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해상 장악한 해양국가, 가야국 비밀풀었다
민족사학자 이종기 선생 유고집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출판
얼마 전만 해도 독도를 두고 일본과 날카롭게 대치했었다. 파렴치한 일본 정치인들은 여전히 역사왜곡에 몰두하고, 2차 대전 당시 남의 민족 짓밟았던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들 일본인은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면서 한반도 남쪽지역을 점령하고 다스렸다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본인의 거짓을 꾸짖기만 할 뿐 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들춰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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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종기 선생 지음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책 표지 © 기획출판 책장, 2006 |
이에 일본의 뿌리는 가야에 있음을 증명해내려는 책이 나왔다. 재야사학자이며, 문학가였던 고 이종기 선생의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 (기획출판 책장)> 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민족사학자 이종기 씨의 사후 10주기를 맞이해 그가 남긴 원고를 정리한 유고집이다.
저자는 70년대 중반 한일의 역사학자들이 외면할 때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와 일연의 '삼국유사'를 지도 삼아 자전거로 일본 규슈의 구석구석을 뒤졌다. 또 허황후의 고향인 인도의 아요디아로 건너가 가야국이 어떠한 위치의 나라였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조금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뭔가 홀린 듯 일본을 뒤지고, 인도의 구석 땅을 헤매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나도 홀려 가고 있었던 것이다. 허황후와 가야공주에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허황후가 했다던 "이 몸은 아유타국 공주이옵니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 인도에서 송장 사진을 찍었다가 죽을 뻔했고, 일본에선 시퍼런 낫을 들고 노려보는 농부와 맞닥뜨리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런 일들이 그의 발을 묶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 외가 할머니인 허황후가 자신을 인도해준다고 믿었기에 아무 두려움도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남의 나라 땅 숲 속, 외진 곳 어두컴컴한 동굴에도 서슴없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 어떤 학자도 해내지 못한 일을 그는 홀린 듯 해나갔다. 오로지 가야국의 실체를 밝혀 임나일본부설의 거짓을 파헤치고, 가야국이 해상권을 장악한 해양국가임과 우리 겨레의 핏줄이 고대 일본을 세웠음을 증명하려고 혼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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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유타국 공주(허황후)가 타고온 꽃가마배를 상상해 그린 저자의 그림이다. © 기획출판 책장 제공 |
그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설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실임을 믿었다. 그래서 그 삼국유사와 중국 삼국지의 한자로 된 역사를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 풀어내려고 애썼다. 특히 일본 역사학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한 것들을 들춰낸다.
예를 들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왜인" 편을 보면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徒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 拘邪韓國七千餘里 始渡一海 千餘里至對海國" 이를 일본인들은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데는 해안에서 순(循)하여 수행(水行)하고, 한국을 력(歷)해서 혹은(乍) 남(南)하고, 혹은 동(東)하여 그 북쪽 해안 구야한국에 도착하는 칠천여 리. 이렇게 해서 바다를 넘어 천여 리 대해국에 닿는다"라고 풀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사남사동(乍南乍東)'이란 "잠시 남쪽으로 갔다가 이내 동쪽으로 방향을 꺾는 행로"를 말하기 때문에 만약 서해안을 따라 바닷길로 간다면 남쪽으로는 내려갈 수 있어도 동쪽으로는 꺾을 수 없기에 잘못된 풀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의 해석은 "대방군에서 왜로 가려면 바닷가 물길을 따라가다가 한국 땅을 거치게 되는데, 잠시 남쪽으로 갔다가 잠시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해안인 가라나라에 다다르게 되며, 여기까지가 7천여 리이다. 비로소 한 바다를 건너면 천여 리쯤의 뱃길로 대해국에 이르게 된다"가 되어야 맞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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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위지동이전 '왜인'편에 나온 여왕국 추적 기록, 저자가 일본인의 왜곡된 해석을 지적한다. © 기획출판 책장 제공 |
또 여기서 저자는 또 한 가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큰 바다를 건너기 위해 배를 얻어 탄 구야한국의 땅, 가락국을 표기하면서 '그 북쪽 해안'이라고 한 점이다. 저자는 이와 함께 삼국지 위지동이전 또 다른 구절에서 '변진의 한 갈래인 독로국은 왜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其瀆盧國 與倭接界)'란 내용을 찾았다.
그뿐이 아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실린 가락국의 경계를 보면 "동쪽으로는 황산강으로, 서남쪽은 창해로, 서북쪽은 지리산으로, 동북쪽으로는 가야산으로..."로 이어지다가 어찌된 일인지 남쪽엔 동그라미 두 개만이 덜렁 표시돼 있음을 지적한다.(東以黃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倻山 南而○○爲國尾) 이는 일연이 "밝힐 수 없는 지명이 남쪽에 있었다"라고 소리없는 외침을 하는 것으로 본다.
이로 미루어 저자는 가야국이 바다를 중심으로 한 해양국가이며, 일본 규슈 북부에도 영토가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그것을 표시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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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상 실크로드 동진 추정도 © 기획출판 책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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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마리의 물고기 무늬(쌍어문)가 있는 인도의 라마왕 탄생서원 앞(왼쪽), 수로왕릉 납릉정문의 장식판(오른쪽 위), 일본의 야쓰시로 신사(아래) © 기획출판 책장 제공 |
그런가 하면 그는 김해 수로왕릉 납릉정문의 장식판에 있는 두 마리 물고기 무늬가 인도의 라마왕 탄생서원 앞과 일본의 야쓰시로 신사에도 있음을 발견해낸다. 그것은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 야유타국에서 왔음과 허황후의 딸인 가야공주가 일본에 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일본 규슈 구석구석을 탐사하면서 가야공주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가야공주가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묘견궁(妙見宮)과 여덟 개의 성, 여왕릉으로 추정되는 자우스야마 터, 거북을 탄 여왕상, 여왕유래 돌비석, 갓파의 상륙을 기념하는 쿠마가와 강변의 '갓파도래비', 야쓰시로 북부 조난초에 있는 비밀제련소로 보이는 동굴의 아난도상 등을 그는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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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야쓰시로에 있는 거북을 탄 여왕 히미코(가야공주) © 기획출판 책장 제공 |
글을 마치며 그는 '물동이 릴레이'를 얘기한다. 전쟁의 대공습에 대비한 불끄기 훈련의 하나로 여러 사람이 릴레이 하듯 늘어서 가득 퍼 올린 물동이 물을 주고받던 것이 '물동이 릴레이'이다. 이 얘기를 하는 우리가 모두 겨레문화의 물동이 릴레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이 일도 물동이 릴레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모두 참여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 탐사를, 이 책을 단순히 민족주의 시각으로 윤색하고, 미신으로 몰고 가지 않으려 애쓴 점이 돋보인다. 범선으로 물길을 갔던 시간을 계산해내고, 삼국지, 삼국유사 등에 실린 한문의 해석에도 꼼꼼한 잣대를 들이대며, 일일이 사진을 찍어 대조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책에도 약간의 '옥에 티'는 보인다. 그것은 대중서일텐데도 전문용어와 함께 약간의 어려운 낱말이 난해다는 느낌을 준다. 수도(修道), 탁선(託宣), 원망(遠望), 천강(天降), 조묘(祖墓), 철매(鐵煤) 따위의 낱말이 나오면 독자들의 읽어가던 흐름에 잠시 걸림돌을 만들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굳이 잡아내려는 흠집일 수도 있을 만큼 이 책의 돋보임을 깎아내리지 못한다.
지은이는 세상을 떴고, 그로부터 10년 만에 이 유고는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1976년 일본에서 "히미코 여왕 도래에 얽힌 수수께끼(卑彌呼渡來の謎)"를 낸 저자는 한 달 만에 책을 회수 당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그 책을 회수하는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만한 내용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 책을 잇는 이번 책의 펴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 겨레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손을 잡아야 할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은이가 말하는 우리 역사의 '물동이 릴레이'에 참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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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이 된 저자 이종기 선생과 1976년 일본 후타이 서원에서 출간되자마자 강제 회수당한 책 “히미코 여왕 도래에 얽힌 수수께끼(卑彌呼渡來の謎)”의 표지 © 기획출판 책장 제공 |
원제는 '겨레의 어미강을 찾아서'였다. [대담]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의 펴낸이 이영아 |
- 어떻게 이 책을 펴내게 되었나?
올케로부터 아버지의 유고가 있다는 걸 알고 달라고 했다. 하지만, 보따리에 싸인 원고는 천여 장, 사진 80여 장이 있었고, 일부는 빠지고 섞여 있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원고를 정리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20여 년 "내 손이 내 딸이다"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고, 어떻게든 아버지의 원고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여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 전에 같은 직장에 있던 동료가 와서 "책을 내지 마라. 아니면 아버지의 생각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란 생각을 하지말고, 지은이가 되어서 생각하라."라고 충고해 주었다. 난 깜짝 놀랐다. 정말 내가 독자를 배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뒤 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닌 후배이며, 제자 아니 이 책의 저자라는 생각으로 임했고 완성할 수 있었다.
- 이 책의 펴냄에 대한 의의를 생각한다면...
아무도 한반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다는 분명 거기 있는 것이고, 그를 통한 해양대국 가야는 있었다. 이런 유산을 우리는 물동이 릴레이로 전해 받았고, 누리고, 또 그것을 후세에게 전해줄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이고, 힘이고 근원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가난한 백성에겐 한의 대물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 아버지께서 가야사를 찾는 일에 매달린 실마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문학을 하셨던 아버지는 우리도 고대 그리스의 '일리야드' 같은 민족대서사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를 섭렵하셨다. 그러다가 삼국유사의 일연스님에게서 '가야의 공주 한 명, 왕자 한 명은 어디 갔어?'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엔 열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이중 일곱 명의 아들은 불도를 닦고, 거등왕과 거칠군, 한 딸은 석탈해 맏아들의 비가 되었다고 쓰였다. '그러면 남은 공주 한 명과 왕자 한 명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의문을 가졌고, 여기에서 해상대국 가야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아버지는 연어가 어미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책의 원제는 '겨레의 어미강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어미강을 찾아가는 과정은 곳곳에 둑이 쌓여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고 이영아 씨는 회고한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던 어머니에게 한마디만 해달라고 채근하자 어머니는 일본에서는 어디 가나 "당신이었군요." 하는 말을 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나라에선 그렇게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며 기어이 눈물을 비췄다.
- 그러데 왜 굳이 가야사인가?
아버지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치욕의 역사가 중심인 근대사에 60% 이상의 비중을 두는 것을 못마땅해하셨다. 딸이 만일 윤간을 당했다면 이웃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불쌍한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참 예쁜 딸'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 진정 딸을 사랑하는 부모의 도리가 아닐까?
역사는 미래와 연결된 것이기에 불행한 역사보다는 당당했던 역사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잃어버린 역사는 더욱 당당한 것들이다. 물론 잃어버린 역사 중에는 단군조선이나 고구려도 있다. 하지만, 단군이나 고구려 역사는 70년대 당시로는 현장에 갈 수 없는 한계 때문에 탐구할 수도 없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야사를 찾으면 다른 역사도 자연 회복될 것으로 생각하셨을 게다.
그녀는 처음 이 책의 원고를 정리할 땐 가야사를 봤지만 다 끝내고 난 지금은 가야사만이 아닌 민족사가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이 가야사의 완성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분명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독자들과 같이 메워나가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맺었다.
나는 대담을 마치고도 약간은 미련이 남았다. 그 강대했던 해상대국이 왜 무너졌을까? 그에 대해 책의 끝 부분에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하다"를 쓴 저자의 차녀이며, 환경과 생명문제 관련 저술가인 이진아씨에게 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집필을 하기 위해 경주에 내려가 있어서 전화로 할 수밖에 없었다.
김해 구지봉에 올라가 보면 김해는 한 나라의 서울로는 좁은 땅이고, 삼태기 지형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구가 늘게 되면 오염이 심각해지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사회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먼저 그런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가야가 번성했을 시절 낙동강은 큰 배가 육지 깊숙이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커서 해운이 발전했고, 그에 따라 해양대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점차 강 상류의 울창한 숲이 마구잡이로 베어 없어지면서 배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사라졌을 것이고, 이에 따른 환경변화로 점차 기력은 쇠약해졌으리라 짐작된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예는 남태평양 이스터섬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