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 간도정책 없었다
8월 25일 ‘간도협약체결 100년의 재조명’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1969년 8월 정부에서 제작한 간도 관련 보고서가 공개됐다. |
간도협약 체결 100년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8월2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학술대회의 주제는 역대 정부의 대간도정책 분석이다. 세 명의 간도전문 학자가 나섰다. 이승만·박정희 정부의 대간도정책은 대구대 최장근 교수,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의 대간도정책은 이일걸 한국간도학회장,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의 대간도정책은 김우준 연세대 교수가 각각 발표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정부의 대간도정책은 사실상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대간도 정책의 사례로 밝힌 것은 한두 개 정도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의 예산 지원으로 국회 도서관에서 일본 외무성 간도 관련 자료를 발췌, 번역한 것이 대표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이 일자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 국회 국정감사의 답변에서 “간도협약은 법리적으로 무효”라고 밝힌 것이 전부다.
발표자에 이어 토론자들도 마찬가지로 정부의 대간도정책이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본격적이라고 할 만한 간도정책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고 평가했다. 홍면기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우리 정부가 과연 국민정서와 주변국의 이익과 관련해 간도정책을 고민해본 일이 있는지, 소위 정책이 있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계였나, 과오였나
이날 토론회에서는 역대 정부에서 대간도정책이 없었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지만 이 이유가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과오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한계를 주장하는 측은 이승만 정부 등 역대 정부가 한국전쟁·남북분단 등 한반도 주변 상황으로 인해 간도정책을 마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반면에 과오를 주장하는 측은 간도정책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가 아니라 과오라고 비판했다.
이날 토론회에 대해 장세윤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간도에 대한 연구에서 정부의 대간도정책에 대한 검토를 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상당히 신선한 주제”라고 평가했다. 발표자로 나선 대구대 최장근 교수는 “정책이 있어서 살펴본 것이 아니라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과 자책”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는 1960년대 말 정부에서 준비한 간도 관련 대외비 문서가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국토통일원(통일부의 전신)에서 근무한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외교사 전공· 간도연구가)은 “1969년 국토통일원을 만들면서 당시 신태환 초대장관이 북한 수복 후 540여 가지 대책을 마련하면서 영토 문제로 간도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노 전 총장은 이 과정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자료는 1969년 8월에 제작돼 50부 한정본으로 인쇄됐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우리는 이상에서 논증한 바대로 백두산을 중국에 빼앗길 수 없는 동시에 간도도 다시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끝맺었다. 이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직전에 신 장관이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역사 속의 자료로만 남게 됐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는 “역대 정부의 대간도정책은 엄격한 의미로 보아서는 없었다”면서도 “그러나 이 자료를 볼 때 정부에서 간헐적으로 간도에 대한 자료는 수집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간도를 얻기 위해 ‘5개’를 내준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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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약이 체결되기 전 대한제국의 지도에는 두만강 건너 북간도가 한국의 땅으로 표시돼 있다. |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 사이에 간도협약이 맺어지는데 같은 날, 만주 5안건 협약을 청·일본 간에 체결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간도협약으로 철도 부설권, 탄광 개발권 같은 것들이 거론되는 데 이런 내용들은 간도협약상이 아니라 만주 5안건 협약에서 확인되고 있다.
간도협약과 만주5안건 협약 동시 진행
내용은 물론 전체적으로 틀린 것이 없다. 다만 간도협약과 만주5안건 협약을 별개의 조약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간도협약과 만주 5안건 협약은 내용이 다를 뿐 결국 같은 날 타결될 수밖에 없었던 조약이었다. 만주 5안건 협약의 내용이 충족되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간도 땅을 양보하는 간도협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75년 일본 외무성 자료를 발췌해 실은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의 해제에서 당시 신기석 국회의원(외교사학자·간도연구가)은 1909년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해 놓았다.
일본은 일·로전쟁후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관동주의 조차지와 중동철도의 남부지선을 양수하기로 하였으나 이에는 중국의 동의가 필요하여 1905년 12월에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해결하였다. 그러나 군용철도로 부설한 안봉선의 개수문제와 소위 동삼성6안이라고 하여 중국과의 사이에 해결해야할 만주관계의 여러가지 현안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간도문제는 영유권에 관한 문제뿐 아니라 두만강북 일대의 한·청 양국인의 처우문제가 또한 중요한 내용이었다. 이러한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일·청 양정부간의 외교교섭은 1905년 2월부터 북경에서 시작되었다. 북경에서의 외교교섭의 경위는 본자료에는 보이지 않으나 알려진 바로는 2월 10일의 제1차회의에서 청국전권 양돈언(梁敦彦)이 간도문제를 먼저 결정할 것을 요망하고 무순탄광문제에 대하여 중국이 양보하면 일본은 간도를 중국영토로 인정하겠느냐고 한데 대하여 이집원(伊集院) 일본공사는 귀국이 만약 무순탄광문제를 양보하면 아국 역시 간도문제를 극력 퇴양(退讓)하겠노라고 한 것을 보면 일본은 교섭을 시작할 때부터 현안의 해결과 교환조건으로 간도의 귀속문제를 양보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보듯 간도협약은 만주5안건 협약과 따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서로 주고 받은 협약이기 때문이다. 동삼성 6안은 흑룡강성, 길림성,봉천성(현재의 요녕성)을 가리키는 3개의 성에 대한 6개 안을 말한다. 이 안중 5개 안은 청이 일본에게 인정해주는 안이고, 나머지 1개 안은 일본이 청에게 인정해주는 안이다. 나머지 1개안이 바로 간도협약이다. 5개의 이권을 얻기 위해 일본이 1개의 권리를 넘겨준 것이다. 반대로 청은 1개의 권리를 얻기 위해 5개를 포기했다. 무엇 때문에 청이 큰 대가를 치르고 간도영유권을 넘겨받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기억하자! ‘간도협약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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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4일 간도의 날 선포 1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
사람들에게는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기 싫은 것은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기억하기 싫더라도 꼭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아픔을 주었던 기억이 그렇다.
개인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은 수치스럽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다. 1910년 한일합방 바로 직전 일어났던 간도협약 체결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했지만 간도협약 체결은 망각 속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채 일본과 청나라가 우리 땅에다 금을 그었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위로 금을 긋는 순간 수십만의 동포는 다른 나라 사람이 됐다. 100년 전 대한제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100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은 침묵하고 있다. 간도협약을 체결한 9월4일이 코 앞으로 다가 왔지만 무관심 속에 100년의 세월이 그냥 지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간도되찾기 대학생 자전거 국토순례
7월 13일 간도되찾기 운동본부에서 ‘간도되찾기 대학생 자전거 국토순례‘에 나선다. 대학생 5명이 자전거를 타고 35일간 전국을 순례한다.
아주대 전자공학부 권순창씨, 중앙대 전자전기공학부 구남훈씨, 경희대 관광학부 정중화씨 등이다. 이들이 돌아오는 8월15일에는 외교통상부 인근 경복궁 앞 근린공원에서 간도협약 체결 100년 대국민집회를 갖는다. 육낙현 공동대표는 “외교통상부가 중국에 대해 간도협약 무효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이날 접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8월25일에는 간도협약 체결 100년 맞이 2차 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학술대회의 주제는 ‘간도영유권 분쟁에 관한 역대 정부 대응전략 분석’이다. 그동안 정부는 간도영유권 분쟁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전문가에게 의뢰해 법적 타당성, 문제점 등에 대해 연구를 해온 것으로 일부 알려졌다. 물론 이 결과는 겉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학술대회에 공개되지 않았던 내용이 발표된다면 많은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간도협약 100주년이 되는 9월4일에 맞춰 9월5일(토)에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간도의 날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모두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 주최하는 행사다.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으로 들끓었던 여론은 간도되찾기운동본부를 결성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여론이 가라앉고 난 뒤 실제로 남은 것은 별로 없다. 올해 이 시민단체에 후원을 하는 곳도 없다. 순수하게 회원들이 낸 회비로 100주년 행사를 치른다는 것이 간도되찾기 운동본부의 이야기다. 비용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다. 정부도, 우리 사회도 100년 전 치욕의 역사를 다시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땅 덩어리가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에서 휩쓸려 송두리째 넘어갔다. 간도협약 대로라면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는 백두산은 중국 땅이다. 백두산에 올라 우리 땅이라고 외칠 수가 없다.
간도를 되찾자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간도협약 무효 선언이 바로 중국에 대해 간도땅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사자가 없이 이뤄진 협약이 무효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간도협약을 전제로 이뤄진 영토 획정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0년 전 아픔의 역사를 잊지 말자’. 이것이 간도협약 체결 이후 100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절절하게 던지는 교훈이다.
개인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은 수치스럽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다. 1910년 한일합방 바로 직전 일어났던 간도협약 체결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했지만 간도협약 체결은 망각 속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채 일본과 청나라가 우리 땅에다 금을 그었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위로 금을 긋는 순간 수십만의 동포는 다른 나라 사람이 됐다. 100년 전 대한제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100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은 침묵하고 있다. 간도협약을 체결한 9월4일이 코 앞으로 다가 왔지만 무관심 속에 100년의 세월이 그냥 지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간도되찾기 대학생 자전거 국토순례
7월 13일 간도되찾기 운동본부에서 ‘간도되찾기 대학생 자전거 국토순례‘에 나선다. 대학생 5명이 자전거를 타고 35일간 전국을 순례한다.
아주대 전자공학부 권순창씨, 중앙대 전자전기공학부 구남훈씨, 경희대 관광학부 정중화씨 등이다. 이들이 돌아오는 8월15일에는 외교통상부 인근 경복궁 앞 근린공원에서 간도협약 체결 100년 대국민집회를 갖는다. 육낙현 공동대표는 “외교통상부가 중국에 대해 간도협약 무효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이날 접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8월25일에는 간도협약 체결 100년 맞이 2차 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학술대회의 주제는 ‘간도영유권 분쟁에 관한 역대 정부 대응전략 분석’이다. 그동안 정부는 간도영유권 분쟁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전문가에게 의뢰해 법적 타당성, 문제점 등에 대해 연구를 해온 것으로 일부 알려졌다. 물론 이 결과는 겉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학술대회에 공개되지 않았던 내용이 발표된다면 많은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간도협약 100주년이 되는 9월4일에 맞춰 9월5일(토)에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간도의 날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모두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 주최하는 행사다.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으로 들끓었던 여론은 간도되찾기운동본부를 결성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여론이 가라앉고 난 뒤 실제로 남은 것은 별로 없다. 올해 이 시민단체에 후원을 하는 곳도 없다. 순수하게 회원들이 낸 회비로 100주년 행사를 치른다는 것이 간도되찾기 운동본부의 이야기다. 비용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다. 정부도, 우리 사회도 100년 전 치욕의 역사를 다시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땅 덩어리가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에서 휩쓸려 송두리째 넘어갔다. 간도협약 대로라면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는 백두산은 중국 땅이다. 백두산에 올라 우리 땅이라고 외칠 수가 없다.
간도를 되찾자는 것은 차후의 문제다. 간도협약 무효 선언이 바로 중국에 대해 간도땅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사자가 없이 이뤄진 협약이 무효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간도협약을 전제로 이뤄진 영토 획정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0년 전 아픔의 역사를 잊지 말자’. 이것이 간도협약 체결 이후 100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절절하게 던지는 교훈이다.
‘북간도’는 알고 있다
<북간도>의 작가인 고 안수길. |
소설 <북간도>의 저자 안수길은 1911년생이다.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태어나 1922년 간도로 이주했다. 간도중앙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대 대학을 중퇴했고, 1936년 다시 만주로 돌아가 간도일보의 기자로 일했다. 1945년 광복 때까지 머물렀고, 광복 후 서울에 와서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1959년 <사상계>를 통해 <북간도>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이한복-이장손-이창윤-이정수로 이어지는 4대가 간도를 무대로 살아가는 것을 그렸다.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19세기 후반의 간도 이주에서 시작해 광복으로 끝이 난다.
안수길 자신이 젊은 시절 간도에서 살았던 만큼 소설 속 간도 이주민의 생활사는 생생하게 그려졌다. 소설에서 1909년의 간도협약은 조선사람의 입을 빌려 ‘분개했다’라고 표현돼 있다. 물론 1911생인 안수길이 간도협약 당시를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20년 가까이 간도에 머문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간도협약이 간도 이주민들에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간도에서 10여 년을 기자로 활동한 만큼 간도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에는 두 번에 걸쳐 간도협약을 묘사하고 있다.
타국에 버려진 조선인들의 심정
“간도는 조선의 영토다.” 통감부 파출소 소장은 성명까지 했고 일본 정부는 그 성명을 뒷받침해 단호하게 청국에 대해 행동하려고 했다. 간도 조선 사람의 처지를 곤란케 만들었던 통감부 파출소였건만 이때 일본이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더라면 간도는 조선 땅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안중에는 조선의 영토 귀속 문제가 큰 것이 아니었다. (중략) 그리고 마침내 9월 4일(1909년) 간도에 관한 일곱 항으로 된 <간도협약>이 체결되었다. (중략) 이렇게 해 일본은 두만강 이북의 간도, 그 영토와 조선 주민을 송두리째 청국에 넘겨주고만 것이었다. 원한의 통감부 파출소는 물러갔다. 그러나 그것은 원한을 걷어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원한의 씨를 심어놓고 간 것이다. 그 뒤엔 무엇이 올 것인가? 이젠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영 입밖에 낼 수 없게 되었다. 북간도의 조선 농민들은 완전히 남의 나라에 온 ‘이미그런트’ 유랑의 이주민이 되고 말았다.
간도협약으로 조선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 땅에서 졸지에 남의 나라 땅에 살게 된, 그래서 정착민이 아닌 유랑의 이주민이 됐다. 간도협약 당사자는 일본과 청이었다. 대한제국은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그 협약에서 조선 사람들의 권리는 찾아볼 수 없다. 남(청)의 나라 땅에서, 남(청)의 법률로 재판받아야 하며, 남(일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조선 사람이 타국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땅을 잃어 버린 결과다. <북간도>에서는 이런 심정이 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1909년 9월 4일에 북경에서 청일 두 대표가 조인한 간도협약은 나흘 뒤인 9월 8일 그 전문이 공포되었다. 그 조항에 따라 두 달 안에 통감부 파출소를 철수하고 영사과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략) 정유7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의 뒤를 잇는 이번 처사로 비탄에 잠긴 것은 현지의 조선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국내의 뜻있는 사람들도 의분에 몸 둘 곳을 몰랐다. 그나마도 지금까지 조선 정부가 간도 귀속 문제로 싸워 내려온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분개했다.
“목이 달아나도 국토는 촌토도 양보할 수 없다.”
일찍이 감계사였던 안변부사 이중하가 청국 대표에게 던졌던 말을 되생각해 내면서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작가 안수길은 1977년 작고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북간도>는 간도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이 소설은 아픔을 건드리기 때문에 더욱 더 감동적이다.
안수길 자신이 젊은 시절 간도에서 살았던 만큼 소설 속 간도 이주민의 생활사는 생생하게 그려졌다. 소설에서 1909년의 간도협약은 조선사람의 입을 빌려 ‘분개했다’라고 표현돼 있다. 물론 1911생인 안수길이 간도협약 당시를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20년 가까이 간도에 머문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간도협약이 간도 이주민들에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간도에서 10여 년을 기자로 활동한 만큼 간도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에는 두 번에 걸쳐 간도협약을 묘사하고 있다.
타국에 버려진 조선인들의 심정
“간도는 조선의 영토다.” 통감부 파출소 소장은 성명까지 했고 일본 정부는 그 성명을 뒷받침해 단호하게 청국에 대해 행동하려고 했다. 간도 조선 사람의 처지를 곤란케 만들었던 통감부 파출소였건만 이때 일본이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더라면 간도는 조선 땅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안중에는 조선의 영토 귀속 문제가 큰 것이 아니었다. (중략) 그리고 마침내 9월 4일(1909년) 간도에 관한 일곱 항으로 된 <간도협약>이 체결되었다. (중략) 이렇게 해 일본은 두만강 이북의 간도, 그 영토와 조선 주민을 송두리째 청국에 넘겨주고만 것이었다. 원한의 통감부 파출소는 물러갔다. 그러나 그것은 원한을 걷어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원한의 씨를 심어놓고 간 것이다. 그 뒤엔 무엇이 올 것인가? 이젠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영 입밖에 낼 수 없게 되었다. 북간도의 조선 농민들은 완전히 남의 나라에 온 ‘이미그런트’ 유랑의 이주민이 되고 말았다.
간도협약으로 조선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 땅에서 졸지에 남의 나라 땅에 살게 된, 그래서 정착민이 아닌 유랑의 이주민이 됐다. 간도협약 당사자는 일본과 청이었다. 대한제국은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그 협약에서 조선 사람들의 권리는 찾아볼 수 없다. 남(청)의 나라 땅에서, 남(청)의 법률로 재판받아야 하며, 남(일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조선 사람이 타국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땅을 잃어 버린 결과다. <북간도>에서는 이런 심정이 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1909년 9월 4일에 북경에서 청일 두 대표가 조인한 간도협약은 나흘 뒤인 9월 8일 그 전문이 공포되었다. 그 조항에 따라 두 달 안에 통감부 파출소를 철수하고 영사과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략) 정유7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의 뒤를 잇는 이번 처사로 비탄에 잠긴 것은 현지의 조선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국내의 뜻있는 사람들도 의분에 몸 둘 곳을 몰랐다. 그나마도 지금까지 조선 정부가 간도 귀속 문제로 싸워 내려온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분개했다.
“목이 달아나도 국토는 촌토도 양보할 수 없다.”
일찍이 감계사였던 안변부사 이중하가 청국 대표에게 던졌던 말을 되생각해 내면서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작가 안수길은 1977년 작고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북간도>는 간도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이 소설은 아픔을 건드리기 때문에 더욱 더 감동적이다.
‘여지고’에 언급한 영토인식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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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고>에 실린 ‘북간도강계’ 내용. |
북간도는 바로 두만강 북쪽인데 무산·회령·종성·온성의 맞은 편 땅이다. …우리 세종조에 김종서가 야인을 소탕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육진을 개척하였으나 다만 북쪽 극변(極邊)은 거칠고 추워서 개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그 땅을 비워두었다. 숙종 38년(1712년)에 이르러 비로소 두 나라 경계를 정하자는 안이 있었으나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많이 이웃나라와 다투는 것을 겁내어 하였다. 일찍이 원대한 경영이 없었기 때문에 강토를 버려 두고 구명(究明)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해결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국가의 중대한 문제이다. 이에 전후의 사실을 수집하여 특별히 부록으로 만든다.
간도에 대한 국가인식은 오히려 후퇴
<여지고>(輿地考)에 실린 ‘북간도 강계’ 내용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78년 편찬한 <국역 증보문헌 비고>에 국역한 자료가 실려 있다. <증보 문헌비고>는 원래 영조46년 1770년 <동국문헌비고>라는 이름으로 편찬하기 시작해 정조 때 증보 작업으로 <증보 동국문헌비고>가 됐다. 최종적으로 순종2년(1908년) 인쇄, 간행됐다. 이중 여지고는 우리나라의 지리를 요약한 부분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는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우리나라 강역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시기였다. 이 시기 여지고에 간도에 대한 영토 개념이 실린 것이다. 여지고 저자는 영조 시대 신경준으로 추측된다. 간도에 대한 내용은 100년 이후 부록으로 첨가됐다고 볼 수 있다. 1903년 제작된 <북여요선>의 내용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1908년 최종 간행 때 부록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1978년 국역의 해제(解題)에서 노도양씨는 부록에 대해 “우리나라에는 남쪽에서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였고 북쪽에서는 청과의 사이에 북간도의 귀속 문제가 일어나 정부에서는 이중하를 토문감계사로 임명하던 때이므로 내외 정세로 보아 당연히 넣어야 할 항목이었다”고 밝혔다. 여지고에 나타난 논리는 간단하다.
신이 삼가 고찰하건대, 서북 간도가 원래 우리의 땅으로 속한 것은 이미 고씨, 왕씨의 시대로부터 그 구역이 분명한데, 전에 목극등이 경계를 정하여 비를 세울 즈음에 있어서 우리 조정에서 모두 스스로 겁내고 두려워하여 살펴서 결단하여 계획을 정하지 못하고 도리어 늙은 역관과 비장의 손에 맡겨서 허술하게 감정하도록 하였고 경계의 문제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또 다시 한 지방관에게 조사 감정을 맡겼으며 조사 감정한 뒤에도 그대로 덮어두고 구명하지 아니하여 20~30년에 이르도록 아직 타결치 못했습니다. 수천리 강토를 무고히 버려서 전체 간도 10여만의 백성들을 날마다 남에게 학대를 받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왕의 강토를 중히 여긴 본의였겠는가?
몇 줄의 기록에는 간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 설치, 1885년 조·청 국경회담의 내용이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1909년 간도협약이 이뤄져 간도 땅이 청나라의 것이 됐으며, 1962년 북한과 중국의 조중변계조약으로 간도협약의 대부분 내용이 승계됐다는 것을 추가하면 된다.
윗글의 저자가 쓴 비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금 영토에 대한 국가의 인식은 이때에 비해 오히려 후퇴했다. 1909년 간도협약으로 두만강 너머 간도는 완전히 남의 땅이 됐다. 올해로 100년이 됐지만 정부는 아무런 입장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이은 대한민국 정부가 간도협약 100주년이 되기 전에 최소한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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