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민족 시원, 만주] 동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

醉月 2010. 4. 20. 08:45

중국 역사서 <구당서>에도 대조영은 ‘고려별종’

[한민족 시원, 만주] 동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1)
말갈은 나라 아닌 동북방 주민 통틀어 부르는 말, 신라인이 발해의 일본사신 통역…고구려 말 방증

 

사극 ‘대조영’이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 통해 더 친숙

발해는 한국방송의 사극 ‘대조영’이나 가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를 통해 국민에게 더 친숙하게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나는 1996년부터 누리집(www.palhae.org)을 만들어 발해를 알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서태지의 노래의 힘이 더 컸고, 대조영 사극의 영향이 더 컷 던 것을 인정한다.

발해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발해사가 왜 한국사인가’라는 것을 규명하는 작업부터 출발한다. 이는 ‘고구려사가 왜 한국사인가’라는 물음과도 맥이 닿는다. 그만큼 고구려와 발해가 밀접하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서 우리는 ‘고구려와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근거’를 밝혀내야 한다.


고구려를 한국사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명확하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등에 기록이 남아 있고, 이미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돼 왔다. 그러나 발해사는 사정이 좀 다르다. ‘고구려본기’와 같은 명확한 근거와 기록이 없다. 당나라 입장에서 기록한 <구당서>와 <신당서>의 북쪽 오랑캐 열전의 하나인 ‘북적열전(北狄列傳)’에 실린 것이 고작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서술한 역사책을 중심으로 발해사를 복원하다 보니, 80년대부터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이 터져나온 것이다.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정책이 그것이다.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을까? 아니면 당나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자주성이 있는 나라였을까? 발해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고구려 옛 영토 대부분 차지하고 사방 5천 리 경영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은 영토, 문화, 종족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고, 오히려 동북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발해는 9세기 말엽 제10대 선왕과 제13대 대현석 시대에 사방 5천 리를 경영했다. 이 시대 발해는 남쪽으로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쪽은 요하 경계에 이르렀다.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 남단에 뻗쳐 있었다.

» 발해는 고구려의 2배에 이르는, 한민족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경영했다. 발해 강역도. 한규철 교수 제공

따라서 발해의 강역은 고구려의 1.5배, 신라의 3~4배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고, 고구려인이 살던 곳에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인구를 370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멸망 뒤 당나라, 신라 등으로 이주한 유민은 2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 고구려인은 자신들의 영토에 세워진 발해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다종족 국가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705년간 지속하면서 초기의 옥저나 예 등의 유민들도 모두 고구려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멸망 시점의 고구려는 초기 고구려족이 아닌 다른 종족으로 재구성한 고구려다. 이들이 곧 발해인의 주축이 되었다.

서울 사람이 부산 출신을 ‘시골 사람’이라고 부르는 꼴

그런데 ‘동이열전’이나 ‘북적열전’에 6세기 이후 고구려인과 함께 말갈인이 등장하면서 발해의 종족 구성을 확정하기 모호하게 하였다. 발해의 종족 계통을 밝혀내는 것의 핵심에 ‘말갈’의 실체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와 다른 계통인 말갈의 왕조였다고 하고,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렇다면, 발해사는 고구려 유민의 역사인가? 말갈의 역사인가?

지배층만 고구려인이었다면 발해는 만주사의 입장에서 말갈국이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말갈은 고구려의 피지배 주민들을 멸시하는 호칭이자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을 통틀어 부르는 범칭이었다. 말갈이란 종족 이름은 스스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당나라나 고구려인들이 고구려 피지배 주민들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라는 것이다. 발해가 ‘진(振)’으로 건국할 때도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멸시해 불렀다. 말갈의 선조로 알려진 숙신(肅愼)과 읍루도 중국 왕조가 멸시해 부른 종족 이름이었다.

또 왕조시대에 나라 사람인 ‘국인(國人)’이란 수도나 도성 중심의 사람만을 의미했다. 신라 왕실이 멸망할 때 <삼국사기>가 ‘신라를 경주로 고쳤다’고 기록한 것은 그런 역사관의 산물이다. 고구려시대에는 평양 사람만 ‘고구려인’으로 불렀고, 변방인은 그들과 종족이 다른 ‘말갈인’일 뿐이었다. 오늘날 서울 사람들이 부산에 사는 사람들을 ‘시골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말갈은 고구려 시대에 변방 주민으로 도성과 차별 받던 고구려인

»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있는 상경용천부 유적지 입구. 발해의 세 번째, 다섯 번째 수도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영상화면 캡쳐

지금까지 발해를 말갈이라고 주장했던 근거는 <신당서>의 기록이다. <신당서>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을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100년 정도 먼저 나온 <구당서>는 대조영을 ‘고려별종(高麗別種)’이라고 적었다.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의미다. <신당서>의 ‘속말말갈 대조영’이란 ‘속말수(송화강) 지역 시골사람 대조영’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말갈은 지역 이름이다. <구당서>가 대조영이 고구려 출신임을 강조한 기록이라면, 신당서는 대조영이 속말수 지방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결국, 고구려 말갈도 고구려인이었고, 후에 발해가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흑수말갈과 같이 고구려계의 주민으로 볼 수 없는 종족들도 있었다. 이들이 말갈의 대명사가 돼 예맥·부여계의 주민인 백두산 말갈이나 송화강 지역의 속말말갈과 혼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발해의 주민이 된 말갈은 고구려 시대에 변방 주민으로 도성 주민과 차별을 받아오던 고구려인이었다.

독립 연호 쓰고, 당을 공격한 자주국가

발해가 융성하던 7세기로부터 10세기 전반까지 동아시아는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주변국들에 대한 책봉이나 조공 질서가 이를 반영한다. 그렇다고 당나라와 주변국 관계를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당나라에 자주성이 강했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신당서>는 “발해가 행정기구명이나 시호와 연호를 ‘사사로이’ 사용하였다”고 기록했다. 발해는 15대 왕 가운데 초대 고왕부터 10대 선왕까지 연호를 사용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주변 나라들이 당의 연호를 사용한 것과 대조적이다. 신라는 통일 전인 진덕왕 4년(650년)부터 당의 연호를 썼고, 통일 뒤 본격적으로 당의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는 당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정도로 자주성이 있었다. 제2대 무왕의 동생 대문예는 732년 ‘발해의 허락없이 당과 가까워지려는 흑수말갈을 응징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당으로 도망을 쳤다. 이에 분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를 비호하는 당을 공격하였다. 해로와 육로를 통해 당을 공격해 등주자사 위준을 죽인 일은 당과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 되찾은 고려국” 자칭

» 상경용천부의 왕궁은 오문과 5개의 궁전으로 구성되었고, 왕이 배를 타고 놀던 어화원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상경용천부 복원도. 출처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발해와 고구려, 말갈의 관계를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구당서>의 기록이다. <구당서>는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전한다. 풍속이나 문화 면에서 발해와 말갈의 관계를 기록한 역사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발해가 말갈족의 왕조라면 <구당서>나 <신당서>에 발해와 말갈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찾고 부여의 풍속을 가지고 있는 고려국”이라고 자칭하였다. 풍속은 대체로 관혼상제를 의미하고, 상당한 기간을 두고 형성한 생활 공동체에서 형성된다. 때문에 풍속의 범주에는 언어도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발해의 언어가 같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발해는 그들의 왕을 토착어인 ‘가독부(可毒夫)’라고 불렀다. 처음부터 황상이나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한 것은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속일본기>를 보면 740년 발해 사신 이진몽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자 통역으로 신라인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말이 서로 통했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신라의 말이 서로 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발해가 영토, 문화, 종족적인 측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자주적인 국가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해사는 당연히 한국사의 일부이며, 발해사의 주인공이 우리 민족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한규철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pjc@hani.co.kr

» 한규철 교수

◈한규철 교수= 경성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사단법인 고구려발해학회 회장. 한국고대사학회 고문. 부산경남사학회 회장, 중국의 고구려사왜곡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고구려연구회 회장, 러시아 사회과학원 극동역사고고연구소 초빙교수, 중국사회과학원 흑룡강성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일본 국학원대 대학원 객원연구교수. ‘발해의 대외관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발해사 연구자다. 저서로 ‘발해의 대외관계사-남북국의 형성과 전개’가 있으며 다수의 공저, 논문을 발표했다. 학술 활동 외에도 언론 기고와 각종 강연, 누리집 활동을 통해 발해사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누리집 www.palhae.org

발해-신라, 대결·갈등 속 민족공동체 의식 ‘싹’

[한민족 시원, 만주] 동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 (2)
초기엔 39개 역참 갖춘 ‘신라도’ 통해 긴밀 교류
동족보다 외세와 손잡은 대가, 남북한 교훈으로

문화적인 측면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증거를 더 살펴보자. 문화적인 계승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덤이다. 장묘문화가 가장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혜공주 묘(문왕의 둘째딸)나 정효공주 묘, 삼령분 등 발해의 왕릉과 지배층의 석실묘는 발해가 고구려의 풍속을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묘제는 대체로 돌을 많이 이용하고, 당나라는 벽돌을 주로 쓰는 것이 특징이다. 말갈의 전형적인 묘제는 흙구덩이에 매장하는 토광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고구려나 발해유적에서 토광묘가 나온 것을 증거로 발해와 고구려를 말갈계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토광묘는 당시 고구려나 발해의 서민들 대부분이 사용하던 매장 방식이었고, 인류 보편의 매장문화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발해의 석실분이나 석관묘 등의 돌무덤 떼 주변에서 토광묘가 함께 발굴되는 것이다. 토광묘를 근거로 발해를 말갈계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다.

» 발해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사실은 온돌 유적을 통해 입증된다. 함경도 신포시의 발해유적 오매리 절터의 구들(왼쪽·출처 조선유적유물도감)과 거란유적지인 몽골친톨고이 집터유적에서 발견된 불에 그을린 구들. 한규철 교수 제공


무덤과 온돌, 발해의 고구려 계승 강력한 증거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설명하는 중요한 유물이 온돌이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주거 문화가 잘 묘사되어 있다. “산골짜기에서 산다. 집은 띠로 이엉을 엮어 이어 짓는다.(중략)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 장치를 하였다.” <구당서>가 이렇게 쓴 것은 고구려인의 주거생활이 당나라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한국학계에서는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본다. 실제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유적지에서 온돌이 발견되었고, 발해 유적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의 궁성 서쪽 ‘침전터’와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발해 유적지에서 구들 흔적이 발견되었다. 온돌은 말갈 지역으로 불리는 고구려와 발해의 변방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당나라 유적지에서는 나왔다는 보고가 없다. 온돌 유적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문화의 독자성과 계승성을 증명한다.

 

남북국시대, ‘신라도’의 의미

이렇게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한국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나? 이는 발해와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조선시대 역사학자인 유득공(1749~1807)이 이 시대를 ‘삼국시대’에 이은 ‘남북국시대’로 규정하였고, 이것이 한국사학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되었다. 삼국이 서로 협력하고 싸우면서 삼국시대를 형성했던 것처럼, 남북국도 교섭과 대결을 통해 ‘역사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남북국은 역사공동체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적극적인 교섭과 대결을 펼쳤나? 우선 ‘신라도’라는 것이 있다. 신라도는 발해의 5가지 대외 교통로 중의 하나다. 신라 천정군(지금의 함경남도 덕원)에서 발해의 책성부(중국 길림성 훈춘)까지 연결하는 길로, 39개의 역참이 있었다고 기록된다. 두 나라가 긴밀하게 교류했다는 증거이다.

» 발해의 대외 교통로. 이 가운데 신라로 가는 신라도는 신라 천정군(지금의 함경남도 덕원)에서 발해의 책성부(중국 길림성 훈춘)까지 연결하는 길이다. 한규철 교수 제공

발해는 개국하자마자 신라 왕실과 접촉을 시도한다. 당의 방해 속에서 어렵게 발해를 개국한 고왕 대조영은 즉위 2년째인 700년에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멸망한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최치원은 당에 보낸 편짓글에서 “(발해가)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인접하기를 청하였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라의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고 전한다. 발해 대조영이 대아찬 벼슬을 받은 것을 명분으로 신라가 발해 건국을 묵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에 조공이나 다른 정치적 배려를 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발해 건국 초기 남북이 당으로부터 일정한 자주성을 확보하면서 평화적으로 교섭한, ‘근친원교’(近親遠交) 외교의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발해의 신라 협공 계획

그러나 두 나라의 평화적 교섭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라와 발해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것은 732년에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가 이 전쟁에 끼어들면서 발단이 되었다. 발해와 당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부터 대립관계에 있었다. 당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의 지배 아래 있는 흑수말갈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것이 발단이 돼 발해가 수륙양면으로 당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는 발해가 아니라 당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발해의 남쪽 국경에 파견하였다. 험한 날씨 탓에 신라군이 중간에 철수하면서 두 나라가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국은 본격적인 대결 국면에 돌입한다. 발해 3대 문왕은 일본과 함께 신라를 협공하려고 ‘신라협공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안사의 난’ 등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본 내부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이렇게 군사적 긴장관계에 놓였던 두 나라는 신라의 국내 정치 변화에 따라 다시 교섭 국면에 돌입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원성왕(790년)과 현덕왕(812년)이 각각 ‘북국’(발해)에 6두품급의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원성왕과 현덕왕은 모두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이 약했고, 국내의 정치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해와 교섭을 활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 발해의 대표적인 불교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대형석등. 이 대형석등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의 흥륭사 절 안에 있다. 박수진 피디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파병

남북국의 교섭은 8세기 초 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서고,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 협력을 맺음으로써 다시 대결 구도로 치달았다. 당나라는 819년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에 3만 명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이를 수용했다. 당시 3만 명이면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한국사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고 할 만 하다. 이사도는 고구려계인 이정기의 손자로 산둥반도에 진출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은 고구려계로 분류할 수 있는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신라를 끌어들여 남북국 대결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셈이다. 이 사건으로 신라와 당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되었지만, 남북국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신라는 826년 1만 명을 동원해 발해와 국경에 성을 쌓는 등 발해를 상대로 한 국방력을 강화했다.

거란에 망한 발해, 거란을 도운 신라

발해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발해가 멸망기에 접어든 10세기, 국력이 기운 발해 왕조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거란국지>는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발해의 마지막 황제 대인선이 은밀히 ‘신라(후삼국)의 여러 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해 약속을 받았다고 전한다. 누란의 위기 속에서 발해는 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을까? 두 나라가 비록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삼국시대 이후 이어온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를 돕기로 했던 신라는 약속을 어기고 발해 대신 거란을 도왔고, 그 공으로 선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신라가 거란을 돕는 데 군사적 지원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국제정세로 보면 신라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거란을 돕는 꼴이 된다. 발해는 결국 신라의 도움을 받지 못했거나, 신라의 방관으로 거란에 망한 셈이다.

 

남북국시대의 교훈, 근친원교인가, 원교근공인가?

남북국시대 교섭과 대결은 오늘날 어떤 교훈을 주나? 남북 교섭에서 신라의 지배세력들은 국내 정치의 위기를 발해와의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반면 발해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늘 긴장 속에서 신라와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또 남북국은 당과 일본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남북교섭은 차선책이나 보조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남북국시대 200여 년간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가 지속되었고, 정치 군사적 대결이 굳어졌다. 또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온 우리 민족의 언어·문화적 동질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두 나라의 언어와 풍속이 점점 달라지면서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 후손들은 발해는 물론 거란 속의 발해인과 여진을 다른 종족으로 보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는 오늘날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숨가쁘게 전개되는 국제적인 외교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또 나라가 망한 뒤 발해 사람들의 운명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시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