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국민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만 골라서 한 가장 정치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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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를 ‘철녀(鐵女)’라고 하니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그러나 철녀는 단지 겉만 강한 게 아니라 속까지 강한 여자를 말한다. 진정한 철녀는 남자처럼 공격적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여성만이 갖고 있는 모성적, 여성적 감수성으로 이 시대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배려의 미학’을 통해 사람들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진정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이란 무엇일까? 필자는 최근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생애를 되짚으며 ‘섬김의 리더십’ 차원에서 그녀의 생전 행동을 진심, 소통, 경청, 연민, 신념이라는 코드로 나눠 짚어봤다.
‘진심으로 대하면 안 될 일이 없다’
일본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엔도 슈사코는 저서 ‘삶을 사랑하는 법’에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여자의 미소’”라고 했다. 유학차 프랑스에 처음 갔을 때 하숙집 아주머니 미소가 그런 것이었다면서 새삼 ‘여자의 미소가 갖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가 아이를 바라보며 짓는 미소에 ‘이렇게 너를 지켜주고 있잖아. 괜찮아, 아가야’라는 마음이 담겨 있듯 미소는 타인을 관대하게 포용하는 제일 좋은 메시지라는 것이다.
필자는 생전 육영수 여사의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엔도 슈사코의 말을 떠올렸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온화함을 잃지 않았던 여사의 미소에는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미소가 가능했을까. 그 힘의 원천은 여사가 타인과의 소통 원칙으로 간직했던 것, 바로 ‘진심(眞心)’이었다. 여사는 평생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신념은 5·16군사정변 후 그가 남편이 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날아들기 시작한 각종 민원을 해결하면서부터 진가를 발휘했다.
남편이 정치인이 되었다고 아내까지 정치인이 되는 것은 여사가 희망했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 같이 어렵고 못살던 그 시절에는 행정의 손이 미처 닿지 않는 그늘이 너무 많았고, 참다못한 민초(民草)들은 최고 권력자의 안주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내면서도 여사가 읽어주기나 할까 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뜻밖에 진심 어린 반응과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는 소통방식에 놀랐다.
첫 편지
5·16 이후 여사의 뒤에는 따로 공보관이나 대변인이 없었지만 그녀의 이름은 입소문을 통해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된 해 무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여사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절도죄로 대전교도소에서 형을 치르고 나온 전과범이 보낸 것이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는 모범수로 뽑힐 정도로 건전한 생활을 하면서 사회로 나가서는 어떻게든 죄짓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막상 나오고 보니 일자리도 없고 장사할 밑천도 없고 해서 막막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부디 손수레 하나만 사주시면 고맙겠다는 생각이 들어 편지를 드린다”고 했다.
처음 받아보는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편지였다. 더구나 신원 불명의 전과자가 보낸 것이니 무시해도 좋을 편지였다. 그러나 여사는 비서를 통해 사실 확인을 했다. 신원조회를 해보니 거짓이 아니라는 연락이 왔다.
여사는 편지를 보낸 사람을 의장 공관으로 오게 했다. 시장통이나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에게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손수레가 있다면 무슨 장사를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 남자가 ‘포도를 팔고 싶다’고 하자 한 관에 얼마에 사와 팔 때는 얼마에 팔겠는지, 수익은 얼마를 낼 수 있는지도 물었다. 평범한 대화였지만 세심하게 이 사람이 과연 도와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탐색하는 절차를 거친 것이다. 여사는 대화를 마치고 그에게 봉투 2개를 건넸다. 하나에는 손수레 한 대 값과 포도 10관을 살 수 있는 돈을 넣었다. 다른 하나에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데 든 왕복여비, 점심 값, 약간의 여비를 넣었다. 여사는 이런 명목들을 죽 적은 종이까지 봉투에 넣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으니 부디 열심히 해 성공하세요.” 이것이 육 여사가 민원을 처리한 첫 사례였다. 처음 가본 ‘가난’의 현장 어느 날 여사는 신문 사회면에 실린 짤막한 기사 하나를 보았다. 이촌동 판자촌에 사는 박옥순(24)이라는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미역국은 고사하고 쌀이 없어서 젖먹이와 함께 굶어 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여사는 미역과 고기, 산모가 입을 옷, 아기 배내옷, 내복, 이불 한 채, 쌀 한 가마니를 사 박 여인의 주소지를 찾아 나섰다. 판자촌은 한강변에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부터 악취가 진동하는 동네였다. 소변을 골목에서 해결하는지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수도는 물론 하수도 시설도 없어 골목은 생활폐수를 버린 오물로 넘쳐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는가 싶어 여사는 충격을 받았다. 도무지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허가촌이라 번지도 없이 마을 전체가 뭉뚱그려 한 번지였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 아기 낳은 집이 어디인지 물었지만 허사였다. 더욱 놀란 것은 육 여사가 만난 사람들 모두가 퀭한 눈빛과 허기진 낯빛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동행한 기사를 불러 집을 찾았다. 거적때기로 만든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몸이 퉁퉁 부은 산모와 탈수가 된 듯 쪼글쪼글한 어린 생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제 밥을 해먹었는지 솥이고 냄비고 음식찌꺼기가 바싹 말라 있었다. 물도 없고 불도 없었다. 기사를 시켜 물과 연탄을 사온 육 여사는 부엌으로 가 밥과 국을 끓였다. 산모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육 여사의 두 손을 잡으며 하염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영부인이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직접 찾아다닌다는 게 입소문으로 번지자 각종 편지가 줄을 이었다. 어느 날은 대통령 내외의 호주 뉴질랜드 순방 소식을 라디오로 전해들은 경남 밀양의 한 노인이 ‘둘째아들이 뉴질랜드에서 목축 질병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직접 만나 격려를 해주시면 큰 힘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사는 실제로 청년을 수소문해 만나 어머니의 마음을 전해주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배워서 할 생각을 하셔야지요” 그렇다고 육여사가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돕는 식은 아니었다. 도움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고, 무엇보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데 주력했다.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낚는 법’을 가르치려고 애쓴 것이다. 어느 날은 삼양동 판자촌을 찾았다. 수도도 급하고 변소도 부족했고 지붕에 플라스틱도 얹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국수기계를 사드릴 테니 국수공장을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정부에서도 분식을 장려하고 사람들도 한 끼 정도는 분식을 하고 있으니 수요(需要)가 있잖아요. 10가구나 20가구가 조합을 만들어보세요. 우선 국수틀 2대와 밀가루 20포를 밑천삼아 시작해보세요.” 당장 국수틀과 밀가루가 생긴다 하니 해보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육 여사는 “조합이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하곤 기다렸다. 며칠 뒤 20대 청년 7명이 조합을 구성했으며 공장자리도 물색해놓았다는 답이 왔다. 여사는 꼼꼼하게 이들의 의지를 테스트하는 면접을 한 뒤 확신이 서자 비서를 시켜 공장건물까지 확인한 후 약속대로 국수틀과 밀가루를 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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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방동 상이용사 재활촌을 도운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 처음에 새(鳥)집 만드는 일을 권했다. 국립묘지를 비롯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원에서 새집걸기 운동을 벌여 상이용사들이 만든 새집을 소비시켜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사업이 되지 못해 실패했다. 그 후 노끈 짜는 기계도 사주고 목공예 기계도 사줬지만 판매망을 구축하지 못해 또 실패했다. 여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궁리 끝에 양말 짜는 일을 생각해냈다. 기계 15대를 사주고 양말을 짜게 한 후 전량 국방부에서 구입해 일선장병에게 보급하도록 했다. 국방부도 싼값에 양말을 공급받게 돼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생전에 여사는 “성의 없는 봉사나 구제는 상대에게 혐오 열등의식 의타심을 길러주어 도와주지 않느니만 못하다. 단지 베푸는 것만으론 봉사와 사랑이 아니다. 진심으로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촌동 판자촌의 비참한 실상을 잊지 않고 있던 여사는 어느 날 통장과 청년 몇 사람을 모아놓고 일해볼 것을 권유했다. 영부인이 온다니 은근히 금일봉 정도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인형 만드는 일을 해보시면 어때요? 제가 아는 분 중에 인형수출 회사 사장님이 있는데 관심이 있으시면 연결해드릴게요.” “한번도 안 해본 일을 어떻게 합니까.” “배워서 할 생각을 하셔야지요. 이렇게 놀고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때 한 청년이 나섰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가는 얼굴이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길을 나서다 여사는 미리 적어온 사장의 주소가 담긴 메모지를 청년에게 건넸다. 몇 달 뒤 청년을 불러 일이 얼마나 진척되고 있는지 물었다. 청년과 대화하면서 여사는 빈민촌 사람들이 최소한 놀지 않고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수출 회사도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이 청년 같은 사람만 나온다면 안 될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젊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 주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가난을 극복할 동력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청년 지도자에 대한 아이디어는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지도자 양성 구상에 씨앗이 된다. 어느 해 여름, 호남지방에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밤잠을 설치며 초조해했고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여사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샤워도 하지 않고 지냈다. 정원 물 주는 것도 자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육 여사는 가뭄이 가장 심하다는 전남 나주로 내려갔다. 군수 부인이 “영부인께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자 “내가 어떻게 한가하게 점심을 먹겠느냐. 도시락이 있다”면서 거절했다. 그때 논바닥 양수기가 눈에 띄었다. 여사가 문득 양수기 쪽으로 가더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페달을 쉼 없이 힘주어 밟던 여사가 어느 순간 양수기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렸다. 다들 눈물바다가 되었다. 같은 해 서울은 집중 폭우로 물난리가 났다. 한강 수위가 올라가 서울 잠원동 주민 150가구가 강물을 피해 인근 초등학교로 피신했다. 육 여사는 오후 5시 뉴스에서 피난민 중에 감기환자나 배탈환자가 계속 생겨나고 있는데 의약품과 생필품이 모자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기약 설사약 영양제를 준비해 길을 나섰다. 국립묘지 근처까지 오자 한강은 거대한 바다로 변해 있었다. 어둠까지 내려앉고 있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이 들었다. 여사는 뱃사공과 배를 수소문해 강을 건너 마침내 학교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서 초조하게 창밖을 보던 사람들은 영부인이 늦은 밤에 도착하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식도 부모도 엄두를 못내는 곳에 찾아와서 구호품을 주고 물속을 첨벙첨벙 걸어가는 영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을지는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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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듣는 자세 육 여사는 용산역에 사병휴게소를 차려놓고 휴가 나온 사병들한테 라면을 끓여주는 일도 했다. 사병들에게 라면을 떠 주며 “어디서 근무했어요” “기합을 많이 받지는 않았어요” “고향은 어디예요” “부모님은 계세요” “애인은요” 하면서 살갑게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굴 한쪽에 흉터가 나 마음고생이 심했을 법한 사병에게는 성형수술을 시켜주기도 했다. 물론 여사 자신이 군인의 아내였기도 했지만 일선 사병들 사기를 북돋워주는 일에 늘 관심을 쏟았다. 추석과 연말에는 위문대를 직접 만들어 생필품을 넣어 위문품을 주었고 군부대와 군병원을 돌면서 장병들을 위문했다. 위문대를 만들 때에는 회원들과 함께 재봉틀 앞에 앉아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재봉틀 페달을 밟았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서 20년 이상을 ‘경청’에 대해 연구해온 미국의 래리 바커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 경청’이란 책에서 “잘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말을 하는 입’이 아니라 ‘말을 듣는 귀’가 모든 대화와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이런 점에서 육영수는 ‘굿 리스너(Good listener)’였다. 1973년 12월24일 성탄절 전날이었다. 3년 만에 한강이 얼어붙었다. 여사는 이런 혹독한 추위에 몸과 마음이 더 추운 불우이웃이 없나 하는 생각에 밤 8시경 영등포 근로자 합숙소를 불쑥 찾았다. 동태를 선물로 주며 내일 아침 국이라도 따뜻하게 끓여 먹으라고 했다. 미리 준비한 코트도 한 벌씩 나눠주었다. 여사가 난롯가에 그들과 함께 둘러앉자 20대 청년이 정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투가 공격적이었다. 한마디로 자기가 지금 이렇게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다 정부에서 정치를 잘못한 탓이라는 논리였다. 여사는 청년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아무리 상대방 말이 일방적이요, 과격해도 다 받아주겠다는 온화하고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청년이 분노를 다 쏟아낸 듯 말을 마치자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남이 하기 힘든 말을 해주어서 고마워요. 그러나 정부에서 하는 일이 그렇게 모두 비뚤어진 방향으로 돌아가지만은 않을 거예요. 시민들 애로가 많은 줄은 알아요. 하지만 민원창구나 정부에서 하는 일도 모두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여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청년을 포함해 9명의 근로자를 청와대로 불러 점심을 대접했다. 메밀가루로 만든 만둣국이었다. 여사는 특별히 그 청년을 불러 간밤에 그가 늘어놓았던 불평들에 대해 자기가 더 알아보았다며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그 자리에는 서울시장도 있었는데 여사는 청년이 할 만한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단순한 일자리 부탁이 아니라 불만으로 가득한 그가 공무원들의 고충을 이해하도록 직접 경험시켜줄 기회가 없겠느냐는 말이었다. 그 청년은 서울시 임시직원으로 채용되어 구청 민원 봉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자기가 편견과 독단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여사에게 토로한다. 여사는 모두들 그 청년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잊어갈 무렵인, 정확하게 3개월 후 다시 비서를 불러 아직도 그 청년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챙겼다고 한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영부인의 이런 독단적(?) 일처리를 감히 생각지 못할 일이라고 하겠지만 우리가 새겨야 할 대목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억지 같은 말이라도 국민의 말을 진심으로 듣겠다는 육 여사의 마음가짐, 그리고 사람을 한번 보살피면 끝까지 책임지는 육 여사의 치밀함이다. 나 혼자 잘살아서는 안 된다 늘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는 육여사의 이런 마음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었던 감정은 ‘연민’이었다. 연민이라는 낱말은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하고, 느낌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이기심은 커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줄어든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연민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보정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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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는 ‘가난’을 모르고 자랐다. 충북 옥천 갑부의 둘째딸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여사의 아버지는 미곡상 금광 인삼가공업 등 당시로서는 뉴 비즈니스 사업에 뛰어든 벤처 사업가였다. 옥천군에서 가장 먼저 닛산 화물자동차를 소유했으며 그 시절에 무비 카메라까지 갖고 있었다. 라디오 영사기 자전거 발전기 등 신(新)문물에 관심이 많아 일본 전기회사가 옥천역 구내에만 전기를 가설하고 마을에는 전기를 공급하지 않자 오사카에 있는 기계 제작소 일본인 사장을 불러 자체 수력 발전소 건설을 계획할 정도였다. 여사는 이런 아버지 밑에서 꼼꼼하게 아버지 재산을 정리하고 살림하는 일을 맡으면서 세상물정을 익혔다. 하지만 수학여행도 못 가게 하고 여자가 시집이나 잘가면 됐지 배울 필요가 없다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고교 졸업 후 전문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결혼해서는 철저하게 남편 수입에 맞는 생활을 했다. 1950년 말 결혼 이후 1958년 박정희 대통령이 소장으로 진급하기 전까지 전셋집을 전전했고 의식주가 어려운 때도 있었다. 가난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잘나가는 군인의 아내였으니 중류가정의 살림은 됐다고 봐야 한다. 그러던 그가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의 절규에 귀가 열리게 된 것은 최고회의 의장 부인이 되고나서였다.
남편을 도우려 신문을 열심히 읽다가 사회면에 실린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알게 됐고 앞서 소개한 민원편지처럼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민초들을 만나면서 가난에 고통 받는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됐다. 그러면서 ‘가난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가난은 가난하다는 그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은 물론 미래에 대한 꿈, 설계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끼니걱정을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여사는 이런 가난과 접하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아서는 안 된다는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육 여사가 1971년 12월29일 날품팔이 근로자들이 30원을 내고 하룻밤을 유숙하는 동대문 근로자합숙소를 방문했을 때 적은 소감문에는 이런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이곳에 있는) 실업자들을 보며 그들이 하루아침에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정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반겨주는 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식당 난롯불을 가운데 끼고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제쳐놓고 건강한 미소와 순수한 정신을 내게 보여준다. 떠날 때 자주 오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돈다. 나는 비록 그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아무런 권한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뜻을 열심히 들어보고 성의껏 그 뜻을 대통령께 전달하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의무에 앞서 커다란 보람이다.” 남을 반성하게 하는 힘 여사의 행동은 단지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바쁜 공식 행사 중에도 짬을 내어 판자촌을 돌아다니고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민원편지를 읽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 안간힘을 쓴 것은 끼니걱정, 땔감걱정을 하는 국민이 있다면 ‘남편의 혁명’이 실패한 것이 되고 만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육 여사는 국가와 가정의 논리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았던 산동네 판자촌마을과 후진국 한국이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다. 식구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판자촌 가장(家長)이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결국 가장들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느덧 종업원 120명을 거느린 회사 사장이 된 이촌동 청년이나 동네국수 공장장으로 성공한 삼양동 청년처럼 일할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 가족은 자연스럽게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남편 박정희가 혁명을 한 이유였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사는 더구나 현장의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남편이 판단하고 선택한 일이 옳다는 절대적인 신뢰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각료부인들까지 한마음으로 묶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양지(陽地)회다. 그늘진 곳을 따뜻하게 비추는 햇볕, 자신 같은 상류층이 쬐고 있는 햇볕을 조금이라도 넓게 펴자는 뜻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자 한국 부유층 기부의 출발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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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여성들을 지속적으로 돕는다는 취지로 양지회관도 만들었다. 회원들이 모은 200만원 정도를 기금으로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에다 203평 대지에 연건평 275평 회관을 건립한 것이다. 200여 명의 여성이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편물 양재 미용 등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주부들이 교양을 높일 수 있도록 강의실 도서실도 만들었으며 요식업 종사자, 버스 안내양들도 교육받게 했다. 무료진료소를 지어 난민촌 사람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여사는 일반 회원들과 똑같이 3인1조가 되어 진료소를 돌며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여사가 손을 대면 상처가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환자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 당시 양지회 활동에 참여한 한 회원의 말이다. “가까이 있으면 누구나 결점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육 여사는 보면 볼수록 존경심이 깊어지게 하는 분이었다. 여사는 ‘남을 반성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동행’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낸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책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편의 평생 정적(政敵)이었음에도 부인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만큼은 후한 평가를 내려 눈길을 끌었다. 육 여사 생전에 세 차례 만났다는 이 여사는 “육 여사는 따뜻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편의 독재를 많이 염려한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속의 야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루에도 10여통씩 민원 편지가 폭주하자 비서실에서 검열을 했다. 육 여사는 이를 알고 검열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국민의 소리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생전 육영수가 양지회 회원들에게 했던 말 중한 대목이다. “혁명한 사람의 아내가 국민과의 대화를 막아버리면 혁명정신이 무색하지 않습니까. 박 장군이 주도하여 이룩한 혁명은 어느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라 국민의 총의를 대신하여 이룬 것이니 혁명가의 아내는 국민과의 대화 통로를 폭넓게 마련하여 의사를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절차에 구애되지 않고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겠지요.” 여사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날아오는 편지를 ‘그냥 답장만 해도 무방한 것’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 세 가지로 나눈 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비서나 소속 행정기관에 연락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한 후 정성을 다해 매듭지어주었다. 자기 선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민원인이 이해할 수 있게 알려주었다. 또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공익(公益)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이 있으면 대통령에게 보고해 힘을 빌리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다. 여사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2시간 이상씩 서재에 틀어박혀 답장을 썼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그것도 바쁜 일정을 쪼개 힘들고 괴로운 내용을 붙들고 일일이 답장을 쓴다는 것은 보통 정신이 아니고선 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서식이 일정한 사무적인 것도 아닌,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 있는 글들에 대한 회신을 하루에도 10여 통씩 줄기차게 쓴다는 것은 끈질긴 성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한 해에 처리한 서신이 5000여 건 가까이 된다. 이런 간접 소통 외에 여사는 직접 소통에도 열심이었다. 육 여사 하면 나환자 돌보기 사업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나환자와 악수하면서 미소 짓던 육 여사를 기억한다. 여사가 나환자한테 관심을 가지게 된 때는 1965년 봄이었다. 식목일이 다가오자 몸은 비록 불편하나 꽃을 보며 마음을 환하게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꽃씨상자를 나환자 마을에 보내준 것이다. 그 후 일반 목욕탕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공중목욕탕을 지어주었고 나환자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왔다. 한번은 나환자를 부모로 둔 아이들이 정상아를 둔 학부형들의 집단행동으로 초등학교 입학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이 100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아들 지만 군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일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여사는 어느 날 비서 한 사람만 데리고 경기도 양주군 나환자촌을 찾았다. 얼굴은 찌그러져 있고 호미를 들고 있는 손도 마디가 떨어져 나간 흉측한 몰골이었지만 육 여사는 그들을 만지고 안는 데 개의치 않았다. 여사는 코를 흘리고 있는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리며 직접 손수건으로 코를닦아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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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드링크 한 병을 들고 여사 앞에 놓더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하는 양이 어른들이 미리 연습을 시킨 것 같았다. 여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건 서울 가는 차안에서 마실 테니 냉수를 한 그릇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맛있게 마셨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한켠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자기들을 벌레 대하듯 하며 얼굴을 보기도 싫어하고 심지어 감염도 안 된 아이들과 자기 아이들을 한 공간에서 공부시키기 싫다며 초등학교 입학도 반대하는 게 사회 사람들의 정서 아닌가.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런데 영부인인 그가 자기들과 악수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들이 사용하는 그릇에 담긴 물까지 맛있게 마시고 물론 뭉개진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1974년 8월15일 육 여사의 사망이 박정희를 고독하게 만들어 유신체제를 약화시키는 데 결정타가 됐다는 증언과 주장은 많다. 실제로 육 여사는 박정희 삶에 결정적이고 절대적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애초부터 세속적인 가치와는 다른 것이었다. 박정희는 육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씨 말대로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는’군인이었을 뿐이고 육 여사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으며 게다가 이혼남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만남은 전쟁 중, 그것도 국군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1950년 8월 하순 부산에서 시작됐다.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가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육 여사는 개의치 않았다. 요절한 정치학자 전인권씨는 인간 박정희를 심리학적 상상력으로 복원해 평전을 낸 바 있다. 평전에서 그는 “육영수는 심리적 고아였던 박정희에게 새로운 인식을 제공했고 사실 육영수야말로 박정희를 정치적 리더로 만든 진정한 장본인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육 여사가 순종적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박정희가 육 여사에 의존했다고 봐야 한다.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귀국하던 박정희 당시 준장은 1954년 6월 배 위에서 이런 일기를 쓴다.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이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 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이 글에서처럼 박정희는 아내를 어머니처럼, 여신(女神)처럼 대했다. 육 여사는 내조의 정신적 방향이나 임무를 세 가지 면으로 요약해 지켜가려 노력했다고 한다. 첫째, 가정에 근심을 덜어줌으로써 남편에게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정신적 안정을 주어야 한다. 둘째, 남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을 아내가 협조한다. 셋째, 남편의 건강을 살핀다. 이런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이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시골에서 남편 아이들과 함께 단란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음은 자연스럽다. 여사는 삼선(三選)개헌을 묻는 국민투표를 앞둔 1969년 10월14일 국민투표에 대한 감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감상이랄 게 뭐 있겠어요. 만약의 경우 나야 보따리 싸가지고 훌훌 나가서 가족들과 알뜰하게 살면 그만이지요” 라고 했다. 여사는 생전에 “앞으로 언젠가 이 자리를 물러나게 되면 그때는 진정 즐거움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동족이 쏜 총탄에 맞아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육영수 신화 소설가 남지심씨는 육영수 여사 평전 ‘자비의 향기’서문에서 2006년 8월15일 열린 육영수 여사 32주기 추모식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다. 남씨가 놀란 것은 추모객들 중에 과거 박 대통령과 함께 국정에 참여했거나 현재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100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2000여 명이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폭염이 내리쬐는 공휴일 아침에 30여 년 전에 이 땅을 떠난 영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다. 남씨는 “부모가 자식 곁을 떠나고 자식이 부모 곁을 떠나도 모든 것을 잊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피를 나누고 목숨을 나눈 사람도 잊고 사는 세태인데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에 있었던 영부인을 매년 잊지 않고 찾게 하는 힘인가”라고 묻는다.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어도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사람들로 문턱이 닳는 게 권력이다. 그러나 육 여사 추모행렬은 비정하고 허망한 권력의 속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남씨 말대로 참으로 ‘불가사의한 힘’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또 다른 평전을 쓴 작가 홍하상씨는 “육 여사야말로 국민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만 골라서 한 가장 정치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남편이 시위대를 탄압할 때 학생들을 감쌌고 남편의 정권 연장에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늘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과거는 잊히게 마련이지만 육영수 신화는 시간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다. 생전의 그녀의 삶은 진정한 여성적 리더십이란 무엇인 지를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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