鈍銘千字

고사성어_14

醉月 2009. 7. 22. 00:02

 終南捷徑(종남첩경)
  終(끝날 종) 南(남녘 남) 捷(빠를 첩) 徑(지름길 경)
 
  신당서(新唐書) 노장용전(盧藏用傳)에 실린 이야기다. 당나라 때, 노장용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시(詩)와 부(賦)에 뛰어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했지만,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조정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곧 당시의 수도인 장안(長安) 근처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일 심신을 수양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노장용은 정말로 황제의 부름을 받고 관직을 얻게 되었다.

부임 길에 오른 그는 몹시 기쁜 마음에 종남산을 가리키며  이 산 중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도다(此中大有嘉處)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사마승정(司馬承禎)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벼슬을 하지 않고 종남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노장용의 말을 듣고는 그의 속뜻을 알아 차리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종남산은 벼슬의 지름길일 따름이다(仕官之捷徑耳).   

終南捷徑 이란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을 비유한 말이다.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런 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지름길만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別無長物(별무장물)

  別(나눌 별) 無(없을 무) 長(길 장) 物(만물 물)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진(東晋)시기, 왕공(王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자(太子)의 스승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그가 회계(會稽)에 갔다가 수도인 남경(南京)으로 돌아오자, 왕침(王 )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왕침 또한 태자의 스승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왕공이 새로운 대자리에 앉아 있음을 발견하고, 

이 멋있는 대자리는 필시 회계의 명물(名物)일 것이며, 하나만 사가지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왕침이 대자리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자, 왕공은 자기가 앉아 있던 하나뿐인 대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 후, 왕공은 풀로 엮은 헌 자리를 깔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 일이 왕침에게 알려지자,

그는 서둘러 왕공의 집으로 달려와서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왕공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직도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이제껏 저는 물건을 남도록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恭作人無長物).
長物 은  여분(餘分) 이라는 의미이니,  別無長物 이란 곧  필요한 것 이외에 는 갖지 않음 을 뜻한다.

이는  물욕이 없는 검소한 생활 을 비유한 말이다. 
  
   
  割席分坐(할석분좌)
  割(나눌 할) 席(자리 석) 分(나눌 분) 坐(앉을 좌)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편에 실린 이야기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관녕(管寗)과 화흠(華歆)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 함께 공부하였지만, 성격은 크게 달랐다. 관영은 검소하고 학문을 즐겨 부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화흠은 그렇지 않았다. 화흠은 한(漢)나라의 태수(太守)를 지내다가, 한때 오(吳)나라의 손책(孫策)의 휘하에서 일을 하였으며,

후에는 위나라의 조비(曹丕)를 도와 한나라를 찬탈하였다. 그러나 관녕은 위나라에서 내린 벼슬을 끝내 사양하였다.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한 돗자리를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멋있는 의관(衣冠)을 입은 높은 관리가 수레를 타고 지나갔다.

관녕은 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책을 읽었으나, 화흠은 곧 밖으로 나가 그 관리의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관녕은 화흠의 태도에 몹시 분노하였다. 그는 칼을 꺼내더니 함께 깔고 있던 돗자리를 반으로 자르고 따로 앉아, 

자네는 이제 나의 친구가 아닐세 라고 말했다(寗割席分坐曰:子非吾友也).
割席分坐 란  친한 사람과의 절교(絶交) 를 비유한 말이다.   
  
  
  聲東擊西(성동격서)
  聲(소리낼 성) 東(동녘 동) 擊(칠 격) 西(서녘 서)
 
  통전(通典)의 병전(兵典)에 나오는 이야기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서로 다투던 시기,

위왕(魏王) 표(豹)의 투항으로 한나라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위왕 표의 협공을 당하는 국면이 되어 매우 위험한 형세에 처하였다.

그는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한신(韓信)을 보내어 정벌에 나섰다.
  이에 위왕 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황하의 동쪽 포판(蒲坂)에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의 도하(渡河)를 저지하였다.

한신은 포판의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나,

사병들로 하여금 낮에는 큰 소리로 훈련하게 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강공의 의사를 나타내도록 하였다.

백직은 한나라 군대의 동태를 살펴보고 그들의 어리석은 작전을 비웃었다. 한편으로  한신은 비밀리에 군대를 이끌고 하양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으로 황하를 건넌 한나라 군사들은 신속하게 진군하여 위왕 표의 후방 요지인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그를 사로 잡았다.
 聲東擊西(to make a feint to the east and attack in the west) 란  동쪽을 칠 듯이 말하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 는 뜻으로, 

상대방을 속여 교묘하게 공략함 을 비유한 말이다. 개인이나 정치인들의 처세, 또는 운동 경기 등에서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
  
  擧棋不定(거기부정)
  擧(들 거) 棋(바둑 기) 不(아닐 불) 定(정할 정)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5년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말기,

즉  기원전 548년 위(衛)나라 대부(大夫) 손임보(孫林父)와 영식( 殖) 등은 위나라 헌공(獻公)을 축출하고,

그의 동생인 상공( 公)을 군주로 삼았다.

복귀하려는 계책을 세우던 헌공은 사람을 보내어 영식의 아들인 영희( 喜)에게 자신을 도와준다면 돌아가서 위나라의 정무(政務)를 그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전했다. 영희는 매우 기뻐하며 곧 협조하겠다고 응답했다.
  대숙문자(大叔文子)가 이 소문을 듣고, 영희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걱정하며 말했다. 

군자는 행동함에 그 종말을 생각하고, 그대로 행해도 좋은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는 군주 보기를 바둑 두는 일 같이도 여기지 않으니, 어찌 화를 면하랴!

바둑 돌을 들고 놓을 곳을 정하지 못하면 상대를 이기지 못하는데(擧棋不定不勝其 ), 하물며 군주를 모시는 일에 주관이 없어서야? 

12년 후, 영희는 군주로 복귀한 헌공의 손에 죽었다.
   擧棋不定 이란  확고한 주관이 없거나 계획이 수시로 바뀜 을 비유한 말이다.
안개 속의 대선주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헤쳐 모이려(?) 하고 있다.

만지작거리던 바둑 돌을 놓을만한 곳이 이제야 보이는 모양이다.
  
 
  貪賂無藝(탐뢰무예)
  貪(탐할 탐) 賂(뇌물 뢰) 無(없을 무) 藝(다할 예)
 
  국어(國語) 진어(晉語) 8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시기, 숙향(叔向)이라는 사람이 한선자(韓宣子)를 만나러 갔다.

한선자가  나는 명색이 임금 아래에 있는 경(卿)인데도 재물이 많지 않네 라고 말하자,

숙향은 그에게 축하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고사를 들려 주었다.
   옛날 난무자(欒武子)라는 이가 경대부를 지낼 때, 겨우 1백명의 하인에 2백 경(頃)의 땅만을 소유하였으며,

집안에는 조상들에게 제사지낼 그릇조차 변변히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선왕(先王)들의 법령과 덕행으로 일을 처리하여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 받은 그의 아들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워 많은 재물들을 긁어 모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아버지의 덕행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경께서는 난무자처럼 재산이 없으시니,

덕정(德政)을 펴시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기에, 저는 축하를 드렸던 것입니다.
貪賂無藝 는  탐욕무예(貪欲無藝) 라고도 하며,  뇌물을 탐함에 그 끝이 없음 을 뜻한다. 
  
  鞭長莫及(편장막급)
  鞭(채찍 편) 長(길 장) 莫(없을 막) 及(미칠 급)
 
  좌전(左傳) 선공(宣公) 15년조의 이야기다. 춘추시기,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파견한 신주(申舟)는 제(齊)나라로 가는 길에 송(宋)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이 일을 송나라에 통보하지 않았던 까닭에, 그는 피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초장왕은 크게 노하여,

기원전 594년 군대를 동원하여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약소국인 송나라는 초나라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동시에 진(晉)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송나라 사신이 진나라에 도착하자, 진나라 경공(景公)은 곧 출병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대부 백종(伯宗)은 이를 반대하며 경공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출병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채찍이 길다해도 말의 배까지는 닿지 않는다(雖鞭之長不及馬腹)고 했습니다. 하늘이 초나라를 도우고 있으니,

그들과 싸워서는 안됩니다. 진나라가 강하다고 하나, 어찌 하늘을 어길 수야 있겠습니까?
鞭長莫及(out of reach) 이란  돕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함 을 비유한 말이다.   
  
  芒刺在背(망극재배)
  芒(까끄라기 망) 刺(가시 자) 在(있을 재) 背(등 배)
 
  한서(漢書) 곽광( 光)전의 이야기다. 서한(西漢)시기.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덟살 된 아들이 소제(昭帝)로서 제위를 계승하였다.

공신의 후손인 대장군 곽광은 한무제의 뜻을 받들어 황제을 보좌하며 국정에 관여하였다. 한소제가 21세로 죽자,

곽광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는 음란하고 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에 곽광은 유하를 폐하고, 한무제의 증손자인 유순(劉詢)을 제위에 앉혔다.
  새로 제위를 계승한 한선제(漢宣帝) 유순은 국권(國權)을 주무르는 곽광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한선제가 선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곽광은 직접 수레를 몰고 그를 모셨다.

한선제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카로운 눈에 엄한 표정을 한 곽광을 보며,

수레 안에서 마치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若有芒刺在背) 참기 어려운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죽자, 한선제는 비로소 이러한 느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芒刺在背(A thorn in the flesh) 란  몹시 불안한 상태 를 비유한 말이다. 경제 대란에다 정치 대란이라는 말이 나돈다.

 시원찮은(?) 리더 덕분에 국민들은 늘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다.
  
  
  五里霧中(오리무중 )
  五(다섯 오) 里(거리 리) 霧(안개 무) 中(가운데 중)
 
  후한서(後漢書) 장해(張偕)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한(後漢)시대, 경전(經典)에 뛰어난 성도(成都)출신의 장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평소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데다, 그와 교제하려는 황족들이나 귀족들까지 그를 자주 찾아왔다.

그는 이러한 붐비는 생활과 벼슬을 싫어하여 산중에 은거(隱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학문외에도 도가(道家)의 도술을 익혀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사방 5리나 안개를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곤 했다.

그 당시 사방 3리 정도의 안개를 일으킨다는 배우(裵優)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술법을 이용하여 도둑질을 하다가 체포되자, 이 도술을 장해에게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이 바람에 장해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五里霧中 이란 거리가 5리나 되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듯  현재의 상태를 알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함 을 비유한 말이다.

  
  巢毁卵破(소훼란파)
  巢(새집 소) 毁(헐 훼) 卵(알 란) 破(깨질 파)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말기, 공자의 20세손인 공융(孔融)은 한나라 헌제(獻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공융은 일찍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조조(曹操)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 하였다. 때문에 조조는 공융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유비와 손권을 공격하려는 조조의 계획을 반대했던 공융은,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한 대부의 모략으로 조조에게 체포되었다.
  공융의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은, 아버지가 잡혀 가던 순간 묵묵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도망하라고 했지만,

공융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새집이 부서졌는데 알이 어찌 깨지지 않겠습니까(安有巢毁而卵不破乎)? 라고 말했다.

공융의 딸은 조조에게 붙잡혀 와서도  죽은 뒤에 혼령이나마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고 형의 집행을 기다렸다.
巢毁卵破 이란  조직이나 집단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를 입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鈍銘千字'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사성어_16  (0) 2009.08.08
고사성어_15  (0) 2009.07.30
고사성어_13  (0) 2009.07.14
고사성어_12  (0) 2009.07.09
고사성어_11  (0) 2009.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