毛骨悚然(모골송연)
毛(털 모) 骨(뼈 골) 悚(두려워할 송) 然(그러할 연)
화감(畵鑒) 당화(唐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중기, 소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대숭(戴嵩)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소를 그리기 위해 소의 무리속으로 들어가 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소의 생활 습성을 깊게 연구하였다.
그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릴 때면, 그림 속의 소는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쳤으므로,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였다.
특히 그의 투우도(鬪牛圖) 는 소들이 들에서 활동하고, 장난하며 싸우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으로서,
전체 그림에 야성(野性)의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다.
원(元)나라의 대화가(大畵家)들은 그가 그린 싸우는 소들의 모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마리의 소들이 날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하고 머리 끝이 솟게 한다(二牛相鬪, 毛骨悚然).
그들의 공격하려는 자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가운 기운이 뼈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한다.
毛骨悚然(Hair rising and bones feeling) 이란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며 털끝이 쭈삣하여짐 을 뜻한다.
鹿死誰手(녹사수수)
鹿(사슴 록) 死(죽을 사) 誰(누구 수) 手(손 수)
진서(晉書) 석륵재기하(石勒載記下)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진(西晉)말기,
후조(後趙)의 국왕인 석륵은 재간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석륵은 외국의 사신들을 연회에 초대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석륵은 신하인 서광(徐光)에게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이전의 어느 제왕(帝王)과 비교될 것 같소?
서광은 공손하게 폐하의 지모(智謀)와 무용(武勇)은 모두 한(漢)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을 능가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석륵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은 너무 지나치오. 내가 만약 한나라 고조를 만났더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며 한신이나 팽월 같은 장군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것이오.
만약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와 함께 중원(中原)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재간을 겨루어,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오(未知鹿死誰手).
鹿死誰手 란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움 을 비유한 말이다.
車水馬龍(거수마용)
車(수레 거) 水(물 수) 馬(말 마) 龍(용 룡)
후한서(後漢書) 명덕마황후기(明德馬皇后紀)에 실린 이야기다.
동한(東漢)의 명장(名將)인 마원(馬援)의 딸은 한나라 명제(明帝)의 비(妃) 로 뽑혀 입궁하였다가 얼마후에는 후(后) 의 자리에 올랐다.
명제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마후(馬后)는 곧 태후(太后) 로 받들어졌다.
마태후는 재능과 인품이 출중하여 문무백관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으므로, 장제도 그녀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일부 간신들은 태후의 형제들을 제후에 봉해 줄 것을 황제에게 건의하고, 태후에게 아부하려고 생각하였다.
이에 마태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모두 여유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있었소.
그들의 문 앞에 수레들은 흐르는 강물과 같았고,
마필(馬匹)들의 움직임은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교룡(蛟龍)과 같았소(車如流水, 馬如游龍). 내 비록 당시에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오.
車水馬龍 이란 권세있는 자에게 줄을 대보려는 아부꾼들의 차량 행렬 을 묘사한 말이며,
수레들의 왕래가 많아 매우 떠들석한 상황 을 뜻한다.
一簞一瓢(일단일표)
一(한 일) 簞(대광주리 단) 一(한 일) 瓢(박 표)
논어 옹야(雍也)편에는 한 그릇의 밥, 한 쪽박의 물(一簞食一瓢飮)로 누추한 마을에서 살게 되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지지 못할 것이지만, 안회(顔回)는 그렇게 살면서도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다. 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대, 안회는 노(魯)나라 사람으로서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으며, 안연(顔淵)이라고도 한다.
그는 총명한 머리에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진지(眞摯)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공자는 그에게 비천한 집안을 떠나 벼슬에 나가라고 권유하였지만, 그는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 의 삶을 살았다.
안회는 29세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고, 32세에 삶을 마쳤다. 60세가 넘은 그의 스승 공자는 하늘이 나를 없애는 것이다.
하늘이 나를 없애는 것이다. 라고 하며 제자의 요절에 통곡하였다.
一簞一瓢 는 단사표음(簞食瓢飮) 이라고도 한다. 이는 극히 소박하고 적은 음식으로 유지되는 청빈(淸貧)한 생활 을 비유한 말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던 빈민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그녀는, 허름한 사리에 구멍 난 스웨터,
양말을 신지 않은 발. 그것은 그녀 생전의 옷차림이었다.
名 利鎖(명강리쇄)
名(이름 명) (고삐 강) 利(이로울 리) 鎖(쇠사슬 쇄)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여우인서(與友人書) 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唐)나라 덕종(德宗) 년간,
못생긴 외모에다 음흉한 마음씨를 가진 노기(盧杞)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어느 날, 노기는 길가에서 풍성(馮聲)이라는 가난한 선비와 마주쳤다.
노기는 여태 그를 멸시해 온터라, 마음대로 그의 주머니를 뒤져 묵(墨) 조각을 찾아내고는 큰 소리로 비웃었다.
그러나 풍성은 점잖게 이번에는 제가 당신의 짐꾸러미를 한번 뒤져보기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작은 종이 삼백여장을 찾아냈다. 이는 당시의 명함으로서 고관대작을 방문할 때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풍성은 웃으며 어찌 된 일입니까?
이렇게 삼백여장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명리(名利)의 노예인 당신과 나를 비교해 본다면, 더 나은 쪽은 누구이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名 利鎖 는 명예의 고삐 와 이익의 사슬 을 뜻하니, 이는 곧 명예와 이익에 얽매어 있음 을 비유한 말이다.
米珠薪桂(미주신계)
米(쌀 미) 珠(구슬 주) 薪(땔나무 신) 桂(계수나무 계)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은 각국으로 유세(遊說)를 다니며,
합종책(合從策)을 주장했던 유명한 종횡가(縱橫家)였다.
그가 초나라의 회왕(懷王)에게 합종책을 실행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초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는 사흘을 기다린 끝에 겨우 초회왕을 알현할 수 있었으나, 초회왕이 자신을 소흘하게 대접하는 것 같아 불쾌하였다.
소진은 초회왕이 나타나자 일부러 당장 떠나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의아하게 생각한 초회왕이 그 까닭을 묻자,
소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초나라의 식량은 주옥(珠玉)보다 비싸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 비쌉니다(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제가 주옥같이 비싼 양식을 먹고, 계수나무처럼 비싼 땔감을 태우면서, 어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米珠薪桂 란 치솟아 오르는 물가 를 비유한 말이며,
영어에는 Up corn, down horn(곡식 값이 오르면 쇠고기 값이 내린다) 라는 속담이 있다.
五日京兆(오일경조)
五(다섯 오) 日(해 일) 京(서울 경) 兆(조짐 조)
한서(漢書) 장창전(張敞傳)에 실린 이야기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때, 장창은 수도 장안(長安)의 부윤(府尹),
즉 경조윤(京兆尹)을 지냈다. 장창의 친구 양운(楊 )은 총명하고 재능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모함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장창에게는 서순(絮舜)이라는 부하가 있었다. 그는 도적 잡는 적포연(賊捕 ) 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부 대신들이 장창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장창이 곧 파면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실하게 근무하지 않고, 마음대로 놀러 다녔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 양반은 이제 길어봐야 닷새짜리 부윤인데(今五日京兆耳),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창은 즉각 명령을 내려 서순을 체포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형집행에 앞서,
장창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너는 날더러 닷새짜리 부윤이라 하였는데, 이제는 어떠냐? 라는 말을 전했다.
五日京兆 란 임직(任職)기간이 너무 짧거나 또는 아무 때나 직위를 떠나 버림 을 비유한 말이다.
倚門倚閭(의문의려)
倚(의지할 의) 門(문 문) 閭(이문 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王)은 연(燕)나라와 진(秦)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아,
나라의 보물을 모두 빼앗겼다. 또한 제나라 민왕은 위(衛)나라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초나라 대장군 요치( 齒)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제나라 대부인 왕손가(王孫賈)의 어머니는 왕손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소 네가 아침에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면,
나는 항상 문간에 서서 너를 기다린다.
만약 네가 저녁에 나갔다가 한밤중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마을어구까지 나가서 너를 기다릴 것이다.
이제 왕의 행방을 알수도 없고, 지금까지 왕이 돌아오지도 않는데, 너는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느냐?
왕손가는 어머니의 말씀에 감동되어 즉시 민왕을 찾아 보려고 하였다.
그는 민왕이 이미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여, 사백여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요치의 거처로 쳐들어가서 그를 죽이고 말았다.
倚門倚閭 란 자녀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 을 비유한 말이다.
目不識丁(목불식정)
目(눈 목) 不(아닐 불) 識(알 식) 丁(고무래 정)
신당서(新唐書) 장굉정(張宏靖)전에 실린 이야기다. 당(唐)나라 목종(穆宗) 시기, 정치는 부패하고 관리들의 생활은 방탕하기 짝이 없었다. 유주(幽州) 절도사(節度使) 장굉정의 막료인 위옹과 장종후 등은 매일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즐겼다.
관아(官衙)를 나서고 돌아올 때에는 앞뒤에 호위를 세우고, 등불을 환하게 밝히며 추태를 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하급 군관들이나 사병들은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으며, 항상 그들은 때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어느날, 그들은 수하(手下)의 한 군관을 꾸짖으며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천하에는 전쟁이 없다.
너희들이 아무리 두 석 무게의 석궁을 끌어 당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丁 자 하나 아는 것만도 못하다
(汝輩挽得兩石力弓, 不如識一丁字) 라고 하였다.
目不識丁(Not to know A from a windmill) 이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한자를 모르는 한맹(漢盲)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 졸업자들의 한자능력이 평균 30점도 못된다는 한 조사결과도 나왔다.
학사 학위에 까막눈이라니. 이는 벙어리 영어교육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眼中釘(안중정)
眼(눈 안) 中(가운데 중) 釘(못 정)
신오대사(新五代史) 조재례전(趙在禮傳)에 실린 이야기다. 오대(五代) 후당(後唐)시대 당(唐)나라의 명종(明宗)이 재위할 때,
송주(宋州)의 절도사로 조재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포악한 정치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반발하거나 불평하지 못했다.
조재례가 송주를 떠나 영흥(永興)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송주 백성들은 모두 조재례가 떠난다니,
마치 눈에 박힌 못이 빠진 것 같은데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나(眼中拔釘, 豈不樂哉) 라며 기뻐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조재례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곧 황제에게 송주의 절도사로 유임(留任)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황제는 조재례의 뜻이 백성들의 희망때문인 것으로 알고, 그로 하여금 유임하도록 했다. 다음 날, 조재례는 즉각 명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못을 뽑아내는 비용으로 일인당 1천문의 돈을 내도록 하고,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眼中釘(a thorn in the eye) 이란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