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지 나흘째인 20일. 흉흉한 사바세계를 벗어나 청량한 새벽 산공기를 마시며 조계종 원로의원인 동춘스님(東春·75)을 찾아간다.
경주 함월산 자락에 홀로 토굴을 짓고 제자도 없이 손수 밥짓고 빨래하며 수행중인 동춘스님. “좋은 생각으로 좋은 인연을 많이 맺으면 저절로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경주에서 감포 바다로 향하다가 왼쪽으로 꺾어져 수류화개(水流花開)의 산길로 10여분쯤 올라가면 함월산 기림사가 있다. 기림사 스님의 안내로 함월산 자락에 있는 스님의 ‘토굴’에 도착했다. 붉은색 황토 흙벽에 검은색 기와를 얹은 단독 가옥. 스님은 깨끗하게 비질된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일주문, 법당, 현판 같은 불교적 치장이 하나도 없는 토굴은 여느 농가와 다름없었다. 조그만 부엌을 통해 들어선 내실도 노수행자의 방이라기보다는 촌로의 방처럼 그냥 꾸밈없이 소박했다. 바닥에는 보료가 깔려있고, 텔레비전과 서랍장, 작은 탁자, 크고 작은 붓들, 승복을 걸어두는 옷걸이가 전부였다. 벽에는 올해 초 쓴 ‘佛(불)’자 서예글씨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고, 그 옆에 큰 붓 한자루가 걸려있다. 스님은 이곳에서 시자도 없이 홀로 밥을 해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기도하며 지낸다.
스님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조승희씨 사건 소식을 잘 알고 있었다. 스님은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며 “현대인들에게 마음수양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의 탓을 하게 되면 화가 나고 화가 뭉치면 악이 됩니다. 화를 내면 건강을 해치고, 가정을 해치고 사회를 해칩니다. 마음을 다스려 늘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마음공붑니다. 그 청년은 과거세의 자업자득이 있었을 겁니다. 마음을 닦지 않으면 방향과 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동춘스님에게는 뚜렷한 주석처가 없다. 몇번의 대중소임을 맡은 것을 빼고는 평생의 대부분을 토굴에 은둔하며 수행에만 매달렸다. 말 그대로 구름처럼 떠돌고, 물처럼 흘러가는 운수납자의 삶이다. 스님은 토굴도 자주 옮겨 다닌다. 토굴이 알려지면 바로 짐을 꾸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버린다. 전국 곳곳에 스님이 수행한 토굴만도 수십군데다.
자연 동굴이나 나뭇가지만 얽어놓은 움막에서 몇 개월씩 정진하기도 했다. 전깃불도 없고 난방도 되지 않는 토굴에서 생식을 하며 한겨울을 나는 고행도 해냈다. 토굴생활의 기본은 무소유다. 지금처럼 집을 짓는 경우에도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갖추면 그만이다. 스님은 경주 내남면 토굴에서 9개월을 지낸 뒤 6개월 전 이곳으로 왔다. 조계종단의 원로인 노스님이 이런 토굴에서 사는 이유가 궁금했다.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지요. 한곳에 오래 머물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업을 짓게 됩니다. 소유하지 않으면 자유롭습니다. 부처님도 깨달은 후 평생을 옮겨다녔습니다. 수행자에게 누더기 옷과 발우 하나만 있으면 다 가진 것입니다.”
동춘스님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인터뷰도 거절하기 일쑤다. 마음의 고요가 깨지기 때문이다. 스님은 평생 한명의 제자도 들이지 않았다. 최근에도 한 젊은 스님이 노장을 모시겠다고 찾아왔지만 “큰 절에서 대중생활을 통해 선지식들에게 점검받아가며 공부해야 한다. 절에서 선·교·율을 제대로 배우고 토굴 생활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면서 쫓아버렸다고 한다.
그는 원로스님임에도 법문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법상에 올라가거나 주장자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결코 대중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몇군데 절에서 조실스님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승낙하지 않았다. 상(相)을 내거나 자취를 남기기 싫어서다.
“나는 깨쳤다고 내세워 말할 것이 없어요. 확철대오 하기 전에는 내놓을 것이 없지요. 지견(知見·알음알이)이 났다고 해서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몇 안되는 신도들이 찾아와 물어보면 그때그때 생각을 말해줄 뿐이지요. 따지고 보면 법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사는 모습 그대로가 법문이고, 이 세계 그대로가 법문이지요.”
작은 키에 다부진 체구. 웃는 모습은 포대화상을 닮았다. 끝까지 겸손함을 잃지 않는 그는 음성이 나직나직하면서도 맑았다. 스님은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다. 원행 때는 늘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올해는 시장에서 산 1만원짜리 털바지 하나로 겨울을 났다. 밥상도 간소하다. 밥, 찌개, 반찬 두어가지면 끝이다. 한꺼번에 3일분을 해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때마다 데워먹는다.
하루 일과도 “대중 없다”고 한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잠자고 싶을 때 잠자고, 정진하고 싶을 때 언제든 선정에 든다. 이런 스님이 텔레비전을 본다. 그는 뉴스를 세상살이의 법문으로 여긴다. 재미에만 빠지지 않으면 드라마까지도 참 좋은 법문이라고 말한다. 적게 갖고 맑게 사는 동춘스님에게는 천지가 내집이고 두두물물이 법문인 모양이다. 그는 미국 총기참사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드러난 행위만으로 선과 악을 평가하는 것은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서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악은 선을 행하는 바탕이고 악이 있으므로 발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을 따지기보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청년에겐 업보이지만 내게도, 우리에게도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스님은 “화가 치밀면 화가 나는 그 생각을 얼른 화두로 돌려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며 “마음을 허공같이, 물같이, 바람같이 하면 화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화는 욕심과 미움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전생에 진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세요. 과거 업은 금세에 풀어야지요.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새로운 업을 짓는 일입니다. 업을 자꾸 풀어야지 왜 자꾸 짓습니까. 좋은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좋은 인연을 많이 맺으면 과거 업이 좋게 바뀝니다.”
스님은 “수행은 마음의 힘을 키우는 행위”라며 “화를 내지 않는 마음의 힘이 생기면 번뇌 그 자체인 탐·진·치 삼독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계에 부딪쳐 분간하고 선택하는 그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며 평상심이 곧 도라고 했다.
“어떤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있다’ ‘없다’에 고통을 받지 않고 만족할 줄 알면 그것이 ‘정신의 재산’으로 저축됩니다. 정재(淨財)가 아니면 있어도 없는 것만 못합니다. 마음을 바로 쓰고, 좋은 생각하고, 좋은 인연 많이 맺어야 좋은 일도 빛이 납니다. 대가를 바라면 공덕이 없어요.”
동춘스님이 불자들에게 늘 하는 질문이 있다. “샘이 있습니다. 물을 퍼내면 일시 줄어들고, 물을 부으면 일시 늘어나지만 결국은 그대로지요. 그렇다면 물을 많이 고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님의 답이 이어졌다.
“샘을 깊이 파면 돼요. 그릇을 키우는 거지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키워야지요. 사람은 각자 인물, 머리, 언변, 문장, 재물 등 타고난 그릇이 있어요. 부족하면 더 노력을 하면 됩니다. 수행은 마음 그릇, 생각의 그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스님은 “ 한 생각을 돌리면 그 자리가 지옥이고 극락”이라며 “사대육신을 버리고 갈 때에 바른 생각을 가졌느냐, 삿된 생각을 가졌느냐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고 연결된다”고 말했다.
동춘스님은 수월선사 이야기를 했다. 나무꾼이었던 수월선사는 글도 법문도 남긴 것이 없다. 그는 도인으로 소문나 사람들이 만나려고 줄을 섰으나 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말년의 수월은 간도를 유랑했다. 당시 간도에는 비적들이 출몰해 집집마다 크고 사나운 개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수월이 지나가면 온동네 개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수월은 개들을 앉혀놓고 법문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내가 지나가면 개들이 짖어요. 마음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허허. 나는 전생에 복을 짓지 못해서 내몸을 위해서 하는 일은 잘 되지가 않아요. 그래도 열심히 할 만큼 했어요. 이제 모든 인연도 놓아버리고 조용히 살다 가야지요. 부족한 공부는 다음 생에서 또 하면 되지요.”
그는 일체의 바람이 없다고 했다. 몸도 마음도 잊었다고 했다. 적게 갖고, 맑고 고요하게 사는 것. 그것이 동춘스님의 행이고 말이며 생각이다.
공비토벌후 출가 무소유 토굴생활
동춘스님은 일본에서 자랐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고등학교는 기독교 학교를 다녔다. 교회도 열심히 나갔다. 6·25 전쟁 때 군에 입대해 전장을 누비면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휴전이 되고 천성산 일대의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내원사 같은 절을 지나갈 때마다 살생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다가 우연히 양산 통도사에서 법문을 듣게 됐다.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자신이 부처가 되는 종교라는 말을 듣고 나서 절에 다니게 됐다. 군 제대 후 하는 일마다 실패한 것도 출가의 계기가 됐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얻어 생사를 벗어나고 싶었다.
출가를 결심하고 혼자 토굴에서 지내며 마음을 정리했다. 첫 토굴살이였다. 1955년 부산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은사로 늦깎이로 출가했다. 선암사는 경허스님의 제자인 혜월스님이 선 채로 열반에 든 곳이다. 석암스님은 경허-혜월-석호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지리산 서암정사의 원응스님, 부산 내원정사의 정련스님 등이 사형사제간이다.
동춘스님이 평생 참선수행만 한 것은 아니다. 부산 선암사와 문경 봉암사, 봉화 각화사의 주지를 지내면서 사판으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그다. 현재 이들 절이 한결같이 국내 제일의 수행도량으로 꼽히는 데는 스님의 공덕이 큰 몫을 했다. 특히 성철스님 등의 결사로 유명한 봉암사는 결제철 선방에서 정진하기 위해 방부를 들였다가 주지를 맡았다. 봉암사 시절 정부의 희양산 국립공원 지정 움직임에 맞서 끝내 조계종 특별선원으로 수행처를 지켜낸 일화는 불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두차례 봉암사 주지를 지내면서 선방과 요사채도 그가 주춧돌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원치 않는 머슴살이를 한 것뿐, ‘내가 했다’고 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주지를 내놓고 나면 그곳에서 인연 맺었던 신도와의 반연(攀緣)까지 딱 끊어버리고 훌훌 떠나버렸다고 한다. ‘법화경(法華經)’에는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닦고,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를 수미산처럼 하라”고 했다. 바로 동춘스님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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