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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를 걸머진 양심_김지하

醉月 2008. 12. 20. 21:46

‘오적’·생명담론과 김지하
70년대를 걸머진 양심

 

“촛불 켜라 모셔야겠다”고 나선 뜻 도발적인 담시(譚詩)와 풍자로 폭풍 같던 정권의 칼끝에 섰던 1970년대, 그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감히 돌이킬 수 없는 절창이었다. 죽음과 죽임이라는 실존의 극단을 경험한 그가 어두운 감방의 끝자락에서 ‘생명사상’에 심취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었을 것이다. 끝내 성공하지 못한, 혹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스스로 들판에 버려진 ‘모로 누운 돌부처’ 김지하가 이제 다시 시대에 좌와 우를 묻는다.

1970년대의 어느 날, 야당이던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동빙고동의 도둑촌’에 관한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 무렵 동빙고동 일대에는 고위층과 재벌들이 남아도는 돈을 주체할 길이 없어 너도나도 다투어 호화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그곳을 가리켜 ‘도둑촌’이라고 불렀다. ‘사상계’는 이미 1970년 2월호에 그 실태를 르포로 다루었다. 당시가 1970년대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번 살펴보자.

“이들 주택의 건축비는 최저 5000만~6000만원에서 최고는 3억원…건축자재는 외국 수입품이 사용되고, 사치품의 구입을 규제하는 법률은 마이동풍, 건물의 유지비만도 매월 10만원은 들며, 승용차 두 대, 구내 엘리베이터, 응접실의 열대어 등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때마침 김지하는 ‘사상계’로부터 한 편의 정치풍자시를 청탁받았다. 김지하는 ‘민주전선’의 ‘도둑촌’기사를 소재로 삼아 판소리 스타일의 풍자적 서사시 형식으로 쓰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미아리의 어느 골방에 틀어박혀 써 갈긴 것이 300행이 넘는 담시‘오적(五賊)’이다. 김지하 자신이 잘 모르거나 확인해 보지 않은 부패사안들, 도둑질 방법, 호화판 저택의 시설이 펜을 드는 순간 단박에 떠올라 신명나게 써 내려간 것이다.

확인도 안 해보고 짐작으로 두들겨대거나 비아냥거린 부패, 호화, 사기, 비리 등의 묘사는 그 뒤 그가 중앙정보부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을 때 크게 문제가 되었다. 취조관들은 입을 모아 “우리가 가서 보고 확인한 뒤에 과장이면 너는 골로 간다. 반공법에 국가보안법, 간첩죄에 해당한다, 알겠어?”라고 을러댔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다섯 도둑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담은 풍자 담시였다. 이들을 꼬집어 짐승 이름을 뜻하는 벽자(僻字) 투성이의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에 옥편을 찾아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다섯 도둑 이야기’의 파문

‘오적’을 쓰던 당시의 심정을 훗날 김지하는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다”는 한 마디로 요약했다. 그 도입부는 이렇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 내 어찌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오적’은 이어 다섯 도둑의 악행을 차례대로 묘사해나간다.

 

(재벌) 재벌놈 재조 봐라 /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 세금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 온갖 특혜 좋은 이권 모조리 꿀꺽/이쁜 년 꾀어 첩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까기 여념없다/귀띔에 정보 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몫잡고…

(국회의원)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끓는 목소리로 / 혁명공약 모자 쓰고, 혁명공약 배지 하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 우매한 국민 저리 멀찍 비켜 서랏 / 골프 좀 쳐야겠다…

(고급공무원) 어허 저놈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 산같이 높은 책상 바다 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 쥐뿔도 공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 한 손은 노땡큐 다른 손은 땡큐땡큐 / 되는 것도 절대 안돼 안될 것도 문제 없어…공금은 잘라 먹고 뇌물은 청해 먹고…

(장성)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 죽는 쫄병들은 / 일만 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 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 집 크게 지어놓고 부속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잡아 주어패서 / 영창에 집어넣고…

(장차관) 굶더라도 수출, 안 팔려도 증산 / 아사한 놈 뼈다귀로 현해탄 다리 놓아 / 가미사마 배알하듯 / 예산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 행여 냄새 날라 질근질근 껌 씹고 캔트 피워 물고…

  

 다섯 도둑의 악행은 법의 그물망을 요리조리 피해간다. 어명을 받아 이들을 잡으러 온 포도대장이 이들을 지목한 돈 없고 빽 없는 ‘꾀수’를 무고죄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오적의 개 노릇를 하다가, 얼마 후 그들과 함께 급살당하는 것으로 ‘오적’은 끝을 맺는다. 그러나 현실 속의 큰 도둑들은 권력과 금권을 마음껏 누리며 떵떵거리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김지하는 단형(短形) 판소리 기법을 이용한 이야기 시, 서양의 발라드(ballade) 형식의 담시 ‘오적’으로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통렬히 고발한 것이다.

‘오적’이 1970년 5월호 ‘사상계’에 실렸을 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전선’에 전재되면서 정치문제로 번져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김지하를 비롯해서 부완혁 등 네 명을 구속했다.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던 양길승은 박 정권이 용공좌경으로 몰아붙인 ‘오적’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공감한 통쾌무비한 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

“장장 20쪽이 넘게 숨 몰아쉴 사이 없이 욕설과 쌍소리를 섞어 쏟아내는 이 ‘오적’은, 동빙고동이라는 부유층의 주거지가 도둑촌이라 불리며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그 도둑이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는 것을 그야말로 속시원히 풀어준 시 아닌 시이다. 어찌 시가 그 당시의 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양길승, ‘1970년대 김지하 : 오적 그리고 타는 목마름으로’, ‘역사비평’ 제31호)

이른바 ‘오적 사건’으로 1953년에 창간된 이래 줄곧 이 땅의 정신풍토에서 민주주의의 견고한 진지 노릇을 하던 ‘사상계’가 등록말소 처분을 받은 채 영영 자취를 감추었고, 김지하는 100일의 구속 끝에 풀려났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1964년 6·3한일회담반대운동 때 23세의 나이로 4개월의 감옥체험을 한 김지하는 이 사건으로 국내외에 걸쳐 유명인사가 되었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출발점에 다시 서게 됐다.

1971년에 김지하는 ‘나폴레옹 꼬냑’과 ‘구리 이순신’ 연극공연을 준비하다가 당국의 방해로 중단해야 했다. 그 후에도 일본의 기생관광과 경제침략을 풍자한 담시 ‘앵적가(櫻賊歌)’를 발표했으며, 민중에 대한 종교적 실천의 문제를 제기한 희곡 ‘금관의 예수’는 그가 가사를 쓰고 김민기가 곡을 붙인 노래로 더 유명해졌다.

1970년 야당이던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이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게재하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를 압수하고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쓴 절창

이듬해인 1972년 김지하는 가톨릭 계통의 종합교양지 ‘창조’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다. 때마침 대연각호텔이 불타는 대화재가 발생했다. 김지하는 이 화재를 우리나라 근대화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압축해놓은 상징으로 보았다. ‘비어(蜚語)’는 그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비어’는 곧 유언비어의 뒷말로 ‘메뚜기처럼 뛰는 말’, 즉 ‘소문’이란 뜻이다. 예컨대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소문에 의하면 이렇고 저렇고 그렇다”라는 식이었다.

‘비어’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고관(尻觀)’으로, ‘엉덩이를 보라’는 뜻과 ‘높은 관리’라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소리 내력’.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돈을 벌려고 애쓰지만 잘 안되는 ‘안도(安道)’의 억울한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저항을 그렸다. 세 번째는 ‘육혈포(六血砲) 숭배’, 파시즘과 그리스도교의 결정적 대결을 예상하는 이야기 시다.

이미 ‘오적’으로 온 세상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했던 터라, ‘오적’과 비슷한 담시가 가톨릭계 잡지에 발표되자 당국에서는 처음부터 문제 삼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 무렵은 내밀하게 남북회담이 준비되고 있던 때로 문제가 확대되면 정권의 도덕적 파탄이 우려됐다. 김지하는 곧 서울 모래내 하숙방에서 체포되어 마산의 가포(架浦)국립결핵요양원에 연금당했다. 입구에 정보요원이 지키고 있었고 사방을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쳤으니 말 그대로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창조’ 역시 그해 11월 자진 휴간 형식으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72년 10월 이른바 10월유신이 선포됐다. 불길하기 짝이 없던, 민주주의의 장송곡이 마침내 울려 퍼졌다. 김지하는 유신체제의 암흑이 온 누리를 짓누르던 어느 날 ‘타는 목마름으로’ ‘남몰래 숨죽여 흐느끼면서’ 한 편의 절창을 썼다. 그 후 20여 년 간 이 절창은 국민적 기도나 다름없었다.

 

 

신새벽 뒷골목에 /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 오직 한 가닥 있어 /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두드리는 소리 /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 살아오는 삶의 아픔 /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 타는 목마름으로 / 타는 목마름으로 /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촛불 신비의 고행’

1974년 1월부터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시해’되기까지의 시기를 흔히 ‘긴조(긴급조치) 시대’라고 한다. 가장 살벌했던 시기는 1974년 4월3일 발표된 긴급조치 4호 때였다. 이른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인해 단일사건으로는 광복 이후 사상 최대인 1204명이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고, 그중 180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군법회의는 180명의 피고인 중에서 김지하, 이철, 유인태, 김병곤 등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인혁당 사건 관련자인 도예종, 서도원, 이수병 등 여덟 명은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내린 바로 다음날 형을 집행했다. 이들이야말로 교통신호를 위반하면서 폭력 질주하던 독재자의 차에 치여 숨져간 엄청난 비극의 희생자들이었다. 한승헌 변호사는 구형과 선고가 일치한 이 희대의 재판을 가리켜 ‘자판기 판결’ ‘정찰제 판결’이라 했거니와, 이 사건은 기소자들의 선고형량 합계가 1650년이나 되는 세계 사법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기록적 사건이었다.

김지하는 1974년의 그 살벌했던 상황을 ‘1974년 1월’이란 시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 그 시간 /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조각 속에서 /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 겁먹은 얼굴 /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명수배됐을 때 김지하는 ‘청녀(靑女)’란 영화의 촬영팀이 묵고 있던 대흑산 예리 관광여관에 묵고 있었다. 김지하는 그곳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제6국에 갇혀 조사를 받았다. 원주의 지학순 주교에게서 자금을 받아 민청학련에 전달하는 등 배후조종을 했다는 혐의였다.

제1심의 군법회의에서 김지하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뒤에 무기로 감형됐다. 머리를 박박 깎고 맨 처음 먹방(글자 그대로 새카만 방)에 갇혔다. 밥그릇 들어오는 식구통만 열려 있고 나머지는 0.78평(약 2.58m2)의 폐쇄된 방, 징벌방이었다. 1975년 2월15일 김지하는 10개월 만에 느닷없이 형 집행 정지로 출감했다.

출감하던 날, 그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미쳤는지, 세월이 미쳤는지, 둘 다 미쳤는지 알 수가 없다. 사형에 무기징역 등을 선고하고 10개월 만에 석방하는 건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누구겠는가, 미친 쪽은?…이제부터는 서서히 어둠 속에 갇혔던 잔혹한 사실들이 모두 다 터져나올 것이다. 그 터져나오는 순서에 따라 현 정권도 서서히 붕괴해가기 시작할 것이다. 서서히!”

1975년 2월25일부터 27일에 걸쳐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고행 - 1974’라는 옥중수기를 발표,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폭로했다. 옥중수기에는 김병곤이 사형구형을 받고 “20대에 반국가단체의 수괴로 취임시켜주셔서 영광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최후진술을 한 데 대한 김지하의 감동도 적혀 있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죽음을 이겨내는 ‘촛불 신비의 고행’, 바로 그것에서 종교적인 거룩함을 느꼈다고 김지하는 술회했다.

 

‘고행 - 1974’의 후폭풍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김지하는 ‘고행-1974’에서 이렇게 썼다.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의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뼁끼통(감방 안의 변소)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 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소리로 물었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하재완입니더.’ ‘하재완이 누굽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인혁당입니더’하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물론 가짜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 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석방 27일 만인 3월13일 김지하는 정릉에 있던 장모 박경리의 집에서 원주로 향하던 중 다시 중정 요원들에게 연행됐다. 이번 연행과 구속은 김지하를 1970년대 내내 “부단히 저 불길하고 잿빛뿐인 미래와 눈을 부릅뜨고 맞서게” 했다. 뒷날 공소장에 적시된 그의 혐의내용은 옥중수첩에 메모된 ‘장일담’의 극작 구상과 인혁당 관련 발언들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인혁당 사건에 관해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그들의 통절한 심정을 증언한 바 있거니와, 천주교 사제단에서도 증언한 바 있다. 박 정권 입장에서 보자면 인혁당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는 것은 그들의 도덕성에 치명타가 될 만한 사안이었다. 김지하가 또 한번 죽음의 벽을 넘어야 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의 광기에 대해 온몸으로 거는 태클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그때부터 김지하로 하여금 “활자도, 언어도, 복음서마저도 없는 어둡고 좁은 독감방에 갇힌 채 면벽만이 생활의 전부인 무명의 나날”을 보내게 했다. 김지하는 이 시절을 겪으며 심각한 벽면증(壁面症)을 앓았다.

“어느 날 대낮에 갑자기 네 벽이 좁혀 들어오고 천장이 자꾸 내려오며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꽥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봐도, 허벅지를 꼬집어봐도 매한가지였다. 몸부림, 몸부림을 치고 싶은 것이었다. 큰일이었다.”(김지하, ‘흰 그늘의 길’ 2권, 학고재, 2003)

중앙정보부는 김지하를 검찰에 송치할 때 단순히 반공법을 위반한 게 아니라 ‘철저한 맑스주의자’라고 둔갑시켜 발표했다. 이에 발맞추어 검찰은 기소장에서 김지하를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자를 위장한 음험하고 교활한 공산주의 음모가로 몰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반공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또다시 같은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경우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한다는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다.

   

   

‘오적’으로 투옥됐던 김지하(오른쪽 세 번째)가 보석으로 풀려 나와 유진산(오른쪽 두 번째) 등 야당인사들의 마중을 받고 있다.

사뭇 불길한 조짐이었다. 박 정권이 김지하를 재판을 통해 죽이려 한다는 전율할 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중앙정보부가 김지하에게 강요해서 쓴 자필 진술서가 문공부에 의해 국내외에 대량 배포되었다. ‘김지하에 대한 반공법 위반사건 관계자료’였다.

 

‘양심선언’, 세계적 메아리로

옥중의 김지하를 위해서는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감옥 안팎의 미로와 같은 연결망을 통해 김지하의 ‘양심선언’이 작성되었고, 이 문건은 일본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에 전해져 도쿄에서 발표되었다.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로 시작하는 본문과 추신, 그리고 ‘사제단 신부님들께’ 보내는 편지로 구성돼 있다.

 

 

1975년 4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을 당시의 김지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모략이 지금 나에게 씌워지고 있다. 박 정권의 억압자들은 나를 가톨릭에 침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민주주의자로 위장한 음험한 공산주의자로 몰아 투옥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양심선언’에 김지하는 ‘내가 공산주의자인가’ ‘민주주의와 혁명과 폭력에 관하여’ ‘혁명적 종교에의 꿈 - 장일담의 세계’ ‘나는 반공법을 위반했는가’라는 소제목으로 나누어 자신의 입장과 진실을 외쳤다. 1970년대라는 동토(凍土)의 상황에서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동시대인들의 열정을 담은 진실과 용기의 서사시였으며, 시대의 암흑에 빛을 비추어준 전조등이었다.

‘양심선언’이 발표되자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김지하를 구출하기 위한 구명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김지하의 사상과 신앙을 보증하는 성명에는 독일의 신학자 요한 메츠와 몰트만을 비롯해서 사르트르, 보부아르, 촘스키, 브란트, 그리고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와 와다 하루키 등 세계적 신학자와 석학, 문화인, 정치인 200여 명이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1975년 6월29일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는 김지하에게 ‘로터스 특별상’을,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위원회’는 인권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으며, ‘김지하 석방요구서’를 박 대통령에게 발송했다. 이 무렵 김지하는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작가와 지식인들에 의해 1975년 노벨문학상,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으며, 세계시인대회는 그해의 ‘위대한 시인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박정희 정권은 9월16일 김지하에 대한 형 집행 정지 결정을 취소, 반공법 위반 혐의로 그를 재구속했다. 다시 무기징역수가 된 것이다. 그 후 재판은 1년 이상을 끌었다. 1976년 12월31일 김지하에게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이 추가로 판결됐다. 이때부터 1980년 12월12일 석방될 때까지 김지하는 30대를 온통 감옥 안에서 보냈다. 1970년대는 박정희와의 길항이라는 점에서 김지하의 연대였고, 김지하란 이름은 1970년대의 중량과 맞먹는 것이었다.

 

고생물학과 동학 ‘공부’

길고 긴 수감시절을 통해 김지하는 동서양의 수많은 책을 읽었다. 김지하는 특히 생태학 스케치, 선(禪)불교, 테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 동학(東學)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생태학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의 경전이 되고 있었다. 낡은 역학이나 사회구성체론 따위로는 살아 생동하는 생성적 공간과 시간을 인식할 수 없다고 김지하는 보았다. 그에게 녹색운동은 새로운 변혁운동의 시발점이었고 생태학은 그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생태학 입문에서 자극을 받은 김지하는 선(禪)과 불교에 관한 내면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혜를 갈구하면서 인간의 영적 깨달음과 영성적 소통의 철학에 매달렸다. 이 무렵 김지하는 영성과 생명, 삶의 안팎을 과학적, 신학적으로 함께 이해하기 위해 테야르 드 샤르댕을 읽어보라는 함석헌의 권유를 받아 그의 주저인 ‘인간현상’을 읽고 또 읽었다.

테야르 드 샤르댕을 접하면서 김지하는 생태학과 선불교 사이의 관계, 외면적 변혁과 내면적 명상의 관계, 집단과 개체의 관계, 필연성과 자유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파고들었다. 그에게 테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은 매우 복잡하고 치밀하며 구체적이었다. 고생물학에서 뻗어나온 과학적 진화론에 터한 그의 ‘우주 진화의 3대 법칙’은, 첫째 우주 진화의 내면에는 의식의 증대가 있고, 둘째 우주 진화의 외면에는 복잡화가 있으며, 셋째 군집(群集)은 개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날 김지하는 테야르 드 샤르댕 사상의 중핵이 동학사상의 핵심에 잇닿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학의 핵심사상인 스물한 자의 주문 중 열세 자의 본(本)주문, 곧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하늘을 모심은 조화에 일치하여 마음을 정하는 것이며 영원토록 잊지 못할 만 가지 사실을 안다)’의 중핵은 맨 앞의 ‘모실 시(侍)’ 한 자에 집중되어 있다고 김지하는 보았다. ‘시’, 즉 ‘모심’이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이 있고, 기화(氣化)가 있으며, 한 세상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서 옮겨 떨어질 수 없음을 깨달아 자기 나름대로 각각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김지하는 이때 테야르 드 샤르댕의 ‘우주 진화의 3대 법칙’이 동학사상의 핵심과 일치할 뿐 아니라, 동학이 도리어 더 첨단적이고 최근의 진화론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한걸음 나아가서 김지하는 서학과 동학을 탁월하고 과학적인 차원에서 통섭(通涉)하되, 동학 쪽에 시중적(時中的) 중심이 더 기울어 있는 ‘기우뚱한 균형’을 찾아냈다.

 

감옥 창살 틈으로 ‘생명’이

어느 봄날 아침, 김지하는 쇠창살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비쳐들 때 바깥에서 날아들어온 새하얀 민들레 꽃씨들이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보았다. 또 쇠창살과 시멘트 받침 사이에 빗발이 몰아쳐 홈이 파이고, 거기에 흙먼지가 날아와 쌓이고, 거기에 또 멀리서 풀씨가 날아와 싹을 틔우는 것을 보았다. 풀씨는 빗방울을 빨아들여 무럭무럭 자라났다. 개가죽나무였다. 그 개가죽나무가 유난히 푸르고 키도 커 신기해 보였다. ‘생명! 생명!’ 하는 메아리가 허공에서 그에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런 미물들도 생명이매 못 가는 데가 없는데 하물며 고등생명인 인간이 벽돌담과 시멘트 벽 하나의 안팎을 넘나들지 못해서 안달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고 그는 술회한다. 김지하는 그 후 100일간의 참선에 들어갔다. 그에게는 그게 ‘생명연습’이었다.

이때가 바로 10·26 직후였다. 교도관이 사방을 둘러보고 난 뒤 오른손으로 자기 목을 탁 끊는 시늉을 하며 박정희의 ‘유고(有故)’를 전해주었다. 이어 1980년 5월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외의 지속적인 석방운동으로 김지하는 1980년 12월12일이 되어서야 투옥 5년9개월 만에 석방됐다. 김지하는 원주에 머물며 옥고에 지친 심신을 달랬다. 이 시기를 통해 김지하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동학에 대한 관심으로, 동학에 대한 관심은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나갔다.

동학은 생명사상이었다. ‘모심’, 곧 ‘시(侍)’ 한 글자야말로 천지만물의 생존과 변화의 비밀이라고 김지하는 보았다. 김지하는 이때부터 유기농 운동과 무공해 농산품 수요, 생명론을 토대로한 환경운동의 전개를 이끌었다. 생명과 동학이라는 새로운 기준 위에서 김지하는 동학과 서학, 생명론과 변혁론, 구조모순과 환경오염 문제의 보합관계를 모색했다. 지식인 사회와 운동권은 이러한 그의 새 담론을 즉각 변절, 배신, 전열 이탈, 전열 혼란으로 몰아세웠고, 심지어는 혹세무민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에는 사회운동을 위한 교육센터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생명사상 세미나’가 열렸다. 개신교의 한 목사가 김지하에게 목청을 높여 물었다.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김지하 시인이 감옥에서 나온 뒤 꺼낸 모양인데, 혹시 김 시인이 더는 감옥에 가서 고통 받기가 겁나니까 애매한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여 생명사상이니 뭐니 하고 나팔 불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고 하면 이것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진실이 뭡니까? 우리가 지금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은 ‘5공 타도’뿐입니다.” (김지하, ‘흰 그늘의 길’ 3권, 학고재, 2003)

이에 대해 지금은 고인이 된 빈민운동가이자 개혁정치가 제정구가 반박했다.

   

 

“나는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데에 꼭 ‘자본론’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론’ 따위를 안 읽고도 생명이란 화두 하나만으로 역사와 사회의 현실을 꿰뚫어 이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행동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김지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는가?”

 

눈부신 흰빛, 컴컴한 그늘

1980년대를 통해 ‘운동권’의 담론들은 엘리트주의적 이론투쟁과 종파투쟁, 그람시나 알튀세르 같은 변형, 심지어는 김일성의 주체이론과 김정일의 종자론까지 난무했다. 김지하는 1984년 동학과 생명론 탐구를 제창하면서 최초의 산문집 ‘밥’을 펴냈다. ‘밥이 곧 하늘’이라는 명제로 압축되는 이 담론집은 그러나 소수만이 이해했을 뿐 담론으로서의 가치는 묵살되었다. 이어서 1985년에 나온 ‘남녘땅 뱃노래’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해 김지하는 수많은 시집과 산문집을 쏟아냈다. 1982년에는 ‘타는 목마름으로’가 출간되었으며(첫 시집 ‘황토’ 출간 후 12년 만의 일이었다), 1986년에는 ‘애린’과 ‘검은 산 하얀 방’이 출간되었다.

 

네 얼굴이 / 애린 / 네 목소리가 생각 안난다 /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 기인 그림자 끌며 노을진 낯선 도시 / 거리 거리 찾아 헤맨다 /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 캄캄한 지하실 시멘트 벽에 피로 그린 / 네 미소가 / 애린 / 네 속삭임 소리가 기억 안난다 / 지쳐 엎드린 포장마차 좌판 위에 / 타오르는 카바이트 불꽃 홀로 / 가녀리게 애잔하게 / 가투 나선 젊은이들 노랫소리에 흔들린다.

 

‘애린’은 창녀, 천민이었다. 사랑을 직업으로 하기 때문에 가장 참혹하게 저주받은 인간이다. 그러한 창녀 ‘애린’의 상처 받은 사랑이 고통에 찬 기적, 후천개벽으로 나타나는 것이 ‘애린’, 그리고 ‘모심’이라는 것이 당시 시인의 시작(詩作) 노트에 기록되어 있다.

‘검은 산 하얀 방’은 ‘검은 그늘’과 ‘흰빛’의 깊은 분열을 의미한다고 시인은 ‘흰 그늘의 길’ 3권에서 술회했다. 검은 산과 하얀 방의 통합, 눈부신 흰빛과 컴컴한 그늘의 창조적 통일이야말로 이 무렵 시인의 정신, 시인의 넋의 제일과제였다. 시인이 구술한 내용을 그의 아내가 단 한 자의 수정이나 가필도 없이 그대로 옮겨 시집으로 펴냈다. 이 시집의 서시 ‘촛불’은 이렇다.

 

나뭇잎 휩쓰는 / 바람소리냐 비냐 / 전기는 가버리고 / 어둠 속으로 그애도 가버리고 / 금세 세상이 온통 뒤집힐 듯 / 눈에 핏발 세우던 그애도 가버리고 / 촛불 / 홀로 타는 촛불 / 내 마음 휩쓰는 것은 / 바람소리냐 비냐

 

‘백학봉(白鶴峰)’과 ‘화개(花開)’

1988년 김지하는 동학교주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다룬 장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을, 1989년에는 서정시집 ‘별밭을 우러르며’를, 1990년대에는 ‘중심의 괴로움’ ‘빈 산’ ‘꽃과 그늘’ 등을 내놓았다.

산문집으로는 1980년대에 대설(大說) ‘남(南)’ 1~3권과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 ‘살림’을, 1990년대에는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생명’ ‘모로 누운 돌부처’(회고록) ‘옹치격’(생명운동과 주민자치에 관한 담론 모음집) ‘님’(‘틈’과 ‘모심’을 주제로 한 산문집) ‘생명과 자치’ ‘김지하의 사상기행’ ‘율려(律呂)란 무엇인가’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대학에서의 미학강의 모음집) 등을 내놓았다.

김지하는 정지용을 근대 100년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했다. 청소년기를 통해 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구절은 정지용의 시 ‘고향’ 가운데 ‘마음은 언제나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라는 대목이었다. 그런 김지하에게 자신의 시 ‘백학봉(白鶴峰)’이 지용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멀리서 보는 백학봉 /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 고통의 결정체인 / 저 검은 돌탑이 / 왜 이리 아리따운가 /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산문 밖 개울 가에서 / 합장하고 헤어질 때 / 검은 물 위에 언뜻 비친 / 흰 장삼 한 자락이 펄럭

아 / 이제야 알겠구나 / 흰빛의 / 서로 다른 / 두 얼굴을

 

지용문학상 수상소감에서 김지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흰빛과 그늘은 상호 모순합니다. 그늘이란 삶의 신산, 고초를 말하고 흰빛은 신성한 초월성을 뜻합니다. 이 두 개의 모순된 명제가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지용 선생의 ‘백록담’에서 ‘흰 그늘’이 나타난다고 봅니다.…윤리적 삶과 미학적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우리의 선조들은 가르쳤습니다. 컴컴한 고통의 흔적이 없는 초월성은 공허하며, 우리 민족의 빛이기도 한 신성한 흰빛과 결합하지 않는 어두운 고통만의 예술은 맹목입니다….”

 

“촛불을 켜라. 모셔야겠다”

근대학문 100년 동안 고안된 여러 가지 이론과 관점들, 그리고 그 성과물들 가운데 학계의 의견을 두루 구해 20개 이론을 확정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교수신문’, 생각의 나무, 2003)에는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비판과 옹호가 팽팽히 맞서왔다고 했다. 창조적 깊이를 보여준 우리 사상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신비, 퇴행, 국수주의라고 냉소를 보이는 이도 있다.

생명사상 비판의 입장에 선 서양철학자 김상봉은, 김지하의 학문방법론은 남의 이론을 성찰 없이 끌어들이는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준다며 지적 허영과 자기 감상주의를 벗지 못한 수준이라고 혹평했다. 반면 외국어대의 이기상은 김지하가 한국인의 삶의 문법에 각인되어 있는 내재적 원리를 끄집어내 동서고금의 통합적 사유로 재해석하고 세계인의 공통화두인 생명문제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한신대 박재순은 생명사상이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생명운동으로 확대시켰다는 적극적인 평가를 내린다. 박재순은 나아가서 생명사상은 실존, 예술, 신명,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고루 동서의 정신세계를 일관성 있게 꿰뚫고 있어 진정한 철학적 면모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했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학문적으로는 ‘모호한 혼합주의의 전형’이지만 ‘탁월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오도송(悟道頌)’인지, 아니면 ‘대안(代案) 패러다임의 시(詩)적 수원지’인지는 학계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다만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탄생한 배경과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대체로 공감하는 것 같다. 이는 김지하가 ‘타는 목마름으로’의 절정에서 죽임과 죽음 체험의 현실을 뛰어넘어 ‘진정한 생명의 바다’를 지향하는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던 큰 시인의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김지하는 자신의 생애가 ‘모로 누운 돌부처’라고 했다. 실패한 부처, 들판에 버려진 잊힌 돌부처라고 했다. 그는 성공과 실패는 안중에 없고 오직 “모시느냐, 안 모시느냐”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실패라 하더라도 그다지 ‘곡조 슬픈’ 실패작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난 10월7일부터 김지하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0월9일에는 ‘좌익에 묻는다’, 이어서 10월10일 ‘우익 잘해보라. 잘하면 망할 것이다’를 잇따라 발표, 한국 사회의 좌우익 양극단 현상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지하의 2006년작 시집 ‘비단길’과 ‘새벽강’.

“촛불을 횃불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기독교 신자, 그것도 장로, 그것도 대통령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데도 이 세상이 제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미친놈이다.”

윤무한
1943년 대구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강화도에서 촛불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는 길, 노을이 아니라 별이 빛나는 밤, 김지하는 ‘프레시안’에 이 글들을 발표한 이후 자칭 중도파와 좌파와 집권 우파의 3파 합동으로 자신이 갈기갈기 찢겨 자취도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예감에 잠시 몸을 떨었다고 했다. 김지하는 지금 3파 삼지창(三枝槍)의 으스스한 위협 앞에서 춤추면서 폴 발레리의 난해한 시구들 중 가장 대중적인 시구,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대신 ‘촛불을 켜라. 모셔야겠다’를 읊고 있는가. 그의 촛불은 과연 무엇인지, 또 무엇을 모시겠다는 건지 발레리의 시구는 쉬우나 김지하의 시구는 난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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