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란보라의 중국속으로_01

醉月 2010. 2. 20. 11:31

당나라에 떨친 지장보살,

신라왕자 김교각스님 지옥없는 세상을 소망한 지장보살, 중국인은 알지만 한국인들은 전혀몰라  

불교하면 자연 중국의 4대 불교성지를 떠올리게 된다. 4대 불교성지란 바로 중국의 아미산(峨眉山), 오대산(五臺山), 보타산(普陀山), 그리고 지장보살 도장(道場)으로 이름높은 불교성지 구화산(九華山)을 말한다.
 
중국 학계에서는 구화산은 중국 당나라 때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이백(이태백)과 지장보살 신라왕자 김교각(金喬覺., 서기 630~729)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공인하고 있다. 

▲ 김교각 스님이 송경했던 배경대(拜經臺).

중국 불교계에서는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을 지장보살로 공인하여 “김지장(金地藏)”으로 높이 모시고 있으며 지장보살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을 무한지혜의 문수보살, 소원성취의 보현보살, 무한 자비의 관세음보살과 함께 4대보살로 칭송하며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이 불법을 닦았던 구화산은 지장보살님이 불법을 수련했던 곳이라고 해서 “지장도장”으로 유명하다.

중국으로 불법구하러 가다

지장보살 김교각은 신라왕족출신으로 중국 당나라시기 당 고종 영회4년(唐高宗永徽四年, 서기 653년) 24세에 삭발 출가하여 지청수(地聽獸)라는 독각(獨角, 외뿔)의 하얀 개를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 불도를 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에 도착한 김교각스님은 처음 북방의 오대산을 찾았었다.

그러나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이 오대산에 오르자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지 오대산은 갑자기 기우뚱 하면서 한 자나 꺼져 들어갔다. 이에 오대산이 자기가 머무를 곳이 아님을 안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은 다시 사방을 운유하던 중 구화산에 이르러 구화산의 수려(秀麗)한 산수(山水)를 보고 매료되어 산에 초당을 짓고 도를 닦기 시작했다고 한다.
 
▲ 김교각스님의 육신보살상이 모셔진 육신보전(肉身寶殿)

가사(袈裟) 하나로 구화산을 시주받다. 
 
초당에서 수련했던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은 목 마르면 산간 벽계수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산나물과 백토(白土, 속칭 觀音土)로 굶주림을 달랬다. 차츰 김교각스님의 덕행이 원근에 전해짐에 따라 구화산 주변의 주민들이 김교각스님께 불법의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왔다. 

이때 구화산의 주인인 민공(閔公)이라는 사람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도 매일 김교각스님을 찾아 불법의 가르침을 받군 했다. 아들에게서 김교각스님이 득도한 고승이라는 말을 들은 민공은 어느 하루 김교각스님을 찾아갔다. 김교각스님이 산간벽계수로 목을 축이고 백토(白土, 일명 관음토, 먹을 수 있는 흙)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본 민공은 김교각스님을 집으로 모셨다.

식사가 끝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민공은 김교각스님이 불법을 폄으로 인근 백성들이 복을 누리게 한다고 하면서 김교각스님께 선물을 드리겠는데 무엇이 수요되느냐고 했다.

▲ 요령성 조양시(朝陽)시 봉황산의 연수사에 모셔진 높이 2.5미터의 한백옥으로 조각된 지장보살 좌상. 왼쪽이 민공, 오른쪽이 그의 아들 도명이다.     ©란보라

김교각스님은 몸에 걸쳤던 가사를 벗어들고 이 가사로 덮을 만한 땅만 주면 절을 짓고 불법을 더 널리 펴겠다고 했다. 이에 가사로 덮을 만한 땅이 크면 어느만큼 크랴고 생각한 민공은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런데 웬걸, 김교각스님이 가사를 하늘로 뿌리자 가사는 마치도 날개가 돋히기라도 한 듯이 훨훨 구화산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차츰 커지면서 나중에는 구화산을 몽땅 덮어버렸다.

이에 놀라 입만 벌리고 있던 민공은 김교각스님의 높은 덕행에 감탄하고나서 자기가 말한대로 한다고 하면서 구화산을 몽땅 김교각스님에게 시주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자기 가산을 전부 김교각스님에게 치성을 드린 민공도 아들과 함께 김교각스님을 찾아 불법을 공부했다. 그때로부터 구화산의 향불은 끊일 새가 없었으며, 날마다 김교각스님을 찾는 선남선녀들로 구화산으로 오르는 길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김교각 스님께 치성을 드리고 향을 올리는 선남선녀들이 하루에 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 김교각 지장보살님의 육신을 모신 탑. 그 거룩한 몸으로 구화산과 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 하다.

 

지옥이 있는 한 성불하지 않으리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은 생전에 “중생을 제도한 뒤에야 보살과를 이루고, 지옥이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으리(度盡衆生, 方證普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라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지장보살님의 거룩한 맹세(地藏大愿)”라고 한다.

구화산을 시주받은 김교각스님은 계속 구화산에서 불법을 폈다. 차츰 사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승려들도 많이 찾아들었으며, 구화산 주위의 사람들은 더구나 너도 나도 앞다투어 출가하여 구화산을 찾아 김교각스님에게서 불법의 가르침을 받았다.

김교각스님은 구화산에서 75년을 수련하여 99세에 열반했다. 김교각 스님이 열반에 드실적에 산이 울면서 허물어 졌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났으며, 김교각 스님의 시신을 함(函)에 넣어 모셨는데 3년 후에 열고 보니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고 모습이 불경에 있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같았으며 뼈마디마다에서는 범패(梵唄, 불교음악)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때에야 구화산의 중들은 김교각스님이 바로 지장보살의 화신임을 알게되어 높이 모시기 시작했으며 구화산은 급기야는 지장보살 도장으로 되었는데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구화산 전성기에는 사찰이 360여 곳, 승니가 5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 구화산에는 94곳의 사찰과 1만 여기의 부처, 그리고 2000여건의 문물과 700여명의 승니(僧尼)들이 있으며 해마다 지장보살 김교각스님의 탄신일인 음력 7월 30일을 계기로 구화산에서는 묘회(廟會)를 한달간 진행한다. 지금 구화산에서는 지장보살의 행적을 기리고저 높이 99미터의 지장보살 동상을 축조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중이다.

지장보살의 행적은 중국의 “고승전(高僧傳)”과 지장보살 동시대의 사람인 비관경(費冠卿)의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와 지방사서인 “구화산지(九華山志)”, “지주부지 (池州府志)” 등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중국의 지장왕 전문 사이트-구화연단(九華演壇). 전문 지장보살관련 경서와 사적, 그리고 설법, 이해 등을 올리는 사이트이다. 이런 사이트는 수도 없이 많다.    @ 구화연단 홈페이지
지금 인터넷에 접속하여 중국어 검색창에 들어가 "지장보살"을 검색하면 5만 8천여개의 창을 검색해낼 수 있지만 구글에 들어가 "지장보살"을 검색하면 6200개 창밖에 뜨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 9월에 중국학술교류차로 중국연변을 방문한 역사학 교수 몇분을 만났는데 혹시 그들을 통해 한국에서 김교각스님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고 김교각스님을 화두로 꺼냈더니 모두다 한결같이 모른다고 했다. 목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학식이 없는 사람도, 불교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도 지장보살 하면 조선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 중국 네트웍에서 유전되고 있는 그림으로보는 지장보살 중의 한 컫.     ©란보라

소학교도 나오지 못한, 50여세의 한 한족여인을 만난적 있다. 조선족으로 나를 안 그 여인은 "조선사람들은 참 좋아요. 지장보살이 보호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그러면서 조선사람들이 왜 총명하고 깨끗한지를 아느냐 했다. 왜 그런가 물으니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죽은 다음 영혼과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두 지장보살을 거치게 되는데 지장보살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가는 길과 사람이 태어날 길을 총관하는 왕인데, 염라대왕은 지장보살 아래서 일을 보는 법관격의 귀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장보살이 조선(신라)사람이라 조선사람들이 죽어 영혼이 지장보살에게 가서 등록을 하게 되면 지장보살은 조선사람들을 생각해서 그 죄보다 벌을 경하게 주고, 사람이 태어날 때면 지장보살에게 가서 미혼탕(迷魂湯, 정신을 흐리게 하는 탕)을 먹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은 전생에 천당에서 있었던 일을 말끔히 잊게 된다, 그러나 조선사람으로 태어날 영혼에게 지장보살은 같은 민족이라 생각해서 미혼탕을 적게 먹인다. 그래서 조선사람들은 다른 민족보다 총명하고 깨끗하다고 했다. 우습게 들으며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의 역사, 자기의 문화, 자기의 선조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문화, 자기의 역사, 자기의 선조들은 자기 스스로가 아끼고 지킬때만이 남아 있고, 살아 숨쉴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잊는 것은 누구도 남겨줄 수 없고, 또 남아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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