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17

醉月 2010. 4. 14. 08:53

‘이슬람 르네상스‘ 피운 중앙아시아의 심장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17> 이슬람의 성도 타슈켄트

중앙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사원으로 꼽히는 타슈켄트의 국차 마스지드. 90년대 초반 사우디 등의 아랍권 형제국과 부호 등의 기부를 받아 신축했다. 금요예배를 위해 사원주위로 신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돌의 도시’ 타슈켄트는 기원전부터 ‘차치’ 란 이름으로 알려진 오아시스 도시다

오랫동안 숙원으로 남았던 탈라스 전쟁의 현장과 명마의 고향을 확인해 준 키르기스스탄은 뜻깊은 방문지였다. 국토의 94%가 해발 1000m 이상의 초원과 산지이고, 그 중 40%는 3000m 이상의 고산지대인 나라, 이 고산지대의 75%는 만년설과 빙하로 뒤덮인 나라, 보기드문 산과 숲, 물의 나라다. 인구 78만의 수도 비슈케크는 문자 그대로 전원도시다. 가로수는 사과나무로 빼곡하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30분 거리에 있는 마나스 공항에서 우즈베키스탄 항공기를 타고 타슈켄트로 향했다.

투르크어로 ‘돌(타슈)의 도시(켄트)’란 뜻의 타슈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공식수도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앙아시아의 수도’라고 일컬어질 만큼 중앙아시아에서 인구(215만)가 가장 많고 지정학적으로도 중심에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앞선 도시다.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이 있는 현대도시다. 타슈켄트의 이런 번영은 중세 이후 ‘이슬람의 성도’였다는 각별한 지위가 작용했다. 지금 중앙아시아 5개국은 90년대 초 옛 소련에서 독립해 저마다 이슬람 정체성을 되찾는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애초부터 국기에 이슬람 상징인 초승달을 그려넣은 나라는 우즈베키스탄뿐이다. 그만큼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에 깊이 훈육된 나라이며, 그 중심에 시종 타슈켄트가 있었다.

타슈켄트는 기원전부터 ‘차치’란 이름으로 알려진 오아시스 도시다. 자연환경이 유리한데다 교통요지여서 농경, 교역이 발달했다. 일찍부터 여러 종교가 공존했으며, 궁궐과 사원, 요새와 주택이 즐비했다. 이슬람 영향권에 들어간 것은 7세기 초부터다. 705년 중앙아시아의 서쪽 메르브에 입성한 이슬람 정복군은 10년도 채 안 되어 파죽지세로 시르 다리아 강과 아무 다리아 강 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점령하고 타슈켄트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당시 당나라 판도 안에 들어가 있어 더 이상 동진은 못하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렸다. 이 때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이 쳐들어오자, 석국(타슈켄트)과 결맹해 당군을 물리친다. 유명한 탈라스 전쟁(751년)이다. 석국-이슬람 연합군이 승리하자, 이슬람 문화는 타슈켄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 11세기 카라한조 시대에 본격적으로 개화한다. 그러다 13세기 몽골군 침입으로 된서리를 맞고 도시는 여지없이 파괴된다. 다행히 15세기 티무르 제국 출현을 계기로 ‘이슬람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타슈켄트는 성도로 떠오른다. 지금 남은 유적유물 대부분은 티무르시대(1405~1500)와 뒤이은 샤이바니 조 시대(1505~98)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유일하게 지하철 있는 교통요지

첫 유적으로 찾아간 곳이 구 시가지 북쪽에 있는 3대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의 하나인 바락 칸 마드라사다. 샤이바니조 7대 칸인 바락 칸(재위 1551~56년)이 세운 이 마드라사는 입구부터 장중하다. 높이 는 실히 될 대문은 아치형으로서 벽면은 아름다운 아라베스크식 모자이크로 장식하고, 윗면에는 경전 <꾸르안>(코란)에서 따온 아랍어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슬람 건축물에는 종종 경전에서 따온 아랍어 단어나 구절을 다양한 서체로 새긴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무늬다. 옛 소련 시대 중앙아시아 이슬람 종교청이 있던 이곳에 지금은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우즈베키스탄 이슬람협회가 들어섰다. 협회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본 옛 교실은 4평짜리가 20개쯤 되었다. 학생들은 전원 기숙하면서 주로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 마드라사 맞은편에 쥼아 마스지드(모스크)라는 유명한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이 유명해진 것은 일주일에 한번씩, 금요일마다 집단 예배(쥼아)를 보는 대사원인데다 한켠 구석의 도서관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경전 사본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원의 이맘(종교지도자) 카림라는 페르가나와 사마르칸드에서 이맘으로 봉직하다 3년 전 왔다고 한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하며 퍽 친절한 분이다. 그의 안내로 40대 중반의 도서관장 무라드를 만났는데, 위풍이 당당하다. 이맘도 소개만 하고는 자리를 피한다. 우리의 청을 받아들인 관장은 경전 사본이 소장된 서고문을 열고 철제상자 속에 보관된 사본을 조심스레 꺼내 단 한번 촬영을 허용했다. 천만 뜻밖이다. 서고문 위에는 유네스코의 기록유산 인증서가 걸려 있었다.


탈라스전쟁 이후 이슬람문화 정착

 주마 마스지드(모스크)에 보관되어 있는 이슬람 경전 사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유네스코 기록유산이다. 이슬람 기록문화유산에서 최고 보물로 꼽히는 이 경전 사본은 ‘오스만본’(일명 이맘본)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1400여년 동안 줄곧 사용되어온 경전의 유일한 정본이다. 원래 <꾸르안>은 교조 무함마드에게 내린 토막 계시들의 모음책이다. 그의 사후 1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 시대 처음으로 계시들을 한데 묶어 첫 남본(藍本)을 만들고, 2대 칼리파 오마르를 거쳐 3대 오스만 시대(644~56)에 이르러 그 남본에 준해 경전의 결정판을 완성했다. 바로 이 오스만 정본이다. 오스만은 정본을 4부씩 필사해 터키 이스탄불과 이집트의 카이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 이라크 바스라에 각각 보관토록 했다. 그후 이 보물은 권력자들의 기호나 정략적 수요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닌다. 1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패자 티무르는 이라크를 정복하면서 바스라에서 정본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애첩을 위해 세운 사마르칸드 비비하눔 사원에 보관케 했다. 지금도 비비하눔 사원의 안뜰에는 이 정본을 전시했던 커다란 대리석 전시대가 남아 있다. 그 뒤 정본은 1869년 러시아 정복자인 카우프만 장군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그의 에르미타지 박물관으로 실어갔다가, 러시아 혁명 뒤 무슬림 밀집도가 가장 높은 타타르스탄의 수도 우파를 거쳐 타슈켄트의 쿠켈다슈 마드라사로, 또다시 이곳의 레닌역사박물관으로 이관된다. 그러다 우즈베키스탄 독립 직전인 1989년 지금 장소로 옮겨졌다. 일부가 소실된 정본은 338쪽 분량이다. 누르스름한 얇은 사슴가죽에 나무 편으로 나무액을 사용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이맘 카림라의 말에 따르면 도서관에는 교조 무함마드의 머리카락도 보관되어 있는데, 자신도 본적은 없다고 한다. 그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뜨거운 포옹으로 우리를 바래다주었다.

이어 부근의 이맘 부카리 이슬람고등학원을 찾았다. 정원에는 사막의 꽃이라는 석류와 살구, 복숭아, 무화과 등 갖가지 과실이 한창 무르익고 있어 꽃동산 같았다. 15세기 건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갈했다. 고등학교 수준의 학생들이 오후에 신학, 경전학 등을 공부한다고 한다.

마침 이날은 금요일이었다. 무슬림들의 집단 예배 모습이 궁금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원인 국차 마스지드(일명 자미으)를 찾아갔다. 정오예배가 한창이다. 흰옷으로 갈아입은 예배자 수천명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정문에 ‘우즈베키스탄 독립에 즈음해 메카시민으로부터 기증’이란 아랍문자가 씌어 있다. 정문 자재를 비롯해 일부 내부시설물들을 이슬람 요람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16세기 샤이바니 조 때의 대신 쿠칼다슈가 세운 쿠칼다슈 마드라사를 찾았다. 이곳 3대 마드라사의 하나라고 한다. 옛 소련시절 창고로 썼다가 1966년 대지진으로 3층은 무너져내렸다. 독립 뒤 신학교로 복원해, 지금은 학생 124명이 공부한다고 한다. 마드라사의 동서 양쪽 구석에 꽤 높은 탑 모양의 흉물스런 기둥이 하나씩 서 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죄수 혹은 부정을 저지른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던 일종의 형구였다고 한다. 마드라사 곁에도 15세기 대부호 호자 아크라르가 세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스지드가 하나 있는데, 벽면장식 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아크라르가 구두쇠여서 견직물 공장에서 나오는 자투리만을 판 돈으로 대충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교사의 본보기로 남겨둠 직하다.

 

15세기 꽃동산 그대로인 고등학교

이같이 타슈켄트는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심장부다운 찬란한 유적유물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이슬람의 근본을 계승해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양새에서는 나름대로의 접변(接變)을 거친 변형을 보여준다. 가령 정통 이슬람에서는 여성도 자리는 다르지만 사원에 와서 금요예배를 할 수 있으나, 이곳에서는 금지된다. 또 호자 아크라르 마스지드에서 보다시피, 원래 이맘이 설교하는 강단인 민바르는 예배 방향을 알리는 벽감(미흐랍)의 왼쪽에 계단식으로 하나 짓게 되어 있으나, 이 마스지드에서는 벽감 좌우에 계단도 없이 각각 하나씩, 두 개의 강단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묘는 될수록 간소하게 하는 것이 이슬람 정통관례인데,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는 초승달 등 여러 조형물로 묘를 상당히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개인 묘당들은 거의 성역화되고 있는데, 이 역시 이슬람의 본연은 아니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타슈켄트는

‘성과 속’ 두 얼굴의 2천년 고도
이슬람의 메카·장사꾼 천국으로 번영

 이만 부카리 이슬람고등학원에 있는 한 강의실의 전경.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에 꽃이 만발해 있다. 타슈켄트는 상반된 이미지를 지닌 고도다. 8세기 이슬람의 동전 이후 지금껏 종교적 성도로 구실했지만 기원전부터 대상무역과 금은 세공으로 번영해 온 상도이기도 하다. 실크로드 오아시스 사이의 대상무역을 이었던 도시국가로서 타슈켄트의 영화는 쿠처에 버금갔다. 중국에서 타슈켄트의 옛 이름은 ‘석국(石國)’으로 불렸다. 돌나라?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이슬람 정벌 이전까지 ‘슬슬’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에메랄드 등 금속 보석 공예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푸른빛을 내는 에메랄드(벽석)의 유명한 산지도 바로 부근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타슈켄트의 상인들은 몽골과 신장 지역 등에서 산출된 금 등의 귀금속, 보석 등도 앞선 기술로 세공해서 교역을 주도했다. 자연스럽게 중개 도시로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중국 문헌에 나오는 ‘자설국(者舌國)’, ‘자시’란 이름은 돌을 뜻하는 이란어 ‘차치’에서 연원한 것으로 모두 보석 금은 세공과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타슈켄트는 중국, 투르크, 위구르, 타지크, 소그드, 아랍인들 사이에 끝없는 영토싸움의 무대였다. 석국인들에게는 아랍권과 중국 왕조 사이의 교묘한 등거리 외교가 필수였다. 8세기 저 유명한 탈라스 전쟁의 도화선도 고선지가 이 지역을 침공한 데서 비롯되었다. 석국을 중심으로 한 소그디아나 일대의 소국들이 이슬람권에 기울어져 당에 복종하지 않은 것이 고선지의 군사행동을 낳은 것이다.

타고난 장사꾼인 소그드인들의 활동은 타슈켄트 번영의 역사에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아무 다리아나 사르 다리아 강 사이에 살았던 소그드인들은 장사와 무역에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던 이란계 민족으로 이슬람 투르크 인이 이곳을 장악하기 전까지 실크로드 교역은 물론 문화전파, 외교 등을 주도했다.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믿으며 이윤이 있는 곳은 어디든 험로를 가리지 않았던 이들은 동서문화 교류의 메신저로 활약했다. 문자나 사교술에 서툴렀던 돌궐, 위구르 등 이민족들의 외교전령사로서도 이들은 활약했다. 타슈켄트는 사마르칸드와 더불어 서투르키스탄에서 소그드인들의 메카와 같은 도시였다. 성과 속이 조화를 이룬 타슈켄트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는 오늘날 중앙아시아 이슬람 문화 특유의 유연성을 낳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