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될 삼협댐 '병서보검협'과 제갈량 수수께끼
중국 삼국시기 신령스러운 용병으로 한낱 수수한 인간에 불과했던 유비를 보좌하여 손권의 동오(東吳)와 조조의 위(魏)나라와 삼족정립(三足鼎立)의 국세를 이루게 하면서 촉한(蜀漢)의 강성을 도모했던 제갈량(諸葛亮)은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러운 인상을 주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수께끼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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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사(武候祠). 제갈량의 공적을 기리어 세운 사당. © 인터넷사진 |
자취를 감춘 병서
신야(新野)를 불사르고 유비를 이끌어 촉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이르러 초선차전(草船借箭, 즉 양자강에서 허수아비를 실은 배로 화살을 얻은 계책)으로 조조를 경악케 했던 제갈량, 2천 여년을 내려오면서 제갈량이 용병계략을 기록했다는 제갈량의 병서(兵書)는 나라의 생사를 결정하는 제왕장상(帝王將相)에서 무사에 이르기까지 탐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보서(寶書)로 꼽혔다.
그러나 제갈량이 사망한 뒤, 그의 병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누구도 그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아침안개마냥 정적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전설은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제갈량 병서의 행방을 모름으로 하여 수천년을 내려온 전설은 한결 더 신비로운 색채만 띠고 있다. 그런데 그 종적을 감추었던 병서가 이제 나타나려고 꿈틀거리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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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浙江)란시(蘭溪)에 있는 팔괘촌(八掛村). 마을은 제갈량의 팔괘도에 따라 설계되었는데 방어와 공격에 모두 편리하다. 제갈량의 병법을 따랐다고 전한다. ©인터넷사진 |
중국이 창장(長江) 상류에 삼협(三峽)저수지를 건설하게 되면서 물이 잠기게 될 지역의 고대유적과 문물들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제갈량의 병서의 내력이 신비로운 전설과 함께 고고학자들의 귀에 들려오게 되었다.
현관(懸棺)의 수수께끼
장강을 따라 계속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지금 중국에서 이미 사용하기 시작한 삼협저수지가 나타난다. 삼협저수지를 건설하게 되면서 중국 관계부문에서는 삼협 주위, 삼협저수지가 서면서 물에 잠길 지역들의 고고학 발굴을 대대적으로 하도록 했다. 고고학 발굴을 하는 가운데 중국 고고학자들은 제갈량의 병서에 대한 전설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이 좁고 험하고 양안에 아찔한 벼랑이 솟아 있는 곳을 협(峽)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런 협이 연속 3개나 이어져 있다고 해서 삼협이라고 이름한 중국의 서북지역, 장강양안에는 삼협을 내놓고도 "협"이라고 불리는 지명들이 많고도 많다. 그 가운데 "병서보검협(兵書寶劍峽, 즉 병서와 보검을 숨겨둔 협)이라는 곳이 있는데 부근의 노인들은 이곳이 바로 제갈량이 병서와 호풍환우의 보검을 숨겨둔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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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懸棺, 즉 벼랑에 달려 있는 관). 창장(長江) 상류의 산샤(三峽)일대에는 이런 현관들이 아주 많다. 현관은 신비로움과 함께 많은 비밀들을 감추고 있다 ©sohu.com |
병서보검협을 거쳐 흐르는 장강 양안의 절벽에는 물에서 15m~80m 높이에 관들이 걸려져 있었는데 이를 사람들은 "현관(懸棺, 즉 벼랑이나 나무에 매달려 있는 관)"이라고 했다. "병서보검협" 부근의 노인들은 제갈량의 병서와 보검이 바로 그 곳에 걸려있는 어느 "현관"에 있다고 했다.
전설에 따르면 제갈량은 자기가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된다는 알고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불러다 세인들이 그토록 구하고자 하는 자기의 병서와 보검을 관에 넣어 사람들이 오를 수 없는 벼랑에 숨겨두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의 병서와 보검은 오늘날까지도 세상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제갈량이 병서와 보검을 숨겨둔 곳을 가리켜 사람들은 병서보검협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는 이 지역 사람들이 강에 우뚝 솟은 검과 같이 생긴 바위돌과 벼랑에 있는 "현관"을 신비롭게 이름을 붙여 부른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갈량의 병서와 보검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병서보검협' 주위의 노인들에 따르면 민국 초년(1912년 후)에 한 사람이 오랫동안 밧줄 등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하여 바로 제갈량의 병서가 숨겨 있다는 "현관"까지 밧줄을 타고 내려가 보았는데, 관 안에는 병서는 없고 보검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보검을 꺼내려고 다시 보니 보검은 온데 간데 없더라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이는 제갈량의 혼령이 병서와 보검을 지키고 있다고 하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현관 수수께끼의 가능한 풀이
삼협지역에는 현관들이 아주 많다. 이런 현관들은 어떤 것은 바위틈에 끼워넣은 것이고, 어떤 것은 벼랑에 나무기둥을 박아넣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은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자연으로 형성된 산굴에 넣은 것이다.
관은 널로 만든 것도 있고 쇠로 만든 것도 있으며, 그런 관들에는 많은 보물(순장품)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관들은 나무로 짠 관이라고 할지라도 방부(防腐)처리를 해서 아주 무거웠다.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사람들은 그 무거운 관을 어떻게 왜서 많은 자금과 인력을 들여가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벼랑에 올려놓았는가 의문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지금 거의 풀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현관' 풍습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관들은 과학적인 조사를 거쳐 3천 여년이나 된다는 것이 알려 졌다. 이런 현관 상장풍습은 명나라 때에 와서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년 전, 지금의 삼협지역은 원시림이 울창했었는데, 벼랑에는 등나무 덩쿨들이 빽빽히 걸려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바로 그것들을 타고 관을 벼랑에 안장했다는 것이 일부의 견해고, 또 일부에서는 관 양켠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아 밧줄에 매달아 벼랑 위에서 내려다 안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일부에서는 물이 붇는 시기를 이용해 벼랑에 있는 동굴이나 돌 틈에 안장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이 '현관'을 하게 된데는 장강상류 유역이 날이 덥고 습도가 높아 시체가 빨리 썩는데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체가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하여 거금을 들여가며 좀 건조하고 또 짐승이나 도굴자들이 건드리지 못하는 높은 벼랑에 안장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현관'은 높은 곳에 안장할 수록 효도가 더 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현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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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고향 산둥(산동)성 린이(臨沂)에 세워진 제갈량의 좌상. ©인터넷사진 |
그집 부모들이 그 말에 따라 정월 초하루부터 앞문을 닫아걸고 뒤문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99일이 되던 날, 그 어린애의 외삼촌이 오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이제 99일이나 지나가고 겨우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앞문을 열어도 괜찮겠지, 그리고 어쩌다 오는 자기의 남동생인데 어찌 뒤문으로 들어오게 하랴는 생각에 앞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앞산과 뒷산에서 콩볶는 소리가 터졌다. 한참 지나서 잠잠해진 다음에 나가보니, 산에 있던 대나무들이 다 갈라터졌는데, 그 속에는 모두 손가락만한 병사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때, 그 점쟁이나 와서 보더니 왜 하루를 더 참지 못했느냐 했다, 대나무속에 들어있는 작은 병사들은 앞으로 어린애를 보좌해 세상을 평정할 장수들인데 이제는 다 글러먹었다 어린애의 황제명은 끊어졌다고 했다.
이에 그 외삼촌이 안스러워 그 작은 병사들을 관에 담아 넣었다. 마침 이를 본 어린애는 홧김에 병사들을 넣은 관을 힘껏 걷어찼는데, 그 관이 바로 절벽에 걸려 '현관'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 뒤부터 현관풍습을 따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이 전설이든, 사실이든 '현관'은 확실히 권세있고 돈 있는 사람들만이 향수할 수 있는 사후의 '향락'이었다.
아직남은 수수께끼와 물속에 잠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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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병서와 보검이 숨겨있다는 병서보검협(峽)의 보검. 암석의 모양이 보검처럼 생겼다. ©인터넷사진 |
지금까지 정리한 것에 따르면 일부 '현관'에는 중국의 춘추전국시기(약 3천 년 전)의 문물들이 들어 있었으며, 그 중에는 귀중한 문물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현관들은 고고학자들의 고증을 거쳐야만 확실히 무엇인지, 어느시기의 문물들인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신비로운 현관의 유적지들은 이제 그 신비로운 전설만 남겨두고 삼협저수지의 물속에 영영 잠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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