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덕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 고전소설 비평과 문학이론을 전공하였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연구생으로 수학하기도 했다. <중한사전>과 <한중사전>을 펴내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중국의 <삼국지>에 얽힌 문화 유적들을 둘러본 뒤 <삼국지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내기도 했다.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攻·守·速·遲·勇·德·剛·柔
21세기 코드로 읽는 三國志 인물학
三國志 인물학|삼국지는 어떤 책인가?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지모와 용맹으로 자웅을 겨루는 삼국지는 문학서이자 교양서, 역사서이자 처세학 교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참고서로, 기업인은 경영의 지침서로 활용한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갖가지 ‘인물론’이 쏟아진다. 이런 시점에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인품과 행적, 시대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승자와 패자를 구분지은 조건을 곱씹어보는 것은 흥미와 의미를 더할 것이다.
사내들은 흔히 제 가슴에 품은 포부를 펼쳐 보이기 위해 세상을 산다고 말한다. 그날을 위해 푸줏간 사나이의 바짓가랑이 밑을 기었던 그 옛날의 한신(韓信)처럼 험한 꼴을 보면서도 꾹 참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포부! 그것은 때로는 아름다운 청운의 꿈으로, 때로는 엄청난 대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길래 온갖 수모를 견뎌내며 그걸 펼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데에는 15세기 중국 작가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보다 더 효과적인 정보원은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나름의 포부와 능력, 자신감을 갖고 난세와 맞서려 했던 사나이들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지모와 용맹으로 자웅을 겨루는 삼국지는 문학서이자 교양서, 역사서이자 처세학 교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참고서로, 기업인은 경영의 지침서로 활용한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갖가지 ‘인물론’이 쏟아진다. 이런 시점에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인품과 행적, 시대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승자와 패자를 구분지은 조건을 곱씹어보는 것은 흥미와 의미를 더할 것이다.
나관중은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바탕 삼아 거기에다 자신의 가치관을 더하고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드라마틱한 요소까지 곁들인 얘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은 물론 세상을 사는 지혜에도 눈뜨게 만든다. 그래서 한번 책장을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한다. 이 책이 문학서이자 교양서이기도 하지만 역사서로서, 또 처세의 교본으로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한 참고서로, 기업가나 경영인은 경영철학의 지침서로도 활용한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삼국지 영웅론’ ‘삼국지 인간학’ ‘삼국지 경영학’ 같은 이름을 단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삼국지의 쓰임새는 이처럼 넓고 다양하다.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행적과 인품, 시대상황 등을 살펴봄으로써 이들 가운데 승자와 패자를 가른 조건이 무엇이었던가를 밝혀보려 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승자의 조건이 바로 천하 제패의 조건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삼국지의 무대
정공법은 下策, 꼼수는 上策?
‘삼국지연의’는 소설이긴 하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았으므로 등장인물들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먼저 그들이 살았던 공간과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역적으로는 지금의 중국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지린(吉林)성 이북과 윈난(雲南)성 이남, 신장(新疆)성 이서를 제외한 중국 전역이 된다. 시간적으로는 후한 말기에 터진 황건적의 난(184)으로부터 시작, 위(魏)·촉(蜀)·오(吳)가 정립(鼎立)한 이른바 ‘삼국시대’를 거쳐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삼국을 통일하면서 진(晉)을 건국(265)하기까지 약 1세기에 걸친다.
그렇다면 그 무대가 됐던 중국이란 어떤 곳일까. 중국은 거대한 대륙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인지라 중국인 스스로 ‘천하’라고 불렀다. ‘천하’의 주인은 그래서 ‘천자’가 됐다. 야망이 있는 자는 천하를 자신의 손에 움켜쥐려 했다. 천자를 향한 꿈이었다. 천하 제패의 야망이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천하라는 말에서 이미 중국 대륙이 갖는 공간의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중국을 실제로 여행해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실감할 수 있다. 동서와 남북간의 공간이동을 통해 목격하게 되는 자연과 인문환경의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 장대한 공간에선 상대를 밀어내 굴복시키는 전법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밀어내도 그 끝이 보이지 않거니와, 그렇게 밀고 있는 순간 누가 뒤통수를 때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매복, 야습, 화공, 허위정보 유포 등이 가세하면 상황은 정말 복잡해진다. 전진과 공격이 절대로 능사가 아닌 것이다. 정공법은 오히려 하책(下策)이 되고, 꼼수같이 보이는 후퇴와 도망, 기습이 상책이 될 수 있다.
모두 13편으로 구성된 병법의 교본 ‘손자(孫子)’에도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장기전을 피하라(제2 작전편)’ ‘적의 의표를 찌르라(제6 허실편)’ ‘기선을 제압해 국면을 전환하라(제7 군쟁편)’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라(제8 구변편)’ ‘지형에 따라 작전을 구사하라(제10 지형편)’ ‘화공의 효과를 높여라(제12 화공편)’ ‘밀정을 최대한 활용하라(제13 용간편)’ 같은 구체적인 방법까지 일러준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싸움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중국인에게 싸움은 싸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심은 물론 천문, 지리에까지 두루 통달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말대로 그들에게 있어 싸움이란 지혜와 용기, 전투력 등 모든 것이 총동원되는 극적 모멘트다. 따라서 그 결과에 따라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중국은 공간적으로만 스케일이 장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수에서도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는 만큼 한번 싸웠다 하면 몇십만 대군이 동원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인해전술’을 구사했을 정도이니 그들의 인적 자원은 차원이 다르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양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질적으로도 그러하다. 출중한 인물, 기상천외한 인재들이 부지기수라 그들만으로도 한 나라를 세울 만큼 엄청난 ‘인재 풀’을 형성하고 있다.
‘그릇’이 인물 평가기준
특이한 것은 중국에선 예로부터 인재를 양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자연발생적으로도 인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재란 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러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유능한 리더란 바로 그런 인재들을 찾아내 적소에 배치해서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봤다. 유비(劉備)가 삼고(三顧)의 예를 다해 공명을 군사(軍師)로 맞아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고, 그랬기 때문에 유비는 유능한 리더로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리더만 자신에게 필요한 인재를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인재라 생각하는 자들이 자신의 포부와 능력을 펼칠 장(場)을 열어줄 리더를 선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원소(袁紹)의 아래에 있다가 그로서는 안되겠다 싶어 구조를 찾아간 순욱(荀彧)의 경우가 그 좋은 예다.
공간적으로 장대하고 다양한 인재들이 풀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선 흑과 백의 이분법은 먹혀들지 않는다. 국지적 사고 또한 무용지물이다. 다면적 사고, 전방위 사고, 요즘 말로 해서 ‘글로벌 싱킹(global thinking)’이 요구된다. 그들은 인물을 논할 때 ‘그릇(器)’의 크기를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중국이 갖는 지리적 스케일과 다양한 인재를 포용해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그들이 ‘능력’이라 표현하지 않고 ‘그릇’이라 한 것은 승패를 가리는 것은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특정 개인의 능력과 운명, 그리고 우연이 어우러져 함께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하늘이 뜻이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하늘의 뜻이 그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그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란 시대가 흘러가는 방향이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민심이었으니 승자란 민심을 얻은 자를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1841년 ‘영웅과 영웅숭배’를 쓴 영국의 사학자 칼라일이 출중한 능력을 가진 특정 개인을 영웅이라 칭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에 초점을 맞춘 데(‘플루타르크 영웅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해 중국인들은 특정 개인과 함께 그를 둘러싼 집단과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춰 인물을 평가했다. 다시 말해 ‘관계’에 주목했던 것이다.
무예에 뛰어나고 학문에 식견이 있는 자는 그 분야의 대가일 수는 있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전문가일 뿐이다. 전문가는 전체를 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자는 재상은 될 수 있으나 천자의 재목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독불장군 또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선 영웅이 경계의 대상일 수는 있었지만 칭송이나 숭배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대신 어질고 덕 있는 인물이 숭배의 대상이 됐다. 그 덕을 이루는 요체가 ‘그릇’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무능한 인물로 비치는 사람이 덕 있는 인물로 추앙받았던 데는 이런 정신적 배경이 깔려 있다.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웨)San kuo chih.
중국 기전체 역사서인 〈이십사사 二十四史〉 가운데 한 권.
위(魏)·촉(蜀)·오(吳)의 3국이 정립한 시기부터 진(晉:220~280)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서진시대에 진수(陳壽:233~297)가 지었다. 총 65권으로 〈위서 魏書〉·〈촉서 蜀書〉·〈오서 吳書〉의 3서로 구성되어 있다.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여 〈위서〉에 기(紀)·전(傳)을 두고, 〈촉서〉·〈오서〉에는 열전(列傳)만 두었으며, 모두 표(表)와 지(志)는 없다. 〈삼국지〉는 단대사(斷代史)를 나라별로 저술하여 사체(史體)의 새로운 형식을 열었다. 왕침(王沈)의 〈위서〉, 위소(韋昭)의 〈오서〉, 어환(魚豢)의 〈위략 魏略〉을 참고로 하여 편찬했으며, 복잡하고 모순된 3국의 역사를 간결한 문체로 일목요연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너무 간략하게 사실을 기록하여 빠진 부분이 많다. 남조 송나라 때 배송지(裴松之:372~451)가 본서의 간략함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책을 참조하여 상세한 주(注)를 달았는데, 이미 없어진 많은 자료를 인용했기 때문에 삼국시대 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청대에도 많은 학자들이 〈삼국지〉에 보주(補注)와 보표(補表)를 달았다. 근대에 기존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노필(盧弼)이 〈삼국지집해 三國志集解〉를 저술했다.
《삼국지》(三國志)는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쓴 중국 삼국시대의 정사(正史)이다. 후한의 운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189년부터 진나라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는 280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는 전란의 시기인데, 중국 인구사에 따르면, 한나라 시대 5600만명이었던 인구가 삼국지 시대에는 1600만명으로 인구가 급감한, 비극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서(魏書) 30권(본기 4권, 열전 26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돼 있다. (삼국지는 원래 위지, 촉지, 오지라는 표제로 구성되었는데, 송나라 이후 위서, 촉서, 오서라는 표제를 더 많이 사용해왔다.) 삼국지는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체계를 따라 인물전기 위주로 짜여 졌으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연표를 담은 표(表)나 당시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 혹은 書)가 없다.
삼국지는 위나라(魏)를 정통 왕조로 보고 쓰여진 역사서이다. 진수는 황제들의 전기인 본기를 위나라의 황제들로 엮었으며 '촉'과 '오'의 황제는 열전에 편입시켰다. 제호를 붙인 것은 위나라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로 기술하였고, 오의 제왕들은 주(主)를 붙이거나 심지어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이러한 체계는 진수가 벼슬을 하던 진나라가 위(魏)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진 나라이기에 위를 정통으로 삼고 촉과 오를 비정통으로 본 데에 따른 것이다. 진수의 이러한 사관(史觀)은 훗날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나 주희(朱憙)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 촉을 정통으로 보면서 논쟁을 불러 오게 되었다.(조위/촉한정통론에 대해서는 정통론을 참조하라.)
삼국지는 서술이 간결하고 분명하여 명저라 일컬어져 왔다. 또한 위서 동이전(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왜인 등의 동양 민족 고대사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혼란 때문에 사료의 수집이 어려워 많은 사료를 참고하지 못하였다. 진수가 주로 참고한 사료는 왕심(王沈)의 '위서(魏書)', 위소(韋昭)의 '오서(吳書)',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으로 알려져 있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5세기 남북조시대 송의 문제가 배송지에게 명하여 여러 책을 수집하여 주를 달게 하였다. 본래 주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는 것이나 배송지는 누락된 사료를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수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하였으며 본문의 몇 가지 오류나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진수의 인물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평을 넣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는 사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삼국지와 더불어 삼국지 평화, 삼국지 연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배송지주의 양과 관련하여 20세기 양익양이 삼국지의 글자수에 대해 정문이 20만자, 주(註)가 54만자로 주가 세 배에 가깝다고 하여 삼국지의 주가 정문을 그 양에 있어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왕정흡과 오금화가 정확히 글자를 세어 본 결과 정문(본문)의 글자수가 약 36만 8천자 주의 글자수가 약32만 2천자로 본문의 글자가 약간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위서는 본문이 약 20만 7천자 주가 약 21만 5천자, 촉서는 본문이 약 5만 7천자 주가 약 4만 2천자, 오서는 본문이 약 10만 3천자 주가 약 6만 5천자이다.
삼국지의 참고서로는 청의 전대소(錢大昭)가 엮은 '삼국지변의(三國志辨疑)', 양장거(梁章鉅)의 '삼국지방증(三國志旁證)', 항세준(杭世駿)의 '삼국지보주(三國志補注)'등이 저명하며 최근의 것으로는 고적출판사에서 1957년 출판한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와 1991년에 호남사범대학출판사에서 퍼낸 소연뢰(蘇淵雷) 주편의 '삼국지금주금역(三國志今注今譯)'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원중 교수가 1994년 완역했다. 정사 본문은 완역되었으나, 배송지주의 상당 내용은 실리지 않았다.
三國志인물학|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인재는 홍수를 이루고
춘추전국시대를 빛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맹자(孟子)는 역사를 일러 ‘일치일란(一治一亂)의 반복’이라 정의했고, 나관중 또한 “여럿으로 쪼개진 것은 언젠가 하나로 합쳐지고, 그렇게 합쳐진 것은 언젠가 다시 여럿으로 쪼개진다(分久必合 合久必分)”라는 멋진 말로 ‘삼국지연의’를 시작했다.
군웅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는 맹자의 말처럼 진시황에 의해 수습되어 진(秦)이라는 사상 초유의 통일 제국이 탄생했다. 진은 단명했으나 곧 한(漢)이라는 거대 제국에 의해 400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러던 것이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광대한 중국 천하를 놓고 군웅들이 다시 한번 쟁탈전을 벌이는 분열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삼국지는 이때부터 약 1세기에 걸친 혼란의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삼국시대는 그러므로 분열의 시대였다. 사회를 움직이는 어떤 고정된 잣대나 가치,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선 난세이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높은 학식이나 지체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힘깨나 쓸 수가 있었지만, 기존의 가치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진 난세에선 그것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삼국시대는 야망의 시대였다. 기존의 틀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야심가들이 너도나도 그라운드로 몰려나와 힘 겨루기에 달려들었다. 심판도, 룰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라 하찮은 필부도 운만 좋으면 왕후장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야망의 시대, 자유경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고, 인재 또한 둑이 터진 듯 한꺼번에 콸콸 쏟아져 나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다양한 인물의 면면을 보라.
삼국의 한 축을 이루었던 조조(曹操)와 유비, 손권(孫權)을 비롯하여, 청류와 탁류가 싸우는 통에 어부지리로 얻은 권력을 오로지하다 그만 폭군의 대명사가 돼버린 동탁(董卓), 뛰어난 무예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결국 주군 동탁까지 죽여버린 여포(呂布), 연환계(連環計)로 동탁과 여포를 동시에 괴멸시킨 후한의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그때 미끼가 되기로 자청한 미인 초선(貂蟬), 반(反)동탁군의 대장으로 한때 북방을 주름잡았던 원소, 원소와 자웅을 겨루고자 한 원소의 이복형제 원술(袁術), 유비와 동문수학하고 북방에서 원소와 패권을 다투다 쓰러진 공손찬(孔孫璨), 형주 자사로 한때 유비를 도와준 유표(劉表), 명의 화타(華陀) 등을 우선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조조 아래에는 그를 삼국의 제일인자로 만드는 데 최대의 공로자였던 책사 순욱, 순욱의 생질로서 사려 깊은 일처리와 판단력으로 조조를 도왔던 순유(荀攸), 조조의 심복으로 ‘난폭자’란 별명까지 얻은 애꾸눈 하후돈(夏侯惇), 조조의 자랑스런 선봉장 하후연(夏侯淵), 교묘한 처세술로 군사의 자리까지 오른 정욱(程昱), 조조를 원소와 비교, 모든 면에서 조조가 뛰어나다고 한데다 손책의 죽음을 예언한 곽가(郭嘉), ‘난세의 철새’ 가후(賈珝), 적벽전투에서 패한 조조를 호위해 허도로 철수한, 투구솜씨가 뛰어난 허저(許楮), “사사로운 일로 국사를 망칠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조조를 끝까지 지켰던 무장 서황(徐晃), 여러 차례 주군을 바꿨으나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하는 위엄으로 오를 토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료(張遼), 군사보다는 학문을 좋아해 다른 장수들과 공을 다투지 않았던 이전(李典), 공손찬 정벌과 관도대전에서 밟히면서도 끝내 용맹함을 잃지 않아 조조가 “나의 한신”이라며 자랑했던 장합, 조비의 등극에 앞장섰던 화흠(華歆), 후한의 헌제를 장안에서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활약하다 위로 가서 태위의 지위까지 오른 종요(種繇), 조조로부터 “2000석의 장수가 모두 가규와 같다면 걱정할 게 없다”고 칭송받은 가규(賈逵), 용감하게 싸웠으나 사로잡힌 몸이 되는 통에 오에 항복, 끝내 그 수치와 분노를 참지 못해 저세상으로 떠나야 했던 무장 우금(于禁), 관도전투에서 발석거로 대항해 승리를 이끄는 데 큰 힘을 보탠 모신 유엽(劉曄), 조조가 동탁 토벌을 위해 의용군을 모집할 때 제일 먼저 달려오는 등 매사에 솔선한 악진(樂進), 괴력 무쌍의 호걸로 조조를 지키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전위(典韋), 조조의 뒤를 이어 위왕이 된 조비(曹丕), 문재(文才)가 뛰어난 조조의 차남 조식(曹植), 촉의 승상 제갈량을 쓰러뜨리고 위가 삼국 최고의 강국임을 증명한 사마의 등이 있었다.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三國志인물학|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연표
《삼국지》의 등장인물 연표
《삼국지》의 총 등장인물의 수는 1,233명이다.
155년 - 조조 탄생.
삼국지의 주인공들중 한명인 조조의 탄생. 아버지인 조숭이 중상시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조씨 성을 얻었기 때문에 본래의 성씨는 '하후'씨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모두가 조조의 사촌형제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조등과 조숭이 인척관계를 맺은것은 그보다 윗대의 일로 여겨진다.
156년 - 손견 탄생.
삼국지의 주인공들중 한명인 손견의 탄생. 청소년 시절부터 집 근처의 강가를 수하들과 돌아다니면서 수적들을 없애는 등 자경단으로서 활약했다고 한다.
159년 - 환제가 양기를 모살
양기는 당시 세력을 잡고 있었던 대장군이었다. 양기와 그 일족이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등의 횡포가 너무나 심하여 가까이에 있던 환관들의 힘을 빌려 양기를 주살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는 후일 '십상시의 난'을 불러오게 된다.
161년 - 유비 탄생.
삼국지의 주인공들중 한명인 유비의 탄생. 후한 제3대 황제인 경제의 자손을 칭하였으나 유비의 할아버지대 부터 탁군에서 어렵게 살았다는 것을 볼때 황족이기는 했어도 기득권층에는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제는 그 후손이 워낙 많아 이미 그때 당시에도 진위여부를 가리기는 어려운 편이었다.
162년 - 관우 탄생.
후세에 이르기까지 민간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관성제군의 탄생. 본래는 하동현 해량 출신으로 고향에서는 소금밀매업자들의 뒤를 봐주며(당시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다) 생활하다가 수배령이 내려지자 탁군으로 피신하여 유비와 교분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정사상에 의형제였다는 기록은 없다.
167년 - 장비 탄생.
민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호걸 장비의 탄생. 본시 삼국지가 기전체 소설로 정형화 되기 전, 송·원대의 삼국지를 주제로 한 잡극에서 주인공은 항상 장비가 맡았을 정도이다. 유비와는 동향이지만 조상들의 영지인 '연'을 내세우는 것을 좋아해서 소설상에서는 '연인 장비'라고 자칭하는 장면이 많다.
175년 - 손책, 주유 탄생.
181년 - 제갈량, 헌제 탄생.
182년 - 손권 탄생.
184년 - 황건적의 난 발발. 도원결의.
점점 가속화 되어가는 매관매직, 가혹한 수탈과 십상시의 횡포로 인해 피폐해져 있던 백성들과, 그러한 백성들의 심리를 이용한 종교결사 '태평도'의 교주인 장각이 일으킨 것으로서, 규모로는 후한최대의 농민봉기라고 일컬어진다. 그 수는 약 50만명에 달하였으며 세력범위도 무려 6개주에 달하여 지방의 군 세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남으로서 중국대륙에서 은거하고 있던 영웅들이 일제히 일어나니, 이것은 바로 삼국지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189년 - 후한 영제의 사망. 십상시의 난.
영제가 사망하고 장양을 필두로 한 십상시들에 의해, 조정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청류파 인사들과 대장군 하진이 숙청되거나 살해된다.
190년 - 반동탁 연합군 결성. 한 왕조, 동탁에 의해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
황건적의 난 당시 서량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던 동탁이 십상시의 난으로 인해 혼란한 황도에 쳐들어와 권력을 잡고, 형주자사 정원을 살해한 다음 스스로 상국의 자리에 앉는다. 이때 동탁이 끌고온 양주군사들의 횡포와 동탁의 농권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또다시 도탄에 빠지자 원소를 필두로 한 18로 군벌들이 대항하여 반동탁 연합을 결성하여 대항하지만, 종국은 제후들끼리의 내분으로 어이없이 와해되고만다.
192년 - 연환지계. 여포, 동탁을 살해.
동탁의 시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포는 이를 동탁에게 들킬까봐 매우 두려워하였고, 동탁은 동탁대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여포에게 화극을 던지는 등의 행패를 부렸다. 이에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던 두사람의 사이를 사도 왕윤이 이간질함으로서 여포는 동탁을 황궁에서 주살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200년 - 관도 대전.
조조와 원소. 양웅이 맞붙게 된 삼국지 최초의 대규모 전투. 조조는 병력과 사기 양면에서 열세였으나 곽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원소를 창정에서 대파한다. 원소는 도주하던 도중 죽어버리고 후계자 선정에서 범한 실책으로 인하여 원씨 일족은 분열, 결국 하북도 조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207년 - 삼고초려.
조조에게 쫒기고 쫒겨 신야성에 머무르고 있던 유비는, 선복이란 이름을 쓰고 있던 서서에게 와룡 제갈량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초막을 세번 찾아간다.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었던 유비는 특유의 인내심으로 제갈량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제갈량도 그를 따르게 된다. 유비의 휘하에 들어온 직후 제갈량은 조인과 하후돈의 군사를 대파하여 내심 자신을 시기하던 관우와 장비도 굴복시킨다.
208년 - 적벽 대전.
드디어 천하통일의 기치를 걸고 85만 병력으로 남하를 개시하는 조조군. 이에 대항할 수단이 없던 유비는 휘하장수와 백성들을 데리고 피신하지만 당양 장판벌에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장비와 조운의 활약에 힘입어 간신히 몸을 피하던 도중 유기에게 군사를 빌려온 관우에게 구함을 받고,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오나라로 가서 동맹을 체결한다. 적벽에서 벌어진 이 싸움은 오나라 총사령관 주유의 지략과 제갈량이 부른 남동풍으로 동맹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조조는 도망치던 도중 화용도에서 관우와 조우하나, 조조는 지난날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갈때 일을 상기시켜 목숨을 건진다. 관우는 이 일로 인하여 제갈량에게 완전히 무릎을 꿇게 된다.
219년 - 유비의 한중왕 등극. 관우의 사망.
서촉 41주를 취한 뒤, 조조와의 한중쟁탈전에서 위장 하후연을 쓰러뜨리는 등 선전한 유비는 마침내 신하 120여명의 주창으로 한중왕에 등극하고, 이에 발끈한 조조는 대군을 일으키려 하나 사마의의 만류로 오와 동맹을 맺는다. 주유와 노숙의 뒤를 이은 명장 여몽은 형주를 수비하던 관우와 일진일퇴를 벌이면서 기습을 성공시키고, 마침내 맥성에서 관우 부자를 붙잡아 참수시킨다. 분노한 유비는 관우의 복수전을 벌이려 하지만 제갈량과 조운의 만류로 단념하고 정세를 살피는데 주력한다.
220년 - 조조의 사망. 후한의 멸망. 위나라의 성립.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 불렸던 조조도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장무 3년 4월. 천하를 종횡하며 제후들의 중심에 있었던 조조는 끝내 사망하고, 장남인 조비가 유지를 이어 조조의 뒤를 잇는다. 조비는 선양의 형식으로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위황제에 즉위, 고조 유방으로부터 400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한나라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221년 - 촉한 성립.
쓰러져가는 한왕조를 재건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 오랫동안 유비를 지배해 왔던 이념의 주체인 한나라가 멸망하자, 유비는 관우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더불어 격심한 허탈감에 빠진다. 실의에 빠져있던 유비에게 제갈량은 '이제 한왕조의 정통을 이을자는 오직 주공만이 계실뿐'이라 주장하고, 마침내 유비는 마음을 굳혀 촉한의 초대황제에 등극한다. 누상촌의 돗자리 장수가 제위에 오름으로서,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없다는 법칙이 깨어진 것이다.
222년 - 이릉 전투.
승상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75만의 대병력을 일으켜 관우의 복수전을 개시하는 유비. 그러나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장비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범인인 장달과 범강이 장비의 목을 가지고 오나라로 도주하자 유비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의 활약에 힘입어 초반 선전하는 유비군이었지만, 여몽의 사후 뒤를 이은 백면서생 육손의 화계에 의해 이릉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유비는 백제성으로 패주한다.
223년 - 유비의 사망. 제갈량의 남만 정벌.
관우와 장비를 잃고, 그 복수전에서도 어이없게 패배한 유비. 아무것도 없이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에게도 죽음은 찾아왔다. 유비는 백제성을 영안궁이라 이름짓고 그곳에 머물다가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사망한다. 안팎으로 무거운 짐을 맡게 된 제갈량은 계속해서 난을 일으키고 있던 맹획을 정벌하기 위해 출진한다. 수많은 고초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진하며, 계책과 귀모를 다한 공명은 마침내 맹획을 일곱번 붙잡아 일곱번 놓아줌으로서 그의 진정한 항복을 받아내고 남만에서 귀환한다.
227년 - 출사표. 제갈량의 북벌 시작.
유비의 사후 촉을 지탱하고 있던 공명에게 한가지 소식이 날아드니, 그것은 사마의가 자청해서 양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사마의의 군비증강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진다면 촉의 천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제갈량은 마량의 동생 마속을 시켜서 사마의를 실각시키고, 촉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승상부에 틀어박혀 하나의 상소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신 량 아뢰나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출사표' 였다.
229년 - 손권이 황제가 됨. 오나라 성립.
북벌에 나선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과 조진이 이끄는 위군은 일진일퇴를 한 끝에 촉의 승리로 끝나지만, 국가적 존망의 위기를 감지한 위황제 조예는 사마의를 다시 불러들인다. 제갈량과 사마의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자 양쪽이 혼란한 틈을 타서 손권도 대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황룡이라 하며 오를 세움으로서 완전한 삼국정립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234년 - 오장원 전투. 제갈량의 사망.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손견도 역사의 무대에서 죽거나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 234년, 제갈량은 오장원으로 진출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마지막 수단으로 하늘에 기도하여 수명을 늘리는 술법을 행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 가을바람 부는 오장원에서 촉을 지탱하던 거대한 대들보는 마침내 쓰러지고, 사마의는 최후의 순간에 승리를 거두고 위로 돌아간다.
263년 - 촉나라 멸망.
근 50여년간에 걸쳐서 삼국으로 대립하고 있던 중국대륙에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위에서는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병권을 모두 장악함으로서 사마씨 일족의 시대가 도래했고 촉 역시 제갈량의 사후 강유 혼자서 겨우 지탱해 나가던 상태였다. 촉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안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는 등애와 종회 두 장군을 보내어 촉을 토벌케하고, 일반적인 행군로를 벗어나 산악지대로 행군한 등애는 마침내 승리한다. 이로서 촉은 2대 황제 유선을 끝으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한왕조 부흥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65년 - 위나라 멸망. 진나라(서진)의 성립.
역사는 되풀이된다. 일찌기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것처럼, 위의 마지막 황제 조방도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물러나니, 이것이 바로 신왕조 진나라의 탄생이었다.
280년 - 오나라 멸망. 삼국 통일.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삼국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으며 읽히고 있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다. 특히 요즈음은 어느 나라의 독자랄 것도 없이 <삼국지>에 대한 이해나 접근 방법이 매우 다양해졌다. "소설 삼국지"는 물론이고 "만화 삼국지", 컴퓨터 게임, 비디오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삼국지>를 만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삼국지>의 이야기는 너무나 자연스레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려서 "도원결의"나 "삼고초려" 같은 사자성어에 얽힌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들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토론을 나누는 들의 새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삼국지>를 분석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열의를 생각한다면 <삼국지>에 대한 전문학자들의 학술 연구는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까닭을 든다면, <삼국지>가 역사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뻔한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을 가지고 만들어낸 이야기이기에 중국 고전소설의 또 다른 대작이라 할 수 있는 <홍루몽>, <수호전> 들에 견주어 볼 때 "문학성"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삼국지>는 중국 민중이 만든 작품
그러면 문학성이 덜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지>가 세계 독자들에게 그토록 흥미를 주고 그토록 널리 읽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분명 소설 자체에만 그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글쓴이는 외적 요인이 어디 있는가를 밝혀 그 답의 한 면이나마 찾아보고, 또 평소에 궁금했던, 영웅들이 활약했던 그 무대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 모습은 과연 어떨지 하는 궁금증에 대한 확인도 할 겸해서 실제 "삼국지 문화유산"을 찾아 답사를 해 보았다. 그 결과 중국의 문화 현장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전역에서 이른바 "삼국지 문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소설 <삼국지>와 이에 대한 이해와 연구만이 있는 데에 견주어 이 소설의 무대인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삼국지>가 현실 생활의 한 부분으로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소설 <삼국지>는 하루아침에 한 사람의 손에 만들어진 그런 소설이 아니다. 진나라 때에 진수가 지은 역사서 <삼국지>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동안 민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 오다가 명나라 때에 와서야 정리되어 <삼국연의>라는 본격적인 소설의 틀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소설 <삼국연의>에만 국한되지 않는 이른바 삼국지 문화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이 삼국지 문화는 크게 "역사서 삼국지", "소설 삼국지", 그리고 "민간 전설"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역사서 삼국지"에 나타나는 인물과 사건이 기본 골격이고, 이것이 소설이 되는 과정에서 정리한 이가 덧붙인 허구적인 요소가 보다 다양한 읽을 거리를 주고 있으며, 서민들의 바람과 정서가 담긴 민간 전설 또한 삼국지 문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삼국지 문화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전반적인 이해는 소설 <삼국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삼국지>의 본무대인 중국에서 보편적으로 형성되어 있음에도 우리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오늘날 중국의 삼국지 문화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직접 답사를 통해 눈으로 확인한 부분을 소개해 보겠다.
신이 되어 버린 관우
중국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관우를 신으로 모시며 관우 사당을 참배하고, 제갈량의 거위털 부채를 호신용으로 사용하며, 곳곳에 "삼의묘"를 세워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의 의리를 기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역마다 자기네가 삼국지 문화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지역들은 저마다 관우 문화의 중심지라고 주장하며, 분명 한 곳이어야 할 제갈량의 집 또한 두 곳이나 있고, 적벽대전이 벌어졌던 전쟁터는 여러 지역에서 각기 자기네가 실제 적벽대전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삼국지 문화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관우에게 집중되어 있다. 중국에는 두 사람의 성인이 있다. 한사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공자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관우이다. 중국사람들은 공자를 "문성"이라 하고, 관우를 "무성"이라 부른다.
중국 하남성 낙양시의 남쪽에 관우의 무덤인 "관림"이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제왕의 묘를 능이라 하고 왕후의 묘는 총, 일반 백성의 묘는 분, 성인의 묘를 임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곳의 관우 무덤을 관림이라 하고, 산동성에 있는 공자의 무덤을 "공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우는 어떻게 해서 성인이 되었을까? 관우는 평생 주군인 유비를 모시며 충성을 다하였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모든 신하가 관우만큼 충성을 다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 이후 중국의 봉건 통치자들은 정치적인 속셈에서 관우를 충의의 화신으로 내세우며 끊임없이 그이를 미화하였다. 특히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관우의 신격화가 시작되었고 청나라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관우를 장무후와 충혜공으로 봉하였다가 무안왕, 숭녕진군 들의 이름으로 추존하였고, 나중에는 나라를 지키는 충의대제로 모시게 된다. 그러기에 중국의 민간인들은 관우를 후에서 왕으로 부르고, 또 대제로 모시다가, 결국에는 신으로 추앙하게 되어서, 중국 방방곡곡에 큰 사당을 짓고 그이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곧 청나라 때에 이르게 되면 호국지신으로 모시고 아예 공자를 문신으로, 관우를 무신으로까지 추앙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새해를 맞으면 많은 중국사람들이 관우 사당에 가서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며 관우 신에게 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중국에 공자를 모신 사당은 그리 많지 않으나 관우를 모신 사당은 곳곳에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중국에 남아 있는 관우 사당은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것만도 6개가 있고, 베이징 지역에 110여 개 정도가 있는 들 하여 거개의 현이나 시골에까지 다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분명 관우는 한 사람이었는데, 중국에는 두 개의 관우 무덤이 있다. 하나는 하남성 낙양시에 있는 관림이고, 다른 하나는 호북성 당양시의 관릉이다. 관림에는 관우의 머리가 묻혀 있고, 관릉에는 관우의 머리 없는 시신이 묻혀 있다. 삼국시대 조조와 손권에 의해 관우의 시신이 나뉘어 무덤이 두 개가 된 것이다.
관우의 머리가 묻힌 낙양의 관림에는 그 궁궐 같은 짜임새나 웅장한 규모와 함께 중국사람들의 숱한 정성과 마음이 가득 담겨 있어서 여느 제왕의 무덤 못지않다. 이를 통해 중국사람들의 관우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신이 묻힌 당양의 관릉 또한 사당과 더불어 체계적인 관리를 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본래 흙으로 된 무덤만 있었는데, 관우를 기리는 기념 건축물이 들어선 것은 송나라 때에 와서라고 한다. 아마 이때부터 봉건 통치자들이 민간에서 관우가 차지하는 위치를 인식하고 이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관우를 신격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때에 이르러 관우가 민간의 신으로 완전히 자리잡자 본격적으로 관청들이 이 관릉을 꾸미도록 했던 것이다. 관릉의 주요 건축물들 거개가 명나라 때에 지어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3개의 관우 무덤
이토록 관우의 위치가 절대적이다 보니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서로 자기네가 관우 문화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호북성의 형주와 산서성의 운성이다. 이들은 각기 "관공문화" 학회를 열며 거듭해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면 이들 지역은 왜 유독 이토록 관우와의 인연을 고집하는 것일까?
먼저 형주를 살펴보자.
<삼국지>를 읽어 보면 결국 제갈량의 아이디어로 유비는 동오로부터 형주를 빌리는 데 성공한다. 이때부터 사실 형주는 촉의 관할이 되었으며, 유비는 이 형주를 근거로 하여 천하를 3등분하게 된다. 유비가 사천 지역을 얻어 완전히 천하를 3등분한 뒤 이 형주는 유비의 오른팔인 관우에게 맡겨진다. 관우는 형주를 10년 동안 지키는데 이때 형주 성이 지어진다. 이 형주 지역에는 <삼국지>와 관련된 크고 작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역사서나 민간인들의 가슴속에 그 이름과 전설만을 남긴 채 사라져 갔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많은 유적들이 삼국시대 영웅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관제묘 행군과 석마조, 춘추각, 괄골료독처 들이 있다. 이것들 모두 관우와 관계 있는 유적들이니 형주와 관우는 보통 인연이 아니며, 이런 까닭에 이 지역 사람들의 관우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운성은 관우가 태어난 곳이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유비에게 자신의 고향을 하동 해량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하동이 바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을 말한다. 산서성 운성시 해주진 상평촌이 관우의 고향이다. 이곳은 운성시에서 동남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사실 관우는 189년에 고향에서 살인을 하는 불미스런 일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 뒤 219년 쉰 여덟 살로 당양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끝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였다.
실제로 중국에는 관림과 관릉이라는 두 개의 관우 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곳 관우의 고향 운성사람들은 관우의 무덤이 세 개라고 주장한다. 곧, 몸은 당양에 묻히고, 머리는 하남성 낙양에 묻혔으나, 관우의 영혼은 이곳 산서성 운성의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다고 생각한다.
이 운성사람들은 온 중국사람들이 떠받들어 모시는 관우 신이 바로 이 고장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그야말로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운성에는 두 개의 의미 있는 관우 사당이 일찍부터 지어졌었다. 하나는 그이의 고향 마을에 있는 상평관제묘이고, 다른 하나는 해주관제묘이다. 상평관제묘는 관우뿐만 아니라 그 집안 조상까지 모셔놓은 관우 집안 사당이다. 해주관제묘는 중국의 수많은 관우 사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관제묘이다. 관우의 고향 마을에 그 집안 사당이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사당이 있음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 듯하다. 그러니 어찌 관우 사랑이 특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이곳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있는 관우 사당과 관우 문화를 한국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한다.
적벽은 어디인가
이러한 삼국지 문화의 중심에 대한 자부심은 비단 관우 한 사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유적지에 대한 논쟁이 한때 격렬했었는데, 삼국시대 최대의 싸움터였던 적벽 싸움터에 대한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의 전쟁터가 수나라와 당나라로 내려오면서, 호북성 장강 일대에는 저마다 그 곳이 적벽대전의 장소라고 주장해서 한때는 포기, 무창, 한천, 한양과 황주 해서 적벽이 다섯 곳이나 되기도 했었다. 지금은 고증을 통해 포기 지역으로 정리가 된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는 아직도 적벽이 두 곳이 있다. 그 하나는 <삼국지> 최대의 격전장이었던 곳, 오늘날 호북성 적벽시의 적벽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적벽은 송나라 최대의 문호였던 소동파가 유배시절 객과 더불어 배를 띄워 놀며 명문장 <적벽부>를 지었던 오늘날 호북성 황강현에 있는 적벽을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사람들은 소동파가 노닐며 지은 <적벽부>의 장소를 "문적벽"이라 부르고, <삼국지>의 전쟁터였던 적벽시의 적벽을 "무적벽"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삼국의 전쟁터였던 무적벽보다 소동파가 노닐었던 문적벽을 중국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또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삼국시대 문화유적에 대한 이해와 정리 부족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대대로 내려오는 적벽의 위치에 대한 혼란이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무적벽 지역은 국민당 시절에는 행정구역으로 가어현 소속이었는데, 공산당이 통치하면서부터 포기현 관할로 바뀌었다. 지금 두 개의 적벽이 있는 데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의 변화로 적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에서는 얼마 전 행정구역 정리 과정에서 계속된 혼란을 없애기 위해 아예 적벽시로 그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과 혼란의 근본적인 까닭은 중국 사람들의 삼국지 문화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와룡이 누워 있는 곳
따지고 보면 온 중국 땅이 삼국시대 문화 유적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삼국지 문화의 중심에 대한 자부심은 제갈량에 대한 사랑으로 또 하나의 논쟁거리를 만들었다. 곧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기 전 살았다는 융중이 바로 그것이다. 유비가 삼고초려했다는 제갈량의 집이 분명 한 곳이어야 함에도 중국에는 두 곳이 있는 것이다.
호북성 양번시의 남쪽에 제갈량이 살았다고 하는 융중이 있다. 이곳 융중은 제갈량의 제2의 고향으로서 제갈량이 젊은 시절 초야에 묻혀 지낸 곳이다. 이곳은 산과 내가 잘 어우러진,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경관을 갖춘 곳이다. 중국 대륙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산세 좋고 아담한 산이 무척 드물다. 그래서 온 산하가 산과 냇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 땅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표현한 것은 절대적인 평가도 분명 그러하지만 아마도 중국 땅에 견주었을 때의 상대적인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중국의 옛말에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서 인재가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융중과 제갈량을 두고 한 말이 아닐지? 한 시대 세상을 움직였던 제갈량의 뛰어난 지략과 큰 꿈은 분명 이 훌륭한 융중의 자연경관 속에서 길러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지금 중국에는 또 하나의 융중이 있다고 한다. 하남성 남양시의 와룡강이 제갈량이 살았던 융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가 제갈량이 살았던 곳이란 말인가? 제갈량은 그이가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에서 "제가 베옷 입고 남양 땅에서 밭 갈고 있을 적에······"라고 썼는데, 이때의 남양 땅은 당시의 남양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삼국 시대의 남양군은 그 관할 지역이 지금의 호북성 북부를 포함하는 매우 넓은 땅이었다. 그때 융중은 남양군 등현의 한 산촌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옛 문헌 속의 남양은 고대의 남양군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지 오늘날 하남성 남양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국에서는 제갈량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사랑과 자부심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갈량하면 바로 생각나는 것이 "지모", "지략" 같은 단어이다. 그래서 그이는 중국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 지혜의 화신으로 아로새겨 있다. 이런 추상적인 것 외에 또 한 가지 제갈량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거위털 부채이다. 제갈량을 모신 중국 무후사 어디를 가도 제갈량이 거위털 부채를 들고 있는 초상이나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제갈량의 손에 항상 들려 있는 거위털 부채는 이미 제갈량의 이미지를 대신해 지혜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어떤 곤란한 일을 만나더라도 제갈량은 이 부채를 살살 흔들면서 그 해답을 찾아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제갈량의 그 신기한 부채는 그이의 아내 황월영이 특별히 신선 세계의 거위털로 만든 것이라 한다. 제갈량의 아내 황월영은 당대의 명망있던 선비 황승언의 딸인데 용모가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현명하고 박학다식했다고 한다. 그이는 제갈량과 혼인하기에 앞서 일찍이 오매산의 선녀에게 도를 배우고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이가 선녀와 작별하고 산을 내려올 때 선녀가 그이에게 선계의 거위털을 주며 재삼 당부하며 말하길, "조만간 너는 이것을 사용해 부채를 만들어 남편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너의 낭군이 대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야" 하고 말했다 한다. 그 뒤 황월영은 제갈량과 혼인을 하였고 그이는 그 깃털로 부채를 만들어 제갈량에게 주었다. 이렇게 해서 부채는 제갈량에게서 뗄 수 없는 보물이 되었고 어딜 가든지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이 거위털 부채를 행운을 주는 물건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거위털로 부채를 만들어 자신의 호신물로 삼는 전통을 가진 지방도 있다.
어쨌든 중국사람들이 제갈량을 사모하고 기리는 마음은 한 시대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중국의 전반적 문화 현상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민간인들의 <삼국지> 숭배
이처럼 오늘날 중국에 남아 있는 삼국지 문화는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고 특이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 그럼 이런 성격과 특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삼국지>를 보는 관점이 촉한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 지역별로 삼국지 문화와 인물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수준이며 그에 대한 이해와 인식 또한 똑같지 않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특징은 먼저 관우가 어떤 위대한 영웅들보다 높은 신으로서 추앙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 전역에 깔려 있는 관우 사당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개발된 대도시에서는 조금 덜하지만 거개의 농촌 지역과 중소도시에서는 실로 전 국민의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런 삼국지 문화는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이다. 곧 삼국지 문화 속에 도교, 불교, 유교 문화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남성 허창시에 장공사라고 하는 장비를 모셔놓은 사당이 있다. 그러나 이 사당은 장비만을 모셔놓은 것이 아니고 장비와 함께 부처도 모시면서 포청천까지 모셔놓은 사당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장공사 안에는 장비를 모신 전각과 함께 부처를 모신 법당과 포청천을 모셔놓은 전각이 나란히 너무나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이 장공사를 포공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사당은 본디 촉나라 장수 장비를 모신 곳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법당이 들어서고 또 청나라 광서 17년부터는 당시 민간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포청천도 이곳에 함께 모셨다. 그러니까 삼국지 문화에 위진시대 이후의 불교 문화, 송나라 이후의 포청천에 대한 민간인들의 존경심이 모두 이 한 곳에 어우러진 것이다.
이는 중국과 같이 오랜 역사를 지니고 문화적인 포용력이 강한 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처음 이곳을 둘러보면서 너무나 무질서하고 무원칙한 것들의 모음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촉나라 장수 장비를 위나라 사람들이 모셔놓은 것도 그렇고, 전혀 다른 종교 이념을 지닌 사당이 같은 곳에 나란히 있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자세히 이곳을 살펴보고 또 참배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중국사람들의 조화 융합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대단히 포용력 있고 거시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작은 것에 집착해 온 우리의 상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중국사람들은 자신의 출신지역, 추앙하는 인물, 종교 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여기서 지역감정이나 배타성, 결벽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공사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런 현상들은 중국의 삼국지 문화 속에 전통 도가, 불가 사상이 자연스레 함께 녹아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함께 중국 민간인들은 교육받은 계층들과 달리 특정 이념이나 종교, 지역으로부터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도 장비와 부처와 포청천이 중국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장공사는 중국 민간 속에 보편화된 삼국지 문화의 성격이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홍위병도 어쩌지 못한 관우 사당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이 이 삼국지 문화가 어떤 면에서 일반적인 경제 개발 논리보다 먼저라는 점이다. 요즈음 온 중국이 개발로 분주하다. 특히 연해지역 경제개발이 성공함에 따라 중국은 크게 자신감을 얻었고 그 결과 개발논리는 탄력을 받아 지금은 서부대개발이란 더 큰 목표를 세워놓고 희망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 개발은 대체로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대도시지역이나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곧 경제개발 논리와 명분으로 많은 중요한 것들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문화지역의 개발은 대도시의 관광지가 아닌 곳엔 전혀 관심이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중국의 전통 문화의 현장을 돌아보면 많은 가치 있는 문화 유적이 방치되고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중국의 많은 삼국지 문화와 관련된 유적지를 돌아보면 상당수 지역이 최근 개발을 이미 마쳤거나 아니면 한창 개발 중임을 볼 수 있다. 이들 공사가 마무리되면 많은 유적지가 분명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심지어 경제 개발보다 먼저 삼국지 문화를 가꾸는 곳도 적지 않다. 이는 중국의 신이 된 관우의 영향 때문인데, 관우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끔 만들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관우는 적어도 중국 민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위대한 신으로 이미 자리잡고 있다. 중국 전역에 공자를 모신 사당은 얼마 되지 않아도 관우를 모신 사당은 많다. 문화대혁명 때 공자 사당을 비롯한 많은 문화 유적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눈여겨볼 것은 문화혁명이 끝난 뒤 문성인 공자의 사당은 그 복원이 미미한 데 견주어 무성인 관우 사당의 복원은 아주 활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 서슬퍼런 문화혁명 시절에도 관우 사당은 덜 훼손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사회주의화의 첨병이라 일컬으며 문화 유산을 다 때려부순 홍위병이라고 해도 그이들 마음속의 신은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념이라도 중국 민간인들의 관우에 대한 믿음을 능가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이를 중국 학자들은 민간에 내려오는 전통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책이나 교과서를 뒤져 봐도 이런 중국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과연 중국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방식으로만 중국을 생각해 온 것은 아닌지? 따라서 정녕 중국을 제대로 알고 소설 <삼국지>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 한다면 삼국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三國志인물학|조조, 무대에 오르다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조조, 무대에 오르다
유비 아래에는 유비와 도원의 결의를 맺고 유비를 위해 신명을 다 바친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유비가 삼고의 예를 다해 군사로 맞아들였던 재사 제갈량(諸葛亮), 냉정함과 침착함으로 무장의 귀감이 됐던 조운(趙雲), 풍모가 좋지 않아 인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애석하게 요절한 방통(龐統), 전장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젊은이 못지않은 기개를 보여줬던 무장 황충(黃忠), 조조도 두려워한 무법자이자 떠돌이 맹장이었던 마초(馬超), ‘읍참마속’의 희생자 마속(馬謖), 무예는 출중했으나 배반을 밥먹듯 하여 공명을 괴롭혔던 맹달(孟達), 활과 마술에 능통했으나 선비로 남길 원했던 미축, 유비를 제갈량에게 소개하여 유비의 아래에 있다 조조가 모친을 인질로 가두자 어쩔 수 없이 그의 수하가 됐던 재사 서서(徐庶),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위탁하고 있을 때 “나는 세상의 움직임을 알 수 없지만 형주에는 시국 정세를 읽을 줄 아는 공명과 방통이 있다”면서 유비가 그토록 찾고자 한 재사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일등공신 사마휘(司馬徽), 유약함의 상징처럼 돼버린 비의 아들 유선(劉禪), 유선의 군사였던 강유(姜維) 등이 있었다.
또 오나라에는 건국의 아버지 손견(孫堅), 그의 후계자 손책, 적벽대전의 최고 영웅 주유(周瑜), 오의 외교 대가 노숙(魯肅), 손견이 낙양의 우물 밑바닥에서 주운 인감이 전국옥새라고 감정한 정보(程普), 적벽대전에서 화공을 진언해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던 황개(黃蓋), 고사성어 ‘괄목상대’의 주인공 여몽(呂蒙), 공명의 형이자 손권의 책사로서 늘 화합을 강조했던 제갈근(諸葛瑾), 의젓함과 냉정함으로 손씨 집안을 도운 육손(陸遜), 손권이 “조조에게 장료가 있다면 나에게는 감녕이 있다”며 치켜세웠던 감녕(甘寧), 손책이 죽자 비통에 빠진 손권에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고 격려하는 등 그의 참모 노릇을 톡톡히 해낸 장소(張昭), 적에게 포위된 손책을 구하기 위해 육탄으로 맞서 그를 구해낸 무장 주태(周泰), 주군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고 적군을 격퇴했던 능통(凌統) 등이 있었으니, 여기에 원소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책사 전풍(田豊), 관도싸움에서 지구전으로 나갈 것을 원소에게 진언한 모신 저수(沮授), 기인 예형과 공자의 후손으로 재기를 자랑했으나 끝내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비운의 공융(孔融) 등을 보태고, 다시 그 사이사이에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까지 합친다면 인명 백과사전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다.
삼국시대는 황건적의 난에서 삼국이 정립되는 시기, 조조·유비·손권에 의한 천하 삼분시대,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이 힘을 겨뤘던 2세 시대 등 크게 3개의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이를 각각 제1, 제2, 제3라운드라 명명하고, 각 라운드별로 승자와 패자를 가른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호족과 환관들의 전횡, 또 그들끼리의 권력투쟁이 극에 달했던 후한 말, 백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노한 민심은 끝내 민란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자는 태평도의 수령 장각(張角). 머리에 누런 띠를 둘렀다 하여 흔히 ‘황건적’이라 부르는 반란의 주모자 장각은 “갑자년(184)에 한 왕조를 뒤엎고 천하를 평정하면 대길하다”는 말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천하의 행방이 민심에 달려 있음을 그 또한 이렇게 확인시켜줬다. 선거라는 민주적 제도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무엇이 정치의 요체인지는 그 당시의 중국인들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나름대로 훌륭하게 작동시켰던 것이다.
황건적은 전국 8개 주에서 동시 다발로 봉기의 깃발을 들었다. 흑산적과 태평도의 한 갈래인 오두미도도 이에 합세했다. 바야흐로 난세의 회오리가 중국 대륙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은 권력투쟁을 일시 중단하고 토벌군을 조직해 봉기 현장으로 내려보냈으나 그들을 당해내지 못해 관군들은 여기저기서 밀리고 있었다.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조조였다. 황건적이 몰고 온 난세는 30세의 젊은 조조를 난세의 리더로 떠오르게 했다. 당시 24세였던 유비는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후일 강동의 실력자가 되는 손견 역시 이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직 조조만이 그런 영광의 대열에 선착한 것이다. 유비가 정치무대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였다.
조조의 등장으로 사태는 반전됐다. 반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얼마 안가 주모자 장각마저 병사했다. 그 잔당들이 각지에 흩어져 저항을 계속했지만, 한시름 덜은 조정은 또 다시 권력투쟁의 흙탕물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영제(靈帝)의 죽음이었다. 영제의 황후 하태후가 낳은 소제(少帝)가 제위에 오르자 실권을 장악한 태후의 오빠 대장군 하진(何進)이 원소 등과 힘을 합쳐 환관들을 몰아내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태후가 이에 제동을 걸었고, 그 바람에 하진만 모살됐다.
이를 목격한 원소는 궁에 들어가 환관 2000여 명의 목을 모조리 베었다. 그러는 사이 이미 하진의 부름을 받고 낙양(洛陽)으로 들어온 동탁은 소제의 신변을 보호하고 패잔병들을 거두어 권력을 장악했다. 동탁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소제를 폐위하고 소제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동생 진류왕을 헌제(獻帝)로 옹립하면서 상국(相國·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황건적의 난 토벌에 공을 세운 조조와 환관들을 쓸어버린 원소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동탁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조조와 원소는 각자 자기네 본거지로 돌아가 전국의 군웅들과 함께 동탁 토벌군을 결성했다. 이른바 ‘반동탁연합군’은 그렇게 해서 권력의 한 축을 이뤘다. 그 즈음 천하는 동탁군과 반동탁군으로 이분됐다.
三國志인물학
|조조, 무대에 오르다
조조(曹操, 155년 ~ 220년 1월 23일)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역신(逆臣)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시대를 선도한 영웅이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출생
조조는 패국 초현 사람으로 환관 조등의 양자인 조숭의 아들이다. 조조는 얼굴이 약간 여우처럼 생겼다고 기록되어있고, 《삼국지》〈무제기〉에 따르면 ,전한 시대 유방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의 자손인 조등은 환제 때 중상시를 맡았다. 이에 대해 《후한서》〈조등전〉에 조참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조참 후예설을 위의 선양을 윤색하고 조씨 가문을 격상시키려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 조등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따르면, 조숭이 하후씨이며 하후돈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환관의 손자라는 콤플렉스가 나중에 조조의 인물상이나 생활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은 길리(吉利), 또다른 이름으로 아만(阿瞞)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묘한 꾀와 기지를 발휘하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소년 시절 매 날리기, 사냥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조조를 보고 숙부가 종종 조숭에게 충고하곤 했다. 어느 날 조조가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듯한 시늉을 했다. 숙부가 조조에게 묻자 “마비증상이 갑자기 왔습니다”라고 답했고 숙부는 이 일을 조숭에게 알렸다. 조숭이 이를 놀라 듣고 조조를 불렀는데 조조는 태연하게 “원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라고 답해 이후 아버지는 숙부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조조는 원소와 일찍이 장난꾸러기 친구 사이였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은 갓 결혼한 신부를 훔치러 갔다. 일이 실패하여 추적자를 따돌리면서 도망하던 도중, 원소는 그만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원소가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조조는 대뜸 범인이 여기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소가 기겁하여 통증도 잊고 얼른 가시덤불 속에서 나와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처럼 품행이 불량한 모습을 보고 누구도 조조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양나라의 교현과 남양의 하옹은 조조를 남다른 인물로 평가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교현의 권유로 허소와 깊은 친교를 갖는다. 어느 날 허소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물었는데, 허소는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也)’(《삼국지》 배송지주)으로 평가했다(한편, 후한서 허소전에는 조조를 ‘태평시대의 도적, 난세의 영웅(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으로 평가한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조조는 20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되고 낙양북부위에 임명된다. 그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던 건석이라는 환관의 숙부가 금지된 야간 외출을 하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법을 어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이어서 그는 돈구(頓丘)의 현령, 의랑(議郞) 등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다.
황건적의 난에서 서주 공략까지
184년 조조가 30살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제남국 재상으로 승진, 거기에서 그는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돌연 사퇴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금성의 한수와 변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수도 방위를 위해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임명된다. 그 무렵 영제가 죽고 대장군 하진과 원소는 환관 주살을 계획한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동탁 등 각지의 제후를 소집하여 황태후에게 압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후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일이 탄로나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조조가 예상한 대로 동탁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사이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되고 만다. 또한 환관들도 원소에게 모두 주멸되고, 이 와중에 실권은 동탁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성을 탈출했다. 이때 조조가 왕윤에게 빌린 칠보검으로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분무장군을 맡는다. 그런데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제후들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손견이 선두에 나서 화웅을 전사시키는 등 동탁을 후퇴하게 만들지만 동탁을 추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냉소적이고 모두가 반대했지만 조조 혼자 결단하여 하후돈 등을 대동하고 동탁을 추격했다. 그러나 조조는 변수에서 동탁의 부하 서영에게 패하고 만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돈이 난전끝에 서영의 목을 기어이 베고 만다고 기록되어 있다.)조조는 제후들이 주둔한 산조로 돌아오지만 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군사를 움직이지 않자 결국 연합군은 와해되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조조는 무형의 자산을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인망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패할 것을 뻔히 알고도 불구하고 오직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뛰어들었다.'라는 이미지가 조조에게 강렬하게 박혀 조조의 밑으로 들어오는 인재들이 우후죽순같이 많아지게 된다.
191년(초평 2년) 조조는 동군에 침공한 흑산적을 연주 전투에서 토벌해 원소로부터 동군 태수로 임명된다. 192년 4월,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된다. 같은 해 청주의 황건적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하자 군대를 이끌고 격파한다. 황건적이 항복하자 조조는 이들을 자기의 세력으로 영입하고,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불렀다. 이때부터 유능한 인재가 그에게 부하로 들어오게 된다.
같은 시기에 원소와 원술은 사이가 나빠진다. 원소는 형주의 유표와 연합하고, 원술은 유주의 공손찬과 서주의 도겸과 손을 잡는다. 조조는 유표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의 군대를 격파하고 있었는데, 그때 도겸이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해 조조의 아버지 조승을 살해한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흥평 원년)에 걸쳐 2차례 도겸 정벌에 나서 서주에서 무차별 살육을 자행했다.
《후한서》에는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도 가차없이 도살하였다. 이 때문에 사수(泗水)는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라는 처절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악역으로 묘사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에 영입한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메뚜기의 피해로 굶주림에 허덕이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허창으로 옮긴다. 그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조지와 한호(《진서》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하여, 허도(허창)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이때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겨 조조 밑으로 도망온다. 부하 정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제거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지금은 영웅의 마음을 붙들 시기” 라며 유비를 잘 대우한다.
관도대전부터 삼국정립까지
197년 조조는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張繡)를 항복시키지만 나중에 그는 조조를 배신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과 부하 전위가 전사한다. 이 때 조조는 맏아들 조앙의 죽음보다도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했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198년 조조는 장수,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고, 하비에서는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한다. 다음해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굴복시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술 토벌에 유비를 파견한 일이 문제가 된다. 유비는 하비에서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살해했다. 그러나 200년에 조조가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를 항복시켰다. 유비는 원소 밑으로 도망치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원소와 천하 패권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진다. 여기에서 조조는 원소의 부하인 맹장 안량과 문추를 물리치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끈다. 그러나 관도에서 대치가 길어지자 아군의 식량이 고갈되고 그 대담한 조조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순욱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상담을 구했는데, 순욱은 격려의 답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의 부하 허유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식량기지를 습격하기를 진언하여 형세는 역전,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 몰수한 전리품 중에서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던 조조의 부하의 편지가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는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해서 나 자신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이때 조조는 군사를 몰아 장성을 넘어 모돈(冒頓 또는 묵돌)을 죽였다고 한다. 모돈은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174년까지 흉노의 선우(대족장)를 지냈던 사람으로 조조와는 4백년 가까이 시차가 있는 인물이다. 조조의 모돈 살해는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꾸며낸 이야기다.
원소 토벌 이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조조는 208년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르고, 형주의 유종을 항복시켜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대패하여 조조는 가까스로 도망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도망치는 도중에 3번이나 유비를 바보라고 비웃으며 “나라면 여기에 복병을 놓겠다”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조운, 장비, 관우에게 차례로 습격당한다. 이후 중국 대륙은 위, 촉, 오 삼국의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완전한 통일의 꿈이 멀어지지만 조조의 우세한 세력 기반은 변하지 않았다.
삼국 정립과 조조의 죽음
210년에 조조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공포한다. “구현령”이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술지령”에서는 수여받은 4현 3만 호 가운데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하고, 제위 찬탈 등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제도다.
213년 위공(魏公)으로 책봉되었고,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지면서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졌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였으나 황제가 되지는 않고 죽을 때까지 위왕으로 남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판도 만만찮다. 조조의 위공 취임을 반대한 순욱에게 자살을 명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자는 비록 공로자라고 할지라도 가차없이 처분했다는 것이다.
211년 마초와 한수 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군대가 먼저 강을 건너 세력이 약해진 틈에 마초에게 습격당하여 위기에 빠졌지만 다행히 허저의 도움으로 구조된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2] 결국 가후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가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한다. 212년 오나라 정벌에 나서고 다음해 유수구에서 격파한다. 이때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를 토벌, 215년에는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키는 등 매년 지칠 줄 모르고 전투를 벌였다.
217년에는 손권과 다시 싸우고 219년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기지만, 대신 손권과 연대해 형주의 관우를 멸한다.
관우가 죽은 이듬해, 220년 1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향년 66살의 나이로 서거했다.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건시전을 지을 때 탁용사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 조비가 위왕에 오르자 조비는 아버지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하였다가,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고 즉위하자 다시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한편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던 조조는 훗날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당대의 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한다.
평가
인물평
조조는 군사, 학문, 무예, 내정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엔터테인먼트쪽으로도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또한 통솔력도 굉장하고 수하를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바로 '능력'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는 크게 인정해줬다. 호차아에게는 단지 '힘이 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커다란 금괴를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이에 서황, 장료등이 감동받아 조조를 극진하게 섬기게 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가 한(漢)황실 종친의 성씨인 유(劉)씨의 성이 아닌 환관 조등(曹騰)의 성씨인 조(曹)씨의 성을 지닌 것이 조조 본인에게도, 한 황조에도 불행이었다. 조조는 황제로서의 자질면에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났지만 한 황실종친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중국 전체를 다스릴 수 없었고 후일 나관중에 의해 저평가되는 빌미마저 제공했다. 하지만 조조는 그 나관중마저 감동시킨 일화를 만드는데 그것이 반동탁연합군이 와해되고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갈 때 극소수의 병력으로 죽을 것을 알고도 헌제를 동탁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서영에게 패배한 것이다. 나관중조차 이에 감동받아 비록 조조를 이를 갈며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삼국지연의에서조차 조조의 부장인 하후돈이 조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동탁의 지시를 받은 서영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묘사해줬다.
동시대의 평가
동시대 사람 중 유명한 두 사람은 조조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했는데, 양국(梁國) 사람인 교현은 그를 두고 난세의 영웅, 치세의 간적으로 평가했지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는 그를 두고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간웅으로 평가했다.
Liu Bei 유비 Xuándé 玄徳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그에게는 특별한 리더십이 있었다. 관우, 장비, 조자룡, 제갈 공명‥ 그 뛰어난 장수와 참모가 왜 유비의 부하가 되기를 자청했을까? 유비는 힘이 없으면 힘있는지를, 아는 것이 없으면 아는 것이 많은 자를 부하로 두고, 그들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능통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덕으로 인재들을 모으는데 특별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인간경영에 성공한 리더인 것이다.
三國志인물학|유비, 제국 촉한을 건국하다
유비(劉備, 161년 ~ 223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221년 ~ 223년)로, 자는 현덕(玄德),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다. 묘호는 열조(烈祖)라 하지만 이는 사후에 사가에서 추존한 것이므로 정식 묘호가 아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의 흔한 군웅들과 달리 뚜렷한 기반이 결여된 상태에서 짚신 장수로 출발한 유비였지만 한고조의 풍도를 가지고 관우, 제갈량 등 같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당대의 패자였던 조조와 끝까지 맞써 제국 촉한을 건국하였다.
Liu Bei 유비 Xuándé 玄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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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출생
유비는 탁군 탁현 출신으로, '후한의 왕손'으로 기록되었으며,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5길이 넘는 뽕나무가 있어 가마 덮개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비도 이 나무에 올라가 놀면서 “나도 이러한 덮개가 달린 가마(황제의 가마)를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숙부 유자경은 "함부로 말하지 마라. 구족이 멸한다."고 주의를 시켰다고 한다. 15살 때 유학해 노식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때 공손찬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그다지 독서를 좋아하지 않아 놀러다니거나 음악을 듣는 데에 몰두했다. 말수가 적고,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적의 난때 장각은 청주,유주,서주,이주,양주,연주,여주,형주등 중국영토를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비와 관우를 만나서 형제 처럼 지내다가 몇년뒤 유비를 만나게 된다. 유비는 탁현 마을이라는 곳에 물건을 팔려고 장비와 함께 배를 타고 나서는 순간 마을이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떄 유비,관우,장비가 처음 만나게 되었다.그리고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유비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관우와 장비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깊은 관계가 《삼국지연의》의 첫 부분에 나오는 ‘도원결의(桃園結義)’의 전설을 낳게 된다. 유비의 무기는 2개의 검으로 이름이 쌍곡(고)검이였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도원결의를 맺고 처음 전쟁에서 유비의 첫부인 '부용'낭자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영제 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황건적을 토벌하여 그 공적으로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었다. 독우가 공무 때문에 안희로 왔을 때 유비가 독우에게 만나기를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이에 곧바로 독우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곤장을 들고 200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수를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말뚝에 묶은 다음 관직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적혀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독우가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자 장비는 독우의 숙소로 쳐들어가 그를 포박한 다음 200회나 매질을 하였고, 유비는 이를 제지하고 관직을 그만둔 것으로 묘사한다. 얼마 후 유비는 단양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도위 관구의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다시 관직을 버린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하나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동탁 토벌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묘사한다.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청주 자사 전해와 함께 기주목 원소와 싸웠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평원상으로 임명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는다. 이때부터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 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196년(건안(建安) 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과 대치하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수장인 조표가 배신하여 여포를 불러들였고,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비가 취한후 여포의 장인인 조표가 충고하자, 조표에게 매질을 했기 때문에 그가 원한을 품고 여포를 불러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내고 유비는 소패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패로 돌아온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생각해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하후돈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는 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진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여 사로잡고 여포를 참수한다.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許都)로 귀환해 좌장군에 임명되고 조조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 유비가 왔을 때 조조의 참모 정욱 등은 “유비는 남을 섬길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한 뒤 그를 죽일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 헌제의 숙부인 거기장군 동승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칙을 받고,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똑같이 기술된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빙자해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난다. 그리고 원술을 멸한 후 유비는 하비를 점거하고 서주차사 차주를 죽인 후 관우를 남겨 하비를 수비하게 한 뒤 소패로 돌아온다. 이때 군현들 다수가 조조를 배반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명에 이르렀다고 정사에 기술되어 있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을 원소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때 조조는 왕충과 유대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나 패배하게 된다. 200년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고, 유비는 또다시 패배하여 원소 밑으로 몸을 의지한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고 업에서 2백리 떨어진 곳까지 가 유비를 만나는 등 유비를 대단히 환영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를 붙잡고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온다. 그리고 조조와 원소가 패권을 다투는 관도 전투가 시작되자, 유비는 여남에서 조조를 배반하여 원소에 호응한 황건적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주변을 침범하지만 조조군에게 패해 원소 진영으로 돌아간다. 전풍이 유비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 원소에게 유비를 죽일것을 진언했지만 원소는 이 진언을 기각하고 유비를 그대로 뒀다.
그 후 유비는 관우가 조조의 휘하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자 관우는 유비의 가족들과 같이 유비에게로 돌아왔다. 유비는 원소 밑을 벗어나려고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와 협공하도록 진언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명의 병사를 이끌어 여남에 진을 치고, 조조는 채양을 시켜 공격하지만 채양은 패배하고 전사한다. 조조는 원소를 격파한 후 몸소 남하해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비는 유표 밑에 몸을 의지한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받았고,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이후 형주의 호걸 중에 선주에게 귀부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자, 유표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은밀히 제어하였다.
정사의 주석에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비가 주연 석상에서, 변소에 가서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떠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아 벌써 허벅지에 살이 붙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탄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유명한 ‘비육지탄(脾肉之嘆)’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량, 채모 등이 연회를 이용해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토마를 타고 힘을 내라며 다그치자 놀랍게도 3길이나 뛰어올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적벽의 싸움에서 삼국정립까지
한편 조조는 하후돈과 우금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명을 내렸는데, 유비가 박망 지역에서 이를 막아낸다. 유비는 자기 진영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것처럼 꾸미고 복병을 써서 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208년 유표가 죽자 후계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다. 제갈량은 “유종을 없애고 형주를 지배해야 한다”라고 진언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때 유종의 측근과 형주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 하루에 겨우 10리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먼저 행군하여 강릉을 지켜야 한다”라고 진언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가 기병 5천 명을 급파했기 때문에 유비는 당양의 장판교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유비는 유표의 큰아들 유기가 있는 하구로 도망쳤다. 그후 유비는 손권과 동맹을 맺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상향과 결혼시켜 유비를 동오에 붙잡아두고 유비와 형주를 맞바꾸려 했으나 실패했다.
211년 익주목 유장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은 법정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촉의 지형, 병기, 인마의 적고 많음 등의 정보와 지도를 제공한 장송의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다. 드디어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맞이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예교위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출어 인심 장악에 힘썼다.
211년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장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했다. 때마침 장송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는데, 형 장숙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된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장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는 양희, 고패를 참살한다. 유비는 지름길로 관중에 이르러서, 여려 장수들과 군사와 처자들을 인질로 잡고, 병사를 이끌고 황충, 탁응 등과 함께 진격해 부성에 도착하여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이 유귀·냉포·장임·등현 등을 보내 부성에서 유비를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되어 패하여, 퇴각하여 면죽을 보전했다.
유장이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통솔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대는 더욱 강해지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해 군 아래의 현들을 항복시켰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百帝)성과 강주, 강양을 평정하였으며,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그리고 유비가 진군하여 낙성을 포위하는데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고, 공격당한지도 또 1년이 되었다.
214년 낙성이 격파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목을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켜 촉한의 기반을 구축했다.
215년 유비는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와 장비를 시켜 무도의 하변을 취하게 하고 그곳 이민족들과 연계하여 무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조조가 조홍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 하후연을 패퇴시켰다. 이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한중을 끝까지 사수하며 상용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위왕에 오른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한편 형주에 있던 관우는 위의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다가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전사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만다.
촉한 성립과 유비의 죽음
220년(황초 원년)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이때 촉한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헌제 살해 소식은 물론 그릇된 소문이었지만, 이것이 유비가 제위에 오르는 명분이 되었으므로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가 되었다. 연호를 장무(章武)로 하고, 유선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때 《삼국지연의》에서는 모든 신하가 칭제를 간하고 유비가 그것을 사양하였다고 나온다. 《삼국지》에서는 대부분의 신하가 간하고 유비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몇몇 신하가 반대한다. 특히 전부사마 비시는 상소를 올려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 고조께서는 초와 약정을 맺어 진나라를 격파시킨 사람을 왕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앞으로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비시전). 이에 유비는 비시를 좌천한다.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해한 것에 분노하여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었고,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조운과 제갈량 이를 말렸지만 유비는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장비는 부하였던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된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을 보내여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하게 하여 이릉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으로 추정하여 볼 때 유비의 군세는 4만 ~ 8만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의 연합군으로 추정된다. 촉군은 장수 풍습(馮習)이 무현에서 이이 등을 공격해 격파하고, 주태의 군대를 몰아세우는 등 초반 오군과의 전투에서 선전하였으나 손권이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한 후 전투의 양상은 달라지게 된다. 육손은, 오반을 선봉으로 내세워 유인한 후 복병 8천으로 공격하려는 유비의 계책을 간파하였고 지구전을 통해서 유비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으며 촉군과의 대치 국면을 유지한다.
6월, 육손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가지게 하여 화공을 통해 유비군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추어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곳의 진영을 격파한 후, 마인산에 포진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공격해 유비의 진영을 붕괴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죽은 군사가 수만 명이 되었다고 기록된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8월, 유비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으로 돌아온다. 겨울 10월, 손권은 유비가 백제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고 유비는 이를 허락하여 태중대부 종위를 보내어 답례하였다.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한 화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서거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Liu Bei 유비 Xuándé 玄徳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그 후 유비의 자손들은?
263년 촉한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劉禪)과 그의 일곱 아들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옯겨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을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들은 절멸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羞)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은 성한을 공략,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은 유비의 증손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을 만났다고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명하지만 그의 후손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평가
나관중의 촉한 중심주의로 인해 유비는 오랫동안 정의의 사자이자, 한 황실 정통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유비의 명성과 인덕의 경우는 정사의 여러 기술에서도 기술된 바가 있다. 연의에서는 당시 민중의 성군상과 유교적인 영웅을 묘사하기 위해 본인의 능력보단 그릇과 덕,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강조하여 묘사한 바가 있고 현대에 들어 유비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일부 학자들에게 무능한 군주였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유비와 그의 부하들과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었던 면이 있으며 살아서 치뤘던 대부분의 전투의 지휘와 정책의 시행은 유비 그 자신이 총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진수의 평은 다음과 같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 무제(조조)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진수의 평을 볼 때 진수는 유비를 조조와 함께 묶어 평가하고 있는데 진수의 조조에 대한 평가를 보면, 조조는 한신과 백기라는 중국역사상 기권간략의 대명사인 두 명장에 이름을 견줄 정도로 동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진수가 기권간략면에서도 최고라는 전제를 내린 조조와 대등한 관계로서 평가, 비교하고 있는 군웅은 유비뿐인 만큼,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진수의 평에서 유비의 역량은 조조에 미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있으나 진수가 유비를 조조에 떨어지는 무능력한 인물로 보고 있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이 군주의 그릇과 풍도를 평할때 유비를 가장 전설적이었던 군주인 한고조와 역량을 견줄 정도로 유비의 역량을 동시대 인물 중에서 최고로 친 것이다.
三國志인물학
|관우, 적토마로 날으다
Guan Yu
관우 關羽 운장 雲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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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관운장, 관우는 누구인가?
관우(關羽, ?년 ~ 219년)는 중국 삼국시대의 촉한의 무장이다. 수장 또는 장생이라는 자를 썼으나 나중에 운장(雲長)으로 바꿨다. 유비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관우의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힌다. 의리의 화신으로 민담이나 전승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되어 관제묘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에도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238-1의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인 동묘(東廟)는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라 하며 선조 34년인 1601년에 건립돼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동관왕묘(東關王廟)는 3세기의 중국 명장인 관우를 모시는 곳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일본군에 의해서 파괴된 것을,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여 재건하였다. 159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601년에 완공하였다. 1601년에는 동묘, 서묘, 북묘가 건축되었으나 현재는 동묘만 건재해 있다. 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9,315m²로 되어 있다. 인근에 수도권 전철 1호선·6호선 동묘앞역이 있다.
별명 미염공
태어난 곳 하동군 해현
죽은 곳 맥성
최종 계급 5호장군 전장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 박망파 전투
적벽 대전
기타 이력 관성제군
Guan Yu
관우 關羽 운장 雲長
생애
관우는 도성 냑양의 서쪽에 위치한 하동(河東)군 해(解)현 출신으로,관우의 원래의 성은 고씨였으므로, 후한관우의 약혼녀 '이령'낭자라는 자를 끌고가서 주책스러운 짓을 하려다 말 고을의 악덕 지주를 살해하게 돤다, 그 관우의 약혼녀 '이령'낭자는 자결을 하게 되고, 그 죄로 고향에서 추방되었고, 관우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산속에서 지내다가 몇 년 뒤 산에서 내려와 '유곡관'(관문이름)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유곡관의 문지기가 수배자를 찾고 있었다,관우는 유곡관의 끝자를 따서 성을 '관'씨를 바꾸고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후로 부턴 관우는 성이 '관' 이름은 '우'로 바뀌게 된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와 함께 나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하루 종일 관우는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관장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키가 9척(약207센티미터), 수염 길이가 2자(=2척, 약60센티미터)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다만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때의 무기는 아니고(한나라 때에는 언월도가 아예 없었으며, 또한 (언)월도는 북방 민족의 무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미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 밑에서 평원상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의 허락을 받아 화웅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에게 일기토를 걸어 몇합 못견디고 죽임을 당했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한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순유(荀攸)의 헌책에 따라 원소군의 배후를 찌르는 움직을 보여 안량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다른 원소군이 이에 반응하여 퇴각하는 와중에도 안량은 적은 병력으로 백마진에 남았고 이를 본 조조는 장료와 당시 객장이던 관우에게 즉시 공격을 명했다. 이때 원소는 이미 유비의 "관우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얘기를 하면 우리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 말에 설득당해 안량에게 관우를 보면 공격하지 말고 영접하라고 명한다. 때문에 안량은 관우를 보자 저항하지 않고 인사를 했는데 관우는 무방비상태의 안량을 기습하여 안량의 목을 가지고 왔다.
삼국지연의는 관우가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삼국지에는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의 책략에 빠진 문추를 서황(徐晃)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쫓지 말라”라고 하며 조용히 보내준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이때 관우는 여포가 소지하고 있던 적토마를 조조에게서 물려받았다. 하지만 말(馬)의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허구이다. 왜냐하면 이당시의 적토마의 연령은 20살을 넘어서 인간의 나이로 따진다면 120살을 웃돌기 때문이다.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과 문추를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진다.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물론 이 둘은 사실이 아니고 삼국지연의의 저자가 꾸며낸 이야기이다.
관우는 유비와 다시 만나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지한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 평정에 착수하자 관우는 수백 척의 군선을 모아 하구로 향해 오나라의 손권과 연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 대전에서 대승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쳐라”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겟다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관우와 노숙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하였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또 관우의 초인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일화가 삼국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식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방덕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허도를 떠나는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와 장제 등이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건의를 듣고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키려 해서 사신으로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을 관우에게 보냈지만 관우는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으로 온 제갈근에게 욕설과 협박을 하는 등의 무례함을 범하였다. 관우의 번성 포위 작전 때 손권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자 손권을 오소리에 비유하며 모욕하였기에 손권은 관우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관우의 무례함이 극에 달하는 행동으로 인해 분개하던 손권은 조조와의 요청을 수락하고 관우에게 기습을 감행하여 강릉을 점령하였다. 손권은 관우를 공격하였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생포하였다. 손권은 그래도 손상향이 유비에게 시집간 것도 있고 해서 관우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셈치고 관우를 살려두어 유비로 하여금 조조에게 대적하게 하려 했지만 관우는 손권에게 독설을 퍼붓는 등의 무례를 범하며 이를 거절했다. 손권은 어쩔 수 없이 관우를 참수하였다. 관우의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으나 조조는 관우의 몸과 목을 맞춰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게 아뢰어 형주의 왕으로 표하게 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우의 후손들은 이 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Guan Yu
관우 關羽 운장 雲長
인물 평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를 평하길, “관우는 만 명을 대적할 만한 용맹한 장수이며 조조에게 보답을 하는 등 국사(國士)의 풍격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냉정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으로 결국에는 실패하였다”라고 했다. 또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은 관우는 거만하여서 유비가 오호대장군의 으뜸으로 세울 때 황충을 "황충같이 늙어빠진 장수가 어찌 저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비난하였는데, 육손은 이 점을 이용하여 관우를 벨 수 있었다.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
공자의 묘를 문묘(文墓)라고 하듯이, 관우의 묘를 무묘(武墓)라고도 하여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으며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무신(武神)으로 받들어지고,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관우와 적토마
적토마가 관우와 일생을 함께하였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관우가 적토마를 물려받았을 때에는 이미 십여 세에 이르른 적토마는 "늙은 말"이었고, 관우가 죽을 때에는 삼십 세가 넘는, 인간으로 치면 180세가 넘는 말이기에 살아 있기는 힘들다.
이것은 관우를 치료한 화타 이야기 만큼이나 유명하지만, 관우를 치료한 의원이 화타가 아니듯이, 관우와 일생을 함께한 말이 적토마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관우가 생포당했을 때 적토마는 붙잡혀있다가 슬피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三國志인물학|장비, 장팔사모의 맹장
Zhang Fei
장비 張飛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三國志인물학|장비, 장팔사모의 맹장
촉한 건국공신, 장비는 누구인가?
장비(張飛, 167년 ~ 221년)는 중국 삼국시대의 맹장으로 촉한의 건국 공신이다. 자는 익덕(益德)이다.
유비, 관우와 함께 황건적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 정벌시, 엄안을 회유하여 파촉 정벌의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 태수 자리에 올랐고 한중 정벌에서 위나라의 장합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를 위해 출정하는 도중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되었다.
장남 장포는 요절했고, 차남 장소가 가계를 이었다. 장비의 장녀와 차녀는 모두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포가 촉한을 위해 활약하고,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다.
Zhang Fei
장비 張飛
생애
삼국지 연의를 보면 장비 익덕은 본래 술과 고기를 파는 상인이었는데, 황건적의 난때 장각은 청주,유주,서주,이주,양주,연주,여주,형주등 중국영토를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우를 만나서 형제 처럼 지내다가 몇년뒤 유비를 만나게 된다. 유비는 탁현 마을이라는 곳에 물건을 팔려고 장비와 함께 배를 타고 나서는 순간 마을이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떄 유비,관우,장비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장비는 무기로 장팔사모(丈八蛇矛, 팔 척짜리(18자)사모)를 썼다고 하는데, 창두가 뱀처럼 구불구불했고 길이가 1장 8척(3m 60cm)이었다 한다. 사모(蛇矛)가 처음 등장한 때가 동진(東晉) 이후이므로 장팔사모 역시 실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또한 터무니 없는 길이를 볼 때 당시 사람들의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장비는 일부 책에서 성주가 준 자신의 동생 인육을 먹고 죄책감에 휩싸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결의형제를 맺어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비는 용맹하고 과격한 성격이고,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즐긴다. 후에 황건적 토벌에서 부장 등무를 토벌하는데, 유비의 스승 노식이 환관의 참언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호송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호송병을 죽이고 노식을 구하려고 했지만 유비에게 제지당한다. 또한 황건적의 수령 장각에게 패한 동탁을 구해주지만 유비를 경멸하자 장비는 이에 분노해 동탁을 살해하려고 했다. 이때도 유비가 그를 제지했다. 마침내 황건적 토벌의 공로로 유비는 안희현의 현위에 임명된다.
술취한 장비 케릭터를 희화화하여 그린 일본의 목판화
《삼국지연의》에서는, 순시하러 온 독우가 뇌물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자 장비가 분노하여 독우를 기둥에 묶고 매질을 하였다. 유비는 장비를 제지하고 현위를 사직하고 도망가게 된다. 그러나 《삼국지》에서는 오히려 유비가 독우를 매질했다고 되어 있다. 그 후 동탁과의 싸움에서 장비는 여포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공손찬을 돕고, 여포와 단기필마로 싸운다. 관우와 유비까지 가세하자 여포는 패주한다. 그 후에는 유비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밑을 떠돌면서 그들을 군사 면에서 돕는다. 정사에서는 공손찬이 동탁과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 객장이었던 유비와 관우, 장비도 동탁과의 싸움에는 나서지 않았다. 여포와의 대결은 관우와 장비의 무용을 보여주기 위한 허구이다.
이윽고 도겸이 죽자 유비가 잠시 서주를 맡게 되고, 조조에게 패한 여포가 유비를 찾아와 의지하려 들었다. 장비는 여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에게 결투를 신정했지만 유비가 이를 말리고 관우가 장비를 데리고 나갔다. 또한 조조의 군사 순욱이 내건 ‘두 호랑이가 서로 먹이를 다투게 하는 계략’으로 황제로부터 여포 토벌의 밀칙을 받자 유비는 이 계략을 간파하고 장비를 제지했다.
이번에는 순욱에게 ‘호랑이를 몰아내고 이리를 잡는 계략’에 걸려 유비는 원술 토벌의 조칙을 받는다. 유비가 출정하고, 장비는 금주 서약을 하고 서주를 지키는데, 그래도 술을 끊을 수 없어 조표에게 술을 강요하며 매질했기 때문에 조표의 원한을 산다. 이에 조표는 밤중에 여포를 불러들였다. 장비는 조표를 죽이지만 유비의 처자를 구하지 못한 채 혼자 달아났다. 장비는 책임을 지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유비가 제지하자 흐느끼면서 포기한다. 그 후 유비와 여포는 화해하지만 장비가 산적으로 변장해 여포의 군마를 탈취하자 분노한 여포에게 공격당한다. 유비 일행은 조조에게 몸을 의지하고 조조와 공동으로 여포를 격퇴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원술을 토벌할 때 관우가 단기필마로 싸워 애먹었던 기령을 토벌한다. 그 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조조가 파견한 유대와 왕충과 대치한다. 장비는 일부러 술에 취해 한 병사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 병사를 유대에게 투항하게 만들어 장비가 야습한다는 사실을 밀고시킨다. 유대는 진지를 비우고 복병을 준비하지만 장비가 의표를 찔러 바깥쪽에서 공격, 유대를 생포했다.
그러나 조조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유비는 패배하여 관우, 장비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장비는 망탕산에서 무사히 탈출해 고성현령을 쫓아내고 그 곳에 독자 세력을 구축해 눌러앉았다. 이 무렵 장비는 나무를 하러 간 어떤 아낙 한 명을 강제로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는데 이 여자가 하후패의 여동생인 하후씨(夏候氏). 이윽고 조조 밑을 떠난 관우가 만나러오자 장비는 배신자라고 말하며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관우는 자기를 추격해온 채양을 토벌한 것으로, 겨우 장비를 납득시켰다. 그후 형주의 유표 밑에서 몸을 의지할 때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만나게 되는데, 동행한 장비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에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했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는데, 조조는 이를 추격해 당양의 장판에서 따라잡았다. 유비는 장비에게 20기병을 지휘해 배후를 막아내도록 했다. 장비는 강을 앞에 두고 다리를 끊고,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장팔사모를 치켜들며 “내가 바로 장비이다! 덤벼라!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 하고 호령했다. 감히 누구도 접근하지 못해 유비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 이는 경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판교의 금강역사’라는 유명한 장면인데, 《삼국지연의》에서는 다리 위에서 장비가 말 위에 홀로 우뚝 버티고 서서 조조군을 퇴각시킨다.
그 후 적벽 전투의 승리를 거쳐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자, 장비는 의도태수(宜都太守)·정로장군(征虜將軍)에 임명되고 이후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전임되었다. 유비가 장로 토벌을 위해 익주로 들어갔을 때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때 장비가 조운과 함께 유선을 다시 데려왔다. 곧이어 유비가 유장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방통이 전사하는 등 궁지에 빠지자,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구원에 나서서 서로 분담하여 군현을 평정했다.
그는 강주에 도착해 유장의 부하였던 파서태수 엄안을 격파하려고 욕을 퍼부었으나 엄안이 그에 대한 반응이 없자 장비는 샛길을 만들아 파서를 냅두고 돌아가려고 하는 줄 안 엄안은 성밖으로 나오나 장비는 그 뒤에 매복해있어서 엄안을 생포한다.장비는 엄안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자 이에 감탄하고 그를 용서해 후하게 대접한다. 이리하여 통과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어 성도에서 유비와 합류, 익주가 평정되자 보상금을 하사받고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승진한다.
다른 유장의 부하들이 전부 항복하는 가운데 유독 장임만은 항복을 완강히 거부하여 장비는 장임을 토벌하기 위해 장임의 군대와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장비는 장임과 아주 격렬한 일기토를 한참동안이나 벌였으나 결국 장임을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하고 만다.
적벽 전투에서 익주 평정에 걸쳐 방통이 뇌양현령에 임명되고 매일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장비가 순시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방통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복한다든지, 유장을 구원하러 장로가 파견한 마초와 단기필마로 싸우는데 밤이 되도록 화톳불을 켜놓고 싸우지만 끝내 승부가 나지 않았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하후연과 장합을 한중에 주둔시켜 종종 파(巴)의 경계선을 침공했다. 장비는 유비의 명을 받아 탕거로 진군, 위나라의 장합과 50일이 넘도록 서로 대치했다. 장비는 정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에게 공격을 감행해 와구에서 격파하고, 장합은 겨우 부하 10여 명 남짓 데리고 사잇길을 따라 달아났다. 219년(건안 24년) 유비가 한중을 평정하고 한중왕에 책봉되자 장비는 우장군 가절에 임명되었다.
나아가 221년(장무 원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장비는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하고 사례교위(司隷校尉)를 겸임해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진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파서에서 장합과 대치했을 때, 장비가 또다시 술에 빠지게 되자 유비가 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것을 책략으로 간파하고 진중 위문품으로 맛 좋은 술을 보냈다. 장비는 변함없이 술을 마시고, 기다리다 지쳐 오금이 저린 장합이 야습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모든 병사가 빠져나가 아무도 없었으며, 이 틈에 장비는 장합의 세 성채를 탈취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죽은 뒤에는 매일 큰소리로 울고, 기분을 달래려고 술을 마시고서는 취해 난폭해지는데, 부하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비는 이를 염려하여 언제나 장비를 훈계하였다.
유비가 오나라 토벌에 나서자 장비는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출진에 앞서 부하 장달과 범강에게 “3일 이내에 전군의 전투 준비물을 갖추라” 는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이 좀더 시간을 달라고 말했는데, 장비는 벌컥 화를 내며 50대씩 곤장을 치며 기한에 못 맞추면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범강과 장달은 장비에게 앙심을 품고 장비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틈에 살해하고, 그 목을 오나라에 가져다 바쳤다. 향년 55살이었다. 유비는 장비의 부관으로부터 서찰이 도달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 장비가 죽었구나!” 하고 한탄하였는데 유비의 예측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환후(桓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비를 아이콘으로 한 게임 케릭터
일화
관우가 고기들은 항아리의 뚜껑을 들어올리고 그 속에 들은 고기를 나누어 주었는데,그 일로 관우와 싸웠다가 유비의 중재로 도원결의를 맺었는데, 이는 장비가 다른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면 샘을 내는 못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三國志인물학
|동탁, 포악무도한 폭정자
Dong Zhuo
동탁 董卓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三國志인물학
|동탁, 포악무도한 폭정자
포악한 폭정자, 동탁은 누구인가?
동탁(董卓, 139년 ~ 192년 5월 22일)은 후한 말의 정치가이다. 자는 중영(仲穎)이다. 후한 황실을 배경으로 삼아 폭정을 휘두르다가 여포(呂布)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동탁은 완력이 뛰어나 두 개의 궁대(弓袋)를 몸에 차고 말을 몰면서 어느 손으로도 활을 맘대로 쏠 수가 있었다고 한다.
三國志인물학|동탁, 포악무도한 폭정자
Dong Zhuo
동탁 董卓
생애
농서군 임조현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의협적인 무리와 함께 강족 지역을 방랑하여 유력자와 친분을 맺었다. 그후 향리에 돌아와 농사에 전념하였는데,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갈이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강족은 그 의기에 감격하였다. 또한 병주 정벌에서 전공을 세우자 포상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동탁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수많은 전과를 올려 승진을 거듭하여 중랑장이 된다. 그후 황건적 토벌에서 패배하여 면직되지만 한수 등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복직되어 진압을 맡았다. 이 전투에서 수만 명의 강족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지만 동탁은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소환하여 소부로 삼고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동탁은 계속 칙명을 거역했다. 이때문에 일찌기 손견(孫堅)은 군율을 무시하는 동탁을 살려두면 절대 안된다고 장온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무시하였고, 훗날 동탁은 자객을 보내어 장온을 죽였다. 연의에서는 동탁이 베푸는 연회 중에 여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장온을 밖으로 끌고가서 죽여버린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 무렵 하진(何進)이 환관 제거를 모의하기 위해 전국의 제후들을 소집하였는데, 동탁도 이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이 주살되고, 환관들에게 연행된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 : 헌제)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낙양으로 들어왔다. 이때 동탁의 병사는 3천여 명밖에 없었으나,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서 밖으로 군사를 보내 다음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시켜 대군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으로 하진·하묘(何苗) 형제의 군사를 병합하는 데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포를 부추겨 집금오 정원(丁原)을 제거하도록 하고 그 군대를 흡수했다. 그리고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을 면직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마자 태위로 승진한다. 소제를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킨 뒤, 모후인 하태후와 함께 시해하고 진류왕을 옹립시켰다.
동탁의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중에 주민들이 춘절을 즐기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목을 베고, 여자는 탈취하여 병사들에게 첩으로 주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함부로 폭행을 가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만행을 참을 수 없어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지만 실패하여 살해되고 만다. 조조(曹操)도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하지만 실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동탁은 장안(長安) 천도를 강행해 능묘를 파서 보물을 도굴하고, 자신이 사는 곳에 성을 쌓아 30년 분의 식량을 비축했다. 주연회를 열 때마다 죄인을 끌고와 혀와 팔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큰 솥에 삶기도 했다.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고 사람들이 서로 무고하였기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또한 오수전을 녹여 조그만 동전으로 주조하지만, 그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고 모양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장은 다름 아닌 예전에 장온에게 동탁을 죽여야만 한다고 진언했던 그 손견이였다. 이에 동탁은 여포가 나서려 했지만 동탁의 부하로서 도위의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화웅(華雄)이 '닭 잡는 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게 아니다'라면서 나서게 된다. 처음에는 원술이 병량을 보내주지 않아 화웅이 우세했지만 원술이 병량을 제대로 조달하기 시작하자 손견은 승승장구하고, 결국 양인이라는 곳에서 손견은 일기토로 화웅을 척살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견이 아니라 당시 마궁수였던 관우가 조조에게 허락을 받고 필마단기로 나가서 화웅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여포가 직접 나섰지만 손견의 활약으로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동탁은 이유(李儒)의 조언에 따라 낙양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장안으로 도망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낙양에 불을 지르는데 이때 이유는 홀로 남아있다가 궁녀 한 명을 살해하고 그 궁녀의 시체의 목에 옥새를 매달아서 우물에 던져버린다. 반동탁연합군에 속한 제후들이 옥새를 놓고 서로 싸우게 만들려는 이유의 계략이였던 것이다. 이 계획이 적중되어 낙양의 화재를 진압하던 손견에 의해 옥새가 발견되고, 옥새를 요구하는 원소와 거절하는 손견의 불화로 인해 반동탁 연합군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에 원소는 유표(劉表)를 개입시켜, 결국 손견을 죽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삼국지 중국제 연속극 장면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연스레 해체되었지만 동탁의 전횡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92년 4월 왕윤(王允)은 동탁의 심복 여포를 꾀어내어 동탁 살해를 모의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양녀 초선(貂蟬)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쓰여있다. 이리하여 동탁은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그 때 호위병에게 제지당하고, 조칙을 받은 여포에게 살해당한다. 동탁의 머리와 사체는 저잣거리에 내걸렸는데, 뚱뚱한 몸의 배꼽에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
인물평
젊어서부터 배포도 크고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도 있어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는 동탁은 하진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입성하는 과정에서도 적은 군사를 대군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를 부릴 줄 알았고, 낙양에 들어와서는 소제를 보호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장수 여포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단기간에 승승장구했다.
사람의 능력 또는 그릇의 크고 작음은 그 지위가 높고 귀해질 때 가장 잘 드러나는지, 그는 정상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이제까지 쌓아올린 것들을 와르르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큰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권력을 손에 쥐자 곧바로 이를 사물화했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행동했다. 미인계에도 쉽게 걸려들 만큼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도 드러냈다. 그런 그에게 온전한 참모 또한 있을 리 없었으니 제동장치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독재와 사치, 향락의 길로 마구 치달았다. 전투력이랄 것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왕윤의 연환계에 걸려들어 여포가 풀어놓은 자객에게 비명횡사, 독재자의 말로를 몸소 보여줬을 뿐이다. 그는 삼국지 제일의 악역으로 평가받는다.
출중한 무술로 산천초목까지 떨게 했던 여포. 용맹성이란 점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지만 그에게는 ‘머리’가 없었다. 판단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동탁과는 배짱이 맞아 그의 양아들이 됐고 지근 거리에서 그를 지키는 경호실장 노릇을 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해타산으로 맺어진 것이었다. 의(義)로써 형제를 맺은 유비·관우·장비와는 달리 그 이해구조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런 문제가 터졌을 때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머리도 없었기에 한번 불이 붙으면 그것으로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동탁과 여포 사이에 초선이라는 미인이 끼어들자 두 사람은 자석의 마이너스극이 마이너스극을 만난 것처럼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결국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인간관계가 무엇에 바탕을 둬야 하는지, 인간이 왜 사리분별력을 갖춰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반면교사 노릇만큼은 톡톡히 해냈다.
여포는 독재자 동탁을 주살했다는 이유로 한때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탁의 잔당에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의탁할 곳을 찾아 헤매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 시절 유비 또한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받았고 심지어는 빈말일지라도 “나 대신 이 땅을 다스려 달라”는 부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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