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한반도가 분할됐다면
여러 차례 나온 ‘독차지하기 힘들다면 나눠갖자’ 제안…
러시아에 맞서 성조기와 일장기가 사이좋게 압록강변에 휘날렸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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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 거란 소손녕, 도요토미도
이른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 지점”이라는 낡은 지정학적 관점을 들지 않아도,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뒤바뀔 때마다 민감히 영향을 받았다. 어느 한쪽이 이 요충지를 독차지하기 힘들 바에는 갈라서 나눠갖자는 주장도 여러 차례 나왔다.
일찍이 648년, 당나라 태종은 신라의 김춘추에게 “힘을 합쳐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 땅은 당이, 백제 땅은 신라가 차지하자”는 제의를 하며 나당동맹을 맺었다. 993년에는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는 대동강 이남의 신라 영토를 갖고, 그 북쪽은 고구려를 이어받은 우리 거란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1593년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국서를 보내 “조선 8도 중 남쪽의 4도를 우리 일본이 갖게 해준다면 전쟁을 그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동아시아의 근대에도 그런 분할안이 등장했다. 먼저 1894년 7월18일에 영국 외무장관이던 존 킴벌리가 당시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다투던 청나라와 일본에 “서울을 경계로 북쪽은 청나라가, 남쪽은 일본이 점령하자”고 제의했다. 영국은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는 한편 청나라 정부가 보장해주던 이권에도 미련이 있었기에, 청나라를 도우려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일본과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의 충돌을 무마시키려 분할안을 제의했고, 겉보기와는 달리 청나라의 군사력이 종이호랑이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은 이 제안을 환영했다. 하지만 일본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분할안은 무산되고, 청일전쟁을 거쳐 청나라 세력은 한반도에서 퇴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형세를 관망하다가 갑자기 뛰어들어 어부지리를 챙긴 나라가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독일·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을 하여, 청일전쟁 뒤 일본이 차지하기로 한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고 조선의 독립을 건드리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일본이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이자 동아시아와 조선에서 ‘러시아 대세론’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를 견딜 수 없던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파 내각을 수립하는 무리수를 두었으나 고종이 아관파천을 성사시킴으로써 러시아 대세론은 완전히 굳어지는 것처럼 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한반도보다 일차적으로 만주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조-러 동맹’을 맺자는 고종의 제의에 냉담하게 반응했으며,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즉위 기념 축하연에 고종이 파견한 특사 민영환은 건성으로 대한 반면, 일본 특사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비밀 회담을 열었다. 그리고 야마가타는 그 회담에서 러시아에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해 나눠갖자”는 제의를 했다. 러시아는 이 제안에 잠시 고심했지만 결국 거절한다.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굳이 일본과 타협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고, 아직 만주의 지배도 확실히 못했는데 공연히 한반도 북부를 욕심내다가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견제를 받게 되면 곤란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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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해진 러시아, 일본에 역제안
이렇게 일단 무산된 러-일 사이의 한반도 분할안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다시 한번 거론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분할 성사 가능성이 높았다. 계기는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관계에서 러시아가 불리해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의 난’에서 러시아는 일본·미국·영국·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과 함께 볼모로 잡힌 서양 외교관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베이징에 침입했다. 주요 제국주의 열강이 힘을 합친 전무후무한 이 원정으로 청나라는 완전히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데, 러시아는 작전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만주를 점령하고는 사변이 끝난 뒤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있었다. 청일전쟁 무렵만 해도 넘보지 못했던 러시아의 만주 점령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여기에 1897년 수립된 대한제국은 여전히 러시아를 가장 중요한 외교 상대로 삼고 있었기에,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우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영국·미국 등을 긴장시켰다. 특히 중국·인도·중동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전체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입장에 있던 영국은 “특정 국가와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오랜 외교 관행을 깨고 독일에 접근했다. 하지만 독일이 러시아에 대항한 영국과의 동맹에 호응하지 않자, 이번에는 일본에 눈을 돌렸다. 이리하여 1902년에 영-일 동맹이 성사되는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러시아가 긴장할 차례였다. 용암포 사건 등 조선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강화하려던 시도가 일본과 영국, 미국의 반발에 부딪쳐 계속 여의치 않자 결국 1903년 9월 주일 러시아 공사 로마노비치 로젠이 “7년 전 귀국이 제의했던 대로, 한반도를 둘로 나눠갖자”는 제의를 일본에 하게 된다.
겉으로는 “39도 이북의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은 러-일 양국이 보장한다”고 공식 문서에 표현돼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39도선을 경계로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분할하자는 이야기였다. 7년 전과는 달리 이 제안에는 양국 모두 신중한 검토를 아끼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상대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 분할안이 무산되면 그 다음은 전쟁뿐이라는 사실이 뻔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일본이 러시아의 제안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 다만 “‘중립지대’의 범위를 만주 남부까지 확대하자”고 역제의한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중립지대는 정말 중립지대가 될 판이니 러시아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만주가 온통 러시아 땅이 된 마당에 한반도 북부까지 러시아의 손이 미친다면 언제 한반도 전체가 러시아에 돌아갈지 불안을 거둘 수 없었다. 밀고 당기는 회담이 이어지던 끝에 일본은 “만주는 러시아에 내준다. 그러나 한반도는 일본이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전쟁뿐이다!”라는 태도를 정리하고 러시아에 통보했다.
결국 전쟁인가? 당시 러시아에서는 아무리 영국의 힘을 업었다지만 극동의 작은 섬나라인 일본이 대러시아 제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평가가 주류였다. 하지만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를 대표하던 러시아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는 사견을 전제로 일본에 “정 그렇다면 전부터 한국이 주장해온 대로 한반도 전체를 중립화하면 어떠냐”며 제의하기까지 한다. 일본에도 유화론자들이 있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아직 러시아와의 대결은 시기상조”라는 점을 들어 적당한 선에서 러시아와 타협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더 일찍 물러났을 수도
하지만 결국 두 나라 모두에서 강경파의 의견이 득세했다. 러시아는 당시 오랜 전제정에 지친 국민 여론이 날로 악화되고 볼셰비키를 비롯한 반정부 세력의 움직임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뭔가 해외에서 국민의 주의를 끌고 정부 지지도를 높여줄 소재를 찾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계속 조선을 차지하려고 공을 들였지만, 다른 나라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조선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타협론을 압도했다. 1904년 1월, 거의 반년 동안의 열띤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한반도 분할론은 무산되고, 러일전쟁을 거쳐 일본이 한반도의 단독 패자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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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분할이 합의되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당시 두 나라에서 국론의 향방이 조금만 옆으로 틀었어도 1903년 이후, 그러니까 1945년보다 40여 년 앞서 이 땅은 두 동강이 날 뻔했다. 실제 그렇게 되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단 한반도를 차지하고 만주까지 손을 뻗치려던 일본의 야욕은 저지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한반도와 만주로 진출하자는 북방공략론과 대만과 동남아시아를 노리자는 남방공략론을 함께 논해왔다. 한반도 남부에서 일단 북방 공략의 길이 막혔다면 남방을 대신 노려야 하는데, 그것은 영국과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다(실제로 1901년에 일본이 대만 건너편인 중국의 아모이를 점령하려 했으나, 영국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실패한 적이 있다). 따라서 한반도 분할 이후 십수 년간 일본은 진퇴양난에 빠진 결과 수시로 태도를 바꾸어, 러시아·중국·영국·미국 등과 돌아가며 동맹·침략·협상·냉전 등을 되풀이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잘하면’ 이런 상황이 이어진 끝에 1940년대의 ‘ABCD 동맹’, 즉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가 손을 잡고 일본을 포위 억압하는 구도가 일찍 수립됨으로써 일본의 패망과 한반도에서의 후퇴를 빠르게 이루어냈을 수도 있다. 또는 일본 내에서 군국주의의 목소리가 빨리 시들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처럼 ‘외부 공략을 포기하고 내실에 힘쓰는’ 체제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관적인 가설이 더 유력하다. 일본이 1930년대에 미국·영국과 등을 지고 결국 패망에 이른 까닭은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아시아의 유일한 강대국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189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동아시아에서 중국·러시아·독일, 그리고 영국의 힘이 잇달아 쇠퇴하고, 그 자리를 일본이 메우는 일이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어진 일본 군국주의의 기관차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면서, 한때 우방이던 미국과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가 1903년 이후 분할되었다면, 러일전쟁도 없었을 것이고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 강대국이 되어 미국의 적수로 떠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은 동아시아 정세와 무관하게 전개됐으리라고 본다면, 1920년대 이후 미국은 공산화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더욱 단단히 손을 잡는 길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일본은 굳이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미국에 대적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그럴 만한 힘도 충분치 않았으리라. 미군과 일본 황군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39도선을 넘어 ‘한반도 통일전쟁’을 벌였을지도, 성조기와 일장기가 사이좋게 압록강변에 휘날렸을지도 모른다. '
민족의 뜻과 무관한 분단의 비극
결과적으로 1945년 이후 남한의 독재정권이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의 후원을 받았듯, 일본의 한반도 지배체제도 미국의 후원을 받아 더욱 공고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복거일의 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미국의 둘도 없는 파트너로 번영을 거듭하는 일본, 그 ‘지방’으로 완전히 귀속된 한반도와 황국신민임을 의심할 줄 모르는 한국인들”이 2010년의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더 낙관적인’ 가설대로 일본이 일찍 패망하거나 군국주의를 버리게 되었다고 해도, 일단 한반도 북부와 남부가 러시아와 일본에 귀속된 이상 한반도의 통일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의 뜻과 무관한 분단은 민족사의 비극이며, 그 비극이 더 앞당겨졌다고 할 때 이후의 역사가 행복해졌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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