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영혼’과 ‘우주 의식 저수지’ 사이
퀴리 부부의 친구였던 화가 뭉크, 작가 코넌 도일, 전화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도 여러 차례 강령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왜 영매술에 집착했을까.
영매의 도움으로 영혼의 만남을 시도한다는 내용이 담긴 연극 ‘달은 오늘도 날 내려다본다’.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은 한때 영매술(靈媒術)에 관심을 가졌다. 영매술은 영매의 매개로 신령이나 망령을 불러내고 죽은 자와 산 자가 의사 소통을 하는 것. 다윈은 65세이던 1874년 아들, 두 조카와 함께 강령회(降靈會)에 참석했다.
다윈은 최면술이나 투시와 같은 것을 믿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심령현상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1870년대에 접어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평소 알고 지내던 런던대학의 물리학자 윌리엄 크룩스가 영매술을 과학적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 계기였다. 다윈의 조카 프란시스 갈턴은 1872년부터 크룩스와 함께 강령회에 참석했고, 자신의 체험담을 다윈에게 들려줬다.
연로했던 다윈은 강령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자리를 떴으나 두 조카는 끝까지 참석했고, 갈턴은 다윈에게 강령회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한 편지를 보냈다. 갈턴은 “강령회는 생생한 진짜 체험이었다”고 적었다. 다윈은 동료 토머스 헉슬리에게 영매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노령의 자신이 직접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헉슬리는 다윈의 아들과 함께 그 영매의 강령회에 참석했고 ‘눈속임을 하는 것 같다’는 부정적인 보고서를 다윈에게 보냈다. 그후 다윈은 영매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
다윈, 헉슬리, 월러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바로 토머스 헉슬리의 손자라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는 심령소설이자 미래소설로 유명한 작품이다.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부탁을 받기 훨씬 전부터 영매술을 의심하고 있었다. 당시 이미 여러 차례 강령회에 참석했으며, 영매가 사람들의 심리를 읽고 눈속임을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박물학자 알프레드 월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솔직히 나는 영매술에 관심이 없다. 현재 엄청나게 중요한 5~6가지 연구에 매달리고 있어서 좋아하는 체스게임도 포기한 상태다. 영매술 조사를 하기 힘들다”고 썼다. 영매술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봤던 그가 정말 영매술에 대해 객관적인 조사를 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선입관은 너무나 완고했다.
월러스는 다윈보다 먼저 진화론에 대한 논문을 써서 발표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월러스는 논문을 학회에 제출하기에 앞서 다윈에게 초고를 보냈는데, 다윈은 이 논문을 읽고 경악했다고 한다. 자신이 오랜 기간 연구해서 틀을 잡아놓은 ‘진화론’과 너무나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많은 증거를 수집해서 상당히 완성도 높은 이론을 정립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도 혁신적이라 보수적 학자들과 종교계로부터 받을 공격을 염려해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신진 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논문을 발표하려 하니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윈은 학회의 영향력 있는 동료들에게 부탁해 월러스의 논문에 자신을 공저자로 올리도록 종용했다. 마음씨 좋고 평소 다윈을 존경하고 있던 월러스는 오히려 영광이라며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이렇듯 진화론의 선구자였던 월러스가 이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까맣게 잊힌 것은 그가 심령주의를 옹호하며 영매들을 적극 변호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는 말년에 학계에서 철저히 배척당했고 연금 수혜 자격까지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런 그를 도와 연금을 받게 해준 사람이 다윈이었다. 다윈은 이로써 자신의 학문적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1906년 프랑스 파리 심리학연구소의 세미나실에 한 명의 피실험자를 앞에 두고 몇몇 사람이 은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피실험자는 당대의 유명한 영매였기에 그 모임은 강령회나 다름없었다. 실험을 주도한 인물은 1913년 과민증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는 생리학자 샤를 르세. 그는 영매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그녀의 오른손을 꼭 잡은 채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다른 한편에는 한 여성이 영매의 왼손을 잡고 테이블에 올려놓게 했다.
靈媒 손 잡은 퀴리 부인
19~20세기 초에 영매술은 유럽 귀족들의 파티에 빠지지 않는 여흥거리로 비싼 참관료를 받고 여러 사람 앞에서 시연됐다. 하지만 이날의 시연은 몇 달 전 남편을 여읜 어느 부인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자리였다. 그 부인은 방사능 연구로 1903년 남편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1911년에는 노벨화학상까지 받은 마리 퀴리였다.
시연이 시작되기 전 보조자로 참석한 파리 일반심리학연구소의 비서가 이중 커튼을 영매 뒤쪽에 설치했다. 강령회가 시작되자 커튼 뒤쪽에서 어떤 물체가 밀치는 듯 커튼이 부풀었고, 트랜스 상태(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진 영매가 그것을 만져보라고 해 샤를 르세가 만져보니 누군가의 손이었다. 그는 퀴리 부인이 영매의 손을 잡고 있는지 확인했고, 자신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음을 확인했다. 약 30초 동안 커튼 뒤의 손을 잡고 있던 르세는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 손가락에 끼워진 둥근 반지가 느껴져 깜짝 놀랐다. 너무나 객관적이고 생생한 체험이어서 그는 “이보다 더 확실한 실험을 생각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기록에는 퀴리 부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 과학자로 물질의 근본적인 구조를 파헤쳐 두 차례나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던 그녀가 왜 이런 비이성적인 실험 현장에 주역으로 참여한 것일까. 그 이유를 찾아내려면 한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리 퀴리의 남편 피에르 퀴리는 강령회를 ‘과학적 실험’이라고 할 만큼 심령현상에 우호적이었다. 1905년 여름, 파리에 머물던 그 영매를 대상으로 피에르 퀴리와 샤를 르세는 특별한 실험을 했다. 그들은 영매와 사전에 협의하지 않고 강령회장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했으며, 그들이 잘 아는 소수 인원만 배석시켜 공모에 의한 눈속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영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고 피에르 퀴리는 이 모든 일이 어떤 속임수로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1906년 4월 교통사고로 죽기 닷새 전 피에르 퀴리는 절친한 동료에게 그 영매가 보여준 능력에 관해 편지를 쓰면서 “이 우주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퀴리 부부와 교류하던 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셜록 홈스’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작가 아서 코넌 도일, 프랑스의 수리물리학자 앙리 푸앵카레, 그리고 전화를 최초로 발명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그레이엄 벨 등도 퀴리 부부와 함께 여러 차례 강령회에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마리 퀴리는 남편이 죽기 전에는 강령회 참석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남편의 강권에 마지못해 끌려가는 식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뒤 마리 퀴리는 영혼의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혹시 남편의 영혼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주도적으로 강령회에 참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과학 격변의 시대
저명한 과학자가 강령회에 참가한 예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1931년 미국의 한 소설가 집에서 열린 강령회에는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이론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참석했다. 아인슈타인은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업튼 싱클레어와 절친했다. 그의 작품에 열광했으며 정치적 성향도 잘 맞았다. 1930년경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초빙으로 아인슈타인이 캘리포니아에 1년 남짓 머무르게 됐을 때, 마침 그곳에 살고 있던 싱클레어와 교제할 시간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 이외 분야의 멘토 격인 싱클레어를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함께 영화를 보면서 일상을 즐겼다.
1931년 초 어느 날 싱클레어는 파사데나의 자택에서 연 강령회에 아인슈타인과 함께 절친한 과학자 2명을 초대했다. 이들은 얼마 후 맨해튼 프로젝트(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주도한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의 수석 과학자문이 되는 리처드 톨먼과 칼텍의 이론물리학 교수 폴 엡스타인이었다.
이들이 영매와 함께 탁자에 둘러앉아 시연을 보려 할 때 싱클레어가 “너무 놀라지 말라”고 사전 경고를 했다. 그에 따르면 이 영매는 지난번 강령회에서 탁자를 공중부양시켰다는 것. 아인슈타인의 비서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헬렌 두카스의 기억에 따르면 영매는 갑자기 몸이 경직되면서 트랜스 상태에 빠져들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테이블은 몇 번 흔들리기만 하고 공중부양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그때 초인종이 울려 일행은 잠시 긴장했다. 두카스는 이웃의 누군가가 신고해서 아인슈타인이 해괴한 집회에 참여한 것이 들통 나는 게 아닌가 가슴을 졸였다고 한다. 결국 강령회는 실패로 끝났다. 몹시 흥분한 싱클레어는 일행 중에 강한 불신자가 있으며, 그 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불평을 쏟아냈다.
오늘날 마술사들은 빌딩을 사라지게 하거나 벽을 뚫고 지나가는 등의 놀라운 마술을 보여준다. 하지만 누구나 그것이 눈속임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지성들은 영매술에 매혹되어 그것이 진짜라고 믿었던 걸까. 무엇보다 피에르 퀴리가 시도했듯,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한 상황에서 영매들이 조작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놀라운 현상을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며 당시 시대상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대의 지성들은 원자나 방사능,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 새로운 발견에 의해 그 이전까지 믿고 있던 사실들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과학적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비상식적인 주장도 받아들일 태세가 돼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영매술에 대해서도 관대하거나 호기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물리적 영매, 심리적 영매
세계의 지성들이 영매술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근원지는 영국 런던이었다. 이곳에서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출신 학자들을 중심으로 1882년 세계 최초로 심령연구협회(SPR· 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가 결성됐다. 영국 학자는 아니지만 샤를 르세도 초창기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다윈, 퀴리 부부,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영매는 각각 찰스 윌리엄스, 유자피아 팔라디노, 카운트 오스토자였다. 이들은 모두 물리적 영매들로 물건을 공중부양하거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람들을 만지거나 연주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이와 상대적인 개념인 심리적 영매는 상대방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을 발휘한다.
물리적 영매 중에는 유자피아 팔라디노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놀라운 능력으로 당대의 많은 지식인을 경이롭게 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팔라디노는 19세기 말~20세기 초 30여 년 동안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서 열린 강령회를 통해 유럽 지성들에게 영매 능력을 시연하고 다녔다. 팔라디노는 탁자의 네 다리를 동시에 공중으로 들어올렸고, 멀리 떨어진 물체를 공중부양하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참석자들의 얼굴과 신체를 더듬게 했고, 진흙에 손이나 얼굴 모습이 찍히도록 했다. 또한 탁자 밑에 놓아둔 악기를 손이나 발을 대지 않고 연주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발광하는 유령의 모습이 나타나게 하기도 했다. 샤를 르세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이 모든 능력을 진짜라고 믿었다. 코넌 도일은 1926년에 쓴 ‘심령주의의 역사(History of Spiritualism)’에서 팔라디노가 보여준 심령 능력과 유령 현상을 극찬했다.
심리적 영매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미국 출신의 레오노라 파이퍼가 꼽힌다. 그녀는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확립자로 널리 알려진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영매술을 연구할 때 주요 실험 대상이었다. 파이퍼는 SPR의 미국지부장 노릇을 하던 제임스 덕분에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그녀는 제임스의 가족과 관련된 일을 놀랄 만큼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양탄자를 잃어버렸다거나 고양이를 에테르로 안락사시킨 일 등 아주 내밀한 사건들까지 정확히 알아맞혔다. 제임스는 “결국 그녀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파이퍼는 1889년 한 해 동안 런던에서 88차례에 걸쳐 SPR 창립자들이 참석한 강령회에서 영매술을 시연했다. 참석자 중 초기 무선통신의 개척자인 물리학자 올리버 롯지 경은 파이퍼가 롯지 자신도 잘 모르는 그의 두 숙부의 어린 시절 일들을 묘사하자 두 숙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로 사립탐정을 보내 그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조사시켰다. 사립탐정은 파이퍼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정보력을 갖고 있다며 놀라워했다. 그곳 기록보관소 담당자나 그 지역 노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 이상을 파이퍼가 갖고 있다는 얘기였다.
롯지 경은 그런 정보가 텔레파시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신도 잘 모르는 숙부들의 어린 시절 정보를 파이퍼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0년에 올리버 롯지, 윌리엄 제임스, 그리고 SPR 창립의 가장 큰 기여자 중 한 명인 고전학자 프레드릭 마이어스 등은 ‘파이퍼 부인의 트랜스 상태에서 관찰된 몇 가지 현상에 대한 기록’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도입부에서 마이어스는 “파이퍼 부인이 알려준 많은 정보는 실력 있는 탐정도 알아내기 쉽지 않은 것이며, 그런 정보들을 입수하려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파이퍼 부인에겐 그런 재력이 없다”고 썼다.
팔라디노를 비롯한 영매 대부분은 그런 능력이 죽은 자의 영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들은 트랜스 상태에서 지도령(指導靈)과 교신하며 이들의 도움으로 초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파이퍼는 ‘죽은 자의 영혼 가설’을 적극 지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1901년 10월 25일자 ‘보스턴 애드버타이저’지에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자신을 조종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죽은 자의 영혼 가설
물리적 영매가 보여주는 여러 능력은 초심리학의 염력과 비슷하다. 심리적 영매의 능력은 초심리학의 초감각지각과 비슷하다. 그래서 일부 초심리학자들은 영매들이 모두 초능력자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영매는 그런 능력이 죽은 자의 영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앞에서 예로 든 영매들의 능력이 눈속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짜 능력이라면 이들의 능력이 지금까지 초심리학 실험실이나 군 특수부대에서 행해진 그 어느 초능력 시연보다 뛰어나 보인다. 그래서 이들의 능력이 순전히 인간으로부터 기인한 초능력이 아니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린다. 죽은 영혼들이 미지의 에너지로 인간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하지만 영매들이 오늘날 마술사들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트릭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팔라디노는 말년에 트릭을 사용하다 들통난 적이 있다. 트릭을 사용한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럴듯한 변명거리는 있다. 초능력이 그렇듯이 영매의 능력도 항상 발휘되는 것이 아니기에 많은 돈을 받고 저명인사들 앞에서 시연할 때는 그들의 여흥을 깨지 않기 위해 이따금 트릭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고전적 의미의 ‘죽은 자의 영혼 가설’보다 훨씬 철학적 형태로 치장한 이론이 윌리엄 제임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는 1909년 SPR 회장 취임식에서 ‘심령 연구자로서의 긍지’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20년간 심령현상을 연구해왔지만 아직도 ‘당황스럽다’고 소회를 드러냈다. 그는 많은 속임수 사례가 있음에도 여전히 초정상적인 인식이 발현하는 경우가 존재함을 믿는다면서 텔레파시나 투시 등에 대해 ‘우주적 의식의 한 연속성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봤다.
우리 개개인은 이 우주 의식에 대해 장벽을 쌓아올리고 있지만, 인간들 중 특별한 능력을 지닌 영매들은 마치 바다나 저수지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처럼 우주 의식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것 같다는 얘기다. 제임스의 ‘우주 의식의 저수지 이론’은 약간의 확장을 통해 심리적 영매뿐 아니라 물리적 영매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 우주 의식의 저수지에는 단지 정보뿐 아니라 에너지도 존재한다는 식으로. 영매술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초능력, 죽은 자의 영혼 개입, 우주 의식의 저수지, 그리고 트릭 중 과연 어느 것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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