鈍銘千字

고사성어_10

醉月 2009. 6. 27. 08:41

  以卵擊石(이란격석)
  以(-써 이) 卵(알 란) 擊(부딪칠 격) 石(돌 석)
 
  묵자(墨子) 귀의(貴義)편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말이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기,

묵자는 노(魯)나라를 떠나 북쪽의 제(齊)나라로 가는 길에 점장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 점장이는 묵자에게 북쪽으로 가는 것이 불길하다고 말했다.

묵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계속 북쪽으로 향하여 치수(淄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치수의 물흐름이 너무 빨라 건널 수 없게 되자 묵자는 다시 돌 수 밖에 없었다.
  되돌아 오는 묵자를 보고 그 점장이는 거만하게 굴며 묵자의 기분을 건드렸다.
묵자는 제나라에 가지 못하게 된 판국에 점장이의 비웃음까지 받게 되자, 몹시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말은 근거없는 미신이오. 당신의 말을 믿는다면 천하에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러한 말로써 나의 말을 비난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돌을 치는 것과 같소(以其言非吾言者, 是猶以卵投石也).

천하의 계란을 다 없앤다 해도 돌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오. 
   以卵擊石 은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 는 뜻이니, 이는 곧  손해만 볼 뿐 이익이 없는 어리석은 일 을 비유한 말이다. 

  起死回生(기사회생)
  起(일어날 기) 死(죽을 사) 回(돌이킬 회) 生(날 생)
 
  사기(史記) 편작창공(扁鵲倉公)열전에는 춘추(春秋)시대의 명의(名醫) 진월인(秦越人)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월인은 당시 의원(醫員)이었던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워 천하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설속의 신의(神醫)인 편작(扁鵲)이라 호칭하였다.
  백성들을 치료해 주며 천하를 돌던 어느 날, 그는 괵( )나라를 지나면서 멀쩡하던 태자(太子)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왕의 부름으로 입궐하여 태자의 상태를 검사하였다. 태자는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

진월인은 태자에게 침을 놓았다. 잠시 후, 태자가 깨어나자, 그에게 처방문을 써주었다.

그의 처방대로 치료를 받은 태자는 한 달도 못되어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진월인이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는  저는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그로 하여금 일어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越人非能生死人也. 越人能使之起耳). 라고 하였다.
   起死回生(Restoration of the dead to life) 이란  죽을 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살아남 을 뜻한다.

요즘 이 말을 보면  起亞 回生 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一國三公(일국삼공)
  一(한 일) 國(나라 국) 三(석 삼) 公(공변될 공)
 
  춘추좌전 희공(僖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진(晋)나라의 군주인 헌공(獻公)은 공자(公子)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위하여 대부(大夫)인 사위(士蔿)를 시켜서 포(蒲)땅과 굴(屈)땅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의 축성작업에 불만을 품은 이오는 헌공에게 호소하였다.

크게 노한 헌공의 문책에 사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이 없는데도 성을 쌓으면 그 성은 적군에게 이용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견고하게 쌓아 훗날 적에게 진지로 이용당한다면,

이는 곧 불충(不忠)의 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실하게 쌓는다면 이는 임금에 대한 불경(不敬)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불충불경의 죄를 범하였으니 어떻게 해야합니까?

덕으로 나라가 안정되어 후대가 견고하다면, 이보다 나은 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집에 돌아와서  여우가죽 옷 갈래갈래 찢어지듯, 한 나라에 세 임금 있으니,

내 누구를 따라야 할꼬(狐 尨茸, 一國三公, 吾誰適從)! 라는 시를 읊었다. 

 一國三公 이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구구한 의견을 제시함 을 비유한 말이다.   
  
  騎虎難下(기호난하)
  騎(말탈 기) 虎(범 호) 難(어려울 난) 下(아래 하)
 
  수서(隋書) 독고황후전(獨孤皇后傳)에는 수나라의 건국에 관한 대목이 있다.

남북조(南北朝)시기, 북주(北周)의 자사(刺史)인 양견(楊堅)은 북주 대사마 독고신(獨孤信)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독고신의 또 다른 딸은 주나라 명제(明帝)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으며,

양견은 또 자신의 맏딸을 명제의 아들인 선제(宣帝)에게 시집보내어 황후가 되게 하였다.
  서기 580년, 선제가 세상을 떠나자 8세된 정제(靜帝)가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때 양견은 정제를 보좌하며 쉽게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 독고씨는 양견이 이미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제위를 차지하도록 종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의 일이 이미 이렇게 된 바, 당신은 맹수의 등에 올라탄 것과 같으니,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大事已然, 騎獸之勢, 必不得下). 
  581년 3월 정변(政變)을 일으킬 시기가 되었다고 확신한 양견은 마침내 정제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수(隋)나라 문제(文帝)였다.
   騎虎難下(Needs must when the devil drives) 는  騎虎之勢 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미 시작된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둘 수 없음 을 비유한 말이다. 
  
  班門弄斧(반문농부)
  班(나눌 반) 門(문 문) 弄(희롱할 롱) 斧(도끼 부)
 
  명(明)나라 매지환(梅之渙)은 이태백의 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여 제이백묘시(題李白墓詩)라는 시를 썼다.

태백(太白)이라는 자(字)로 더 유명한 이백은 술을 매우 즐겼으며, 사람들은 그를 이적선(李謫仙)이라 하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들이 있다. 채석강에서 익사했다거나,

풍랑과 함께 나타난 거대한 고래와 신선들이 강에 배를 띄우고 놀고 있던 그를 데리고 하늘로 사라졌다고 하는 것 등이 그렇다.
  훗날 채석강 부근에는 이백의 묘를 비롯한 적선루, 착월정 등의 많은 명승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많은 문인들도 이곳에서 시흥(詩興)를 느꼈다. 이렇다보니 시를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저마다 한 수씩를 읊어대게 되었다.

시인 매지환은 나무 공예, 즉 목장(木匠)의 시조라는 노반(魯班)의 고사을 인용하여 이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풍자하였다.
   채석강변에 한 무더기 흙, 이백의 이름 천고에 높은데, 오고 가는 사람마다 시 한수씩 읊조리니,

노반의 문앞에서 도끼 자랑하는도다(來來往往一首詩, 魯班門前弄大斧) 
   班門弄斧(Teach a dog to bark) 란  전문가 앞에서 얄팍한 재주를 뽐냄 을 비유한 말이다. 
  
  傑犬吠堯(걸견폐요)
  傑(뛰어날 걸) 犬(개 견) 吠(짖을 폐) 堯(요임금 요)
 
  사기(史記) 노중련추양(魯仲連鄒陽)열전에는 한(漢)나라 경제(景帝)때의 유명한 학자인 추양(鄒陽)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처음에, 추양은 뛰어난 문장력과 언변을 가지고 오왕(吳王) 수하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오왕이 반란을 꾀하자,

그는 이를 따르지 않고 간언하는 글을 올렸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추양은 양(梁)나라 효왕(孝王)에게 귀순하였다.
  그러나 효왕의 심복들은 추양의 재능을 시기하여, 효왕에게 그를 중상모략했다.
크게 노한 효왕은 추양을 구금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는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효왕에게 글을 올려 모략당한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모두 충절지사 였음을 말하고,

사실을 정확히 살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글에서  어진 선비에게 벼슬과 봉록을 베푼다면,

포악한 걸왕의 개라도 성왕(聖王)인 요임금에게 대들어 짖게 할 수 있다(傑之狗可使吠堯) 라고 하였다.

양 효왕은 이 글에 매우 감동하여, 그를 석방하였다.
   傑犬吠堯 란, 하(夏)나라 폭군 걸왕이 부리는 개가 그의 명을 받고 요임금과 같은 성왕(聖王)에게도 짖고 덤벼드는 것처럼 

자기가 섬기는 사람에게는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충성을 다함 을 비유한 말이다. 
  
  靑天霹靂(청천벽력)
  靑(푸를 청) 天(하늘 천) 霹(벼락 벽) 靂(벼락 력)
 
  송(宋)나라에 육유(陸游:1125-1210년)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평생 광범한 제재(題材)로 1만여수의 시를 썼으며, 인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내면서 고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의 저작 중의 하나인 검남시고(劍南詩稿)에는 사일야계미명기작(四日夜鷄未鳴起作)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동안 병상에서 지냈던 그는, 음력 9월 어느 가을 날 닭들도 채 일어나지 않은 아침에,

이 시에서 자신의 적막한 만년(晩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내 병든 채 가을을 보내려다,

  문득 일어나 붓을 놀리니,

  마치 오래동안 틀어박혀 있던 용이,

  푸른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치듯 하네(正如久蟄龍, 靑天飛霹靂)


  육유는 병들어 드러 누워있던 자신이 갑자기 붓을 들어 시를 짓는 행동을 맑은하늘에서 용이 벼락을 치는 것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靑天霹靂(a bolt from the blue sky) 이란 본시  갑작스런 행동 을 뜻했으나,
지금은  뜻밖에 발생한 재난(災難)이나 변고(變故) 를 비유한 말로 쓰인다.   
 

杯盤狼藉(배반낭자)
杯(잔 배) 盤(소반 반) 狼(이리 랑) 藉(깔개 자)
 
  사기(史記) 골계(滑稽)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있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 위왕(衛王)은 주색을 즐겨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초(楚)나라가 공격해 오자 언변에 능한 순우곤(淳于 )을 시켜 조(趙)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다.
조나라 도움으로 초나라 군대가 물러가자 위왕은 크게 기뻐하며 순우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주량을 묻는 위왕에게 순우곤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라고 대답하며, 그 까닭을 설명했다. 

대왕 앞에서는 황공하여 한 말이면 취해 버리지만, 만약 남녀가 함께 앉아 마신다면, 여덟 말쯤 마셔야 취하게 됩니다.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절정에 이르고, 남녀가 한 자리에서 무릎을 맞대고 신발이 뒤섞이며,

잔과 접시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履 交錯, 杯盤狼藉), 아름다운 주인 여자가 저 한 사람만 머물게 한다면   

저는 마음이 즐거워져서 한 섬 술도 마실 수 있습니다.
   杯盤狼藉(Cups and plates are all in disorder after a feast) 란  잔치가 파할 무렵이나 파한 뒤의 어지러운 술 자리 를 형용한 말이다.

피서철인 요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떠들석한 술자리와 산더미같은 쓰레기가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華而不實(화이부실)
  華(꽃 화) 而(말이을 이) 不(아닐 불) 實(열매 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진(晉)나라 대신(大臣) 양처보(陽處父)는 위(衛)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魯)나라 영성( 城)의 한 집에 묵게 되었다.

집 주인 영( )은 양처보의 당당한 모습과 비범한 행동을 보고 그와 함께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양처보의 동의를 얻은 후, 영은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를 따라 길을 나섰다.

그런데 영은 온(溫) 땅에 이르자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다. 영의 아내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에 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다만 사납고 강한 성질로만 처세하고,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속으로는 덕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집중시키고 있소(且華而不實, 怨之所聚也).

이러한 사람을 따른다면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지도 못하고 이익은 커녕,
도리어 그의 재난에 관련될 것을 두려워했소. 그래서 나는 그를 떠나 돌아 온 것이오.
   華而不實(Flowery but bears no fruit) 이란  사람이나 사물이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알맹이가 없음 을 비유한 말로서,

곧 사람들의 가식과 허영을 경계하고 있다.
  
  不寒而慄(불한이율)
  不(아닐 불) 寒(찰 한) 而(말 이을 이) 慄(떨 률)
 
  사기(史記) 혹리(酷吏)열전에는 혹독한 관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중앙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호족 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채용하였다.

당시, 의종(義縱)이라는 사람은 왕태후의 총애를 받은 누님의 덕택으로 현령과 도위를 지내다가, 남양 태수를 거쳐 다시 정양 태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는 남양태수로 재임하면서, 도위(都尉)였던 영성(寧成)의 일가를 죽인 바 있어, 이미 법 집행이 엄격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정양 태수로 부임하자, 정양군내의 호족세력을 평정한 후, 2백여명의 범죄자들을 체포하였다.

동시에 그는 사적(私的)으로 감옥에 드나들며 죄인들을 면회한 사람들을 죄수 탈옥 기도죄로 구속하였다.

의종은  이 자들은 사형수들을 탈옥시키려 하였다 라고 판결하고, 그 날 중으로 4백여 명을 전원 죽였다.

이후 군내의 호족들과 백성들은 춥지 않아도 벌벌 떨었으며(其後郡中不寒而慄),

교활한 자들은 알아서 관리에게 협력하여 공무를 도왔다.
   不寒而慄(Trembling without being cold) 은  몹시 두려운 상황 을 형용한 말이다.

무더위 속에서 공포 영화를 즐기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不恥下問(불치하문)
  不(아닐 불) 恥(부끄러워할 치) 下(아래 하) 問(물을 문)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는 배움의 태도를 일깨워주는 대목이 있다.
  춘추(春秋)시기, 위(衛)나라 대부(大夫)였던 공어(孔 )는 매우 겸손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찬사와 칭송을 받았다. 공어가 죽자,

위나라 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호학(好學) 정신을 배우고 계승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문(文) 이라는 봉호(封號)를 하사하였다.
  당시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위나라의 자공(子貢)은, 공어에게는 잘못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만큼 그렇게 훌륭하지 않으며,

또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자공은 스승인 공자에게  공어의 시호(諡號)는 무엇 때문에 문(文)이라 합니까? 라고 물었다.
  공자는 말하길  그는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랫사람에게도 묻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敏而好學, 不恥下問).

그래서 그를 문(文)이라 하였던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不恥下問(Not ashamed to ask of one's inferiors) 은  하문불치(下問不恥) 라고도 하는데,

이는  분발하여 학문을 함에 마음을 비우고 가르침을 구하는 정신 을 형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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