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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원규의 지리산 사람들

醉月 2013. 10. 11. 01:30

지리산 빈 집 구하기 어려워졌다

입산 15년 동안 7번 이사, 텃새 아닌 철새로 살아
내 집 소유하지 않는 대신 훨씬 더 많은 집 얻어


	10여 년 전 살던 섬진강변 마고실 집의 모습.
▲ 지리산에 입문한 지 어느덧 15년이 지났다. 10여 년 전 살던 섬진강변 마고실 집의 모습.
지리산에 들어와 산 지 어느새 15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빈집을 찾아 7번 이사를 했으니 지리산의 여기저기를 살아본 셈이다. 전남 구례의 섬진강변 용두리와 피아골과 문수골, 전북 남원의 실상사 지혜방, 경남 함양의 칠선계곡 입구 의탄리,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 근처 중기마을 등. 최소 1년 이상을 살아야 그 마을의 지수화풍을 읽을 수 있고, 뭐라도 조금 쓸 수 있었으니 한 번 이사를 할 때마다 졸작이지만 시집이나 산문집 한 권 정도는 낸 셈이다. 굶어죽지 않고 잠시 머물다 떠나는 집 한 채, 한 번 이사에 책 한 권이면 돈은 안 되지만 밑천도 별로 들지 않는 참으로 멋진 장사가 아닌가.

 

경북 문경 출신인 내가 처음 전남 구례에 거처를 잡은 것은 1998년 봄이었다. 사표를 내고 곧바로 전라선 밤기차를 타고 내린 곳이 구례구역이었고, 미리 봐둔 토지면 용두리의 비구니 스님 수행처인 토굴이었다. 물론 일시적인 빈집이었다. 아직 전라도 구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100년 된 먹감나무에 의지하며 뒷집 할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40년 이상 차이 나는 할머니와 ‘플라토닉 러브’를 했던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여 년이 넘은 수절과부에게 섬진강 은어를 잡아 주며 ‘서방노릇’을 했고, 할머니는 내게 물김치를 담가 주거나 콩조림 등으로 보답했다. 워낙 소녀처럼 내외를 하는 할머니인지라 언제나 내가 없을 때에만 출입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빨래를 걷어다 툇마루에 놓아두고, 콩조림 등을 흰 접시에 담아 그 위에 감잎 세 장을 덮어 놓고 가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사탕이나 과자 등을 다시 흰 접시에 담은 뒤 감잎 세 장을 덮어 밭일 나간 할머니 집의 툇마루에 가져다 놓았다. 어쩌다 10kg이 넘는 알밤을 한 자루 이고 구례장에 가는 할머니와 마주치면, 나는 얼른 모터사이클에서 내려 알밤 자루를 싣고는 대신 장에 나가 팔아다 주기도 했다. 겨우 3만 원 정도에 불과했지만, 할머니는 기어코 내가 없는 사이에 막걸리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몰래 툇마루에 두고 갔다. 참으로 눈물겨웠다.

 

지리산에서 두 번째 이사한 피아골 입구의 외곡리 조동마을은 겨우 세 가구가 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지금도 여섯 가구 정도밖에 살지 않는 산골이다. 거기에서 나의 닉네임이자 당호(堂號)인 ‘피아산방(彼我山房)’을 스스로 지었다. 피아골의 이미지가 ‘피밭골’을 의미하는 직전(稷田)을 넘어 한국전쟁의 여파를 거치며 영화제목처럼 피아간의 전투가 심했다는 것을 연상시키는 것을 보다 못해 피아(彼我)를 말 그대로 전쟁이나 전투의 이미지가 아니라 상생의 의미인 ‘너와 나, 우리들’의 뜻으로 되찾기 위해 피아산방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사하는 곳마다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집은 어차피 내 집이 아니고 빌려 사는 집이니 소유개념이 사라진 모두의 산방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열쇠도 자물쇠도 없이 15년을 살아 왔다.


	7년 전 문수골에 살 때의 산중 외딴 집.
▲ 7년 전 문수골에 살 때의 산중 외딴 집.
실상사 지혜방에서 2년간 살기도

 

도법·수경 스님과의 시절인연으로 ‘지리산 댐 백지화’를 위해 천년고찰 실상사의 지혜방에 2년간 살기도 했고, 칠선계곡 앞에 있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의 슈퍼 2층에서 살기도 했다. 지리산에 기대어 그야말로 꿈꾸던 ‘산짐승처럼’ 살아보았으니 지리산에 대한 보답으로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때 스스로 내린 대답이 바로 10여 년간의 환경활동이었다. 지리산 댐 계획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범국민적인 지리산 위령제’ 등을 마치며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자 나는 다시 사무처장직을 내려놓고 구례군 문척면 죽연리 마고실이라는 아름다운 섬진강변 마을로 넘어왔다.

 

마고실은 지금은 널리 알려진 지리산과 섬진강의 조망 1번지인 ‘오산 사성암’의 바로 아랫마을이다. 당시 6가구 정도가 사는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강변 벚꽃길이 참으로 아름다운 그곳에서 2년간 살다가 ‘벚꽃축제 노래자랑’이 바로 마을 앞에서 벌어지는 등 유명세가 치러지자 나는 다시 구례군 토지면의 문수골 입구의 산중 외딴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무덤 7기가 집을 둘러싸고 있는 집이었지만 참으로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집 바로 뒤에는 밤밭이 있었는데, 어느 날 지리산 반달가슴곰이 내려왔다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밤밭 주인이 피해를 주는 멧돼지를 잡기 위해 설치한 올무에 반달곰이 걸려 죽는 바람에 TV 9시 뉴스에 나오기도 했던 곳이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잠시 집을 비우고 ‘한반도 대운하 반대, 어머니의 강의 모시는 종교인 순례단’의 총괄팀장을 맡아 ‘4대강을 살리자’며 103일간 도보순례를 마치던 날 밤 “이유를 묻지 말라. 골치 아프니 아예 집을 사든지, 아니면 당장 집을 비워 달라”는 서울의 집주인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쫓겨나다시피 문수골을 떠나야 했다. 이 집의 주인은 모 대기업의 간부였다. 아무래도 그 어떤 언질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나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만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빈집을 찾기 시작했다.

 

몇 군데 후보지가 있었지만 당시 섬진강 건너에서 보아도 두 눈에 확 들어오는 집이 있었다. 바로 지금 내가 일곱 번째 이사해 살고 있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중기마을의 이 집이다. 느낌이 바로 오는 것이었다. 멀리서 보아도 마당 빨랫줄에 노란 빨래 하나가 걸려 있지만 분명히 빈집일 것이라는 감이 왔고, 어쩌면 저 빨래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정확했다. 집주인이 돌아가신 지 6개월이 넘은 빈집이었으며, 다만 그 노란 빨래는 죽은 자의 것이 아니라 친척 중의 한 분이 마당의 풀을 베다가 걸어놓은 수건이었다. 참으로 어렵게 부산에 사는 집주인을 알아내고는 결국 이사까지 하게 된 것이다. 돈 주고 집을 사는 것도 그러하지만 남의 빈집에 사는 것 또한 시절인연이 아니고서는 도대체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14년 전 피아골 살 때의 집.
▲ 14년 전 피아골 살 때의 집. 지금은 어느 스님의 출생지로서 반야토굴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지어졌다.
지리산 살다 보니 ‘地水火風’ 알게 돼

 

이렇듯 그동안 빈집 구하는 데도 거의 달인 수준이 되었으니 우편집배원 아저씨에게 막걸리 한 병 나눠 마시며 “그 마을 할머니 돌아가시면 알려 주세요. 내가 살러 갈 테니” 하고 굳이 부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참, 지리산에 살다 보니 ‘반풍수’의 눈으로도 척 보면 앉을 자리가 보이고 빈집인지 아닌지, 빨랫줄에 무언가 나부껴도 산 자의 것인지, 죽은 자의 것인지 대충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내 소유의 붙박이집이 없기 때문에 누리는 호사일지도 모른다. 물론 때로 서러움을 받기도 하지만, 내 집에 대한 소유욕이 없기 때문에 이 또한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확연히 달라졌다. 지리산에서 빈집 구하기란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복권 당첨’보다 더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요즘 섬진강과 지리산 주변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값만 오르는 게 아니라 구하기도 쉽지 않다. 불과 몇 년 전에 5만∼10만 원쯤 하던 밭이나 논이 무려 20만∼30만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내가 처음 지리산에 입산하던 15년 전 당시의 빈집은 겨우 300만 원 수준이었는데 어느새 10배 이상 치솟아 5,000만 원을 넘기도 하지만 막상 이마저 구하기도 쉽지 않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값이 떨어지거나 대도시의 부동산 매매가 불경기를 면치 못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몇 년째 지속되고 있다. 지리산 주변뿐만이 아니라 충북 괴산이나 경북의 상주·봉화와 내 고향 문경 등 전국의 생태지역 또한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멈춘 지 오래였던 농어촌의 ‘유령마을’이 이 바람을 타고 활성화되는 것은 지극히 긍정적인 일이다. 1970년대 전후 불기 시작한 대도시로의 급격한 이농현상이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반환점을 돌았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식 욕망의 무한질주에 편승해 앞만 보고 달려가다 1997년의 구제금융(IMF) 사태나 세계적인 경제불황에 처하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그중 일부는 실패나 좌절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로서의 불가피한 선택도 많았다.
그러나 어찌됐든 10여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생태주의적인 귀농 혹은 귀촌의 바람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식 투자 개념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진정한 행복의 전제조건인 생태적인 삶의 질적인 변화 이전에 도시적 무한 욕망의 삶이 그대로 시골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신성했던 밭과 논이 무작위로 대지 등으로 형질변경되는 과정을 겪으며 투기화 현상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도시적 삶과 전통적 공동체의 삶이 충돌하면서 수많은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펜션이니 전원주택이니 쉽게 허가가 나다 보니 깊은 골짜기나 계곡 주변이 흉물스럽게 변하고 ‘토건 공화국의 작업장’이 도시에서 생태적인 곳으로 옮겨와 날마다 ‘공사 중’인 것이다. 가슴 아프지만 이것이 지금 지리산과 섬진강 주변의 현주소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골목.
▲ 지금 살고 있는 집 골목. 차는 들어갈 수 없지만 입구엔 방아풀꽃이 한창 피어 있다.
귀농·귀촌이 투자로 변질돼 집값 치솟아

 

이러다보니 마침내 자본주의의 꽃인 도시가 과부하로 ‘불타는 집’인지, 이미 오래전에 바닥을 친 공동화의 농촌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또한 오랫동안 꿈꾸던 이들의 생태적인 귀농인지, 평화로운 전원생활인지, 세계화의 거센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루저(loser)들의 반란인지 도피인지, 진정한 행복을 위한 인생지사 대결단인지, 그 무엇 하나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최하위 수준이라는 것과 자살률 1위라는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과 직결돼 있다는 점이다. 민족과 국가, 정치·경제·사회적 책임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국민 개개인의 불행은 갈수록 증폭되고, 그만큼 루저의 길은 거미줄처럼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여파가 지리산까지 깊숙이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이미 15년 전에 박봉우 시인의 ‘서울 하야식’처럼 그럴싸하게 지리산으로 입산한 듯하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이미 스스로 선택한 루저의 길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학벌이나 생김새나 키 또한 그랬으니 돌이켜보면 무한질주 욕망의 기관차에서 내밀려 떨어진 것인지, 스스로 뛰어내린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낙오자는 낙오자였다. 나름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등의 생태주의 논리와 다양성의 시대를 예감했다지만 당시 그것은 아직 미몽에 가까웠다. 사실은 겨우 ‘자발적 가난’과 ‘타발적(부득불) 가난’의 경계 위로 온몸을 구겨 넣었을 뿐이다. 일단은 ‘안 벌고, 안 쓰고, 덜 벌고, 덜 쓰며’ 산짐승처럼 살아남는 데 겨우 성공했으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도시를 벗어나 지리산에서 살고 싶어 하는 이들 대다수는 나같이 경제적, 육체적, 심리적인 루저들이 대부분이다. 암이나 아토피 등으로 몸이 아프거나, 자녀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실직을 당하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자본주의적 조직이나 대인관계에 상처를 받거나, 실연을 하거나, 이혼을 하는 등 계기는 참으로 많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들에 대처하는 자세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가 아니라 정면에 서서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잠시 가던 길을 잃었다고 무어 그리 조급할 게 있는지요. 잃은 길도 길입니다. 살다 보면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겠지요. 그럴 때는 그저 눈앞이 캄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길이 아니겠는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언제나 너무 일찍 도착했으나 여태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원통할 뿐입니다.’

 

인생은 때때로 실패를 실패로 인정할 때 다시 길이 열리는 법이다. 지리산까지 와서도 스스로 루저가 아닌 척하느라 오히려 몸과 마음이 땀을 뻘뻘 흘리다 보니, 사람의 향기보다는 악취가 나는 것이다.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에 너무 많이 마음을 주면 내내 불행할 뿐이다. 후회도 꼭 필요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날마다 후회만 하는 사람은 내일 또 안절부절못하며 후회만 한다. 어느 곳에서든 자신이 주인이며, 그곳이 가장 중요한 곳(隨處作主 立處皆眞)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과 상통하는 길이다. 스스로 처한 상황을 인정하면서 당당하게 “그래, 나는 루저다!” 소리치는 순간부터 ‘행복한 반란’은 이미 시작되는 것 아닌가.


	지리산과 섬진강 조망 1번지 구례의 오산 사성암 전경.
▲ 지리산과 섬진강 조망 1번지 구례의 오산 사성암 전경. 10여 년 전 사성암 아랫마을인 마고실에서 살았다.
지리산 입산은 내 인생의 마지막 번지점프

 

그동안 이 골짜기 저 골짜기의 빈 집들을 떠돌며 일곱 번 이사하다 보니 이제야 지리산의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조금 알 것도 같다. 사람이 살 만한 곳과 죽어서 묻힐 만한 곳, 사내의 기개를 드높이며 고함이라도 지르고픈 기운생동의 봉우리나 능선, 차분하게 지난 생을 반추하며 걸어볼 만한 옛길, 그리고 때로는 슬픔을 억누르다 못해 폭포수처럼 혼자 울기에 좋은 계곡 등이 눈앞에 선하다. 이처럼 지형적인 등고선이나 지명, 역사문화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정서적 개념을 나타내는 새로운 지도를 그려보는 것도 참 의미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사실 누군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 수 있다는 것은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행복에 가깝다. 이처럼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울기 좋은 곳’이나 ‘죽기 좋은 곳’ 하나쯤 남몰래 가슴속에 품고 산다는 것 또한 절망의 구심력이 아니라 희망으로의 원심력에 가깝다. 단지 스쳐 지나가는 배경으로서의 산과 계곡과 강과 들녘이 아니라 자연과 한몸으로 교감하는 삶의 현장, 바로 이곳에서 세상을 둘러보면 날마다 누군가 새롭게 태어나기에도 좋고,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누군가 죽기에도 참 좋은 날들의 연속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그네나 철새는 따로 집이 없다. 날마다 도착하는 그 모든 곳이 바로 집이기 때문이다. 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 사실을 알아채고 따라 하는 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누구나 그럴듯한 집 한 채 장만하는 게 간절한 소망이겠지만,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욕망 때문에 인생의 대부분을 허비하고 말 것인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텃새처럼, 아니 이미 새가 아닌 닭처럼 철망 속의 둥지에 깃들여 살 것이냐, 철새처럼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길을 갈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어차피 집과 집을 이으면 길이 되고 그 길의 마지막 집은 무덤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집이라는 해괴한 물건(?)을 포기했다, 버렸다, 패대기쳤다. 이 세상의 모든 집을 안식처가 아니라 과정의 길로 만들고 싶었다.

 

분명 15년 전 지리산 입산은 도약이 아니라 한없는 추락을 자처한 내 인생의 마지막 번지점프였다. 서울살이 10년 동안의 환멸과 권태라는 은산철벽을 단숨에 깨뜨리는 ‘자발적 가난’의 외통수였다. 날아오르기보다는 차라리 추락의 자유를 꿈꾸었고, 비굴한 현실 안주보다는 도피·잠적·무책임의 질타를 받더라도 더 늦기 전에 스스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해방과 자유를 꿈꾸었다.

 

텃새에서 철새로의 몸바꿈은 쉽지 않았지만 또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었다. 한 마음을 내려놓으니 또 그만큼의 빈터가 생기는 것이었다. ‘서울 하야식’ 혹은 ‘지리산 입산’은 단 한 번의 예행연습으로 끝냈다. 사표를 내고 보름간의 서울역 노숙자 생활, 이 극약처방이 주효했다. ‘돌아보지 말자, 더 이상 돌아볼 가치도 없다. 서울이 대변하는 아수라 지옥을 빨리 벗어나자’ 되새김질하며 구례행 전라선 밤기차에 올랐던 것이다.

 

다만 내 집을 소유하지 않는 대신 모터사이클을 집으로 삼았으니, 나는 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달팽이가 아니라 집을 타고 다니는 한량처사가 되었다. 되도록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내리 잠만 자다가 일어나 주먹밥을 싸들고는 산짐승처럼 지리산 골짜기들을 헤매고 다녔다. 생의 한철 돈도 없이 내리 3년간을 참 잘 놀았다.
그 이후로도 10여 년 넘게 전국의 이곳 저곳과 5대강 등 3만 리 이상을 걸어봤고, 모터사이클로 한반도 남쪽의 국도며 지방도며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100만km, 지구 25바퀴 이상의 거리를 달렸으니 여한이 없다. 그렇다고 멈출 것인가. 아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싸돌아다닐 것이다. 지리산의 큰 골짜기만 해도 30개 정도가 되니 다 살아보려면 1년에 한 번씩 이사하더라도 30년은 걸린다. 그러니 끔찍하지만 최소한 일흔 살은 넘게 살아야 할 터이고, 오프로드 모터사이클을 타고 야영하며 전국의 비포장도로를 다 가보려면 대충 잡아도 몇 년은 걸릴 것이니 이 또한 만만한 일생지대사가 아닌가.

 

꼭 성취해야만 맛인가. 딱히 생을 걸 정도로 이보다 더 필이 꽂히는 것도 없으니, 그냥 한 번 가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집을 못 가지거나 안 가지거나 버림으로 해서 얻은 집이 훨씬 더 많았다.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듯 못하는 듯 사실은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맛보았다.


	강아지 지화자와 날개를 다친 말똥가리 수.
▲ 1, 2 강아지 지화자와 날개를 다친 말똥가리 수. 문수골에 살 때 키웠다.

한 편의 시


‘입산자의 노래’
- 빈 집을 찾는 후배에게


함부로 도를 묻지 마라
온몸이 상처인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서
기에 빠지지도 말며
무릉도원 청학동을 찾아 헤매지도 마라
백태의 눈으로 천부경 삼일신고를 새기지 말고
명심하라 명산에 도인 없다 애시당초
진인은 사라지고 삼신산에는 사기꾼들만
살모사처럼 똬리를 트는 법
밤새 동의보감 본초강목 한글본을 읽으며
함부로 약초를 구하거나 처방을 내리지 마라
진정 네 업이 아니면 사기다
이제마의 사상의학 몇 줄에 기대어
툭하면 체질을 분별하거나 함부로
뜸과 부항을 뜨고 침을 놓지 마라
조금 아는 것이 사기다 정감록을
노래하지 말고 살아보지도 않고 풍수를 논하거나
도참비기를 꿈꾸지 마라 잘 모르면 사기다
기분에 따라 비운의 빨치산을 노래하고
머리로만 생태주의를 꿈꾸지 마라
살다 보면 너무 많이 알아도 사기다
잘못 고르면 지리산 녹차도 독이듯이
사기 천지 지리산에서 사기꾼을 면하려면
먼저 귀를 막아라 입을 꿰매어라
날마다 일찍 일어나 거울 속
자꾸 꺼칠해지는 너의 얼굴을 보아라
한동안 몸이 상하지 않으면 그것도 사기다
또 하루 살아남은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초상을 치르듯 천도재를 지내듯
날마다 거울 속으로 절을 하며 또 하루를 시작하라
최소한의 텃밭에 푸성귀나 가꾸며
내리 삼 년 아무 것도 하지 마라
절대로 굶어죽지 않으니
그저 산짐승처럼 지리산에 몸을 맞추어라
빈집을 구하는 아우야
전설 속의 청학동은 많이 상한 네 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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