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여류혁명가 김명시
광막한 만주벌판 말달리던 ‘여장군’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투쟁하신 이야기를 좀 들을까요.”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뿐입니다.”
이런 겸사의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민주과업이 착란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 있는 오늘의 남조선을 통분히 여겨 마지 않는 여사로서는 앞만을 바라보는 타는 듯한 정열이 오히려 지난 일을 이렇게 과소평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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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26일자 <동아일보>에 난 김명시(맨 왼쪽 위) 관련 기사. |
‘콤뮤니스트’ 등 비밀 기관지 발행
“1925년에 공산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7년도에 파견되어 상해로 와 보니 장개석씨의 쿠데타가 벌어져서 거리마다 공산주의자의 시체가 누웠더군요. 거기서 대만 중국 일본 비율빈 몽고 안남 인도 등 각국 사람들이 모여서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하고 또 그 이면에서는 중공한인특별지부 일도 보게 되었습니다. 28년에 무정장군을 강서로 떠나보내고 그 다음 해 홍남표(洪南杓)씨와 만주에 들어가서 반일제동맹을 조직했습니다. 그때 마침 동만폭동이 일어나서 우리는 하르빈 일본영사관을 치러 갔습니다. 그 다음 걸어서 흑룡강을 넘어 제제(齊齊) 하르빈을 거쳐 천진 상해로 가던 때의 고생이란 생각하면 지긋지긋합니다. 상해에 가니까 김단야(金丹冶), 박헌영(朴憲永) 제씨가 와 계시더군요. 그 다음 나는 인천으로 와서 동무들과 <콤뮤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 기관지를 발행하다가 메이데이날 동지들이 체포당하는 판에 도보로 신의주까지 도망을 갔었는데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체포되어 7년 징역을 살았습니다.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두 살까지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
그 다음 연안 독립동맹에 들어가서 천진·북경 등 적지구에서 싸우던 눈물겨운 이야기, 그 중에도 임신 중에 체포되어 매를 맞아서 유산하던 이야기, 밤에 수심도 넓이도 모르는 강물을 허덕이며 건너가던 이야기 등은 소설이기엔 너무도 심각하다. 싸움이란 혁명에 앞장서 싸우는 것이란 진실로 저렇게 비참하고도 신명나는 일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일어나서 나왔다.
<독립신보> 1946년 11월 21일치에 실려 있는 인터뷰 기사이다. ‘여류혁명가를 찾아서’라는 제목 아래 7명이 소개되었는데- 유영준(劉英俊), 정칠성(丁七星), 박진홍(朴鎭洪), 유금봉(劉金鳳), 허하백(許河伯), 조원숙(趙元淑) 다음으로 나온다. ‘21년간 투쟁생활, 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라는 제목 밑에 실린 김명시(金命時)가 끝이다. 잇달아서 소개할 여류혁명가가 동이 났는지 실어야 할 다른 소식들이 너무 많아서 그랬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쉬운 노릇이다. 8·15 뒤 나온 일간지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두 2면 1장짜리 타블로이드판이었다.
이름을 적지 않은 기자는 김명시를 넣은 7명 ‘여류혁명가’들을 자본주의 용어인 ‘여사(女史)’라고 불렀지만, 김명시는 ‘장군’이었다. 광막한 만주벌판을 호마 타고 달리던 여장군 김명시.
“굉장했지. 종로통이 온통 사람들로 백차일을 쳤으니까.”
늙은 스님은 말하였다.
“무정이 장군과 그 부관인 김명시 장군이 뒷다리 쭉 빠지고 훨씬 키 높은 호마 타고 종로통 거리를 지나가는데 모두들 손바닥이 터지라고 손뼉을 쳤어요. 그러면서 목이 터지라고 외쳤지. 무정 장군 만세! 김명시 장군 만세!”
<해방일보> 1945년 12월 21일치를 보자. ‘호접(蝴蝶)을 상연, 극단 전선(全線)서 2회로’라는 제목이다.
“극단 ‘전선’에서는 신정 서울소극장에서 제2회 공연으로 중국 연안에서 망명활동 중이던 작가 김사량(金史良)씨 귀국 제1회작 <호접>(전3막)을 상연할 예정으로 준비 중이다. 이 작품은 1941년 12월 중국 제8로군이 화북(華北) 석가장(石家莊) 부근에 출동한 우리 조선의용군의 무장선전대원 29용사가 애통히도 선혈로써 장절한 전투기록이라고 하며 투쟁적인 테마와 다채한 필치는 상당히 기대되는 바가 있다.”
연극을 보고 나온 무정과 김명시가 몇 사람 조선의용군 싸울아비들 호위를 받으며 종로거리를 행군하였다는 것이다.
무정 장군과 함께 종로거리 행군
‘마지막 빨치산’으로 1963년 체포돼 비전향 장기수로 살다 2006년 숨진 정순덕. |
“조선의용군 김명시 여장군 만세!”
위장입산하여 숨죽이던 60년대 끝 무렵 산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남조선노동당 당원으로 6·25 전 입산한 ‘구빨치’였던 그 늙은 스님은 아련한 눈길로 싸락눈 흩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것이었다. 왼쪽 손이 반쪽밖에 없는 그 늙은 구빨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때는 무정이 장군을 젤루 쳤지. 기밀셍이 장군보다 더 높이 봤어요. 그리고 그 보좌관으로 할빈에 있던 왜놈 영사관 까부순 김명시 장군이 굉장했지. 미제를 구축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박멸시켜 평등조선 자유조선 해방조선 통일조선이 되면 인민무력상 한 자리는 할 인물로 쳤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셨나요?”
“응. 뭐가?”
“김명시 장군 말씀예요?”
“으응. 1946년도 말에 여맹 선전부장을 한 것까지는 아는데, 그 다음은 몰라. 리승만이 김성수 앞잡이들한테 개밥 되었거나 북선으루 넘어갔겠지 뭐.”
그렇다. 문득 사라져버리었다. 어디에도 김명시 장군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해방되던 해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일을 보다가 같은 달 조선국군준비대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축사를 하였고, 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고, 4월 민전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뽑혔으며, 12월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이 된 것까지만 알려져 있다. 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360명 가운데도 없다. 김명시쯤 되는 항일투쟁 경력이라면 남에서든 북에서든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했을 터인데, 이름이 없다. 몰록 사라져버린 것이다.
김명시는 190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24년 서울 배화고등여학교를 중퇴하였고, 25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고공청)에 들어가 마산 제1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10월 고공청에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뽑혀 27년 6월 졸업하였다. 같은 해 8월부터 상해와 북만주에서 김단야 조직선으로 활약하다가 32년 3월 귀국하였다. 오라버니 김형선(金炯善)과 함께 경인지역에서 <코뮤니스트>와 <태평양노조>를 ‘가리방 긁어’ 뿌리다가 왜경 지명수배를 피해 만주로 가려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혔다. 7년 징역을 산 다음 태항산(太行山)으로 가서 8·15까지 무장투쟁을 벌였다.
김명시는 ‘본급’이었다. 그때에 주의자들이 쓰던 말로 기본계급 출신이라는 말이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간이농업학교에 들어간 오라버니 김형선이 학자금을 못대어 퇴학당했다는 것이 웅변하여 준다. 왜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점원 노릇을 하고 부도노동자 일을 하다가 창고회사 사무원으로 5년간 있던 끝에 마산공산당 결성에 들어간 김형선이니, 21살 때였다. 이런 애옥살이에서 서울로 올라가 배화고녀를 다니다가 모스크바공산대학 유학생으로 뽑혀간 것으로 보면 대단히 뛰어난 재원이었을 것이다.
공산대학, 곧 2년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로 간 김명시는 김단야 조직선으로 맹렬하게 운동한다. 상해와 만주에서 선전부 책임자가 되고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동맹 기관지 <반일전선>을 엮어내다가 귀국한 것도 상해 조선문제 책임자인 김단야 지도에 따른 것이었다. 김단야는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전설적 지도자였다. 오누이가 함께 간 인천에서는 김삼룡(金三龍, 1910~1950)이 부두노동자로 있으며 적색노동조합을 엮어내고 있었다. <주의자의 총알>인 기관지를 ‘가리방 긁어’ 경인지역에 뿌리다가 조여오는 왜경 발자국을 피하여 만주로 가려던 김명시가 붙잡히게 되는 것은 백마강역이라는 곳이었다. 압록강변 신의주 부근 간이역이었다.
김명시를 잡은 것은 평북 경찰부 경부인 말영청헌(末永淸憲)이었다. 조선인 밀정이 물어다 주는 정보에 따라 경성부 훈정동 4번지 박헌영 집에서 잡게 된 것은 김명시가 아니라 고명자(高明子, 1904~?)였다. 김단야·박헌영·임원근은 1921년 3월 상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청년단 창립 트로이카였다. 김단야 부인이 고명자이고, 박헌영 부인이 주세죽(朱世竹, 1898~ 1953)이며, 임원근 부인은 허정숙(許貞淑, 1902~1991)이었는데, 남편들 못지않게 맹렬한 여성 트로이카였다. 주의자들 선망을 한몸에 받는 환상의 ‘3대 커플’이었다.
1946년 12월 이후 기록서 사라져
고명자를 쥐어짠 끝에 얻어낸 정보는 여비 4원을 얻어 떠난 것이 며칠 전이라는 것이었다. 눈에 불을 켠 형사대는 김형선 레포(연락원)인 박은형(朴殷馨) 집 식구들을 족쳐 어떤 마을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마강역 근처 어느 농가였다. 말영청헌 기록이다.
‘막사과(莫斯科) 공산대학 졸업생. 조선공산당에, 중국공산당에 여성투사로써 중진, 상해로부터 잠입한 김명시였다.’
이때부터 김명시는 7년 징역을 살게 되고, 다섯 달 뒤 영등포에서 잡힌 김형선은 8·15까지 12년을 살게 된다. 김형윤(金炯潤)이라고 김형선 아우가 있었다. 언니 못지않은 맹렬주의자로 <소년전기(少年戰旗)> 같은 좌익 잡지를 교재로 농촌 어린이들에게 공산주의 선전을 하고 마산볼셰비키 기관지인 <볼셰비키>를 뿌리며 부산에서 적색노조운동을 하고 조선공산당재건그룹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김명시한테 손위가 되는지 손아래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김형선과 김명시가 세 살 터울인 것을 보면 손아래가 될 확률이 높지만 연년생도 많으니 모를 일이다.
김형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6·25가 터진 해 9월이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가던 중 미군 폭격기가 퍼부어대는 폭탄에 맞았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삼남매가 죄 민족해방투쟁의 제단에 그 영육을 공양드린 집안이다.
김명시는 어디로 갔는가? 북풍한설 몰아치는 광막한 만주벌판을 호마 위에서 장총 들고 달리던 여장군도 오라버니와 함께 있었을까? 그런데 왜 자취가 없는가. 46년 12월부터 50년 9월까지 김명시라는 이름은 어떤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48년 끝 무렵 입산하여 63년 1월 16일 새벽 토벌대와 교전 끝에 다리에 총을 맞고 잡힌 마지막 빨치산이 있었다. ‘지리산 여장군’으로 불리던 정순덕(鄭順德, 1932~2006)이니, 만주벌판 여장군 김명시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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