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中國禪과 韓國禪

醉月 2013. 7. 1. 01:30

 

中國禪과 韓國禪

-橫的인 同時配列에서 縱的인 宗法體制로 바뀐 禪宗史成立에 관한 문제-

閔泳珪*
 

차 례

1. 머리말

2. 義天과 義相의 경우

3. 맺음말

 

1. 머리말

 

‘中國禪과 韓國禪’이라는 제목은 주최측에서 내게 부탁한 것인데 이 제목을 가지고 어떤 해답을 도출하자면, 먼저 중국의 선종사와 한국의 선종사를 會通한 연후에 비로소 건강한 해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현재 우리는 그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춘 단계에 이르고 있는가 自問自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근 40~50년래 우리 불교학계, 특히 그 禪宗史學分野에서 우리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어 왔습니다.

 

그 두드러진 성과의 하나를 여기 柳田교수에게 돌려도 과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祖堂集?에 관한 선생의 연구업적은 오늘은 물론 후세에 두고두고 우리가 그것을 美談의 하나로 칭송해 마땅하리만큼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學恩을 나도 선생의 學業에서 얻어 입은 한 사람으로서 최상의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종사연구는 이것으로 大團圓을 이루고 만족해도 좋을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 柳田교수도 나와 意見을 같이 하리라 믿습니다. 오히려 이제야말로 우리는 새로운 自覺과 反省으로 새로운 地平線을 열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中國禪과 韓國禪」 표제 아래 약간 긴 부제를 달았습니다. ‘橫的인 同時配列에서 縱的인 宗法體制로 바뀐 禪宗史成立에 관한 문제’는 내가 붙인 제목입니다. 오늘의 엄청난 제목을 놓고 그 폭을 약간 제한해서 내 나름의 결론으로 이끌기 위한 先行條件이 되기도 합니다. 時間上의 제약으로 오늘의 강연은 어쩔 수 없이 이 부분이 되겠습니다.

 

서기 830년 당시 圭峯 宗密이 지은 禪源諸詮集都序에서 洪荷能秀라는 用語가 자주 나옵니다. 洪은 馬祖 道一과 그 추종자들을 의미한 洪州宗을 가리키고 荷는 荷澤 神會를 宗主로 삼은 荷澤宗을 말하며, 能과 秀는 南宗의 惠能과 北宗의 神秀를 가리킵니다. 이밖에 또 牛頭宗․空宗․淨衆宗․保唐宗 등 이른바 十宗七家들이 야단스럽게 등장하여 百家爭鳴합니다. 결코 후세 祖堂集이나 景德傳燈錄에서 보아오듯이 아저씨와 조카,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친속관계에서가 아니고, 水火가 相克하는 敵對關係일 따름, 宗密은 그 본문에서 荷澤 神會와 馬祖 道一과의 관계를 參商之隙으로 표현했고 ‘頓과 漸이 相見하기를 仇讎보듯 하며, 南과 北이 相敵하기를 禁漢과 같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橫的인 同時配列, 또는 同時存在로 보는 所以입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제치고 내가 그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극한상황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장 비열한 戰術武器라면 圓懺說을 들 수 있을 것이고, 가장 效果的인 방법이었다면 周나라 周公이 창안했다는 宗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宗子相續을 制度的으로 규정한 宗法에 관하여 王國維의 殷周制度論」 (觀堂集 卷十)에서 존경할 만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宗法이란 무엇인가. 중국사회에서 宗法이 갖는 의미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얼마만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던가.

 

前世紀 구라파에서 중국으로 파송된 어떤 선교사가 그동안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이 如意치 못했던 데에 대한 장애요인의 하나로서 孝를 들어 본국으로 올린 보고서가 생각납니다. 위로는 皇帝로부터 아래로는 억조창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行動規範, 價値判斷의 基準으로서 孝라는 大命題 아래 무릎을 꿇고 그 발 아래 엎드려 절을 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ㅇ서의 孝는 기실 이 宗法에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모든 道德律의 大宗인 三網五倫도 기실인즉 이 宗法을 거창하게 包裝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위로는 皇帝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억조창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가 되어 그 발 아래 굴복한다는 大命題로서 ‘태초에 宗法이 있었다’고 말해도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傳法寶紀가 페리오 頓煌文書 속에서 발견된 것이 언제였는지 지금은 잊었습니다. 楞伽師資記가 발견된 것은 1926년 겨울 胡適 선생이 영국 大英博物館 스타인 돈황문서 속에서였습니다. 700년대 전반기에 제조된 것으로 보이는 두 개 돈황문서 속에서였습니다. 700년대 전반기에 제조된 것으로 보이는 두 개 돈황문서는 中國 本來의 宗子相續法을 禪宗의 宗統싸움으로 끌어들인 첫 번째 예가 될 것입니다. 初祖가 達摩大師고, 二祖가 慧可요, 三祖가 僧璨, 四祖가 道信, 五祖가 弘忍, 그리고 六祖가 法如, 혹은 神秀로 되어 나옵니다. 얼마만한 준비와 근거를 갖추고서 一人一代 이러한 宗譜가 만들어졌던가. 심히 疑問視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一人一代가 모두 그러하려니와, 특히 그 三代와 四代는 연결을 방해하는 반대 의견들이 자꾸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만, 승려사회에 宗法이 가져다 줄 威力을 計算한 것이라고밖에 달리 해헉할 도리가 없습니다.

 

전법보기와 능가사자기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앞서 神秀系 北宗의 宗統宣布에 대한 荷澤 神會의 색다른 반격으로 되어 나옵니다. 732년 5월 15일, 河北省 滑縣 大雲寺 無遮大會에서 四部大衆을 향해 사자후한 ‘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이 그것입니다. 신회는 여기서 북종이 주장한 初祖 達摩로부터 五祖 弘忍에 이르기까지 宗譜를 굳이 否定하려 하지 않습니다. 五祖에서 六祖로 이어지는 宗統이 神秀가 아니고 惠能이 되어야 한다는 증거로 袈裟傳法說을 들고 나옵니다. 初祖 達摩로부터 五祖 弘忍까지 傳法의 信表로 袈裟 한벌이 비밀스럽게 傳授된 것은 사실인데, 그 袈裟를 五祖 弘忍이 덤풒머리 惠能을 密房으로 역시 비밀스럽게 불러들여 아무도 모르게 전수되었으며, 그 袈裟로 말하면 지금 당장 惠能先師가 계시던 韶州 曹溪山에 봉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神秀도 惠能도 이미 地上의 존재가 아니고 袈裟가 있다는 韶州는 滑台에서 五天里 밖 東南方,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反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神會야말로 참으로 이 길에서의 天才 중의 천재라고 胡適 先生은 칭찬과 감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길에서의 天才가 神會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神會를 꺾은 第三의 인물이 바로 ?歷代法寶記?를 제작한 保唐寺 無住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돈황에서 출토된 문서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洪州 馬祖와 같이 淨衆寺 無相의 會下에서 나온 인물이며, 774년에 入寂해 있습니다. 紳土協定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無住는 淨覺의 一人一代五代 傳法과 神會의 袈裟傳授를 전면적으로 否定하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袈裟가 五祖 弘忍에게서 惠能에게로 일단은 넘어간 것이 사실이되, 696년 則天武后가 惠能으로부터 그것을 宮中으로 거둬들여 한동안 內道場에 봉안하다가, 이듬해 697년 7월, 四川省 資州縣德純寺 智詵을 불러들여 전수했고, 智詵은 處寂에게 處寂은 다시 淨衆寺 無相에게 전수했는데, 無相은 762년 5월 15일 79세로 順世하면서 弟子 無住에게 마지막으로 전수했은즉, 初祖 達摩로부터 면면하게 시작된 禪宗의 宗統은 南宗의 惠能에게 있지 않고, 北宗의 神秀에게도 있지 않으며 오로지 智詵․處寂․無相․無住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교와는 無關한 중국의 宗法思想을 불러들여 어지간히 지친 모습인가 싶었던 禪宗界 宗統의 자리다툼은 800년대로 접어들면서 南岳 朱陵 沙門 智炬가 지었다는 ?寶臨傳? 十卷이 나돌면서 다시 한번 패닉상태로 빠져드는 계기를 이룹니다. 西天 第27祖 般若多羅를 새롭게 등장시키고 부처님 말씀을 빙자한 懸記 곧 圖懺說을 불러들임으로써 洪州宗 馬祖 道一이 淨衆 無相의 弟子이면서 南宗 南岳懷讓의 系譜로 移籍하는 슬픈 결과를 여기서 낳게 됩니다.

 

會昌年間의 破佛沙汰(845)는 三武一宗의 法難 중에서도 유례가 없는 파괴를 중국불교에 가져왔으며, 그러한 정황일수록 圖懺說로 분장한 寶林傳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마련이었던 것 같습니다. 從上宗乘을 표방하고 모처럼 荒蕪地 속에서 추스린 祖堂集二十卷이었지만 寶林傳의 骨格을 그대로 답습해 있는데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 祖堂集의 골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景德傳燈錄 三十卷입니다. 景德傳燈錄? 三十卷은 그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十年이 모자란 千年 동안 불교학 모든 분야에 걸쳐 君臨해 온 셈이 됩니다. ‘景德傳燈錄이 形成되기를 佛敎外의 要因-宗子相續法과 圖懺說에 의하여 편성된 結果였음을 감안할 때, 참으로 불행한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대한 地下石油資源 하나를 확실하게 하자면 그에 선행해서 몇 군데 시굴작업이 필요합니다. ‘中國禪과 韓國禪’이라는 제목이 워낙 큰 제목이고 보면, 최종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가장 가깝고도 효과적인 길을 찾아 몇 군데 시굴작업이 필요하게 됩니다. 一에 義天의 경우, 二에 義相의 경우, 三으로 知訥과 休靜의 경우는 그러한 뜻에서 조심스럽게 설정한 시굴점이 될 것입니다.

 

2. 義天과 義相의 경우

 

대각국사 義天의 생애를 결산하는 비문으로서 林存이 撰한 천태종 선봉사비와 金富軾이 찬한 화엄종 영통사비 두 가지가 전한다. 후자 靈通寺碑의 경우, 삼국사기의 저자답게 史家로서 놓쳐서는 아니될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지적하고 있다. 義天이 그의 만년에 門人들이 가까스로 스승의 글밭을 모아 二十卷集으로 편찬 板刻에 올린 것을 모두 불에 태웠다는 것이다. 모처럼 板刻한 것을 불태웠다면 그것은 곧 당년 四十七세 義天이 평생 주장해오던 바를 하루아침에 부정한다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變身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던가.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義天의 입멸은 그가 四十七세 나던 一一○一년 十월 五일이었다. 바로 그해 봄 二월, 왕실의 원찰 洪圓寺 九祖堂을 낙성하는데, 오랜 주저 끝에 화엄종 宗祖 아홉분을 다음과 같이 모시도록 義天은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다.

 

一. 馬鳴, 二. 龍樹, 三. 天親(世親), 四. 佛陀(扇靈), 五. 光統(慧光), 六. 帝心(杜順), 七. 雲華(智儼), 八. 賢首, 九. 淸涼(澄觀).

 

여기서 새롭게 제정된 화엄종 아홉분 종조는 일찍이 義天이 一○八五년 三十一세 나이로 北宗에서 돌아온 慧因院 淨觀이 일러준 대로 이땅에 모시고 强行해오던 이른바 慧因院 七祖像과는 크게 다르니 다음과 같다.

 

一. 馬鳴, 二. 龍樹, 三. 宰心, 四. 雲華, 五. 賢首, 六. 淸涼, 七. 定慧(宗密).

 

慧因院 淨觀의 이른바 화엄교학이란 賢首宗이라 불러서 마땅하고 智儼․義相으로 이어진 신라․고려의 전통적인 화엄종과는 거리가 있다. 그 좋은 증거로 義天이 중국으로 逆수출하기까지 ?華嚴搜玄記?․?孔目章?․?五十要問答? 등, 智儼三藏의 중요한 저술들이 北宗에서는 전해지지도 않았고 읽혀지지도 않았었다. 그만큼 兩者는 서로 체질을 달리하기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일년 남짓 중국에서 배워온 대로 그리고 一個貧僧 淨觀이 일러준 대로 義天이 이땅에 와서 이른바 三種法界觀을 내세우고 圓通鈔 一大叢書를 大成한 均如一党을 王權을 동원하면서까지 일방적으로 몰아부치려 했지만 처음부터 거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義天 스스로 十중 七八의 반대에 부딪쳤다고 그의 新集圓宗文類序에서 고백한 대로이다.

 

화엄종 宗祖를 규정한 慧因院 七祖像과 洪圓寺 九祖堂과의 사이엔 王室佛敎의 代表走者로서 義天의 처음과 끝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慧因院 七祖像은 온통 龍樹의 中觀系로 일색을 이룬 賢首의 화엄종이었다. 여기에 世親과 佛陀(扇靈)와 慧光 등 唯識系 地論宗, 곧 初期 화엄종이자 신라 화엄불교의 전통이기도한, 새로운 색채를 加味한 것이 洪圓寺 九祖堂의 내용이었다. 비록 임종의 해에 다달아 義天에게 劇的인 變身이 있었다고 보기엔 그 變身의 내용이 심히 미온적이고 철저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면치 못한다. 문제는 杜順에 있다. 중국․한국․일본 삼국 화엄불교의 初祖일밖에 없는 杜順이 참으로 華嚴法界觀을 제창한 실제 인물이었던가 아니었던가에 따라서 馬鳴․龍樹가 등장할 수 있는 餘地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杜順에 대해서는 종래로 그 實際性에 대하여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어 왔었다. 심지어 그것을 賢首의 뒤를 이는 淸涼大師 澄觀이 창작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澄觀이야말로 賢首의 후계자 惠苑을 異端으로 제외시킴과 동시에 賢首 위에 智儼을, 또 그 智儼 위에 杜順이라는 인격을 창조하여 앉힘으로써 방대한 체계의 화엄교학을 완성시킨 인물이라는 것이다.

 

諸惡의 根源은 그러나 앞 뒤 五十年에 걸친 則天武后의 막대한 권력창조와 이에 가담한 賢首가 불교자체를 완전히 변질시킨데서 비롯된다는 나는 생각하고 있다. 晩唐에 이르러 화려하게 등장한 禪佛敎도 그러한 體裁佛敎에 대한 自覺과 대중의 호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中國禪과 韓國禪의 差異를 낳게 된 근본동기도 기실인 즉 이 시기의 격렬했던 사회사적 변동에 원인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3. 맺음말

 

결론적 입장에서 해인사에 보관해 온 ?조당집?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음에도 아직 풀리지 않은 몇 가지 수수께끼가 우리를 당혹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조당집이 서기 952년에 중국 변두리 복건성에서 처음으로 저작되었는데, 왜 중국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버리고 말았는가. 왜 중국에서 전승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조당집이 한국에 와서 고려 고종 때 남해도 분사도감에서 20군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으로 조판이 되는데, 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을 아는 이가 없이 창고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어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당집이 편찬되었던 952년은 중국에서 삼무일종의 법난 가운데 마지막인 후주 세종의 법난이 벌어질 때였습니다. 그래서 설봉의존으로부터 시작해서 백년 남짓 걸쳐서 애써 편찬된 조당집이지만 끝내 중국에서 전파될 기회를 상실하고 만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그렇게 남북동서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을 때가 우리나라로 보면 고려 태조 때입니다. 고려 태조와 후주 세종과는 연락이 빈번하여 사신들이 왕래하였습니다. 또 당시는 양자강 남쪽 복건성 절강성에 오월국이 아직 있을 때인데, 고려 태조와 오월국 사이에도 왕래가 밀접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조당집이 중국에서 전파될 기회를 상실하고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된 하나의 시대적 배경을 이룬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고려대에 조판된 ?조당집?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았는가? 조당집과 함께 판각된 중편조동오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일연스님이 지으신 것인데, 남해도에서 지어지고 판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당집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발간되어 일본 조동종이 성전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그것이 일연스님의 저술이라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 접니다. 그러면 왜 중편조동오위를 조당집이 간행되었으면서도 잠재워져야만 했던가 그에 대한 해답으로 보는가? 당시 일연스님과 송광사의 혜심스님, 청연스님과 충청도 계퇴사의 스님들은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고려재조대장경을 간행한 주역들이기도 합니다만, 조당집에 실린 내용이 신라 이래, 당시의 고려 불교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잠재워져야만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일연스님은 신라로부터 시작된 고려, 그 당시 불교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에는 신라의 선불교가 있었으며 그것은 중국의 선불교와는 역사가 다르다. 그 마지막 보루를 지킨 사람이 일연스님이었다. 그 뒤 대륙에서 바람이 몰아쳐, 마침내 우리 신라이래 의상대사로부터 구축된 선불교는 모두 중국의 황토바람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以下未能成稿 不勝慚愧 八十老殘 西餘識.


 

中國禪과 韓國禪에 대한 논평

권기종(동국대 교수)

 

 

본 세미나의 큰 주제는 ‘禪宗史에 있어서 頓悟頓修思想의 위상과 의미’이다. 그 가운데서 閔泳珪 선생님의 論題는 「中國禪과 韓國禪」으로, 특히 ‘橫的인 同時配列에서 縱的인 宗法體制로 바뀐 禪宗史成立에 관한 문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세미나의 발표에 있어서는 주로 禪宗史書의 하나인 ?祖堂集?의 간행과 전래, 그리고 이 조당집이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깊이 묻혀있었던 이유를 밝히고자 하였다. 따라서 本 論評者는 논평을 함에 있어 당황할 뿐이다. 그래서 본 세미나의 대주제인 ‘禪宗史에 있어서 頓悟頓修思想의 위상과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돈오돈수라는 말은 선수행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며 최선의 길임에는 틀림없다. 말 그대로 선수행자에 있어서는 돈오와 돈수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말대로 모든 선수행이 이렇게 된다면 얼마가 좋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돈오돈수가 최선의 길이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어느날 단박에 깨달아지고 모든 수행이 다 닦아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의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돈오돈수는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이상일 뿐, 수행의 실제에 있어서 그렇게 될 수 있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禪宗史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으며, 오늘 다시 이 주제를 문제 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발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이 문제를 다루면서 보다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어떤 선입견이나, 그 어떤 입장에 서서 이렇다 자렇다 할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생각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엄정한 객관에 서서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 禪도 불교의 한 분야에 속한다는 전제하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禪法이 중국에서 성립된 혁명적 사상이라 하더라도 불교를 떠나서 독립된 별개의 선법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의 선법은 ?능가경?․?금강경?․?유마경?․?화엄경?․?능엄경?․?원각경? 등, 수많은 대승경전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에서 가리키고 있는 見性成佛이 경에서 설해지는 궁극적 목적과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경에서 설해지고 있는 깨달음이란 緣起法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근본이 된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성립과 함께 이 연기법은 새롭게 발전되어 諸法皆空, 諸法空相, 不二法 등 다양한 표현이고 전개되어지고, 이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곧 깨달음인 것이다.

 

이 깨달음을 반야바라밀(즉 지혜의 완성)이라고도 표현하고 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다(얻는다)고도 하였다. 成佛이란 곧 부처가 된다는 뜻이고 부처가 된다는 말은 깨달음을 이룬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의 출발이 모든 중생은 깨달을 수 있다[成佛]는 가능성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는 보살(깨달으려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갖게 되는데 있다. 모두가 깨달음의 가능성[佛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二乘도 三乘도 아닌 一乘[모두는 하나이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때 見性이란 이 부처될 가능성인 佛性을 갖고 있다는 자각이며, 이것을 통해서 成佛[깨달음을 이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은 분명히 頓悟인 것이다. 왜 돈오냐 하면 없던 것이 다시 생긴 것이 아니며, 없던 곳에서 새롭게 자라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가지고 있던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본래 깨달음이지 새롭게 얻어진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이것을 本來成佛이니 本覺이니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깨달음은 頓悟일 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頓悟가 아니라 本悟이다. 이런 입장에 보면 悟만 그런 것이 아니라 修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생의 自心 속에는 萬德이 다 갖추어 있으므로 頓修일 것이다. 없던 修가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자라나는 것도 아니며, 본래 있는 것이므로 頓修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大乘의 諸典에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般若經」의 보살의 四種階位나 ?華嚴經?의 十地나 ?法華經?의 開․示․悟․入 등이 모두가 수행의 실제에 있어서는 단게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3아승지겁이라는 긴 수행의 기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禪者들 자신도 수년에 걸친 구도의 參究가 있었으며, 이것은 오늘의 禪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돈오돈수의 주장과 수행의 실제 사이에는 상당한 不一致가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不一致의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오돈수의 주장이 禪思想에서 강조되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돈오돈수의 사상이 원론적으로는 합당한 이론이며, 또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중국불교가 처하고 있는 불교사적 위치에서 왜 이러한 사상이 주장되어졌어야만 했나를 살펴야 할 것이지만 우선 몇 가지 문제점만 거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중국의 초기 선법은 경전영향을 받아서 수립되면서도 점진적으로 印度的 經典의 제약에서 벗어나 독자적 양상을 띠고 있다. 경전의 제약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한 경전의 외면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경전을 초월하는 이론이 필요한데 이미 대승경전은 그 경전의 내용 속에서 경전을 부정하고 있다. 경전이란, 단순한 도구요 방편이며, 그 경전을 읽고 있는 당사자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며, 그 경전이 담고 있는 내용 즉, 法이 요체가 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맑아지고 법을 볼 수 있다면 경전은 하잘 것 없는 휴지일 뿐이다.

 

이같은 이론은 선사들이 경전을 불지르거나 경전을 초극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선사에게는 不立文字 見性成佛이 대단히 매력있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 선법의 전제와 발전은 다른 교학불교에 비하여 시기적으로 늦다. 초기 선종은 독자적 교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율원에 얹혀있기도 했으며, 국가로부터의 지원도 없어 자급자족의 생활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어 선원청규가 독자적으로 제정되고 一日不作이며 一日不食의 노동이 강조되기도 했다. 이러한 선종이 기성교단과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여기서 선종이 발전하는 길은 교학을 통한 교리적 대응이 아니라, 경전을 넘어선 본질의 문제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臨濟스님도 王常侍의 “경을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경을 보지 않는다고 답했다. 大慧스님이 宗直閣에게 보내는 글에는 ‘살생만 일삼던 廣額屠兒도 피묻은 칼을 놓자마자 당장 부처가 되었다’는 글을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을 깨닫는데는 경전을 읽을 필요도 없고 오랜 기간의 수행도 필요하지 않다. 나아가서는 닦을 필요도 없으며[道不用修], 좌선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頓悟頓修이다. 이것은 참으로 선종만이 지니는 최고의 무기일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에 깊은 조예를 갖지 않은 士大夫에게도 대단히 매력적인 것으로소 일생을 관리에 있었거나, 돈벌기에만 급급했던 부호들도 참으로 편리한 가르침이었다. 이들에게는 平常心是道라는 명제가 감격적인 충격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頓悟하면 그만이지 무슨 수행이 다시 필요한가. 당시 선사들의 법어는 반드시 경전과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형식이나 격식도 필요하지 않다. 반드시 말로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몸짓으로 눈빛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오직 중요한 것은 마음에 있지 형식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체의 구속과 형식을 탈피하면서도 교학불교를 능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돈오와 돈수에 있다. 돈오돈수의 경지는 수십년에 걸친 경학연구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경지보다도 더 높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이 돈오돈수를 논의함에 있어서 是非를 가리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러한 사상이 강조되어졌고 발전할 수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불교에 있어서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교학불교가 쇠퇴하여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때도, 선법만이 오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선법이 가지고 있는 초교학적 이론, 즉 돈오돈수의 선적 특징이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논평에 대한 답변

민영규

 

 

질문하신 조당집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조당집에 얽힌 일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조당집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은 것을 처음으로 胡適 선생에게 보내드린 것이 1960년 이른 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전해드렸느냐 하면, 호석 선생이 일본의 학자들하고 논전을 하는데, 일본 학자들은 조당집을 금과옥조처럼 몰래 펴들고 이용하는 데 호석 선생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전해드렸습니다. 애석한 일은 호석 선생이 조당집을 충분히 연구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돌아가겼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성묘를 갔는데, 호석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조당집 인화한 것을 쌓아놓고 씨름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뒤 4년이 지나 프랑스에서 드미에뷰 박사를 만나 그에게서 조당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이 조당집을 한 부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시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보니 야나기다 선생이 복사한 것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고 그 이듬해에 조명기 박사 화갑기념 논문집을 내기에 ?조당집? 20권을 영인하여 실음으로써 최초로 지상에 공표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당집은 야나기다 선생 한 분의 손으로 위대한 금자탑이 쌓였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으며, 이 점 야나기다 선생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한분, 회상되는 분은 조명기 박사입니다. 내가 복사한 조당집은 조명기 박사가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그 당시 총독부 고서보존의 책임자이면서 경성대학교 교수였던 후지다 료사꾸씨가 해인사에 와서 한 해인가 두 해 여름에 걸쳐 대장경판을 하나하나 꺼내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지취 아래 조명기 선생과 신태현씨 두 사람이 작업을 하였는데, 조명기 선생이 경판을 조사하면서 한 장한장 찍어낸 것을 모두 저에게 양도해주셔서 ?조당집?도 그 때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 태평양전쟁 말기,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한 두해 여름을 꼬박 지내면서 조사한 경판기록, 찍어낸 것들은 앞으로 소중하게 연구되어져야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 분들이 모두 이승이 아니고 저승에 계신 분들입니다. 삼가 이 분들에게 부처님의 가호가 계시기를 빌어마지않습니다.

'수련단체&요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0) 2013.08.01
退翁 性徹_깨달음의 길  (0) 2013.07.16
육조단경에서 견성의 의미  (0) 2013.06.30
行禪의 효험  (0) 2013.06.23
仙道의 중점적 효능  (0) 2013.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