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돈이 아닌 말이 통하게 仁政 하라!
사람들은 흔히 욕설 말머리에 ‘개’라는 접두어를 붙이는데, 개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개는 싸움은 하지만 상대를 죽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개는 먹을거리를 두고 혹은 짝을 짓기 위해 싸우긴 하지만 패를 짜서 조직적으로 동족을 죽이진 않는다. 고의로 동족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개는 싸우긴(fight) 하지만 전쟁(war)을 벌이지는 않는다.
허나 인간은 싸울 뿐만 아니라 전쟁을 치르기도 하는 동물이다.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짓이 전쟁이다. 나아가 동족을 잘 죽이는 자를 영웅으로 떠받들기도 한다. 왕조를 건설한 사람치고 ‘전쟁광’이 아닌 자가 없었다. 한나라의 유방, 당나라의 이세민, 원나라 칭기즈 칸이 모두 그렇다. 우리나라인들 다르랴. 고구려의 주몽은 그 이름 자체가 ‘활 잘 쏘는 아이’라는 뜻이다. 또 활솜씨, 칼솜씨로는 조선의 이성계도 뒤지지 않는다. 임금 왕(王)자가 양날 도끼를 형상화한 글자요, 제후를 뜻하는 후(侯)자 속에 화살[矢]이 들어 있는 데는 다 내력이 있는 것이다. 인간문명의 역사라는 것도 살상용 무기기술 발전에 뒤따른 측면이 있고 보면, 백주대낮에 낯 뜨겁게 흘레를 붙는 통에 욕설의 대명사가 되긴 했으나 개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인간이 개보다 못하다.
개보다 못한 짓이 유독 횡행한 시대, 전쟁과 살상으로 점철된 시대를 춘추시대(春秋時代·BC 770~453년)라고 한다. 춘추시대는 한마디로 ‘전쟁의 세기’였다. 권력을 위해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재화를 위해 신하가 군주를 살해하는 무도한 세기요, 한 움큼의 밥을 뺏으려고 낯모르는 사람을 척살하는 시절이었다. 급기야 사람이 무서워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심산유곡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던 때다. 이런 시대를 산 사람이 공자(BC 551~479년)다. ‘예기’에는 공자가 산길을 가던 중 한 여인을 만난 일화가 실려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깊은 산속을 가던 어느 날. 한 여인이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 우는 까닭을 묻자, 여인은 “남편과 자식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잃었다”고 하소연한다.
공자는 “산을 떠나 마을에서 살면 될 것 아니냐”고 권한다. 그러자 여인은 “도시의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도 없다”고 답한다.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단단히 기억해두어라. 세상의 잘못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을.”
이 폭력과 광기의 시대를 뚫고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고민한 사람이 공자다. 공자는 당시를 “잔혹하고 또 살인이 횡횅하는 시대”로 규정하고, 이런 “잔혹과 살인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백년의 세월은 걸릴 것”이라고 암울하게 전망했다. 오랜 세월 개보다 못한 죽임과 죽음의 사태가 지속되다보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우울하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논어’의 밑바닥에는 사람이 짐승으로 타락할지 모른다는, 아니 머지않아 인간이 ‘개보다 더 못한 짐승으로 추락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이 점을 두고 맹자는 “공자는 시대를 두려워했다”(孔子懼)고 지적했던 터다. ‘논어’에 깃들인 당대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미래에 대한 절망감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고작 책상머리에서 관념한 백면서생의 형이상학적 언설로 읽어서는 공자의 참된 생각과 만날 수 없다. 과거의 평화는 옛 전적에나 남아있을 뿐이요, 또 내일은 더 이상 해가 뜰 것 같지 않은 어둠 속에서 새 길을 뚫으려는 암중모색의 기록이 ‘논어’다.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혀
절망과 공포는 분노와 증오를 동반한다. 마을마다 시체더미에서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의 강을 건널 때라야 비로소 사태에 대한 냉정한 성찰과 객관적 진단이 가능할 것이다. 평화로운 인간사회에 대한 꿈이 아무리 절실할지라도 당대 현실에 대한 성찰과 진단이 없으면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이다. 내일의 꿈이 몽상이 아니라 이상이 되기 위해선 타락한 시대에 대한 증오는 필수적이다. 이때 증오는 ‘강낭콩꽃보다 더 푸르고’ 그 분노는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것이다.
공자사상의 핵심어가 ‘사랑’을 뜻하는 인(仁)임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인’을 주로 다룬 ‘논어’ 제4권 ‘이인’편에 증오(惡)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좋은 말로 사랑하기를 격려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나쁜 것을 철저하게 미워하는 것이 ‘인’을 실현하는 방법이라는 매서운 구절들이 들어있다. 어쩌면 유교는 ‘칼의 종교’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 것도 이런 대목에서다. 공자사상의 밑바탕에는 분노와 증오가 깔려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음 문답을 보자.
제자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선생님도 미워하는 것이 있는지요?”
공자, 말씀하시다. “미워하는 게 있지. 남의 잘못을 떠벌리는 것을 미워하고, 낮은 데 있으면서 윗사람 헐뜯는 것을 미워하고, 용맹스럽기만 하고 무례한 것을 미워하며,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힌 것’을 미워한다네.”
공자가 물었다. “자네도 미워하는 것이 있는가?”
“주워들은 걸로 자기 지식인 양 여기는 짓, 불손함을 용기로 아는 짓, 그리고 고자질을 정직으로 여기는 것을 미워합니다.” (논어, 17:24)
미워할 대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증오하는 것, 이것이 공자의 또 한 면모임을 알겠다. 다만 그것은 사사로이 자아낸 감정이 아니라, 대상의 잘못에서 비롯된 공분(公憤)이다. 그러므로 그 증오는 오로지 미움을 받아 마땅한 대상에게만 주어질 뿐, 다른 데로는 옮겨지지 아니한다. “분노를 옮기지 아니함”(不遷怒·논어, 6:2)이라는 말이 바로 이 점을 드러낸 것인데, 정녕 무섭도록 맑은 거울을 가슴속에 품었다는 뜻이니 전율할 일이다.
여기서 공자는 네 가지 인간유형을 미워한다고 털어놓는다. 첫째는 남의 잘못을 떠벌리는 짓, 둘째 지위가 낮으면서 윗사람을 헐뜯는 짓, 셋째 용맹스럽기만 하고 무례한 짓, 그리고 넷째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힌 놈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의 ‘과감하기만 하고 꽉 막힌 것’을 미워한다는 지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리라. 여기 ‘꽉 막힌 것’(窒)은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요, ‘과감하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전부로 생각하고 마구 행동하는 짓을 의미한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 귀를 막은 인간의 행태를 춘추시대의 질병으로 진단한 것이다.
‘귀 막음’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자공의 증오가 이 대목을 겨눈다. 그는 “주워들은 걸 자기 지식인 양 여기는 짓”, 곧 사이비 지식이 ‘귀 막음’의 뿌리라고 지목한다. 올바로 알려하지 않고 고작 제 입맛에 맞는 정보에만 귀를 열고 또 그걸 바탕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짓, 세상 변한 것은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제 살아온 경험만을 진리로 여기는 몽매함, 이들이 다 소통장애의 뿌리라는 얘기다. 공자의 증오와 관련하여 한 대목 더 살펴보자.
미생묘(微生畝)가 공자를 두고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여기저기 분주하신가? 너무 말만 번지레한 것 아니신가?”
공자가 말했다. “말만 앞세우려던 것은 아니나 ‘꽉 막힌 세태가 미워서’(疾固) 분주하답니다.” (논어, 14:32)
미생묘는 공자의 선배로 숨어 사는 은둔자였던 듯하다. 이 대화에서는 당혹해하는 공자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공자 스스로 “말만 번지레한 것을 싫어하노라”(惡夫 者·논어, 11:24)고 지적했는데, 도리어 본인이 말만 번지레한 사람으로 지목을 당했으니 말이다. 주목할 것은 공자가 제 처신을 변명하면서 내뱉은 ‘꽉 막힌 세태를 미워한다’는 의미의 ‘질고(疾固)’라는 단어다. 여기서 ‘고(固)’는 고루함 고집함 굳어있음을 뜻한다. 공자는 당대의 병폐로 딱딱하게 굳어있는 마음, 돌아앉아 닫힌 마음을 들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변명인즉, 자신의 분주함은 당대 인민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것. 앞서 자공과의 대화에 등장한 ‘질(窒)’은 오늘날 식으로 풀자면 소통이 단절된 사태, 곧 불통의 사회현상을 뜻하는 한편, 여기서 고(固)는 사람들이 마음을 굳게 닫고 돌아앉은 사태, 곧 소외현상을 의미한다. 공자는 소통이 단절된 세태와 개인으로 분절된 소외 현상을 춘추시대의 질병으로 보았던 것이다.
“덤벼들어라”
춘추시대의 소통단절과 인간소외라는 사회현상의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세계를 ‘나 중심’으로 편제하려는 욕망이 그 뿌리다. 이른바 “소인배는 동이불화(同而不和)하노라”(논어, 13:23)던 경고 속의 동(同)이 ‘나 중심’의 세계관을 표상한다. ‘상대방이 나와 다름을 인정함’이 화(和)의 전제라면, ‘동’은 상대방을 나로 동화시키려 하는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은 군주들의 권력 ‘독점’, 자기만 옳다는 가치관의 ‘독선’, 그리고 언어의 ‘독백’ 욕망들을 상징한다. 춘추시대의 살육과 전쟁, 그리고 야만 상태는 천하통일이라는 명목을 내세운 제후들의 권력욕과 영토 독점욕, 그리고 자기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면서 남의 말을 듣기는커녕 언제나 지시하고 명령하려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소통의 단절이요, 인민의 소외현상이라고 공자는 분석했다. 그렇다면 공자의 꿈, 공자가 제시하려는 새 세계의 비전은 분명해진다.
이제 공자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춘추시대 사람들의 시대적 소명, 역사적 과제는 무엇이었던가? 좀 더 좁혀 우리 주제에 맞추자면 당대의 국가경영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공자는 이렇게 답하리라. 첫째, 권력의 독점 상태를 깨고 인민과 더불어 행하는 권력균점 체제를 건설하는 것. 둘째, 군주가 독점한 가치의 유일성을 분산하여 가치의 다양성을 도모하는 것. 셋째, 상명하복의 지시와 명령의 독백구조를 붕괴시키고 대화와 소통이라는 새로운 ‘말의 질서’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 독점에서 균점으로, 유일성에서 다양성으로, 독백에서 대화로의 전환이 공자가 자임한 프로젝트였다. 이것이 공자가 내내 분주했던 까닭이요, 이말 저말 하면서 천하를 주유한 이유였다. 여기서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에게 내린 가르침을 보자.
자로가 임금 모시는 법을 여쭈었다.
공자 말씀하시다. “속이지 말고, 덤벼들어라!”(논어, 14:22)
여기서 “속이지 말라”는 것은 윗사람에게 거짓으로 대하지 말라, 사실만 전달하고 공식적인 언어만 구사하라는 권고로 해석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임금은 신하를 예에 합당하게 대접하고, 신하는 진심으로 임금을 섬겨야 한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논어, 3:19)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목할 부분은 “(군주에게) 덤벼들어라”라는 뒷대목이다. 문맥상으로는 ‘군주의 잘못을 목숨을 걸고 간하라’는 권고로 읽힌다. 하지만 ‘덤빈다’(犯)는 것은 일본 사무라이식 충성과 질적으로 다르다. 일본식 충성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식의 ‘의리’ 즉 군주에 대한 신하의 절대복종을 뜻하는 반면, ‘덤빈다’ 속에는 군신이 각각 독립된 존재로서 군주는 신하의 몸과 뜻을 사유화할 수 없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자로에게 이런 권고를 한 까닭은 자로가 무사 출신이라 상하의 지배-복종 논리에 익숙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공자는 신하가 결코 군주의 수족(도구)으로 동화(同化)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군신 간은 서로 독립된 존재로서 이성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가치 공유를 추구해야 하는 긴장관계임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군신관계는 직분이 다를 뿐 상호적인 수평관계여야 함을 알려준 셈이다. 훗날 주희는 군주와 신하가 긴장관계를 통해 공익을 실현하는 묘처를 두고서 ‘상반이상성(相反而相成)’, 곧 ‘서로 반대되면서도 서로를 이뤄주는 관계’라는 역설적 언어로 표현했다. 이는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의 화(和)가 표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지점에서 문득 현대 기업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P. Drucker)의 지적도 같은 맥락임을 확인한다.
“드러커는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업과 사회에 대한 드러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가 사람(개인)을 가장 소중한 요소로 여겼음을 확신하게 된다.” (짐 콜린스, ‘개정판 서문’, 피터 드러커, ‘경영학’, 2008)
리더가 부하들을 자기 목적 달성의 도구가 아닌 경영목표를 향한 동반자로 여길 때 제대로 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권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통하는 셈이다.
소통하려면 거리가 필요
어쨌건 공자의 권고인 “덤벼들어라” 속에는 ‘상호적 관계의 긴장’이 무너지고 상하·주종의 수직적 형태로 타락하여 군주가 신하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사태에 대한 공자의 염려가 깃들어있다. 군주의 독선 독점 독백의 사태를 다양성과 균점, 그리고 대화와 소통의 세계로 재건하려는 공자의 비전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힘 가진 자의 ‘홀로’를 부수고 ‘함께, 더불어’의 세계 만들기, 이것이 ‘시대경영자’를 자임한 공자 프로젝트의 정체였다.
이 대목에 작가 김훈의 인터뷰를 인용할 만하다. 기자의 ‘작품들에 대한 인터넷상의 댓글은 읽어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댓글을 읽은 적은 없다. 작가와 독자는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엉켜서 끌어안고 떠들어대는 것은 소통이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떨어진 거리가 필요하다. 들러붙어서는 소통되지 않는다.” (김훈, ‘동아일보’ 인터뷰, 2009년 10월9일)
김훈의 주장은 작가와 독자를 어느 정도 떨어뜨려놓는 것이 그 관계를 ‘동’으로 타락시키지 않고 ‘화’의 가치를 살려내며, 일방적으로 말하는 독백으로부터 벗어나 소통의 장을 만들어내는 전제임을 이야기한 것이다. 거리를 둬야만 소통의 환경이 형성된다는 이 말은, ‘주종관계로 한통속이 되지 말고 다양성을 위해 덤벼들어라’고 한 공자의 권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에겐 지배-복종으로 수직화하기 쉬운 상하관계의 거리를 지켜내면서(혹은 버텨내면서) 다양한 가치를 만들고 조절해나가는 노력이 인간경영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특히 김훈의 “들러붙어서는 소통되지 않는다”는 말은 여러모로 곱씹어볼 만한데, 내친김에 작가 공지영의 말도 빌리자면 “가족은 사랑하는 남이다”고 했다. 그렇다. 가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의 가치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곳이라면, 민주적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식들의 바람만 가득한 곳이라면, 그것은 사랑이란 명목의 집착과 애욕의 감옥일 뿐이다. 화목한 가정의 열쇠는 구성원이 서로 다르다는 인식, 요컨대 ‘가족을 사랑하되 타인으로 대하라’는 공 작가의 역설 속에 들어있다.
공자가 권한 효도 또한 ‘아버지에게 복종하기’ 따위가 결코 아니다. 이 점을 두고 공자의 후예, 순자(荀子)는 이렇게 직언한다.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공손한 것, 이 따위는 사소한 행실이다.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에게 따뜻이 대하는 것, 이런 건 중간 치기다. 도를 좇지 임금을 따르지 않고, 정의를 좇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사람으로서 큰 행실이라 할 만하다.” (순자, ‘자식의 도’(子道)편)
마지막의 ‘정의를 좇지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사람으로서 큰 행실이다’는 대목은 유교에서 바라보는 효도의 의미를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요컨대 유교의 고유한 덕목인 효도조차 부모-자식 사이의 거리를 전제하고, 그 거리를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실천과정일 따름이라는 이야기다.
내 주변에서 함께 하기
여기서 공자사상의 핵심어인 인(仁)의 글자꼴에 주목해보자. 다산 정약용의 방식으로 글자를 쪼개어 읽자면, ‘仁’은 곧 사람(人)과 둘(二)로 이뤄진 합성글자다. 그러니까 ‘두(둘) · 사람’이 곧 인(仁)을 만든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바로 ‘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나와 상대방, 예컨대 나와 아내, 나와 부모, 나와 자식, 나와 학생, 나와 친구 등이다. 결국 인은 ‘관계’와 같은 뜻이다.
다음의 시(詩)는 ‘인’의 조건을 잘 보여준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김광규의 시 ‘나’의 일부
김광규 시인의 명징한 묘사처럼, 유교 또는 동아시아에서 ‘나’는 개인이 아니라 관계로 이뤄진 존재다.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자 “나의 아들의 아버지”인 ‘나’ 속에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들어있다. 곧 나 속에 상대방이 함께해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 된다. 전래된 속언에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 짓을 해야 사람이지’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 짓’, 곧 상대(너)와의 관계를 제대로 수행해야만 완성된 인간이 된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인간(人間)’이란 한자어의 의미도 이 속담과 똑같다. 사람이란 ‘사람-사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 ‘사람됨’이 존재한다. 그러니 단독자 즉 개인은 사람이 아니다. 너와 내가 함께이고, 더불어 할 때, 곧 적절한 소통에 성공할 때에야 비로소 사람다움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사상의 핵심어인 인(仁)은, ‘아버지로서의 나’가 자식으로서 제 구실을 하고, ‘선생으로서의 나’는 학생들에게 제 역할을 하고, ‘남편으로서의 나’는 아내에게 제대로 할 때 획득되는 가치다. 이것이 사람다움이요, 사람다움의 정체는 상대방과 제대로 소통함에 달려있다. 상대방과 내가 눈짓으로도 의사가 통할 정도여야 ‘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셈이다. 공자가 인을 두고 ‘내 주변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상대방과 함께 하는 것’으로 정의한 까닭을 알 수 있다.
“인(仁)이란 내가 이룬 것은 남들도 함께 이루도록 해주고, 내가 아는 것은 남에게도 알려주어 함께 하는 것이지. ‘내 주변에서 함께하기’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게 ‘인’을 이루는 방법인 게지.”(논어, 6:28)
신뢰, 국가경영 원칙
결국 공자 국가경영론의 이상인 인정(仁政)이란 집안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서 말(의견)이 원활하게 소통하는 상태를 뜻한다. 즉 공자에겐 ‘말이 원활하게 소통하는 상태’가 경영의 목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공자가 꿈꾼 것은 ‘말이 통하는 문명사회’라는 점을. 말의 소통은 신뢰(信)로 개념화된다. ‘논어’에서 공자가 분노를 터뜨리는 곳이 어디인지를 보면 그의 뜻을 넘겨짚을 수 있다.
공자 말씀하시다. “내가 처음에는 사람들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당연히 그리 하는 걸로 여겼다. 허나 근래 사람들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해도 그 말을 점검해보기에 이르렀는데, 이건 저놈 재여(宰予) 때문이다.” (논어, 5:9)
공자는 언어와 실천의 약속을 깨버린 제자 재여에게 큰 분노를 표하고 있다. 이것은 거꾸로 공자가 꿈꾼 문명세계가 신뢰가 살아있는 곳임을 짐작케 한다. 신뢰의 조건은 말이 통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정확히 수행해야 하는 점에 있다. 이것이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논어, 12:11)는 말의 속뜻이다.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부자(父子)관계를 이룰 수 없고, 부자관계를 이루지 못하면 ‘아버지’ ‘아들’이라는 말은 의미를 잃고 껍데기가 된다. 이래선 신뢰의 전제인 관계를 이룰 수가 없다. 관계가 망가져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이건 사회가 아니라 뒤죽박죽 엉클어진 야만상태다. 춘추시대의 현실이 그러했다.
이에 공자는 관계의 직분, 즉 명분(名分)을 어김은 곧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경고한다. 이는 공자사상의 특징으로 정명(正名)을 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인데, 여기서 이름이란 고유명사로서의 이름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이름, 자식이라는 이름, 교수라는 이름처럼 직분의 명칭도 아우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에서 일컫는 이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이름이란 곧 사람됨의 상징이다. 사람의 전부가 이름에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굶어죽을지언정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 ‘명예’다. 명예는 오로지 이름과 말이 힘을 발휘하는 문명사회에서 가능하다.
공자 생각에 야만 상태에서는 정치나 경영이 존재할 수 없다. 정치와 경영은 언어의 힘, 말의 힘이 통용되는 곳에서만 자라기 때문이다. 언어의 힘이 곧 신뢰다. 그러니 신뢰는 정치와 경영의 핵심이다. 이에 공자는 말한다.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군사(兵)와 경제(食) 그리고 신뢰(信)다. 셋 가운데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군사를 버린다. 나라가 망해도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둘 중에 하나를 버린다면 경제를 버린다. 사람이 나서 죽지 않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도록 보존해야 할 것은 신뢰다. 신뢰가 없이 공동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어, 12:7)
마지막의 ‘신뢰 없이 공동체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목을 현대 경영이론가인 스티븐 코비(S. Covey)의 다음 주장과 비교해보자.
“신뢰의 속도만큼 빠른 것은 없다. 신뢰의 관계만큼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 신뢰를 보내는 것만큼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것은 없다. 신뢰의 경제학만큼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 신뢰의 평판만큼 영향력이 큰 것은 없다. 신뢰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신뢰를 쌓고 보내고 회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스티븐 코비, ‘신뢰의 속도’, 68쪽)
야만에서 문명사회로
공자의 위대한 점은 폭력이나 금력을 국가경영의 유일한 도구로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정치나 경영은 폭력과 돈의 힘이 아니라 언어와 신뢰의 힘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데 있다. 이 점은 동양사상사에서 분수령을 이루었다. 요컨대 공자는 이전 샤먼의 힘(신화)과 폭력의 힘(무력)에 이끌렸던 인간사회를, 말과 신뢰가 통용되는 문명사회로 전환시키려 했던 최초의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 길이 험했다. 공자가 분주한 까닭을 이해하고,
그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한 날카로운 비평이 은둔자로 보이는 사람한테서 튀어나온다.
제자 자로가 길이 늦어져서 석문(石門)에서 묵었다.
새벽녘 성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지기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슈?”
자로가 말했다. “공자한테서 오는 길이외다.”
문지기가 말했다. “음! 그 안 될 줄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 말이우?” (논어, 14:41)
분명 이 문지기는 숨어 사는 현자임에 틀림없다. 단 한마디로 공자를 찍어 넘겨버렸다. ‘안 될 줄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이라니! 이보다 더 정확하고 올바르게 공자를 정의할 수 있을까? 정녕 이 점, 안 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세상사에 개입하는 ‘비관적인 사회참여’야말로 공자의 특점이다. 세태를 비관하여 자연 속으로 물러나 몸을 감춰버리는 은둔자의 세계관과, 세상사를 비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사회에 개입하려는 공자 혹은 유교적 세계관을 갈라놓은 강이다.
● 1959년 출생
●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과(정치학 박사)
●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
●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현)
● 저서:‘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등
공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켜 비관적인 인간세상으로 몸을 던지는 길을 택했다. 문제의 원인을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며 뒤로 물러나 조소하는 은둔의 길도 아니요, 그저 제 한 몸의 안락을 위해 이념과 지식을 파는 참여 일변도의 길도 아닌 샛길이다. 안 될 줄을 알면서도 뚜벅뚜벅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걸었던 길, 찬바람을 가르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걸었던 길이다.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데도 제 허기를 못 이겨 여기저기 주둥이를 갖다 대는 ‘상갓집 개(喪家之狗)’ 꼴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 말이다. 문득 이 자리, 공자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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