인간이 한평생 평탄하게 순리대로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는가?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런 사람은 없을 듯 하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거나 그런 예가 많다면 인간의 발전이란 있었겠는가?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시련과 극복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던가?
두보의 인생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적인 안타까움에 콧등이 시큰해지며, 정해진 각본같은 인간의 운명이란 것에 짜증까지 나려한다. 두보는 시성(詩聖)으로 불리며 시선(詩仙) 李白과 함께 성당시기를 이끈 중국 최고의 시인 중 하나다. 그의 인생과 시풍은 이백과 여러 가지로 대비되며, 특히 그는 생전에 시명(詩名)이 있긴 했지만 이백처럼 크게 이름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천재적인 시의 완성도에 비해 그의 인생은 ‘어쩜 저렇게 지지리도 가난할까?’라고 짜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아가 그에게 있어 한가한 낚시, 운치있는 낚시는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른다.
두보(712년∼770년)는 자가 자미(子美), 호북(湖北) 양양(襄陽)사람이다. 그의 조부는 초당 시인 두심언(杜審言)이었고, 그의 부친은 두한(杜閑)으로 낮은 벼슬을 했다지만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고, 두보 때는 대단히 가난했다.
두보는 어릴 때 병이 많았지만 학문을 좋아하였고,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4∼15세에 이미 당시 문사들과 시로써 주고받았다. 하지만 24세에 장안으로 가서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하여, 이후 근 10여년을 산동,산서,하남 등지를 유랑하며 이백․고적(高適) 등과 시로써 화답하는 시절을 보냈다. 747년 그의 나이 34세 무렵에 장안으로 와서, 몇 번의 시험에서도 모두 낙방하고 실의와 가난 속에서 생활을 하였지만, 현실의 사회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이 40에 현종이 제사대전(祭祀大典)을 거행할 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올려 그에게 대제집현원(待制集賢院)의 벼슬을 내렸지만, 당시 재상인 이임보(李林甫)는 끝내 발령을 내지 않았다. 두보는 더욱 빈곤해졌고, 통치자의 부패와 하층민의 고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병거행(兵車行)>은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장안에서 10여년을 보내는 동안 마침내 군대의 창고를 관리하는 조그마한 벼슬, 즉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府兵曹參軍)이란 벼슬을 받고, 가족을 데리러 봉선현(奉先縣)(지금의 섬서성 포성(蒲城))에 갔는데, “문에 들어서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어린 자식이 이미 굶어서 죽었다네(入門聞號咷, 幼子饑已卒.)”. 이런 기막힌 일을 당한 두보다.
그래서 통치자들의 사치와 부패를 고발한 <경사에서 봉선현으로 가며 느낀 시 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는데, 사실 그의 마음이야 어디 500자에 그치겠는가? 그속에 나오는 구절 “귀족들의 집에는 술과 고기 썩는 냄새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의 뼈가 딩군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는 바로 그들에 대한 원망을 축약한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왜 우리의 <춘향전>에서 어사또가 읊조린 한시, “금 술잔에 좋은 술은 수많은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온 백성 기름이라.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아진다.(金樽美酒 千人血, 玉搬佳酵 萬成膏.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가 오버랩되고, 백거이의 <경구(輕裘)>, “술독과 병은 술로 넘치고,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올해 강남은 크게 가물어, 구주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데.(樽罍溢九酝, 水陸羅八珍.…是歲江南旱, 衢州人食人.)”가 생각나는 걸까?
참 복도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벼슬이라고 할 수 없는 하급직 하나 겨우 얻어, 가족을 데리러 奉先에 간 동안,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고 만다. 그의 나이 44세(755년 11월) 때다. 그래서 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 반란군에게 잡혀(756년), 다시 장안으로 보내진다.
이듬해 그의 나이 46세 때 숙종이 봉상(鳳翔)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숙종을 배알하고, 좌습유(左拾遺)란 관직을 하사받는다. 이 짧은 2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그가 경험한 역경의 깊이만큼 불후의 작품, <애왕송(哀王孫)>,<비진도(悲陳陶)>,<비청판(悲靑坂)>,<춘망(春望)>,<애강두(哀江頭)>,<희달행재소(喜達行在所)3수>,<술회(述懷)> 등이 나왔다. 장안도 수복되어 안정되어 갈 무렵, 방관(房琯)을 구원하는 글을 올려,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폄적을 당하여, 장안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삼리삼별(三吏三別)은 華州에서 하남(河南)으로 가는 도중에 전쟁과 세금으로 인해 백성이 받는 고통을 읊은 시다.
759년 장안일대에 대기황이 들어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고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동곡(同谷) 일대의 황간벽지에서 머물며, 겨우 초근목피로 생활하다가, 결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성도(成都)로 들어갔다. 친구의 도움으로 완화계(浣花溪) 옆에 초당을 짓고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잠깐 그해 가을 태풍에 초당이 무너졌고, 762년에는 성도 소윤(少尹) 서지도(徐知道)가 난을 일으켜 두보는 어쩔 수 없이 배를 하나 사서, 선상생활을 하게 된다. 마침 친구 엄무(嚴武)가 검남(劍南)의 절도사가 되어 사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를 절도참모검교공부원외랑(節度參謀檢校工部員外郞: 이 때문에 후세에 그를 ‘두공부(杜工部)’라 부름)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54세 되던 해, 엄무가 병으로 죽자 사천에서 의지할 곳이 없던 두보는 가족들을 배에 싣고 기주(夔州: 지금의 사천성 봉절현(奉節縣))에 이르렀다. 이곳에 기거한 약 2년간 두보는 회고시를 많이 썼는데, <秋興8수>는 이 시기에 쓴 작품이다.
두보는 768년 기주를 떠나 다시 강릉(江陵), 공안(公安), 악주(岳州: 즉 岳陽), 형주(衡州: 즉 衡陽) 등지를 배로 떠돌다가, 770년 나이 59세에 상수(湘水)의 뢰양(耒陽)에 이르러 건강이 나빠져 죽고 만다. 그의 죽음에 있어서도, 너무 굶주린 끝에 친구가 보낸 돼지고기 등에 급채해서 죽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굶주림은 곧 두보의 인생을 대신 설명해주는 단어로 인식될 정도다.
이러한 굶주림의 인생에 있어, 낚시란 그저 유한지식인의 사치에 불과한 것이리라. 너무 허기져서 낚는 고기마다 밥으로 보이는데, 낚시의 매력인 찌올림의 매력이나 당기는 손맛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두보의 시 속에는 물고기에 관한 언급이 많다. 그러나 불쌍한 그의 인생처럼 두보에게 물고기는 낭만적인 낚시의 매력을 발산하는 그런 사물이 아닌 물위나 개울에서 대하게 되는 자연의 일부분이거나 아니면 식탁위에 오를 반찬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의 사천성 요리 중 ‘오류어(五柳魚)’는 두보가 만든 생선요리라고 전해지고 있을 정도니, 그의 비참하고 성실한 삶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낚시에 관련된 그의 시를 보자.
<江村>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물이 마을을 안고 흐르고,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의 강촌은 일마다 운치가 그윽하다.
自去自來梁上燕(자거자래양상연), 저절로 갔다 저절로 오는 것은 집위에 깃든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서로 친하게 가깝게 노는 것은 물 가운데의 갈매기다.
老妻畵紙爲棋局(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이는 바늘을 두드려 낚시바늘을 만드네.
多病所須唯藥物(다병수수유약물), 병약한 이몸에 필요한 것은 오직 약뿐이니,
微軀此處復何求(미구차처복하구). 미천한 이몸 이것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할까?
두보의 낚시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시다. 늙은 아내는 먹을 것을 보채는 아이들을 달랠 심산으로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굶주림에 지친 어린아이는 옷보다도 우선 입에 넣을 것이 필요했으니, 이것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어디 낚시로 세월을 낚는 그런 마음이 있겠는가?
지금의 현대사회에서는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풍경인가? 예전 육이오전쟁이 끝나고 피죽, 콩나물밥, 무밥 등을 먹었다던 굶주림의 상징들도 두보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두보의 눈에도 낚시하는 풍경은 한가롭고 여유로왔던 모양이다.
그의 <渡江>에 보면, “물가의 꽃은 하얀 솜을 펼치고, 물가의 풀은 푸른 도포를 어지럽히네. 낚시하는 사람에게 장난스레 물으니, 여유롭게 상대편을 바라보네.(渚花張素錦, 汀草亂靑袍. 戱問垂綸者, 悠悠見汝曹.)”라고 한 것을 보면, 두보의 심성이 참 곱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낚시하는 인간(?)들을 보라. 속에서 천불이 일어날 듯도 하지만, 두보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 낚시꾼들도 잠시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홍수가 난 지역에서 골프를 친 일로 한참 시끄럽더니 결국 옷을 벗는 일이 있었다. 우리 낚시꾼들도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발생하는데, 새물 들어온다고 턱하니 그곳에 낚싯대를 펼친다고 생각해보라. 그곳 이재민에게 낚싯대가 부러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일이다. 아무리 내것 네것 챙기고,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초상집 앞에서 노래 틀고 춤춘다고 생각해보라.
적어도 인간이라면 남의 아픔도 고려할 줄도 알아야 인간답다고 하지 않겠는가? 맨날 낚싯대 들고 도닦는 생활을 한들 뭐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있어야지. 자연의 닮아 참된 인성을 되찾지 못할 바에야 뭐 하러 낚시하러 가는가? 차라리 시장에 가서 물고기를 사서 요리해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텐데...
<秋興>8수 중 7首에서도 낚시꾼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어쩐지 가을을 맞이하여 가을의 풍성함이나 흥겨움이 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스러져가는 가을의 풍경과 스산한 정서가 느껴진다. 그 스산한 땅에 혼자 버려져있는 이가 바로 시인 두보인 것이다.
昆明池水漢時功(곤명지수한시공), 곤명호수는 漢代의 공적을 말해주고,
武帝旌旗在眼中(무제정기재안중). 한 무제의 깃발이 눈속에 들어오네.
織女機絲虛夜月(직녀기사허야월), 베짜는 여인의 베틀소리 달밤에 공허하게 들리고,
石鯨鱗甲動秋風(석경린갑동추풍). 돌고래 비늘은 가을바람에 움직인다.
波漂菰米沈雲黑(파표고미침운흑), 물결에 뜬 줄풀밥이 검은 구름 속에 잠기고,
露冷蓮房墮粉紅(로냉련방타분홍). 이슬에 찬 연밥은 분홍가루 떨어지는 붉은 꽃속에 진다.
關塞極天惟鳥道(관색극천유조도), 관문의 높은 하늘은 새만이 날아가는 길 뿐,
江湖滿地一漁翁(강호만지일어옹). 강호의 온 땅에는 낚시하는 늙은이 하나.
변경의 험악한 산악지대는 새가 아니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험준하고, 너른 강호엔 낚시인이 한가로이 낚시하고 있는 가을 풍경은 그야말로 속때가 없이 모든 근심을 잊고 세월을 낚는 풍경이다. 한폭의 그림같은 가을 경치에, 필자는 유독 그 낚시인이 왜 그렇게 불쌍하게만 보이나?
두보는 성도 생활 이후로 배를 사서 유랑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구절이 많다. 그런데 그전 754년 장안에 있을 때 지은, ‘물고기가 뻐금거려 작은 물결이 일 때 기녀의 부채 움직이고, 제비는 떨어지는 꽃잎을 나꿔채더니 춤추는 잔치자리에 떨어뜨리고(魚吹細浪搖歌扇, 燕蹴飛花落舞筵)’(<성의 서쪽 미피(渼陂)에서 배를 띄우고(城西陂泛舟)>)가 있는 것으로 보아, 두보는 그전부터 물고기와 제비를 좋아하고 자세히 관찰했던 것 같다.
또 761년에 쓴 ‘가는 비에 물고기 물밖에 머리를 드러내고, 미풍에 제비는 비껴 날고(細雨魚兒出, 微風燕子斜)’(<수함견심(水檻遣心)>)는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구절로, 자연현상과 생물의 활동을 적합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자연시다.
이외에 “야외의 정자는 호수에 가깝고, 쉬고있는 말은 높은 숲 속에 있네. 악어소리에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고, 물고기가 물위로 뛰어오르니 태양은 산을 비추고(野亭逼湖水, 歇馬高林間. 鼉吼風奔浪, 魚跳日映山.)”“책상에 기대어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고, 채찍이 되돌아오니 새는 급히 집으로 들어가네(凭几看魚樂, 回鞭急鳥栖.)”“벼락이 치니 천막 속의 제비가 놀래고, 소낙비는 강속의 고기에게로 쏟아지고(震雷翻幕燕, 驟雨落河魚.)”․“숲속이 더우니 새는 입을 벌리고, 강물이 후덥지끈하니 물고기는 물밖으로 고개를 내밀고(林熱鳥開口, 江渾魚掉頭)” 등등이 있다. 물고기 외에도 두보의 시구를 자세히 보았으면 눈치를 챘겠지만 두보는 제비도 좋아하여 그의 싯구 속에 76차례나 언급하고 있다.
두보는 물고기 먹은 것도 좋아하여, “집집마다 거위를 키워, 끼니마다 황어를 먹네(家家養烏鬼, 頓頓食黃魚)”라고 하여, 기주(夔州)지방 사람들은 끼니 때마다 물고기를 먹는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음식에 대해서도 관찰력이 대단하여, 그가 손님을 초대한 시로 <객지(客至)>,<엄공왕가초당, 겸휴주찬, 득한자(嚴公枉駕草堂, 兼携酒饌, 得寒字)>가 있고, 초대받아 손님으로 가서 접대를 받은 것을 기록한 시로 <배정광문유하장군산림십수(陪鄭廣文游何將軍山林十首),其二>, <수향강칠소부설회, 희증장가(閿鄕姜七少府設膾, 戱贈長歌)>,<병후과왕의음, 증가(病後過王倚飮, 贈歌)>,<증위팔처사(贈衛八處士)> 등이 있는데, 그속에 생선회,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가 대접받을 때 회를 뜬 묘사가 나오는데, <陪鄭廣文游何將軍山林十首>其二에서, ‘신선한 붕어는 실같이 뜬 회가 하얗고, 향긋한 미나리는 산골물로 끓인 국으로 푸르고(鮮鯽銀絲膾, 香芹碧澗羹.)’라고 하여, 붕어로 회를 뜬 모습이 나온다. 사실 붕어는 살이 딱딱하여 회로도 일품이다. 다만 디스토마가 있어서 먹기가 조금 꺼려지지만, 붕어회에 맛들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예전에 시골 이웃에 살던 어느 분은 붕어를 집안 웅덩이에 잡아놓고 식사 때마다 드시더니 새까맣게 살이 빠져서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는 그 병이 디스토마인지를 몰랐다. 또 한번은 충주호에 낚시를 갔다가 좌대에서 철수할 때, 다른 좌대의 조사들과 함께 배로 나오는데, 그분들 중 한분이 배 위에서 계속 낚시대를 들고 있었다. 마침 5치정도 붕어가 걸렸는데, 그 자리에서 후다닥 비늘벗기고 그냥 초장 찍고 깻잎에 싸서 입에 넣는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만큼 붕어살이 맛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붕어찜을 해먹어보면 그 살의 맛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또 <閿鄕姜七少府設膾, 戱贈長歌>에 보면, 그때는 겨울인데, 강씨란 친구는 얼어붙은 황하에서 고기(어떤 사람은 味魚)를 구해와서, 두보의 이빨과 위가 좋지 않은 것을 고려하여, 밥을 지었고, 주방장이 특별히 회를 쓰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두보가 특별히 흥취를 느꼈다. “주장장이 어민에게서 생선을 받아와, 고기를 씻고 칼을 가니 생선의 눈은 빨갛고, 소리없이 가늘게 쓰니 생선살이 하얀 눈가루처럼 날리고, 뼈도 이미 잘리고 생선 머리는 푸른 파가 얹혔네.(饔人受魚鮫人手, 洗魚磨刀魚眼紅. 無聲細下飛碎雪, 有骨已剁觜春蔥.)”라고 표현하였다.
이때의 회는 아마도 잘게 체로 쓸었던 것 같은데, 그 생선 종류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렇지만 겨울철에 회를 뜬 것을 보니 그 주인은 제법 회를 먹을 줄 알았던 사람인 듯 하다. 이렇게 자세히 표현한 시인의 관찰력에 경탄하지만, 그의 빈곤한 환경으로 인해 더욱 더 생선의 조리법까지 신경쓰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마지막으로 그와 관련된 사천의 ‘우리우위(五柳魚)’라는 요리에 대해 언급할까 한다.
그가 사천의 완화계 가에 살 때다. 그는 너무도 가난하여 매일 채소반찬으로 세월을 보냈기에 그지역에서는 그를 ‘채두노인(菜肚老人)’이라고 불렀다 한다.
어느날 그가 친구 몇 명을 초당으로 초대하여 시를 짓고 읊었는데 매우 흥겨워 점심 때가 된 줄도 몰랐다, 두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데, 눈치를 보니 점심을 먹을 작정인 듯 한데, 집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무엇으로 손님들을 접대할 것인가? 그는 마음이 조급하던 차에 갑자기 식구가 완화계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오지 않은가?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저것으로 손님들을 대접하리라고 생각했다.
두보가 웃으며, “기다려봐! 내가 오늘 여러분께 직접 음식을 대접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생선의 배를 갈라 씻은 뒤에, 조미료를 뿌리고 솥에 쪘다. 다 찐 뒤에 또 그 지역의 달콤한 간장을 넣고 볶고, 사천의 매운 고추,대파,생강과 국간장, 그리고 전분가루 약간 등을 섞어서 장을 만든 뒤에, 뜨거울 때 고기 위에 얹고, 쌍차이(香菜)를 걷어내면 완성되었다.
친구들은 방안에 앉아 두보가 생선을 내오자, 젓가락으로 맛을 보니 정말 맛이 있었다. 친구들이 말을 하며 생선을 먹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물고기를 다 먹어버렸지만 그 생선의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 생선의 이름을 의논했는데. 어떤 이는 ‘이 생선은 후완화위(浣花魚)로 부르자!’고 하였고, 어떤 이는 ‘라오뚜위(老杜魚)로 부르는게 적당해!’라고 하였다.
마지막에 두보가 “도연명(陶淵明)은 우리들이 존경하는 선현(先賢)인데, 이 생선은 등과 배에 다양한 색깔의 선이 있어 마치 버들잎 같으니 ‘우리우위(五柳魚)’라고 부릅시다!”라고 하였다. 모두들 찬성하며 그 이름이 매우 재밌다고 여겼다. 오류어는 이렇게해서 불려지게 되었고, 사천의 유명한 요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천재적인 시의 완성도에 비해 그의 인생은 ‘어쩜 저렇게 지지리도 가난할까?’라고 짜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아가 그에게 있어 한가한 낚시, 운치있는 낚시는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른다.
두보(712년∼770년)는 자가 자미(子美), 호북(湖北) 양양(襄陽)사람이다. 그의 조부는 초당 시인 두심언(杜審言)이었고, 그의 부친은 두한(杜閑)으로 낮은 벼슬을 했다지만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고, 두보 때는 대단히 가난했다.
두보는 어릴 때 병이 많았지만 학문을 좋아하였고,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4∼15세에 이미 당시 문사들과 시로써 주고받았다. 하지만 24세에 장안으로 가서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하여, 이후 근 10여년을 산동,산서,하남 등지를 유랑하며 이백․고적(高適) 등과 시로써 화답하는 시절을 보냈다. 747년 그의 나이 34세 무렵에 장안으로 와서, 몇 번의 시험에서도 모두 낙방하고 실의와 가난 속에서 생활을 하였지만, 현실의 사회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이 40에 현종이 제사대전(祭祀大典)을 거행할 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올려 그에게 대제집현원(待制集賢院)의 벼슬을 내렸지만, 당시 재상인 이임보(李林甫)는 끝내 발령을 내지 않았다. 두보는 더욱 빈곤해졌고, 통치자의 부패와 하층민의 고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병거행(兵車行)>은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장안에서 10여년을 보내는 동안 마침내 군대의 창고를 관리하는 조그마한 벼슬, 즉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府兵曹參軍)이란 벼슬을 받고, 가족을 데리러 봉선현(奉先縣)(지금의 섬서성 포성(蒲城))에 갔는데, “문에 들어서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어린 자식이 이미 굶어서 죽었다네(入門聞號咷, 幼子饑已卒.)”. 이런 기막힌 일을 당한 두보다.
그래서 통치자들의 사치와 부패를 고발한 <경사에서 봉선현으로 가며 느낀 시 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는데, 사실 그의 마음이야 어디 500자에 그치겠는가? 그속에 나오는 구절 “귀족들의 집에는 술과 고기 썩는 냄새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의 뼈가 딩군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는 바로 그들에 대한 원망을 축약한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왜 우리의 <춘향전>에서 어사또가 읊조린 한시, “금 술잔에 좋은 술은 수많은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온 백성 기름이라.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아진다.(金樽美酒 千人血, 玉搬佳酵 萬成膏.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가 오버랩되고, 백거이의 <경구(輕裘)>, “술독과 병은 술로 넘치고,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올해 강남은 크게 가물어, 구주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데.(樽罍溢九酝, 水陸羅八珍.…是歲江南旱, 衢州人食人.)”가 생각나는 걸까?
참 복도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벼슬이라고 할 수 없는 하급직 하나 겨우 얻어, 가족을 데리러 奉先에 간 동안,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고 만다. 그의 나이 44세(755년 11월) 때다. 그래서 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 반란군에게 잡혀(756년), 다시 장안으로 보내진다.
이듬해 그의 나이 46세 때 숙종이 봉상(鳳翔)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숙종을 배알하고, 좌습유(左拾遺)란 관직을 하사받는다. 이 짧은 2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그가 경험한 역경의 깊이만큼 불후의 작품, <애왕송(哀王孫)>,<비진도(悲陳陶)>,<비청판(悲靑坂)>,<춘망(春望)>,<애강두(哀江頭)>,<희달행재소(喜達行在所)3수>,<술회(述懷)> 등이 나왔다. 장안도 수복되어 안정되어 갈 무렵, 방관(房琯)을 구원하는 글을 올려,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폄적을 당하여, 장안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삼리삼별(三吏三別)은 華州에서 하남(河南)으로 가는 도중에 전쟁과 세금으로 인해 백성이 받는 고통을 읊은 시다.
759년 장안일대에 대기황이 들어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고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동곡(同谷) 일대의 황간벽지에서 머물며, 겨우 초근목피로 생활하다가, 결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성도(成都)로 들어갔다. 친구의 도움으로 완화계(浣花溪) 옆에 초당을 짓고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잠깐 그해 가을 태풍에 초당이 무너졌고, 762년에는 성도 소윤(少尹) 서지도(徐知道)가 난을 일으켜 두보는 어쩔 수 없이 배를 하나 사서, 선상생활을 하게 된다. 마침 친구 엄무(嚴武)가 검남(劍南)의 절도사가 되어 사천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를 절도참모검교공부원외랑(節度參謀檢校工部員外郞: 이 때문에 후세에 그를 ‘두공부(杜工部)’라 부름)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54세 되던 해, 엄무가 병으로 죽자 사천에서 의지할 곳이 없던 두보는 가족들을 배에 싣고 기주(夔州: 지금의 사천성 봉절현(奉節縣))에 이르렀다. 이곳에 기거한 약 2년간 두보는 회고시를 많이 썼는데, <秋興8수>는 이 시기에 쓴 작품이다.
두보는 768년 기주를 떠나 다시 강릉(江陵), 공안(公安), 악주(岳州: 즉 岳陽), 형주(衡州: 즉 衡陽) 등지를 배로 떠돌다가, 770년 나이 59세에 상수(湘水)의 뢰양(耒陽)에 이르러 건강이 나빠져 죽고 만다. 그의 죽음에 있어서도, 너무 굶주린 끝에 친구가 보낸 돼지고기 등에 급채해서 죽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굶주림은 곧 두보의 인생을 대신 설명해주는 단어로 인식될 정도다.
이러한 굶주림의 인생에 있어, 낚시란 그저 유한지식인의 사치에 불과한 것이리라. 너무 허기져서 낚는 고기마다 밥으로 보이는데, 낚시의 매력인 찌올림의 매력이나 당기는 손맛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두보의 시 속에는 물고기에 관한 언급이 많다. 그러나 불쌍한 그의 인생처럼 두보에게 물고기는 낭만적인 낚시의 매력을 발산하는 그런 사물이 아닌 물위나 개울에서 대하게 되는 자연의 일부분이거나 아니면 식탁위에 오를 반찬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의 사천성 요리 중 ‘오류어(五柳魚)’는 두보가 만든 생선요리라고 전해지고 있을 정도니, 그의 비참하고 성실한 삶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낚시에 관련된 그의 시를 보자.
<江村>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물이 마을을 안고 흐르고,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의 강촌은 일마다 운치가 그윽하다.
自去自來梁上燕(자거자래양상연), 저절로 갔다 저절로 오는 것은 집위에 깃든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서로 친하게 가깝게 노는 것은 물 가운데의 갈매기다.
老妻畵紙爲棋局(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이는 바늘을 두드려 낚시바늘을 만드네.
多病所須唯藥物(다병수수유약물), 병약한 이몸에 필요한 것은 오직 약뿐이니,
微軀此處復何求(미구차처복하구). 미천한 이몸 이것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할까?
두보의 낚시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시다. 늙은 아내는 먹을 것을 보채는 아이들을 달랠 심산으로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굶주림에 지친 어린아이는 옷보다도 우선 입에 넣을 것이 필요했으니, 이것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어디 낚시로 세월을 낚는 그런 마음이 있겠는가?
지금의 현대사회에서는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풍경인가? 예전 육이오전쟁이 끝나고 피죽, 콩나물밥, 무밥 등을 먹었다던 굶주림의 상징들도 두보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두보의 눈에도 낚시하는 풍경은 한가롭고 여유로왔던 모양이다.
그의 <渡江>에 보면, “물가의 꽃은 하얀 솜을 펼치고, 물가의 풀은 푸른 도포를 어지럽히네. 낚시하는 사람에게 장난스레 물으니, 여유롭게 상대편을 바라보네.(渚花張素錦, 汀草亂靑袍. 戱問垂綸者, 悠悠見汝曹.)”라고 한 것을 보면, 두보의 심성이 참 곱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낚시하는 인간(?)들을 보라. 속에서 천불이 일어날 듯도 하지만, 두보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 낚시꾼들도 잠시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홍수가 난 지역에서 골프를 친 일로 한참 시끄럽더니 결국 옷을 벗는 일이 있었다. 우리 낚시꾼들도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발생하는데, 새물 들어온다고 턱하니 그곳에 낚싯대를 펼친다고 생각해보라. 그곳 이재민에게 낚싯대가 부러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일이다. 아무리 내것 네것 챙기고,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초상집 앞에서 노래 틀고 춤춘다고 생각해보라.
적어도 인간이라면 남의 아픔도 고려할 줄도 알아야 인간답다고 하지 않겠는가? 맨날 낚싯대 들고 도닦는 생활을 한들 뭐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있어야지. 자연의 닮아 참된 인성을 되찾지 못할 바에야 뭐 하러 낚시하러 가는가? 차라리 시장에 가서 물고기를 사서 요리해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텐데...
<秋興>8수 중 7首에서도 낚시꾼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어쩐지 가을을 맞이하여 가을의 풍성함이나 흥겨움이 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스러져가는 가을의 풍경과 스산한 정서가 느껴진다. 그 스산한 땅에 혼자 버려져있는 이가 바로 시인 두보인 것이다.
昆明池水漢時功(곤명지수한시공), 곤명호수는 漢代의 공적을 말해주고,
武帝旌旗在眼中(무제정기재안중). 한 무제의 깃발이 눈속에 들어오네.
織女機絲虛夜月(직녀기사허야월), 베짜는 여인의 베틀소리 달밤에 공허하게 들리고,
石鯨鱗甲動秋風(석경린갑동추풍). 돌고래 비늘은 가을바람에 움직인다.
波漂菰米沈雲黑(파표고미침운흑), 물결에 뜬 줄풀밥이 검은 구름 속에 잠기고,
露冷蓮房墮粉紅(로냉련방타분홍). 이슬에 찬 연밥은 분홍가루 떨어지는 붉은 꽃속에 진다.
關塞極天惟鳥道(관색극천유조도), 관문의 높은 하늘은 새만이 날아가는 길 뿐,
江湖滿地一漁翁(강호만지일어옹). 강호의 온 땅에는 낚시하는 늙은이 하나.
변경의 험악한 산악지대는 새가 아니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험준하고, 너른 강호엔 낚시인이 한가로이 낚시하고 있는 가을 풍경은 그야말로 속때가 없이 모든 근심을 잊고 세월을 낚는 풍경이다. 한폭의 그림같은 가을 경치에, 필자는 유독 그 낚시인이 왜 그렇게 불쌍하게만 보이나?
두보는 성도 생활 이후로 배를 사서 유랑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구절이 많다. 그런데 그전 754년 장안에 있을 때 지은, ‘물고기가 뻐금거려 작은 물결이 일 때 기녀의 부채 움직이고, 제비는 떨어지는 꽃잎을 나꿔채더니 춤추는 잔치자리에 떨어뜨리고(魚吹細浪搖歌扇, 燕蹴飛花落舞筵)’(<성의 서쪽 미피(渼陂)에서 배를 띄우고(城西陂泛舟)>)가 있는 것으로 보아, 두보는 그전부터 물고기와 제비를 좋아하고 자세히 관찰했던 것 같다.
또 761년에 쓴 ‘가는 비에 물고기 물밖에 머리를 드러내고, 미풍에 제비는 비껴 날고(細雨魚兒出, 微風燕子斜)’(<수함견심(水檻遣心)>)는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구절로, 자연현상과 생물의 활동을 적합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자연시다.
이외에 “야외의 정자는 호수에 가깝고, 쉬고있는 말은 높은 숲 속에 있네. 악어소리에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고, 물고기가 물위로 뛰어오르니 태양은 산을 비추고(野亭逼湖水, 歇馬高林間. 鼉吼風奔浪, 魚跳日映山.)”“책상에 기대어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고, 채찍이 되돌아오니 새는 급히 집으로 들어가네(凭几看魚樂, 回鞭急鳥栖.)”“벼락이 치니 천막 속의 제비가 놀래고, 소낙비는 강속의 고기에게로 쏟아지고(震雷翻幕燕, 驟雨落河魚.)”․“숲속이 더우니 새는 입을 벌리고, 강물이 후덥지끈하니 물고기는 물밖으로 고개를 내밀고(林熱鳥開口, 江渾魚掉頭)” 등등이 있다. 물고기 외에도 두보의 시구를 자세히 보았으면 눈치를 챘겠지만 두보는 제비도 좋아하여 그의 싯구 속에 76차례나 언급하고 있다.
두보는 물고기 먹은 것도 좋아하여, “집집마다 거위를 키워, 끼니마다 황어를 먹네(家家養烏鬼, 頓頓食黃魚)”라고 하여, 기주(夔州)지방 사람들은 끼니 때마다 물고기를 먹는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음식에 대해서도 관찰력이 대단하여, 그가 손님을 초대한 시로 <객지(客至)>,<엄공왕가초당, 겸휴주찬, 득한자(嚴公枉駕草堂, 兼携酒饌, 得寒字)>가 있고, 초대받아 손님으로 가서 접대를 받은 것을 기록한 시로 <배정광문유하장군산림십수(陪鄭廣文游何將軍山林十首),其二>, <수향강칠소부설회, 희증장가(閿鄕姜七少府設膾, 戱贈長歌)>,<병후과왕의음, 증가(病後過王倚飮, 贈歌)>,<증위팔처사(贈衛八處士)> 등이 있는데, 그속에 생선회,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가 대접받을 때 회를 뜬 묘사가 나오는데, <陪鄭廣文游何將軍山林十首>其二에서, ‘신선한 붕어는 실같이 뜬 회가 하얗고, 향긋한 미나리는 산골물로 끓인 국으로 푸르고(鮮鯽銀絲膾, 香芹碧澗羹.)’라고 하여, 붕어로 회를 뜬 모습이 나온다. 사실 붕어는 살이 딱딱하여 회로도 일품이다. 다만 디스토마가 있어서 먹기가 조금 꺼려지지만, 붕어회에 맛들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예전에 시골 이웃에 살던 어느 분은 붕어를 집안 웅덩이에 잡아놓고 식사 때마다 드시더니 새까맣게 살이 빠져서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는 그 병이 디스토마인지를 몰랐다. 또 한번은 충주호에 낚시를 갔다가 좌대에서 철수할 때, 다른 좌대의 조사들과 함께 배로 나오는데, 그분들 중 한분이 배 위에서 계속 낚시대를 들고 있었다. 마침 5치정도 붕어가 걸렸는데, 그 자리에서 후다닥 비늘벗기고 그냥 초장 찍고 깻잎에 싸서 입에 넣는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만큼 붕어살이 맛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붕어찜을 해먹어보면 그 살의 맛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또 <閿鄕姜七少府設膾, 戱贈長歌>에 보면, 그때는 겨울인데, 강씨란 친구는 얼어붙은 황하에서 고기(어떤 사람은 味魚)를 구해와서, 두보의 이빨과 위가 좋지 않은 것을 고려하여, 밥을 지었고, 주방장이 특별히 회를 쓰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두보가 특별히 흥취를 느꼈다. “주장장이 어민에게서 생선을 받아와, 고기를 씻고 칼을 가니 생선의 눈은 빨갛고, 소리없이 가늘게 쓰니 생선살이 하얀 눈가루처럼 날리고, 뼈도 이미 잘리고 생선 머리는 푸른 파가 얹혔네.(饔人受魚鮫人手, 洗魚磨刀魚眼紅. 無聲細下飛碎雪, 有骨已剁觜春蔥.)”라고 표현하였다.
이때의 회는 아마도 잘게 체로 쓸었던 것 같은데, 그 생선 종류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렇지만 겨울철에 회를 뜬 것을 보니 그 주인은 제법 회를 먹을 줄 알았던 사람인 듯 하다. 이렇게 자세히 표현한 시인의 관찰력에 경탄하지만, 그의 빈곤한 환경으로 인해 더욱 더 생선의 조리법까지 신경쓰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마지막으로 그와 관련된 사천의 ‘우리우위(五柳魚)’라는 요리에 대해 언급할까 한다.
그가 사천의 완화계 가에 살 때다. 그는 너무도 가난하여 매일 채소반찬으로 세월을 보냈기에 그지역에서는 그를 ‘채두노인(菜肚老人)’이라고 불렀다 한다.
어느날 그가 친구 몇 명을 초당으로 초대하여 시를 짓고 읊었는데 매우 흥겨워 점심 때가 된 줄도 몰랐다, 두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데, 눈치를 보니 점심을 먹을 작정인 듯 한데, 집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무엇으로 손님들을 접대할 것인가? 그는 마음이 조급하던 차에 갑자기 식구가 완화계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오지 않은가?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저것으로 손님들을 대접하리라고 생각했다.
두보가 웃으며, “기다려봐! 내가 오늘 여러분께 직접 음식을 대접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생선의 배를 갈라 씻은 뒤에, 조미료를 뿌리고 솥에 쪘다. 다 찐 뒤에 또 그 지역의 달콤한 간장을 넣고 볶고, 사천의 매운 고추,대파,생강과 국간장, 그리고 전분가루 약간 등을 섞어서 장을 만든 뒤에, 뜨거울 때 고기 위에 얹고, 쌍차이(香菜)를 걷어내면 완성되었다.
친구들은 방안에 앉아 두보가 생선을 내오자, 젓가락으로 맛을 보니 정말 맛이 있었다. 친구들이 말을 하며 생선을 먹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물고기를 다 먹어버렸지만 그 생선의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 생선의 이름을 의논했는데. 어떤 이는 ‘이 생선은 후완화위(浣花魚)로 부르자!’고 하였고, 어떤 이는 ‘라오뚜위(老杜魚)로 부르는게 적당해!’라고 하였다.
마지막에 두보가 “도연명(陶淵明)은 우리들이 존경하는 선현(先賢)인데, 이 생선은 등과 배에 다양한 색깔의 선이 있어 마치 버들잎 같으니 ‘우리우위(五柳魚)’라고 부릅시다!”라고 하였다. 모두들 찬성하며 그 이름이 매우 재밌다고 여겼다. 오류어는 이렇게해서 불려지게 되었고, 사천의 유명한 요리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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