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 같은 내 인생
경제 종착역에 밀어닥친 불황 한파…
고물상 이향종(40)씨, 고물 수집상 이정오(55)씨, 고물 줍는 김순남(75)씨 스토리
지난 12월10일 아침 8시, 부산 강서구 대저동 고물상 업주 김아무개(42)씨가 자신의 굴착기에 밧줄로 목을 매 자살했다. 현장에 남겨진 유서에는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들에게 미안하다. 아내에게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고 적혀 있었다. 김씨는 고철값 폭락으로 많이 힘들어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고물상을 짓누르는 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다. 건설업과 제조업에 깊은 불황이 닥쳤다. 생산활동이 줄면서, 생산의 흔적인 고물도 사라졌다. 고물값이 폭락했고 고물상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 골목을 뒤져 고물을 줍던 노인들도 끼니 걱정을 하고 있다. 벼랑에 내몰린 ‘고철 인생’에는 한국의 경제사도 깃들어 있다. 이들 대부분은 60년대 이후 경제개발 시대를 떠받쳤던 노동계층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바뀌어도 이들의 빈곤은 여전하다.
현대제철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제조업체가 밀집한 인천은 고철 인생이 모여사는 곳이다. 공장이 문을 닫고 고물상이 망하고 고물 줍는 노인들이 추운 겨울 거리를 헤매는 인천을 밀착취재했다. 고철 산업의 하층을 이루는 이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중·소 규모의 고물상이 어떻게 서로 물고 물리며 불황에 신음하는지, 그리고 제철·제강업계를 주도해온 대기업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3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통해 경제위기 구조의 한 단면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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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0일 오전 10시35분, 인천 서구 가좌동
1t 트럭에 시동을 건다. 동네 작은 고물가게들을 돌아다닐 시간이다. 백미러에 매달린 작은 십자가가 부르르 몸을 떤다. 사람들은 그를 고물상이라 부른다. 4년 전까진 마을버스 기사였다. 10년 전엔 택시 기사였다. 22년 전엔 농고 기계과 학생이었다. “아니, 그랬던 분이 어쩌다 고물상이 됐어요?” 이런 질문을 그는 들어보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향종(40)씨를 고물상이라 부른다.
고물 종류가 많은 걸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모는 트럭 조수석에도 고물이 있다. 커피가 까맣게 말라 굳은 일회용 종이컵, 딸기 과즙이 들어 있던 우유팩, 별이 은하수를 이룬 사이다캔이 뒤섞여 있다. 일하다 가끔 마신 음료수의 흔적이다. 설탕물이 비릿하게 썩는 냄새가 난다. 고물이 수북이 쌓일 때까지 오른편 문은 열리지 않는다. 나중에 그것들을 모아 270평 공장의 한구석으로 옮길 것이다.
그는 ‘공장’이라 부르고 사람들은 ‘고물가게’라 부르는 곳에는 작은 산맥이 있다. 물랭이산, 따데기산, 신쭈산, 스땡산, 고철산, 생철산, 파지산이다. 연한 플라스틱을 ‘물랭이’라 부른다. 딱딱한 플라스틱은 ‘따데기’다. 그걸 주워모으는 할머니들이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고물상들도 따라 그렇게 부른다. 이씨는 물랭이와 따데기 말고도 낡은 고철과 윤나는 생철을 구분해 쌓는다. 비철 중에도 수도꼭지처럼 값나가는 신주(황동)와 냄비처럼 흔한 스테인리스를 따로 모아야 한다. 많은 종류의 고물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것들이 그의 눈에는 밟혔다. 부평역에서 계산역까지 마을버스를 모는데, 골목마다 고물이 쌓여 있었다. 일을 마치면 그것들을 주우러 다녔다. 마을버스를 몰며 한 달에 130만원을 벌었다. 고물을 팔면 하루에 몇만원씩 들어왔다. 대통령 탄핵을 반대한다며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던 2004년, 그도 운전대를 놓고 거리로 나갔다. 고물상 일을 시작했다.
그의 삶은 전쟁이다. 이긴 적은 별로 없지만, 모든 것을 잘 참아왔다. 땅을 빌려 고물상을 열었더니 공무원들이 나왔다. 민원이 들어온다고 했다. 냄새가 난다고 했다. 길 건너 주택가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어느 날엔 산처럼 쌓아둔 고물이 몽땅 불탔다. 누가 불을 냈는지도 모른 채, 그 재를 치우느라 구청에 돈을 냈다. 그래도 이씨는 잘 참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집에 들어갔다. 신용보증기금에서 5천만원을 빌려 공장 터를 다시 잡았다. 인천·부천을 거쳐 영종도 공항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씨도 참기 힘들다. 9월이 지나면서 모든 고물값이 떨어졌다. 1kg에 600원 하던 고철이 지금은 100원이다. 9월 이후 고철 거래는 완전히 끊겼다. 1kg의 파지를 30원에 사서 35원에 내다판다. ‘5원 떼기’ 장사다. 3t을 사고팔면 1만5천원이 남는다. 파지 장사로는 월 30만원을 겨우 번다. 공장세만 한 달에 170여만원이다. 감당이 안 된다.
스티로폼을 압착한 뒤 떡처럼 뽑아내 재생원료로 파는데, 그 돈으로 겨우 세를 낸다. 스티로폼은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압착하려면 기술도 필요하다. 스티로폼을 다루는 고물상은 많지 않다. 이씨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근처 항구에서 나온 스티로폼 박스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많이 난다. 압착할 때 스티로폼 타는 냄새도 비릿하다. 그래도 여기는 공장 지대라 냄새 난다고 민원 넣는 사람은 없다.
대운하를 파면 고철을 내다팔 수 있을까
소일 삼아 고물을 줍던 외환위기 때는 어려운 줄 몰랐다. 거리에 고물이 많이 나왔다. 카드 대란이 났을 때도 돌려 막아가며 버텼다. 이번에는 다르다. 같이 일하던 5명의 일꾼을 한 달 전에 내보냈다. 없는 사람끼리 서로 형편 봐주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냥 내보내지 않고 사정이 나은 다른 고물상 자리를 소개해줬다. 일꾼들이 몰던 1.4t 트럭도 한 대 팔았다. 한 달에 50만원씩 내던 지게차 임대료는 5만원 깎았다. “이제 안 쓸랍니다.” 이씨의 말에 지게차 주인은 군말 없이 가격을 낮췄다.
달리 직업이 없는 형님 내외를 불렀다. 형님한테는 200만원, 형수님한테는 100만원씩 월급을 준다. 대신 이씨는 지난 두 달 동안 아내에게 10만원을 갖다줬다.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두 아들을 키우는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 있는 사람은 버티고 돈 없는 사람은 나앉는 수밖에 없다고 이씨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건 마비야. 예고 없는 타격이지. 위에 있으면 잘 모르겠지만, 우리 밑바닥 인생들은 금방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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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기도하고 집을 나서는 이씨는 매일 천국을 생각한다. 그의 천국은 제주도에 있다. 고물을 모으며 따로 챙겨둔 골동품들이 있다. 옛날 미싱, 옛날 장난감, 옛날 일본칼, 옛날 소화기도 있다. 그걸 모아 제주도에 박물관을 열 것이다. 제주도에는 그런 걸 좋아하는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 박물관을 열면, 일본 사람들은 이씨를 고물상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혹시 대운하를 파면 고철을 내다팔 수 있지 않을까, 이씨는 생각한다. 지난봄에 1천만원을 주고 사들인 고철 50t의 산에서 녹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씨와 고향이 같은 정동영 민주당 대선 후보의 친구 되는 목사님의 아버님이 이씨의 옆집에 살았지만, 그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운하 사업을 하면 경제가 나아진다는 말을 믿었다.
그러나 고향이 다른 것보다는 처지가 다른 게 문제였다. 대통령은 수출해서 나라를 세운 것처럼 말한다. 이씨는 밑바닥 사람들이 차곡차곡 고생해서 이만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돈 있는 사람들은 밑바닥 사람들 코빼기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이씨가 말하는데, 밑바닥 동생에게 잠시 의탁하고 있는 형님이 장갑을 벗으며 다가온다. “점심 먹고 해야지.” 이씨 형제는 500원짜리 빵과 흰 우유를 하나씩 먹었다.
12월10일 오후 4시06분, 인천 부평구 십정동
마음에 드는 일만 일어나길 바랄 순 없는 노릇이다. 11월14일에 중간판매업자가 와서 집게차로 파지 2t을 실어갔다. 2만원이 이문으로 남았다. 이정오(55)씨가 한 달 동안 딱 그만큼 벌었다고 장부에 적혀 있다. 낡은 장부 표지에는 날래고 용감한 옛날 만화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정의의 용사는 그날 이후 이씨의 고물가게를 찾아오지 않았다.
얼마 전 고물상협회 인천지부 월례 모임에 갔다. 어느 고물상이 자살했다더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워낙 형편이 힘드니 그런 낭설까지 떠도는 것이라고 이씨는 생각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게 그의 버릇이다. 가게 이름이 ‘겸손자원’이다. YH무역에서 일한 7년 동안에 대해서도 그는 겸손하다.
한 달 2만원, 너무 ‘겸손’한 이문
1972년 그는 가발과 의류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서울 면목동에서 채석장을 하던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다니던 공고를 중퇴하고 같은 동네에 있는 공장에 들어갔다. YH무역이었다. 그는 미싱수리공이었다. 여공들이 쓰는 미싱이 고장나면 그가 고쳤다. 한 달에 ‘오버타임’을 250시간까지 해봤다. 하루에 10시간씩 추가 근무를 했다. 그러면 월급이 50% 정도 더 나왔다. 입사 때 받은 월급은 5500원.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그가 돈을 벌자 식구들이 모두 좋아했다.
밤에는 새참이 나왔다. 수백 명 몫을 한 솥에 넣고 끓였다. 퉁퉁 불은 라면이 양은 사발에 담겨 나왔다. 식구들 얼굴을 떠올리며 먹었다. 새벽 4시에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아침 8시까진 다시 출근해야 했다. 이씨는 그 시간도 아까웠다. 사무실에서 의자를 붙여 잠을 잤다. 회사가 잘나갈 때는 직원이 4500명이나 됐다. 대통령이 주는 수출공로탑도 받았다. 그런데 그 대통령이 죽기 두 달 전인 1979년 8월9일, 여공 200여 명이 신민당사를 점거했다. 위장 폐업과 감원에 항의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이 화근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서울 왕십리 콩나물 공장 자리에 미싱 석 대를 놓고 가발 공장을 시작했던 사장은 정부의 수출지원책에 힘입어 의류까지 다루는 큰 기업의 회장이 돼 있었다. 경기가 나빠지자 수출 기업의 회장은 공장 문을 닫고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 여공들이 사흘간 농성했는데 경찰이 강제진압했다. 노조위원장은 진압 과정에서 죽었다.
그 일은 역사책에도 남았다. 그때 이씨는 다친 사슴처럼 가만히 면목동 본사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데모하러 가지 못했다. 회사에서 대기했다. 이씨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옛날 이야기하면 가슴이 아파.” 종업원들은 당연히 힘들었고, 회장도 할 만큼 하다가 손을 들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
“아휴, 좋은 데 있던 분이 저희 같은 회사에 오시면 되겠어요?” 이력서를 넣는 공장마다 그렇게 이야기했다. 군인 대통령이 죽고 또 다른 군인 대통령이 취임하던 때였다. 사장님들은 YH무역에서 일했던 과거를 곱게 보지 않았다. 엔지니어라고 자부했던 이씨는 눈높이를 낮췄다. 하루라도 땀 흘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80년대에는 청계천에서, 90년대에는 안양공단에서 일했다. 10명 정도 일하는 작은 공장들이었다. 대부분 수출 기업이었지만 예전처럼 신나진 않았다. 이씨는 미싱사였던 아내를 그 시절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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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돌아야 고철이 나올 텐데
장인이 운영하던 고물상을 1991년에 물려받았다. 장인이 몸져누웠다. 봉제업도 쇠퇴하고 있었다. 이씨는 트럭을 몰고 밖에 나가 고물을 모아왔다. 아내는 130평의 작은 가게를 지켰다. 도부꾼들이 리어카에 담아온 고물을 사들였다. 예닐곱 명의 도부꾼이 매일 아침 이씨 가게로 출근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옛날 일이다. 오늘 점심 무렵 이씨는 배터리가 방전된 1t 트럭을 고치러 차량 정비소에 다녀왔다. 5월 이후 가게 앞에 세워두기만 했더니 탈이 났다. 나가서 고물 모아올 일이 없다. 큰길 건너 인천공단이 있다. 그 공장들이 돌아가야 고철이 나온다. 공장 사장들은 문 닫고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다. YH무역 회장도 그때 그런 심정이었을지 이씨는 궁금하다.
아들 둘은 이제 대학생이다. 들어오는 물건 가운데 학습지를 골라 공부시켰다. 큰아들은 제대한 뒤 휴학 중이다. 작은아들은 막 입학했다. 등록금이 필요하다. 두 아들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공부 1등 하면, 엄마·아빠도 업계에서 1등 할 수 있나요?” 아내가 말했었다. “아들 학교 보내지 말고 그냥 연금 낼까요?” 외환위기 때 국민연금을 체납했다고 보험공단에서 전화가 왔었다. 20만원 연금을 내면 아이들 뒷바라지를 할 수 없었다.
통금 해제될 때까지 동상에 걸려가며 일했는데 나라가 우리한테 뭘 해줬느냐고 아내가 말한다. “일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보면 잘못 살았지 싶다”고 말하는 아내는 대학생 아들 생각해서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남편 이씨를 채근했다. 이씨의 큰 귓불이 발갛게 상기된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니 자식들에게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겨울의 옅은 해가 일찍 졌다. 옛 미싱수리공은 옛 미싱사의 손을 잡고 19평 집으로 돌아갔다.
12월11일 오전 3시12분, 인천 남동구 간석동
까만 밤이 일직선으로 동네 골목을 가른다. 리어카 밑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나온다. 할아버지의 걸음은 그보다 빠르지 않다. 이제 10여 분 걸어나가면 꽃밭이다. 네온사인이 번쩍번쩍 하는 것이 꽃밭이구나, 10년 전 고물 줍는 일을 시작하면서 김순남(75)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란주점과 실내포차와 20년 전통의 해장국집을 지나며 그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주변을 살핀다. 키가 큰 아가씨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국가유공자, 왕년의 반공투사
불 꺼진 건물의 유리문을 민다. 다섯 번쯤 그러다 열린 문을 찾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종이 박스를 깔고 앉았다. 신문지로 싼 유리병을 꺼낸다. 원래 그 병에는 새우젓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 새우젓으로 김장을 했을 것이다. 돼지 머리고기에 새우젓을 올려 먹었을 수도 있다. 김씨는 새우젓 말고 그 병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쌀밥과 볶은 김치가 담겨 있다. 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김씨는 밥을 먹는다.
“우리는…” 하고 시작하는 게 그의 말버릇이다. ‘우리’는 차가운 걸 좋아한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차가운 밥을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짠 것도 좋아한다. 붉다 못해 까만 김치를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요즘 나오는 맛소금과 진간장이 참 맛이 좋아서 그것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밥 먹는 걸 싫어한다. 한 줄에 1천원 하는 김밥을 먹으려 24시간 분식집 문을 열면, 식당 아주머니는 주문받을 생각도 않고 잠시 실눈을 떴다가 내처 존다. ‘우리’도 사람인데 시답지 않은 대접받는 건 질색이다.
국가유공자로서, 왕년의 반공투사로서 그런 일은 견딜 수 없다.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김씨는 6·25 때 미 해병대 소속 8240 유격대에 자원 입대했다. 9·28 수복 직후 당숙이 송화군수가 됐는데, 중공군이 다시 밀고 오면서 가족 전체가 반동으로 몰렸다. 황해도 신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 만 게 그가 배운 것의 전부다. 신천과 송화는 6·25 때 서로 갈려 죽고 죽이는 일이 많았던 곳이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배운다고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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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이북 청년들과 함께 유격대에서 싸웠다. 바닷물이 짠지 신지도 몰랐던 그는 ‘양키 싸진’ 밑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았다. 낙하산을 세 번 탔다. 칼 두 자루가 낙하산을 떠받치고 있는 해병대 모자를 그는 새벽마다 고쳐쓰고 나와 리어카를 몬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근데 나라에서 주는 돈은 하나도 늘지 않아 서운했다. 매달 8만원이 나온다. 여기에 노인연금 8만4천원이 더 붙는다. 나머지는 김씨가 알아서 번다. 단칸 지하방에 사는데도 가스비 8만원, 전기세 5만원이 매달 나간다. 볕이 들지 않고 습한 지하방이라 전기와 가스를 안 쓸 수는 없다. 위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안 아픈 데가 없는 할머니 약값으로 20만원이 나간다.
그가 고향의 처녀를 만나 결혼하던 40여 년 전, 통행금지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무원, 기자 그리고 연탄배달부였다. 몸에서 풀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 마포구 만리동에 연탄가게를 냈다. 쌀도 팔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탄과 쌀만 있으면 해마다 닥쳐오는 겨울을 살아냈다. ‘송화상회’는 한 달에 4500장씩 연탄을 팔았다. 결혼 축의금이 100원 하던 시절, 연탄 100장을 1천원 받고 팔았다.
1966년 연탄 파동이 났을 때, 한 가구당 연탄 20개씩만 사야 한다고 나라가 법을 정했다. 구청에서 가택수색을 나와 더 사모은 이를 잡아갔다. 동사무소에서 확인증을 받아 연탄공장에 가면 정해진 수량만큼 연탄을 받았다. “빌어묵을 양반, 늙어 죽도록 연탄 장사나 하시오.” 주문이 밀려드는데 연탄을 대지 못했다. 만리동 달동네의 아주머니가 욕을 해댔다. 연탄으로 밥 지어 먹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만리동 동장은 수완을 발휘해 매일 세 끼니 열한 명의 식구들 밥을 해낼 만큼 연탄을 구했다.
값나가는 고물을 이제 내놓아야 하나
남한테 머리 숙이지 않고 뛰어다니면 돈이 되는 그 일이 그는 좋았다. 여름철 석 달만 놀면 1년 벌이를 걱정하지 않았다. 다섯 달을 놀게 됐을 때 그는 조금 걱정이 됐다. 일곱 달을 놀았을 때, 그는 연탄가게를 접었다. 석유곤로로 밥을 짓고, 프로판가스로 요리를 하더니, 도시가스까지 집집마다 들어왔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그는 인천으로 왔다. 전쟁 때 월남한 고향 사람 몇몇이 모여사는 동네였다.
1972년부터 몰던 연탄 리어카 두 대를 함께 끌고 왔다. 할머니들은 힘이 없어 리어카를 끌고 싶어도 끌지 못한다. 유흥업소에서 종이박스와 플라스틱 병과 고철이 나와도 모두 담아가지 못한다. 김씨에게는 36년 된 리어카가 두 대나 있다. 새벽 3시에 나와 저녁 6시까지 리어카에 고물을 담아 모은다. 그런데 올가을부터 재미가 적다. 손가락만 조금 쑤시고 몸은 여전히 견딜 만한데 일감이 줄었다. 종이도 줄고 고철도 줄었다. 어제는 하루 두 번 리어카로 고물을 실어 날랐는데 1만1천원을 받았다. 그제는 9천원이었고, 그그저께는 4500원을 받았다. 매달 40만원을 벌었는데 요즘은 20만원을 겨우 넘긴다.
폭과 길이가 2m쯤 되는 큰 전자저울에 리어카를 올려놓을 때마다 김씨는 구부정한 허리를 억지로 펴고 눈금을 본다. 김씨의 고물을 사주는 작은 가게에서 석 달째 매달 10만원씩 빌렸다. 그 30만원을 언제 갚을지 알 수가 없다. 목숨 바쳐 싸웠고 일했는데 왜 여전히 사는 일이 고단한지 김씨는 잘 모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부자들은 그와는 다른 낙하산을 탔다. 그가 연탄을 배달할 때도 부자들은 석유곤로로 밥을 지었다.
지하방 앞에 모아둔 값나가는 고물을 이제는 내놓아야 하나, 김씨는 생각한다. 시래기 말린 것을 걸어둔 시멘트 담벽 아래로 냄비, 프라이팬, 세숫대야, 밥솥, 버너, 비디오, 음료수캔, 커튼 지지대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해병대 모자, 리어카 그리고 이 고철들이 70여 년을 살아낸 김씨에게 남겨진 재산이다. 따뜻한 기운도 없는 겨울 아침 해가 그의 굽은 허리를 타고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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