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보다 넓은 라오스의 밭을 유전으로 바꾼다”
라오스 최대 기업인 ‘코라오(코리아+라오스)’그룹과 이 그룹의 오세영(吳世榮·47) 회장을 취재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기자는 라오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라오스라는 내륙국가가 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오 회장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인천공항에서 라오스 수도인 비엔티안까지 가는 직항편은 없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하룻밤을 잔 뒤 비엔티안행 비행기에 올랐고, 돌아올 때는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항공기를 갈아타야 했다. 하노이와 프놈펜은 ‘돈독’이 올라 있었다. 도시 전체가 공사판이라고 할 정도로 소란스러웠고, 사람들의 눈은 ‘돈 있는 사람을 찾느라’ 반짝거렸다. 욕망이 멈춘 나라 그러나 비엔티안의 분위기는 달랐다. 공항에 내릴 때부터 비엔티안은 소박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하노이와 프놈펜, 특히 하노이는 클랙슨의 지옥이다. 오토바이와 차량이 뒤엉켜 서로 “빵빵” 거린다. 비엔티안은 인구 60만의 작은 도시지만 이 곳에도 러시아워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 경적 소리는 듣기 힘들다. 비엔티안의 도로에서 “빵” 소리를 내는 것은 베트남인이거나 화교, 아니면 한국인 운전자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라오스는 한반도의 1.1배 면적(23만6800㎢)에 700만명이 사는‘널널한’ 국가다. 라오스인과 중국인(화교)과 베트남인, 태국인들이 라오스 국적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다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몽족’이라고 하는, 산악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도 있다. 불교국가답게 라오스 사람들은 두 손을 모은 자세로 인사를 한다. 아주 공손한 인사법인지라 그 인사를 받으면 저도 모르게 따라서 합장을 하게 된다. 라오스 사람들은 잘 웃는다. 아는 사람을 보면 목례와 함께 미소를 보낸다. 이러니 사람들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다. 화가 난 한국인 상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 이곳의 여성 직원들은 깜짝 놀라서 울어버릴 정도로 이들은 조용조용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라오스를 유약한 나라로 보면 곤란하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갖고 있기에 자존심이 강한 편이다. 라오스는 베트남과는 사람 왕래가 힘든 높은 산맥을 국경선으로 삼기에 마찰이 적어서인지 형제국가처럼 지낸다. 그러나 태국과는 메콩강이 흐르는 평야지대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인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는 베트남보다 태국과 훨씬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 태국어를 하는 사람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내륙국가인 라오스는 과거엔 베트남의 항구를 이용해 국제무역을 했으나 1993년부터는 태국의 방콕항을 무역항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도 태국만큼이나 라오스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라오스는 베트남과 달리 화교 상권이 강하기에 중국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일본도 라오스에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을 많이 지원한 덕분에 나름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 1975년 라오스 공산화를 계기로 단교했다가 1995년 복교한 한국은 라오스를 작은 시장으로 보는 듯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코라오의 오세영 회장은 이런 배경에서 라오스 최대 기업을 일구었으니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기자는 라오스가 공산국가인지 아닌지도 알아보지 않고 항공기에 올랐다. 라오스는 프랑스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해 왕국을 이뤘는데, 베트남전이 벌어지면서 이들도 내란을 겪었다. 라오스의 우파 왕정에 도전한 것은 공산 베트남(북베트남, 월맹)의 지원을 받은 공산게릴라 ‘파테트 라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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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한 공산국가 파테트 라오의 세력은 2개 사단 규모에 불과했는데, 라오스 왕정은 파테트 라오 소탕작전을 산악지대의 소수민족인 ‘몽족’에게 맡겼다. 이 몽족을 지원한 것이 미국의 CIA였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은 태국의 기지에서 발진한 폭격기로 북베트남을 폭격했는데, 이때 파테트 라오군의 은신처도 함께 두들겼다. 라오스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가가 아니기에 미국의 라오스 폭격은 국제법 위반이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라오스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480여 km의 ‘호치민 루트’를 이용해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베트콩에 전투물자를 제공했으니, 파테트 라오 세력도 중립을 지켰다고 볼 수는 없다. 베트남전쟁은 베트콩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베트콩 세력이 남베트남을 거의 장악하자, 북베트남은 1973년 1월27일 미국과 맺은 휴전조약을 깨고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하고(1975년 4월30일), ‘남북통일’을 완성했다. 당시 베트남에 파병했던 한국은 이 통일을 ‘월남 공산화’로 불렀다. 북베트남군이 베트남을 통일하자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내전도 공산 게릴라의 승리로 귀결됐다. 캄보디아는 당시 ‘크메르’라는 국명을 사용했는데, 크메르는 베트남보다 먼저 공산화됐다. 친미(親美) 론놀 정권에 반기를 든 공산 게릴라 ‘크메르 루즈’ 세력이 1975년 4월17일 수도인 프놈펜을 장악한 것이다. 크메르 루즈는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꾸고 론놀 정권에 협조한 200여만명을 죽이는 ‘킬링필드’를 연출했다. 베트남이 통일된 4개월 후인 1975년 8월에는 라오스의 파테트 라오 세력이 비엔티안을 점령했다. 비엔티안은 태국과의 국경선인 메콩강 바로 옆에 있다. 따라서 메콩강을 건너 태국으로 쉽게 건너갈 수 있다. 파테트 라오 세력이 비엔티안에 진입하자 35만명이 넘는 반(反)공산세력이 태국으로 탈출했다. 탈출자 가운데 절대 다수는 파테트 라오와 싸운 몽족(25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날 이후 라오스와 베트남은 공산국가가 되었으나, 캄보디아는 1993년 이후 선거를 치르는 민주국가로 변모했다. ‘공산국가’ 라오스의 수도에 도착한 기자는 그러나 공산주의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밝고 공손하고 조용한 사람들, 하노이나 프놈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거리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인상은 떠나는 날까지 계속됐다. 라오스는 선진국과 국제기구의 지원으로 근근이 연명해온 나라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93년 라오스는 한번에 모든 허가절차를 완료할 수 있는 외국인 투자법을 만들었다. 외국인이 투자청의 허가를 받으면 다른 기관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기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것. 이로써 라오스도 공산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을 선택한 대열에 합류했다. 라오스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00달러도 되지 않는 세계 최빈국이지만, 여러 기관이 실시하는 행복지수 조사에서는 항상 방글라데시와 수위를 다툰다. 이곳에서는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가난해도 남의 것을 넘보지 않는 ‘욕망이 멈춘’ 사회인 것이다. 월급쟁이에서 창업자로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온 기자에게 라오스의 편안함은 경이 그 자체였다. ‘라오스의 발견’은 코라오그룹과 오세영 회장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증폭됐다. 이 역시 놀라운 발견이 아니라 편안한 발견이었다. 코라오그룹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오세영이라는 인물부터 탐구해야 한다. 오 회장은 라오스에 입성한 지 10년도 안 돼 라오스 제1의 기업을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다. 라오스 시장이 작다고 해도 외국인이 1위 그룹을 일구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는 짧은 시간에 기적을 만들어냈다. 오 회장은 2004, 2005년에 열린 세계 한상(韓商)대회를 통해 국내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그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시도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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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창업자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정 회장은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학력으로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등 세계적인 기업을 아우르는 대그룹을 만들었다. 오 회장은 월급쟁이 출신 창업자다. 그는 지금 라오스를 무대로 정주영의 꿈을 좇고 있다. 오 회장은 386세대의 첫 번째 학번 출신이다. 학창시절 386세대는 자기 문제가 아닌 시국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자기일에 덜 집중했기 때문인지 이 세대에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창업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오 회장은 ‘비(非)386적’이었고, 이것이 그의 성공을 가져왔다. 그는 묵호로 불리던 강원도 동해시에서 배를 갖고 있던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배를 처분하고 포항으로 삶터를 옮기는 바람에 포항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성균관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은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진 다음해다. 대학가는 사복을 입은 전경부대와 안기부 요원들이 상주해 있어, 뭔가에 짓눌린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불만은 많은데 저항을 할 수 없는 분위기 탓인지 1981년 대학가에는 포커가 유행했다. 포커는 ‘포커 페이스’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승률이 높다. 오 회장은 웃으면서 “이것은 비밀인데, 그때 나는 포커를 아주 잘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찍부터 자기감정을 다스릴 줄 알았던 모양이다. 386세대들은 군사문화를 싫어했다. 그런 까닭에 주요 대학 학군단은 지원자가 적어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ROTC 생도가 됐다. 잘 놀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포병 소위로 임관해 ‘이기자 부대(27사단)’에 배치됐다. 27사단은 휴전선을 관리하는 2군단의 예비사단이기에 훈련이 혹독했다. ‘빡센’ 부대 생활을 그는 아주 잘 보냈다. 비법은 적응이었다. 그는 “조직 생활을 잘하려면 상사를 잘 모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병연대에서 인사장교를 한 그는 상급자인 대대장을 잘 모셨고, 대대장은 그에게 “제대하지 말고 군에 남으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코라오그룹 직원들은 회사 현황 브리핑을 아주 잘했다. 군인이 현황 보고를 하듯이 날렵하게 설명했다. 오 회장은 “군대 생활을 통해 나는 바른 자세를 배웠다. 상대방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바른 자세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기술을 익힌 것이다”라고 설명했는데, 이러한 인식이 직원들에게 투영돼 날렵한 브리핑 기술을 익힌 것 같았다. 윗사람에게만 잘했다면 그는 윗사람 비위만 맞추는 ‘딸랑이’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가르치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같이 놀아주는 것. 병사들과 놀기로 약속했으면 대대장이 뭐라고 해도 화끈하게 놀아줬다. 사람들은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보다는 같이 놀아주는 사람을 따른다. 조직을 만들려면 아래위 사람으로부터 모두 신망을 받아야 하는데, 신망을 얻는 방법으로 같이 놀아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있으랴. 놀아줄 줄 아는 재능은 머리로 익히는 게 아니고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중위로 전역한 그는 코오롱상사에 입사했다. 이때 그는 회사에서 주는 다이어리 첫 장에 ‘나는 무역부서에서 3년, 내수부서에서 3년 일을 배운 후 회사를 그만둔다’라는 글귀를 써놓았다. 그리고 이 목표를 위해 인사 담당자를 찾아가 원하는 부서로 보내달라고 사정했다. 어찌 보면 당돌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짓을 한 것인데 그는 미움을 사지 않았다. 오 회장은 ‘말술’실력을 자랑한다. 마셔도 마셔도 끄떡없는 체력은 부모님이 물려준 가장 큰 자산이다. 그는 술자리 분위기를 만들 줄 알았다. 그러니 상사들은 접대를 할 때마다 그를 불렀다.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의심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 상사를 ‘그는 그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올랐다. 내가 접대해야 하는 상대도 우리 상사가 모실 만한 분이다’라고 믿고 술자리에서 재미있게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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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를 누가 미워할 것인가. 덕분에 ‘술 상무’의 인맥은 탄탄해져갔다. 문제는 월급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48만원의 월급으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에 빠듯했다. 이것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무역파트에서 일하던 그는 드디어 활로를 찾았다. 베트남을 발견한 것이다. 성공과 좌절을 가져다준 베트남 서울올림픽이 열린 이듬해인 1989년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무너지더니 1991년 말 소련이 붕괴했다. 소련 붕괴는 사회주의 경제권 전체의 몰락을 가져와 베트남은 생필품 부족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미국은 베트남에 대해 여전히 금수조치를 취하고 있었기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도 베트남을 외면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살길’을 갖고 있었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취했듯 베트남도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무너지기 전인 1986년 ‘도이모이’라는 개혁개방 정책을 선언하고 1989년부터 이를 적극 추진했다. 미국의 금수조치와 무관하게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미국과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나라 기업들은 베트남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 기업들은 베트남에 슬금슬금 들어갔다. 코오롱상사 무역파트에서 그는 베트남을 담당하게 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SK만 정식으로 정부 허가를 받아 베트남과 거래했고, 나머지 회사들은 몰래 무역을 했다. 그는 베트남 사람들이 생필품이 부족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통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상권을 쥐고 있는 것은 화교들이다. 그런데 베트남은 공산화 직후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화교 재산을 빼앗는 조치를 취했다.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기자 1979년 중국은 3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일시적으로 북부 베트남 일부 지역을 점령했으나 베트남군의 저항에 밀려 퇴각했다. 이 중월(中越)전쟁으로 베트남의 화상(華商)은 완전히 무너졌다. 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됐는데 화상들마저 힘을 쓰지 못하니 베트남의 사정은 날로 심각해져갔다. 베트남과 한국이 수교한 것은 1992년 12월이었다. 한-베트남 수교 1년 전 그는 ‘드디어’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자기 사업을 위해 베트남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국은 베트남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의 대기업들은 들어오지 않고, 화상 세력도 없는데다 물건은 없어서 못 파는 곳이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나처럼 좋은 조건을 갖지 못한 사업자가 뛰어들 수 있는 최적지다.’ 그의 베트남 무역은 대성공을 거뒀다. 한창 잘나갈 때는 한국에서 한 달에 두 번씩 베트남으로 배를 보냈다. 보따리 무역인데도 연간 매출액은 1억달러를 돌파했다. 베트남은 자동차를 비롯한 기계류는 중고를 도입했다. 그는 한국산 중고차 거래로 큰 재미를 보았다. 그런데 1995년이 되자 베트남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93년 미국이 베트남과 수교하고 이듬해 금수조치를 해제한 것이 계기였다. 주요 국가의 대기업들이 베트남에 몰려와 지사를 설치하고 자사 물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고품이 아닌 신품을 공급했다. 그러자 1995년 아세안에 가입한 베트남이 중고품 수입중단 조치를 취했다.
대기업이 신품을 공급한다고 하지만 베트남 시장은 여전히 값싼 중고차를 원했다. 베트남 사정에 정통한 그는 베트남 정부의 중고차 수입금지 조치는 유지될 수 없다고 보고 계속해서 한국산 중고차를 도입했다. 그런데 아뿔싸, 베트남 정부의 조치는 빈말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그는 부도를 맞게 됐다. ‘오세영판(版)’ 훈요십조 이 사태를 통해 그는 큰 교훈을 얻었다. 변화는 현실 때문에 오기도 하지만 지도자나 정부의 의지 때문에 찾아오기도 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은 습관이 있기 때문에 같은 유형의 실패를 반복한다.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습관을 바꿔야 한다. 오 회장은 자기의 생각 패턴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오 회장은 왕건의 ‘훈요십조’처럼 코라오 관계자들에게 ‘라오스 비즈니스 10계명’을 만들어 숙지시키고 있는데, 여기서 제6계가 ‘투자 관련 법규를 숙지하고 개정 여부를 주시하라’이다. 베트남에서 경험한 실패를 죽어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이렇게 투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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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업 실패로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변화를 시도했다. 노총각 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 전경미(全京美·41)씨에게 장가를 든 것이다. 그리고 심기일전해 다시 인도차이나로 날아갔다. 인도차이나 사람들은 종종 ‘20년 격차론’을 말한다. 중국 경제는 베트남보다 20년 앞섰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보다 20년, 캄보디아는 라오스보다 20년 앞서가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는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뒤진 라오스에 주목했다. 베트남이 겪은 일을 아직 겪지 않은 나라, 경제규모가 작아서 적은 돈으로도 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라오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계기는 1993년의 외국인 투자법이었다.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될 때 많은 라오스인이 태국을 거쳐 서방국가로 탈출했다. 외국 시민권과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들이 라오스가 문호를 개방하자 고국을 찾아와 땅을 사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비엔티안을 중심으로 부동산 붐이 일었다. 땅값이 올라 재산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자동차를 갖고 싶어 한다. 그는 라오스로 진출해 코리아의 ‘코’와 라오스의 ‘라오’를 더한 ‘코라오’ 법인을 세워 한국산 중고차 도입 사업을 벌였다. 한국에서 모집한 중고차는 분해돼 컨테이너선에 실려 방콕항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조립해 라오스 남부의 사바나켓에 있는 코라오 공장까지 600여km를 몰고 오게 하는 것이다. 이 주행을 통해 운전자는 이 자동차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찾아낸다. 사바나켓에 있는 공장에서는 운전자가 발견한 문제와 정밀진단을 통해 발견한 문제의 원인을 분석해 수리한다. 한국인들은 대개 10만~15만km를 뛰면 차를 처분하지만, 한국산 자동차는 40만~50만km를 뛰어도 끄떡없는 엔진을 갖고 있다. 엔진 수리가 끝나면 시트와 에어컨을 교체한다. 찌그러진 외장은 펴거나 판을 덧대 고친다. 그는 수리를 끝낸 자동차에 코라오 로고를 찍어 비엔티안에서 전시했는데 전시하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덕분에 코라오 자동차는 라오스판 ‘시발(始發) 자동차’가 됐다. 현대와 기아 차를 수리한 코라오 자동차는 라오스 시장의 53% 이상을 점유하게 됐다. 한국산 중고차 도입을 계기로 그는 라오스에 구축돼 있던 화교경제망을 뚫을 수 있었다. 중국의 자동차산업은 한국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기에 화교들은 한국산 중고차의 라오스 상륙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 추진한 것이 오토바이 사업이었다. 한국은 오토바이 제작 능력이 뒤떨어진다. 그리고 라오스인들은 오토바이만큼은 신품을 원했기에 그는 중국에 코라오 오토바이 공장을 차렸다. 코라오 오토바이도 불티나게 팔려나가 라오스 시장의 35%를 장악했다. 한발 나아가 그는 비엔티안의 버스터미널 사업권을 따냈다(2004년). 비엔티안버스터미널은 서울의 강남고속버스 터미널과 구의동 시외버스터미널을 합친 성격이다. 이곳에서는 베트남과 태국, 캄보디아로 가는 국제선 버스도 출발한다. 비엔티안엔 하나밖에 둘 수 없는 국제·고속·시외버스터미널을 만들었으니 이곳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전부 한국산 중고차일 수밖에 없다. 라오스는 인구가 적지만 발전 동력은 만만치 않다. 라오스는 이렇다 할 은행 시스템이 없기에 모든 것이 현금 거래다. 현금 거래만큼 기업가에게 좋은 것은 없다. 이동수단이 증가하면 도로 증설과 건물 증축이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시멘트 수요가 폭증하는데, 현대 정주영 회장은 이러한 변화를 예측하고 적기에 현대시멘트를 세웠다. 2007년 초 오 회장은 라오스에 연산 100만t 규모의 시멘트 공장을 준공했다. 장사 일변도에서 제조업을 병행하게 된 것이다. 바이오 연료 사업에 눈떠 베트남에서의 경험 때문에 그는 모든 사업을 단독 투자로 추진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바이오디젤 사업 때 무너졌다. 식물성 기름을 이용해 제조하는 신재생 에너지인 바이오 연료에는 크게 바이오디젤과 바이오에탄올(알코올)이 있다. 바이오디젤은 콩이나 유채, 팜, 해조류에서 추출한 기름에 첨가제를 넣어 만든다. 바이오에탄올은 단맛을 내는 사탕수수나 사탕무, 옥수수를 발효시켜 얻은 알코올을 토대로 만드는데, 바이오에탄올을 휘발유와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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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바이오 연료는 원유를 정제해 디젤이나 휘발유를 만드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었기에 시장이 형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선에 육박하고, 1992년 발효된 기후변화협약과 2005년 발효된 교토(京都)의정서에 따라 국제적으로 화석연료 사용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갑자기 주목을 받았다. 미국 일본 EU 등 에너지 소비가 많은 나라들이 바이오 연료 사용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가자, 여러 회사가 바이오 연료 제조에 뛰어들면서 세계는 심각한 식량위기에 부딪혔다. 2007년 미국에서만 무려 813만t의 옥수수가 바이오에탄올 제조로 전용됐다. 중국 또한 바이오에탄올 제조에 들어가는 옥수수가 너무 많아지자 2007년 옥수수를 이용한 바이오에탄올 제조를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나 식량위기가 없는 가난한 나라는 바이오 연료를 재배하는 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바이오디젤 원료를 추출할 팜나무를 키우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었다. 라오스는 전 국민이 농촌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농업국가다. 그렇다면 라오스에서도 바이오 연료 사업을 할 수 있겠다고 오 회장은 생각했다. 2002년부터 그는 1100ha의 땅을 매입하고 450ha는 라오스 정부로부터 90년 기한으로 임차해 가구용 목재로 쓰이는 티크 나무 등을 재배해왔다. 그런데 티크보다는 바이오 연료 추출이 시장성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연구에 들어갔다. 옥수수와 사탕수수 사탕무는 식용으로 쓰이는 것이라 가격 변동이 심했다. 팜은 식용이 아니기에 가격변동 폭이 작지만, 3년 이상 길러야 수확이 가능했다. 무엇을 키우는 것이 좋을까. 그러다 발견한 것이 라오스에 자생하는 자트로파(Jatropha)라는 나무였다. 이 나무 열매의 씨를 말려 짜면 바이오디젤 원료를 얻을 수 있다. 자트로파 열매는 맛이 없고 약간의 독성을 갖고 있어 식용으로 쓰이지 않는다(자트로파 즙은 입 주위에 생기는 헤르페스와 변비를 고치는 데 효험이 있을 정도의 독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씨를 뿌리고 8개월이면 열매를 딸 수 있으므로 팜보다 생산 효율이 높다. 제주도보다 넓은 경작지 확보 오 회장은 자트로파를 원료로 한 바이오디젤은 국제 원유가가 배럴당 35달러를 넘어야 시장성이 있다고 보았는데, 국제 원유가가 100달러 선으로 급등했다. 그는 자트로파 농장은 훌륭한 ‘유전’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오 회장이 라오스 정부를 설득하자 정부도 알아듣고 ‘베팅’을 했다. 2006년 라오스 정부는 90년간 23만3500여ha의 땅을 코라오에 추가로 임대해준다는 결정을 내렸다. 23만ha는 2300㎢(7억4750만평)인데, 이는 제주도 면적(1848㎢)의 1.25배에 달하는 땅이다. 워낙 넓은 땅을 임대받게 되자 그는 원칙을 깨고 처음으로 외부 자금을 도입했다. 2008년 군인공제회와 지방행정공제회, 굿모닝신한증권 등으로부터 3500만달러를 투자받은 것이다. 지금 코라오는 자트로파를 심을 땅을 개간하고 묘목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라오스는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아열대지역이라 식물은 우기를 거치면서 빠르게 성장한다. 자트로파는 1년에 무려 170cm나 자란다. 따라서 열매를 따기 좋도록 싹이 나올 때부터 위로 뻗는 가지를 잘라줘서 가지가 옆으로 퍼져나가게 해야 한다. 이러한 수작업은 라오스 농민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자트로파 재배를 계기로 라오스 농촌에 새마을운동을 벌일 수 있다고 오 회장은 생각했다. 그러나 라오스에는 자트로파 열매에서 바이오디젤 원료를 추출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 본격적인 자트로파 수확에 대비해 그는 기름을 짜는 착유시설과 자트로파 기름을 바이오 디젤로 바꾸는 정유시설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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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자본주의 선도 코라오가 라오스에 대규모로 자트로파를 재배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 기업들이 관심을 기울였다. 지난 6월 한국을 방문한 부아손 라오스 총리는 한승수 국무총리를 만나 한국인의 단기방문 비자를 면제해주는 조치 등을 취한 후 바로 울산의 (주)SK 정유시설을 방문했는데, 이는 자트로파 사업에 대한 부아손 총리와 (주)SK의 기대감을 말해준다. 자트로파 재배를 계기로 코라오는 라오스의 경제 개방을 유도해주는 지위를 차지했다. 라오스에는 아직 증권거래소가 없다. 한국의 증권선물거래소(KRX)는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에 증권거래소를 설치해준 데 이어 최근에는 캄보디아와 몽골에 증권거래 시스템을 수출하는 논의를 하고 있다. 라오스 정부도 경제발전을 위해 증권거래소 설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코라오는 이런 라오스 정부를 위해 한국증권선물거래소와 함께 2010년 10월10일을 목표로 라오스 증권거래소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증권거래소를 열려면 은행 거래가 활성화돼야 하는데 라오스는 아직도 현금거래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 이에 오 회장은‘인도차이나 뱅크’를 설립하기로 하고 한국의 금융 전문가를 초청해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라오스의 증권거래소 설립에 맞춰 증권회사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오 회장의 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라오스에 증권거래소가 개설되고 은행 거래가 활발해지면 자연 외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진다. 그러나 비엔티안에는 외국인들이 묵을 만한 숙소가 마땅치 않다. 이를 위해 코라오는 비즈니스맨을 위한 레지던스 시설과 이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리조트 시설 건설에 착수했다. 라오스에서도 휴대전화 등 전자제품에 대한 인기는 대단하다. 그는 라오스 국영기업인 ETL사와 함께 무선 이동통신사업에도 도전하고 있다. 연평균 10% 이상 커지고 있는 라오스의 전자제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대규모 전자마트 개점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다. 코라오가 입성 10년도 되지 않아 라오스 최대 기업으로 성장하자 주변에서 질시하기 시작했다. 후진국에서는 이 같은 경쟁자의 질시와 함께 정변(政變) 가능성에도 주의해야 한다. 정변은 종종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므로 외국인 사업가는 투자국과의 관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라오스를 위해 100만달러 쾌척 오 회장은 한국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라오스에 진출해 성공했지만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만큼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부인과 공동명의로 태국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여윳돈을 부어왔다. 만에 하나 자신이 잘못되면 부인이 이 돈을 찾아 가족과 생계를 꾸리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라오스는 그에게 이 통장을 활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라오스와 그의 관계는 갈수록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 2007년 8월의 코라오그룹은 너무 잘 나가고 있었다. 이때 오 회장은 태국은행에 저축해둔 100만달러를 찾아 라오스 사회와 경제발전에 써달라고 부아손 총리에게 기증했다. 100만달러는 10억원에 불과한 돈이지만, 코라오와 라오스의 경제규모에 비추면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2007년 코라오그룹의 총매출이 1억6000만달러였으니 이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이러한 기부가 오 회장의 성공을 질시하던 경쟁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이들의 공격을 무마시켰다. 부아손 총리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오 회장의 기탁금을 받은 부아손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돈을 관리할 재단을 만들고 이 돈을 은행에 넣어 이자를 받아서 우수 기업을 표창하는 데 쓰도록 하겠다. 표창을 받은 기업은 상금도 받았고 코라오의 사례도 있으니, 상금보다 많은 금액을 내지 않겠는가. 재단은 그 돈을 라오스의 사회복지를 하는 데 쓰게 하겠다. 이렇게 하면 재단은 100만달러에서 나오는 이자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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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회장이 100만달러를 기부한 것은 라오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오 회장은 또 매주 토요일 전직원을 동원해 비엔티안 곳곳을 청소하게 했다. 이러한 현지화 노력 덕분에 코라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한다. 개혁개방을 한 중국이 그랬고 베트남이 그랬듯이, 라오스에도 조만간 민족기업이 성장하는 날이 올 것이다. 민족기업이 발전하면 라오스는 더 이상 중고품을 수입하지 않고 자국 기업을 키울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피하려면 오 회장은 라오스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라오스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인터뷰 도중 자주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코라오의 미래를 만들어갈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듯했다. 라오스에는 4년제 대학이 하나밖에 없기에 인재 확보가 쉽지 않다. 코라오는 라오스에서는 1위라고 하나 한국 기준으로 보면 매출액 1600억원에 불과한 중(中)기업일 뿐이다. 한국의 엘리트는 이런 소기업에 몰리지 않는다. 북한에 자본주의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 필요한 사람을 얻기 위해 그는 어떤 노력을 할까. 오 회장은 “직원에게 무엇을 가장 많이 주입하는가”란 질문에 “비전의 공유”라고 대답했다. 쉽게 이룰 수 없는 높고 큰 비전을 세우고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직원들과 공유한 후 한덩어리가 되어 달려가게 하는 데 가장 많은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오 회장과의 긴 대화를 마친 뒤 기자와 오 회장을 비롯한 코라오 관계자들은 ‘조선-라오스 청년 친선센터’라는 한글 간판을 단 북한 식당에서 저녁을 들었다. 이 식당은 라오스의 분위기 탓인지 다른 나라의 북한 식당과 달리 매우 조용했다. 북한식당의 여성 복무원은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를 해보라는 기자의 주문에 노래를 부른 후, 자발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라오스 이상으로 변화가 더딘 사회가 북한이다. 북한 사람들은 라오스인보다는 거칠지만 기본 속성은 온순하다. 체제 문제만 건드리지 않으면 다정다감하다. 핵문제가 해결되고 세습체제가 무너지면 북한도 라오스처럼 개혁개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의 북한에 자본주의와 한국사회를 ‘부드럽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오세영 회장이 아닐까? 지금은 오 회장이 한국을 활용하지만, 남북통일기에는 한국이 오 회장에게 많은 것을 부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세영의 라오스 성공 스토리는 계속돼야 한다. 1년에 170cm씩 자라는 자트로파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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