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東語西話

醉月 2017. 11. 15. 17:23
東語西話
내가 고질병을 치료하던 여가에 질문을 던지는 객승이 있어, 그 질문에 응답한 것이 모여 한 책이 되었으니 그 제목을 「산방야화(山房夜話)」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일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가져 갈만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산방야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그때 그때 일어났던 느낌들을 말하다 보니 모두 20여 편의 책이 되었다.
그래서 제목을 「동어서화(東語西話;이런 말 저런 말)」라고 했는데, 책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는 조리 있게 체계적으로
서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히 깨달으신 선배에게는 들려줄 것이 못 되고, 후학들에게나 겨우 보여 줄만 하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얼굴이고,
아주 친한 듯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심성(心性)이다.
얼굴은 직접 볼 수 없다 해도
거울에 비추면 볼 수 있다.
그리고 심성은 그냥 알 수는 없지만,
투철하게 깨달으면 알 수 있다.
투철하게 깨닫지도 못하고
심성의 심오한 이치를 알려는 것은,
마치 거울을 버리고
자기의 얼굴을 보려는 것과 같다.

옛날에 대매산(大梅山)에 머물던
법상(法常;752∼839)스님이
마조(馬祖;709∼788)스님에게 묻기를,
"부처님이란 무엇입니까?"하자,
"마음이 부처님이다〔卽心是佛〕"고 대답했다.
그러자 법상스님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열 개의 태양이 일시에 비추듯
모든 미망과 번뇌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는 바로 대매산(大梅山)으로 가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곳에
자신을 한결같이 맡겨버렸다.
이것이야말로 투철하게 깨달은 좋은 본보기이다.

이로부터 마음이 부처이다'고 한 말이
온 세상에 퍼졌으니,
이것은 玄妙함을 讖學하는
上根氣 인재뿐만 아니라
일개 장사치·부엌데기·아녀자까지도
말할 때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마음이 무엇이냐?"고
다그쳐 질문하면 망연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이런 무리들은 그만 두고 말하지 않더라도,
더러는 평소에 참선공부 한다고
자처하는 수행자들이
그 심체(心體)를 노래하고 읊조려 지적하기를,
마치 얼굴이 거울 속에 선명하게 비추듯이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법상스님이 도달한 경지에는
좀처럼 미치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될까?
법상스님은 투철하게 깨달은 것이고,
그밖의 사람들은 다만 알음알이로
이해한〔情解〕 것이다.
그저 알음알이로 이해한 사람은
말은 오히려 교묘할지 몰라도,
그 종지(宗旨)에는 도리어 어두우며,
말이 기묘하면 기묘할수록
이치는 더더욱 혼미해진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얼굴을 비출 거울은 구할 수 있지만
심성을 밝히는 말씀에 관한 요점을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다만 불성〔性〕은 마음에 있는 것이니
깨달음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혹 이것을 믿지 않는 이라면
깨달음의 원인〔因地〕이 없으므로
스스로 깨달는 것〔果覺〕도 없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의 <믿음>은
누가 믿음을 내라고 꾸짖고 지도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며,
또 <믿음>을 내라고 권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직 믿음이 마음에서 우러나왔으니,
마치 굶주린 자가 음식 찾듯이
생각 생각에 잠시도 쉬지 않고
알음알이와 思量 分別을
싹 쓸어내어 철벽같은 믿음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눈 밝은 종사(宗師)의 기연(機緣)을 만나
깨달음의 문이 툭 터지면
마치 오랫동안 잊었던 것을
홀연히 기억한 것과도 같았다.
이것이 바로 법상스님이
마조스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대답한 소식이니
어찌 우연히 그랬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투철하게 깨닫지도
못했으면서도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말을 지껄이며,
알음알이의 허망한 분별로
이리저리 때도 없이 지껄인다.
이래서야 그저 말만 많아질 뿐
<마음>과 <부처>에 戒合할 이치가 있겠는가!

생사대사가 왜 중요한가 ?
참선하는 사람 치고
생사(生死)의 일이 크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생사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망연하여
의례 대답을 못하고 만다.
어떤 사람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고 해서 내가 살며시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대는 생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생사문제의 해결을 위해 發心한다 하니
참으로 허망합니다.
生死의 일은 인간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실로 생사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서
참선을 한다는 것은
마치 농사일을 버리고 생식〔草穀〕하는
사람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억지로 시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草穀으로 이미 배고픔을 잊은 그는
벼나 기장을 심을 필요가 없으므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게으름만 피웁니다.
이와 같이 讖學을 하는 자가
생사의 단서부터 미혹되면
참학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태어나도 오는 곳을 모르며,
죽어도 가는 것을 모른다.
이것을 생사라고 말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이지 미친 소리입니다.
가령 오고 가는 곳을 안다 해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생사인데
생사 자체에 빠져서
생사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는 원래 체성(體性)이 없는데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을 미혹시켰기 때문에,
허망하게 윤회를 하여서 한 生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이 추우면 응결하여 얼음이 되지만,
그 추위가 사라지면
다시 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혹이 마음에 축적되면
생사가 허망하게 응결되지만,
미혹했던 것을 깨닫고 나면
마음의 작용은 고요할 뿐입니다.
생사를 찾으려 하나,
마치 졸다가 깨어난 사람이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란 본래 공(空)한 것이지만
그것을 알려면 깨달아야만 하고,
본래 열반(涅槃)이 있지만
미혹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을.
혹 자기의 마음을 투철하게
깨닫지 못했는데도
생사문제를 환히 깨달으려 한다면,
이것은 마치 장작불을 계속 때면서
가마솥의 물이 끓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생사를 환히 깨닫는 데에는
마음을 깨닫는 것보다 가까운 길이 없고,
마음을 깨닫는데도 發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려면, 추위와 더위를 모두 잊고
寢食을 그만두며, 알음알이와
허망한 생각〔妄〕을 비워야 합니다.
그런 일념(一念)을 어떤 곳에서든 꾸준히 하여,
마치 견고한 무기나 침범되지 않는
엄중한 성곽처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동시에 옛 사람들이 말했던
확고한 發心을 두루 살펴
그와 같이 하기를 조심해서 노력한다면
確哲大悟하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미 깨닫고 나면 생사만
공적(空寂)한 것이 아니라,
열반도 그러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생사와 미망(迷忘)이
교대로 결합하여 멀리는 광겁(曠劫)으로부터
미래제(未來際)에 이르기까지
털끝만 한 사이도 없이
유전(流轉)하겠습니까?
생사는 큰 일이다'고 말하는 것이
왜 헛된 말이며, 어찌 빈 말이겠습니까?'

환법의 정체란 무엇인가 ?
독사와 호랑이에게는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이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높은 산허리를 의지하고
평평한 땅바닥에 누워 있다.
그런데 길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을 무서워하여
서로 주의를 주며 멀리 한다.
이는 그들이 사람을 물어뜯고,
또 독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자만 보아도
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보살이 환법(幻法)을 대하는 것도 이와 같다.
무엇이 <환법>인가 하면,
실제는 없는데 있는 듯한 것이다.
이미 실체가 없다고 말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허공에는 본래 미세한 먼지도 없는데,
눈병에 걸린 사람은
허공에서 어지러운 헛꽃〔空華〕을
보는 것과 같다.
허깨비인 줄 아는 사람은
자기의 눈병을 탓하겠지만,
허깨비인 줄 모르는 사람은
도리어 헛꽃 만을 탓한다.

그밖에 물에 어린 달 그림자와
거울 속에 비친 형상도
실제로는 모두가 헛된 존재이다.
그런데도 미혹한 사람은
그것을 <있다>고 집착하면서
그저 그것을 없애려고 한다.
더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무언가 <있는> 듯 해진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허깨비인 줄 알고
없애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일부러 없애려 하지 않아도
그것은 저절로 없어진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서
허깨비인 줄 알면 그대로 없어지니
따로 방편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 것이다.

허깨비인 줄 아는
그 <앎>은 알음알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刹那에 깨치는 마음 바로 그 자체이다.
그 <앎>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허깨비가 없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진다.
그러므로 일부러 방편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깨비를 없애려는
마음이나 없애려는 대상이
모두 방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자리를
通哲하게 깨달아서
모두가 허깨비인 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렇게 확실히 알기만 하면
허깨비는 저절로 없어지므로,
없애고 말고 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마치 뱀과 호랑이를
보기만 해도 피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사람을 물어뜯고 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자연히 그들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어찌 따로 방편을 써야만
환법(幻法)이 사라지겠는가?
참된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4대5온(四大五縕)은 허깨비'라고 모두들 말한다.
그러나 잠시라도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부딪치면,
갑자기 알음알이가 발동하여
갖가지 허깨비가 생겼다가는 없어지곤 한다.
갖가지 고통을 모두 맛보고
마음에 싫증이 나서
그것들을 없애려고 하지만,
허깨비 같은 견해〔幻見〕만
더욱 증가할 뿐이다.
더구나 허깨비가 생기게 된
모든 인연을 올바르게 알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없앨 수가 있겠는가?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허깨비를 없애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오직 자기의 공부만 부지런히 할 뿐이다.
자기의 마음자리만 깨달으면
백 천이나 되는
허깨비의 허망이 녹아져
진실하고 고요한 상태로 돌아간다.

이 때는 <떠난다>고 한
그 말마저도 오히려 부질없는
군더더기가 될 뿐이다.

말로써 성품을 깨칠수 있는가 ?

묘희 대혜(大慧;1088∼1163)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은 모두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의례 말로써
마음과 성품을 설명하려 한다.
너희들이 알아듣도록 잘 가르칠 것이니,
삼십 년 후에 내가 말했던 것을 검토해 보라"
하였다.
이런 지극한 말씀이 없다고 해도
교화는 날로 쇠퇴하고
인심은 날로 衰落해 갔다.

무엇이 견성(見性)인가 하면,
다름이 아니라
수행하여 본래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성품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수행은 하지 않고서
본래의 자리에 도달한 듯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황제가 사는 서울에
천하의 빼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것과 같다.
다른 지방·다른 나라에 사는 볼 것 없는
어린애나 더벅머리 총각도
서울이 있는 방향은 가리킬 수 있다.
다만 그들은 직접 가보지 못했을 뿐이다.
아직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로만 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서울에 대한 말이 많을수록
설명은 더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제대로 發心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 말에 의지해서
서울 사정을 알려고 할 것이며,
더구나 실없는 말이나 연구하여
헛된 것을 찾으려는 선승이 되려 하겠는가?

發心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양식을 준비하여
튼튼한 신발을 신고
천 리나 먼 길이라 해도
서울을 향해 고생을 무릅쓰고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몸소 서울에 도착하면
화려한 대궐과 많은 인파,
번화한 문물과 엄청난 부귀를 직접 보게 된다.
이래야만 비로소 직접
서울을 본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직접 본 사람이라야
고향에 되돌아가서
서울의 사정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동쪽을 서쪽이라 하고,
훌륭한 것을 억지로 천한 것이라 하며,
종일토록 자기 멋대로 말하더라도
결코 그가 몸소 보았던 진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나는
법왕(法王)은 법에 자재(自在)한 분이다'고 한다.
몸소 도달해서 본 사람과
도달하지 못하고 말로만 설명한 사람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말로만 설명하려 했던 경우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뽐내려는 마음이다.
대체로 말로만 하는 자는
천부적인 자질이 준수하고 민첩하여
많이 듣고 널리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버릇이 알음알이를 움직여서
알음알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알음알이는 그의 뽐내는 행위를
더더욱 부추기고,
뽐내는 마음은
알음알이를 더더욱 빛나게 하여
말을 하면 할수록
사생(死生)의 결박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그러나 몸소 본 사람은
종일토록 아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진실한 음성은 우주에 가득 찬다.

그래서 영가(永圈;647∼713)스님은,
"말없을 때 말을 하고,
말을 할 때 묵묵하라.
크게 베푸는 문을
열어 놓으니 막힘이 없다"고 하셨다.

그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속였겠는가?
"삼십 년 뒤에 이 말을 검토해 보라"고 한
그 말씀이 없었던가?

대혜스님의 이 말씀을
칭찬해야 할는지
깎아내려야 할는지.
이 소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비 오듯 할 것이다.

病故가 良藥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
부처님께서는
"중생에게 病故는 훌륭한 약이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도대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중생은 오랫동안 미망(迷妄)을
쌓아왔기 때문에
안으로는 아상(我相)이 생기고,
밖으로는 대상에 집착한다.
단지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편안한 상태에
도달한 것만을 뽐낸다.
그 결과 알음알이가 어지럽게 뒤섞여서
허깨비 같은 육신은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만다.

섭생해서 건강을 유지하다가
방법이 잘못 되어
어느 날 갑자기 자리에 누워 신음하게 되면,
아무 일도 못하고
때도 없이 고통이 찾아와
머지 않아 죽게 된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도(道)도 깨닫지 못하고
의지할만한 法力도 없어서
아득한 三界에 끝없이 들락거리게 된다.

혹 그러다가 苟且하게라도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게 되면
이를 악물고 뼈를 깎는 苦行으로
道를 探究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出家했던 본 뜻을 살리고,
佛祖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맹세한다.

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病故가 진실한 良藥'이라는
본 뜻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도리어 病을 앓으면서도
자기에게 좋거나 싫은 상황을
思量分別하여 愛憎만 더 두터워진다.

佛祖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면서도
자기가 지어온 業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이렇게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깨달음을 救하는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佛祖의 진실한 말씀을
虛妄되게 만들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病故는
病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좋은 藥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도 훌륭한 藥이 된다.
왜냐하면 피차 몸은 四大에 拘束되어 있고,
形體는 外緣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남들의 병이 저와 같은데
나인들 어떻게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은 요행히도 병이 없어
몸이 쾌적하고 편안하지만,
순환하는 八苦八卦 속에서
건강을 자신할 수 있겠는가?

건강할 때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부지런히 道를 닦아
煩惱의 울타리를 부수고,
無明의 소굴을 粉碎하며,
涅槃까지의 험난한 함정을 텅 비우고
생사의 빠르게 돌아가는 흐름을
끊어야만 한다.
마음 밖에서는 도를 구하지 못하는데,
깨달음〔佛〕을 어떻게 다른 것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위와 같이 생각한다면
좋은 약의 효과가
어찌 병든 사람에게만 있다고 하겠는가?
무릇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모두 이 말씀에서
신비한 효험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들은
削髮出家해 禪門叢林에 살면서
걸핏하면 生死의 일로
평생의 업을 삼는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病故가 바로 良藥이다는
밝은 가르침을 듣고서도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끝없이 輪回轉生 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

사찰을 잘 보호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

한 손님이 말하기를,
"속인이 교묘한 방법으로
이웃 사찰의 살림을 빼앗은 자가 있었습니다.
절의 스님들은
백방으로 힘을 써보았으나
절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관청에서 이 문제를
다스려 주길 바랬으나
절도 찾지 못하고
수고로움만 겪었습니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세간 밖에 노니는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자신의 몸을 잊고 물욕을 비워
이치로써 자신을 관조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속인들의 취사(取捨)에
집착하는 꼴을 본받습니까?"하였다.

옆의 객승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천 년간이나
상주(常住)하는 사찰이요,
하루 아침 살다 가는 스님이다'는
訓戒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살다 가는 승려가 아니라면
누구라서 천 년을 常住하는
사찰을 보호하겠습니까?"
다시 어떤 사람이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은 이와 다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상(常)이라 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주(住)라 합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고요한
法身의 本體를 두고 한 말입니다.
참된 것은 변하지 않으며,
고요한 것은 搖動하지 않습니다.

참되고 고요한 常住物은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모두 包攝하여
어느 것도 본체를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가르침에도
이 법은 眞如 法位에 安住하여
세간의 모습이 常住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俗世에서 奔走히 돌아다녀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걸핏하면 알음알이를 쓸데없이 일으키니,
이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대는 出家하여 깨달음을
救하는 修行者입니다.
常住物은 참되고 고요한 法身의 본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衆生을 引導하고 敎化를 行하는
부처님의 弟子가 되겠습니까?
옛날의 보살은 六바라밀을 修行하고
四無量心을 베풀어 행동을 삼가 하고,
착한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
사찰을 보호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대는 하루 아침 살다 가는 승려로서
사찰을 보호하려 하니
착하다고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正念을 버리고
取捨의 알음알이에 빠져 싸움질하고,
혈기만 믿고 빼앗긴 땅과
살림살이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진실하고 고요한
법신을 미혹하고
사찰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큰 잘못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이것을 뉘우쳐 고치지 않고
다만 미친 감정으로
세속의 풍습을 본받아
千年토록 계속될 寺刹을 保護하려 한다면,
이는 마치 제방을 터놓고
물이 새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습니까?
세간에 나는 듯한 樓閣이며,
용솟음치는 듯한 殿閣을.
모든 藏嚴具가 大千世界에 充滿했는데,
만약 그것이 부처님께서 願해서 그
렇게 되었다면 外道라 해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살이 布施를 행할 때는
자신의 머리·눈·골수·뇌 등을 보시해도
아깝다는 기색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보살은 三世 三輪이 모두 空跡하여
한 생각도 執着이 없습니다.
인간과 천상이 봉헌한다 해도
오히려 내가 보시를 받는다'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보살에게 베풀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참되고 고요하다는 것은
법신의 본체를 말한 것이고,
항상하여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신의 모습을 밝게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만
진정으로 常住物인
사찰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정을 멋대로 하여
관청에게 다스려주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자 객승이 말했다.
"분명 이와 같다면
당신에게는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公的인
문제에 걸려 있을 경우,
어찌 그런 일을 앉아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대는 한낱 救濟라는 말만 알았을 뿐,
정작 구제해야 하는 까닭은 알지 못했습니다.
아녹다라 삼막삼보리 第一義諦를 깨달아
거기에 의지해서 사찰이 건립되는 것이고,

寺刹은 六度·四無量心·萬行·衆善을
바탕으로 해서 잘 운영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서 救濟하는 理由를
따로 찾으려고 하면,
다만 業輪만 도울 뿐입니다.
비록 구제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해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았더니
진실한 법신의 상주는
사찰과 표리의 관계가 되어
하나가 되어 억만 겁이 지나도록 변동이 없는데,
어찌 천 년만 가겠습니까?"
얘기가 이쯤 되자
듣던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神光이란 무엇인가 ?

깨달음의 當體는 매우 밝아서
우주의 어디에나 가득 찼으며,
너무도 눈부시게
색(色)과 공(空) 모두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볼 수가 없으며
자취도 찾을 수 없다.
푸르지도 누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길거나 짧지도 않다.
그것은 근기에 따라 감응한다.
그리하여 雪山 한 밤중의
샛별이 되기도 했으며,

용담(龍潭;1423∼1500)스님의
꺼버린 촛불이 되어
비추는 본체는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기도 했으며,

동평(東平)스님의
깨버린 거울이 되기도 했고,

毘耶離城에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오랜 동안 본체에 접촉하여
그 본체와 떨어지지 않아
아침 내내 눈에 가득하여
눈이 멀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神光이라는 것이다.
고덕스님은
"신광이 홀로 빛나니
만고의 아름다운 法이다.
이 문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간직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홀로 빛난다'고 한 뜻은
한몸〔一體〕으로서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싱그럽고 광채로운 깨달음의 當體여!
하늘에 있으면 하늘과 동일하고,
땅에 있으면 땅과 동일하구나.
그것은 텅 비어 만상을 머금었고
暄出하게 十虛를 貫通하였다.
붉은 비단 장막 속에 옥구슬을 뿌리고,
무쇠 눈 구리 눈동자로도
그 비슷한 것조차 엿볼 수 없다.
枯木이 서 있는 바위 앞에서
길을 묻지만
電光石火처럼 빨리 지나가니
누구라서 그 시작과 끝을 분간하겠는가?

神光은 가리거나 감출 수 없다'고 하니,
산호(珊瑚)는 가지마다 달을 지탱하였다.

또한 神光은 혼람(混濫)하지 못한다'
고도 말하니,

부상(扶桑)에서는
밤마다 일륜(日輪)이 붉었구나.
그러나 이 신광은
하늘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용솟음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안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외부에서 온 것도 아니다.
이 神光에 의지하여 조화(造化)가 부려지고,
이를 말미암아 만물이 생겨난다.

모든 것을 성취하지만,
어느 것에 의해서도 성취될 수 없는 것이
이 神光이며,

일체를 덮을 수 있으나
어느 것에 의해서도 덮여지지 않는 것이
이 神光이다.

반야(般若)는 중생심(衆生心)으로써
깨달을 수 없지만,
神光으로는 깨달을 수 있다.

또한 眞如는 다른 것에 섞여지지 않지만
神光은 다른 것과 섞여진다.

서쪽 祖師가 칼을 잡으면
부처가 와도 목을 베고,
마구니가 와도 목을 벤다.

그러나 목을 벨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神光이다.
도인이 가는 處所에는
불이 얼음을 녹이는 듯하고,

납승(納僧)의 앞길은
험난하여 길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대가 이렇다 하면
나는 이렇다 하지 않으며,
그대가 이렇지 않다 하면
나는 이렇다고 하리라.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는데도
과녁에 적중하였고,
여의주가 독 안에 있는데도
허공을 비춘다.

이는 모두 神光이 붙은 것으로서,
다른 방법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천하의 參禪하는 사람이
말 밖에서 확연히 깨닫지 않고
알음알이〔知解〕로써
나의 빛나는 神光의
요지(要旨)에 戒合하려 한다면,
마음은 날로 수고롭고
공부는 매일같이 후퇴하리라.

이것을 조심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복과 재앙의 근원은 무엇인가 ?

산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며,
방위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 번 정해진 업(業)은 피할 수가 없다.

보연(報緣)의 業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善과 惡이다.
善하면 福으로 報答하고,
惡하면 花로 報答한다.
福과 災殃이 동일하진 않지만,
모두 報然에 속하므로
모두 業이라고 이름한다.
업으로 정해진 이치〔道〕는
길가는 사람이 만나는 경계와 같다.

30 리에 다리〔橋〕 하나,
50 리에 점포 하나를 기준으로 하고
다다른 이수(里數)에 의해서
다리와 점포를 설치한다.
이것은 성현이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선악의 생각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으로부터 솟아난 것도 아니다.
한결같이 미망(迷妄)의 정(情) 때문에
제 스스로 結縛을 했을 뿐이다.
3세(三世)와 오랜 세월을 통해
인연 때문에 만나는
복과 화는 마치 30리를 가서 다리를 만나고
50 리를 가서 점포를 만나는 것처럼
털끝만큼 錯誤가 있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夭折하고,
暴惡한 사람은 도리어 長壽하고,
拒逆하는 자는 吉하고,
의로운 자는 凶한 것만을 볼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지었던 것을 지금에 받고,
지금에 지은 것은 후세에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를 두려워하여 업을 짓지 않을지언정,
오는 果報를 받지 않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탓하지도 않았던 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한다.
실제로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가령 그것을 알았다면
복이라 해서 기뻐할 것이 없으며,
재앙이라 해도 슬퍼할 것이 없다.

기쁨을 잊었는데
무엇 때문에 허망하게 한 생각이라도 내어
그 복에 攀緣하려 하겠는가?

또 슬픔도 잊었기 때문에
억지로 속임수나 계책을 늘어놓아
재앙을 피하려고 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피하지 않는다.

더러는 구차하게 구하여 얻기도 하고,
구차하게 피하여 면한 자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도 한 번 정해진 업으로서
당연한 것이지
우연히 구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구차하게 하는 짓이
쓸모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복을 좇고 재앙을 피하려는 생각은
저절로 없어진다.
사념〔念〕의 자체가
공(空)해지면 간직한 마음자리도 空해져서
道에 會合한다.
佛祖聖賢의 解脫한 方法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부러 操作하는 것이 없다면
이(理)는 저절로 빼어나게 되고,
사(事)는 자연히 殊勝해진다.
이(理)가 빼어나고 사(事)가 殊勝해지면
온 법계(法界)안의 한 티끌이라도
나의 장엄한 세계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과 憎惡가 그의 알음알이를 結縛하고,

좋은 것은 갖고
싫은 것은 버리려는
妄想이 어지럽혀진다.

그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因緣과 함께
未來로 들어가 酷毒한 苦炒를 받는다.

그러나 정해진 分數의 業이
한결같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이지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土地가 肥沃하면 심어진 穀食이
반드시 豊盛해지고,
샘이 깊으면 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한 貯蓄한 것이 많으면
살림살이가 豊足해지고,
인(因)이 원만하면
그에 따르는 과(果)도 반드시 圓滿해진다.
이는 天下 古今의 변함 없는 眞理이다.

聖人은 오랜 세월동안 功德을 쌓고
온갖 修行을 닦아 한량없는 身命을 다해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法財를 모았다.

모든 福이 빈틈없이 具足하였고,
만 가지 德은 圓滿하여
世間이나 出世간에서 暄出하여
빠지거나 不足한 것이 없다.

그 베푸는 것이
마치 봄이 돌아온 것 같고,
달이 千이나 되는 江에 나타나듯이
자취 없이 온다.

대체로 蓄積된 인(因)이 원만하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과(果)도 원만해진다.
이는 天下 古今의 변함 없는 眞理이다.
聖人은 오랜 歲月동안 功德을 쌓고
온갖 修行을 닦아 限量없는 身命을 다해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法財를 모았다.

모든 福이 빈틈없이 具足하였고,
萬 가지 德은 圓滿하여 世間이나 出世間에서
暄出하여 빠지거나 不足한 것이 없다.

그 베푸는 것이 마치 봄이
돌아온 것 같고, 달이 千이나 되는 江에
나타나듯이 자취 없이 온다.

대체로 蓄積된 인(因)이
圓滿하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과(果)도 圓滿해진다.
나는 일찍이 가람(伽藍)을 건립하고
탑묘(塔廟)를 세우는 者를
자세히 觀察한 적이 있다.

或是라도 4方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거나
그 형세가 미약할 경우는
많은 재물로써 사람을 모으고,
方便으로써 求하며, 巧妙한 計策을 꾸몄다.
심지어는 勢力을 動員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모두가 보리(菩提)의 뜻에 違背되는 것이다.

伽藍을 건립해도 깨달음과
相應하지 못할 경우는
불법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선행(善行)도 없다.
이것은 虛妄한 業을 따라서
隨順한다는 見解에 바탕이 될 뿐,
菩薩行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보살이 원만한 깨달음을 수행을 할 때,
伽藍이나 塔廟를 건립하는데
잘 具備가 안되거나 不足한 경우를 만나면,
根本 인(因)이 不足한 것을 反省하고
정근(精勤)을 가다듬어 苦行을 닦는다.

이렇게 해서 반드시 깨달음이 殊勝한 行이
만족하기를 기다린다.
施主 단월들이 지녔던 財物을 獻納하면서도
그것을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면
시주하는 사람 쪽으로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이 이뤄지고,
스님에게는 원만한 깨달음이 이뤄진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가람과 塔廟를 建立하는 方法이
빈틈이 없고 완벽하지 못할 경우,
지혜로운 재주를 동원할지언정
勢力으로 解決하는 것은
원래 되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재물로써 취하는 경우야
어찌 이치에 어긋나겠습니까?"
내가 이에 대답하였다.
"도인(道人)이 伽藍과 塔廟를 建立할 경우는
자신이 道를 먼저 修行한 뒤에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합니다.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의 원만한 깨달음의 위치에서
均等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중생들은 탐심이 쌓여서
모든 괴로움을 다 받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貪心은 더욱 甚해서
중생들을 더더욱 괴롭게 만듭니다.
자신의 재산을 獻納하면서도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과
그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모든 곳에 道가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 .

동산연조(東山演祖; ? ∼1104)스님께서는
"모든 곳에 도가 존재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곳이란 바로 만사(萬事)이며,
만법(萬法)입니다.
또 세간의 사법(事法)과
출세간의 지극한 도(道)는
서로 표리 관계를 이루는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군더더기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그대는 무슨 말을 그리도 쉽게 하십니까?
동산연조께서 存在한다고 말씀한 理由는
서로 섞어서 間隔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虛妄한 差別은
바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日常生活로 말한다면, <모든 곳>이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옷을 입을 때
몸 全體가 道라고는 생각할지언정,
실오라기가 옷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은 밥을 먹을 때
입에 가득한 것이 道라고는 생각할지언정
곡식의 알맹이가
밥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밖의 갖가지 경우에도
어느 것도 道와 一切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道와 一切가 된다는 참 뜻이 分明하면
存在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옷을 입을 때도
그것이 道인 줄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옷에 대해 알음알이를 일으켜
虛妄한 짓을 하여 갖가지 分別을 짓습니다.
分別에 빠지게 되면
生死에 끝없이 묶여버리고 맙니다.
`모든 곳에 도가 존재한다'할 때에
이 존재의 뜻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世上物情에 섞여서 존재한다는 뜻도 있으며,
그저 자기의 修行만 굳건히 존재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깨달아 通達한 사람들은
混合되어 하나라는 말은 하지만,
실제로 혼합되어 하나인 줄은 모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의 修行만 굳건히 지킴으로서
存在하는 것입니다.
`자기 수행만을 굳건히 지킨다'는 뜻은
순수한 정념(正念)으로써 배워야 할 道를
생각하여 凡夫와 聖人을 떠나고,
憎惡와 사랑을 끊고 부지런히 修行하여
잠시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중한 보배를 손에 잡은 듯,
봄날에 살얼음을 밟은 듯이 더욱 굳게 조심하고,
신중히 발걸음을 떼 놓는 것입니다.
홀연히 깨달아 내가 능히 道를 닦노라
하는 생각과 또 닦아야 할 道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돌이켜 觀察해 보면
그것들은 모두 일정한 본체가 없습니다.
종일토록 분명하게 작용한다 해도,
억지로 하려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