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재용 ㅣ 최근 법원이 삼성그룹의 불법 승계 논란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그의 후계 구도 또한 가시화되고 있다.
ⓒ그림 최익견 |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그는 엘빈 토플러, 피터 드러커 같은 세계 석학들과 칼리 피오리나 등 유명 CEO들을 초빙해 미래의 경영 환경이나 새로운 경영 기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조언을 구하는 기회를 자주 갖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도 빠지지 않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일화 한 토막. 지난 2005년 타계한 피터 드러커 전 미국 글레어몬트 대학 드러커 경영대학원 석좌교수가 생전에 승지원을 찾은 적이 있다. 물론 이전무도 아버지 이 전 회장과 함께 그를 맞았다. 피터 드러커는 나중에 삼성그룹 관계자를 만나 “삼성은 아주 운이 좋다. 유일한 후계자인 이전무가 매우 스마트하고 성품이 좋다. 삼성의 미래가 아주 밝다고 본다”라고 전했다는 후문이다.
삼성그룹 임직원들 사이에서 이전무에 대한 평판은 상당히 호의적이다.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직원들은 “겸손하다”라거나 “예의 바르다”라고 말한다. 회식 자리에서도 직접 폭탄주를 제조해 직원들에게 돌릴 만큼 친화적이라고도 한다.
요즘 이전무는 또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최근 이건희 전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그를 둘러싼 후계 구도가 가시화하고 있다. 이제 자신의 경영 능력을 그룹 임직원뿐 아니라 외국인 주주들에게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그가 최근 중국 상하이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해외 순환근무에 나선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삼성그룹에 따르면 이전무의 활동 영역에는 특별히 제한이 없다. 주재원처럼 붙박이 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중남미나 인도, 아프리카, 러시아 등을 오가며 해외 사업을 직접 챙기고 있다. 여기에서 쌓은 경험과 경영 능력이 향후 이전무의 경영 승계 과정에서 평가 자료로 활용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전무를 둘러싼 환경은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동안 그를 눌렀던 불법 경영권 승계 논란이 최근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법원이 삼성에버랜드 CB(전환사채)와 삼성SDS BW(신주인수권부사채)의 저가 발행에 따른 배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 대법원의 판결이 남아 있다. 그러나 1심과 2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된 만큼 대법원 판결도 마찬가지로 내려지리라는 것이 그룹 안팎의 시각이다.
익명을 요구한 그룹의 한 관계자는 “원래는 12월 중순 정도면 결론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좀 늦어지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둘째 주와 넷째 주에 이루어진 점을 감안할 때, 올해 안에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삼성이 서초동 신사옥으로 이전한 사실도 이전무를 염두에 둔 경영 구도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2세 경영이 태평로에서 이루어졌다면, 3세 경영은 지금의 서초동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이전무는 지난 10월 사옥 이주를 앞두고 각 계열사 임원들과 직접 만나 이전 계획을 체크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챙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 인해 조만간 단행될 예정인 연말 또는 연시의 삼성그룹 CEO 및 임원 인사에서 대폭적인 ‘물갈이론’도 제기되고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옛말처럼 이재용 시대에 맞는 인물들로 참모진이 대폭 교체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일례로 이 전 회장이 경영권에서 물러난 이후 삼성은 사장단협의회가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룹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까지도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이전무가 경영권을 물려받아 총수 자리에 오를 동안 그룹을 책임지는 한시 기구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전무의 등극 시점을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해외에서 순환근무 중인 그가 언제 귀국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그룹의 한 관계자는 “아직까지 경영 수업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소한 2~3년은 해외 순환근무를 더 할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그런 이유로 연말 인사도 중폭 정도에 머무를 것이다. 최근 그룹 안팎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대폭 인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예년과 같은 수준에서 인사가 단행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과 미디어리서치가 공동으로 조사한 ‘기업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세 미만 차세대 인물’로 이재용 전무가 1위에 꼽혔다. 아직은 경영 수업을 받고 있지만, 조만간 후계 구도가 마무리되면 재계에서 무시하지 못할 인물로 떠오를 게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무는 전체 응답자 가운데 28%의 선택을 받아 차세대 리더 1위에 올랐다.
안철수 등 벤처 기업인들의 약진도 두드러져
이전무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인물은 최태원 SK 회장이다. 최회장은 최근 어느 때보다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11월 말 이명박 대통령을 수행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행사가 열린 페루를 방문했을 당시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최회장은 대통령 기조연설 직전에 이대통령을 소개하는 연설을 해서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선 지난 11월 중순 국제 금융 위기와 경기 침체 대책 등을 논의하기 위한 전경련 정례회의에서 최회장이 호스트를 맡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차세대 기업인을 뽑는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20%의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재벌 그룹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와 최태원 SK 회장 외에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2%)도 차세대 리더의 반열에 올랐다.
이번 조사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벤처 기업인들의 약진이다.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의장(8%),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2%),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2%) 등이 나란히 차세대 리더 후보에 꼽혔다.
|
|
|
[여성]정치의 중심에서‘우먼 파워’를소리 높여 외치다 |
심상정·나경원 등 실력파 정치인들이 상위권 | |
여성 분야에서는 정치인들의 바람이 거세다. 정당보다는 개인적 활동이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인지도를 높여온 여성 정치인들이 즐비하다.
1위는 압도적인 지지(12%)로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 대표가 차지했다. 2위는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이다. 언론인 출신의 두 의원, 박영선 민주당 의원과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도 낮은 지지도이지만 이름을 올렸다.
심상정 대표는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정치에 입문한 지 1년 만에 ‘여야가 뽑은 2004년 최고 국회의원’ ‘정치부 기자가 뽑은 올해의 정치인’으로 뽑혔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1980년, 공장에 위장 취업하면서 한국의 노동 현실을 알게 된 그녀는 서울노동운동연합 중앙위원장, 전국금속연맹 사무차장, 민주노동당 당대회 부의장을 거쳤다. 17대 대선 이후 진정한 서민 정치를 하겠다며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후 2008년 3월,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18대 총선에서 경기도 고양시 덕양 갑에 출마했다가 석패했다. 의석에서는 물러났지만 지난 11월 노 전 대통령을 향해 한·미 FTA 토론을 제안하고 비상경제시국회의에 참석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은 여성 1위로 꼽아온 김주하 MBC 앵커도 이름을 올렸다. 방송 3사 최초의 여성 앵커이자 처음으로 MBC 주말 <뉴스데스크>를 단독 진행하는 등 그녀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0위권 내 유일한 20대이자 문화계 인사인 장한나 첼리스트의 등장은 특히 눈길을 끈다. 장한나는 음악 분야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등 저력을 보여줬다. 그녀는 2006년, 영국의 클래식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에서 ‘내일의 클래식 슈퍼스타 20인’에 선정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난해에는 지휘자로 데뷔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소외 계층 위해 뛰는 ‘자랑스러운’ 여성도 있어
소외받고 힘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묵묵히 일하는 이들도 10위권에 들었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에서 활동하는 소라미 변호사와 문경란 국가인권위상임위원이 그 주인공이다. 소라미 변호사는 최근 ‘진짜 자랑스러운 이화인상’을 받기도 했다. 기업인으로는 최연소 신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박남희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상무와 윤송이 엔씨소프트 부사장도 거론되었다.
“나라 살림 알뜰하게…” |
|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학창 시절, 장래 희망으로 정치인을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인 쟁점이 터질 때마다 누구보다도 행동하는 정치인으로 앞장서고 있다. 그녀는 돈이 없어 무시당하고 기회를 박탈당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던 소박한 마음이 오늘날의 심상정을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그녀를 지난 12월11일 진보신당 당사에서 만났다.
1위로 선정된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50세 이상이어서 그런 것 같다. (웃음) 국민 특히 여성들의 처지가 더욱 어려워져 좋은 정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기인 만큼 제대로 하라는 격려의 뜻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소홀히 다루어졌던 여성 분야로 정치권이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 이유는? (심상정 대표는 2006년, 성인지 예산 제도를 통과시키는 등 양성 평등 실현에 기여해왔다.)
여성의 짐으로 떠넘겨졌던 아이 교육, 노인 복지, 환경의 문제가 정치의 중심 의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제들이 정책으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대거 진출해야 한다. 그런 만큼 내각의 50%를 여성으로 구성하는 법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장점과 한계는?
현실 정치에서 여성으로서 갖는 장점은 거의 없다. 실력보다는 학연·지연·혈연 등 사회적 자원에 크게 영향을 받는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당리당략에 따른 정치가 아닌 알뜰하게 나라 살림을 하는 여성주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여성이 강점으로 발휘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으로 믿는다.
인생 전체로 보았을 때 고비가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다. 18대 총선에서 낙선해서가 아니다. 나라 경제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성장 중심의 경제 체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추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이 순간 큰 힘이 없고, 갖고 있는 마이크가 약하다는 점이 안타깝다.
최근 여러 인터뷰를 통해 서민들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진보의 실천, 생활 정치를 강조해왔다. 구체적인 방안이 있는가?
당에서 곧 경제 위기 대책을 발표할 것이다. 금융 개혁을 위한 수술 자금 100조원과 서민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자금 100조원 투입하라는 내용이다. 서민들의 소비를 늘리는 것이 경제 위기를 벗어날 유일한 대책인 만큼 실업 대란을 막고 교육·의료·주거 등 기초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대규모 재정 투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중3인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청소년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이들이 사회로 나오기 전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정치적 역량을 키울 것이다. | |
[영화]작품성·흥행성‘두 마리 토끼’ 잡는 스크린의 거인들 |
박찬욱 감독 1위, 배우로는 송강호·설경구 꼽혀 |
|
|
|
|
|
|
|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차세대 인물로 박찬욱 감독(45)을 첫 손에 꼽았다. 전문가들이 그를 선택한 것은 영화 산업의 성패가 결국에는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창작의 정점에 있는 감독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감독 외에도 차세대 인물 10명 가운데 총 5명의 감독이 포진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 중에서도 박찬욱 감독이 가장 많이 호명된 것은 그가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만족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 등으로 해외에서 대중과 영화 관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박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5백80만명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우고 완성도 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주류 영화계에 진입했다. 이후 복수극 3부작이라고 불리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가며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견고히 했다. 그중에서도 <올드보이>는 박감독의 명성을 세계에 널리 알린 작품으로 손꼽힌다. 특히 최고의 액션 장면으로 꼽히는 ‘장도리 액션 신’은 충격적인 이야기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감독은 <올드보이>로 2004년 제57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영화광 출신 감독이라는 점이 통한 것일까.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올드보이>에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할리우드에서 <올드보이>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박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서 할리우드 리메이크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해외 언론의 보도를 확인시켜주었다. 할리우드가 워낙 유동적이어서 스필버그가 직접 감독을 할지, 제작자로 물러날지, 아니면 또 다른 변화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내 장점은 작은 영화에서 더 잘 발현된다”
박감독은 “솔직히 내 손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관심은 없다. 스필버그가 하면 다른 감독들이 하는 것보다 더 새로워질 테니까 더 궁금하기는 하다”라고 말했다. 직접 리메이크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올드보이>나 <친절한 금자씨>를 직접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지긋지긋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의 리메이크 제안도 받았는데 흥미가 있기는 했지만 리메이크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박찬욱 감독이 처음부터 성공 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다. 그는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이 실패하고 다음 영화인 <3인조>를 내놓기까지 5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마저 실패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동안 영화광 출신답게 영화평론가로서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에 출연하고 영화 비평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감독이 된다는 목표를 버리지 않고 꾸준히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해 결국, <공동경비구역 JSA>를 성공시켰다.
<미쓰 홍당무>를 통해 신인 이경미 감독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키며 자신도 제작자로서의 도전에 성공한 박감독은 현재 차기작인 <박쥐>의 후반 작업에 열심이다. 흡혈귀를 소재로 한 <박쥐>에는 송강호, 김옥빈, 신하균 등이 출연하며 내년 4월30일 개봉 예정이다.
<박쥐>는 총 제작비 60억원이 들어간 중간 규모의 영화이다. 박감독의 명성에 비해서는 작게 느껴진다. 박감독은 “이야기가 집 하나에서 거의 다 벌어지고 등장 인물이 많거나 몹신이 등장하지도 않는다”라며 자신의 장점은 작은 영화에서 더 잘 발현된다고 설명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인 유니버설픽처스에서 제작비 절반을 투자했다. 유니버설픽처스가 미국 쪽 배급을 담당하게 되는데 미국에서 자막이 들어간 외국 영화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작비 절반을 투자한 결정은 해외 영화계에서도 박감독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자신은 이야기꾼이라고 하면서도 좋은 감독이라면 이야기와 화면 모두를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야기꾼이라고 알려진 빌리 와일더의 영화를 보면 이야기를 운반하기 위한 형식을 정확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들리 스콧이 스타일리스트라고 하지만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의 스토리가 얼마나 심오한가”라고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의 영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좋은 감독은 이야기와 화면 모두 겸비해야 한다”
박감독 외에도 <괴물>의 봉준호 감독(39), 싸이더스 FNH의 차승재 대표(48), <영화는 영화다>로 제작자로도 성공한 김기덕 감독(48), <놈놈놈>으로 흥행성을 확인한 배우 송강호(41), <강철중 : 공공의 적 1-1>의 강우석 감독(48)과 배우 설경구(40),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제작자 심재명 MK픽쳐스 대표(44)와 임순례 감독(47), 칸의 여왕 전도연(35) 등이 차세대 주자 10명에 들었다. 영화감독이 총 5명, 영화 제작자가 3명(강우석은 감독과 제작자 모두에 포함), 배우가 3명이다. 영화 현장에서 감독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특히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감독으로 양손에 꼽히는 봉감독은 박감독과 치열하게 선두를 다투었다. 현재 봉감독은 <마더>를 작업 중이고, 이는 내년 개봉 영화 중 <박쥐>와 함께 최고 기대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 외에도 이준익 감독(49), 배우 김혜수(38), 김성수 감독(47), 홍상수 감독(47), 정훈탁 한국연예매니지먼트 회장(41), 김우택 전 쇼박스대표(44) 등이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제 실력 발휘 못 하는 감독들은 문제 불법 다운로드가 영화산업 망치고 있다" |
박찬욱 감독 인터뷰
|
|
|
|
▲ 박찬욱 ㅣ 내년 4월30일이면 그의 신작 <박쥐>를 만날 수 있다. 이번에는 어떤 즐거운 충격을 선사할지 기대된다.
ⓒ그림 최익견 |
박찬욱 감독을 서울 대학로의 모호필름 사무실에서 만났다. 모호필름은 박찬욱 감독이 설립한 제작사로서 주로 그의 작품을 제작한다. 지금은 박감독의 차기작 <박쥐>를 제작 중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당시에도 박감독은 그 다음 날 있을 <박쥐>의 후반 작업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는 최근에 신인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를 제작해 제작자로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박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일 외에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며 대답하기를 주저하고는 했지만 불법 다운로드 만연으로 인한 부가 판권 시장의 붕괴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라며 열변을 토했다. 그의 작품 세계와 미국 진출, 한국 영화계의 현주소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미쓰 홍당무>로 다른 감독 영화의 제작자로 나섰는데.
언론이나 시사회에서의 반응에 비하면 굉장한 흥행을 거둔 것은 아니다. 본전 수준이다. 극장 수익에서는 본전이 조금 못 되었는데 수출하게 되면 본전은 넘길 것이다. 하지만 신인 이경미 감독의 역량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공효진, 서우, 황우슬혜 세 여배우가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등 전체적으로는 큰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제작자로서 어느 정도 개입했나?
우선 그 감독을 선발하고, 영화를 기획하면서 어떤 소재를 어떤 스타일로 접근할 것인가를 함께 정했다. 각본을 쓰는 일은 거의 이감독이 직접 했다. 캐스팅, 편집, 음악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중요한 일들은 거의 이경미 감독의 몫이었다.
이감독을 픽업한 계기는?
|
|
|
▲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금자씨> 촬영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모호필름 제공 | 미장센 영화제를 통해서이다. 이전에는 전혀 몰랐다. 이감독의 단편영화를 봤을 때는 다들 깜짝 놀랐다.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데뷔시켜준다는 제작자가 많았는데, 그런 데로 안 가고 연출부 현장 경험(이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에 연출부로 참여했다)을 한 번 하고 가자는 나한테 왔다. 나를 포함한 기성 감독들이 미장센 영화제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다들 아무리 바빠도 품앗이를 해서 참여하고 있다. 거기서 이경미, 나홍진 등 아주 믿을만한 감독이 나온 것이 여간 반가울 수 없다. 한 번 해보니까 어떤가. 계속할 생각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생각 없다. 노름에서 돈 땄을 때 빠지고 싶은 심정 있지 않은가. 딱 이 정도에서 빠지자 생각한다. 더 하다가 혹시 시원찮은 영화가 나오면 짜증나고 피곤할 것 같다. 이번 작업은 만족한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실제로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돈을 많이 번 기분이다. 미장센 영화제에서 또 기가 막힌 신인을 발견하면 어떻게 하겠나?
발견해가지고 좋은 제작자에게 소개시켜줄 것이다. 영화시장 침체로 신인 감독 등용이 어려워졌다. 박감독도 초반에는 어려움이 많았는데.
영화 두 편을 다 실패해놓고 세 번째 기회가 온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지금은 비평적으로든 흥행적으로든 두 번씩이나 실패한 감독에게 세 번째 기회를 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데뷔를 할 때 예전보다는 신중해야 한다. 기회가 왔다고 무작정 붙들어서는 안 된다. 한 편을 해도 자기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었는데도 인정을 못 받아서 그것으로 데뷔작이 유작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이 작품만 할 수 있다면 한 작품 찍고 은퇴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의 자신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침체된 한국 영화의 돌파구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제작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산업적인 면에서는 아는 것이 없어 나도 공부하는 중이다. 감독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감독들이 최근 실력 발휘를 충분히 못한 것이 문제일 것이다. 물론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들도 있지만 그 수가 조금 적었다. 나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로 산업적으로 찬물을 끼얹는데 일조하지 않았나. 감독들이 더 분발해야겠다.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DVD 산업의 붕괴는 큰 문제이다. 우리 아이가 중학생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선생님들이 불법 다운로드로 애들에게 영화를 보여준다고 한다. 선생님들이 그럴 정도이니 한국 사람들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단시간 내에 국면 전환을 노리는 캠페인도 병행해야겠지만 좀 길게 봐야 할 것 같다. 캠페인으로만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교육적으로 접근해야 할 듯싶다. 저작권 문제는 법적인 해결도 필요하지 않나?
정부에서도 IT 산업을 키운다고 너무 무관심했다. 불법 다운로드는 일종의 도둑질인데 방관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왔다. 좀더 강력하게 해야 한다. 부가 판권 시장이 너무 빨리 무너졌다.
부가 판권 시장이 가진 포션이 가장 낮은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 직배사들이 한국 DVD 시장에서 다 철수했다. 외국에 나갔을 때 그렇게 영화시장이 큰 나라에 왜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의 DVD업체들이 다 철수했냐고 물어보면 얼굴이 화끈거려 대답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외국에서 우리 영화를 어떻게 보고 있나?
영화 관계자, 지식인 그룹, 대중의 세 가지 층위로 볼 수 있다. <올드보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못했다. 지식인 그룹에서는 한국 영화에 대해 잘 안다. 특히 김기덕 감독에 대한 지지가 대단하다. 영화 관계자에게는 한국 영화가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이다. 우리가 아는 홍상수, 김기덕, 김지운, 봉준호, 나 정도의 영화는 모두 다 봤고 다음 영화를 궁금해한다. 폭력 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데.
설정한 것은 아니지만 관심사는 확실히 그런 쪽이 맞다. 폭력이 사람들 개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그 공포와 고통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가볍고 희망적인 밝은 영화를 해보고 싶어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찍었는데 반응이 안 좋았다. 그 길로 나가라는 관객들의 대답인 것 같다. <사이보그…> 외에도 <3인조> <휴머니스트>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등 참여한 코미디 영화는 잘 안 되었는데.
그 각본들은 애정을 많이 갖고 있는데, 특히 <철없는 아내…>가 제일 좋다. 그렇게 코믹한 면이 강한 영화, 뭐가 웃기느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관객 대중과 항상 잘 맞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웃기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겠는데, 내가 봐도 웃기면서 관객들도 웃긴다는 것이 어렵더라. 예를 들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의 몇몇 장면에서는 먹혔다고 봐야 하고,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의 유머는 절반밖에 안 먹혔다. 배우를 선택할 때는 무엇을 고려하나?
처음 보는 배우라면 만났을 때 뭔가 새로운 느낌, 개성이 있어야 한다. 외모를 본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배우는 생긴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부에서 배우들의 연기력과 내면의 무엇인가가 제일 중요하다고 얘기하며 생김새는 아무 관계없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잘생겨야 한다는 것인가?
조각 같은 미모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못생겨도 좋고 다 상관없는데 생김새 자체로 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관객은 카메라와 영사기라는 두 매체를 통해서 배우를 간접적으로 만나지만, 감독은 그 사람들과 직접 대면해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실물을 직접 만났을 때 압도하는 그런 에너지가 필요하다. 젊은 배우들이 너무 일찍 스타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일찌감치 청춘스타가 되는 사람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우리나라만 유독 그런 것은 아니다. 연기 못하는 스타도 어디에나 있고 김윤석처럼 늦게 유명해지는 배우도 있기 마련이다. 한국이 조금 아쉬운 것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계속 스타성을 유지하는 배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영향을 받은 감독을 꼽자면.
초기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이었던 것이 분명하고, 영화를 만들어오면서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향이 점점 커졌다. 두 감독 모두 인간 욕망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주목한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특히 베르히만이 제일 큰 돈을 들여서 상업적으로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는 아주 히치콕스럽다. 최근 감독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언제나 나의 우상이고 미하엘 하네케,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도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는 <내가 찍은 그녀는 최고의 슈퍼스타>를 재밌게 봤다. 톰 디칠로 영화를 좋아한다. 할리우드 진출설이 나오는데.
김지운 감독이 다음 작품을 그쪽에서 하는 것으로 안다. 나는 검토만 하고 있다. 좋은 작품, 시나리오가 있으면 나갈 생각이다. 좋은 작품이 입수되면 하는 것이고, 끝내 안 오면 안 해도 된다. 무조건 가겠다는 그런 생각은 없다. 한국 감독이 할리우드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
얼마든지 권하고 싶다. 특히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 몇 억 달러짜리 영화를 하고 싶은 사람은 할리우드를 가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작은 영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한다. 다른 감독들은 빨리 가서 경험도 많이 하고 만약에 내가 나중에 가게 되면 조언도 해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쓰리 아미고스’라고 하는 3명의 멕시코 감독이 있다. 알폰소 쿠아론, 베네치오 델 토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이다. 이 셋이서 서로를 위하면서 외로울 수 있는 할리우드에서 서로 키워주고 끌어주고 후배도 같이 데려와서 셋이 한꺼번에 제작해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부럽다.
언젠가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이 할리우드에서 맹활약하며 ‘세 친구들’로 불리울 날을 기대해 본다
| | | |
[문학]날은 저물어 팍팍한 마음 달래줄 '엄마'가 필요해 |
공지영·신경숙, '두 여자 전성시대' 예고 |
|
|
|
|
|
|
|
문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차세대 리더로는 소설가와 시인이 골고루 꼽혔다. 팍팍해진 현실 때문인지 서사적인 이야기보다 감성적인 글쓰기를 하는 문인들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소설가 공지영·신경숙 씨가 공동 1위를 차지해 ‘두 여자’의 전성시대를 예고했고, 시인 안도현·문태준 씨가 그 뒤를 이어 ‘감성 회복’을 바라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언제부터인가 국내 소설계에 재기발랄한 신인들이 가세해 선배들과 경합을 벌이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최근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가수 타블로가 펴낸 소설집 <당신의 조각들>이 서점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한 달여 베스트셀러 순위를 지킨 것은 문단의 얼굴을 붉히게 만든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국내 소설가들은 지금 외국 작가들에게 영토를 많이 내주고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눈먼 자들의 도시>의 스페인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 <사랑하기 때문에> 등으로 탄탄한 마니아 층을 형성한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 올해 펴낸 산문집 <흐르는 강물처럼>의 인기가 언제 시들지 모를 정도인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 등 유럽·미국 대륙과 일본 등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한 서점 통계에 따르면 한국 소설 판매량이 외국 소설 판매량의 4분의 1 정도인 형편이다.
독자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이름값’ 하는 몇몇 중견 작가들뿐이다. 김훈·이외수·황석영 등 ‘나이 드신’ 작가들이 쟁쟁한 외국 작가들의 책들과 경쟁하며 체면을 지켜주었다. ‘차세대 리더’로 꼽힌 공지영씨가 지난 봄에 산문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펴내며 지난해 말 낸 소설 <즐거운 나의 집>의 여세를 이어갔다. 또, 신경숙씨는 지난해 <리진>으로 6년의 ‘침묵’을 깨고 돌아와 최근 <엄마를 부탁해>를 펴내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르며 ‘재기’에 성공했다.
소설의 묘미는 무엇보다 재미이다. 읽는 재미가 있어야 감동도 주고 메시지도 분명히 던져줄 수 있다. 감동과 메시지를 찾아보겠다고 재미없는 이야기에 인내하며 견디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공지영·신경숙 씨가 차세대 리더 1위에 오른 배경에 이 점도 분명히 작용했으리라 본다. 작가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작품이다. 작품으로 승부를 걸었기에 독자들의 사랑이 지속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불러들여 울고 웃고 또 함께 분노하고 고민하는 한 ‘두 여자’와 독자들과의 끈끈한 유대는 끊어지지 않을 듯하다.
시인 안도현·문태준도 주목…‘감성 회복’ 기대
안도현 시인은 올해 <간절하게 참 철없이>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등을 엮어내는 등 꾸준한 창작 활동을 해내고 있다. <가재미>로 잘 알려진 문태준 시인은 <그늘의 발달> 등을 펴내 시들지 않는 창작욕을 과시했다. 안도현 시인은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문태준 시인은 불교방송국 제작 PD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연수씨는 올해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산문집 <여행할 권리>를 잇달아 발표해 여전히 저력을 발휘하고 있고, 지난해 말 <퀴즈 쇼>를 출간한 김영하씨는 지난여름 ‘여행자’ 시리즈 2편 <김영하 여행자 도쿄>를 펴냈다.
시인 송찬호씨는 ‘늘 빠르고 폭력적이고 불운한 것들로 가득 찬 듯한 세상 한 쪽에 도사리고 있는 아름다움의 힘과 실체’를 찾아 들려준 공으로 올해 미당문학상을 수상해 눈길을 끌었다.
성석제씨는 지난 6월 산문집 <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를 펴낸 데 이어 최근에는 소설집 <지금 행복해>를 펴내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올해 초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펴낸 소설가 천운영씨와 최근 <앱솔루트 바디>를 펴낸 소설가 박민규씨도 국내 작가 중 차세대 리더 10위 안에 꼽혔다.
한국 문학의 흐름에서 ‘여성 작가’가 뚜렷하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로 기억된다. 이념과 사상이 소설의 화두로 자리 잡았던 1980년대에는 남성 작가들이 쓴 대하 역사 소설이나 현장 소설들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썰물 빠지듯 그런 문학의 조류가 지나간 1990년대에는 여성 작가들이 강점을 가질 수 있는 가족과 개인에 얽힌 소소한 읽을거리가 봇물 터지듯 터져나왔다. 특히 1980년대 운동권이나 노동 현장을 지나온 여성 작가들은 ‘여성 해방’이라는 화두를 세밀하게 또는 예리하게 다듬어냈다. ‘운동’에서 축적한 논리와 시대의 변화에서 읽은 가능성으로 무장한 여성 작가들은 뭇 여성 독자들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가 한 판 굿을 벌이듯 당기고 밀고 부수고 풀어 헤치며 부둥켜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가부장 사회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결점이나 과거지사 등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흉이 되지 않았다. 차분하게 ‘커밍아웃’하고 소곤거리듯 새로운 질서를 말하는 그 이야기들은 가부장 사회가 억압해온 온갖 사슬들을 댕강댕강 끊는 예리한 ‘칼의 노래’였다.
그녀들의 문학은 그렇게 여성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는 구원의 메시지였다.
여성 작가들, 1990년대 문단에 활기 띄워
1963년,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다른 환경에서 자라 따로이 20여 년의 집필 활동을 해온 두 작가는, 중견 작가들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기에 힘겨워하는 시절을 보기에 따라서는 쉽고 편안하게 보냈다. 자기 표현과 사회와의 소통을 하는 데서 조직에 얽매이거나 집단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문학이라는 창작 방식이 여성들에게 유리한 시절이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지영씨는 1990년대 문단에 페미니즘을 확산시키고, 페미니즘 확산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작가 인생 20년을 훌쩍 넘으면서 그녀는 그런 인식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듯하다. 비판과 칭송이 엇갈리는 논쟁 속을 그녀는 ‘무소의 뿔처럼’ 정면으로 돌파했고,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쉼 없이 화제를 이끌어냈다.
공지영씨는 1988년, 1년 전에 있었던 구로구청 농성 사건을 소재로 한 단편 <동트는 새벽>을 문예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발을 내디뎠다. 그 뒤 386 운동권 출신으로서 후일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통했다. 1997년에 장편 <착한 여자>를 내놓으면서 페미니즘 작가로 명성을 굳혔다. 2005년에는 사형수와 여교수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장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큰 인기를 모아 지지부진했던 한국 소설에 활기를 띄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해 자전적인 소설 <즐거운 나의 집>과 산문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펴내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 그녀는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소설 <도가니>를 연재하면서 또 다른 ‘도전’에 연말연시를 바치고 있다.
신경숙씨는 한 일간지 조사에서 국내 문인 중 ‘감수성이 가장 뛰어난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인된 문장가인 셈이다. 그녀는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 <겨울우화>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 <풍금이 있던 자리>가 평단과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스타 작가로 도약했다. 작품성과 대중성의 경계를 잘 타왔다는 평,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더 정치적이지도 더 사회적이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서술해내는 것이 장점’이라는 평을 받았다.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딸기밭>을 펴냈고, 이후 6년 만인 지난해 <리진>으로 독자들을 다시 끌어모은 뒤 최근 펴낸 <엄마를 부탁해>로 인기몰이를 하며 언론의 관심까지 독차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여, 인생의 ‘의미’를 찾기 바란다" |
소설가 공지영씨 인터뷰
|
|
|
▲ 공지영 ㅣ 소설가. 1963년 서울 출생. 1988년 <창작과 비평>에 <동트는 새벽>으로 데뷔. 21세기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 수상.
ⓒ그림 최익견 |
이름 앞에 ‘최고, 베스트’가 붙기도 한다. ‘공지영 신드롬’이라는 말도 있었다. 부담되지는 않나?
부담된다. 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대중들의 변덕’에 시달린다. 독자의 사랑을 못 받으면 당장 수입이 줄어드는데 프로로서 그 점도 마음에 걸려 한다. 하지만 최고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나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사람이 나오기를 바란다.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새 소설 <도가니>를 연재하고 있다. 악플로 여겨지는 댓글이 눈에 띄던데, 악플에 대항할 내공이 있는가.
그 점을 주위 사람들이 걱정해주셨다. 악플은 누구나 싫은 것이다. 그전에도 당했는데 그 고통을 삶으로 견뎠다.
<도가니>는 ‘청각장애인 학교인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 판결을 수화로 전해들은 청각장애 학생들의 이상한 신음소리가 법정을 울렸다’는 기사의 마지막 줄에 충격을 받고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도가니>는 어떤 작품인가?
사건이 발각되고 조사가 이루어지는데 사건에 연루된 상류층 인사들이 담합해서 사건을 덮으려 하자 그에 맞서 진실을 밝혀내려고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는 딸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엄마와 딸이 소통하기도 쉽지 않다. 그 책은 어린 독자들에게도 많이 읽힌 것으로 알고 있다. 인터넷 연재에서도 어린 독자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쓰는가?
작가에게는 책을 내는 자체가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서 놀랐다.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숨어 있던 분’들도 많다는 것을 느끼면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놀랍고도 감사했다.
한때 페미니스트로 불리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수식어가 떨어져나갔다.
10년 전 이야기이다. 자유주의자니 페미니스트니 다 얽매는 것 같다. 나는 어디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숨어 지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리낌 없이 살고 싶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좌충우돌’이다.
취업 문제 등으로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힘들다고 한다.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어려운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질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으면 한다. 취직이 안 되거나 하는 그런 시대는 언제나 있었다. 요즘 20~30대를 보면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것 같다. 수능 다음에 토익 점수, 사회에 나가서는 연봉을 따지는…. 그것은 감옥 같은 것 아닌가.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의미’인 것 같다. ‘의미’를 못 찾으면 인생은 부질없고 처참하다.
| |
"방치해서 잃어버린 ‘엄마’를 더 늦기 전에 찾아야 한다" |
소설가 신경숙씨 인터뷰
|
|
|
▲ 신경숙 ㅣ 소설가.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문예중앙>에 소설 <겨울우화>로 데뷔.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그림 최익견 |
발표한 작품마다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눈물을 훔치게’ 한 결과로 1위에 선정된 것 같다. 소감은?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누군가가 지켜봐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를 부탁해>가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일부에서 1997년 김정현 작가의 <아버지>와 비교해 2008년 출판계 키워드의 하나로 어머니를 말한다.
그저 쓰고 싶은 작품을 썼던 것이지 사회 분위기에 맞춘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에서든 어머니라는 상징이 따뜻하고 건강하게 상처 없이 존재하기를 바랐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라는 상징을 잃어버렸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첫 문장을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해서 개개인의 어머니 찾기를 시도해본 것이다.
오래전부터 어머니가 화두였다고 말했다. 책이 나온 뒷얘기가 있다면.
작가가 되기 전부터 작가가 되면 어머니 얘기를 써보리라 생각했었다. 글을 쓰게 된다면 어머니 마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 되기를 희망했다. 너무 늦게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1980~90년대를 지나오면서 문학 속에서 억압의 상징으로서 ‘아버지 죽이기’ 작업이 많이 진행되었다. 그 덕에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문학 속에서는 상당히 사라지거나 희화화의 대상이 된 것 같다. 그러면 어머니는? 힘 센 아버지 옆에 존재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한 어머니는 방치되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상생활과 닮았다. 하지만 어머니 이야기를 쓰기가 쉽지 않았다. 어머니를 ‘엄마’로 바꿔 부르자 달라졌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각각 화자의 시점이 다르다. 그런데 ‘나’를 지칭하는 것은 엄마뿐이고 모두 ‘너, 그, 당신’으로 지칭된다.
문학 속에서도 엄마를 주변에만 두었지 그 자리를 중앙에 내줘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늦었지만 엄마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것이 작가로서 엄마들에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배려였다. 더 나아가 엄마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지점까지 가보고 싶었다. 어머니를 여읜 사람들은 ‘살아계실 때 잘해드려라’라고 말한다. 지난해 겨울 집필하는 동안 보름인가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고 들었다.
개인적인 상황으로 엄마가 서울에 와 계셨다. 사춘기 때 엄마와 떨어져 살기 시작한 이후로 30년 만에 처음 그리 여러 날을 보냈다. 새벽에 엄마가 자고 있는 방으로 건너가 그 옆에 나란히 누워서 옛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엄마 마음속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무슨 얘기인가를 하다가 딸인 내 가슴에 안겨 우는 엄마를 보면서 오늘날의 우리가 존재하도록 기반이 되어준 분을 그리 두었다는 아픔이 밀려왔다. 엄마 얘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 이 작품을 쓰는 동안 가장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면 이 책은 자전적인 내용인가?
엄마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엄마를 피해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엄마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엄마를 지닌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 엄마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20여 년 글을 써오면서 본인의 문장과 서술 방식의 변화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글 쓰는 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글을 쓰는 일로 세상과 소통을 해왔다. 내게 절실한 것은 읽는 이에게도 절실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써왔을 뿐이다.
‘신경숙 마니아가 몇십만 명’이라는 식의 말도 나돈다. ‘신경숙 장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몇십만 명은 과장된 말이고 처음부터 쭉 따라 읽어온 독자들은 있다. 내 소설은 읽기가 쉬운 소설이 아니다. 스토리텔링에 의존하는 서사를 향해서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식의 서술 방식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며 상징이며 보편성을 떠난 독자적인 시공간들이 소설 속에 무수하게 들어와 있다. 그런데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내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쓰든 인생이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나는 문학 작품을 읽으며 사회적 단절을 지나왔고 내면의 변화를 겪어왔다.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가 나를 설득하려고 하면 더 튕겨져 나가는 성격이어서 쓰는 나도 읽는 독자를 설득할 생각은 없다. 소설의 흐름에 따라 뒷문을 열어둠으로써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 거기까지가 내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작품의 마침표는 읽는 사람이 찍는다고 본다. 내 독자들과 함께 보기 좋게 나이가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선배 작가들 중에 엄마 같은 존재로 생각되는 분을 꼽는다면.
박경리, 박완서, 오정희…. 힘든 시대를 겪어온 분들이기 때문에 강인하고 아름답다. 잘 늙고 싶다는 바람이 생길 때 그들을 생각한다. 내게는 문학의 어머니 같은 분들이다.
어려울 때 어머니를 떠올리면 눈물만 그렁그렁해진다. 방황하는 젊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30대 이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삶의 질이 달라진다. 힘들지만 먼저 이 일을 하면서 살면 행복하겠다 싶은 일을 정하고, 정해졌다면 그 일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시간들을 보내라고 권하고 싶다 | | |
[미술]두려움 모른 채 그리고 조각하는김홍도의 후예들 |
도전 즐기는 토종 작가 이불 1위 |
|
|
[1000호] 2008년 12월 17일 (수)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
|
|
|
|
|
최근 우리 미술계의 대표적 인물을 선정하는 조사에서 유독 미술시장의 영향이 많이 반영되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주로 갤러리보다는 미술관, 미술관보다는 비엔날레를 비롯한 각종 주요 국제 행사에서의 비중이 주로 반영되었던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몇 년 사이 아트페어나 경매 등의 소식이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결과 때문이다. 1990년 말 외환위기 사태 이후부터는 ‘꿩 잡는 게 매’라고 외국에서 잘 팔리는 작가가 곧 애국자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반영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간의 관심은 많은 변화를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미술 분야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가로 이불에 이어 강익중이 선정된 것은 세간의 평가와 예상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불은 토종 작가라는 점에서, 강익중은 미국을 거점으로 활약하고 있는 사실이 주목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변수가 있다면 작가의 최근 활동 시점이 이번 조사의 시점과 얼마나 가깝냐는 것이었다.
이불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것은 최근에 있었던 개인전이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에 전시를 가진 작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이 모두 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00년대에 가장 주목받는 활약을 한 작가로서 또한 미래의 활약이 기대되는 작가로 그를 손꼽는 데는 이견이 없는 상태이다.
2위 강익중은 백남준의 후예로 주목받아
이불(45)은 홍익대 조소과 출신으로 1990년대부터 도발적인 누드 퍼포먼스, 광채 나는 시퀸이나 구슬, 몬스터나 에일리언 등 각종 캐릭터들로 기성 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준 바 있다. 어딘지 모르게 엽기적이고 음란해 보이면서도 반항적이고, 그러면서도 우수와 여운이 주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1997년 뉴욕 MoMA에 설치된 생선은, 생선이 썩어가면서 풍기는 악취로 인해 철거되는 스캔들로 말미암아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휴고보스 미술상 최종 후보 작가 전시,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수상 등으로 명실 공히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한 강익중은 홍익대를 졸업한 후 1984년 도미해 뉴욕에서 현대미술의 에센스를 섭취하면서 성장해온 작가이다. 도미 후 10년 만인 1994년 백남준에게 발탁되어 휘트니에서 함께 <멀티플 다이얼로그> 전시를 갖는 등 미국 무대에서 백남준의 뒤를 이을 작가로 주목되기 시작했다. 1997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해 특별상을 수상함으로써 국제적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쾰른의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밀레니엄 작가 1백20명에 백남준과 함께 선정된 것은 그의 국제적 위상을 재확인시켜준 쾌거로 기록되고 있다.
광화문 가림막 작품으로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작품은 작은 단위들의 조합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시대의 패러다임에 적중되는 양식의 결정체로서, 미학적인 담론의 차원에서도 거론되는 양식으로 하나의 획을 그었다. 뉴욕에서 그림 그릴 시간이 없던 그가 주머니 속에 작은 캔버스를 만들어 넣고,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작업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데, 일상적 경험의 그물망에 포획된 각종 이미지들이 변화무쌍하게 조합을 창출해나가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무명 서양화가 김동유, 크리스티 경매에서 ‘파란’
일견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이는 이 양식은, 우리 동시대의 언어는 좀더 다중적이고 복합적이라는 미학적 인식을 조형화시키고 있다. 동양의 정적인 요소와 서양의 역동적인 문화의 내용들을 조화시키며, 아울러 그 어떤 공간에서도 조화와 해석을 수행하는 것을 강점으로 하는 전천후 양식은 그 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제 유니트 컴바이닝 페인팅은 보편적 양식으로 정착되고 있다.
|
|
|
|
2표를 받은 공동 3위에는 김동유, 차대영, 홍경택, 서도호, 최정화, 유근택이 함께 올라와 있다. 이 가운데 서도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서도호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 약관의 나이에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참가했고, 미국으로 활동 본거지를 옮긴 뒤에는 현재까지 각국에서 초대되어 전세계를 누빈다 해도 지나침이 없는 작가이다. 국내에서는 2006년 선미술상 수상전 외에는 이렇다 할 전시를 갖지 않아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위의 두 사람에 비해 불리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 2006년 전시에서 선보인 서도호의 작품은 주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충돌 및 화해, 관계성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들이다. 자신이 살았던 한옥이 어느 날 태풍에 실려 미국 서부의 어느 가옥 위로 떨어진 모습을 표현한 정교한 미니어처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큰 반향을 유발했다. 작가 자신이 체험한 기억들과 다양한 인종들과의 관계 속에서 겪는 소통의 문제를 상징적 아이콘과 오브제들을 통해 치밀하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미의식을 조형화시켜 나가고 있다.
재작년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지방 작가의 작품 한 점이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상가의 20배가 넘는 가격 3억5천여 만원에 낙찰되어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서양화가 김동유이다. 모택동, 마릴린 먼로, 박정희 등의 역사적 인물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앤디 워홀처럼 매체 속의 이미지를 집적시키고 반복시키는 것까지는 유사하다. 그런데 그 조합은 다시 통일적인 이미지로 복제되는 독특한 방식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차대영의 경우는 한 송이의 꽃 이미지를 거대한 화폭에 해맑게 펼침으로써 한 폭의 추상적 화면이 되도록 하는 인상적인 그림으로 유명하다. 홍경택은 원색의 연필, 책 등이 화면에서 몇 개의 소실점을 가지면서 쾌활하고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홍경택 역시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기념비적인 낙찰가를 기록했다. 그래픽과도 같은 메커닉한 이미지들이 보여준 쾌거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는 기념비적인 경매 이후 한창 입체적인 평가 작업이 진행 중인 단계에 있다.
최정화는 미술과 비즈니스를 넘나드는 자유로움과 분방한 사고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회화, 인테리어, 영화, 설치 등의 많은 분야에 걸쳐 제도의 규범을 무시하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모든 것이 조형으로 승화되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
|
|
|
"나의 거대한 서사를 짓는다" |
이불씨 인터뷰
|
|
|
▲ 이불 ㅣ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기성 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림 최익견 |
인터뷰를 위해 성북동에 위치한 작가 이불씨의 작업실이자 자택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무언가 한창 작업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을 찍을 때도 작업복을 입은 채로 포즈를 취했다. 이불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본명이냐고 묻자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이불과 현대미술가, 모두 생경하게 느껴졌지만 그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자 금세 친숙하게 다가왔다.
이불의 작업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컨셉트 외에는 너무 많이 바뀌기 때문에 딱히 뭐라고 부를 말이 없다. 조각, 비디오, 페인팅, 퍼포먼스 등 여러 가지를 하니까. 누군가가 적절한 말을 찾아내서 나중에 정리를 하겠지만 지금은 뭐라고 딱 짚어서 얘기할 수 없다.
작품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천착하는 주제는 있다. 그게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뭐 하러 작업을 계속하겠나. 살면서 계속 변하고 발전시키기 때문에 주제는 있으되 문장으로 얘기하기는 좀 그렇다. 최근 3~4년 정도는 큰 주제로서 단어 하나를 잡아놓고 작업을 하고 있어 그것은 말할 수 있다. ‘Mon Grand Recit’이라는 프랑스어인데 ‘나의 거대한 서사’라고 해석이 되겠지만 굳이 해석을 하는 순간 그 의미가 사라지기에 프랑스어를 그대로 쓴다. 근대에 이루어진 유토피아에 대한 플랜들에 집중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실패했거나, 실현되지 못했거나, 시간이 지나며 변한 것들이다. 건축, 문학, 영화 등 여러 분야의 유토피아 아이디어를 개인적인 상상력으로 엮어 하나의 서사 구조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동안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작업을 한다는 평을 들었다.
매체에서 선정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그들도 실제로는 사용하면서도 어떤 뉘앙스인지 모르고 사용했을 것이다. 한 번 이름 붙여져버리면 그것이 나를 수식하는 단어가 된다. 불리는 순간 이미 불편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쓴다.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려운 것은 굉장히 어렵다. 작가들이 어려워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운 것으로 치면 다른 분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화학도 어렵지 않는가. 사실 미술은 클래식 음악보다 훨씬 덜 어렵다.
일반인이 미술에 익숙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딱히 어떤 방식이 맞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굳이 권한다면, 차이가 큰 작품들을 두루두루 많이 봤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낭만주의 작품 전시가 있으면 그것도 보고, 젊은 작가의 작품도 보고 하면 둘 사이의 차이가 크겠지만 자기가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 뭔지 알게 된다. 그 반응에 따라서 더 알기를 원하면 책자를 본다든지 하는 다음 단계로 나가게 될 것이다.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어디가 좋은지, 자기에게 맞는지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시기에 한 군데만 매진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좋다. | | |
[무용]프리마돈나 안무의 달인 함께 정상에 ‘우뚝’ |
발레리나 강수진·현대무용가 안애순, 공동 선두 |
|
|
|
|
|
|
|
무용은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어서 연륜과 신체적인 조건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30대에서 40대 사이의 비교적 젊은 층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시사저널>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영향력 있는 50세 미만의 차세대 인물’에서도 눈에 띄는 젊은 무용인들이 많았다. 다만, 이런 현상은 장르의 특성상 한국무용보다는 발레나 현대무용에서 두드러진다.
50세 미만의 차세대 인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은 무용인은 발레리나 강수진씨와 현대무용가 안애순씨이다. 둘 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이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서 무용의 저변을 넓혀왔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최초 동양인 단원인 강수진씨는 무대에서 직접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발레리나로서, 안애순무용단의 안애순씨는 아름다움을 엮어내는 안무가로서 각자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왔다.
발레리나 강수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진 것은 CF에서 ‘울퉁불퉁한 발’로 화제를 모으면서부터이다. 그동안 발레리나 강수진을 몰랐던 국민도 발레를 향한 그녀의 열정과 노력에 감명받았다. 실제 그녀는 상상을 초월한 노력과 끈기로 동양인 최초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했고, 세계적인 콩쿠르에 연달아 입상하며 무용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문훈숙·최태지 단장은 3, 4위에
하지만 우아하고 환상적인 발레 연기로 찬사를 받는 강수진도 40세가 넘으면서 ‘현역’ 무용가에서 은퇴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11월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위해 내한했을 때 “나이가 나이이기에 마지막 줄리엣 연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강수진은 독일에서 발레를 해왔고 한국에서는 간혹 공연만 하고 떠났다. 한국에 영향력이 있다기보다는 단지 유명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강수진 때문에 대중이 발레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한국 발레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은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과 국립발레단을 이끄는 최태지 단장이다. 왕년의 ‘스타 발레리나’들이 한국 발레계의 양대 산맥을 하나씩 맡아 책임지고 있다.
현대무용 안무가 중에는 댄스시어터 온의 홍승엽 단장과 도발적인 무용으로 유명한 안은미씨가 영향력 있는 차세대 인물 10위 안에 선정되었다. 둘은 안무 역량이나 인지도 면에서 안애순씨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사람의 평이다. 20위권 안에는 학계의 인물들이 많았다. 국민대 문영 교수, 우석대 양순희 교수, 신라대 정신혜 교수, 한양대 손관중 교수, 안동대 정숙희 교수, 강원대 조성희 교수, 상명대 박재근 교수, 동덕여대 김순정 교수 등이 영향력 있는 차세대 인물로 지목되었다.
"휴머니즘 담긴 시대의 몸짓 펼치겠다" |
현대무용 안무가 안애순씨 인터뷰
|
|
|
ⓒ그림 최익견 |
가장 영향력 있는 차세대 인물로 뽑혔다. 소감은?
20년 넘게 한국의 정체성, 역사, 문화를 대변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난해한 현대무용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이 점을 인정해준 것 같다.
외국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현대무용가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20대 중반 무렵, 스스로 작가로서의 확신을 얻고, 내 이름을 무용계에 각인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유학을 미루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린 나이에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다면 온전한 나만의 움직임이나 정체성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발레와 같이 순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작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는 내면에서 자유와 휴머니즘을 열망하지 않는가. 나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런 플롯을 만들어야 하며, 그 역할을 예술이 해야 한다고 믿는다.
안무를 만들 때 관심이 가는 주제들이 있다면.
한국의 문화적·사회적·역사적인 충돌이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에 관심이 많다.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오는 문화적 혼란과 갈등의 문제, 집단에 다양한 개인성이 매몰되는 문제 등이다.
2006년 한국뮤지컬대상 안무가상을 수상했다. 순수 무용으로 사회문제를 폭로하던 평소 안애순의 안무 경향을 고려할 때 조금 의외이다.
대중들이 많이 보는 <대장금> <바람의 나라>와 같은 창작 뮤지컬의 안무는 의무감을 가지고 담당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순수 예술은 대중과 가깝지 않다. 순수 무용은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실 같은 영역이다. 그렇게 순수 무용에서 찾은 근원적인 움직임이나 안무 스타일이 고립되지 않고 대중들과 만나려면 뮤지컬과 같은 문화 상품이 필요하다.
앞으로 활동 계획과 목표가 있다면?
다수의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개인의 문제를 다룬 <백색소음>이라는 작품에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2010년부터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공연한다. 내년 6월에는 LG아트센터에서 창작 안무를 선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무용이라는 한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분야의 작가들과 공동 작업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작가들을 찾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귀와 눈과 감각이 충족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 | |
[패션]상큼한 그녀의 ‘위풍당당’ 워킹 누가 막으랴 |
가수 겸업 패션모델 장윤주 ‘독주’ |
|
|
|
패션모델 장윤주씨의 독주가 여전하다. 장씨는 이 분야 ‘가장 영향력 있는 50세 미만의 차세대 인물’에서 1위를 차지했다. 패션모델의 정년은 보통 25세인데, 장윤주의 올해 나이는 29세이다. 숫자로 보면 정년을 지나도 한참 지났다. 그런데도 그녀의 아성은 더욱 단단하고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장씨는 최근 어릴 적부터 품어오던 가수의 꿈을 이루었다. 첫 번째 정규앨범 <드림>(Dream)을 발매하고 모델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장윤주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열여덟 살에 모델에 데뷔했다. 올해로 벌써 11년차이다. 장씨의 애칭은 애니메이션 뮬란의 여주인공인 ‘뮬란’이다. 죽 찢어진 눈이 영락없이 뮬란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키가 1백73cm이지만 모델이 되기에는 작은 키이다.
한마디로 키도 작고 못생겼다. 그런데도 국내 모델계의 최정상에 올랐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장씨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최정상 모델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단점을 개성으로 차별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장점은 최대로 살렸다. 모델계에서는 ‘장윤주스럽다’는 아이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모델 변정수·디자이너 정욱준 공동 2위
|
|
|
|
차세대 인물 2위는 모델이자 탤런트인 변정수씨(34)와 디자이너 정욱준씨(42)가 차지했다. 변정수씨의 인기는 30대 중반에 들어서도 식을 줄을 모른다. 오히려 ‘아줌마’라는 이미지를 잘 살려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변씨는 평소 ‘S라인’을 뽐내다가 임신 후에는 ‘D라인’을 뽐내며 공식 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래서 변정수씨에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워킹맘’이다.
디자이너 정욱준씨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손꼽히고 있다. 정씨는 지난 1991년 에스모드 서울을 졸업하고 쉬퐁, 클럽모나코, 닉스의 디자이너를 거쳤다. 1999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론 커스텀(Lone Costume)을 론칭했다. 지난 2000년부터 서울컬렉션에 참가하는 동시에 영화 의상과 호텔 유니폼 디자인에도 관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해왔다.
지난해 6월, 준지(Juun.J)라는 이름으로 파리 컬렉션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고, 올해 파리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인으로 주목받았다.
|
|
|
|
4위에는 디자이너 손정완(49), 강진영(45), 두리정(35)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디자이너 손정완씨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패션 디자인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숙명여대 산업공예학과를 다니면서 패션 디자인 학원을 다녔다. 그가 본격적으로 디자이너의 길을 걸은 것은 1987년이다. 그의 이름을 딴 ‘손정완 부티크’를 열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손정완씨가 만든 옷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누구나 한 번 입어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의 컨셉트는 로맨틱함에 트렌드를 적절히 반영한 ‘로맨틱 룩’이다. 지난 2006년 9월에는 파리에서 열리는 패션 전시회 ‘후즈 넥스트’(Who’s Next)에 초청을 받아 포르테 드 베리사이유 단독 패션쇼를 개최하기도 했다.
강진영씨는 한국인 최초로 뉴욕에 진출한 세계적인 디자이너이다. 지난 1993년 서울 강남 신사동에 ‘오브제(Obzee)’라는 이름으로 여성 의류점을 낸 후 1년만에 롯데백화점에 입점하는 성과를 올렸다. 강씨는 부부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부인 윤한희씨도 유명 디자이너이자 강씨의 파트너이다. 여성복업체 ‘오브제’로 국내에서 시장 공략에 성공한 강진영·윤한희 부부는 지난 2002년 뉴욕 컬렉션에 진출해 와이앤케이(Y&Kei), 하니 와이(Hanni Y) 등의 브랜드를 키워냈다.
재미교포 패션 디자이너 두리정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네 살 때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갔다. 지난 1995년 파슨스 디자인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의류회사인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남성 의류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러다가 미국 패션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제프리 빈에게 발탁되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의 브랜드인 ‘두리(Doo Ri)’로 옷을 만들었다. 두리정은 지난 2005년 미국의 <뉴스위크>가 선정한 ‘2006년 패션업계를 이끌 유망주’로 선정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2006년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CFDA)와 패션잡지 <보그>가 선정한 ‘유망 디자이너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 출신의 세계적 모델 혜박·디자이너 장광효 등 공동 7위
|
|
|
|
모델 혜박씨(23), 디자이너 장광효씨(48), 정구호씨(46), 송자인씨(35), 최범석씨(32)가 공동 7위이다. 혜박씨(한국 이름 박혜림)는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톱모델이다. 지난 2005년 모델계에 데뷔한 이후 동양인 모델 최초로 샤넬, 프라다 등 명품 패션쇼 무대에 섰다. 그는 지난 7월 세계 패션모델 랭킹을 소개하는 사이트 모델스닷컴의 ‘여자 모델 톱 50’에서 전세계 18위에 올랐으며, 아시아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국내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불리는 사람이 장광효씨이다. 그는 1987년 서울 압구정동에 남성복 브랜드 ‘카루소’를 열었다. 1994년 국내 최초로 파리 국제 남성기성복전시회(SEAM)에 참가하면서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지난 2007년 한국 섬유패션 대상을 수상했다.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씨는 제일모직 여성사업부 상무이다. 그는 미국 휴스턴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각각 전공했다. 지난 2005년 아시아패션연합 한국협회 디자인 디렉터상을 수상했으며, 지난 6월에 열린 제45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의상상(황진이)을 받았다. 영화 <정사> <스캔들> <텔미썸딩> 등의 아트디렉터를 맡기도 했다.
디자이너 송자인씨는 이화여대 조소과를 전공했다. 디자이너로 본격 데뷔한 것은 지난 2004년 봄에 개최된 스파컬렉션을 통해서이다. 송씨는 같은 해 자신의 이름을 딴 개인 브랜드 ‘자인 바이 자인 송’을 출시했다. 송씨의 어머니는 유명 디자이너인 김동순씨이다.
동대문 출신 고졸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최범석씨에게 따라 붙는 수식어이다. 최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대문시장에서 원단을 나르면서 옷을 팔았다. 그는 지난 2003년 서울컬렉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동대문 브랜드는 ‘Mu(무)’였다. 그 후 ‘빨간색의 고흐’를 메인 이미지로 한 남성복 브랜드 ‘제너럴 아이디어’를 설립했고, 3년 만에 파리 쁘랭땅 백화점 등에 진출했다.
이밖에 10위권 밖에는 방송인 장윤정씨, 모델 박둘선씨, 모델 이선진씨, 슈퍼모델 김소연씨, 모델이자 영화배우 강동원·권상우 씨, 디자이너 이상봉씨, 모델이자 가수인 이효리씨, 가수 비, 모델 최지호씨, 스타일리스트 김성일씨, 간호섭 홍익대 교수, 디자이너 서상영·노승은·김성민·조용현 씨, 모델 한혜진·최진희 씨, 디자이너 박윤정·박윤수 씨, 권영아 신라대 교수 등이 뒤를 이었다.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즐겁다" |
장윤주씨 인터뷰
|
|
|
▲ 장윤주 ㅣ 패션 모델. 개성있는 외모와 끼로 모델계의 최정상을 지켜왔고, 최근 가수로 데뷔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림 최익견 |
톱모델 장윤주씨(29)는 역시 바빴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인터뷰 일정을 잡아놓고도 몇 번이나 변경한 끝에 지난 12월9일 오후에 겨우 만났다. 장윤주씨를 만난 곳은 서울 압구정동의 한 미용실. 그녀는 저녁에 잡혀 있는 행사에 나가기 위해 메이크업을 하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최근 앨범을 냈는데, 반응은 어떤가?
괜찮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정규 앨범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과감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앨범까지 냈다. 평론가들의 평도 나쁘지 않다. 판매율도 만족스럽다.
이번 앨범의 가사를 직접 썼다. 평소에도 글을 자주 쓰는 편인가?
일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언제 글을 써야겠다고 정해놓지도 않는다. 다만, 틈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끄적끄적 하는 편이다.
원래부터 가수에 대한 꿈이 있었나?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나름으로 소질도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음악을 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스물두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한 곡 한 곡을 써봤다. 앨범을 낼 때까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했다.
올해 코리아 베스트 드레서로 뽑혔다. 평소 옷 입는 스타일이 궁금하다.
평소에는 옷을 자연스럽게 입는 편이다. 액세서리로 치장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내추럴하고 편하게 입는다. 명품 옷과 국내 브랜드를 잘 조화해서 입는다. 공식 자리에서는 코디의 조언에 따라 입지만 내 생각도 반영한다.
장윤주씨를 일컬어 ‘신이 내린 몸매’라고 한다. 평소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누구든지 자기 몸매에 100%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비교적 내 몸매에 만족하는 편이다. 요즘에는 관리를 잘 못해서 살이 많이 쪘다. 몸매 관리를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다. 운동하려면 시간도 있어야 하고 즐기면서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먹는 것 조절이 가장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얼굴을 고친 곳이 있는가?
전혀 없다. 부모님이 만들어준 얼굴 그대로이다.
주량은 얼마 정도인가?
맥주 한두 잔 정도를 마시는 것 같다.
결혼은 언제쯤 생각하고 있나?
30대에는 결혼을 하려고 한다. 나도 벌써 나이가 서른을 앞에 두고 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제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 이상형은 몸과 정신이 건강한 남자이다. 생각하는 것도 마음가짐도 건강한 남자가 좋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선후배 중에서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최미애 선배이다. 현재 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고 있는데 여전히 멋진 삶을 살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부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베풀면서 산다. 주변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존경심이 우러난다.
연예인 중에 친한 사람은 누구인가?
홍진경씨와 친하다.
성격은 어떤가?
다양하다. 침착할 때는 침착하고 지나치게 감성이 풍부할 때도 있다. 어떤 때는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하다. 드라마나 영화를 해볼 생각은 없나?
그럴 생각은 없다. 지금은 모델 일을 하면서 음악에 전념하고 싶다. 음악은 나의 또 다른 시작이다. 앞으로 앨범을 내면서 내 능력을 다해서 성공하고 싶다.
자신의 경쟁력이나 장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이나 재능을 표현하는 데 굉장히 자연스럽다. 장르가 달라도 ‘장윤주스럽다’라고 할 정도로 표현이 매끄럽다. 나만의 개성 있는 표현, 이런 것이 경쟁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 | |
[정보기술]“벤처 성공 모델 만들겠다” |
안철수 의장 인터뷰 |
|
|
|
|
|
|
▲ 안철수 ㅣ 소프트웨어 업체 CEO에서 최근 교수로 변신했다. 현재 카이스트에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고 있다.
ⓒ그림 최익견 | 지난 2005년 안철수 연구소 CEO에서 물러나 유학을 떠났다.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나에게 가장 편한 일은 안철수연구소의 CEO이다. 백신 엔진 개발 및 회사 설립 때부터 최근까지 적지 않은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이제는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유학을 결심했다.
최근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벤처 캐피탈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최근 들어 기업들이 창업을 꺼리고 있다. 돈을 쌓아놓으면서도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런 퇴행적 현상들이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경제를 활활 살려놓는 데는 벤처 캐피탈리스트가 제격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공부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들을 많이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한국 학생들은 공부를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받는다. MIT 등과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부분에서 외국 학생들과 차이가 났다. ‘How’만 생각하다 보니 근본적인 부분을 다루는 데 소홀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수직을 승낙했다.
‘기업가 정신’이라는 과목은 생소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목인가?
흔히들 기업가라고 하면 ‘비즈니스맨’으로 착각을 한다. 기업가의 ‘기’를 한자로 쓰면 ‘企’(바랄 기)와 ‘起’(일으킬 기) 등으로 나뉜다. 일본의 경우 후자인 일으킬 기로 번역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원뜻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비즈니스맨으로 인식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후자이다. 창조적인 기업인을 양산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보면 된다.
어려움은 없나?
솔직히 어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전혀 생소한 분야를 가르치다 보니 하나에서 열까지 새로 수업 자료를 마련해야 한다. 수업도 특정 주제를 놓고 토론 형식으로 진행하는 탓에 학생들에게 벅찬 감이 있지만 서로 노력해서 이겨낼 것이다.
향후 계획은?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지 벌써 한 학기가 다 되어간다. 방학이 되면 우선 책 쓰는데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그동안 바빠서 전혀 작업을 하지 못했다. 중·장기적으로는 한국과 미국 벤처의 연결 고리를 만들 예정이다. 미국 유학 중에 의미 있었던 것을 꼽으라면 벤처 인맥이다. 이들을 활용해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아직 공개할 수는 없지만, 현재 몇 가지 모델을 만들어두었다. 내년 1월 미국에 가서 최종적으로 한 가지를 선택할 계획이다.
최근 글로벌 금융 위기로 국내 기업들의 어려움이 많다.
위기는 항상 있었다. 이 위기를 잘 넘기면 또 다른 호황기를 맞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정말로 중요한 시기는 위기일 때이다. 호황기에 조금 더 잘되는 것은 의미 없다. 오히려 침체기 때 못하면 망가지게 된다. 국운이나 인생이 모두 그렇다.
위기를 겪는 사람이나 기업에 할 말이 있다면.
위기 때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편법보다는 정공법을 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단기적 편법에 매달리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경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위기에 놓여 있을 때 호황기에서 찾지 못했던 문제들을 고쳐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라고 본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고 비관하면 유혹에 빠지기 쉽고, 문제를 고칠 힘도 안 난다. 지금은 힘들지만 잘된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