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송년회 중독 혹은 열광
대한민국 12月 밤은 또 하얗게 지샌다
“일종의 집단의식이죠. 자기가 혼자라는 불안감을 해소하고 사회적 네트워크를 확인하면서 정신적인 힘을 얻는 거예요.”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의학박사)은 송년회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편성(universality)을 찾는 겁니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라는. 구조조정에 대한 위기감, 자식 걱정, 펀드 걱정 등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공감대가 형성되고 위로도 받게 되거든요.”
수십 번 ‘참을 인(忍)’ 자를 새기며 ‘진상’의 꼴불견을 받아주고, 1mm의 오차도 없는 폭탄주로 연신 ‘위하여’를 외치며, 노래 한 자락에 ‘탬버린 친구’가 되고, ‘진상’ 퇴출 후 포장마차 ‘딱 한잔’을 고집하는 한국인들. 그들은 왜 연말연시만 되면 함께 모여 송구영신(送舊迎新)하는 것일까.
‘주간동아’는 12월 5~9일 서울 종로, 여의도, 강남 등에서 열린 12곳의 송년회 현장을 ‘랜덤’ 방식으로 따라붙었다.
모여야 산다
12월5일 오후 7시 서울 을지로3가의 한 식당 앞. 모임 명부를 보며 참석자를 확인하는 대기업 사원 이찬희(28) 씨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여보세요? 어, 어디니?….” “○○야. 여기 위치는….”
고교 동창들의 송년회가 있는 날. 회사가 을지로에 있다는 이유로 모임 장소 섭외와 연락은 늘 그의 몫이다.
“전화와 문자메시지, e메일, 인터넷 동문 카페 등을 통해 이미 다 연락했어요. 힘들게 연락했는데 참석률이 저조하면 속상하지만, 친구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요즘 같은 송년회 시즌에는 최소 두 번 이상 연락한다고. 그래야 참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해 그에 맞는 장소를 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 초년생 친구들이 많아 서로 사회생활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이런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연락책’ 정도는 맡아야죠.”
이날 이씨의 고교 동창 송년회에는 예상 인원 20명이 전원 참석했다.
12월8일 오후 8시 서울 여의도의 한 고기 전문점. 현대증권 사내야구팀 ‘Bulls’의 팀원 20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폭’(소주+맥주)을 높이 들었다. “구호 제창 준비!” 왼손을 허리에 댄 인성익 감독(원효로지점 지점장)의 절도 있는 한마디에 모두 “얍!” 하며 잔을 앞으로 내민다. “구호 제창!” “불(Bulls)! 불! 불!” “아자! 아자! 아자!” 이후 팀원들은 모두 성배(聖杯)를 마시듯 숙연하게 소폭을 들이켰다.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지고…. 인 감독은 “송년회를 통해 팀원들의 얘기를 듣고 서로 용기도 북돋워준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도 준비한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이기동 교수(유학동양학부)는 “한국인의 송년 문화는 개인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우리 민족은 너와 나를 구분하면 굉장히 싫어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거죠. 원래 사람은 모두 하늘(人乃天)이었기 때문에 현재 이렇게 따로 사는 게 한스러운 겁니다. 일종의 한풀이인 셈이죠.”
그는 한국인이 친구든 직장 동료든 가족처럼 어울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에 대해 같은 ‘하늘끼리’ 원래대로 모이는 의식이라고 풀이했다. 각기 떨어진 하늘은 늘 정(情)이 발동해 ‘만나고 싶다’고 느끼며, 그러면서 하나가 된다는 설명이다.
전남대 김명혜 교수(인류학)는 “송년회는 하나의 ‘얘깃거리’를 만들어 모이는 것인데,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심을 방조하는 현대 문화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임”라고 설명했다.
음주 후 필수, 가무(歌舞) 12월5일 오후 10시 서울 종로1가 근처 한 노래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나하게 몇 잔 걸친 10여 명이 대기 중이다. 종업원은 “20개 방 모두 ‘풀가동’ 중”이라며 “큰 방은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한 송년회 모임에 양해를 구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3번 방에 모인 9명은 모두 같은 지역 유통업 종사자들. 총무를 맡고 있는 이모 씨의 설명이다. 이씨가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선창하자 어깨춤이 시작된다. 만점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씨가 지갑에서 1만원을 꺼내더니 노래방 기기 모니터 위에 ‘턱’ 하고 붙인다. 기분 좋게 몇 잔 기울인 데다 상금까지 내걸리자 모두 자신의 ‘필살기’를 예약했다. 30, 40대는 주로 동물원 김광석 이문세의 발라드를, 20대는 원더걸스 동방신기 빅뱅 등의 최신곡으로 맞섰다. 30분쯤 지났을까, ‘음치’라는 이유로 완강하게 노래를 거부하던 한 30대 회원이 이씨의 완력에 스테이지로 ‘끌려’나온다. “그래도 한 자락은 해야 한다”는 이씨의 거듭된 재촉에 마지못해 조용필의 ‘꿈’을 열창했다. 성균관대 전헌 초빙교수(서양철학)는 “동네 골목골목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노래방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관찰 대상”이라며 웃었다. “노래를 못해도, 가사를 몰라도 각국의 노래를 언제든 부를 수 있고, 또 누구나 좋아한다는 것은 한국 특유의 ‘열린 문화’ 때문은 아닐까요? 공자는 학문의 정점을 유어예(遊於藝·예에서 노닐다)라 했고, 맹자는 ‘음악은 인의를 즐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악(禮樂)을 통해 인(仁)에 이르려는 유학 수양법의 영향을 받아서일 수도 있겠죠. 누구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인생은 노래 부를 만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김 교수는 “노래방이 송년회 필수 코스가 된 것은 자신의 지위와 역할이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누구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라며 “저렴한 비용에 일탈이 허용되는 곳을 찾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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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는 동질감을 확인하는 자리 12월9일 오후 10시 서울 서초동의 한 주얼리숍. ‘하나로비(飛)’ 회원들이 1차 송년회를 끝내고 부회장 박병건 씨 숍에 빙 둘러앉아 와인을 즐겼다. 하나로비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친목 모임.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회원들은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회원 이원선 씨가 “집사람이 정기검진 받으러 갔다가 1.5cm 크기의 유방암세포를 발견해 수술을 했다. 지금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자 모두 부인의 건강을 염려했다. 이씨는 회원들에게 정기검사를 꼭 받으라고 권했다. 개인 사업을 하는 김동관 씨는 “캐나다에 유학 중인 아들이 욕설을 한 캐나다 사람과 시비가 붙어 현지 경찰에 체포돼 한동안 연락이 안 됐다”며 “매일 메신저로 연락하라고 노트북 컴퓨터를 보냈다”고 말했다. 축구자료 수집가인 이재형 씨는 최근 한 지방자치단체와 축구 박물관 건립 방안에 대해 협의 중이라 했고, 스페인유학원 원장 정남시 씨는 1유로당 2000원까지 환율이 올라 사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박씨는 “경기 불황으로 주얼리숍을 찾는 손님들이 줄었다. 우리 모임의 회원들을 회사 이사로 선임할 테니 지원을 부탁한다”며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오후 11시30분이 되자 새해 계획과 포부를 밝힌 뒤 건배로 2009년 모임을 기약했다. 일부 회원들은 3차 장소인 호프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 원장은 축구 모임처럼 사람들이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는 것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동질감을 확인하기 위한 발로라고 분석했다. “정신과 치료 중에 집단정신치료라는 게 있어요. 의사가 환자를 빙 둘러앉게 한 다음 환자 모두에게 빠짐없이 얘기하고 조언해주는 치료기법이죠. 개인의 불안감을 완화하고 위안을 주는 거예요.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위로받는 송년회도 같은 효과가 있죠.” 송년회 ‘진상’은 열등감과 불안감 때문 평소 기자와 알고 지내는 직장인 최모(34) 씨는 송년회 얘기가 나오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평균 한 달에 두 번 이상 후배들을 저녁회식이라며 ‘집합’시켰어요. 술자리에선 ‘자뻑’의 결정판이고, 자기가 불러놓고 막상 계산할 때는 칼같이 ‘n분의 1’이죠. 올해 송년회 때도 ‘역시나’였어요.” 동기들에게 애걸복걸하다시피 해 5명을 모은 최씨는 일행과 12월9일 서울 을지로입구의 한 중식당으로 향했다. 술잔이 돌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결국 안주의 유래 설명을 시작으로 선배의 ‘자뻑’이 울려 퍼졌다. “깐풍기가 무슨 요리인지 알고 시켰냐? 중국 발음인 건 알지? 국물 없이 마르게(乾) 볶은(烹) 닭(鷄) 요리를 말하는 거야. 알고나 먹어야지. 그러니 발전이 없는 거라고. 옮긴 회사는 급여도 훨씬 높아. 왜 거기 박혀 있냐? 우리 아들은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은상…, 얼마 전에 차를 바꿨는데….” 선배의 ‘일장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최씨는 속으로 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My Style’을 수십 번 따라 불렀다.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그렇게 말이 많니♬~.” 모처럼 선배가 쏜다고 해 찾아간 노래방에서 그는 쓰러지는 줄 알았다. 3곡을 연달아 부르더니 후배들에게 자신의 신청곡을 요구했다. 그것도 최신곡으로. “모르는 노래는 춤이라도 춰야 했다. 봉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최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과시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예요. 불안감과 열등감이 강한 캐릭터이기도 하고요.” 손 원장은 이씨의 경우 송년회 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상’ 범위를 벗어나 상당히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자기가 남들보다 낫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싫어한다는 사실도 잘 알죠. 하지만 (자기 과시) 욕구를 억제하지 못해 술을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자기 만족감을 확인하게 돼요.” 노래방에서 노는 것조차 ‘질서 유지’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종의 ‘공포정치’에 비유했다. “반란을 꿈꾸지 말라는 거예요. 역으로 생각하면 ‘상사로서 대접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 열등감이 강하다는 뜻이죠.” 전 교수는 “경쟁은 ‘좋은 경쟁’과 ‘나쁜 경쟁’이 있다”며 “상대가 있어야 씨름을 하듯 ‘좋은 경쟁’은 서로 힘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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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죽자 송년회’ 해야 하나 송년회라고 해서 음주와 가무가 필수 코스는 아니다. 건설업체 과장 손모(37) 씨는 최근 3년간 회사 송년회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 송년회도 팀원들과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를 보고 중식당에서 저녁식사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공식 부서행사인 만큼 회사에서 지원금을 받았지만 요즘 같은 경제위기에서는 흥청망청 쓸 수도 없다고. “3년 전 여직원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예요. 처음엔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맨정신’에 다양한 주제로 대화할 수 있더라고요. 익숙해진 거겠죠.” 경찰공무원 한모(28) 씨는 12월6일 고교 친구 4명과 스키장에서 1박2일 송년회를 가졌다. 명목은 ‘알뜰 건강 송년회’. 토요일 오전 5시 서울을 출발, 3시간을 달려 강원 횡성군의 한 리조트에 도착해 주간 스키를 탄 뒤 횡성 한우를 먹으며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총경비는 숙박비와 교통비 등 40만원. 5명이 8만원씩 냈다. 울산에서 수입품도매업을 하는 김모(47) 씨 가족은 2006년부터 연말이 되면 주말을 이용해 집 근처 양로원에서 가족 송년회를 갖는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거나 청소와 빨래를 돕는 봉사 송년회인 셈. 2006년 12월 송년회 다음 날, 어김없이 찾아오는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그는 ‘송년회 변화’가 절실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꼭 이렇게 송년회를 해야 하나’라는 회의가 들더라고요. 평소 나쁜 일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을 한 게 없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시작한 거예요.” 첫해는 김씨와 동생 가족이 참가했지만 지금은 처남 식구, 처제 가족 등 20여 명이 함께한다. 가족 단위로 20만원을 내고 1년간 자녀와 조카들이 모은 저금을 합치면 100만원 정도가 모인다고. “라면과 내의를 준비해 일요일 오후까지 봉사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가족끼리 식사를 하며 한 해를 마무리해요. 가족의 소중함을 절로 배우게 되죠.” 최근 각종 송년회 관련 설문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경기 불황으로 송년회 풍속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 최근 한 취업 포털사이트가 직장인 947명을 대상으로 한 ‘경기 불황이 송년모임 계획에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 56.2%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중 56.6%는 ‘송년회 횟수와 비용을 줄였다’고 답했다. 올해 송년회 모임은 평균 2.6회. 지난해는 4.2회였다. 또 다른 사이트는 최근 회원 887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집에서 송년회를 갖겠다’ ‘송년회를 생략할 생각’이라는 답변이 각각 40.5%, 23.1%로 나왔다고 한다. 뒤집어보면 그래도 10명 가운데 8명은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송년회를 갖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대학생 ‘럭셔리 송년회’는 우월감 표시 대학생 박모(22) 씨는 12월26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송년 와인파티’를 열기로 했다. 친구 10명이 참가하는데 각자 ‘뉴 페이스’ 1명씩을 데려오는 게 조건. 지난해 미국 어학연수 때 경험한 ‘스탠딩 파티’를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송년회라고 반드시 아는 사람과 보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송년회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남자친구도 사귈 수 있겠죠.” 호텔 예약과 와인 준비를 위한 회비는 10만원. “대학생에겐 좀 과하지 않냐”고 묻자 “친구들끼리 폭탄주를 마시고 흥청망청 노는 것보다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송년회 중 하나 정도는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손 원장은 “사람은 누구나 따라하려는 심리가 있다. 주로 윗사람이 대상”이라고 말했다. ‘나도 어른이 됐으면, 혹은 나도 어른이 됐으니’라는 생각에 사회적으로 지위를 갖추고 싶어한다는 것. 대학생들이 폭탄주를 마시거나 호텔에서 송년회를 여는 것도 어른을 흉내내면서 성숙해졌다고 느끼며 (또래보다) 우월하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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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반성 16’, 김영승
송년회는 오랜 시간 보지 못한 사람을 반갑게 만나고 회포를 푸는 소중한 자리다. 반면 혹자에게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역의 자리이기도 하다. 어느 자리에나 ‘진상 남녀’는 있게 마련이다. 송년회도 예외는 아니다. 진상들은 즐거워야 할 송년회 자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특히 진상 남녀가 술을 만나는 날은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자랑형’에서 ‘수금형’까지 진상 남녀는 해가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진상 남녀 제압법’은 즐거운 송년회를 보내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 됐다.
당신을 사랑했었다
대기업 과장인 최모(37) 씨. 대학 동기들 가운데 그의 연애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술자리만 있으면 언제 첫사랑을 만났고 헤어졌으며, 그 뒤로 누구를 만났는지 시시콜콜 다 말하기 때문이다. 과 동기 송년회에서도 여지없이 흘러간 레코드를 틀어댄다. 캠퍼스 커플로 5년을 사귄 상대의 얘기를 본인 앞에서 버젓이 할 때는 분위기가 여간 어색하지 않다. “너랑 참 좋았는데, 아직도 네 생각 나더라.” “우리 다시 만날까? 요즘은 애인도 많이 둔다잖아.”
결국 그 ‘첫사랑’은 재작년부터 송년회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다른 여자 동기들도 덩달아 나오지 않아 반쪽 송년회가 돼버렸다. 보다못한 동기들은 송년회 성격을 부부동반 모임으로 바꿔버렸다. 아내에게 잡혀 사는 최씨가 아내 앞에서 첫사랑 얘기를 할 정도로 ‘간 큰 남자’는 못 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최씨는 친구들 앞에서 다시는 흘러간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에 다들 씁쓸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나불나불 자기 자랑
개인 사업을 하는 박모(38)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주는 자랑꾼이었다. 박씨 앞에서 다른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결혼 전에는 애인 자랑, 결혼 뒤에는 마누라 자랑이더니 이제는 아들 자랑이다. 가족 자랑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에 주식으로 몇천만원 벌었지” “내가 골프를 치면 최경주가 울고 가잖아”…. 술이라도 진탕 먹여 입을 닫게 하고 싶지만 술도 잘 취하지 않는다. 참다못해 어쩌다 한마디 빈정대기라도 하면 삐쳐서 눈도 맞추지 않는다.
궁리 끝에 동기 대표는 자랑이라면 남에게 지지 않는 친구 한 명을 더 불러냈다. 그러고는 서로 자기 얘기하기 바쁜 그들을 한쪽 테이블에 붙여놨다. 서로 누가 잘났는지 불꽃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이번에 차를 외제차로 바꿨어” “야, 우리 애가 명문 사립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둘이 한쪽에서 입씨름을 하자 그제야 다른 친구들이 대화를 시작한다. “난형난제로군.” 다른 친구들은 웃으면서 건배를 한다.
작업의 정석
대학생 김모(22·여) 씨는 연말이 두렵다. 동아리의 송년회 자리에 ‘그분’이 오시기 때문이다. 동아리 선배 박모(26) 씨는 타고난 바람둥이다. 사귀었다는 여자 선후배도 여럿이다. 지난해 송년회 때는 괜히 그 선배 옆자리에 앉았다가 술을 따라주며 ‘작업’을 거는 통에 난감했다. 송년회 때마다 작업을 거는 통에 여자들은 박씨라면 혀를 내두른다. 박씨 때문에 송년회에 나오지 못하는 여자 선후배가 수두룩하다. ‘그 사람만 오지 않으면 되는데….’ 김씨는 이번 기회에 그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작심했다.
김씨는 먼저 박씨와 스캔들이 있었던 동아리 선후배에게 모두 연락해 이번 송년회에 꼭 나오라고 부탁했다. 송년회 당일 10분 정도 일찍 모여 한쪽 자리에 그들을 앉혀놓고 박씨가 오기를 기다렸다. 박씨 자리는 이들이 모여 있는 자리 한가운데. 마침내 박씨가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이들을 봤다. “어…!” 외마디를 내뱉었을 뿐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온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급한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만 마시면 최홍만도 두렵지 않다 직장인 이모(36) 씨는 술만 마시면 ‘헐크’로 변한다. 기분 좋게 분위기를 이끌다가도 2차에서 술이 과해지면 여지없이 폭력성을 드러낸다. 후배들을 불러모아 욕하는 것은 물론 때리기까지 해서 옆자리에 앉기를 꺼려하는 1순위로 꼽힌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모습으로 변해 후배들은 한숨만 내쉴 뿐이다. 팀 송년회가 있었던 그날도 어김없이 술이 들어갔고, 이씨는 “야, 너 어디 가! 대가리 박아” 운운하며 후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후배 한 명이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네가 선배면 다야? 나랑 한판 붙어볼래?” 평소 순종적인 데다 조용한 후배이기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배가 덤벼들자 당황한 이씨는 잠을 자는 척했다. 다음 날 후배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씨에게 커피를 건네자 이후 이씨의 술버릇은 깨끗이 사라졌다. 수금의 시간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이모(27·여) 씨는 고등학교 송년회 연락을 돌리면서 깜짝 놀랐다. 졸업 이후 코빼기 한번 보이지 않던 김모(27·여) 씨가 참석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송년회날 이씨가 가져온 두툼한 쇼핑백에 든 것은 청첩장. “결혼식에 꼭 와야 해.” ‘낯짝도 두껍다’는 주위의 표정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김씨는 열심히 청첩장을 돌렸다. 그리고 바쁘다며 쌩하고 돌아서는 김씨. 송년회가 끝난 뒤에도 수시로 연락하며 결혼식 날짜를 알렸다. 얄미운 그에게 이씨는 지난 친구들의 경조사 명단을 정리해서 내밀었다. ‘김○○ 결혼식, 장□□ 할머니 장례식’ 등이 나열된 종이를 보자 김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뒤로 김씨는 예전처럼 다시 연락하지도, 모임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위 사례들을 보며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뜨끔한 사람도 적지 않을 터. 나도 모르는 사이 진상 남녀로 찍힌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면 지금 바로 과거의 행동을 돌이켜보시라! 서로에 대한 예의는 송년회도 예외일 수 없다. 한 해를 보내면서 자신의 진상도 떨쳐보내자. 송년회를 올해만 하고 그만둘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우리는 어쩌면 노래방과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DNA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꼿꼿한 젓가락을 내던지고 두툼한 마이크를 잡은 50대와 60대, 학창시절 혹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노래방 물결’에 몸을 내맡긴 30대와 40대, 노래방 기기 자막으로 한글을 깨친 20대, 엄마 배 속에서 좋든 싫든 ‘태교용’ 미디음악(컴퓨터가 만든 기계음)을 듣고 태어난 10대까지. 한국인 송년회의 ‘must visit spot’ 노래방은 어디에서 왔을까. 1991년 부산발(發) 노래방 혁명 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아싸’(ASSA·옛 연풍전자)는 ‘노래방 대혁명’을 이끈 장본인이다. 아싸는 1988년 세계 최초로 컴퓨터 음악연주기 개발에 성공, 그해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하며 노래방사(史)를 열었다. 하지만 컴퓨터 음악연주만으론 아쉬웠다. 모니터에 자막과 영상이 함께 나오는 일본의 레이저디스크 플레이어(LDP) 가라오케에 비해 ‘2%’ 부족했다. 이때 부산 로얄전자가 힘을 보탠다. 로얄전자는 자막을 입히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고, 이를 아싸의 음악연주기에 적용했다. 1991년 4월 로얄전자가 직영하는 부산 하단동의 한 오락실에 두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원시 노래방’이 첫선을 보였다. ‘대박’이었다. 당시 한 곡 뽑는 가격은 300원. 청소년들은 “엄마 900원만…”을 입에 달고 다녔으며, 새로운 오락문화의 혁명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광안리 해수욕장(5월)과 충무동(7월)에 현재의 모습과 비슷한 노래연습장이 개업하면서 본격적인 노래방 전성시대가 열린다. 그해 12월까지 부산에서만 200여 업소가 생겼다. 노래방 양대 산맥 ‘금영(KY)’과 ‘태진(TJ)’ 밴드가 연주한 기본음을 녹음해 재생하던 아싸는 1994년 미디음악으로 업그레이드한 태진(현재의 TJ미디어)에 밀려 1위 자리를 내줬다. 수년간 군림해온 ‘노래방 절대 강자’가 꼬리를 내리자 후발주자들의 추격이 본격화했다. 금영(KY)은 1996년 6월 ‘합창단 육성 코러스’라는 필살기로 승부를 걸었다. 누군가 노래 부르는 자신을 도와준다는 느낌을 주는 육성 코러스는 ‘금영방’ 추종자들을 대거 탄생시켰고 이듬해 태진의 1위 자리를 보란 듯 꿰찼다. 이후 2000년대 들어 TJ미디어와 금영의 양강 구도가 형성되면서 두 회사가 시소게임을 벌이는 사이 아싸, 대흥전자, 아리랑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위 탈환을 노리던 TJ미디어는 2005년 서울 등촌동 본사에 음악동을 짓고 30억원짜리 스튜디오를 갖춘 뒤 최고의 세션을 불러 직접 연주한 곡을 담았다. 금영도 이에 질세라 원곡 작업에 참여했던 세션들을 외부 스튜디오로 끌어모았다. 원곡에 충실하고 울림 있는 사운드를 자랑하는 금영은 중년층의 감성을 자극했고 빠른 스피드와 웨이브, 경쾌한 반주가 장점인 TJ미디어는 20대 젊은 층을 열광시켰다. ‘송대관의 네박자 노래방’은 금영 기기를, 수(秀)와 락휴 등 젊은 층이 주로 찾는 노래방은 TJ미디어 기기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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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과 TJ미디어의 지역 구도도 흥미롭다. 부산에서 시작한 금영은 주로 지방에서, 경기 부천에서 시작한 TJ미디어는 수도권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본사를 중심으로 영업지역이 확산된 게 가장 큰 이유다. 여기에 한 지역에서 특정 회사 반주기가 득세하면 타사 반주기를 갖춘 노래방도 반주기를 바꾸는 노래방의 영업 특성도 한몫했다. 그러나 노래방이 증가하면서 ‘미세 조정’의 지역 단위도 세분화하다 보니, 같은 충청도 지역이라도 충주는 TJ미디어, 대전은 금영의 시장점유율이 높다. 금영 이종호 홍보팀장은 “금영의 적극적인 수도권 상륙작전으로 수도권에서의 시장점유율도 역전됐다”고 말한다. 현재 전국의 등록 노래방 업소는 3만4370개(그래프 참조). 노래방 업소당 평균 8개 룸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반주기는 27만5000여 대가 깔려 있다. 미등록 업소와 클럽 등에 보급된 기기를 포함하면 40만대 정도가 보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현재 시장점유율은 금영이 65%, TJ미디어가 35%.
신곡 업데이트는 한 달 평균 140곡 본사와 인터넷으로 연결된 네트워크(온라인) 반주기는 실시간 신곡 다운로드가 가능해 매일 업데이트가 이뤄진다. 오프라인 반주기는 노래방 업주 요청에 따라 기술자가 업소를 직접 방문해 업데이트한다. 업데이트 곡은 한 달 평균 140곡. 2006년 6월 이후부터 신곡 저작권료는 ‘4.5원×수록곡 수×판매량’으로 정한다. 여기서 판매량은 전국의 기기에서 몇 곡이 연주됐는지를 집계할 수 없어 온라인으로 연결된 기기의 평균치를 말한다. 기기당 금액은 50만~160만원대까지 다양하다. 본사는 반주기와 제품 판매, 신곡 업데이트 비용이 주수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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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분위기를 띄우려면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지?’
송년회만 다가오면 으레 빠져드는 고민이다.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자리인데 여느 모임처럼
입 꾹 다물고 있을 수도 없고, 나서자니 준비한 것도 없어 머리만 아프다. 감동의 말 한마디,
시원스러운 노래 한 곡, 사람들의 혼을 쏙 빼낼 웃음거리를 풀어놓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송년회 자리, 어떻게 하면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화젯거리, 소소한 일상사, 넘칠 만큼 준비해라
자신이 직접 A부터 Z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는 이벤트 전문회사 직원이 아니라면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단 대화거리를 많이 마련하자. 안면이 있거나 친구들뿐 아니라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아이스 브레이킹’에 서툴면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피하려면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
최근 몇 번의 송년회에서 갖가지 대화술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송년회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는 김민호(34) 씨. 김씨는 신규 고객을 많이 유치해야 하는 보험설계사다. 일도 일인지라 김씨는 친한 사람들이 모이는 송년회보다 낯선 송년회 자리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다. 그는 송년회에 가기 전 지인을 통해 참석자들의 신상이나 특기, 업무 스타일 등을 간단하게나마 파악해둔다. 누가 들어도 귀가 솔깃한 뉴스의 뒷이야기도 언론이나 사정기관의 친구, 선후배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다.
“처음 만난 상대방이 나의 장점이나 취미를 잘 알고 있다든지, 남들에게 쉽게 꺼내지 못한 어려운 사정을 먼저 알고 걱정해준다면 얼마나 고맙겠어요. 그냥 얼굴만 보고 명함만 건네는 것보다 호감도가 훨씬 더 높아질 수밖에요.”
그는 자신의 일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가 예기치 못한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
“한번은 회사 동료를 따라간 송년회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11월 실적이 아예 없어 회사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고 했더니 참석자 가운데 두 명이 한꺼번에 보험을 들겠다고 하더라고요. 제 처지를 솔직하게 드러내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기본 폭탄주 3~5잔, 2008년 송년회 공식 품목 송년회에 폭탄주가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를 게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폭탄주야말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회의 의미와 딱 들어맞는 메뉴다. 참석자 대부분이 ‘두주불사’ 스타일이라면 주야장천 폭탄주를 돌려도 문제없겠지만, 대체로 송년회 시작과 중간, 마무리 시간대에 3~5잔 가볍게 돌려 마시는 게 요즘 폭탄주 문화의 추세다. 검찰과 일부 공직자 송년회에선 여전히 양주잔과 맥주잔을 양주, 맥주로 가득 채우는 이른바 ‘텐-텐’주(원자폭탄주) 또는 맥주잔에 양주를 붓고 양주잔에 맥주를 넣는 수소폭탄주가 유행이지만, 이런 경우에도 다음 날을 생각해 5잔 정도에서 끝내는 게 적당하다. 폭탄주는 50세주(백세주 1병+소주 1병), 백두산주(백세주 1병+소주 2병), 천국의 눈물주(천국술과 참이슬 소주를 5:5로 배합), 소백산맥주(소주+백세주+산사춘+맥주), 드라큘라주(포도주+양주), 벤처 폭탄주(전통술+양주, 문배주를 넣을 경우 더 강력)에서부터 다소 마시기 쉽지 않은 난지도주(각종 음료수+나물 안주+과자+양주+맥주)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 송년회에서는 기본적인 5분, 7분 소폭(소주와 맥주), 양폭(양주와 맥주)이 선호된다. 자양강장제를 섞은 황제주, 막걸리와 맥주를 섞은 쌀보리주는 취기와 구토기가 금세 올라와 오히려 송년회 분위기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 최근 강남 지역의 바(bar)나 카페들이 폭탄주 손님을 위해 내놓는 것처럼 맥주잔 절반 크기의 폭탄주잔을 번거롭지만 따로 준비해오는 것도 센스다. 양이 절반으로 준다면 여성들도 부담 없이 폭탄주를 즐길 수 있다. 여성에겐 얼음을 타주는 것도 팁이다. 최근엔 큰 그릇에 양주 약간과 맥주를 붓고 그 안에 레몬을 빠뜨려 섞어 마시는 폭탄주도 인기다. 폭탄주를 마실 때는 재미난 건배사(辭)나 설정 코멘트를 하는 것이 분위기를 띄우는 데 효과적이다. 개그맨 김대희의 유행어인 “밥 묵자”를 변형한 “폭탄 묵자”는 최근 송년회 자리에서 반응이 괜찮은 건배사.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맨 안상태가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에서 현장 취재 기자로 출연해 내놓는 코멘트인 ‘~할 뿐이고’를 응용한 설정도 좋다. 폭탄주를 한 잔 마신 뒤 “난 폭탄주를 마셨고, 내 위에선 뇌관이 터질 뿐이고, 엉덩이에서는 파편 나오고, 그냥 엄마 보고 싶을 뿐이고”라고 해보자. 참석자들 대부분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이다. 송년회에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이 많이 참석했다면 ‘나가자’(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진달래’(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원더걸스’(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걸러서 스스로 마시자) 등 잘 알려진 감동 건배사를 적절히 활용해도 좋다.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걱정하지 마, 모든 게 다 잘될 거야’라는 뜻의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도 요즘 같은 불황기에 잘 어울리는 건배사다.
정갈한 유머와 센스, 드레스 코드·헤어스타일 변신으로 분위기 ‘UP’ 참석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것도 송년회 분위기를 이끄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과장된 몸짓이나 듣기 거북한 욕설이 아니라면 적당한 유머와 센스 있는 말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 자신이 무미건조한 스타일이라면 송년회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스스로 유머 감각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대화를 나눌 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유행어를 상황에 따라 적절히 ‘카피’해 친밀도를 높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이 마흔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변정욱(39) 씨. 그는 11월 말 부서 송년회에서 유행어 덕을 톡톡히 보고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말주변 없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만큼 대화에 능숙지 않은 변씨는 송년회 전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유행어들을 입에 장착(?)했다. 운까지 따랐던지 우연히 옆에 앉은 7년 여자 후배에게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목례로 첫인사를 나누려는 후배에게 개그맨 황현희의 유행어인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를 던져 후배를 박장대소케 했고, 곧바로 자신의 명함을 쥐어주며 한민관의 유행어인 “스타가 되고 싶음 연락해”로 확인 사살해 후배를 녹다운시켰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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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파가 얼마나 컸던지 후배는 변씨의 얼굴만 봐도 웃음을 참지 못했고, 결국 ‘특별한 감정’으로 이어져 수일 뒤엔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후문이다. 드레스 코드나 헤어스타일 변신으로도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패션 및 미술업계 송년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인데, 한 해 마지막으로 보는 자리인 만큼 그 이미지가 강하게 뇌리에 남는다. 엄숙하고 경건한 송년회가 아니라면 과감한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최근에는 마술 전문회사에 자문을 받아 간단한 마술을 선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노래방에서 마지막 불꽃을 송년회뿐 아니라 모든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노래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기가 살짝 오른 상태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는 모두를 하나로 묶는 ‘사랑의 묘약’이나 다름없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는 ‘2008 송년회 분위기를 휘어잡을 필살가(歌)’를 선정해 발표했다. 최고경영자(CEO)를 기준으로 한 설문조사지만, 순위 안에 든 곡들이 모두 누구나 알 만한 ‘명곡’들인 만큼 일반인의 애창곡과 별 차이 없다. 남성이 분위기를 띄우기에 가장 좋은 노래는 김수철의 ‘젊은 그대’로 나타났다. 흥겹고 따라 부르기 편한 곡의 대표격. ‘꿈의 대화’(이범용 한명훈), ‘어쩌다 마주친 그대’(송골매), ‘여행을 떠나요’(조용필), ‘황홀한 고백’(윤수일), ‘널 그리며’(박남정)가 그 뒤를 이었다. 여성의 경우 심수봉의 ‘젊은 태양’이 1위였고, 역시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남행열차’(김수희), ‘첫차’(서울시스터즈), ‘영원한 친구’(나미), ‘하늘땅 별땅’(비비), ‘분홍 립스틱’(이애리자), ‘밤이면 밤마다’(인순이)가 인기곡에 올랐다. 이 밖에 30대 남성들이 노래방에 갈 때마다 한 번쯤은 부르는 ‘슬퍼지려 하기 전에’(쿨), ‘챔피언’(싸이)이나 최근 드라마나 방송에서 화제를 모은 ‘땡벌’(강진), ‘날 봐 귀순’(대성), ‘무조건’(박상철), ‘샤방샤방’(박현빈), 30대 여성의 경우에는 ‘미쳤어’(손담비), ‘노바디’‘텔미’(이상 원더걸스) 등 이색 최신곡도 분위기를 뜰썩이게 만들 만한 곡이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는 부르는 사람의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노래로 꼽혔다. 모두가 따라 부른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멋지게 마무리한다면 당신은 분명 송년회의 주인공이 돼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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