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꿍놀이와 정원 가꾸기의 공통점
김정운 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 entebrust@naver.com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한국 사람이 무례하다고 한다. 지나가다 어깨를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꼭 덧붙인다. 정말 그렇다. 독일에서 13년을 살고 한국에 막 돌아왔을 때, 우리 부부도 매일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례함과 불친절함에 대해 불평했다. 힘세고 용감한 아내는 매번 쫓아가서 따졌다. 생전 처음 당하는 황당함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상대방을 돌려세우고, 씩씩거리는 아내를 끌고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을, 몸집 큰 아내가 냅다 쫓아가서 따지니 상대방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무례한 것일까? 한동안 깊이 고민했던 주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무례한 것이 아니다. 무례해 보일 뿐이다. 다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한국인의 교양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나라의 국민으로 글로벌한 매너와 규칙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조건 무례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왜 그런지를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상호작용의 원칙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의 근대화란 다양한 방식의 집단, 즉 민족, 계급, 종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나(I)’라고 하는 주체의 성립과정이다. 물론 이 집단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근대성이라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집단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적 합리성의 근거는 ‘나’라는 주체의 성립이다. ‘나’가 있어야 그에 상응하는 ‘너’라는 존재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나’와 ‘너’의 동등한 관계로서 만날 때, ‘우리(We)’가 가능해진다.
서양인은 타인의 존재는 항상 ‘나’의 상대방으로서의 ‘너’다. 동등한 주체로서의 상대방에 대한 무례함은 곧 ‘나’라는 주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곧바로 ‘날씨’이야기를 할 수 있고,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너’의 존재를 인정할 때, ‘나’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가 저서 ‘Ich und Du’에서 ‘나’라는 존재의 근거로 ‘너’와의 관계를 지적하고, ‘나’와 ‘너’의 관계를 모든 의미 구성의 기본단위로 여기는 이유도 바로 이런 문화적 맥락 때문이다.
‘우리’가 성립되는 그 순간
반면 한국인의 상호작용 양상은 사뭇 다르다. ‘나’와 ‘너’의 상호작용이 서구인들처럼 곧바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라는 상호 주체의 만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야만 가능하다. ‘남’은 상호작용의 상대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질문이 무서운 것이다. ‘남’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무시해도 된다.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타인이 일단 ‘우리’라고 하는 경계 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 ‘타인’은 더 이상 남이 아니다. 그에게 절대 무례해서는 안 된다. ‘우리’라는 경계선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상대방은 ‘너’라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나’와 ‘너’라는 주체적 상호작용은 ‘우리’가 성립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뤄진다는 이야기다.
서구인에게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성립된다면, 한국인은 ‘우리’가 먼저 만들어지고 난 후에 비로소 ‘나’와 ‘너’가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섭섭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혹은 “우리 사이에 정말 이럴 수 있는 거니?” 거기다 대고,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야기는 바로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를 깨고, 바로 ‘남’이 되자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남’이 되는 순간 어떠한 합리적 상호작용도 성립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한번 성립된 ‘우리’는 좀처럼 깨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서구인들과 달리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너’에게 ‘나’는 정말 간까지 빼줄 만큼 잘한다. ‘우리 사이’에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낯선 이를 만나 이야기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바로 이 ‘우리’라는 경계선을 만드는 일이다. 일단, 말투를 듣고는 고향을 확인한다. 같은 고향이면 간단히 ‘우리’가 된다. 고향이 다르면 다닌 학교를 확인하려 한다. 고등학교가 같으면 ‘선후배’라는 아주 끈끈한 ‘우리’가 만들어진다. 학번을 통해 같은 연배가 확인되면, 서로 알 만한 사람 이름을 댄다. 둘이 함께 알고 있는 사람이 생기면 이 또한 ‘우리’로 이어진다. 친구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확인하려 해도 확인되지 않으면 입고 있는 옷 색깔, 사는 동네, 혹은 살던 동네까지 확인하려 한다. 그만큼 ‘우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없다면 ‘나’는 존재할 수없다. 각 대학의 수많은 최고위과정의 목적은 대부분 이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에 대비해 다양한 ‘우리’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놓는것은 보험을 드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 존재의 근거다.
‘우리’안에 있어야 행복하다
독일에 유학 가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노력한 일은 독일 친구를 사귀는 일이었다. 주말만 되면 학생들끼리 모이는 이러저러한 파티에 정말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러나 ‘굿텐 탁’만 하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독일에 왔는지에 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문을 트고자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면, 남쪽이냐 북쪽이냐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무지 독일 학생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주제를 찾을 수 없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들도 그저 날씨 이야기, 정치 이야기, 연극이나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떻게 그 파티에 왔는지 서로 묻지도 않고, 기억할 필요도 없는 듯했다. 서로 모르는 이들끼리 그토록 재미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이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계속 인사말만 하다 더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썰렁해지면 뒤에서 혼자 포도주만 홀짝거렸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구경할 수 없었던 다양한 포도주를 종류별로 홀짝거리며 공짜로 마시는 재미도 사뭇 쏠쏠했다. 혼자 포도주 마시고, 혼자 취한 나는 미친 척 기타를 들고 큰소리로 노래했다. 그러면 모두들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름 연습한 독일 노래를 부르며 중간중간 ‘에브리바디’를 외치면, 그 심심한 독일친구들은 열심히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게 전부였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쓸쓸할 수 없었다. 거의 4,5시간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작 이름이나 소속 학과, 사는 동네를 제대로 알게 된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내 개인적 삶에 관해 물어온 녀석도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생소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자기들끼리도 서로 다 그랬다. 만나는 그 순간부터 ‘나’와 ‘너’가 만나 아주 쉽게 ‘우리’가 되지만, 그뿐이었다. 돌아서면 그 ‘우리’는 아주 쉽게 해체돼버렸다. 발생론적으로 서구인들의 ‘우리’와 한국인들의 ‘우리’는 이렇게 질적으로 다른 종류인 것이다.
한국인들의 언어습관 중에 가장 특이한 것이 바로 이 ‘우리’의 사용법이다. ‘우리나라’‘우리 집’등 거의 모든 언어 표현의 주체는 정체불명의 이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이다. 서구인들은 그 우리의 주체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매번 의아해 한다. ‘my country’‘my house’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그래도 봐줄 만하다. ‘우리 엄마’는 영어로 ‘our mother’가 된다. 독일 친구에게 우리는 가까운 친구이기에 형제 같은 사이다. 한국에서는 친구의 엄마는 다 자기 엄마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그 독일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참 갸우뚱거리더니 묻는다. ‘우리 와이프’는 그럼 또 뭐냐는 것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our wife’가 되는 것인데, 도대체 네 부인이 내 부인도 되는 것이냐고 짓궂은 표정으로 물어온다.
주어를 생략하는 습관은 일부 아시아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주어로 ‘내’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우리’를 넣는 이 언어 습관은 한국어에서만 유난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만들고, ‘우리’안에 있어야 행복한 까닭이다. 너와 나의 복수인 ‘우리’와 울타리를 뜻하는 ‘우리’가 같은 단어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그토록 강한 것이다.
전기충격 버튼 누르는 착한 여대생
온갖 형태로 구성되는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 근거가 된다. 한국인에게 ‘나’와 ‘우리’는 서로 대립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나’는 항상 ‘우리’라는 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바로 그 ‘우리’는 온갖 형태의 집단주의로 왜곡되고, 권력화되어간다. 자신의 정서적 위안처가 되어야 하는 진짜 ‘우리’는 해체되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가꿔온 ‘우리’의 덧없음을 느끼게 된다. 배신감까지 든다. 중년의 삶이 자주 우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원인 모를 적개심, 분노의 원인은 ‘우리’가 사라진 까닭이다.
이전 시대를 지탱해왔던 ‘우리’라는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산업사회의 공동체 구성방식으로는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존재 근거가 되었던 ‘우리’라는 그 울타리가 변형되어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의 ‘우리’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지금 그 대안적 ‘우리’가 잘 형성되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존재 확인 방식이 없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존재가 불안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분노와 적개심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적 살인사건의 원인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살인과 같은 엄청난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구체적 대상 없는 공격성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운전해보면 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쉽게 난폭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쉽게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지를. 보행자가 되면 신호등을 무시하는 운전자가 그렇게 미울 수 없다. 그러나 운전자가 되면 느릿느릿 건널목을 건너는 보행자처럼 짜증나는 경우가 없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운전자가 되기도 하고, 보행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매번 우리는 운전자일 때는 보행자에게, 보행자일 때는 운전자에게 추악한 공격성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같은 운전자끼리도 마찬가지다. 차선을 바꾸려고 깜박이를 켜면 그것을 빨리 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가속기를 밟아 내 앞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바로 막아버린다. 그 반대 처지여도 마찬가지다. 끼어들 공간이 없어도 무조건 자동차 머리부터 들이밀고 본다. 만약 그 운전자가 여자라면 우리의 공격성은 두 배로 늘어난다. 젊은 여자라면 좀 참는다. 그러나 만약 아줌마라면 가차없다. 그럴 줄 알았다며 창문까지 내리며 위협한다.
심리학 전공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짐 바르도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다. 그의 심리학개론서는 거의 모든 심리학과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아주 특이하고 무모한 실험을 했다. 사람이 익명일 때, 얼마나 무자비해지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아주 착한(?) 여대생들을 모아 두 집단으로 나눴다. 두 집단 모두 무고한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해야 하는 지시를 받았다. 한 집단의 여대생들에게는 머리에 커다란 꽃 그림이 그려진 천을 씌워 눈만 내놓게 했다. 아무도 자신이 누군지 못 알아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여대생들의 이름도 사용하지 않고, 번호로만 불렀다.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 전기충격 버튼만 누르도록 했다. 반면 다른 집단의 여대생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다 드러난 상태에서 지시에 따르도록 했다.
두 집단의 태도는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익명의 상태로 지시를 받은 여학생들은 무자비하게 전기충격 버튼을 눌러댔다. 그 대상이 무고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누를 수 있는 기회마다 오랫동안 전기충격을 가했다. 반면 다른 집단의 여학생들은 주저하며 버튼을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
주로 익명성이 가져오는 폐해를 설명할 때 이 실험 결과가 자주 인용되곤 한다. 인터넷상의 악플도 바로 이 익명성의 부작용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일면 옳다. 그러나 악플을 막겠다고 인터넷 실명제로 바꾼다고 이러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라고 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확인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우울하고, 분노하고, 적개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간지럼 태우기와 까꿍놀이
그럼 과거와는 다른, 또 다른 형태의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진정한 ‘우리’는 서로의 정서를 흉내 내며 시작된다. 인간 문화의 기원 또한 바로 이 흉내 내기에 있다. 인간의 모든 재미는 흉내에서 출발한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와 제일 먼저 하는 놀이도 흉내 내기다. 아기는 엄마의 표정을 흉내 내고, 엄마는 아기의 표정을 흉내 낸다. 사람들은 영·유아기에는 주로 아기가 엄마를 흉내 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엄마가 아기를 더 많이 흉내 낸다. 엄마가 아기의 표정 몸짓을 끊임없이 흉내 내는 과정에서 아기는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표정과 몸짓, 그리고 느낌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느낀다. 이렇게 나와는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것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부터 인간의 자의식이 생긴다.
대표적인 현상이 ‘간지럼 태우기’ 놀이다. ‘나’라는 자의식이 가능할 때만 간지럼을 느낀다. 내가 나를 아무리 간질여도간지럽지 않다. 간지럼은 반드시 남이 태워야만 느낄 수 있다. 즉, 나와 남이 다른 존재라고 의식할 때만 간지럼 태우기 놀이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간지럼 태우기는 아기의 자의식 발달을 측정하는 가장 확실한 측정도구가 된다. 아기는 엄마가 간지럼을 태우며 웃는 모습을 흉내 낸다. 엄마는 또 아기의 그 표정을 흉내 낸다. 이때 엄마와 아기는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하게 된다. 완벽한 ‘우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주체가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기원이 된다. 서로 공유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서로 공유하는 경험이 없다면 ‘내가 경험하는 세상’과 ‘남이 경험하는 세상’이 같다는 것을 도대체 누가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흉내 내기 놀이가 바로 인간 의사소통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간지럼 태우기 놀이 단계가 지나면 ‘까꿍놀이’가 시작된다. 아기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자기가 볼 때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장난감을 책으로 가리면 장난감이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눈을 가리고 ‘맹구 없다’ 하는 식이다. 이 인지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고안된 놀이가 바로 ‘까꿍놀이’다. 전 세계의 모든 인종이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놀이가 바로 이 ‘까꿍놀이’다. 이 ‘까꿍놀이’의 본질도 흉내 내기다. 자신의 시각 경험을 엄마가 흉내 내며 대신해주는 것이다. 이 놀이가 반복되다 보면 아기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눈에 안 보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피아제는 ‘대상 영속성(object permanence)’ 개념이 생겼다고 정의한다.
엄마와 함께 형성한 ‘우리’라는 울타리에 다른 사물들이 포함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이전의 장난감은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을 보조하는 기능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장난감 자체가 아이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도대체 왜 아이들은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대상세계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장난감 중에 외부의 대상을 모방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인형, 자동차 장난감, 컴퓨터게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놀이의 본질은 흉내 내기다.
의사소통은 모방으로 시작된다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상상력 또한 모방에서 출발한다. 놀이를 가능케 하는 심리학적 요소는 ‘마치 ~인 것처럼(as if)’이라고 하는 상상력이다. 그러나 이미 이야기한 대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이 바로 놀이의 심리학적 본질이다. 이렇게 모방하며 재미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인간 문명의 기원 또한 자연에 대한 흉내 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의 핵심이다. 이 현상을 가리켜 그는 ‘미메시스(mimesis)’라고 명명한다.
우리는 서로 흉내 내며 이해하기 시작한다. 내비게이션이 아직 없던 시절, 여행지에서 아내와 싸우게 되는 것은 대부분 지도 때문이다. 일일이 지도를 확인하며 운전해야 하는데, 조수석의 아내는 매번 자신 없이 방향을 가리키곤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여 물어보면 지도를 내던지고,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한다. 함께 여행을 떠나면 꼭 지도 때문에 며칠 씩씩대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아내의 그 성질머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행히 지금의 내 차에는 터치스크린의 최고급 내비게이션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 나와 아내가 같은 차를 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최악의 운전조수인 아내와 이탈리아의 산골을 여행한 적이 있다. 또 길을 잃었다. 지도를 보는 아내가 제때 방향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듯이 내가 화를 내자, 아내는 지도책을 내던졌다. 씩씩거리며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결국 우리의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차를 세웠다. 지나가는 이탈리아 사람을 세웠다. 우리가 가려던 도시이름을 대며 어떻게 가야 하는지 영어로 물어봤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은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독어로도 해봤다. 더 못 알아듣겠다는 몸짓이다.
나는 도시 이름만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도시 이름을 알아들은 그 사람은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관없이 이탈리아 말로 계속해서 뭔가를 설명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반복해서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반복해서 그의 몸짓과 하는 말을 반복해서 흉내 내다 보니,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을 서로 흉내 내며 이야기한 후, 내가 이해한 대로 운전해 가니 그 산골을 아주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지름길을 통해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단지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의사소통은 모방으로 시작한다는 통찰이다.
아주 먼 옛날,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들끼리 만났을 때, 어떻게 서로 의사소통 할 수 있었을까? 서로의 말과 몸짓, 표정을 흉내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서로를 흉내 내다보면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거기에 상대방이 하는 단어를 흉내 내 발음하다 보면 단어의 의미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의사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기가 엄마를 흉내 내고, 엄마는 아기를 흉내 내며 말을 배우는 것처럼, 모방은 모든 인간 의사소통의 기원이 된다.
“맞아, 맞아!” “그래, 그래!”
흉내를 통해 우리는 재미를 공유한다. 찜질방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아줌마들을 보라. “맞아, 맞아!”, “그래, 그래!”를 끝없이 반복하는 어투, 표정, 몸짓이 서로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다. 수다는 서로 흉내 낼 때 재미있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공주처럼 생뚱맞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 수다는 더 지속될 수 없다. 그 공주 아줌마는 그 다음 모임에는 반드시 탈락되게 되어 있다. 재미를 공유하지 않은 까닭이다. 서로 흉내 내야 한다는 ‘우리’구성의 암묵적 약속을 어겼다는 이야기다.
집단에서 왕따 되는 비결은 간단하다. 구성원들이 공유하며 반복하는 표정, 몸짓, 말투를 따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재미도 모방이다. 오래된 부부가 서로 닮아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닮아간다는 이야기다. 서로 비슷한 얼굴근육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당연히 서로 닮을 수밖에 없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이 미메시스의 원리는 개인과 개인의 상호작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먹고살 만해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정원을 가꾸는 것이다. 정원 가꾸기는 인류가 시작된 이래, 가장 중요한 여가활동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일컫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사막 한가운데 30층 높이의 피라미드형 탑 꼭대기에 만들어 온갖 꽃을 심은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바빌론에, 오늘날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물 공급 장치를 만들어 정원을 만들었던 이유는 단지 왕비가 그리워하는 고향 메디아의 꽃밭을 흉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인류 역사의 모든 왕국의 왕은 이 정원 가꾸기를 즐겼다. 전쟁을 위한 성 쌓기가 끝나면, 그 안에서 자연을 흉내 낸 정원을 가꾸며 놀았던 것이다. 자연을 흉내 내 정원을 만드는 것은 그 평화로운 자연을 흉내 내 마음의 안식을 얻겠다는 욕구의 표현이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정원에 집착하는 이유도 정원이 가지는 미메시스적 기능을 알기 때문이다. 도쿄의 구석구석에는 정말 그림 같은 정원들이 있다. 그 안의 연못가를 거닐다 보면 정말 그림 속을 걷는 기분이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일본문화에 대해 이토록 감동하고 감격해서는 안 된다는 아주 오래된 터부가 이 자연스러운 행복감을 방해한다. 아,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일본의 정원은 우리가 정말 뛰어넘기 힘든 일본의 저력이다.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일본인들은 그 정원 구석구석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그 오래된 정원의 전통이 우리에겐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흉내 낸 어설픈 시민공원이 전부다.
아내의 수줍은 미소, 아이의 꾸밈없는 몸짓
가수 남진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고 고개를 흔들며 수십년째 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이유도 이 좌절된 정원 가꾸기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남한강 일대의 그 문화사적 출처가 애매한 별장들도 이 정원 가꾸기 욕구의 변형이다. 그러나 인내와 자기성찰이 필요한 이 정원 가꾸기의 꿈을 완성시킬 만큼 끈기를 가진 이는 별로 없다. 그러니 이제까지 배워온 대로 땅값 올리기에 급급해질 따름이다. 한 번도 자연을 흉내 내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아도르노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폭력적으로 변한 이유는 주체가 객체를 지배하려는 도구적 이성 때문이라고 한다. 음악과 같이 주체와 객체의 친화적 미메시스의 회복만이 인간문명을 막다른 길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음악처럼 정원 가꾸기도 친화적 미메시스의 과정이다. 인간과 식물, 땅의 조화로운 미메시스를 통해 인간 내면이 평화스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겨왔던 이들에게 평화스러운 미메시스란 전설 속에나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토록 거칠어진 이유는 정원 가꾸기의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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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연을 모방하며 자연과 대화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몸짓, 표정을 흉내 내며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서로 소통하며 ‘나’와 ‘너’의 관계인 ‘우리’를 만든다. 재미란 이렇게 평화로운 미메시스의 과정에서 선물로 얻어지는 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삶을 원한다면 흉내를 내야 한다. 아내의 수줍은 미소를 흉내 내고, 아이의 꾸밈없는 몸짓을 흉내 내야 한다. 자연의 작은 풀잎을 모방하여, 베란다 한구석에 꽃잎이라도 자라게 해야 한다. 동네 어귀의 시멘트벽을 치우고 작은 감나무라도 자라게 해야 한다. 진짜 재미는 이렇게 얻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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