鈍銘千字

고사성어_15

醉月 2009. 7. 30. 08:47

毛遂自薦(모수자천)
  毛(털 모) 遂(이를 수) 自(스스로 자) 薦(천거할 천)
 
  사기(史記) 평원군우경(平原君虞卿)열전의 이야기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자신의 집에 수많은 식객들을 두고 있었다. 조나라 효왕(孝王) 9년, 기원전 257년,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이에 평원군은 초(楚)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가게 되자, 식객중에서 자신을 수행할 사람 20명을 뽑고자 했다.

몇번이고 고르고 골랐지만 끝내 한 사람을 채우지 못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자신를 추천하고 나섰다.

평원군은  유능한 사람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송곳처럼 금방 드러나게 되는 법인데,

당신은 삼년 동안이나 내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수는  제가 지금 초나라 수행을 원하는 것은, 저를 자루 안에 넣어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군께서 저를 좀더 일찍 자루에 넣어주셨더라면, 저의 재능도 일찍 드러났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毛遂自薦 이란  자신의 재능을 알리며 자기가 자신을 추천함 을 비유한 말이다.

경기 침체에다 기업들의 연쇄 도산등으로 대학가에 취업비상이 걸렸다. 대학에서는  毛遂就業論(?) 이라는 강좌라도 개설해야 할 판이다.
  
  孔席墨突(공석묵돌)
  孔(구멍 공) 席(자리 석) 墨(먹 묵) 突(갑자기 돌)
 
  한(漢)나라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戱)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전국시대는 격렬한 전쟁으로 사회가 몹시 불안하였다.

이에따라 각종 사상이 발생하고 자신의 이상과 견해를 전파하고자 각국으로 유세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자(孔子)와 묵자(墨子) 역시 이러한 사람들에 속한다.
  공자는 자신의 학문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많은 제후국들에서 유세하였다.

그리고 노(魯)나라 사람인 묵자는 본시 수공업자 출신으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겸애(兼愛) 를 주장하며, 힘만 믿고 약자(弱者)에게 고통을 주는 전쟁을 반대하였다.

그는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묵자(墨子) 이외에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귀중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였다.
  반고는 공자와 묵자의 이러한 유세 활동을  공자의 자리는 따뜻해 질 틈이 없고,

묵자 집의 굴뚝에는 그을음이 낄 새가 없다(孔席不暖, 墨突不黔) 라고 표현하였다. 

孔席墨突 은  여기저기 몹시 바쁘게 돌아 다님 을 비유한 말이다. 

 

  
  耳視目聽(이시목청)
  耳(귀 이) 視(볼 시) 目(눈 목) 聽(들을 청)
 
  열자(列子) 중니(仲尼)편에 실린 이야기다. 춘추시기 노자(老子)의 제자로 항창자(亢倉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귀로 사물을 보고 눈으로 소리를 듣을 수 있었다(能以耳視而目聽)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전해들은 노(魯)나라의 군주는 상경(上卿)의 예(禮)로써 그를 초빙하여, 겸손한 말로 그러한 능력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이에 항창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런 소문은 전한 사람들의 망발입니다.

도가(道家)의 수련에서 눈과 귀를 쓰지 않고도 소리를 듣거나 물체를 볼 수는 있지만 귀와 눈의 기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제가 눈을 쓰지 않고 귀로 물체를 본다는 것과 귀를 쓰지 않고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가장된 것이오니,

이를 사실로 믿지마십시오.
   耳視目聽 은 본시 도가수련의 한 단계로서 눈과 귀의 도움없이 정신만으로도 보고 듣는 것이 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耳視 란  직접 보지 않고 소문을 들어서 알아차림 을 뜻하고,  目聽 이란  직접 듣지 않고 표정을 보고 알아차림을 뜻하니, 

耳視目聽 이란  사람의 눈치가 매우 빠름 을 비유한 말이다.

자고나면 달라지는 정보화시대. 정보 수집에는 컴퓨터보다는 역시 눈치(?)가 최고다.
  
  出奇制勝(출기제승)
  出(날 출) 奇(기이할 기) 制(마를 제) 勝(이길 승)
 
  사기(史記) 전단(田單)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 王)은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가,

연(燕)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제나라는 민왕의 먼 친척인 전단장군의 선전(善戰)으로 거성( 城)과 즉묵(卽墨)성은 잃지 않았다.
그후 연나라의 소왕의 뒤를 이어 혜왕(惠王)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안 전단은 간첩을 보내어 악의와 혜왕을 이간질하였다.

그 결과 연왕은 악의 대신 기겁(騎劫)을 보냈다. 기겁의 학대를 받은 연나라 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전단은 이 틈을 노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한밤중에 꼬리에 횃불을 단 소들을 이용하여 연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사마천은  손자(孫子) 의 말을 인용하여 전단의 용병술을 묘사하였다.  전쟁이란 정면으로 대치하여 싸우나,

유격(遊擊)인 기병(奇兵)을 가지고 이기는 것이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기병을 쓰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兵以正合, 以奇勝. 善之者, 出奇無窮). 라고. 

出奇制勝 이란  특출한 전략을 이용하여 승리함 을 뜻한다. 

  

  開門揖盜(개문읍도)
  開(열 개) 門(문 문) 揖(읍할 읍) 盜(훔칠 도)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손권전(孫權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 말년, 조정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강동(江東)의 손책(孫策)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강동 오군(吳郡)의 태수인 허공(許貢)은 황제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손책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고자 하였으나,

 손책에게 발각되어 죽고 말았다. 한편 사냥을 나갔던 손책은 허공에게 큰 은혜를 입은 식객들이 쏜 화살을 맞아 죽었다.
  당시 손책의 아들 손권(孫權)은 겨우 15세. 부친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군정을 살피지 않자, 장소(張昭)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들을 뒤쫓아오고, 이리 같은 놈들이 도처에 숨어 있는데,

자네는 부친의 죽음만을 슬퍼하고 대사(大事)를 돌보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문을 열어 도둑을 맞아들이는 것과 같네(是猶開門揖盜). 
開門揖盜 는  개문납적(開門納賊) 이라고도 하며,  스스로 화를 자초함 을 비유한 말이다. 


  李代桃 (이대도강)
  李(오얏 리) 代(대신할 대) 桃(복숭아나무 도)  (쓰러질 강)
 
  악부시집(樂府詩集)인 상화가사(相和歌辭) 계명(鷄鳴)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어떤 집에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조정의 대신(大臣)이었다. 그들은 표면상 우애가 좋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서로 다투고 시기하였다.

그 중 한 형제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하게 되었는데도, 나머지 형제들은 그의 불행을 즐기는 눈치였다.

벼슬을 하는 형제들이, 황금 장식으로 치장한 말이 끄는 화려한 꽃수레를 타고 고향에 올 때면, 길거리는 늘 구경꾼으로 붐볐다.

그러던 어느 날, 관직에서 쫓겨난 그 형제의 집 우물가에 있던 자두나무가 갑자기 말라 죽었다.

죽은 자두나무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옆에 있던 복숭아나무의 뿌리는 벌레들에게 모두 갉아 먹혀있었다.
  이에 관직을 잃은 그 형제는 소리치며 울었다.  자두나무야! 자두나무야! 벌레 먹힌 것은 복숭아나무인데,

네가 죽다니, 이게 무슨 까닭인가?
   李代桃  은 형제가 함께 어려움을 겪으면서 서로 돕고 사랑함을 비유하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 을 뜻하기도 한다.

 

 

  擧措失當(거조실당)
  擧(들 거) 措(둘 조) 失(잃을 실) 當(당할 당)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이야기다. 진시황 26년, 즉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진시황은 곧이어 전국을 36개 군(郡)으로 나누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였다. 이듬해,

진시황은 위덕(威德)을 선양하기 위하여 천하 주유에 나섰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은 태산(泰山)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시 남쪽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올랐다.

이곳에서 진시황은 낭야대를 쌓고, 비석을 세워 자신의 공덕(功德)과 진나라 왕조의 덕정(德政)을 담은 비문(碑文)을 새겼다.  

진시황께서는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조석으로 게으름을 피지 않으시고, 의혹을 제거하고 법령을 제정하시니 백성들이 모두 법으로 금한 일을 피할 줄 알게 되었다. 지방장관의 직무가 나뉘어서 모든 정무의 시행이 용이해지고,

모든 조치가 타당하여 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擧錯必當, 莫不如畵). 

 


     飮水思源(음수사원)
  飮(마실 음) 水(물 수) 思(생각할 사) 源(근원 원)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주(北周)에 유신(庾信)이라는 문인(文人)이 있었다. 자(字)는 자산(子山)이었다.

서기 554년, 그는 양(梁)나라 원제(元帝) 소역(蕭繹)의 명을 받들어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유신이 고국을 떠나와 있던 동안, 양나라는 서위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유신은 당시 문단(文壇)에서 그 명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서위의 군주는 그를 강제로 장안에 잡아두고 대관(大官)으로 삼았다.

유신은 고향을 떠나 북조(北朝)에서 28년 동안 머무르며 고향을 매우 그리워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유자산집(庾子山集) 칠권의 징주곡(徵周曲)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일을 먹을 때는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생각하고(落其實者思其樹),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네(飮其流者懷其源).
   飮水思源 이란  음수지원(飮水知源) 이라고도 한다. 이는  근본을 잊지 않음 을 비유한 말이다.

넓게는 국가와 민족, 가깝게는 부모와 고향. 일상 생활에서는 문자 그대로 식수원(食水源).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

그리고 제일 중요한(?) 돈의 근원 등. 이렇듯 우리 주위에는 큰 혜택을 베풀기에 그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虎狼之國(호랑지국)
  虎(범 호) 狼(이리 랑) 之(-의 지) 國(나라 국)
 
  사기(史記) 굴원(屈原)열전의 이야기다. 전국(戰國)시대의 최대 강국 진(秦)나라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이 잦았으며,

남쪽 초(楚)나라도 그 위협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초나라 회왕(懷王)의 대신(大臣)으로 있던 유명한 시인(詩人) 굴원은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 회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진나라 장의(張儀)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이에 초 회왕은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장의는 다시 초나라를 방문하여 초왕의 신하와 총비(寵妃)를 매수하고, 초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었다.
  얼마 후, 진나라 소왕(昭王)이 초회왕을 초청하자, 굴원은 이것이 함정임을 주장하며  진나라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으니, 가시지 않는게 좋습니다(秦, 虎狼之國, 不可信, 不如無行). 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에 갔던 초왕은 결국 그곳에서 붙잡혀 죽고 말았다.
   虎狼之國 이란  포악한 침략국 를 비유한 말이다. 일부 강대국들은 군사적 침략외에도 정치적, 문화적, 특히 경제적 침략을 꾀하고 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정도로는 곤란하다. 지금은 호랑이를 때려 잡는 힘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吹毛求疵(취모구자)
  吹(불 취) 毛(털 모) 求(구할 구) 疵(흠 자)
 
  한비자(韓非子) 대체(大體)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현명한 군주는 지혜로써 마음을 더럽히지 않으며, 사리를 추구함으로써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

또한 법술에 의해 국가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상벌에 의해 시비를 분별하며, 저울에 의해 물건의 경중(輕重)을 분명하게 하고, 리하여 하늘
의 법칙에 역행하지 않으며 사람의 본성을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터럭을 불어 남의 작은 흠을 찾으려 하지 않으며(不吹毛而求小疵),

때를 씻어 알기 힘든 상처를 발견하지 않는다(不洗垢而察難知).
   吹毛求疵(pick a hole in one's coat) 는  취모구하(吹毛求瑕)  또는  취모멱자(吹毛覓疵) 라고도 한다. 

疵 는 병(病)이나 흠, 결점, 과실 등을 뜻하며,  瑕 는 옥의 티, 허물, 잘못 등을 뜻한다.

또  覓 은 눈위에 손을 올리고 자세히 살펴 보는 것을 뜻하니,  吹毛求疵 란  고의로 남의 잘못을 들춰냄 을 비유한 말이다.

이는 입으로 털을 불어가며 혹시 보이지 않는 곳에 작은 흠이라도 없는지 살피는 야박한 행동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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