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공자에게 경영을 묻다_01

醉月 2010. 2. 17. 09:08

현실정치가로 실패한 孔子 학교 경영으로 성공한 이유
배병삼│영산대 교수 baebs@ysu.ac.kr

“공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신뢰(信)다. 신뢰란 평등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상호의존의 원칙이다. 공자의 논어를 봉건적 상하관계에 작용하는 멸사봉공이라는 뜻으로, 충·효를 가르친 책이라고 읽는 것은 도쿠가와 시대 봉건제에서 살았던 일본사람이 자기의 봉건사상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중에서
 
 

송나라 개국공신 조보(趙普)는 2대에 걸쳐 정무를 총괄하는 재상을 지냈다. 그는 본시 시골의 무지렁이인데다 젊은 시절 내내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배운 것이 없었다. 나라를 세우고 관리가 된 후 읽은 책이라고는 ‘논어(論語)’밖에 없다고 한다.

2대에 걸쳐 정권을 잡다보니 정적들이 생기게 마련. 그를 두고 ‘고작 논어 한 권 읽은 무식한 사람이 재상직을 너무 오래 누린다’는 입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미심쩍어하는 임금에게 조보는 이렇게 말했다.

“정녕 제겐 논어 한 권밖에 없습니다. 하나 논어 반 권으로는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는 데 도움을 드렸고, 나머지 반 권으로는 폐하의 정치가 태평을 이루는 데 쓸 참입니다.”

-나대경의 ‘학림옥로(鶴林玉露)’ 중에서

이른바 ‘반부 논어’라는 고사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창업에 논어 반 권, 수성에 나머지 반 권이라니 제국을 건설하고 경영하는 데 논어 한 권만으로도 넉넉하다는 주장이다. 조선은 이성계의 무력과 정도전의 유교적 경영 프로그램이 힘을 합쳐 만들어진 나라다. 유교 프로그램의 핵심 텍스트가 논어이니 조선조 500년은 논어라는 레일 위를 달려간 열차에 비유할 만하다.

그러니 다산 정약용이 “공자가 자로와 염유 등에게 늘 정치적 업무로서 인품을 논하였고, 안연이 도를 물었을 때도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대답하였으며 각자의 뜻을 말해보라고 할 때도 역시 정치를 행하는 것에서 대답을 구하였다. 이에 논어의 효용은 경세(經世)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던 주장을 수긍할 수 있다. 또 정약용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가 논어를 두고 우주제일서(宇宙第一書), 즉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책’이라고 찬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천하와 국가도 경영하는 터에 기업경영이 대수이랴. 일본의 기업경영 철학을 제시하여 ‘동양의 피터 드러커’로 추앙받는 시부사와 에이치가 ‘논어와 주판’이라는 기업경영론 속에서 “상인의 재능도 논어를 통해 충분히 배양할 수 있다. 언뜻 도덕적인 책과 상인의 재능은 관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상인의 재능’도 원래 도덕을 뿌리로 두고 있게 마련이다”고 주장한 것이 이해가 된다. 또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은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라고 술회했는데, 이 또한 대기업을 창업하고 성장시키는 데 논어가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고 내세울 증거가 된다.

 

논어의 그늘

한데 이병철의 언급을 따져 읽어보면 그동안 이 땅에 드리워졌던 ‘논어의 그늘’을 느낄 수 있다. “논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는, 멈칫거리는 말투 속에 오늘날까지 연면한 ‘논어’라는 단어에 엉킨 어두운 이미지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40대 이상 중년층은 논어라고 하면 ‘부모에 대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는 문투가 연상될 것이다. 당시 초중등학교 담벼락에는 어김없이 충효(忠孝)라는 큰 글자가 쓰여 있었고 아이들 일기장에조차 ‘충효일기장’이라고 박혀 있었다.

   

강요된 복종과 폭력과 억압 밑에서 젊은이들은 충효라는 구호에 ‘이를 갈았고’, 공자와 논어에 ‘침을 뱉었다.’ 그러니까 연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밑바탕에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삭혀온 공자와 논어에 대한 분노와 반발심이 폭발한 사회적 심리 기제가 깔려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또 우리는 논어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누가 고전을 두고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책”이라고 비아냥댔지만 막상 논어야말로 이런 손가락질에 맞춤하다. 잘못된 관습, 누추한 전통, 진보를 가로막는 수구꼴통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을 뿐, 아무도 그 속내를 알려들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하나 논어를 읽어보면 놀랍게도 이 속엔 그동안 분노했던 충효의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논어에는 ‘효도를 통해 부모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워서 군주에게 충성하라’는 식의 논조가 단 한 곳도 없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지적은 인용할 가치가 있다.

“공자의 유교에 대해 오로지 충효의 봉건도덕을 가르쳤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고전을 읽는 쪽의 편향이다. 공자의 논어에서 말하는 충(忠)은 반드시 그 대상을 군주로 한정하지 않는다. 효(孝)를 중요한 도덕으로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상식적인 효행일 뿐 몸과 생명을 희생하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충효, 즉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논리가 논어에는 없다는 증언이다.

이어지는 대목은 더 충격적이다. “공자의 논어를 봉건적인 상하관계에서 작용하는 멸사봉공이라는 뜻의 충·효를 가르친 책이라고 읽는 것은 오히려 도쿠가와 시대 봉건제에 살았던 일본 사람들이 자기의 봉건사상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곧 충·효라는 묶음말의 뿌리는 논어가 아니라 일본식 사무라이 전통이라는 사실을 일본학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분노했던 공자=충효라는 등식은 논어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남의 장단에 춤을 춘 우스꽝스러운 짓이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근 40년 겪는 중에 우리는 일본의 봉건적 관습이던 상명하복, 멸사봉공, 대의멸친 따위의 ‘군국주의적’ 언어들을 무비판적으로 채용해 마치 조선시대 내내 이 땅의 삶이 그러했던 양 오해했던 것이다. 두 나라가 같이 한자를 쓰는 통에 그리고 그들의 지배를 받는 통에, 일본식 관습이 마치 우리 전통인 양 ‘사이비 상식’으로 행세했다는 말이다. 요컨대 충효라는 언어로 익숙한 ‘부모에 효도=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항등식은 결단코 공자의 논어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다!

 

경영서로서의 논어

그동안 드리워졌던 오해의 그늘을 걷어내고 새로이 논어를 읽는 길은 본래 경세서로서의 맥락을 계승하는 독법이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로 당겨서 해석하자면 논어 읽기에 정치· 경제학적이면서 또 경영적 차원의 접근이 요구된다는 것. (물론 여기 ‘경영’이란 기업경영만을 이르지 않는다. 개인의 삶과 가족관계, 공공단체 그리고 국가와 국제관계 등 인간관계 전반을 아우르는 말이다.)

서점에 가보면 서가를 가장 넓게 차지하는 것이 경영·경제·처세술 관련 책들이다. 또 이 책 대부분은 미국을 위시한 서양의 이론과 사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른바 ‘글로벌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기업인이나 경영자들에겐 미국식 경영지침과 경제이론은 중요한 학습대상일 것이다. 하나 이런 추세가 지나치다보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게도 된다.

예컨대 최근 경영 분야 베스트셀러인 코비(S. Covey)의 ‘신뢰의 속도’라는 책을 보자. 이 책의 요지는 “신뢰가 높아지면 속도는 빨라지고 비용은 내려간다”는 것이다. 거래 상대방을 믿지 못하니 불신을 방지하기 위한 거래비용이 증가하고, 이는 업무성취의 속도를 떨어뜨리므로 결국 ‘신뢰가 높아지면 속도가 빨라지고 비용은 내려간다’는 것. 한데 이건 너무나 평범한 상식이 아닌가. 더욱이 동양사상의 눈으로 보자면 이런 주장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서두에 인용문의 첫마디에서 명료하게 드러나듯,

 “공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신뢰(信)”로 압축되기 때문이다.

코비는 이 책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불신이 쌓여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신뢰도 받기 어렵다. 이처럼 개인적인 불성실성이 다른 사람의 의심을 초래하는 경우는 매우 많다”고 말한다.

한데 공자 제자 자하(子夏)도 이렇게 말한다.

   

“관리자는 신뢰를 얻은 다음에 아랫사람을 부려야 한다. 만일 신뢰를 얻지 못한 채로 사람을 부리면 자기를 괴롭힌다고 의심을 받는다. 또 신임을 얻은 다음 윗사람에게 충고해야 한다. 만일 신임을 얻지 못한 채로 바른 소리를 하면 윗사람은 자기를 비판하는 줄 의심을 산다.” (논어, 19:10)

다르지 않은 말이다. 하긴 진리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된다는 점에서 진리일 것이다. 어쩌면 코비는, 아니 최신의 경영이론서들은 이런 보편적 진리를 오늘날 환경에 맞춰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러니 책에는 죄가 없다. 하면 진짜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땅의 오랜 삶의 지혜에는 시큰둥하면서 저쪽의 현란한(그러나 진부한) 말에는 귀를 쫑긋 세우는 행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식과 이론을 이른바 서양의 ‘경영 구루(guru·현자)’에게 기대다보면 다음과 같은 행태도 빚어지게 되는데, 이럴 정도면 우스꽝스러움은 바보짓으로 변한다.

군(軍) 리더십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의 에드가 F. 퍼이어 박사가 국방부 청사에서 현역 장성을 포함한 국방부 및 합동참모본부 직원 500여 명을 대상으로 리더십 강연을 했다. 퍼이어 박사는 이날 ‘미래지향적 군 조직에 요구되는 리더의 인격과 역량’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훌륭한 리더의 우선 조건으로 인격수양을 꼽았다. “부하에 대한 포용력과 애타심(愛他心) 등을 바탕으로 한 인격수양이 훌륭한 리더가 되는 길입니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 150명의 미군 장성들을 직접 인터뷰한 결과, 유능한 리더가 되는 길은 인격을 쌓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강조했다. (2005년 6월, 연합통신)

이 기사를 읽는 중에 픽하고 웃음이 터진 것은 ‘훌륭한 리더의 우선 조건으로 인격수양을 꼽았다’는 대목에서다. 개인의 인격수양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하여 유교적 인간교육의 기본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화가 난 까닭은 공공부처에서 이런 강연을 듣기 위해서 들인 헛된 비용 때문이다.

조선이 망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1910년이었으니 올해로 꼭 100년이 흘렀다. 이제는 우리도 차분하고 진지하게 공자와 논어의 의미를 헤아려 따져볼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 지난 100년 동안 서양의 위세에 주눅들었던 자세에서 벗어나 이 땅에 연면한 지혜들을 헤아릴 정도의 물질적· 정신적· 역사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공자의 학교

우리는 공자를 도덕적 교설가, 의례주의자로 알고 있지만 실은 실무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초상화에서 연상하는, 책상머리에서 관념적으로 세상일을 꿈꾼 창백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공자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그 속에서 이치를 궁구하고 또 배우며 평생을 산‘실학자’였다. 이에 그는 스스로를 두고 호학(好學)이라,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던 터였다.

배움에 목말랐던 사람이라야 또 남에게 베풀 줄 아는 법. 공자 스스로 “배움에 싫증내지 않고, 남을 가르칠 적에 게으르지 않은 미덕이 어찌 내게 있으리오!”(논어, 7:2)라고 겸양했지만 그는 자기가 아는 것을 누구에게든 베풀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동양사회에서 학교를 최초로 세운 사람이면서 그 학교의 운영자이기도 하였다.

공자학교의 특징은 열린 학교라는 점에 있었다. 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또 빈부나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정녕 이건 놀라운 사실이다. 오늘날조차 인종이나 민족 간에, 그리고 계급 간에 갈등이 엄존한 사회가 도처에 존재하는데 2500년 전에 이른바 ‘개방 대학(open university)’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스로 ‘속수’ 이상의 예를 차리는 자에게 가르침을 베풀지 않은 적이 없었노라.” (논어, 7:7)

여기 속수(束脩)란 ‘말린 고기 한 묶음’을 뜻한다. 오늘날 병문안할 때 들고 가는 주스 한 상자가 이에 근사하다. 당시 선비들의 선물로는 꿩고기를 주로 썼다는데 ‘속수’는 그보다 못한 최하의 예물이다. 공자는 “시장에서 파는 말린 고기는 먹지 않았다”(논어, 10:8)라고도 하였으니 그에게 ‘속수’는 더욱 하찮은 예물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곧 학생이 최소한의 예물로라도 예를 갖춰 배우려는 의지를 보이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 ‘공자의 학교’였다는 것.

그랬기에 꿈을 가진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공자학교로 몰려들었던 것 같다. 이념적으로는 극좌에서 극우까지, 혹은 직장을 얻기 위해 입학한 젊은이로부터 국가를 혁신하려는 포부를 가진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욕망이 들끓던 학교였다. 직업학교로서 공자학교의 특성은 공자 스스로 “삼년을 나에게 배우고서 직장(穀)을 구하려들지 않는 녀석을 찾기 어렵더구나!”(논어, 8:12)라던 개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탄식은 공자학교를 취업의 계기로 삼으려 했던 학생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논어 속에는 노(魯)나라 권력자들이 공자학교를 방문해서 스카우트할 요량으로 제자들의 품평을 묻는 대목이 여럿 있다. 그리고 제자 자로(子路)와 염유(·#53529;有)는 집권자의 조정에 취업하기도 했던 것이다.

반면에 또 어떤 제자는 공자가 직장을 알선해주었음에도 저 자신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고백함으로써 스승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공자가 칠조개(漆雕開)에게 벼슬자리를 알선해주었다.

칠조개, 답했다. “저는 아직 그 자리를 맡을 만한 깜냥이 되지 못합니다.”

공자, 흔연히 기뻐하였다.(논어, 5:5)

요즘같이 직장이 흔전만전한 시대에도 지도교수가 직장을 알선해주면 학생들은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른다. 옛날 춘추시대라면 직장도 변변찮았을 뿐만 아니라 그 숫자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혹 칠조개는 가난했던지 모른다. 이에 스승이 나서서 직장을 알선해주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당사자가 기뻐하기는커녕 ‘저는 아직 그런 자리를 맡을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니, 스승의 놀라움이 어땠을까? 곧 칠조개라는 제자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성찰하는 눈’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고 또 외부의 편안한 자리에 목매는 소인배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공자는 성실한 교사였다. 학교를 졸업한 제자에 대해서도 끝까지 가르침을 베푸는 다음 장면을 보자.

유비(孺悲)가 공자를 뵙고자 찾아왔다. 공자는 아프다며 만나길 거절했다.

집사가 말을 전하러 문을 나서자, 공자는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 불렀다. 유비로 하여금 듣게 하고자 함이었다. (논어, 17:20)

‘예기’에 따르면 유비는 한때 공자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던 제자였다. 그런데 훗날 스승과 그 삶의 길을 달리했다고 전한다. 아마 권력자의 주구가 되어 인민들을 해치는 정책을 집행했으리라. 이런 제자가 옛 스승을 찾아왔다. 그런데 공자는 ‘아프다’며 만나길 거절한다. 한데 그 말을 전할 집사가 문을 나서자마자 거문고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비로 하여금 들으라고 한 행동이다.

즉 ‘아프다’라고 한 것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실은 마음이 아프다는 뜻이 깃들어 있는 연주다. 바로 그대의 행실을 돌이켜보라는 가르침인 셈이다. 맹자(孟子)는 이를 두고, “묵묵히 답변하지 않는 것도 가르침의 일종이라”(맹자, 6b:16)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끝까지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푼 교사로서의 자의식을 놓치지 않은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경영자로서의 공자

중국 어언대학 앞.

공자학교의 규모를 두고 “30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전하는 말이 있으나 이 숫자는 교사로서의 위용을 수식하기 위한 훗날의 과장으로 보인다. 다만 맹자에 따르면 공자에게 깊은 감화를 받은 제자의 숫자를 70명이라고 하였고 또 공자 본인도 노경에 특출한 제자들을 회상하면서 열 명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으니, 제법 큰 규모의 학교를 운영하였고 또 천하의 다재다능한 영재들이 몰려들었던 것임에는 분명하다. 학교 경영자로서 공자의 면모는 다음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공자가 제자인 자화(子華)를 멀리 제나라로 심부름을 보냈다.

학교 회계를 담당하던 염유(·#53529;有)가 그의 집에 수고비를 보낼 것을 청하였다.

공자, 말씀하시다. “두어 되쯤 보내려무나.”

염유가 작다 싶어 더 줄 것을 청하였다. 공자, 말씀하시다. “두어 말 보내거라.”

그것도 적다 싶어 염유는 한 가마니를 보냈다.

공자가 말했다. “제나라로 떠나는 자화를 보니까 살진 말을 타고, 고급 가죽옷을 입었더구나. 군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쓰지,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지 않는 법이니라.”(논어, 6:3장. 전반부)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에서 제(齊)나라까지는 먼 거리다. 그런데 공자는 부담이 될 만한 일을 제자(자화)에게 시켜놓고 그 대가를 치르려고 하지 않는다. 공자학교의 재정을 맡고 있던 제자 염유가 그 점을 지적하여 자화의 집에 수고비를 보낼 것을 청했던 것이다. 한데 공자는 몹시 귀찮은 듯 응대한다. 애초부터 수고비를 내줄 의향이 없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자 스승의 체면을 생각한 염유는 자화네 집에 넉넉하게 비용을 치르고 말았다. 염유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제자라도 일을 시켰으면 이에 대해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공자는 염유의 처사를 꾸짖는다. 겉으로 드러난 뜻은 자화가 부자이기 때문에 수고비를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자의 속뜻을 헤아리자면, 사제지간에 스승의 사사로운 부탁을 제자로서 들어줄 수 있는 일이고 또 머나먼 길을 보내는 심부름이기에 특별히 부유한 제자(자화)를 택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숨어있는 듯하다. (곧 공자가 “제나라로 떠나는 자화를 보니까 살진 말을 타고, 고급 가죽옷을 입었더구나”라는 말이 그러하다.)

즉 공자는 살림살이에 여유가 있는 제자를 골라서 개인적 사무를 맡긴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우에 심부름값을 치러버리면, 제자(자화)의 ‘스승을 위한 행동’이 결국 ‘돈을 위한 행동’으로 추락하고 만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공자가 일부러 자화를 택하여 심부름 보낸 뜻이 변질되어버린다. 또 기껍게 스승의 뜻을 받아서 행한 자화의 행동은, 보상으로 말미암아 그 기쁨이 망가져버린다. 요컨대 공자는 여러 제자 가운데 경제력과 성실성 등을 두루 감안하여 자화를 골라 심부름을 보냈고, 자화는 또 여러 제자 중에서 뽑혀 스승의 심부름을 하게 된 데 대해 기꺼워하며 길을 떠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특별히 나를 지목하여 심부름을 시키면 자랑스러워 얼마나 기뻤던지를 연상하면 자화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읽자면 우리는 공(公)과 사(私)를 분간하여 일을 처리하는 공자의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공자가 재물을 아까워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의심의 눈길을 논어 편찬자들도 느꼈던 듯, 위의 인용문에 이어 다음 예화를 싣고 있다.

공자가 가난한 제자, 원사(原思)를 집사로 삼았다.

월급을 주자, 원사가 사양했다.

공자, 말씀하시다. “사양하지 말거라. 네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한이 있더라도.” (논어, 6:3. 후반부)

   

원사는 따로 원헌(原憲)이라고도 불렸는데 제자들 가운데 가장 궁핍한 처지였다. ‘장자’에도 원사는 “쌀겨를 끓여 먹을 만큼 가난한” 인물로 나온다. 이런 제자를 학교 관리자로 삼았다면 스승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터다. 허기를 조금이라도 면하게 해주려는 것. 물론 공자가 가난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일을 맡길 사람이 아니다. 또 원사 역시 성격이 칼칼하기로 이름난 인물이니 가난하기는 하지만 경위 없이 아무것이나 덥석 무는 소인배는 아니었던 터. 역시나 그는 스승의 경제적 배려에도 불구하고 관리직에 따른 월급을 사양했다. (곧 “월급을 주자, 원사가 사양했다.”)

 

공자 학교의 채용방식

원사의 생각으론 사제지간에 스승을 위해 자발적으로 한 일을 두고 돈을 받는 것은 치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마치 앞서 스승을 위해 제나라로 심부름을 한 자화가 수고비를 받고서 느꼈을 치욕처럼. 하지만 공자는 이번 것은 경위가 다르다는 생각이다. 앞서 자화의 경우가 사사로운 사제간의 부탁이었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돈이 개입되어 불쾌하게 되는 것이라면 이번 원사의 건은 공식적인 채용이어서 마땅히 업무수행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사(피고용자)가 그 월급이 싫어서 자기 이웃에게 주고 말망정, 고용자인 공자로서는 또 마땅히 월급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사양하지 말거라. 네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보면 공자가 학교를 운영하는 가운데 공과 사를 구분하여 제자들에게 일을 맡기고 또 업무의 성격에 따라 합당한 사람을 선택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현명한 경영자로서 공자의 면모를 이런 예화들 속에서 흠뻑 느낄 수 있다. 그랬기에 교사로서 공자의 면모는 2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이리라.

한편 두 인용문을 통해 공자가 인간세계를 둘로 나눠서 인식하고 있었음도 추출할 수 있다. 하나는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영역이요 다른 하나는 재물이 개입하면 안 되는 시장 바깥의 사회다. 자화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이 시장 바깥에 속한다면, 원사를 채용해 월급을 준 것은 시장 속의 일이다. 공자는 시장 바깥의 인간관계에 재물이 개입하게 되면 그 세계가 망가져버릴 것을 염려했다. 그러므로 염유를 두고, “군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쓰지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지 않는 법”이라고 꾸짖은 것은 재화가 개입되지 말아야 할 세계를 돈으로 사버리면 순수한 인간관계가 황폐화되고 만다는 공자의 경고로 읽을 수 있다.

裵 柄 三
1959년 출생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과(정치학 박사)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현)
저서:‘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등

 

역시나 염유는 뒷날 권력자의 주구가 되어 세금을 크게 올렸다가 스승으로부터 지탄을 받는데 이점에서 공자는 이익-손실이라는 잣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공리주의 일변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글로벌 자본주의’가 범람하는 오늘날 세계에 대해 공자는 크게 염려하리라고 예단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공자는 현실정치가로서는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교육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하면 공자가 학교를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새로운 세계의 비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대의 쟁쟁한 젊은이들을 감동시킴으로써 그의 어록을 남기게 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다음부터는 이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꾸로 보는 도덕경   (0) 2010.02.25
란보라의 중국속으로_01  (0) 2010.02.20
김성동의 현대사 아리랑_03  (0) 2010.02.16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12  (0) 2010.02.16
간도오딧세이_02  (0) 2010.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