鈍銘千字

고사성어_16

醉月 2009. 8. 8. 09:43

織錦回文(직금회문)
  織(짤 직) 錦(비단 금) 回(돌 회) 文(무늬 문)
 
  진서(晋書) 열녀전(烈女傳)의 이야기다. 동진(東晋)시기, 전진(前秦)에 진주자사(秦州刺史)를 지내는 두도(竇滔)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도에게는 소혜(蘇蕙)라는 재주 많은 아내 말고도 조양대(趙陽臺)라는 총희(寵姬)가 또 있었는데,

이들의 사이가 좋지 않아 두도는 무척 고민스러웠다.
  훗날 두도가 양양으로 부임하게 되자, 아내인 소혜는 남편이 총희와 함께 가려는 것을 보고 자신은 따라 가지 않기로 하였다.

양양으로 떠난 남편이 자신을 잊어버린 것으로 생각한 소혜는 몹시 상심하였다.

그녀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오색 비단에 글자를 짜넣어 회문시(回文詩)를 지어(織錦爲回文璇圖詩), 남편에게 보냈다.

이에 크게 감동한 두도는 곧 총희를 돌려 보내고 융숭한 예의를 갖춰 아내를 다시 맞아 들였다.
  소혜가 지은  선기도(璇璣圖) 에는 모두 840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들을 종횡, 상하, 좌우 등등 어떻게 읽어도 모두 훌륭한 시가 되었다.

훗날 여러 사람들의 연구 결과  선기도 의 시는 7,958 수에 달하게 되었다.  織錦回文 이란  구성이 절묘한 훌륭한 문학작품 을 비유한 말이다. 올 노벨문학상은 이탈리아의 다리오포가 차지했다. 그는 해학과 진지함 등을 고루 담은 훌륭한 작품을 썼다고 한다.
  
  貪小失大(탐소실대)
  貪(탐할 탐) 小(작을 소) 失(잃을 실) 大(큰 대)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 혜왕(惠王)은 군대를 동원하여 촉(蜀)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험한 산세에 길이 없어서 진군(進軍)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진혜왕은 탐욕스런 촉왕을 속이기 위해 실물 크기의 돌소(石牛) 다섯 개를 만들어,

돌소의 꼬리에 번쩍거리는 황금을 달아 놓고, 신우(神牛)가 황금의 변(便)을 본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촉왕이 신기한 돌소에 군침을 흘리자, 혜왕은 촉왕에게 돌소를 대가없이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돌소를 차지하게 된 촉왕은 그것들을 운반해 올 방법이 없었다. 이에 진왕은 그에게 길을 만들어 돌소를 옮겨 가도록 제안했다. 

재물에 눈먼 촉왕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길이 뚫리자 진나라의 20만대군은 일거에 촉나라를 멸하고 말았다.

훗날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제(北齊)의 유주(劉晝)는 유자신론(劉子新論) 탐애(貪愛)편에서 이 일을  촉왕의 멸국망신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작은 이익을 탐하다 큰 이익을 잃어버린 꼴이다(以貪小利失其大利也) 라고 하였다. 

貪小失大 란  작은 이익을 탐하여 큰 이익을 잃어버림 을 뜻한다.

 이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는 여러 실수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釜底游魚(부저유어)
  釜(가마 부) 底(밑 저) 游(헤엄칠 유) 魚(고기 어)
 
  후한서(後漢書) 장강(張綱)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순제(順帝) 때, 조정에는 장강이라는 하급 관리가 있었다.

그는 충실하고 강직하여 아부를 몰랐다. 당시 대장군으로 양기(梁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황후인 누이를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장강은 공개적으로 황제에게 양기의 불법 행위를 밝혀 조정의 백관들을 놀라게 했다.
  얼마 후, 광릉(廣陵)에서 장영(張 )이 사람들을 모아 자사(刺史)를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평소 장강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양기는 이 틈을 이용하여 장강을 제거하고자 그를 광릉의 태수로 임명하였다.

장강은 양기의 계략을 이미 눈치챘지만, 곧 광릉자사로 부임하여 장영을 설득하였다.
  장영은 믿음이 가는 장강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저희들은 물고기가 솥바닥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이,

잠시 숨만을 쉬고 있을 뿐입니다(若魚游釜中, 喘息須臾間耳). 이처럼 대인께서 명철하시니 저희들은 기꺼이 조정에 귀순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釜底游魚 란  상황이 극히 위험한 상태에 이름 을 비유한 말이다. 

 

  廢寢忘食(폐침망식)
  廢(폐할 폐) 寢(잠잘 침) 忘(잊을 망) 食(밥 식)
 
  송사기사본말(宋史記事本末) 왕안석변법(王安石變法)에 실린 이야기다. 북송(北宋)시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인(文人)인 왕안석은 신종(神宗)년간에 두 차례 재상을 지냈다.

당시 일부 귀족들이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납세(納稅)를 거부하여, 중앙 정부의 재정이 날로 악화되자,

재상으로 있던 왕안석은 변법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무리들의 반대에 부딪혀 두 차례 모두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왕안석은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널리 제자백가서를 읽고,

각종 이론들을 진지하게 연구함으로써  형공신학(荊公新學) 을 정립하여 변법의 이론으로 삼았다.

그는 강동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저명한 학자인 주돈이(周敦 )를 만났다. 그는 주돈이와 여러 가지 사상 문제를 토론하며 밤을 세웠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 문제들을 몇번이고 생각하며, 잠 자는 것, 밤 먹는 것까지도 모두 잊어버렸다(安石退而精思, 至忘寢食).
   廢寢忘食 이란  잠 못자고 끼니를 거를 정도로 바쁘거나 매우 열심히 공부함 을 비유한 말이다.

학원 수강에다 학교에서의 야간 자율학습 등, 대학을 향한 열기로 고3 학생들은 대부분 잠 못 이루고 끼니 잘(?) 거르는 생활을 하고 있다.
  
  
  一日千里(일일천리)
  一(한 일) 日(해 일) 千(일천 천) 里(마을 리)
 
  후한서(後漢書) 왕윤(王允)전의 이야기다. 왕윤은 동한(東漢)때의 인물로서, 헌제(獻帝) 재위 시기에 사도(司徒)를 지냈다.

그는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와 동향(同鄕)인 곽림종(郭林宗)은 왕윤의 총명함과 학문하는 태도를 보고,

그를 칭찬하여  왕윤의 학문은 매우 빨리 발전하고 있는데(王生一日千里),

장차 제왕(帝王)을 보좌하여 대사(大事)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王佐才也). 라고 하였다.
  왕윤이 사도로 재임하던 때에, 동탁(董卓)은 전권을 잡고 방탕하고 도리를 모르는 포악한 생활을 하였다.

왕윤은 겉으로는 동탁에게 순종하였지만, 몰래 여포(呂布)를 부추겨 미인계로써 동탁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탁의 부하인 이각(李 )과 곽사(郭 )에게 살해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56세. 

一日千里 라는 말은 본시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서주(西周)시대 주나라 목왕(穆王)의 휘하에 조보(造父)라는 마부가 있었는데, 그가 모는 말은 하루에 천리길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一日千里 란 본시 말이 매우 빠르게 달리는 것을 뜻하였으나, 지금은  진보나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름 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代人捉刀(대인착도)
  代(대신할 대) 人(사람 인) 捉(잡을 착) 刀(칼 도)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편의 이야기다. 위(魏)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의 사신이 위 무제를 만나러 왔다.

위 무제는 자신의 키가 작고 풍채가 초라하여 사신들에게 위풍을 보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위무제는 대신(大臣) 최계각(崔季珪)으로 하여금 흉노의 사신을 접견하게 하고,

자신은 칼을 잡고 시위(侍衛)처럼 서있었다(帝自捉刀立牀頭).
  최계각은 본시 큰 몸집에 짙은 눈썹과 큰 눈으로 풍채가 당당하고 위엄있었으며, 우렁찬 목소리에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흉노의 접견을 마친 후, 위 무제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흉노의 사신이 위 무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 보게 하였다.

흉노 사신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위왕의 고상한 덕은 대단했습니다만,

칼을 들고 옆자리에 서있던 그 사람은 위풍이 당당하여 정말 영웅같았습니다. 
  위 무제는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흉노의 사신을 죽여 버렸다. 위 무제는 다름아닌 조조(曹操)인데,

그는 체구가 작았다고 한다.  代人捉刀 란  사람을 대신하여 일을 함 을 비유한 말이다.

맹주을 대신하여 칼 들고 비자금 폭로전의 선봉에 나섰던 어떤 협객(?). 그는 꼭 스턴트맨 같다.
  

  畵虎類狗(화호유구)
  畵(그릴 화) 虎(범 호) 類(같을 류) 狗(개 구)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기,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은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라는 경박한 조카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계형자엄돈서(誡兄子嚴敦書)>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나 단점을 비난한다거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한다.

나는 사람됨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청렴했던 산도현(山都縣)의 현령 용백고(龍伯高)와 의협심이 강한 월기사마(越騎司馬) 두계량
(杜季良)을 존경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그들을 본받기는 바라지 않는다.

용백고처럼 되는지 못한다하더라도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너희들이 두계량을 본받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그리려다 도리어 개를 그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畵虎不成反類狗者也).
   畵虎類狗 란  서투른 솜씨로 큰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 을 비유한 말이다.   


  高陽酒徒(고양주도)
  高(높을 고) 陽(볕 양) 酒(술 주) 徒(무리 도)
 
  사기(史記) 역생육가( 生陸賈)열전의 이야기. 진(秦)나라 말기,

유방(劉邦)은 패현(沛縣)에서 군대를 일으켜 진류(陳留)현의 교외에 주둔하였다.

당시 진류현의 고양이라는 시골에는 역이기( 食其)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일정한 생업을 갖지는 못했다.  역이기는 유방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했는데,

유방이 유생(儒生)들을 싫어하여 그들이 찾아오면 관(冠)을 벗겨서 거기에 오줌을 누고 욕을 퍼붓는다는 말을 듣었다.

역이기는 심사숙고한 후 대책을 마련하여 유방을 만나러 갔다.

유방은 유생이 찾아왔다는 말에 크게 노하여  유생 따위는 만날 시간이 없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역이기는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고양땅의 술꾼이지 유생이 아니오(吾高陽酒徒. 非儒人也)  시위의 보고를 받은 유방은 발을 씻다말고,

맨발로 나가 역이기를 맞았다. 그후 역이기는 유방을 도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高陽酒徒 란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리거나,

음주운전하다  삼진 아웃  당하는 사람들도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懸梁刺股(현량자고)
  懸(매달 현) 梁(들보 량) 刺(찌를 자) 股(넓적다리 고)
 
  전국책(戰國冊) 진책(秦策)의 이야기. 전국시대의 유명한 인물인 소진(蘇秦). 그는 웅대한 포부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며,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밤이 깊어지고 몸이 지쳐 졸음이 오면 곧 송곳으로 자신의 다리를 찔러 피가 줄줄 흐르곤 하였다(引錐自刺其股, 血流至足).

그는 이렇게 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공부에 임하여, 훗날 전국시대의 유명한 정치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漢)나라 때, 신도(信都)라는 곳에 공부를 매우 좋아하는 손경(孫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하여 밤을 새는 날이 많았다.

그는 튼튼한 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어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以繩系頭, 懸屋梁),

머리를 고정시켰다. 졸다가 머리카락이 뽑힐 듯 아프면 다시 정신을 차려 책을 읽었던 것이다.

훗날 손경은 이러한 호학(好學)정신으로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懸梁刺股 란  분발하여 책을 읽거나, 고통을 감수하며 공부함 을 비유한 말이다. 독서의 계절.

선선한 밤. 얇지만 깊은 책으로 딱 한 권이라도 읽는다면, 굳이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매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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