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退翁 性徹_깨달음의 길

醉月 2013. 7. 16. 08:38

깨달음의 길The Correct Path of Zen 禪門正路

退翁 性徹(Ven. Master Songch'ol) 

  

-이 글은 이미 발행된 禪門正路에서 스님께서 특히 요점만을 직접 발췌한 것과, 화두공부하는데 대해 보충 설명한 것입니다.

 

無一衆生而不具如來知慧 但爲妄想執著而不證得 若離妄想 一切然智 無碍智 則得現前(八十華嚴 第五十)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지만 망상의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여의면 모든 자연지(自然智)와 무애지(無碍智)가 나타나느니라.

 

여래의 지혜는 불성을 말함이니, 불성을 가리고 있는 망상을 버리면 불성이 저절로 나타난다.

 

一切衆生 悉有佛性 煩惱覆故 不知不見(大涅槃經 第七)

모든 중생들이 불성이 있으나 번뇌에 덮혀서 이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느니라.

 

如是佛性 唯佛能知(大涅槃經 第七)

이와 같은 불성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느니라.

 

因見佛性 成阿耨多羅三藐三菩堤(大涅槃經 第七)

불성을 보므로 무상정각을 이루느나리.

 

불성은 망상이 다 끊어진 부처만이 볼 수 있으니, 이것이 무상정각이다.

 

諸阿羅漢 不見佛性(同上二十七)

모든 아라한은 불성을 보지 못하느니라.

 

菩薩位階十地 尙不明了知見佛性(同上 八)

보살의 지위가 십지에 이르러도 아직 불성을 밝게 보지는 못하느니라.

 

보살의 지위가 제십자가 되어도 불성을 밝게 보지 못함은 미세한 망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니, 나한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深信含生同一眞性 但爲客塵妄心所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眞 寂然無爲 名爲理入(達磨 思行錄)

중생들이 다 같은 참 성품임을 깊이 믿으나, 객진인 망심에 덮여 있어 완전히 나타나지 못한다. 만약 망상을 버리고 참 성품에 돌아오면 고요하여 함이 없으니 이치에 든다理入고 하느니라.

 

이것은 돈황본 등으로 보아 달마가 친히 설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萬法盡在自性 妄念浮雲蓋覆 自性不得明 吹却迷妄 內外明徹 於自性中 萬法皆現(敦煌本壇經)

만법이 모두 자성 속에 있지만 망념의 뜬 구름에 덮혀서 자성이 밝지 못하다. 미망을 불어 없애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서 자성 속에 만법이 다 나타나느니라.

 

안팎이 사무쳐 밝음[內外明徹]”을 부처님께서는 유리병 속에 불을 밝혔을 때와 같이 안팎이 밝다 하고 그것을 묘각(妙覺)이라 하였다.

 

刹那間 妄念俱滅 內外明徹 識自本心 卽是解說 卽是無念(壇經)

찰나간에 망념이 다 없어지고 안팎이 사무치도록 밝아서 자기의 본심을 아는 것이 해탈이며 무념이니라.

 

단경(壇經)의 유행본(流行本)에서 견성한 사람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내외명철(內外明徹) 돈수무념(敦修無念) 등은 돈황본(敦煌本)과 유행본(流行本)이 같은 내용으로서 단경에 표현된 6조의 근본사상은 변함이 없다. 즉 내외명철(內外明徹)하면 견성이며 망상이 다 떨어지면 무념이라고 한 것이다. 불성을 덮은 망상이 끊어진 것을 견성이라고 함은 불교의 근본원리이니, 부처와 조사의 말씀이 다를 바 없다.

 

菩薩地盡 遠離微細 得見心性 名究竟覺(起信論)

보살의 지위가 다하여 미세망념을 영원히 버리면 심성을 보니, 구경각이라고 이름하느니라.

 

妄心滅則 法身顯現(同上)

망심이 다 없어지면 법신이 나타나느니라.

 

법신은 법성신(法性身)이니, 불성과 같은 말이다.

 

除滅無明 見本法身(同上)

무명을 다 없애버리면 본래의 법신을 보느니라.

 

諸佛如來 唯是法身(同上)

모든 부처와 여래는 바로 법신이니라.

 

기신론은 공인된 대승불교의 총론이다. 망상이 다 떨어진 구경각을 견성이라고 함은 부처와 조사들의 말씀이 일치하고 있다.

 

十地終心 金剛喩定 無垢地中 微細習氣心念都盡 故云 得見心性(賢首 起信義記下)

십지의 최후심인 금강유정의 무구지에서 미세한 습기인 심념(心念)이 모두 없어지는 까닭에 심성을 본다고 하니라.

 

교가(敎家)의 권위인 현수(賢首)도 십지에서 미세한 망상이 끊어져야만 견성이라고 하였다.

 

十地聖人 說法如雲如雨 見性如隔羅穀(雲門傳燈錄)

십지의 성인이 법문을 구름 일어나듯 비 오듯 하여도, 견성에 있어서는 엷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보는 것과 같느니라.

 

如明眼人 隔於輕穀 都衆色像 究竟地菩薩 都一切境 亦爾 如明眼人 無所障隔都衆色相 如來亦爾

눈 밝은 사람이 엷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모든 색상을 보는 것과 같이 구경지 보살이 모든 경계를 보는 것도 이와 같느니라. 눈 밝은 사람이 가리움없이 모든 색상을 보는 것과 같이 여래도 이러하니라.

 

십지의 구경지보살도 미세한 망상이 남아 있으므로 견성이 아니다.

 

悟人頓修 自性頓修(壇經)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느니라. 자성을 단박에 깨달으니라.

 

돈황본(敦煌本)에서의 이 구절이 유행본(流行本)에서는 迷人漸契 悟人頓修 頓悟頓修 亦無漸次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사람은 단박 닦느니라. 단박 깨치고 단박 닦음에는 역시 점차(漸次)가 없느니라로 표현되어 돈수(頓修)의 주장은 동일하다. 돈황(頓煌)유행(流行) 각 본에서의 공통적인 돈수(頓修)주장은 육조의 근본법문이요, 육조는 깨친 후의 점수(漸修)를 거론하지 않았다.

 

頓悟頓修 一念不生 前後際斷(都序)

돈오돈수는 한 생각도 나지 않아서 앞과 뒤가 끊어졌느니라.

 

妄念都滅盡 盡處還抹却(參禪錄太古錄)

망념이 다 끊어지면 끊어진 곳도 또한 없애라.

 

망념이 다 끊어졌으나 끊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은 크게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한 것[大死不活]이다. 그러므로 망념이 다 끊어진 곳도 없애버려야 바로 깨치게 된다.

 

若人 一念不生 前後際斷 頓悟頓修 頓斷頓證 無地位矣(西山集 四)

만약 누구든지 한 생각도 나지 않아서 앞과 뒤가 끊어지면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으며 단박에 끊고 단박에 증하여 지위가 없느니라.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돈오는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점수의 돈오는 번뇌망상이 그대로이므로 망상 제거하는 것을 점수라 하고, 돈수의 돈오는 한 생각도 나지 않는 대무심이므로 망상제거의 필요가 없어서 돈수라고 한다.

보조의 돈오는 망상이 그대로이므로 십신초(十信初)라 하였고, 육조의 돈오는 묘각인 내외명철이므로 불지(佛地)인 무념이라 하여 상반된다. 선종의 정안종사들은 모두 일념불생을 지나서 무념 아님이 없으니 망상 그대로인 보조 주장의 심신초는 상대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일념불생(一念不生)이 되어도 일념불생에 머물러 있으면 대사불활(大師不活)로 견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法達 言下大悟 自言已後 念念修行佛行 大師言 佛行是佛(敦壇)

법달이 말 끝에 대오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후로는 부처행을 수행하겠습니다하였다. 대사(大師)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행이 곧 부처니라하셨다.

 

돈오가 부처지위이므로 깨달음 이후 점수(漸修)는 필요없다. 부처행을 수행한다 함은 돈수하고 원증(圓證)하여 행하는 것이다.

 

我六代大師 一一皆言 單刀直入 直了見性 不言階漸 夫學道者 須頓悟漸修(神會遺集 三)

우리의 육대(六代)조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단도직입적으로 곧바로 견성함을 말하였지 계단과 점차를 말하지 않았느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돈오하여 점수할지니라.

 

신회유집에는 돈수사상이 많으므로 호적(胡適)은 신회(神會)가 돈수(頓修)를 말한다고 단언하였으나, 신회(神會)는 선종(禪宗)이 돈수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점수를 주장하였으니 점수(漸修)의 원조(元祖)는 신회가 아닐 수 없다.

 

先須頓悟 方可漸修者 此約解悟 故華嚴說 初發心時 便成正覺 然後 三賢十聖 次第修證(都序, 節要)

먼저 돈오하고 나서야 점수한다 함은 해오(解悟)를 말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말씀하기를 처음 발심하는 때 곧 정각(正覺)을 이룬다하였다. 그 이후에 삼현(三賢)과 십성(十聖)을 차례로 수증하느니라.

 

悟後 初入十信位也(承襲圖節要)

깨친 뒤에 처음으로 십신위(十信位)에 들어가느니라.

 

삼현십성을 차례로 수증함은 분명히 교가(敎家)이어늘 이것을 교외별전인 선종(禪宗)이라고 주장하니 포복절도할 노릇이다.

 

頓悟自性 本來空寂 客塵煩惱 與前無異(修心訣)

자성이 본래 공적함을 알았으나 객진번뇌는 이전과 다름이 없다.

 

부처와 조사는 대무심지(大無心地)인 구경각을 견성이라고 하였는데 보조(普照)는 번뇌망상이 이전과 다름 없는 십신초(十信初)를 견성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불조(佛祖)의 말씀에 근본적으로 위배된 것이다.

 

一念回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 頓悟也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성을 보니 어 성품자리는 무루의 지성(智性)이 본래 구족하여 모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까닭에 돈오라고 하느니라.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濕氣 卒難頓除 故依悟而修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言漸修也(修心訣)

비록 본성이 부처와 같음을 깨쳤으나 시작도 없이 익혀온 기운習氣을 단박 없애기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깨침을 의지하여 닦아서 길이 부처종자[聖胎]를 길러 오랜만에 성인이 되므로 점수라고 하느니라.

 

보조는 번뇌망상이 이전과 다름없는 십신초(十信初)를 견성이라고 하였으나 부처와 조사가 말한 견성은 아니다.

 

悟後 長須照察 妄念忽起 都不隨之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方始究竟 天下善知識 悟後 牧牛行 是也(修心訣)

깨친 뒤에 오랫동안 잘 살펴서 망상이 홀연히 일어나도 결코 따라가지 않고 망상을 버리고 또 버려서 버릴 것이 없게 되면 바야흐로 구경이니라. 천하 선지식의 깨친 뒤 목우행(牧牛行)은 이것이리라.

 

화엄열반 등의 대경(大經)에서 부처님은 망상이 다 끊어진 부처의 지위를 견성이라고 하여 더 닦을 필요가 없음을 말하였다.

육조스님은 ?단경?에서 내외명철(內外明徹)이 견성임을 자세히 말씀하여 더 닦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가장 오래된 ?돈황본(敦煌本)?에서도 점수(漸修)사상을 찾을 수 없다.

보조는 망상이 중첩한 십신(十信)을 견성이라 하고 그 망상 제거하는 것을 점수라 하여, 6조의 말씀과 반대됨을 볼 수 있다. 망상이 중중첩첩한 십신을 견성이라고 한 자체가 잘못이며 망상을 그대로 두면 안되므로 자연히 점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점수사상은 교가(敎家), 선종(禪宗)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敎意者 不變隨緣 頓悟漸修 有先有後 禪法者 一念中 不變隨緣 性相體用 元是一時

교에는 불변과 수연, 돈오와 점수에 선후가 있는 것이요, 선에는 한 생각에 불변과 수연, 성과 상, 체와 용이 원래 동시에 있는 것이다.

 

이는 서산(西山)?선가구감(禪家龜鑑)?에 있는 말인데, 돈오점수는 교가의 사상이요 선종이 아님을 말하였다.

 

今錯承禪旨者 或以頓漸之門爲正脈 圓頓之敎爲宗乘 其訪法之愆 余何敢言(禪敎訣)

지금 선의 뜻을 잘못 이어받은 이는, 돈점의 문으로 정통맥을 삼기도 하고 원돈의 교로써 종승을 삼기도 하니, 법을 비방한 그 허물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하리오.

 

돈오점수와 원돈신해 사상은 교가요 선종이 아니거늘 이것을 선종이라고 잘못 주장함은 대법을 비방한 큰 허물이라고 서산(西山)은 경고하였다. 또한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도 동일한 구절이 있다.

 

荷澤 是知解宗師(節要)

하택은 지해의 종사이니라.

 

하택은 돈오점수의 원조(元祖)이고, 규봉(圭峰)이 이것을 계승 선전하였다. 보조도 하택규봉 사상을 극력 주장한 사람인데, 보조가 ?절요(節要)?의 첫 머리에서 하택을 지해종사(知解宗師)”로 비판하였음은 사상의 큰 변동이다.

 

然此義理 雖最圓妙 總是 識情聞解思想邊量故 於禪門徑截門 一一全揀佛法知解之病也(看話決疑論)

그러나 이 이치[義理]가 비록 가장 원묘하지만 모두 마음[識情]으로 들어 해석하고 생각[思想]으로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에 선문인 경절문에서는 하나 하나 불법에 대한 지혜의 병으로 모두 가려내는 것이다.

 

원돈신해는 불법에 대한 지해임을 말한 것이다.

 

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恒河沙數 謂之死句 令人 生解碍故

원돈신해의 여실한 언교가 항하의 모래 수같이 많으나 죽은 말[死句]이라고 부르나니, 사람들에게 지해의 장애를 나게 하기 때문이니라.

 

보조 자신이 돈오점수인 원돈신해를 죽은 말[死句]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는데 팔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돈점의 원돈쌍이 선종이라고 고취함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證智現前者 今時罕見罕聞故 只今貴依話頭參意門 發明正知見耳(看話決疑論)

증지가 나타난 사람을 오늘날 보고 듣기 어려우므로 지금엔 다만 화두의 참의문에 의지하여 바른 지견을 드러냄을 귀중히 여길지니라.

 

今時 疑破者 多分參意 未得參句故 與圓頓門 正解發明一般(看話決疑論)

오늘날 의정을 부순 자는 참의함이 많으니 참구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원돈문과 바른 이해의 드러남이 한 가지이니라.

參意者 圓頓門死句也 有理路有語路有聞解思想故也(禪家龜鑑)

참의라 함은 원돈문의 죽은 말이니, 이치와 말과 듣고 해석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니라.

 

참구(參句)는 말과 생각이 끊어진 부분의 활구(活句)를 말한다. 보조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종래의 주장인 원돈사구(圓頓死句)를 포기하고 활구(活句)를 주장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의론(決疑論)?의 끝 부분에서는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어버렸다.

곧 보조 자신도 참의(參意)는 원돈문(圓頓門)과 한 가지라고 하면서 다시 원돈의 사구(死句)로 되돌아가서 이를 권장하였으니, 보조의 근본사상은 여전히 원돈신해

(圓頓信解)에 있음을 알겠다.

이는 단경(壇經)에서 말하는 내외명철(內外明徹)오입돈수(悟入頓修)와 정반대이니, 6조의 법손(法孫)인 선종으로서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이는 보조에게 투철한 정견(定見)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이론의 모순이요, 자살이 아닐 수 없다. 선문에서는 오직 단경을 표준삼아 내외명철(內外明徹)하고 오입돈수(悟入頓修)하는 본분의 활구로 돌아가야만 한다.

 

重敎輕心 雖歷多劫 盡是天魔外道(禪敎釋)

교를 중히 여기고 선을 가볍게 여기면, 한없는 세월을 지낼지라도 이는 모두 하늘의 마군이요 외도이니라.

 

이는 서산(西山)이 지은 ?선교석(禪敎釋)?의 결론이니, 무서운 말이다. 선문이라는 간판 아래 교를 주장하면 하늘의 마군이요 불법이 아닌 외도임을 선언하였으니, 서산(西山)은 참으로 탁월한 지도자이다.

 

直以徑截門活句 敎伊自悟自得 方是宗師爲人體裁 若見 學人不薦 拖泥說敎 瞎人眼不少 若宗師 違此法則 雖說法 天花亂墮 總是痴狂外邊走

곧바로 경절문의 활구로 그를 가르쳐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얻게 해야 종사가 사람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만약 배우는 사람이 이해못함을 보고 진흙밭으로 이끌어 교리를 설명하면 대단히 사람 눈을 멀게하는 것이다. 종사가 이 법칙을 어긴다면 비록 설법을 하여 하늘에서 꽃이 어지러이 쏟아져도 모두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달려가는 것이니라.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원칙 아래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것[先悟後修]

을 서산은 구감(龜鑑)에서 교가라고 지적하였으니, 보조(普照)의 점수수상(漸修思想)은 교가(敎家)요 선문(禪門)이 아님이 명백하다.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이전과 다름이 없는 십신초(十信初)에서 자성을 돈오하였다[頓悟自性]하고, 망상을 제거함을 점수(漸修)라고 주장함은, 망상이 모두 없어진 묘각(妙覺)에서 내외명철(內外明徹)하고 오입돈수(悟入頓修)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선문(禪門)에서는 원돈사구(圓頓死句)를 단절해 버려야 한다. 원돈사구에 대한 고집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면 서산(西山)이 준엄하게 가르친대로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달려가는 것이며 선문에서 가장 금기하는 지해종도(知解宗徒)이다.

불조는 불성을 가리는 번뇌망상을 모두 없앤 구경각(究竟覺)에서만 견성(見性)을 허락하였는데, 보조(普照)는 객진번뇌가 이전과 다름이 없는 십신초위를 견성이라고 하여 그 출발부터 불조의 법칙에 상반되었다. 점수(漸修)를 주장하면서 점수의 원조인 하택(荷澤)을 지해종사(知解宗師)라고 비판한 이상 점수사상을 단연코 포기하여야 한다. 결의론(決疑論)에서 사상전환이 있는 듯 하였으나 그 끝부분에서 여전히 사구(死句)를 참의(參義)할 것을 고취하였으니, 사상에 일시적인 변동은 있었으나 근본적인 전환은 없다. 이는 사구를 참구하지 말라고 역설한 그의 노력에 상반되는 것이다. 보조(普照)가 원돈신해(圓頓信解)인 사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잘못된 사상은 배제하여야 하며, “치광외변주(痴狂外邊走)”라고 엄훈(嚴訓)한 서산의 유법(遺法)을 준수하여야 한다.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太古錄)

자나 깨나 한결같음에 점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를 마음에서 여의지 말지니라.

 

설사 화두참구가 자나 깨나 한결같이[寤寐一如] 되어도 오직 화두참구에만 힘써야 한다. 이것이 납자의 생명선이다.

 

若是丈夫漢 看箇公案 僧問趙州 狗子還有佛生也無 州云 無 但二六時中 看箇無字 晝參夜參 行住坐臥 心心相顧 猛若精彩 日久歲深 打成一片 忽然 心華頓發 悟佛祖之機(禪關策進)

대장부라면 공안을 참구하라.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조주스님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밤낮없이 오직 이 무자(無字)만을 참구하되, 마음 마음 계속 돌아보고 매섭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지내다 보면(화두와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홀연히 마음꽃이 활짝 피어 불조의 기밀(機密)을 깨치게 된다.

 

評曰 此 後代 提公案 看話頭之始也 不必執定無字 或無字 惑須彌山 惑死了燒了等 隨守一則 以悟爲期 所疑不同 悟則無二(同上)

평하였다. 이것은 뒷날 공안을 들고 화두를 참구하게 된 시초이다. 굳이 자에만 국집할 것은 없고 , 또는 만법(萬法)’, ‘수미산(須彌山)’, ‘죽어서 불사라 버린다등의 공안으로 하나만을 고수하되, 깨침으로 목표를 삼아야 한다. 의심하는 화두는 다를지라도 깨침에는 다름이 있을 수 없다.

 

공안 참구가 문자로 전하기는 황벽(黃檗)이 처음이다. ‘()’자 뿐 아니라 무슨 공안이든지 하나를 지시받아 힘써 참구하면 반드시 확철히 깨칠 것이니, 이것이 선종 문하에서 가장 발달된 참선 방법이다.

 

十分信得 更要持戒 若無戒行 如空中架樓閣 還持戒麽 云, 見持五戒 云, 此後 只看箇無字 不要思想卜度 不得作有無解會 且莫看經敎語錄之類 只單單 提箇無字 於十二時中 四威儀內 須要惺惺 如猫捕鼠 如雞抱卵 無令斷絶 未得透徹 不可改復 時復鞭起疑 云, 一切含靈皆有佛性 趙州因甚道無(魏山)

신심을 완전히 냈다 하더라도 반드시 계행을 지켜야 한다. 만약 게행이 없으면 허공에 누각을 짓는 것과 같다. 계행을 지키겠는가? 5계를 지킴이다. 이제부터는 다만 자를 참구하되 이리저리 따지지 말며, 있다없다 해아려 알려고 하지도 말며, 경전과 어록 등을 보지도 말라. 그저 자만을 들되 하루 종일 앉으나 서나 반드시 또렷또렷해야 하며, 고양이가 쥐 잡듯, 닭이 알 품듯 끊어짐이 없게 해야 한다. 확철히 깨닫기 전에는 화두를 바꾸지 말라. 때때로 다시 채찍질하여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하였는가?’하고 의심하라.

 

做工夫 不只是念公案 如看無字 便就無字 上起疑情 如看柏樹子 便就栢樹子 起疑情 如看一歸何處 起疑情 疑情發得起 全十方世界 只一箇疑團(博山警語)

공부를 하되, 공안을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자를 참구하거든 자에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하며, ‘백수자(栢樹子)’를 참구하거든 백수자에 의정을 일으켜야 하며, ‘일귀하처(一歸何處)’를 참구하거든 일귀하처에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의정이 일어나기만 하면 온 시방세계가 다만 하나의 의심덩어리일 뿐이다.

 

當於本參公案上 有疑 大疑之下 必有大悟 千疑萬疑 倂作一疑 於本參上 取辨(蒙山)

본참공안을 의심할지니, 큰 의심에 반드시 큰 깨침이 있다. 천만 가지 의심을 한 의심으로 뭉쳐서 본참공안에서 결단내도록 하라.

 

動靜一如 寤寐惺惺 話頭現前 如透水月華 在灘浪中 活發發 觸不散 蕩不失 中寂不搖 外撼不動 疑團破 正眼開矣(蒙山)

움직이거나 가만 있거나 한결같고 자나깨나 또렷또렷하여, 화두가 나타남이[現前] 물 속에 비친 달빛이 여울 속에서도 활발하여 부딪혀도 흩어지지 않고 없애려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안으로는 고요하여 요동치 않고 밖으로는 흔들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서 의심 덩어리가 부숴지면 바른 눈이 열리는 것이다.

 

吾祖西來 單提直指 以大悟爲入門 不論禪定神通(夢山)

우리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오직 바로 가리킴[直指]만을 제시하신 것은, 크게 깨침으로 입문을 삼았을 뿐 선정과 신통을 말씀하지 않았따.

 

正悟者 如久暗遇明 大蒙俄覺 一了一切了 更無纖毫憎愛取捨之習 滯于胸中(中峰)

바른 깨침이란 오랜 어둠 끝에 밝음을 만나듯 큰 꿈에서 문득 깨어남과 같아서, 하나를 알면 일체를 알아 다시는 털끝만한 밉고 고움이나 취하고 버리는 습기가 가슴 속에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如暗室中 出在白日(雪岩)

캄캄한 방에서 환한 햇빛에 나옴과 같다.

 

生死幻翳永消 金剛正體獨露 一得永得 無有間斷(心要)

허깨비같은 생사가 영원히 사라지고 금강의 정체가 홀로 드러나니,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끊어짐이 없다.

 

見性成佛 一得永得 據自寶藏 運自家珍 受用豈有窮極(心要)

자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니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친다. 자기의 보배 창고에서 자기 보배를 운용하니, 쓰는 데에 어찌 다함이 있으랴.

 

看話一門 最爲徑截 止觀定慧 自然在其中(眞覺)

화두 참구하는 방법이 가장 지름길이니, 지관과 정혜가 자연히 그 가운데 있다.

 

但向十二時中 四威儀內 看箇話頭(眞覺)

하루 종일 앉으나 서나 다니거나 가만 있거나, 화두만 참구해야 한다.

 

진각(眞覺)은 점수사상(漸修思想)의 총수인 보조(普照)의 상수제자이지만, 보조의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지 않고 간화(看話)를 주장하였으며, 간화선의 근본 성전인 염송(拈頌)을 결집하였다.

 

有一般 昭昭靈靈 靈臺知性 能見能聞 向五蘊身田裏 作主宰 恁麽 爲善知識 大膁賺人 知麽 我今問汝 若認 昭昭靈靈 是汝眞實 爲甚麽 瞌睡時 又不成 昭昭靈靈 若瞌睡時 不是 這箇 認賊爲子 是生死根本 妄想緣起(玄沙錄傳燈錄 十八)

어떤 이들은 소소영령한 영대지성(靈臺知性)이 있어서 보고 들을 수 있으며 오온(五蘊)의 몸속에서 주인노릇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고서 선지식 노릇을 한다면 크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알겠는가? 내가 이제 너희에게 묻는데, 만약 소소영령한 그것을 진짜 너희 자신으로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잠이 깊이 들었을 때는 소소영령하지 못하는가? 잠이 들었을 때 소소영령하지 못한다면 이는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함이니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의 연기이다.

 

是法 非思量分別之所能解(法華經)

이 법은 사량분별로는 알지 못한다.

 

佛言 學我法者 唯證乃知(宗鏡錄 二十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법을 배우는 이는 오직 증득을 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雖卽心卽佛 唯證者 方知(澄觀 傳燈錄 三十)

마음이 곧 부처라고는 하나, 오직 증득한 사람이랑야만 안다.

 

法性 證智所知 非餘境(義湘 法性偈)

법의 성품은 증득한 지혜로만 아는 것이요, 그 밖의 경계로는 알 수 없다.

 

증득한 지혜[證智]는 오직 부처님만이 아는 것[義湘 法性偈]이라고 의상(義湘)은 그의 ?법성도(法性圖)?에서 자술(自述)하였다. 증지가 아니면 모른다함은 불조선교(佛祖禪敎)의 일관된 철칙(鐵則)이거늘 보조는 망상이 이전과 다름없는 해오(解悟)를 견성(見性) 운운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불조에 대한 반역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공안(公案), 곧 화두(話頭)는 증지가 아닌 사량분별로써는 절대로 모르는 것이다.

 

一燈 能除千年暗 一智能滅萬年愚(壇經)

한 등불은 천년의 어둠을 없고 한 지혜는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앤다.

 

원오(圜悟)는 그의 제자인 대혜(大慧)에게,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었으나 죽기만 하고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서,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死了不活 不疑言句 是爲大病]’라고 통렬히 경책하였다. 옛 조사의 공안은 오매일여하여 내외명철(內外明徹)이 되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매일여하여 내외명철이 되기 전에는 오직 화두 참구에만 전심전력해야 한다. 오매일여내외명철은 일념불생(一念不生)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불가능하며, 일념불생은 돈수(頓修)이므로 돈수가 아니면 그 돈오(頓悟)는 견성(見性)이 아니다.

 

보조(普照)의 가장 큰 과오는 객진번뇌가 예전과 다름없는 해오(解悟)를 견성이라고 단정한 데 있다. 망상이 그대로인 해오는 견성도 아니며 여기에서는 옛 조사들의 공안은 절대로 알 수 없다. 참선을 하다가 망상 가운데서 알았다는 병()이 나면 공부는 영영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알음알이의 병[知解病]이야말로 병 가운데 가장 큰 병이다. 그런데 보조는 이것을 견성으로 인정하였으니, 뒷 사람들이 이로부터 받은 피해는 막심하다. 해오견성설(解悟見性說)은 종문(宗門)을 근본적으로 망쳐놓은 것인데, 이것은 지해병을 조장하는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사람은 <단경>의 말씀과 같이 내외명철(內外明徹)무심무념(無心無念)의 실제 경지가 되기 전에는 알았다는 생각을 절대로 내지 말아야 한다. 이 지견병(知見病)에 걸리면 선지식으로 자처하면서 후학을 잘못 지도하고 자기도 자멸하게 되니,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원증돈증(圓證頓證)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들 하지 말고 지해병에만 걸리지 않고 참답게 정진한다면 삼사년 안에 내외명철이 되어 크게 깨칠 수 잇다.

 

그러나 해오병(解悟病)으로 장사질 할 생각은 절대로 금물이다. 정진하는 사람은 삼경(三更) 전에는 잠자지 말고, 선원에서 이야기하지 말며, 경전어록이라도 문자는 보지 말며, 해제(解制)했다고 돌아다니지 말고, 이 세상에 안난 셈치고 오직 정진에만 힘써 보라. 반드시 영험을 얻을 것이다. 내외명철이 되기 전에는 고인(古人)의 공안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 정진은 하지 않고 공부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지견병(知見病)의 간판을 떼고 참답게 정진을 하라. 반드시 좋은 성과를 얻으리라.

 

거듭 말하거니와, 옛 사람들은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不爲也이언정 非不能이라]’고 하였다. 참답게 정진했는데 그래도 성취하지 못하거든 자기의 목을 베어 가라고까지 경책하였으니,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셈치고, 만사를 제쳐 놓고 대용맹심을 내어 허망한 꿈에 속지 말며 참답게 정진할 것을 부탁할 뿐이다. 이는 인아(人我)를 서로 다투려는 것이 아니요 불법만세(佛法萬歲)를 위하여 감히 한마디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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