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르네상스‘ 피운 중앙아시아의 심장
‘돌의 도시’ 타슈켄트는 기원전부터 ‘차치’ 란 이름으로 알려진 오아시스 도시다
오랫동안 숙원으로 남았던 탈라스 전쟁의 현장과 명마의 고향을 확인해 준 키르기스스탄은 뜻깊은 방문지였다. 국토의 94%가 해발 1000m 이상의 초원과 산지이고, 그 중 40%는 3000m 이상의 고산지대인 나라, 이 고산지대의 75%는 만년설과 빙하로 뒤덮인 나라, 보기드문 산과 숲, 물의 나라다. 인구 78만의 수도 비슈케크는 문자 그대로 전원도시다. 가로수는 사과나무로 빼곡하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30분 거리에 있는 마나스 공항에서 우즈베키스탄 항공기를 타고 타슈켄트로 향했다.
투르크어로 ‘돌(타슈)의 도시(켄트)’란 뜻의 타슈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공식수도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앙아시아의 수도’라고 일컬어질 만큼 중앙아시아에서 인구(215만)가 가장 많고 지정학적으로도 중심에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앞선 도시다.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이 있는 현대도시다. 타슈켄트의 이런 번영은 중세 이후 ‘이슬람의 성도’였다는 각별한 지위가 작용했다. 지금 중앙아시아 5개국은 90년대 초 옛 소련에서 독립해 저마다 이슬람 정체성을 되찾는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애초부터 국기에 이슬람 상징인 초승달을 그려넣은 나라는 우즈베키스탄뿐이다. 그만큼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에 깊이 훈육된 나라이며, 그 중심에 시종 타슈켄트가 있었다.
타슈켄트는 기원전부터 ‘차치’란 이름으로 알려진 오아시스 도시다. 자연환경이 유리한데다 교통요지여서 농경, 교역이 발달했다. 일찍부터 여러 종교가 공존했으며, 궁궐과 사원, 요새와 주택이 즐비했다. 이슬람 영향권에 들어간 것은 7세기 초부터다. 705년 중앙아시아의 서쪽 메르브에 입성한 이슬람 정복군은 10년도 채 안 되어 파죽지세로 시르 다리아 강과 아무 다리아 강 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점령하고 타슈켄트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당시 당나라 판도 안에 들어가 있어 더 이상 동진은 못하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렸다. 이 때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이 쳐들어오자, 석국(타슈켄트)과 결맹해 당군을 물리친다. 유명한 탈라스 전쟁(751년)이다. 석국-이슬람 연합군이 승리하자, 이슬람 문화는 타슈켄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 11세기 카라한조 시대에 본격적으로 개화한다. 그러다 13세기 몽골군 침입으로 된서리를 맞고 도시는 여지없이 파괴된다. 다행히 15세기 티무르 제국 출현을 계기로 ‘이슬람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타슈켄트는 성도로 떠오른다. 지금 남은 유적유물 대부분은 티무르시대(1405~1500)와 뒤이은 샤이바니 조 시대(1505~98)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유일하게 지하철 있는 교통요지
이 마드라사 맞은편에 쥼아 마스지드(모스크)라는 유명한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이 유명해진 것은 일주일에 한번씩, 금요일마다 집단 예배(쥼아)를 보는 대사원인데다 한켠 구석의 도서관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경전 사본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원의 이맘(종교지도자) 카림라는 페르가나와 사마르칸드에서 이맘으로 봉직하다 3년 전 왔다고 한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하며 퍽 친절한 분이다. 그의 안내로 40대 중반의 도서관장 무라드를 만났는데, 위풍이 당당하다. 이맘도 소개만 하고는 자리를 피한다. 우리의 청을 받아들인 관장은 경전 사본이 소장된 서고문을 열고 철제상자 속에 보관된 사본을 조심스레 꺼내 단 한번 촬영을 허용했다. 천만 뜻밖이다. 서고문 위에는 유네스코의 기록유산 인증서가 걸려 있었다.
탈라스전쟁 이후 이슬람문화 정착
이어 부근의 이맘 부카리 이슬람고등학원을 찾았다. 정원에는 사막의 꽃이라는 석류와 살구, 복숭아, 무화과 등 갖가지 과실이 한창 무르익고 있어 꽃동산 같았다. 15세기 건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갈했다. 고등학교 수준의 학생들이 오후에 신학, 경전학 등을 공부한다고 한다.
마침 이날은 금요일이었다. 무슬림들의 집단 예배 모습이 궁금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원인 국차 마스지드(일명 자미으)를 찾아갔다. 정오예배가 한창이다. 흰옷으로 갈아입은 예배자 수천명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정문에 ‘우즈베키스탄 독립에 즈음해 메카시민으로부터 기증’이란 아랍문자가 씌어 있다. 정문 자재를 비롯해 일부 내부시설물들을 이슬람 요람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16세기 샤이바니 조 때의 대신 쿠칼다슈가 세운 쿠칼다슈 마드라사를 찾았다. 이곳 3대 마드라사의 하나라고 한다. 옛 소련시절 창고로 썼다가 1966년 대지진으로 3층은 무너져내렸다. 독립 뒤 신학교로 복원해, 지금은 학생 124명이 공부한다고 한다. 마드라사의 동서 양쪽 구석에 꽤 높은 탑 모양의 흉물스런 기둥이 하나씩 서 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죄수 혹은 부정을 저지른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던 일종의 형구였다고 한다. 마드라사 곁에도 15세기 대부호 호자 아크라르가 세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스지드가 하나 있는데, 벽면장식 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아크라르가 구두쇠여서 견직물 공장에서 나오는 자투리만을 판 돈으로 대충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교사의 본보기로 남겨둠 직하다.
15세기 꽃동산 그대로인 고등학교
이같이 타슈켄트는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심장부다운 찬란한 유적유물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이슬람의 근본을 계승해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양새에서는 나름대로의 접변(接變)을 거친 변형을 보여준다. 가령 정통 이슬람에서는 여성도 자리는 다르지만 사원에 와서 금요예배를 할 수 있으나, 이곳에서는 금지된다. 또 호자 아크라르 마스지드에서 보다시피, 원래 이맘이 설교하는 강단인 민바르는 예배 방향을 알리는 벽감(미흐랍)의 왼쪽에 계단식으로 하나 짓게 되어 있으나, 이 마스지드에서는 벽감 좌우에 계단도 없이 각각 하나씩, 두 개의 강단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묘는 될수록 간소하게 하는 것이 이슬람 정통관례인데,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는 초승달 등 여러 조형물로 묘를 상당히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개인 묘당들은 거의 성역화되고 있는데, 이 역시 이슬람의 본연은 아니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타슈켄트는
‘성과 속’ 두 얼굴의 2천년 고도
이슬람의 메카·장사꾼 천국으로 번영
타고난 장사꾼인 소그드인들의 활동은 타슈켄트 번영의 역사에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아무 다리아나 사르 다리아 강 사이에 살았던 소그드인들은 장사와 무역에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던 이란계 민족으로 이슬람 투르크 인이 이곳을 장악하기 전까지 실크로드 교역은 물론 문화전파, 외교 등을 주도했다.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믿으며 이윤이 있는 곳은 어디든 험로를 가리지 않았던 이들은 동서문화 교류의 메신저로 활약했다. 문자나 사교술에 서툴렀던 돌궐, 위구르 등 이민족들의 외교전령사로서도 이들은 활약했다. 타슈켄트는 사마르칸드와 더불어 서투르키스탄에서 소그드인들의 메카와 같은 도시였다. 성과 속이 조화를 이룬 타슈켄트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는 오늘날 중앙아시아 이슬람 문화 특유의 유연성을 낳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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