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간도오딧세이_03

醉月 2010. 3. 3. 08:42
[간도오딧세이]1세대 간도연구가 아쉬운 은퇴

김득황 박사
만주어를 한국어로 풀이한 만한(滿韓)사전이 있다. 만주어는 중국에서도 거의 사라졌다. 그 만주어를 알기 쉽게 사전을 만든 이가 있다. 그는 또 만주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만주족의 언어>라는 책을 펴냈다. 1995년에 두 번, 각각 200부 한정판으로 발행했다. 그는 간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에게 이 책을 한 권씩 증정했다. 기자에게 준 만한사전에는 1995년에 초반 200부, 1997년에 중간 300부를 발행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한국에서는 만주어를 알고 있는 몇 사람 안에 손꼽힌다. 중국에서조차 잊혀져 가는 만주어를 공부한 것도 고향이나 다름없던 간도에 대한 열의였다. 간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만주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주지역 지명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독학으로 만주어를 공부했다. 만주족이 남아 있는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독학으로 만주어 사전도 펴내
얼마 전 동방사회복지회 이사장인 김득황 박사의 은퇴식이 화제가 됐다. 올해로 94세인 김득황 박사는 1972년부터 올해까지 37년간 부모없는 아동에게 양부모를 찾아줬다. 그동안 그가 입양해준 아이는 모두 6만 명이다. 37년이란 세월만큼이나, 6만 명이라는 숫자만큼이나, 94세라는 나이만큼이나 그의 소식은 화제가 됐다.

이렇게 ‘입양아의 대부’로 널리 알려진 김 박사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만한사전 저자다. 그는 ‘입양아의 대부’이기도 하지만 간도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1세대 간도연구가다. 간도 문제에 대해 사회에서 그다지 관심을 가지 않을 시기에 그는 꾸준히 간도 관련 저서를 집필했다.

1915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김 박사는 어린 시절 만주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 놀던 곳이 바로 우리나라 땅이라는 신념을 갖고 살아왔다. 일제 시대 때 백두산 정계비 터를 가본 ‘살아 있는 증인’이다. 그는 당시 백두산을 답사하면서 정계비 터 주변에 놓인 돌울타리(석퇴)를 직접 보았다.

동방사회복지회의 사무실에는 만주지역을 우리 땅으로 표시한 당빌지도가 있었다. 청나라가 18세기 초에 제작한 당빌지도에는 평안도를 뜻하는 영문 표기가 압록강에 걸쳐 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간도지역이 조선 땅으로 표기된 것이다. 이 지도를 외국에서 사들인 김 박사는 이 지도에 나타난 국경선을 ‘레지선’이라고 불렀다. 레지 신부가 제작한 지도에 나타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을 말한다. 18~19세기 외국 지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 대부분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있다. 그중 일부가 레지선을 따르고 있다.

그는 생존해 있는 몇 안 되는 1세대 간도연구가다. 지금 간도연구는 3세대로 넘어왔다. 1세대보다 연구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만 간도연구는 1990년대에서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이 간도영유권 문제를 일시적으로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지만 그때뿐이었다. 간도되찾기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가 꾸려졌을 뿐 간도영유권 문제는 일반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다. 연구도 마찬가지로 근근히 맥을 잇고 있는 정도다. 간도협약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간도 관련 인사들의 부끄러움은 더욱 커져간다. 그가 혼자 만든 만주어 문법책과 만한사전을 보노라면 새삼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94세에 은퇴식을 가진 김 박사의 열정을 가진다면 간도연구도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다.
 

[간도오딧세이]중국의 영토논리에 어떻게 맞설것인가

1885년과 1887년 청나라와 국경회담을 했던 감계사 이중하.
연변대학의 한 교수가 몇 년 전 한국의 간도연구가에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의 제자가 간도와 관련된 영토 문제를 다루는 박사논문을 쓰려고 하니 한국 책을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백두산 정계와 관련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중국의 기록을 훨씬 능가한다. 때문에 중국에서 영토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우리나라 기록을 더 참조해야 할 형편이다.

숙종실록, 승정원일기와 같은 정사에는 정계에 관한 기록이 자세히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 문집에서도 정계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역관 김지남은 <북정록>에 정계가 이뤄지던 과정을 거의 매일같이 기록했다. 이때 함께 갔던 김지남의 아들 김경문은 홍세태에게 당시의 상황을 전해줘 홍세태는 <백두산기>를 남겼다.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업무를 했던 접반사 박권은 <북정일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들 자료 외에도 김지남·김경문 부자가 쓴 <통문관지>라는 외교자료집과 <동문휘고>라는 외교자료집에서 당시 외교 상황을 살필 수 있다.

중국은 <청사고>와 <길림통지>에 겨우 몇 줄로 백두산 정계를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기록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런 기록의 우위는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데 우리나라에 훨씬 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줬다. 중국은 우리나라 기록을 통해 반론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1712년 백두산 정계에서 압도적인 기록의 우위를 보인 우리나라는 1885년과 1887년의 국경회담(감계담판)에서도 많은 기록을 남겼다. 감계사인 이중하는 <백두산 일기> <토문감계> <문답기> <조회담초> <감계사문답> <감계사교섭보고서> 등의 기록으로 감계 당시의 상황을 낱낱이 기록했다. 이때 기록한 문서들을 정리해 <감계사등록>이라는 자료집을 만들었다.

조선이 남긴 간도 기록이 훨씬 많아
조선시대의 기록은 1938년 일본인 법학자 시노다 지사쿠에 의해 빛을 발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넘보면서 사실상 만주를 노렸다. 도쿄제국대 법학과 졸업생으로 변호사였던 시노다는 총독부 관리로 간도에 대한 자료를 정리했다. 그의 목표는 조선의 땅이었던 간도를 일본제국의 땅으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방대한 기록을 정리해 <백두산 정계비>라는 책을 1938년 발간했다. 그의 기록을 보면 일본 특유의 꼼꼼한 기록정신을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 연구가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열성적으로 간도에 대해 연구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해방 이후 간도 연구는 주로 시노다의 저서에 큰 도움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끄럽게도 간도영유권 주장은 그가 펼친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연구는 철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시노다가 책을 쓴 지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간도 연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지 못했다. 역사 분야에서 간도 연구는 지지부진하다. 오히려 정치학·법학적인 접근이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연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고구려·발해 같은 고대 역사에 관심을 쏟고 있다. 간도에 관한 연구는 늘 주장하던 이론에서 맴돌 뿐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이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차근차근 영토에 관한 연구를 쌓아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조선이 남겨놓은 기록 정신을 잃어버렸다. 다만 남아 있는 것은 ‘순발력’뿐이다. 정계비를 세울 당시 조선 관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상황을 재치 있게 모면하는 데는 재주를 지녔다.

중국이 영토 논리를 개발하고 세운 후 우리나라는 어떻게 맞설까. 간도협약 체결 100년이 된 올해 어느 누구도 간도를 기억하려 들지 않는 상황에서 앞으로 중국과 어떤 논리로 싸워야 할까? 그때에는 결국 또 ‘뛰어난 순발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간도오딧세이]1909년을 기억하다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내리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 일행.

딱 100년 전인 1909년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외교권조차 박탈당해 일본의 속국이 되다시피 한 지경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고, 다음해인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다. 바로 전해인 1909년을 기억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다. 당시 순종실록에는 이 사건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순종2년 10월 26일 기사다.

황태자가 직접 전보로 아뢰기를,
“이토(伊藤) 태사(太師)가 오늘 오전 9시에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흉악한 손에 의하여 피살되었으니 듣기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는 아직 하지 않고 있는데 영구가 돌아온 뒤에 공포한다고 합니다. 일본 황실에서 시종무관과 시의(侍醫)를 파견하기 때문에 신도 김응선을 파견하려고 합니다. 황실에서 일본 황실에 직접 전보를 보내어 위문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범인 안중근은 진남포 사람이다. 뒤에 융희 4년 2월 14일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하여 같은 해 3월 26일에 집행하였다.)

일본 천황 폐하에게 직접 전보하기를,
“바로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가 똑같은 마음으로 지극한 뜻을 표시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또 이토 공작과 공작 부인에게도 직접 전보를 보냈다.

안중근은 ‘흉악한 역도’로 묘사돼 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 내용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임금이 죽은 후에 실록을 저술하는데, 고종과 순종의 사후는 일제가 강점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일제의 입맛에 맞게 실록이 저술됐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를 암살하기 바로 한 달하고도 22일전 북경에서는 간도협약이 체결됐다. 1909년 9월 4일의 일이다. 순종실록(순종 2년 9월 4일 기사)에 이 사실이 기록돼 있다.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 체결
간도(間島)에 관하여 일청 협약이 체결되었다.
<간도에 관한 협약>
대일본국(大日本國) 정부와 대청국(大淸國) 정부는 선린(善隣) 관계와 상호 우의에 비추어 도문강(圖們江)이 청국과 한국 양국의 국경으로 된 것을 서로 확인하고 아울러 타협의 정신으로, 일체 처리법을 상정(商定)하여 청국과 한국의 변방 백성들에게 영원히 치안의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의 조관(條款)을 정립(訂立)한다.

제1조
일 청 양국 정부는 도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에 있는 정계비(定界碑)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함을 성명한다.

순종실록에는 일청조약이 체결됐다는 단 한 줄의 내용과 함께 조약이 나열돼 있다. 이 조약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한국과 청의 국경을 왜 일본과 청이 정했는지는 물론 언급될 리 없다.
남 탓할 필요 없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간도협약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간도협약은 지금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을 이루는 밑바탕이 됐다. 지금도 간도협약은 유효한 협약으로 사실상 인정되고 있는 셈이다.

[간도오딧세이]청의 심기를 살핀 국경 획정
1636년 병자호란에 패배한 후 청의 요청으로 세운 삼전도비.
조선은 청에 어떤 나라였을까? 청의 역사책 <청사고>의 1876년(고종 13년)의 기록에는 일본의 외교 관리가 북경에 가서 청의 관리와 나눈 대화가 나온다. 일본의 외교 관리는 조선과 통상 조약을 하기 전인 1872년 북경을 방문했다. 이 관리는 “조선은 속국이 아닌가”라면서 “그 나라의 통상에 관한 일을 대신하여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청의 관리는 “조선은 비록 번속(藩屬)이기는 하지만 내정과 외교는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아조(我朝)에서 간여하였던 일이 없다”고 말했다. 19세기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번속’의 관계는 17세기 말~18세기 초에 더 심했으면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청사고> 1712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순(李焞)은 표(表)를 올려 늘 바치던 공물을 줄여준 것에 대한 사은을 표시하고 방물을 바쳤다. 황제는 사은예물을 동지·원단예물로 삼도록 하였다. 이 해에 목극등이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에 이르러 조선접반사 박권·관찰사 이선부와 함께 소백산 위에 비석을 세웠다.

‘이순’은 숙종의 이름이다. ‘조선국왕’이란 표현이 <청사고>에 일부 나타나 있지만 조선의 왕들은 이름으로 표시됐다. 강희제는 ‘황제’라고 표현했다. 공물을 바치던 기록만 보아도 조선 국왕과 청 황제의 관계를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때는 1636년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큰 굴욕을 당한 지 한 세기가 넘지 않았다. 왕세자가 볼모로 잡혀갔고 수많은 사람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런 주종의 관계 속에서 목극등이 백두산으로 파견됐으니 조선의 주장은 궁색했다. 잘못하면 청의 관리가 화를 낼까, 청의 조정이 격노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외국의 사절을 응대하는 조선의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목극등에게 1712년 5월 4일 올린 글을 보면 어떤 상황인지 잘 알 수 있다.

목극등 잘못에 대해 조선 관리들 침묵
삼가 대인께서 황명(皇命)을 공경히 받들어 욕되게도 원방에 오셔서 산천을 모두 거치고 험조함을 두루 맛보셨습니다. 그럼에도 지기는 미려(彌勵)하시고 용감히 나아감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최선을 다하는 의리와 쉼없는 충성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함을 일으키고 감탄을 자아냅니다. 저희들은 무엄하게도 대인을 인도하는 임무를 맡게 되어 대인의 모습을 직접 뵐 수 있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쏟아 저희 임금께서 대조(大朝)를 존경하는 뜻을 감히 몸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교문서를 담은 <동문휘고>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금의 문구로 봤을 때 아무리 외교적인 문서라고 하더라도 과도한 응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청과 조선의 관계는 이렇게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양국 간 경계를 확정한다는 것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관리들은 어떻게 하면 청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고심했다. 하급관리들은 더했다. 이들은 목극등이 경계를 잘못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1712년의 잘못된 경계 획정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다. 국가 간 경계 획정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청은 토문강이 동해 쪽으로 흘러내려 갈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계비가 세워진 곳의 토문강은 동해 쪽이 아니라 북쪽인 만주를 향해 내달음쳐 갔다.

[간도오딧세이]북방 경계 개척 주장 펼친 남구만
청구도 본조팔도성경합도. 성경이 심양이며, 오라성과 영고탑이 보인다. 현대 지도로는 오랄성과 영고탑은 두만강·압록강과 거리가 더 멀다. <규장각 소장>
공포는 엉뚱한 생각을 낳는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혼쭐이 난 조선은 청을 공포, 그 이상으로 두려워했다. 조선이 황제의 나라로 받들던 명을 상대로 청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공포감은 더욱 커졌다.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그동안 ‘모셔온’ 명이 야만족인 ‘청’을 무찔러주길 기대했다.

엉뚱한 상상은 또 엉뚱한 상상을 물고 이어졌다. 명이 청을 무찌른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해보았다. 심양에서 쫓기어 만주족의 본거지인 영고탑(현재의 길림성 흑룡강 일대)으로 물러갈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가정까지 한 것은 좋았지만 상상이 지나쳤다. 심양에서 쫓긴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거쳐 영고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북방 경계지역에 군사 시설은 보충해도 민간인들의 이주는 줄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북방지역 백성들 접근 방지 논의
추측이 어긋난 만큼 대책도 엉뚱한 것이 돼버린 꼴이다. 심양에서 지금의 길림으로 가려면 직선 코스가 있다. 만주를 가로질러 바로 가면 거리가 훨씬 줄어드는데 청나라 군대가 일부러 험한 압록강-두만강으로 내려와 고향을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지리 정보에 어두웠던 만큼 이런저런 상상을 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리적 정보는 발로 다닌 경험 외에 가보지 않는 곳은 ‘심양에서 오라까지 800여리’ ‘오라에서 영고탑까지 400여리’라고 하는 정도다. 신지도만 접했더라도, 지리적 정보를 좀 더 갖고 있었더라도 청나라 군대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거쳐 길림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행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근심을 하는 데 전제부터 잘못됐다. 명은 ‘지는 해’였고, 청은 ‘뜨는 해’였다. 명은 더 이상 일으켜 세울 힘도 없었다. 그런 명이 청을 칠 수 없었다. 그러니 청이 쫓겨가는 일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선의 조정대신들은 책상머리에 앉아 국제 정세를 점쳤다. 그래서 북방지역에 백성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남구만은 이런 인식이 잘못됐음을 왕에게 아뢰었다. 남구만은 함경감사로 재직하면서 북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숙종실록> 1697년 5월 18일 기사에는 이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영중추부사 남구만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선조에서 근신으로 입시하였는데, 재신이 일을 아뢰고 인해서 말하기를, ‘심양에서 영고탑으로 가려면 길이 매우 험하고 멀지만, 만약 우리나라 서북의 변경을 거쳐서 간다면 매우 가까우니, 피중에서 만약 급박한 변고가 있어 옛날에 살던 땅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면 틀림없이 돌아가는 길을 버리고 질러가는 길로 나아가면서 우리나라의 서북 변경을 짓밟으려 할 텐데, 조정에서는 더욱 유의하여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신미년(1691년) 사이에 피중에서 백두산(白頭山)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을 하면서 아울러 다섯 명의 사신을 보내어 우리에게 길을 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위로는 조정부터 아래로는 하인까지 모두 피중에서 틀림없이 급하게 옛날 살던 지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겨 이렇게 백두산을 그린다고 핑계를 대지만 실제로는 도로를 엿보려는 일이라고 여기고 시끄럽게 떠들며 어수선하여 금지시킬 수 없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나라의 서북 두 곳의 변경은 겹쳐진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험하고 좁은 길이 하늘에 달려 있는 듯하니, 심양과 영고탑의 사이가 틀림없이 이보다 험하거나 이보다 멀 이치가 없습니다.”

남구만은 북방 경계지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구의 주장이 옳았는지 역사가 말해주었다. 남구만의 생각이 옳았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13  (0) 2010.03.06
공자에게 경영을 묻다_02  (0) 2010.03.05
란보라의 중국속으로_02  (0) 2010.03.02
가야국 비밀풀었다   (0) 2010.03.01
김성동의 현대사 아리랑_04  (0) 201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