汗流浹背(한류협배)
汗(땀 한) 流(흐를 류) 浹(적실 협) 背(등 배)
사기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의 이야기. 서한(西漢)시기, 한문제(漢文帝)는 태위 주발(周勃)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진평은 좌승상에 임명하였다. 문제는 국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자, 어느 날 조회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물었다. 일 년 동안 전국에서 옥사를 판결하는 건수가 얼마인가? 주발은 사죄하며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문제는 다시 일 년 동안 전국의 재정상의 수입과 지출이 얼마인가를 물었다.
주발은 또 모른다고 사죄하며 땀으로 등을 적시면서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汗出霑背, 愧不能對).
문제가 다시 진평에게 묻자, 진평은 조리있게 대답을 잘했다. 문제는 진평의 답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우승상 주발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신의 능력이 진평에 못 미침을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주발은 병을 핑계로 재상의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외환 위기의 책임 문제가 강도높게 제기되고 있다. 아마도 몇몇 사람들은 지금쯤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을 것이다. 汗流浹背 란 극도로 무서워하거나 긴장된 상황 을 비유한 말이다.
欲蓋彌彰(욕개미창)
欲(하고자 할 욕) 蓋(덮을 개) 彌(널리 미) 彰(밝힐 창)
춘추좌전 소공(昭公) 31년조의 이야기. 춘추시기, 노(魯)나라 소공 31년 겨울, 주( )나라 대부 흑굉(黑肱)이 주나라를 배반하고 노나라에 투항하자, 그가 다스렸던 남(濫)땅은 노나라에 편입되었다. 흑굉은 본시 신분이 높은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굳이 그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공자는 흑굉으로 인하여 국토의 변동이라는 큰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 춘추에 이 사건을 분명히 기록하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름이 나타나 있으면서도 나타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한 일이 있다. 토지를 지니고 군주를 배반한 일은, 그의 지위가 비록 낮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 땅 이름을 써서 밝히고 그 사람을 말했는데, 그것은 결국 불의(不義)가 되고, 그 불의는 없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몸이 움직이게 되면 예의를 생각하고, 무슨 일을 행하면 의리를 생각하며, 이익을 위해서 비뚤어지지 않고, 의리를 위해서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혹은 이름나기를 원하나 이름나지 못하게 되고, 혹은 이름을 감추려 하나 이름이 나타나게되는 것은 불의를 징벌하려는 것이다(或
欲蓋而名章, 懲不義也). 欲蓋彌彰 은 진상을 감추려 하나 모두 드러나게 됨 을 뜻한다.
出爾反爾(출이반이)
出(날 출) 爾(너 이) 反(되돌릴 반) 爾(너 이)
맹자 양혜왕(梁惠王) 하편에 나오는 이야기. 전국시대 추나라는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였다. 추나라 목공은 자신의 잘못된 정치를 반성하지 않고, 병사들과 백성들이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아 패하였다면서 그들을 탓하였다. 가르침을 청하는 목공에게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흉년과 기근이 든 해에 추나라의 백성들 중에는 노약자들이 도랑에 빠져 죽고,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는데, 그 수효가 천명에 가깝습니다. 한편 관리들은 왕의 창고에는 곡식과 물자가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 사실을 왕께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윗사람이 교만하여 아랫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증자는 경계할지라. 너에게서 나간 것은 너에게로 돌아오느니라(出乎爾者, 反乎爾者也) 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당한 것을 다시 갚았던 것이니, 왕께서는 그들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렇듯 정치의 품질에 따라 국민들의 충성의 질도 달라진다. 좋은 정치에는 칭송과 박수 갈채가 따르지만, 나쁜 정치에는 비난과 야유라는 보답이 있을 뿐이다. 出爾反爾 는 언행의 앞뒤가 서로 모순되고 신의(信義)가 없음 을 비유한 말이다.
曲學阿世(곡학아세)
曲(굽힐 곡) 學(배울 학) 阿(아첨할 아) 世(세상 세)
사기 유림열전(儒林列傳)의 이야기다. 한나라 경제(景帝) 때, 시경(詩經)에 정통했던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학문으로 왕자의 스승을 지냈으나 병 때문에 물러났다. 얼마 후,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원고생은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되었는데, 아첨을 일삼는 관리들은 그가 너무 늙었다며 헐뜯었다.
원고생이 조정의 부름을 받았을 때, 당시 60세이던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사람도 함께 부름을 받았다. 공손홍은 늙은 원고생을 꺼리며 마땅치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에 원고생은 공손홍의 태도를 보고 말했다.
바른 학문에 힘써 직언(直言)하도록 하시오. 배운 것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일부 대학, 그것도 국립 대학의 교수 채용을 둘러싼 비리(非理) 소식이 보도되었다. 자존심을 포기한 선비들의 왜곡된 학문의 결과이며,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별로 신기하지 않은 비밀(?)이기도 하다. 曲學阿世 란 이렇듯 자신의 학문을 굽히면서 권세나 세속에 아첨하는 것 을 뜻하는 말이다.
兼聽則明(겸청즉명)
兼(겸할 겸) 聽(들을 청) 則(곧 즉) 明(밝을 명)
자치통감(資治通鑒) 당기(唐紀)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조의 이야기. 당나라 태종 때 위징(魏徵)이라는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다. 그는 역사에 정통하였기 때문에 항상 당태종에게 여러 가지 계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서기 628년,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은 당태종이 그에게 물었다.
나라의 군주로서 어떻게 해야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는가? 또한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경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위징은 이렇게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 말만 듣고 그것을 믿는다면 일을 잘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위징은 역사적인 교훈을 예로 들면서, 군주의 편파적인 판단이 얼마나 큰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지 설명하였다. 위징의 말은 차기 대통령의 비서진과 각료 인선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兼聽則明 이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면 시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음 을 뜻한다.
負重致遠(부중치원)
負(질 부) 重(무거울 중) 致(보낼 치) 遠(멀 원)
삼국지 촉서(蜀書) 방통(龐統)전의 이야기. 삼국시기,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이었던 주유(周瑜)가 병으로 죽자, 그의 친구인 방통은 몹시 슬퍼하며 달려와 조문을 하였다. 박학다식하고 명성이 높은 방통이 동오지방에 오자, 동오의 명사(名士)인 육적, 고소, 전종 등은 그와 친분을 맺었다. 문상을 마치고 방통을 환송하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방통은, 육적에 대해서는 잘 달리는 말과 같은 인재라고 하고, 고소는 힘든 일을 이겨내며 일하는 소와 같다라고 하고, 전종은 지혜는 좀 떨어지지만 그 역시 당대의 인재라고 평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방통에게 그렇다면 육적의 재능이 고소를 능가한다는 뜻입니까? 하고 묻자, 방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말은 민첩하여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한 사람 밖에 태울 수 없소. 하지만 소는 하루에 삼백리를 갈 수 있거니와, 소가 짊어진 짐이 어찌 한 사람의 몸 무게만 되겠소?
負重致遠 이란 무거운 물건을 지고 먼 곳까지 간다는 뜻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음 을 비유하는 말이다.
屢見不鮮(누견불선)
屢(여러 누) 見(보일 견) 不(아닐 불) 鮮(깨끗할 선)
사기 역생육가( 生陸賈)열전의 이야기. 초한(楚漢)이 천하를 다투던 때, 한나라의 유방(劉邦)을 수행하며 세객(說客)으로 있던 육가(陸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방이 죽은 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육가는 월(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받은 두 개의 보물자루를 천 금을 받고 팔아, 자식들에게 2백 금씩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보검(寶劍)을 차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탄 채 하인 10명을 거느리고 다녔다. 어느 날, 육가는 자식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너희들 집에 들르거든 너희들은 하인들과 말에게도 음식을 주어야 하며, 10일간 지내고 다음 집으로 갈 것이다. 그러다 내가 죽게 되거든 바로 그 집에서 나의 보검, 수레와 말, 그리고 하인들은 갖도록 하여라. 여러 군데 들르다 보면 1년 중 너희들 집에 들르는 것은 두세 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너무 자주 보면 새롭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한 번 총리는 영원한 총리(?). 잘 하면 두 세기에 걸쳐 해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구관(舊官)의 대명사인 JP를 놓고 되느니 안되느니 말이 많다. 屢見不鮮 이란 너무 자주 보아 전혀 새롭지 않음 을 뜻하는 말이다.
行不由徑(행불유경)
行(갈 행) 不(아닐 불) 由(따를 유) 徑(지름길 경)
논어 옹야(雍也)편의 이야기.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이라는 작은 고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에게 축하도 하고, 또 잘 하고 있는 지도 볼 겸하여 공자가 찾아 왔다. 공자는 반가운 마음으로 자유에게 자유아, 일을 잘하려면 좋은 사람이 필요할 텐데, 너의 수하에 쓸만한 인재이라도 있느냐? 하고 물었다.
자유가 대답하였다. 예, 있습니다. 성이 담대(澹臺)이고 이름이 멸명(滅明)이라는 자가 있사온데, 그는 언제나 지름길로 다니지 않으며(行不由徑),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저의 방에 찾아 오는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입니다.
돈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일부 대학의 교수들, 그리고 전현직 판사들과 변호사들, 소위 지도급 인사들의 냄새나는(?)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이 번듯한 큰 길을 두고 자꾸 샛길만을 고집하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徑 은 지름길이나 샛길 을 뜻한다. 行不由徑 이란 지름길이나 샛길을 가지 않고 떳떳하게 큰 길로 가는 것이니, 이는 곧 눈 앞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함 을 비유한 말이다.
一葉障目(일엽장목)
一(한 일) 葉(잎 엽) 障(가로막을 장) 目(눈 목)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이 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갈천자( 冠子) 천칙(天則)편의 이야기. 옛날 초나라 땅에 가난한 한 서생(書生)이 있었다. 그는 회남자(淮南子)를 읽고 사마귀 벌레가 매미를 잡을 때 나뭇잎에 몸을 숨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나무를 찾아 잎사귀를 모조리 따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나뭇잎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채 아내에게 자기의 모습이 보이는지 물어보았다. 처음 그의 아내는 다 보인다. 고 대답하였으나, 남편이 계속 이렇게 눈을 가리고 다니자 어찌나 보기 싫었던지 그만 보이지 않는다 고 말해버렸다
아내의 말에 자신감이 생긴 서생은 잎사귀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길거리로 나갔다. 그는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심문하는 관리에게 나뭇잎으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당신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는 관리로부터 미친 놈 대접을 받았다.
一葉障目 은 국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미혹되어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함 을 비유한 말이다.
一傅衆 (일부중휴)
一(한 일) 傅(스승 부) 衆(무리 중) (떠들 휴)
맹자 등문공하( 文公下)편의 이야기. 전국(戰國) 시대, 송(宋)나라의 대부 대불승(戴不勝)이 강왕을 도와 인정(仁政)을 실시해 보려고 설거주(薛居州)를 시켜서 왕을 보필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맹자는 송나라를 방문하였다. 대불승을 만난 맹자는 그에게 물었다.
어떤 초(楚)나라 대부가 자기 아들에게 제(齊)나라 말을 배우게 하려는데, 제나라 사람을 시켜 가르치는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초나라 사람을 시켜서 가르치는 게 낫겠습니까? 대불승은 당연히 제나라 사람을 시켜서 가르쳐야 겠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나라 사람 한 명이 가르치는데, 많은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고 떠들기만 한다면(一齊人傅之, 衆楚人 之), 매일 매 때리며 제나라 말을 하라고 강요한다 해도 배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를 몇 년 동안 제나라의 번화한 길거리에 데려다 두고, 배우게 한다 할지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맹자는 대불승 혼자의 힘으로는 어진 정치가 실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다. 一傅衆 란 학습 환경이 좋지 않고 방해가 많음 을 뜻하며, 일에 성과가 없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道傍苦李(도방고리)
道(길 도) 傍(곁 방) 苦(쓸 고) 李(오얏 리)
진서(晉書) 왕융전(王戎傳)의 이야기. 진 나라의 왕융(서기 234-305년)은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며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좋아하였다. 그는 유유자적하며 인생을 즐기고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왕융이 일곱 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동네의 아이들과 놀다가 문득 길가의 자두나무에 가지가 휘어지게 많은 자두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따려고 앞다투어 그 나무로 달려갔으나, 왕융만은 그 자리에 가만 있었다.
그때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왕융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왜 따러가지 않고 서 있는 거냐?
왕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무가 길 가에 있는데도 열매가 저렇게 많이 달려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써서 먹지 못하는 자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 자두를 따서 맛을 보니 과연 왕융의 말처럼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道傍苦李 란 길 옆의 쓴 자두나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버린 물건이나 무용지물 을 비유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