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그들의 관계를 ‘라이벌’이라고 해도 될는지요. 신라 때 동시대를 살았던 원효와 의상 말입니다. 이 땅의 내력 깊은 사찰이라면 이들 둘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곳이 드뭅니다. 그 이야기들을 다 사실로 믿기는 어렵겠지만 깊은 산중 자그마한 암자부터 명산의 이름난 대찰까지 이들이 발자국으로, 혹은 이름으로 새겨놓은 자취는 1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뚜렷합니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맵고 차가운 겨울날. 원효와 의상의 자취를 짚으려 첩첩산중 경북 봉화로 길을 떠났습니다. 여덟 살 나이 차가 있었지만 숙명적인 라이벌이기도 했고, 함께 불법을 닦는 ‘도반(道伴)’이기도 했던 원효와 의상. 그들이 겹겹이 병풍처럼 둘러친 봉화의 산중 사찰에서 만나고, 또 비껴갑니다. 때는 바야흐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 신라에 통일전쟁은 승전의 역사였지만 그건 결론일 뿐이고, 정작 백성들은 전쟁의 격랑 속에서 무참한 살육의 공포와 생존의 고통으로 신음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종교로 구원의 빛을 밝히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 백성의 고통을 덜어 줬던 이가 바로 원효와 의상이었습니다. 원효는 우화처럼 전해지는 ‘해골바가지 일화’부터 떠올리게 합니다. 원효가 도반과 함께 불법을 배우려 당나라로 향하던 한밤중에 무덤 곁에 유숙하다 고인 물을 달게 마신 뒤 이튿날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구토를 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겠지요. 이때 원효는 인간의 만사가 ‘나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고는 바랑을 메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당시 원효와 함께 유숙했던 도반이 바로 의상입니다. 원효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의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불법을 얻으려 길을 갑니다. 중국 3대 고승전 중의 하나인 ‘송고승전’에는 의상이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가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같지만 다릅니다. 나중에 요석공주를 만나서 설총을 낳아 파계한 원효는 직관적이되 감상적이었고, 평생을 구도에 바친 의상은 굳은 심지로 묵묵히 수행을 거듭했던 이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의 흔적이 봉화 축서사와 각화사, 청량사에 남아 있습니다. 석탑돌이 뒹구는 남화사의 옛터에도, 돌을 떡 주무르듯 만져 지은 석불을 모신 허름한 절집 지림사에도 그들의 발자취가 보입니다. 여기서 의상의 자취를 좇아 봉화와 이웃한 경북 영주 부석사를 들러도 좋겠고, 고승들의 자취는 없지만 눈속에서 푸르게 얼어붙은 백천계곡을 거슬러 당도하는 현불사를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쩡쩡 얼어붙은 겨울 끝자락에 봉화의 사찰로 향하는 여정. 시간의 태엽을 감으며 원효와 의상이 거쳐간 1400년 전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동안거가 끝나 용맹정진하던 스님들이 바랑을 메고 떠난 산사에서 마치 거울처럼 잔잔해지는 스스로의 마음을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경북 봉화군 물야면의 깊은 산중. 거기에 ‘독수리가 사는 절집’이 있다. 이름하여 축서사다. ‘독수리 축(鷲)’자에 ‘살 서(棲)’자를 이름으로 삼았다.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불가에서 지혜는 곧 문수보살을 뜻한다. 그러니 축서가가 깃들어 있는 산에 문수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절묘하다. 축서사는 의상이 창건했다. 그게 신라 때인 673년이다. 이 절을 짓고 나서 의상은 3년 뒤에 영주 땅에 부석사를 짓는다. 그래서일까. 축서사는 부석사와 마치 쌍둥이 같은 모습이다. 절집의 앉음새가 어찌 이리도 닮아 있는지. 이 절을 ‘부석사의 큰 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축서사의 문루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소백산이, 남쪽으로는 청량산이 우뚝 솟아 장엄하게 물결친다. 신라의 고승 의상의 행로를 좇는 길이라면, 축서사를 단번에 찾아가서는 아니될 말이다. 산 아래쪽의 물야면 북지리의 호골산 아래 평지에 들어선 절집 지림사부터 들르는 게 순서다. 지림사는 언제 누가 세웠는지 기록이 전혀 없다. 인근에서 ‘대사(大寺)’란 이름이 새겨진 기왓장이 발굴되고, 절집 옆을 흐르는 작은 개천의 보를 ‘한(大)절(寺)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한때 거대한 절집이 서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경주로 돌아오던 의상은 이 절집에 묵었다. 모르긴 해도 오랜 시간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의상은 중생을 제도할 희망에 부풀어 있었을 터였다. 지림사에서 유숙하던 의상은 어스름 무렵 멀리 문수산 자락에서 한 자락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게 된다. 비범한 기운을 느낀 의상이 그곳을 찾아 산자락 깊숙이 절집을 지었으니 그게 바로 축서사다. 그러니 부석사와 축서사, 그리고 지림사는 하나의 인연으로 묶이게 되는 셈이다. 한때 스물일곱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렸다던 지림사는 지금은 허름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절집 곁의 마애불이 아니었다면 오래전에 잊어졌을 터였다. 봉화는 이웃 안동과 함께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린 곳. 유교가 성하면서 불교에 대한 탄압이 이뤄져 절집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것이 1947년 지림사 터에서 석벽을 쪼아 새긴 마애불상이 발굴된다. 봉화군의 유일한 국보인 ‘북지리마애불좌상’이다. 가슴까지 땅에 묻히고 덤불로 뒤덮였던 마애불이 발굴되자 이듬해 그 곁에 절집이라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자그마한 암자가 하나 들어선다. 그후 몇 차례 불사가 이뤄지긴 했지만 지림사는 원통전이란 허름한 당우와 함께 새로 지어져 단청작업을 앞두고 있는 법당 두 동이 고작이다. 법당이야 별 볼 게 없지만 지림사에서는 마애불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불교 탄압이 이뤄지던 당시에 인위적으로 깎아낸 흔적도 있고, 오랜 비바람으로 풍화돼서 얼굴 윤곽도 무너지고 말았지만, 자못 당당한 위세의 불상과 그 뒤편에 새겨진 화염과 작은 부처들이 화려하다. 돌을 떡 주무르듯 했던 당시 석공들의 솜씨를 들여다보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게다가 새로 지어진 법당 뒤편의 암벽 위에도 희미하게 삼존불의 형상과 일곱 불상을 새겼던 흔적이 보인다. 그 곁에는 삼층석탑을 돋을새김해 놓은 자취도 뚜렷하다. # 독수리가 깃든 절집, 소백산 능선이 그려내는 전망을 굽어보다 지림사에서 의상이 서광을 보았다는 문수산 중턱의 축서사로 가는 길. 이 길은 겨울에도 운치가 넘친다. 가지를 뒤틀며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과나무 사이를 지나 산중으로 드는 길이 제법 청량하다. 첩첩산중의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해발 800m쯤에 자리 잡은 축서사가 나타난다. 축서사에 당도하면 누구나 긴 탄성을 먼저 터뜨리게 된다. 마치 허공에 선 듯 건너편으로 펼쳐지는 소백산맥의 꿈틀거리는 산세가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어찌 이런 자리를 찾았을까. 부석사의 장쾌한 전망에 절대 뒤지지 않은 경관이다.
절집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진신사리 오층석탑은 그중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절집에서 발견된 사리에다 미얀마에서 기증받은 사리 등을 더해 모두 112개의 진신사리를 모아 7년 전에 지은 탑이라는데 코끼리와 용, 그리고 불상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여기다가 보광전의 비로자나불좌상을 빠뜨릴 수 없겠다.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석조불의 자태도 빼어나지만, 불상의 지붕을 이루는 ‘닫집’이 어찌나 화려하게 조각됐는지 절로 입이 딱 벌어진다. 닫집에서 아래로 머리를 늘어뜨린 용 조각은 깜짝 놀랄 정도로 섬세하다. 불자라면 종무소에 미리 연락해 산사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예불을 드리는 것도 좋겠다. 산사에서 하루를 보내며 저물녘에 석양의 붉은 빛으로 물든 소백산 자락을 바라보는 맛도 그윽하고, 겨울 산사의 푸른 새벽을 맞는 느낌도 청량하기 이를 데 없다. 과연 신라 때 의상은 홀연히 비치는 빛을 따라가 축서사를 열고서 무엇을 꿈꿨을까. 그가 과연 1400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자신이 터를 잡은 절집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의 고단함까지 알고 있었을까. 사람들이 고즈넉한 절집을 찾아 마주하게 될 위안을 내다보고 있었을까. 설핏 기울어 가는 햇살이 비껴드는 겨울날 오후. 오층석탑 앞에서는 절집을 찾은 누추한 차림의 할머니와 어린 손녀가 길게 그림자를 끌고 오래도록 합장하고 있었다. # 각화사에서 겨울의 깊은 침묵을 듣다 봉화의 각화사는 조선시대 각화산에 지어진 태백산 사고를 관리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 각화사가 문을 연 것은 원효였다. 원효는 의상이 부석사를 지은 그해에 봉화 땅으로 와서 각화사를 창건했다. 겨울의 각화사는 고요하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누가 써붙인 것일까. 묵언(默言). 절집에는 침묵만 가득 담겨 출렁거렸다. ‘그곳에서는 산짐승들도 묵언을 한다’던 절집 아래 마을 주민들의 말이 비로소 실감이 됐다. 각화사는 절집의 풍모는 이렇다 할 것이 없다. 건물들은 죄다 최근에 복원된 것이고, 절 입구에 세월에 삭아가는 귀부와 11기의 부도가 늘어서 있지만 그것도 어쩐지 처연하고 썰렁한 느낌이다. 각화사는 어쩌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를 느끼는 것이 걸맞은 절집인지도 모르겠다. 의상의 자취를 따라갈 때 축서사에 앞서 지림사를 찾아가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효의 자취를 좇아 각화사를 찾아갈 때도 절집 아래 남화사의 옛터부터 찾아가는 것이 순서겠다. 남화사는 봉화군 춘양면의 춘양중·고교 자리에 있다. 운동장 한쪽에 정갈하게 서 있는 서동리 동·서 삼층석탑이 그곳이 남화사의 옛터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원효는 이곳 남화사를 폐사하고 절집을 각화사로 옮겨 창건했다. 원효는 왜 이곳의 사찰을 6㎞나 떨어진 오지 중의 오지인 각화산 자락으로 옮겼을까. 그러고는 왜 절집 이름을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의 ‘각화사’라고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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