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고대문화 되살린 ‘중국의 피카소’
쿠처는 석굴로 이름난 고장이다. 부근에만 10여곳의 석굴이 널려있어 신장 지역 전체 석굴의 5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그중 키질 석굴은 단연 으뜸이며, 둔황·룽먼·윈강 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굴을 만든 시기가 가장 오래고, 내용물에도 동서 교류적 요소가 많다는 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뿐만 아니라, 1만여 ㎡에 달하는 벽화의 예술적 가치는 둔황 석굴과 비견된다거나 심지어 더욱 높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키질 석굴이 더욱 뜻깊게 다가오는 것은 그 실체와 진가가 한겨레붙이의 노력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흥분된 심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쿠처와 바이청(拜城)을 잇는 ‘고배로(庫拜路)’를 따라 서쪽으로 67km 떨어진 수게트(蘇格特) 계곡까지 한 시간쯤 달려갔다. 깊숙한 계곡 오른쪽엔 무자르트강(木札爾特江)이 황량한 츠르타크산(却勒塔格山)을 끼고 아득히 흘러가고, 왼쪽으론 깎아지른 듯한 밍우타그산(明屋達格山) 절벽이 2km나 쭉 늘어섰다. 절벽에 벌집처럼 뚫린 것이 유명한 키질 석굴이다.
3년간 옥고 뒤 선생은 평생 소원인 석굴 벽화의 복원작업에 착수한다
키질 석굴과 조선족 화가 한락연
이 석굴군은 3~9세기 약 600년 동안 여러 왕조시대 다양한 내용으로 조성되었다. 벽화는 부처의 본생과 본행, 교화와 공양을 주제로 한 내용이 핵심이다. 벽화 기법에서는 어느 석굴벽화보다도 서역기법을 많이 받아들이고, 중원기법을 가미해 특유의 쿠처풍 도상을 그려냈다. 그러나 소승 신앙으로부터 시작된 불교가 7~8세기에 이르러 대승에 편중되자 벽화 미술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든다.
발굴된 236개 포함 300개 넘는 석굴
발길을 가장 오랫동안 멎게 한 곳은 10동이다. 원래 선방으로 벽화는 없었다. 약 2. 높이의 주실은 방형이고 창문과 벽난로터가 있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제자(題字)가 길이 3.3, 폭 1.9의 북면 상반부에 세로로 새겨졌다. 글자의 크기는 평균 8~10mm이며 새김 깊이는 0.m 정도다. 그리고 주실 한가운데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갸름한 나무받침대에 놓여있었다. 제자와 사진의 주인공은 중국 조선족 출신의 화가 한락연(韓樂然)이다. 글자는 조수였던 천탠(陳天)이 새겼다고 한다.
하얀 가루의 맛을 보니 실제로 짠맛이 났다.
제자의 원문은 이렇다. “ 본인은 독일의 르콕이 지은 신장문화보고(寶庫)기와 영국의 스타인이 지은 서역고고기를 읽고나서 신장이 고대 예술품을 대단히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곧 신장에 올 생각이 났다. 1946년 6월 5일 단신으로 와서 벽화를 보니 실로 아름다운 옥이 눈앞에 가득한 것처럼 훌륭한 것이 너무 많았다. 모두 우리나라 여러 동굴들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고상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벽면은 외국 고고대(考古隊)에 의해 벗겨졌는데, 문화사에서 일대 손실이다. 본인은 이곳에서 유화 몇 폭을 모사하려고 14일간 머물면서 준비를 충실히 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듬해 4월 19일 조우보우치(趙寶琦), 천탠, 판궈챵(樊國强), 쑨비둥(孫必棟)을 데리고 두 번째로 왔다. 우선 번호를 매겼는데, 정부(正附) 번호(‘韓氏編號’ㅡ필자)를 매긴 동은 모두 75좌다. 그리고 나서 개별적으로 모사·연구·기록·촬영·발굴을 진행하여 6월 19일 잠정적으로 한 단락을 지었다. 고대문화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참관하는 제위는 이곳을 특별히 애호하고 잘 보관해 주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파리 유학·반파시즘·항일운동·비행기 추락사
이 제자에서 키질 석굴에 대한 화가의 각별한 애착과 투철한 선구자적 역사문화의식, 그리고 외래 도굴꾼들에 대한 의분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1929년 선생은 좀더 큰 포부를 안고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역시 식당 잡부로, 신문사 촬영기자로 일하면서 파리의 국립루브르예술학원에 입학해 천부적 화재(畵才)를 다듬질했다. 유학기간 피카소처럼 거리화가란 명성을 얻기도 했고, 유럽나라들을 주유하면서 국제 반파시즘 운동에도 가담했다. 1937년 유럽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우한과 충칭, 시안 등지를 전전하면서 좀더 성숙한 모습으로 작품활동과 항일구국투쟁에 헌신한다. 그러던 중 40년 시안에서 국민당 당국에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른다. 옥중에서도 ‘다리 위에서’를 비롯한 수채화 40여점을 그린다. 출옥 후 란저우로 자리를 옮긴 선생은 평생 소원이던 석굴벽화의 복원작업에 착수한다. 둔황 천불동에 두 번이나 가서 <뇌신(雷神)>같은 모사 수작을 남겼으며, <키질 벽화와 둔황 벽화의 관계>라는 학술논문까지 발표한다. 그리고 46년과 47년 두 차례에 걸쳐 키질 석굴을 탐방해 불후의 공적을 세운다. 키질 가는 길에 투르판에 들러 고창성과 아스타나 등 유적에서 미라를 비롯한 유물 여러 점도 발굴해 학계를 놀래게 했다. 47년 7월 30일 국민당 257호 군용기를 타고 우루무치를 이륙해 란저우를 향하다가 가욕관 상공에서 ‘기후 악화’로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것이 선생의 마지막 길에 관한 보도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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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모사와 미라 발굴 등 불후의 공적
선생은 중국 내서만 2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65점의 유작(키질 석굴 모사품은 29점)을 남겼다. 그는 서구의 사실주의·인상주의 화풍과 동양 전통의 필묵(筆墨)화풍을 조화시켜 화면의 층차가 분명하고, 입체감이 넘치며, 색조가 묵직하면서도 명쾌하고, 지역특색이 선명한 풍속화, 풍경화, 초상화, 벽화의 모사화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려 ‘유작마다 국보’(‘件件遺作是國寶’)라는 절찬을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1993년과 2005년 두 차례 유작전시회가 열렸으며, 올 8월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기도 했다. 한 선생은 ‘중국의 피카소’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역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의 귀감이었다.
관능적 자태·몽환적 색·빛의 조화…서역 중원 기법 섞인 특유의 화풍
키질 석굴벽화의 특징
둔황 벽화가 세밀한 선묘로 중국인 얼굴 등을 묘사하는 중화 스타일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키질은 이란·인도 미술의 역동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서역 양식의 전형이다. 인도 간다라와 아프간 바미얀을 거쳐 들어온 그리스·로마, 인도, 이란풍 묘사법과 색채감각이 쿠처의 지역성과 만나 새로운 벽화 양식을 만든 것이다. 중국 본토나 둔황에서 보기 힘든 관능적인 여인상, 푸른빛 화불 따위 도상들은 명백히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키질 벽화들은 소재 또한 전생도, 본생도, 인연도 등 석가의 생전, 전생 설화를 담은 것들이 많다. 부처가 전생 자기 몸의 일부나 전부를 짐승의 먹이로 내어놓는 희생적 메시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곧 지극한 인내가 요구되는 사막지역 대상들의 삶을 다르게 암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전생도, 본생도의 주요 장면 등을 석실 천정의 마름모꼴 윤곽 안에 넣고 표현한 것은 키질에만 주로 나타나는 표현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 장인들이 유난히 빛의 표현에 민감했다는 점이다. 라피스라줄리(청금석)라는 몽환적인 푸른색 안료를 즐겨 쓰고, 중국과는 다른 붉은선의 명암 표현을 쓰면서 빛과의 조화를 의식한 것은 불, 빛을 중시한 이란 문화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이런 특징은 쿠처가 서역북도의 중요한 길목이자 거점인 까닭에 인도, 이란계 출신 사람들의 왕래와 정착이 잦았던 데서 비롯한다. 7세기 중엽 이슬람을 피해 다수의 이란 사산왕조 귀족들이 쿠처로 망명했으며, 이슬랍 압바스 왕조는 이후 이곳을 직접 침공한 적도 있었다.
지금 키질 석굴에서는 벽화 본래의 환상적 이미지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 투루판과 마찬가지로 키질의 걸작들은 20세기 초 독일의 르콕과 일본 오타니 탐험대 등이 떼어가 버렸다. 예배·공양자 상, 마하가섭의 두상, 여신과 주악천인상 등의 벽화 걸작 상당수는 독일 국립 베를린 박물관, 일본 도쿄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오타니가 키질 석굴에서 절취해온 7세기께 벽화 본생도 단편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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