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겨울바다 포항 기행

醉月 2012. 2. 6. 11:26

호미곶 인근의 바다는 늘 거칠다. 높이 일어선 파도가 흰 포말을 만들면서 연방 해안 쪽으로 몰려온다. 호쾌하면서도 비장한 느낌의 바다 앞에 서면 알싸한 박하향이 느껴지는 듯하다.

거기서는 겨울 풍경이 더 강렬하고 또렷해집니다. 겨울 바람이 해안선을 따라 우우 몰려다니고, 먼 바다에서부터 겹쳐지는 파도가 허연 이빨을 드러내는 곳. 다름 아닌 경북 포항의 바다입니다. 포항에서도 한반도의 꼬리를 이루는 호미곶 쪽 바다가 가장 거칠고 강렬하답니다. 하선대에서부터 구룡소를 지나 호미곶과 구룡포를 거쳐 양포항까지 이어지는 그 길에서는 바람과 거친 파도의 기운에 온몸을 맡길 수 있습니다. 어쩐지 비장미가 느껴지는 그 바다에 서면 혹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짐승이 포효하며 깨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포항의 바다 앞에 서면 주위가 선명해집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렇습니다. 잔뜩 흐린 날이거나, 포항시내가 연무에 휩싸여 있을 때도 호미곶으로 향하는 925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시야는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해집니다. 무겁고 짙은 청색의 바다와 벌떡 일어선 파도가 끌고오는 흰 포말의 색감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날개를 접고 몰려앉은 갈매기떼들을 바라보노라면, 아마도 눈이 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실 겁니다.

포항을 찾았다면 죽도시장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동해안 최대 상설시장이라는 죽도시장에는 온갖 해산물들이 그득합니다. 횟집만 자그마치 200곳이 넘는다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한쪽에서는 고래고기를 썰어내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집게 발을 든 대게들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이즈음의 죽도시장 생선 난전에는 어린 아이 크기만한 대구와 찬 바다에서 잡아올린 돌문어가 한창이더군요. 그러나 죽도시장에서 꼭 보아야 할 것은 좌판에 내놓은 생선들보다, 그 뒤편에 바지장화를 신고 연신 허연 입김을 뿜어대고 있는 상인들의 펄펄 뛰는 삶의 풍속화입니다. 겨울 아침 추위는 매섭지만, 삶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시장을 돌아보다 보면 갓 잡아올려 펄떡거리는 생선 몇 마리와 함께 ‘삶의 용기’ 같은 것을 하나쯤은 가져갈 수 있으실 겁니다.

포항에는 바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얼어붙은 저수지 물에 둥글게 안겨 있는 오어사의 겨울 정취는 빼놓으면 아쉬울 곳입니다. 절집이 바라뵈는 저수지 산책로를 걷는 것도 좋겠고, 햇살이 설핏해질 무렵부터 해거름에 절집 뒤편 깎아지른 바위에 올라앉은 자장암에 올라 발 아래를 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절집이 얼어붙은 물과 빚어내는 그윽한 경관은 필시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질 것입니다.


# 거친 파도가 만들어 내는 포말 앞에 서다 = 포항 호미곶 일대의 바다가 보여주는 겨울풍경은 비장하고, 또 선명하다. 쉼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거친 갈기가, 성난 바다 위를 힘차게 차고나가는 어선들이 이리도 또렷할 수 없다. 시야는 난바다로 툭 터져 있고, 그 바다는 힘찬 파도가 몰고온 포말로 가득하다.

포항의 오어사는 절집에 깃든 원효와 혜공스님의 이야기도 자못 흥미롭지만, 저수지 오어지를 앞에 두고, 뒤로는 자장암이 들어선 암봉을 두르고 있는 경관만으로도 빼어난 곳이다. 오어지가 겨울추위에 푸르게 얼어붙었다.
이쪽의 바다는 서정보다는 서사에 가깝다. 우우 몰아치는 바닷바람은 차지만 해안가의 갯바위들을 치는 성난 파도는 끓어오르듯 뜨겁다.

호미곶 드라이브는 도구해수욕장 쪽에서부터 구불구불 오래된 어촌마을을 따라가는 925번 지방도로를 타고 간다. 크게 휘어져 들어온 만과 거친 바다를 줄곧 옆에 끼고 달리는 길이다. 이 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밀조밀한 풍경들로 가득하다. 하선대와 선바위, 장군바위와 두꺼비바위 등을 지나면 ‘까꾸리개’라 이름 붙여진 갯바위로 가득한 해안을 만난다.

까꾸리개란 이름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셀 때 해안 가까이로 회유하는 청어떼가 갯바위까지 떠밀려나와 갈퀴로 쓸어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우뚝한 해안에는 청어 대신 갈매기떼가 하얗게 바다를 뒤덮고 있어 그 모습이 자못 장관이다.

해안도로 옆에는 ‘일본실습선 조난기념비’가 서있다. 1901년 일본 수산학교 실습선이 지형탐사와 측량을 위해 호미곶 인근을 운항하다 거친 파도에 그만 침몰하고 만 자리다. 아무리 실습이라고 해도 다른 나라의 영해로 들어와 수중지형을 탐사하거나 측량하는 것은 범죄에 해당하는 일. 그러나 일본은 ‘실습선 침몰이 등대 등 해양안전시설 미비로 인해 일어났으니 전적으로 한국 정부의 책임’이라며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고는 일본은 한국정부에 ‘등대건설을 우리에게 맡기라’고 해서 공사비를 받아 챙기고 등대를 건설했다. 이게 바로 100여년 전 호미곶 등대가 세워진 연유다.

호미곶을 돌아 구룡포 쪽으로 향하는 929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파도는 한층 거세진다. 해안 쪽으로 딱 붙은 길을 따라가노라면 겹겹이 밀려오는 높은 파도 때문에 현기증마저 일 정도다.

과메기가 꾸득꾸득 말라가는 구룡포읍의 뒷골목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식 가옥 50여채가 밀집한 거리가 있다. 1925년 일제가 구룡포항을 개발하고 일대의 황금어장 침탈에 나서면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 골목은 지금 ‘근대문화역사거리’ 조성을 위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지만, 아쉬운 대로 옛 분위기를 느낄 수는 있다.

# 죽도시장, 펄펄 뛰는 치열한 삶의 풍경들 = 포항 죽도시장은 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온갖 수산물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규모만으로도 ‘동해안 최대의 상설시장’이란 이름값을 넉넉히 하고도 남는다. 시장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200여개의 횟집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고, 좌판에서는 고래고기와 꿈틀거리는 돌문어, 등 푸른 고등어, 손바닥보다 큰 등딱지의 대게까지 없는 게 없다.

포항 죽도시장 수협위판장에서 경매사가 갓 잡아 들여온 대구를 경매하고 있다.
이즈음 죽도시장에 가장 많이 들어오는 것이 과메기와 대구. 대구는 웬만한 것도 죄다 팔뚝 크기를 넘고, 큰 것은 어린아이만 하다. 크기가 1m는 됨직한 것이 한 마리에 2만원 아래니 가격도 헐한 편이다. 포항에서는 과메기야 흔전만전하다. 횟집에는 아예 다른 메뉴를 주문해도 곁들이로 과메기를 빼놓지 않고 내놓을 정도다.

포구를 끼고 있는 죽도시장 한쪽에서는 오전 6시부터 하루종일 경매가 열리는데, 경매 수량이 많은 이른 아침이 더욱 활기차다. 경매시장에 부려지는 수산물은 고깃배에서 들여온 것도 있고, 좀 더 높은 값을 받고자 인근에서 잡은 수산물을 활어차로 실어온 것들도 있다. 부려놓은 수산물이 바닥에 내려지면 떠들썩한 경매가 시작된다. 바다에서 막 건져내 바로 경매장으로 온 수산물들은 어찌나 싱싱한지 그대로 바다로 돌아갈 것 같다.

죽도시장은 수산물만 펄펄 뛰는 것이 아니다. 엄동설한의 추위에도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억센 시장 사람들의 삶도 기운찬 것은 마찬가지다. 허연 입김을 뿜으며 배에서 잡아온 고기를 내리는 뱃사람들과 잡아온 수산물 주위를 빙 둘러서서 치열하게 경매를 진행하는 경매사와 중매인들, 그리고 경매 물건을 받아다가 좌판에 펼쳐놓고 꽁꽁 언 손을 비비며 생선을 손질하는 아주머니들이 시장을 살아 숨쉬게 만든다.

포항시내에서 죽도시장 말고 들를 만한 곳을 한 곳만 꼽으라면 포스코역사관을 꼽을 수 있겠다. 포항제철 건립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다양한 기록들을 두루 모아놓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최근 작고한 박태준 포스코명예회장의 자취와 함께 한국의 근대화과정에 뿌려진 피와 땀을 느껴볼 수 있다.

# 벼랑위 암자에 올라 오어사를 굽어보다 = 포항이라면 대부분 바다를 먼저 떠올리지만, 포항 일대의 깊은 산중에 들어선 사찰의 정취도 각별하다. 포항의 사찰 중에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어사다.

‘나 오(吾)’자에 ‘물고기 어(魚)’자를 이름으로 쓴다. 원효와 혜공선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먹은 물고기를 살리는 법력을 겨뤘는데, 물고기 한 마리가 거슬러 올라오자 이것을 두고 서로 자신의 물고기라 했던 데서 절집의 이름이 유래됐다고 전한다. 오어사의 내력을 소개한 삼국유사의 기록에다 민담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오어사는 절집을 휘감아 흐르는 물길을 막아 만든 저수지 오어지를 끼고 있다. 저수지의 물가에 둥글게 곶을 이루는 절묘한 지점에 절집은 앉아 있다. 앉은 자리부터 그윽하기 이를 데 없다. 절집의 돌담을 끼고 얼어붙은 물가를 따라 걷는 맛도 좋고, 출렁다리 원효교를 건너가 물 건너편에서 절집을 건너다보는 것도 운치 있다.

그중 빼어난 경치가 펼쳐지는 곳이 오어사 뒤편의 깎아지른 암봉 끝에 올려진 암자 자장암이다. 오어사에서 10분 남짓 가파른 산길을 올라 당도하는 자장암 대웅전 앞 벼랑에서 굽어보면 계곡 아래 오어사의 참빗 빗살 같은 기와지붕과 절집을 감아도는 얼어붙은 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포항 북쪽의 명산인 내연산을 끼고 있는 보경사도 놓치면 아쉬울 명소다. 제법 넓은 가람이 펼쳐져 있는 보경사는 산문으로 들어서는 길부터 고요하고 적막하다. 짙은 솔숲 속에서 간혹 들리는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만 겨울 사찰의 적막을 깨운다. 절집의 당우들은 정갈한데 특히 천왕문 안으로 석탑과 적광전이 자로 잰 듯 일직선을 이루는 모습이 단아하다.


# 포항 가는 길 = 중앙고속도로나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해 대구까지 가서 대구∼포항 간 고속도로로 갈아 타고 간다. 경부고속도로에 올라서 김천으로 가서 김천∼포항 간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포항시내에서 울산까지는 31번 국도를 주 노선으로 삼고 해안도로를 들고나면서 달리는 게 좋다. 포항에서 포스코와 현대제철을 지나면 죽도시장이고, 도구해수욕장을 지나 925번 지방도에 올라서면 호미곶으로 이어진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포항은 물회로 유명한데 다른 곳보다는 죽도시장에서 먹는 것이 낫다. 죽도시장의 횟집에서는 가자미 같은 흰살 생선의 회를 푸짐하게 썰어넣는데 구룡포와 호미곶 일대의 횟집들은 간혹 산 오징어를 물회에 썰어넣기도 한다.

포항시내의 맛집으로는 송도교 근처의 ‘아구 물곰식당’(054-247-3858)을 추천할 만하다. 냄비에 올려 손님 상에서 끓여내는 곰치국이 시원하다.

숙소로는 포항에서 호미곶 방면으로 향하는 925번 지방도로에 엔비모텔(054-292-1010), 바하펜션(054-292-6002), 아무르모텔(054-292-9228) 등이 있다. 포항시내에도 호텔과 모텔들이 즐비하다.


“밤새 조업을 하고 돌아온 어선에서 문어가 푸짐하게 내려지면 어민들이나 경매인 모두가 떠들썩한 잔치분위기가 되지요.”

해뜨기 전 이른 새벽 포항 죽도시장의 포항수협 위판장. 이곳에는 일가족이 모두 중매일을 하는 이용우(68)씨 가족을 만났다.

이씨는 올해로 27년째 죽도시장에서 위판 일을 해왔다. 요즘에는 대를 이어 중매인이 된 아들 정훈(36)씨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위판장에 나온다. 이들 부자가 떼 온 수산물을 파는 일은 이씨의 아내 김순애(64)씨가 도맡고 있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 이른 새벽부터 이씨 가족은 분주하다. 이씨는 주로 문어를 입찰해 거둬들이는데, 이날 제법 많은 돌문어들이 경매에 나왔다. 30년 동안 해온 중매일이니 이씨는 척 보면 문어의 선도며 질을 알 수 있다.

아들 정훈씨도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으니 문어 고르는 일에 제법 이력이 났다. 의기투합한 부자가 대형 문어를 잇달아 사들였다.

포항 죽도시장에서 27년째 대를 이어 수협위판장 중매인을 하고 있는 이용우(왼쪽)씨 가족, 가운데는 부인 김순애씨, 오른쪽은 아들 정훈씨.

“문어는 사계절 나지만 겨울철 문어가 최고지요. 초겨울부터 음력 3월까지 나는 문어는 다른 어떤 것하고도 바꾸지 않는답니다. 이때 잡히는 게 달큰하고 부드러운 맛이 최고지요.”

이렇게 죽도시장에서 경매를 거친 수산물들은 바쁘게 전국 각지로 실려나간다. 이씨는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모든 종류의 해산물들을 다 맛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현지에서 먹는 것만 하겠느냐”며 “죽도시장에 와야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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