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김성동의 현대사 아리랑_03

醉月 2010. 2. 16. 08:46

의열단 의백 김원봉
암살대상자 ‘칠가살’ 명단 작성하다

미소공동위원회 환영 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시대의창 제공>

“아무래도 여기를 떠야 할 것 같구려.”
“뜨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인민공화당 당직자들을 바라보던 김원봉 당수는 침통한 어조로 말하였다.
“여기서는… 왜놈들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오.”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북반부로?”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대륙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장택상 “김원봉 반드시 잡아오라”
1947년 4월 9일. 며칠 전 미군정이 군정포고령 위반을 하였다며 압류하였다가 풀어준 인민공화당 사무실이었다. 조국 광복의 큰 꿈을 안고 의열단을 창단하였던 22살 때부터 해방을 맞아 귀국한 48살까지 26년 동안 강도 일제와 끊임없이 싸우면서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창피였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끈덕지게 추적해 오는 왜경이었으나 한 번도 붙잡히지 않았던 김원봉 장군이다. 그런데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 지휘를 받는 친일 경찰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은 독립투사들이 다 그랬듯이 김원봉 또한 인간적 모욕과 함께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김원봉이 철창 속에 있는 동안 두 번째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철창에 있을 때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철근(鐵根)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통곡하였다. 민족자주연맹 대표였던 송남헌(宋南憲)이 쓴 ‘해방 3년사’에 그때 상황이 나온다.

“김원봉을 붙잡아 간 사람은 노덕술(盧德述)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한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항일결사 ‘의열단’ 칠가살(七可殺) 명단에 올라 있던 자였다.”
“김원봉이를 반드시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린 사람은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張澤相)이다. 송남헌 증언이다.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이 군자금을 모집하던 광복회원에게 불응하다 살해됐는데 장택상은 이 원한 때문에 ‘진보적 해외 지도자’ 김원봉을 수도청에 구금하였다는 설이 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였다. 두둑한 포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풀어 있던 노덕술은 “하이!” 하고 입에 밴 왜말을 뱉으며 차렷 자세를 취하였다. 하늘 같은 청장님이 꽥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 바보 같은 자야! 정중히 모셔오랬지 이렇게 불경스럽게 하라고 했나?”
그러면서 짐짓 송구스러워 어쩔줄 모르겠다는 듯 손수 묶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이승만정권 때 초대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하였으며 77살로 죽자 국민장을 치러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6월항쟁 때 ‘국본’에서 이른바 두 김씨를 불러 “존경하는 역사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한 사람은 “녹두장군”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창랑선생”이라고 하였다. 창랑(滄浪)은 장택상 아호였고 그 김씨는 그리고 창랑 장택상 비서로 정치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김원봉(金元鳳)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진보적 중인 집안으로 부농이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를 다녔고, 민족주의자 전홍표가 사재를 털어 세운 동화중학 2학년에 편입하였다. 전홍표를 위험인물로 점찍은 일제에 의해 동화중학이 폐쇄되자 소년 김원봉은 5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표충사에 들어가 한 1년 동안 ‘손자’ ‘오자’ 같은 병서를 읽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병 침략군을 무찌른 사명대사를 기려 세운 절이다. 저항정신이 유달리 강한 밀양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이 사명대사와 김종직(金宗直)이다. 김종직은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자리를 빼앗은 세조를 꾸짖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가 연산군한테 부관참시당한 강직한 선비였다. 김원봉의 투철한 무력항쟁이 나오게 되는 뒷그림이다.

고모부 황상규, 대한광복회 창립멤버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사건 기사. 사진은 21세 때의 김원봉. <시대의창 제공>

서울로 올라가 중앙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명산대천을 찾아 무전여행을 떠나니, 열일고여덟 살 때였다. 차분하게 학업에 몰두하기에는 어지러운 시대였다. 여기저기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무장력을 기르고자 중국대륙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무엇보다도 애국애족의 피가 뜨거웠던 소년이었다. 이 무렵 김원봉 소년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스승이며 고모부였던 황상규(黃尙奎, 1890~1931)가 창설자의 하나였던 대한광복회였다. 경술국치 직후 가장 규모가 컸던 대한광복회 총사령은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었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軍師將)으로 흥인지문 밖 20리까지 진격하였다가 서대문감옥 사형수 1호로 처형당한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한테 글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던 박상진은 경남 울산 사람이다. 1904년 양정의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판사시험에 입격한 것이 1910년.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부귀공명이 보장된 판사자리를 버린다. 1913년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되었으니, 중국에 가서 본 신해혁명에서 배운 바가 컸던 탓이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인민대중을 격동시키는 암살, 폭동 같은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100여 군데에 거점을 확보하여 무장독립군으로 하여금 일제히 일어나 일제를 타도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군자금 마련에 나서게 된다.

이름난 친일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내라는 서신을 보낸 다음 거부하는 친일부호는 처단하기로 하고 대구시내 친일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징수하려다 검거되어 6개월 징역을 살게 된다. 출옥한 그의 지시로 광복회원들이 한 거사가 1917년 11월 경북 칠곡의 대지주 장승원한테 군자금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자금을 내겠다는 약조를 어기고 왜경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군자금을 받으러 갔던 동지만 희생당하게 된 광복회에서 경북관찰사였던 장승원을 처단하게 되었고, 1918년 1월에는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게 된다. 친일면장 박용하를 처단한 것이 대한광복회임이 드러나면서 총사령 박상진이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게 되니, 1921년 38살 때였다. 대한광복회라는 이름의 암살단 이념과 인맥은 의열단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도주하였다가 나중에 발견되자 격전 끝에 왜경 여럿을 죽이고 자결한 김상옥(金相玉) 열사와 권준(權俊)이 그들이다.

1945년 12월 환국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임시정부 요인들.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김원봉이다. <시대의창 제공>

김원봉이 중국 천진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덕화학당에 들어간 것은 19살 때인 1916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는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독일로 갈 생각을 하고 덕화학당에 들어갔던 것이니, 독일에 협력하면 독립을 할 수 있으리라는 그때 선배 애국자들 정세관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어를 배우기 전 우선 중국어를 배우다가 1917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애국자들 희망과 다르게 중국이 일본 측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덕화학당은 폐쇄되고 김원봉은 1년여 고국에 머물게 되는데, 그때에 사귀게 되는 사람이 김두전(金枓全)과 이명건(李明鍵)이었다. 고모부인 황상규가 세 사람에게 호를 지어주며 의형제를 맺게 하였고, 세 사람은 해외로 나가 민족해방운동을 벌어기로 굳게 언약한다. 황상규는 세 소년에게 어떤 경우에도 조국산천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산과 물과 별을 속뜻으로 하는 호를 지어주었으니-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이 된다.

1918년 9월, 김약산, 김약수, 이여성 세 동지는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에 들어간다. 미국인이 경영하는 기독계 계통 학교로 여운형(呂運亨)이 영어과를 마친 것이 그 전해였다. 세 사람이 들어간 곳도 영어과였다. 1919년이 되자 여운형이 국내외 애국동지들을 상해로 불러모으고 있었다. 여운형이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언더우드 양아들로 영어에 능통하고 중국 국적을 갖고 있어 해외 여행에 걸림이 없는 김규식(金奎植)을 조선 대표로 보내어 조선독립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제국들이 조선 같은 약소민족을 위하여 저희들과 같은 처지인 일본제국주의와 싸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약산은 길림으로 간다. 김약수, 이여성과 만나 조국독립을 위한 둔전병(屯田兵) 양성을 상의하기 위한 것이다. 만주 서간도에서 군대양성계획이 그때 독립운동 단체들의 공통된 구상이었다.

‘정의’와 ‘맹렬’에서 ‘의열단’ 명명
봉천에서 세 사람이 만났을 때 고국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약수, 이여성은 “독립운동은 반드시 해외에 나와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내로 돌아가 인민 대중을 토대로 하여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국내로 돌아갔고, 약산은 “무장력을 감췄을 때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며 의군부(義軍府)가 있는 길림으로 갔다. 의군부 핵심은 대한광복회 회원이던 황상규, 김좌진, 손일민이었다.

3·1운동을 일으킨 인민대중의 무서운 힘을 보게 된 약산은 지금까지 품어왔던 생각을 바꾸게 된다. 군대를 길러서 세계 최강인 왜적과 대결한다는 것이 승산은 다음이고 우선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암살, 파괴투쟁이었다. 3·1운동에서 인민대중의 힘을 믿게 되었고, 그 인민대중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뇌관 구실을 하자는 것이었다. 작지만 강고한 결사체를 조직하여 적의 중심 인물들을 임살하고 적의 중심 기관들을 파괴함으로써 인민대중 속에 들어 있는 광포한 혁명역량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자는 것이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농군 반아무개 집에 약산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다. 모두 13명인데, 거지반 밀양, 대구 일원에서 3·1만세 시위를 목대잡다가 만주로 망명해온 사람들이었다.

약산, 윤세주,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鍾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외 1명.

황상규가 의백(義伯)으로 추대되었는데, ‘의열단(義烈團)’이라는 이름이었다. 공약 제1조에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서 ‘정의’의 ‘의’와 ‘맹렬’의 ‘열’을 따온 것이었다. 암살 대상으로 정한 것이 7가지 부류였으니, 이른바 칠가살(七可殺)로 다음과 같다. ①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군부 수뇌 ③대만 총독 ④매국적 ⑤친일파 거두 ⑥적의 밀정 ⑦반민족적 토호열신. 다음은 파괴 대상으로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③매일신보사 ④각 경찰서 ⑤기타 왜적 주요 기관이다.

 

북으로 간 약산, 국가검열상 되다
청장하 다리 입구에 세워진 기념비. <시대의창 제공>
만주 길림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본부를 북경으로 옮긴다. 1920년 늦봄에서 초여름쯤이다. 중국 정치 중심지인 북경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가 내세우는 외교독립노선에 반대하는 조선인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황상규 검거되자 약산이 ‘의백’ 맡아
의열단이 거행한 제1차 거사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일명 ‘밀양폭파사건’이다. 하지만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김수득, 한봉근, 윤세주 6명이 서울 인사동 어떤 중국 요릿집에 모여 있다가 독립운동자 검거로 악명을 떨치던 김태석(金泰錫) 경부와 그 부하들에게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20년 6월 16일 모두 16명이 검거된 ‘암살 파괴의 대음모 사건’ 주범으로 지목받은 곽재기는 8년 만기를 채웠고, 이성우가 세상 구경을 다시 하게 된 것은 1928년 3월 8일이다. 이 사건으로 황상규, 이성우 같은 선배들이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약산은 ‘의백(義伯)’이라는 이름의 단장을 맡게 된다.

제2차 거사를 책임 맡은 것은 부산 출산 박재혁(朴載赫)이었다. 의열단이 노린 것은 많은 동지들이 잡혀간 부산경찰서였다. 1920년 9월 14일, 예전책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서장실로 들어간 박재혁은 고서 속에 숨겨두었던 폭탄을 던졌다. 서장실이 박살나면서 하시모토(橋本) 서장은 중상을 입었고 박재혁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박재혁은 곡기를 끊기 아흐레 만에 숨을 거두었으니, “왜놈 관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는 생각에서였다.

박재혁 열사 거사가 있은 지 두 달 뒤인 1920년 11월, 이번에는 밀양경찰서가 폭탄세례를 받았다. 밀양 사람으로 동화학원을 다녔던 약산 친구 최수봉(崔壽鳳)에 의해서였다.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때 밀양에 들어온 의열단원을 만나 단에 들어간 최수봉은 폭탄을 던진 다음 추격을 피해 도망치다가 길이 막히자 단도로 제 목을 찔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21살 나이였다.

1921년 9월 12일 상오 10시 10분쯤, 일제식민통치의 총본산인 총독부 건물에서 폭탄이 터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용산 철도국 노동자 출신 김익상(金益相) 열사 거사였는데, 경성 일대에 계엄령에 준하는 포위망을 치고 이잡듯이 뒤졌으나 오리무중이었다. 누가 어떻게 삼엄한 총독부에 들어와 2층에 있는 회계과를 폭파시켰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1922년 3월 28일 하오 3시 반 상해 황포탄 부두는 대일본제국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환영하기 위한 사람들 물결로 백차일을 친 듯하였다. 사다리를 내려온 다나카가 줄지어 늘어선 환영객과 악수를 하며 걸어나오는 순간, 사격 명수인 오성륜(吳成崙) 단총이 불을 뿜었다. 총알은 그러나 마침 다나카 앞으로 나서는 서양 여자 가슴에 박혔고, 다나카는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엎드렸다. 제2선을 맡았던 김익상이 아수라장을 이룬 군중을 헤치고 다나카 뒤를 쫓으며 연달아 두 방을 쏘았으나 두 방 모두 다나카가 쓴 모자를 꿰뚫었을 뿐이었다. 재빨리 마차를 타고 도망치는 다나카를 제3선을 맡은 이종암이 쫓아가며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일본 영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오성륜은 유치장을 부수고 탈출하였고, 김익상은 총독부청사에 폭탄을 던졌던 것이 드러나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에서 다시 20년으로 감형받아 나온 1942년 이후는 자취를 모른다. 다음은 오성륜이 한 말이다.

“일본의 대신, 대장을 암살한다 해서 독립을 성취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암살로 말미암아 자연 사방의 정세가 독립을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암살수단을 채택하게 되었다.”

뛰어난 무장투쟁가였던 오성륜은 1941년 변절하여 왜경에 협력하였는데, 1947년 초 팔로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지어준 ‘조선혁명선언’을 의열단 근본철학으로 한 약산은 다시 암살, 파괴 계획에 들어간다. 최종덕, 이종암을 국내에 들여보내어 사회주의자 김한(金翰)과 암살, 파괴공작을 벌이려는데, 김한이 검거된다. 다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시현(金始顯)과 김시현이 포섭한 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옥(黃鈺)에게 폭탄과 조선혁명선언문과 단원들을 보낸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밀정 김아무개 밀고로 좌절되고 만다. 압수된 물품만 건물파괴용 폭탄 6개, 방화용 17개, 암살용 13개 등 36개, 뇌관 6개, 도화선 6개, 도화선과 연결되는 시계 6개, 권총 6자루, 실탄 155발, ‘조선혁명선언’ 361부,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협박문 548장이었다.

1923년 1월 5일, 김지섭(金趾燮)이 동경으로 갔다. 황궁 정문 앞에 있는 이중교 다리에 폭탄을 던져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황궁으로 들어가 왜왕을 죽이려고 이중교에 폭탄을 던지기는 하였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왜경한테 당한 살인적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몸이 약해져 한 달 보름 만에 옥사하고 말았다. 김지섭 열사의 동경 거사 뒤에도 여러 차례 의열단원에 의한 암살, 파괴 사건이 일어나지만, 동경 거사 실패와 함께 의열단 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독립운동단체 모아 민족혁명당 결성
의열단 투쟁만이 아니었으니, 상승이 있으면 하강이 있게 마련인 것이 운동법칙인 때문인가. 3·1운동과 함께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국내외 독립운동은 하강기로 접어들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왜군과 맞붙었던 만주 독립군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대첩(1920년 6월)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1920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자본주의 열강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비대발괄하는 외교 청원을 주된 노선으로 한 상해임정은 일제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제국주의 열강 외면과 내분으로 간판만 남았으며, 국내에 있는 부르주아계급이 벌이던 실력양성론은 민족해방을 포기하는 이른바 민족개량주의 운동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본받아 일어난 공산주의운동은 아직 그 세를 넓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암담한 상황에서 끈덕지게 이어졌던 의열단 투쟁은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린 조선 인민들에게 비쳐주는 한 점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김원봉 회견기. <시대의창 제공>

약산이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들어간 것은 1926년 1월이다. 신악, 이영준, 김종, 이인홍, 왕자량, 양검, 이병희 같은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한 투쟁노선 변경에 따른 것이니, ‘결사적인 항일군대’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광동코뮌이 끔찍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며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간 약산은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워 조국해방을 위한 인재들을 키워낸다. 그들을 국내로 들여보내어 노동자, 농민, 학생과 대중운동을 벌이게 하고, 장개석과 합작을 추진하였으니 장개석의 소극적 항일노선으로 인하여 좌절된 다음, 남경으로 가서 혁명간부학교를 세운다.

1935년 7월 4일, 독립운동 단체 9개를 묶어 민족혁명당을 만들고 총서기가 됐다. 1938년 10월 1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이 됐다. 물밀 듯 쳐들어 오는 왜병에 맞선 무한방위전에 참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군데를 옮겨다니며 항일 전투를 하던 조선의용대는 화북으로 가서 무정(武亭) 장군이 조직한 ‘조선의용군’이 된다. 중경에서 조선의용대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 힘쓰던 약산은 김구(金九)가 주도하는 임정에 들어가 군무부장을 맡게 되는데, 일제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내다본 것이었다.

약산이 해방을 맞아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 온 것은 1945년 12월 3일이다. 중경과 상해에서부터 임정 보수파들과 싸우며 임정개조론을 펴던 약산은 ‘임정은 조선을 대표하는 정권이 될 수 없다’고 보고 반동세력을 뺀 모든 민주주의 세력 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가하여 여운형, 허헌, 박헌영과 더불어 공동의장이 되었다. 박헌영이 월북하고 여운형이 좌우 양쪽으로부터 배척받고 있는 상황에서 허헌과 함께 민전을 이끌던 약산은 1947년 6월 1일 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확대개편한다. 약산이 귀국했을 때 했던 말이다.

약산 부친, 주변 냉대 속 굶어 죽어
1946년 여름 밀양의 표충사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 김원봉이 첫아들 중근을 안고 있다. <시대의창 제공>
“나는 작년 8·15 그날은 중경 남안에 있었다. 이 남안이란 곳은 중경성 밖 강 하나를 새에 둔 조그만 거리로 우리 조선민족혁명당원들과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나는 그날 오후 7시경 강을 건너 성안에 들어가니 중국인들은 항전승리 만세를 부르며 거리거리 인산인해를 이루어 폭죽을 터뜨리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비로소 일제가 투항한 것을 알고 곧 돌아와 우리 당원과 거주 동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동맹군의 승리로 조국이 해방된 전축회를 열고 기쁨과 감격 속에 철야로 피차의 감상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의 심경은 단순한 감격보다도 어떤 공허감과 참괴한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절치액완하며 일제를 우리의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하고 결국 연합군의 힘으로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 있어 일제가 투항전야까지 될 수 있는 대로 임정 영도 아래 무장혁명군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그것조차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의 힘을 입어 조국해방이 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감회였다.

그리고 만리이역에서 해방된 조국을 생각하며 하루 빨리 귀국하려도 그 자유조차 없었으니 기쁨의 감격도 순간이요 오히려 해방된 조국의 장래가 그때부터 걱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중경에 있는 임정이란 기구가 국내에 들어가 인민의 지지를 받는 혁명정권이 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임정국무위원회를 열어 간수내각(과도적)을 조직해 가지고 국내에 들어가 이 임정의 주권을 전국인민대표 량해하에 처리케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임정이 해외에 있어 국내 인민과 하등의 연계가 없고 또 국내 인민들은 적의 압박 밑에서 혁명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 해외에 있는 소수 독립운동가라도 비록 3천만을 대표하는 임정을 수립한다는 론거가 성립되었으나 동맹국의 힘으로 해방이 되고 보니 국내 인민은 연합국의 원조 밑에서 인민 자신의 정권을 건립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니 자연 임정이 과거에 조선독립을 령도할 만한 공적이 없으면서 조선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북으로 간 약산은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이 된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서 해임된 1958년 9월부터 그 이름은 사라져버린다.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는 설과, 감옥에서 자결하였다는 설, 그리고 명예로운 은퇴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6·25가 터지면서 밀양지역 보도연맹 가입자 400여 명이 학살당하는데, 약산 형제들인 춘봉, 작은봉, 구봉 등 4명이 한밤중에 들이닥친 군경차에 실려간 다음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80 넘은 약산 부친은 주변의 냉대 속에 굶어 죽었으며, 사촌들까지 잡혀가 오랫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하였다.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김원봉 장군 이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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