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의 장

소림사 18문로 나한공 전의

醉月 2012. 2. 23. 08:54

소림사 18문로나한공 전의

少林寺十八門路羅漢功傳義

목차
프롤로그
서장
학습유교론
우리 시대의 자화상-청동상에게
1. 생명의 한가운데 서서
   제1장 행공의 일반의미
      1.수행담론(修行談論)
      2.기론신단서설(氣論新端緖說)
      3 심의기론설(心意氣論說)
      4.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제2장 18로나한행공
     1.18로나한공의 연원(淵源)
이황서 합록(二黃序合錄)
전서연의(傳書演義)

 

2. 소림사 18문로나한공 전의
   제1로 선인공수(仙人拱手)
   제2로 패왕거정(覇王擧鼎)
   제3로 좌우삽화(左右 花)
   제4로 고수반근(枯樹盤根)
   제5로 야차탐해(夜叉探海)
   제6로 추창양격(推窓亮格)
   제7로 위사헌저(韋蛇獻杵)
   제8로 노승입선(老僧入禪)
   제9로 철우경지(鐵牛耕地)
   제10로 청룡파미(靑龍擺尾)
   제11로 좌우편마(左右騙馬)
   제12로 연자탁수(燕子 水)
   제13로 호달인신(虎達人身)
   제14로 진단대곤(陳 大困)
   제15로 부자청례(父子請禮)
   제16로 이러타정(鯉魚打挺)
   제17로 장요헌포(張遼獻袍)
   제18로 금구괘병(金鉤掛甁)
3. 행공을 마치며
4. 논공을 마치며
    제3장 행공의 새로운 모색
       가. 문명원어에서 본 인간관
       나. 태극행공론(太極行功論)
       다. 태권행공론(跆拳行功論)
남은 이야기

프롤로그 : 동아시아 문명과 한국 근현대사의 사상사적 과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으나 사상사의 관점에서는 <자아상실의 역사>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전통과 사상과 역사를 혐오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실의 근대사>에는 외세적 원인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자기의 <밖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지적으로 비겁한 일이다. <그래도 괜챦은 면이 있었다>고 타협하는 것은 사상사의 방기를 의미하는 안일함이며 자기를 합리화하는 <사사로운 이기적 자기분식>일 것이다.

 

우리도 그동안 <전통을 중시해왔고 문화를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해왔다>고 말하는 것은 사상사의 입장에서는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진정한 본질을 보려는 노력이 미흡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월드컵으로 우리민족의 저력을 보여주었다>는 것과 같은 비역사적이며 막연하고 무책임한 자기호도일 것이다. 진정한 자기가치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근현대사가 추구해온 가치는 전통사상사와 전연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일어나야 하고 근대성이란 결국은 진정 자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보다 절실한 치열함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더 단적으로 말하면 <호적제도를 폐지하고> <남녀고용할당제를 실시하고> <유교사상의 차별적 권위적 허위의식을 타파>하는 것이 현재의 최대과제라고 말하는 개혁적 주장들은 어쩔 수 없이 독선적 함정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논의할 수 있는 현실문제일 뿐이다. 전통사상과 역사에 가탁하여 자신의 주장을 역사적인 것으로 분식하려는 <계몽주의시대 수준의> 사상사적 침해는 말아야할 것이다. 스스로의 논리의 힘으로 정당성을 세워야 할 것이다. 자의적 정의의식은 그 무엇의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서구적 사유만으로도 이미 확정적인 일이다. 요컨대 너무 거대한 담론이 기피되는 이유라든가 열정이나 특정한 신념이 불안정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단지 지성적 균형을 경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크게는 중국이 <중화주의>를 지속하고 한국이 <신사대주의>를 유지하는 한 이는 근대사적 비극을 각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공히 중심 국가의 반열로 성장하는 활로를 먼저 차단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지적 예측이 요구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의 공적 역량을 긍정하고 믿는 공자의 <신이호고적적(信而好古)>인 동아시아 문명권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절실하다는 것이 오늘의 최대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동아시아적 사상과 가치관에 관한 토론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좋으나 일반적으로는 대개 비판적 담론이 보다 우세하다고 관측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교사상을 다루는 학자들은 유교가 지닌 가능성을 확신하는 쪽과 부정하는 견해로 갈라져 있다. 양측이 다 일정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찬반의 양론의 어느 편이나 유학사상 자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공통적이다. 또한 논의의 기준이 되는 중심 개념이 자유 평등 등의 서구적 개념이며 논의의 목표도 서구적 규준의 현대사적 근대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유교사상의 보편 가치를 독자적 관점과 논법으로 주목하고 있지 못하다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또한 동아시아 역사 즉 문명사의 성과인 중심사상을 논하는 것임에도 설명의 역사성을 크게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논리와 개념 이전의 본질적 오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적 담론의 내용과 논리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보다 더 기초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게 된다. 거시적 관점에서는 역사적으로 역동해온 사상으로서 유교를 보지 못하고 있고 더욱이는 구체적 사유의 방식으로서 유학을 논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유학은 문명사상 일개 민족의 성과이기보다는 동아시아 문명의 문명권적 형성인을 가지는 것이다. 초민족적 본질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야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근본문제일 것이다. 미시적 구조에서는 유교논리의 특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함에도 대개의 논리적 연구들은 논리자체의 특징을 검토하려하는 경우가 많고 논리의 대상일 경험을 다루는 방식상의 특징으로서 유교논리를 검토한 성과는 미미하다. 이 문제는 유교적 텍스트가 내포하고 있는 경험적 범주가 차지하는 의미로부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삼재사상>이라는 이해는 바로 그 경험적 범주성을 중심으로 고찰할 경우 진정한 의미를 되찾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유교가 동아시아의 사상사로서 그 본래의 위상을 수립하는 일은 위와 같은 여러 이유로 인해 쉽게 실현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오히려 전연 뜻밖의 현실적 논의로부터 유교사상의 회복운동이 발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 유행하는 여러 양식의 지적담론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인 전통문화체제를 직접 새롭게 사유하고 논함으로써 의외로 유학사상의 본질을 잘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특별한 소리 없이 유학의 개념과 사색법을 각분야의 문화적 현상론이나 문물비평의 방식 가운데 단도직입하여 논의를 전개하여 역시 새로운 사색의 가능성을 열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직하기로는 유학의 이념과 논법을 추구하는 평론과 일반분야 탐구가 거리낌 없이 수행될 수 있어야 하겠다. 그 말은 오늘을 지배하는 명백히 편중-편파적인 입장의 지적 권위의 오류와 독단으로부터 유교논의가 어떤 제한이나 억압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폭언내지는 폭력에 가까운 대 유교 공격이 명징한 근거 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심각한 문화적 자학이며 자살에 가까운 중대한 자기말살이다. 바로 맹자가 말하는 <자포자기> 바로 그것일 것이다.

 

전통적 역사적 삶의 한 모습으로서 우리가 가장 동경해왔던 것의 하나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삶이었다. 수기치인의 삶이란 개인의 수양을 통하여 공적 행동의 영지를 확고히 열어가려는 인간 친화적 삶의 길이었다. 즉 이는 삶의 영역과 차원을 개척하려는 역사적이고 위대한 의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수기치인의 기초로서 우리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의 삶을 추구해왔다. 오늘날에 이어진 행공(行功)도 명백히 그 일환이었다. <수기>의 한 분야였던 것이다. 수기치인의 이상을 처열하게 공격하는 논자들이 상당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는 조금도 손상될 수 없을 것이다. 행공론은 그와 같은 문명사적 본질을 오늘의 사색으로 되살리려는 시도적 작업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직 더 많은 검토와 사색과 정리가 필요함에도 감히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서장
학습유교론

 

유교는 "<학습>을 수단으로 영위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유교의 본질을 새로이 파악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때 <학습> 개념의 정의와 <생활양식>이라는 의미적 단정은 당연히 그만한 근거를 필요로 한다. 유교를 이해할 때 맨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학습개념일 것인데 우리는 전통적으로 그 의미를 심각한 정도로 왜곡해왔다고 믿어진다.

 

<학>이란 <배움>이라고 해석하여왔다. 그리고 역대 주석사에서 배움이란 <새로운 것을 아는>것 혹은 <새롭게 아는 것> <배운 것을 기억하여 간직하는 것>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했었다. 그러한 해석은 사상사적으로는 공자이후 특히 유교가 발전하고 문헌이 재정립된 한왕조 시대 이후의 시점에서 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원래의 의미에서는 <지식>과 <이해력>이라는 지성적 측면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전통적 이해를 가장 강력하게 지탱한 것은 <학>이 윤리와 지식의 전수 공간으로서 <학교>를 의미한다는 전통적 어원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상(庠) 서(序) 학(學) 교(校) 라는 전통적 교육기관 명칭이 전래된 것이 그 한 근거이며 갑골학적으로 <학>이 학교 건물을 의미한다는 이해도 이를 보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이 교육기관을 지칭해왔었다고 해도 그 문자적 어원이 건물이라고 확정할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자들은 의례의 수행자들이었다. <유>라는 글자가 목욕재계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제사의례를 중심으로하여 각종의 의식을 담당하던 계층이었다. <유>는 성인 집례자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학>도 학생이 있는 학교를 그렸다기보다는 그 스스로 학생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동적인 피교육자로서의 학생이 아니고 의식에 참여한 소년소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은 일종의 관례(冠禮)의식을 그린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혹은 머리장식과 제복을 걸친 시동(尸童)을 그린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머리 올리는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학>이란 청소년기의 젊은이들이 참여하여 공식의례를 행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례를 행한다는 것은 당연히 <문화생활>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문화>란 동아시아적 원어로는 <문명(文明)> 혹은 <문물(文物)>이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의미로 성숙된 표현>을 의미한다. 성인의 <문명적> <문물적> 삶에 참여하거나 그러한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그려서 완숙한 집례자인 <유>와 대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학>이란 지식에 국한되지 않고 의례를 중심한 생활주체를 의미한다. 즉 <학>은 삶 속에서의 의미의 발견과 창조적 수행 표현을 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주체적으로 의미를 발견하고 수립하는 결국은 탈종교적 삶의 양식을 말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것은 고대 사상사에서 종교마저도 새로운 의미로 재편성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습>이란 <새가 날기를 익히듯이 익히는 것> 이라고 해석하고 <百>과 <羽>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왔었다. 그러나 원의에서는 그런 지식-지성위주의 의미이기보다는 보다 현실적 행동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깃털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의례를 위해 만든 관 장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맥동하는 사유의 실상에 접하고 절실하게 사상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학습이란 오늘의 개념으로는 정밀한 학술이기보다는 행위예술의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유학은 그 원래 청동기-철기시대 이후의 새로운 지적 창조의 삶을 지칭하지만 행동적 측면과 표현적 성향이 강조되었고 일반의 공적 생활 특질을 본의로 하였던 것이다. 학습이란 기능과 지식을 포함하고 의례와 생활 포괄하는 광범한 것이었고 수기(修己) 치인(治人)의 신념 체계로 발전되었다. 학습이란 그 수기라는 의미 속에서 전반적으로 생명과 인간과 삶의 내용을 반추하고 치인의 이념으로 수행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교사상은 또한 자연관 우주관 인생관 사물관이라고 할 4대 관점의 융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문제는 그 융화가 단순한 이념적 개념적 융화가 아니라 절실한 경험적 검토를 다한 귀결이라는 데 있다. 경험적 모색을 다하였다는 것은 이미 전통적으로 <격물치지사상>으로 표방되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절실한 사상적 기초 전제이다. 격물치지라고 할 때 <격>이란 (1)바르다 (2)지극하다 (3)이르다 의 3가지 함의를 공유하고 있다. 그 포괄적 의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어느 학자는 (1)을 택하고 어느 학자는 (2)를 택하였다는 식으로 시비를 가릴 일이 아니다. <물>이란 (1)사람 (2)동물 (3)식물 (4)기타사물 (5)문자 (6)문물(포괄적인 문화유산과 현재적 창조물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일과 역사적 행동 학술 종교 기술 재능 아름다움 미모 -그림 문헌 역사 건물 생활용구 장신구 실용품....)을 의미한다. 이 <물>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포한하였으며 (7)꿈이라든가 귀신이라든가 재이현상등의 초현실적 신비적 경험 까지를 포괄하였다.

 

유학사상의 사유법으로서 경험적 보편성과 포괄성을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 경험사이의 균형을 두고 <중용>이라고 하였다. 그 힘으로 얻어진 지적 능력을 <명덕>이라고 하였다. 명덕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적 삶을 사는 것을 <신민>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를 <친민>이라고 읽어도 의미에 변화는 없다. 그 균형의 삶에 접근하는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친>이란 바로 도에 접근함을 말한 것이다. 유학은 수용하지 못할 사실이 없고 논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이점은 극히 중요하며 우리가 망각하고 있지만 유일 절대의 지표이다.

 

그 유학적 논법으로 행공 기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유학사상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모든 삶의 모색과 경험현상은 유교적 사색의 대상이다. 동아시아 문명사의 초기부터 우리 선현들이 동참하여 형성 발전해온 민족사상사로서 유교를 이해하고 그 개념과 논법을 수용하고 운용하여 오늘의 어떤 현실 문제든 아무 장애 없이 아우르고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시론 하려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이는 논자의 오랜 믿음이며 학술적 비 학술적 분야를 불문하고 어떤 주제나 양식의 서술에서도 의외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바로 그 보편논리로서의 일반적 가치와 기능을 검토하려고 하였다.

 

유학적 사색은 근본적으로 개인이 영위하는 일상의 일반적 사유를 중심으로 하므로 생활의 자연스런 감각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떤 장르의 유행적 경향을 검토하는 경우에도 적절히 합치할 수 있다. 특히 <탐구글쓰기>라고 할 <새로운 텍스트 관>에 입각하여 다양한 사유의 과정과 결과를 반영하면서 보편적 학구의 체제를 행문 과정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을 아울러 드러내보려고 하였다. <탐구글쓰기>란 문자자체를 직접적인 일반경험과 변별하지 않는 논어 <학습론>상의 유교적 이해방식에 기초한 시도이다. <새로운 텍스트 관>이란 글쓰기 자체를 오로지 탐구의 과정 자체로서 의의를 부여하려는 관념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행공의 의미 모색을 중심으로 <탐구>와 <쓰기>를 실시간으로 동시적으로 진행하면서 특별한 이해의 성과를 최종적으로 겨냥하기보다는 그 과정 자체를 주의하려고 하였다. 유교적 문명사관에서는 문(文)과 질(質)의 균형이 역사의 본질이다. <탐구쓰기>는 <질>과 연관된 모색이며 오늘의 문화사적 최대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행공 수행이 모든 문명적 삶의 행동적 기초가 된다는 생각과도 일치된다.

 

행공을 주제로 택한 것은 어느 정도 우연한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분야가 <유·불·선> 삼교를 아우른다고 생각해 왔었으므로 바로 그 친근함과, 또한 오늘의 문명적 생태상 긴요하다는 현재적 요구에 끌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실은 <유·불·선 삼교 합일>이란 이상은 종교적 문맥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동아시아 일반 지성사로서는 중대한 오차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유교는 종교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 <보편사상>이기 때문에 유학적 삶을 구현함에 있어서는 과학이나 기술 철학이나 종교 학술 등의 모든 분야를 구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보편사상론>에 이견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는 동아시아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것이므로 그 관성적 이해의 속단을 자제해주기를 바란다는 소박한 희망을 동시에 적어두고 싶다.

 

부언한다면 <유교를 버려도 되는가> 하는 것이 이 시대 최대의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요즘 유교란 무의미해 보인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보다 많은 편의의 추구와 풍요로운 생활이 오로지 관심사이고 국제적으로는 어떻게 하여 국가간의 경쟁에서 이겨내고 풍요를 쟁취하고 강대한 힘을 기를 것인가가 문제로 보일 것이다. 너와 나 우리와 너희를 할 것 없이 힘의 논리가 오직 중요시될 뿐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맞는 생각이다. 전통사상이라고 해도 국가의 수호와 민족의 보존은 궁극의 목표였으니까. 그리고 민생의 안정은 어느 시대나 추구하던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좀 다른 데 있다.

 

(1)사회와 역사를 주도하는 중대한 힘의 근원이 여전히 물리적 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적 야만성이 그중 가장 치명적인 오류이다. 국가간에 무력과 경제력 기술력만을 중시하는 것이 그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들의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진운은 그런데서 열려갈 수 없다고 본다. 오직 동아시아적 개념의 진심 <지성>의 힘이어야 한다.

 

(2)근·현대 문명의 성과에 대한 지나친 자만이 또 하나의 오류이다. 서양의 경우는 그래도 자신의 문화를 깊이 성찰하는 움직임이 있고 스스로에게 경고 하는 일을 잊지 않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동아시아이다. 그들이 이룩한 근대적 성과가 모방에 의한 것이고 고유의 가치관과 미의식을 상실한 위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보다는 매우 허망한 측면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상의 변절자나 친일파처럼 남의 위세를 추종하는 움직임이 매우 강하다. 그 환상과 믿음이 널리 광포되어 강한 유행과 같은 성향을 이루고 있어 쉽게 변경하기 어렵다는 것이 최대의 문제이다.

 

(3)그 오도된 사상과 생활의식이라는 근대적 믿음의 바탕에 자신의 문화를 포기하는 엄염연한 <자아상실>이 있음을 돌아 보아야할 것이다. 즉 자신의 성찰이 없다는 것이 또 하나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물론 지식인들이 책을 읽고 치열하게 사색 탐구하고 바른 길을 탐토하려는 운동가들도 많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도외시하기 때문에 그것은 단적으로 자신의 성찰이 아니며 남의 눈에 영합하는 몰개성적 비극을 지향하고 있다. 현실과 역사와 미래를 이어갈 끈을 버리고 남의 끈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끈은 우리의 사상사이다. 우리의 전통이며 역사이다. 이를 관심 있는 생활의 구체 분야에서부터 되찾아야한다. 우리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모든 추향을 다 함섭하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아무 것도 버리거나 고칠 것은 없다 다만 우리가 선 중심만 지킬 수 있으면 그것으로 완전히 우리는 역사적 전통적 삶을 복원할 수 있고 과거와 역사로부터 새 힘을 현재로부터 활력과 신념을 미래를 향해 막강한 자신과 희망을 갖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오직 우리 역사와 사상의 진상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중심으로 해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시대의 자화상
청동좌상에게
칠흑빛 로댕 청동상의 나신엔 성스러워야할 혼돈의 동혈이 있다
기다림 없이도 천년이라도 앉아 있을 신비한 경이도 있다
속절없이 자연소화 하는 육신을 맑은 땀과 하얀 서리로 식히고
살 냄새만으로 휴먼 새크리화이스의 제전을 영위함은 분명 이적이다.
매일 별 달을 몰며 꿈을 지어내는 샤갈의 환상을 이마에 드리우고
바다의 무게로 심해어마저 고요한 미동 없는 날들을 어깨에 지고
하루 한번 고운 빛으로 전환하는 역설의 파노라마 자락을 등에 걸친다
천부의 영능은 이미 빠짐없이 표피 밑 한 뼘 깊이로 스미어 뿌리내려
보아라 놀랍게도 DNA 구조물 타고 어느새 목덜미 윤기로 올라있다
공간의 진상과 존재의 실상, 시간의 현상들이 비린내 풍기며 서로
양보 없이 살 속으로 들어 부딪는 파동을 넌 갈비 마디로 받고 있을 터
무릎 앞 환타지아 너의 세계는 웅크리고 읽어야할 고독한 문헌이기보다는
용감한 돈키호테와 산초판자의 고야 화법에 따라 누구라도 스스럼없이
너 또한 주저함 없이 밀고 들어야 할 공기원근법의 문이다.
아마 머리칼로 들으리 영대 누각의 종이 먼 허공에 높이 매달려서도
쉬임없이 종신 유곽을 흔들고 지나 지나 지나 공명하여 용통 아래
이어서 이어서 울리어 울리어 울리어 부르는 메아리를 메아리를
혹은 발 끝으로 느끼리라 전신이 구름의 숨소리와 바람의 물결 되어
충만한 성신(聖神)의 기해에서 위로 위로 위로 기립함을
온갖 사물과 함께 하는 남기 어린 들에서 남기 어린 들에서
어둠을 밀고 가는 밀고 가는 밀고 가는 우렁찬 북소리로 북소리로
몇 옥타브 넘나드는 화성악의 굉음으로 굉음으로 굉음으로
상상하지 못할 세계의 주술을 이미 그대가 행하고 있나니
죽음의 연기로 천연스레 새 생명공학의 기적을 열고 있다

 

생명의 한가운데 서서

1
인간은 극히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경험하기로는 인생은 엄연히 아름답고 오랜 고전적 믿음으로 보면 사람은 스스로 순수한 천부의 기품을 지니고 태어난다. 맹자 <성선설>의 위대한 발견이다. 기품을 준 하늘(天)은 그대로 완전하고 인간은 그 완전함을 추구한다. 바로 완전하지 못한 만큼의, 그 완전함과의 거리공간 속에서 사실은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함과 불완전함이란 아름다움이나 순결함 등 이상의 영역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질성을 공유한다. 경전주석의 문투로 <인자(仁者)>와 <인지자(仁之子)>의 한 글자 차이일 뿐이다. 양자 사이에서는 그 상호 괴리의 좌표 점을 연결한 경사선 만큼의 물리학적 경향성 즉 힘의 역동이 일어난다. 우리의 공부라든가 행공 수행이란 그 다이내믹한 힘을 운용하려는 학습일 것이다.

 

삶의 주요 지표인 기쁨이라든가 행복 또는 편안함 아니면 성장과 창조란 단연코 대개 양자의 괴리의 산물이기도하다. 우리는 그러한 괴리란 새로움을 향하는 신성한 뜻으로 정해지고 두어진 것이라고 결론지울 수 있다. 그것은 곧 <스스로 새로워지려한다.>는 대학의 명제와 통한다. 혼란을 조장하려는 석연치 않은 한 구석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령한 공간이 지니는 신성함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연히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결론은 사실 사려 깊지 못한 것일 것이다. 촌각(寸角)을 다투어 사사롭게 미추지우(美醜智愚)를 가름하려는 우리의 변별력이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사로움이란 결국은 주체의식을 의미하므로 사실은 모든 생체의 중심이다. 신성한 힘의 근원인 것이다. 다만 <자사(自私)>와 <멸사(滅私)>의 추향의 차이이다. <독락(獨樂)>과 <동락(同樂)>의 성향의 다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인생 도정에서 심신은 때로 병들거나 끊임없이 노쇠하게 된다. 그러나 그 병듦과 노화작용마저 완전함을 지향하는 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죽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한 말은 그런 뜻에서 일 것이다. 즉 우리들 삶의 분절적 전개란 사실은 다만 새로움을 발견해내야 할 우주적 계기작용이다. 우리는 서있기조차 힘들게 되었을 때 서있음의 의미를 알게 되고, 먹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음식의 귀중함을 알게 된다. 육체가 나약하고 퇴락하였을 때 비로소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역시 숭고한 우주 본연의 원질작용일 것이다. 우리는 자각적으로 결국은 죽음의 인생을 영위함으로써 다시 장엄한 의미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유와 경외는 그 크기만큼 굉장한 깨달음을 몰고 오는 것이리라. 불후한 삶을 추구한 전통 유학(儒學)이 죽음에 대해 소극적이라는 것은 그런 면에서 완전한 곡해일 것이다.

 

그 완전함의 지향은 역설적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완결될 수 없으므로 이는 생명의 영원한 과제이며 숙명이다. 인생과 완전함의 사이에는 그런 큰 공간이 존재한다. 우리는 산채로 그 공간 좁히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바로 공간을 영위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 완전을 지향하는 끝없는 공간적 욕구의 크기는 곧 모든 행동과 결단으로 구현되는 갱신의 에너지 양이다. 그 공간의 발견과 확보는 순수한 자기 응찰로 가능하며 공간과의 공감과 일치감으로 수행된다. 이는 특히 자신의 천품의 청탁을 타진하여 아는 데서 출발한다. 자신을 구석구석까지 전인적으로 빠짐없이 다 두드려 감촉해볼 필요가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은 다름 아닌 그러한 공간탐구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인식은 자기이해의 깊이를 나타내며 자아의 깊이란 단지 폐쇄된 생체의 내부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된 자기 공간의 투명함의 두께를 말한다. 자신을 응시하지 않고, 내공간의 청탁을 알지 못하면 그 아무 것도 진정으로 출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알라"는 신탁의 말이 중요함을 또한 실감한다.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 지혜" 라는 경전의 말씀이 절실한 언어임을 느낀다. 기품의 여하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전인적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직솔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그 출발일 것이다. 이를 경(敬), 직내(直內) 사상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성찰을 몸과 행동 동작으로 견지하고자 하는 것이 수행공부일 것이다. 우리는 쉼 없이 그 자각을 드러내고 그 구현된 자각은 또 다른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새로운 자각을 유인한다. 공부란 그 나선적인 순환의 과정이다.

 

대개 일반적으로 모든 변화현상은 완전함을 구현하는 과정며 현상이란 언제나 완전의 가능성을 내포하여 불완전함을 보완하고자 한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 속하였을 때 절실해진다. 탄생기 성장기 장년기 노년기 죽음 이후 등의 시점 가운데 특히 후기에 이르는 개별적 순간에 사람은 특히 불완전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희망이라든가 소망이라는 심리적 양식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그 싯점적 긴장을 완화하고 그에 수반된 불만과 상실감을 해소한다. 어느 시점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을 때 인생의 어느 것도 어떤 경우나 상황도 특별한 돌발의 사변으로 보지 않을 수 있고, 특정 시점을 고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일관된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한 시점에 지나치게 고착될 때 당장 곧 한계의 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다름 아닌 어느 시공에 대한 집착이 사람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유와 수행은 일종의 자기 삶의 시점인식의 폭을 열어 보편적 질서공간과 일치하려는 희망의 양식이다. 즉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여는 모든 행동적 기제일 것이다.

 

실재의 시간과 공간은 무한하며 존재적 가능성이나 상황적 소여성은 무한대로 열려있으므로 집착이란 진리이기 이전에 방자한 자기 설정이며 개인적인 가상 내지 상상적인 것으로서 그저 임의의 자의적 결단일 뿐이다. 이를 사사롭다고 한다. 그러나 인생은 한 순간도 결단으로 이루어지고 단적으로 생명에의 집착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집착은 생명에 수반되는 불가결한 면이 있다. 그 집착지향성을 정면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조건화라는 위대한 정신기술을 개발해 왔다. 불완전할지라도 논리적 <정의>를 내려 새로운 관점을 준비하는 조건화의 방식을 통해 우리의 판단을 조절하고 가치를 수립함으로써 우리가 상대할 공간과 시간을 자유롭게 선정하고 정밀하게 응찰하게 되었다. 이 <조건화 기법>이야말로 고대 사상이 발견한 위대한 유산이다.

 

그러므로 공부란 자유로운 조건화의 시도를 통해 이룩하는 심신과 현상에 대한 자기 주체적 선택적 성찰체제이다. 그 결과 무한정의 시공을 헤쳐 나아가는 결단이나 확신의 근거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서와 도를 상정하고 생각하며 또한 상시 그 성과를 교정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의(義)로움이 신의(信義)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정의마저도 임의의 독단이거나 사사로운 사정의 본질성을 지닐 수 있다는 입체적 성찰의 뜻일 것이다. 어떤 영롱한 지성어일지라도 그런 응찰의 절실함을 갖추지 못할 때 전연 무의미한 가식이 될 것이다. 행공은 그러한 절실함을 현실로 드러내가 위한 것이며 단적으로 실질하고 체험적인 변별의 공부이다.

 

완전함을 전제로 한 그 같은 기품에 대한 사색과 믿음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생명이 이미 천부의 것이고 그 안에 천부의 본 뜻이 함축되었다는 진실의 받아들임은 나의 생명의 기원이나 의미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게 해줄 수 있고 우리의 삶을 진정 자각적이고 힘차게 해 줄 것이다. 그러한 열린 자각의 삶이 곧 생명의 진상으로 곧게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인생에서 그 진상과의 일치의 기쁨은 지극한 것일 것이다. 행공은 적어도 나에게는 조금도 다름 아닌 그러한 일치를 위하고 전인적 자각을 위한 진절한 수행양식이다. 우리는 그러나 그 당연한 믿음을 뒤흔드는 유혹 속에 항시 살고 있으므로 그 믿음을 위한 건실한 용기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한 오류 거부의 표현 의식으로서의 행공은 거부하고 밀어내는 의념으로 시작하여 평화로운 일치의 상징성으로 마치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행공이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상징이며 경건한 생활의례일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모든 예의가 행공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눈앞의 현실을 딛고 살지만 보이지 않는 과거의 역사와 유산으로부터 신비로운 힘을 제공받는다. 비록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볼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 안에 과거도 하나의 실재로서 살아 있다는 것을 때때로 느낄 수 있다. 사실 사람은 역사적 동물이며 그 역사는 결국 그 자각의 역사이다. 문명의 역사는 그 자각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산출한 그 성과로 구성된다. 모든 자각의 역사는 개인사의 집적이며 자각은 개인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하므로 결국 개인의 삶에서 자각을 실현하는 일은 단적으로 거대하고 중요한 일이다. 수행이나 행공이란 그런 독자적인 개인사의 창출의 한 방식이다.

 

그 자각은 추상적 논리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전통적인 자각 공부의 텍스트인 <중용>의 의미는 그 동안의 <조화> <균형>이라는 순 논리적 이해를 극복하고 그 원래의 의미인 <만남(中)> <일상(庸)>의 의미로 돌아가야 한다. 일상의 경험 속에서 먼저 만나게 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서경>의 윤집궐중(允執厥中)에서 시작된 중용사상은 사실은 경험과 자아와의 만남을 중시하고 그에 대한 성찰을 견지(執)한다는 의미로서 출범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유교사상의 시작은 건실한 경험성에 있었다. 역사도 그 경험의 범주 속에 확고하게 있었다.

 

사람의 삶이란 결국 그들이 개척한 자각의 많은 양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직무 일상 학문 사상 예술 정치 경제 그 모든 분야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자각은 나의 육체적 감성과 지적 이해력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양식 위에 선 개인으로서 보편적 가치를 창출해야하는 필연적 시공 위에 긴장된 채로 서 있다. 사람의 삶이란 의미와 성과에서 매순간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은 개인으로서 완전히 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일정 환경과 구조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모든 혼동을 쇄신을 추구하는 사유의 출발점이다. 그 구조적 복잡함을 극복하려는 것이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이며 그 성과가 <명덕(明德)>을 전제로한 <신민(新民)> 혹은 <친민(親民)> <지선(至善)>일 것이다.

 

우주는 생명의 중심이지만 그 스스로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한다. 스스로 이미 특별히 조작함이 없이 태평하여 자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각의 주된 중심은 오직 의식적 작위로 살아가는 인간이며 나 자신이다. 자각은 나의 감성과 지성을 오직 중심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지감으로 이루어진 의식이 우주의 중심과 같은 중대한 중심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행공이란 바로 그러한 자각적인 그리고 중심을 추구하고자 하여 보편적 작위를 시연하는 삶의 한 체제이다. 행공은 내가 두 다리를 딛고 일어서는 순간에 어디서나 일상으로 시작되는 모든 사변(事變)에 대한 전인적 감각과 대응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으로 그 스스로의 자연적 자각 반응과 연관된다. 행공은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오직 절실하고 확고한 경험적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으로서 자각의 삶을 철두철미하게 견지하려는 시도이다. 중심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다양한 경험을 통합하는 계기가 된다. 공자의 <일관(一貫)>이란 그런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전인적 감각과 대응을 견지하여 일상화 할 때 그 감각과 대응의 성숙도에 따라 그만큼의 오묘한 자연조화의 비밀과 모든 가능성이 모색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원리는 간단하다고 생각된다. 익숙한 전인적 감각의 균형된 유지는 심신을 편하게 하고 그 편안함 속에서는 모든 사려가 가능해져, 모든 의지의 경신과 그 결행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중용의 교훈이다. 행공은 그 같은 보편한 문을 여는 모든 두드림이다. 그 모든 언어이며 사고이고 행동이며 모든 몸짓이다. 다만 우리가 얼마만큼의 넓이로 모든 문호를 열 수 있을지는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행공적인 수행의 삶이 새삼 오늘 절실하게 필요한 또 다른 보다 더 긴요한 이유는

 

첫째 우리가 역사적으로 심신 수행의 고귀한 전통을 개발해왔으면서도 우리 사회가 진절한 역사와 전통과의 실질한 대화를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역사상의 성과를 딛고 일어서야 할 근대 내지 미래지향적 인간으로서, 우리의 현실과 미래가 지금 경도된 지적 자만에 의해 위협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둘째는 역사시대를 통하여 본의와 달리 역사적 모순으로 인해 좁혀져온 학문과 삶의 해석태도를 돌이켜 본원적 본질 그 원래대로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행공은 초월적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꼭 가진 만큼의 고유한 심신의 가능성을 그대로 열어보려는 겸손한 열망으로 시작되는 모든 수행이다. 단적으로는 배움의 의미를 그 원의 그대로 실연해야한다는 <생활회복의 움직임>이라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은 특히 생소하게 들릴 것인데 원래 유학에서 말하는 그 <학습>이란 오늘의 의미와는 너무나 질적으로 다른 용어였다. 원의로서 학습이란 <새로운 지적 생활운동>이었다. 그러나 학습이 그대로 <전체로서 생활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적지 않은 수행과 천착이 필요할 것이다.

 

전통사상으로서의 유학은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는 즈음에 형식화되고 여타의 사상 문화체계로부터 도전을 받음으로써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크게 왜곡되었다. 형식화의 문제는 유학의 학문적 전승이 각 지역의 문화적 전승의 차이로 말미암아 불완전함에 기인하였고 그 위에 각 시대 각 문화정신체제로부터 오는 압력과 저항으로 말미암아 그 학적 본질을 견지하지 못하였다. 도전의 문제는 특히 종교적 도전이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한나라에서 유학이 국교화 되는 과정에서 전통미신 새로운 신학적 종파 혹은 종교화된 이단학파 등이 등장하여 정치적 사회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유교와 대립하였다. 혹은 종교와 학파가 연합하여 대항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유교는 그 원래의 사상 가운데 신성한 종교적 분야를 사실상 타집단과의 변별을 위하여 경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형식상으로는 종교적 양식과 절충하였다. 이것이 최대의 왜곡의 시작이었다. 그 결과 한나라를 통하여 건조한 명교가 유행함으로서 유학의 사유능력은 반감되었다. 그에 대한 당연한 반작용이 일어났고 근세까지 그 왜곡은 해결되지 못하였다. 처음의 사상왜곡의 그림자는 길고도 깊었던 것이다.

 

오늘날 특히 유학(儒學)이 우리 정신사의 중심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그 본래의 깊은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있다. 일반 보편의 사유양식이었던 지성의 성과를 아집과 고루한 도덕적 형식주의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너무나 널리 팽배해있다. 유학의 개념을 그대로 모든 분야에 현실로서 삶 자체로서 적용하고 운용해볼 필요가 절실하다. 오직 동아시아 사상사의 이름으로서 유학의 보편성을 실제로 체현해볼 필요가 긴급하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우선은 행공의 의미를 반추함으로써 유학이 그 본래의 고유한 특장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학은 보편적 사유를 생명으로 하므로 모든 문화 해석에 뛰어난 시각을 제공할 수도 있다. 특히 삶의 막강한 힘일 수 있다. 장래에는 삶과 문화의 각 장르와 분야에서 유학적 개념과 사유법이 약동적으로 적용될 것을 믿으며 이 글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기를 오직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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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하나의 논리인 말로써 기를 논하고 표현하고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언어는 이미 응집된 나의 혈기의 표현이며 언어를 타고 흐르는 의미의 유동은 동시에 일반 원기의 반영이다. 나의 말 속에 이미 행공의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그 혈기와 원기를 정의(情義)개념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언어현상은 일반현상과 다를 것이 없다. 한마디 말과 몇 구절의 글이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사실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기가 아닌 것이 없다. 공간에서 가지는 존재의 의미상 전연 동질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통유학에서 사물과 인간과 문물과 문자가 동등하게 받아들여졌던 이유이다.

 

언어는 논리의 공로를 통해서 나와 원기를 융통하는 것으로 하나의 실재의 양식이다. 그림은 시각을 통해서 음악은 청각을 통해서 조각은 형체를 통해서 학문은 현상 정의를 통해서 통달의 길을 열고자 한다. 사람이 지닌 감성과 지성의 전 영역은 바로 그 같은 화통의 길을 모색하는 양식을 개척하는 권능으로 인해 오직 위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 자체를 인간자신과 전연 변별 내지 구별하지 않고 사유할 수 있는 정도의 사유력은 사실 유학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

 

행공은 몸으로 수행하는 전인적 통달의 양식이다. 무공이나 의학 혹은 선가의 전유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인성자(聖)와 귀신신자(神)의 의미적 발전을 통해서 행공의 기원에 대한 그 일단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두 글자 모두 전감각적으로 초월적 힘을 느끼는 의미로 시작되었다. 성인성자는 고구려 시대의 아란불과 같은 무자들의 예에서처럼 신의 말씀으로 통하는 방식을 말하고 귀신신자는 백제의 일자들처럼 일반 현상가운데서 신의 의지의 드러남을 읽으려는 간접적인 방식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언어적 방식은 유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위적 제3의 방식(일, 행사)이 유행된 것이 중국적 특징이다. 그들은 "신은 말로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도 맹세의 말을 진정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 제3의 방식이란 갑골점법(甲骨占法)과 주역서점(周易筮占)이다. 거북뼈나 수골의 견갑골에 홈을 파고 불을 가하여 나타나는 균열을 해석하는 방식과 시초(蓍草) 점대의 수학적 조합결과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 공통점은 갑골점에서 와(瓦) 옥(玉) 원(原)의 상징을 중심으로 1200여 점체를 유추하고, 서점에서는 음양(陰陽)을 상징하는 3개의 효의 조합을 바탕으로 한 64개 괘상을 통하여 모든 현상을 유형화하고 해석하였다는 데에 있다. 언어적 인 경우는 꿈이나 신탁의 내용을 역시 해석함으로써 신비적 통달의 욕구를 달성하였다. 이런 두 경로의 신비적 전통 역시 <현상 해석>을 수행한다는 면에서 모든 경험적 분석과 완전히 일치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는 학문이나 과학과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동아시아 사유의 위대한 핵심적 본질이다.

 

부언할 것은 중국에서 확립된 것으로 믿어온 점법은 조작적 행위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그 조작을 통하여 경험을 확충하는 경험획득법은 사실 동이족적인 것이기도하였다. 오늘날의 실험적인 탐구와 동질적인 것이다. 우리 단군신화에 <열 손가락을 깨물어보아라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하는 것이 그 실험정신을 대표한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그들이 창출한 문화 문물을 구별 없이 경험으로 수용 사용하여 왔음을 나타낸다. 그 방식이 중국에서 더욱 양식화하고 발전하였던 것이다.

 

초기 역사의 신비주의 시대에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신비적 구조와 양식에 따라 현상을 해석하기 시작함으로서 비로소 온몸으로 달통하려던 자세에서 진전해 분석과 통합적 사유를 교호하면서 적극적 통달의 길을 추구하였으므로 자연히 그 신비주의적 방식은 지성적 논리적 방식과 연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나아갔었다. 오늘날의 지성과 논리의 뿌리가 전인적 감각에 기초하는 신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 신비주의가 현상과 경험과 논리와 만남으로써 상상을 불허하는 의식적인 비약 발전을 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몸과 신비주의적 방식이란 버려야하는 열등한 지성의 양식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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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 등의 고대 이래의 주류사상에서는 그와 같은 신비주의의 영역이 축소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경험과 논리 사이에서 서로를 말살하려하거나 서로 결별한 적은 없었다. 그 가운데 항시 원초적으로 행공적인 요소가 삶으로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역상의 축소현상은 지적으로 전환 가능한 자각의 영역이 넓어진 데 따른 자연적인 일이며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신비적 정념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동양이 신비롭다"는 표현은 정당하다. 그리고 신비적 정념을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지적 발견에 의해 전통적인 지성의 중심을 의심하거나 경솔히 변경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한마디로 신비주의와 지성주의의 절묘한 조화의 공간에서 고대사상이 비약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상사의 중심은 이성적 경험적인 쪽이 점점 더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동아시아 사상은 강한 경험성을 그 중심으로 유지해왔으므로 <동양이 신비롭다>는 이해는 결국은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지성의 정체를 회복함에 있어서도 행공은 중요한 그 총체적 수행법으로서 절실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그와 같은 점들을 전인적으로 고요히 스스로에게서 음미하기 시작함으로써 행공은 출발된다.

 

행공은 단지 치우침 없는 전인적 감각으로 내면의 모든 울림을 감촉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울림에 대한 감각은 나의 사적인 감각에 머무르지 않고 제한 없는 달통의 길을 추구하기 때문에 공적 의식을 지향하는 수행의 양식으로 승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행공시에 호흡을 천천히 한다거나 동작을 서서히 하는 것은 그 동작의 과정을 그대로 조건 없이 음미하려는 것이다. 그 음미의 과정에서 개별적인 독특한 행공체험을 하게 되고 다시 이를 사유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모든 반성적 사유의 모든 양식이 자유롭게 운용된다. 행공이 결국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유자적 태도로 귀결되게 되는 까닭이다. 학문에서는 모든 현상경험의 폭넓은 수용이 절실하지만 자신의 자기내면현상에 대한 성찰이 그 기초가 되고 끝이 되어야할 것이므로 우리는 증자(曾子)의 삼성(三省:吾日三省吾身)이 바로 행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 회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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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 공부를 하면서 이 절실함으로 넘치는 생존의 들녘에 서서 생명으로 가득한 그 무엇을 느끼면서 여러 가지 세속적인 생각을 하곤 한다. 요즘엔 특히 멀지 않은 늙음에 대하여 도전하려는 생각이라든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는 생각 등 이 생각 저 생각을 좁은 여유 속에서 일으켜볼 때가 있다.

 

최근엔 대선이 끝나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세속적인 것의 대명사인 정치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말하는 대담들이 넘치고 있다. 그 말 많은 대담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 사회가 아직은 매우 불안정하지만 점점 "권력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사회는 어느 특정한 인위적 권위가 세상을 이끌어갈 수 없을 만큼 변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우리의 삶 공부도 꼭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동안 일상에서 거의 고정되었던 의식들을 재성찰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사회와 개인의 의미가 변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개인의 선택과 결단이 진정 중요해지고 명실상부하게 사회의 흐름을 직접 형성하는 시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의 의미가 한층 자각되고 존중되어야한다. 행공은 그러한 새로운 자각의 중요성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믿음의 표현이어야 할 것이다.

 

전근대사의 문제는 공동체적 의식이 지나치게 강하여 사회의 지도력이 실제 이상 명예화 되고 권위화 되고 권력화하면서 개인의 존엄해야할 가치를 압도하였고 그 부작용으로 권력이 이욕의 대상으로 되었기 때문에 공조직에서 사적 농단을 필연적으로 유인하였다는 데 있었다.

 

일견하기에 전근대 시기에는 지성적 변화 발전의 역동이 비교적 부진하였고 힘을 중심한 외교관계 성향이 보다 강하여 국가간의 생존환경이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전쟁지도자와 같은 일사불란한 지도력이 강조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간의 경쟁은 치열하고 서로에게 치명적인 반대자를 상대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그 대응의 방법과 효율의 힘은 강대한 지도력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높은 형식적 권위의 지도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삶의 구조와 여건을 보위하고 개선하기 위한 건실한 노력으로서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려는 구성원들의 일치된 의지와 일상의 치밀한 준비성에서 모든 대책의 창출이 가능하다. 물론 특정한 상황에서 지도력과 결정력을 가진 사람의 판단이 대세를 가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판단력 자체가 초능력으로부터 나온다기보다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여지 가운데서 선택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역시 더 중요한 근본은 다수 사람들의 일반 의지와 참여 그리고 그들의 결단력과 실천적 결행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능력이 개인화 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나라가 많지만 국민의 의사와 지도자의 정치가 다를 경우가 많다. 또 국론이 반분되어 있을 경우도 있어 그 뜻을 따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선택은 물론 지도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 대책의 방향은 이미 대중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제시된 것일 수밖에 없다. 국민일반의 공감과 합의가 기초라는 것이다. 맹자의 말과 같이 "모든 강대한 기상은 즉 막대한 용기란 의를 결집(集義)하는데서 나온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반추할만하다. 개인에 있어서나 사회 집단에 있어서 의의 결집은 똑같이 중요하다. 그와 같은 의사결집의 의의를 새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모든 권위나 권력이란 이제 국민일반의 의사를 결집하고 선택하여 수행하는 시행자의 의미가 보다 강조되어 나아갈 것이다. <국민의 뜻을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흔히 의례적으로만 말해왔던 행태는 이제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삼천년 전에 그와 같은 공적 직무의식이 있었다. <순(舜)이 천자의 지위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최고 권력자란 최고의 공의의 실천자임을 이미 깊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학자는 공의의 발견자이며 국민은 공의의 성숙 형성자이며 지도자는 공의의 수행자일 것이다. 맹자가 공직을 천작(天爵)과 비교하여 진정 존엄한 것은 하늘의 뜻을 수행하는 자가 가지는 자연적 지위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바른 공직관을 재발견하여야 할 때일 것이다. 행공하는 개인, 수행하는 개인은 공의의 가장 민감한 체현자로서 그와 같은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중심이기도 하다.
사회나 정치를 언급하는 것이 다소 낯설겠지만 행공이란 그와 같은 실천적 공의의 길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공부란 그 공의의 요핵을 그 실체 그대로 자신에게서 구현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맹자의 <호연지기>론은 모든 학습적 기론의 기초일 것이다.

 

제1장 행공의 일반 의미
1.수행담론修行談論
제1절 행공의 문화사적 의미

 

우리는 어떤 욕구나 새로운 상황 혹은 중대한 시련 앞에선 자신을 쇄신해야하므로 항시 새로운 행동의 전제로서 인간론(人間論)을 필요로 한다. 세세한 새로운 가치의 삶을 위해서도 먼저 인생론(人生論)이 요구된다. 행공론(行功論)은 사실 인간론이며 인생론 일 수밖에 없다. 그 때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의 건너편에 그러나 함께 있는 공간이다. 즉 사람 자신의 점유 공간 그리고 일반 공간과의 관계이다. 그 모든 판단의 질은 그 공간개념에 달려있다. 우리는 그 공간이 허무(虛無)한 진공(眞空)이 아니며 허령(虛靈)한 것 곧 신비한 그 무엇이라고 볼 때 공간론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주는 아직 인간이 손쉽게 끼어들 수 없는 공간인데 그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황량한 우주에 던져지면 즉시 사멸할 수밖에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진정 그뿐인가 하고 묻는데서 사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광대한 대지에 혹은 삭막한 사막에 고립되었다고 가정할 때와 우주상에 고립된 경우와는 다른가? 사람의 조밀한 대중의 사이에서 고립되었을 때와 사막이나 광야 혹은 지구 밖의 외계에 고립되었을 경우와는 진정 다른가? 전연 필요 없는 가정이며 물음일 수도 있지만 실은 고립이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하다. 곧 고립은 창조적 모든 관계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이어서 죽음과 사멸을 초래하는 그 무엇이라는 "죽음의 현상학적 의미"상 전연 동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고립이란 단적으로는 공간과 나와의 대립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립되는 공간을 창조적 조화적 공간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사상이다. 행공은 그러한 믿음의 실천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주가 별들의 역동적 관계로 구성되는 인간과 대립하는 제3의 공간이나 사람의 노력에 따라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인간 친화적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근대 우주개척사가 보여주고 있다. <조건화> 능력이야말로 사람이 역사를 창조적으로 갱신해온 동력이다. 인체는 이미 일정조건으로 구축된 친화적 관계의 결집체로서 그 가능성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 자체가 조건적 존재이고 존재의 발전이란 그 조건을 소거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삶이란 진정한 조건을 따지고 다루는 기술로 영위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삶에서 문자 그대로 "사람이 지닌 현재자기(現在自己)와 진정한 자아와의 내·외의 사이(人間)"가 영원한 주제일 수밖에 없고 행공은 그 긴장된 조화를 위한 삶의 축도(縮圖)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인간(人間)이란 사람의 내·외공간이다. 그 내외 공간의 조화와 균형을 주목한다면 사람의 생체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 나아가서는 사람을 둘러싼 모든 일반 공간계가 모두 구현된 동질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우주는 인간공간을 지향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과 그 관계된 내·외공간(內·外空間)이야말로 모든 사변과 가능성의 집결체이다. 그 결론이 우연한 놀라움이던 혹은 카오스일지라도 또한 인간론은 결국은 시공과의 관계와 변화를 통관하려는 공간의 통일 이론이다. 모든 전 공간과 인간 공간과의 차별 없는 받아들임 즉 동질화(同質化)라는 이상의 길을 통해 그 주제에 접근하려는 많은 노력 가운데 실질한 하나로 우리는 행공을 생각할 수 있다.

 

행공은 그러한 인간화행동(人間化行動)이다. 진정 사람다운 행위란 그와 같은 공간인식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행공은 결국 '허령공간을 향한 두드림' 즉 '유의미한 미지에의 노크'일 수 있다. 일반우주공간과 현재의 세상공간은 구별되는 공간이다. 일반 공간은 우리들의 생명공간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본질성에서 다를 것이 없다 세상은 단지 조건화된 일반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건화된 공간 속에서 일반공간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다면 공간 사이의 일치도를 높여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원대한 꿈을 시도하는 것이 또한 행공공부의 한 분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람이 더할 수 없이 폐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시 공간과 대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아(我) 고(固) 집(執) 필(必)이 바로 그 점을 뼈아프게 반복어법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 조화적 공간통일의 대법을 중니(仲尼)의 결론으로는 서(恕)라고 부른다. 서심(恕心)이란 나와 남을 가르는 격막의 강을 건너가서 마음으로 일치한다는 뜻이다. 행공이 그 밖에 있을 수 없다. 물리학적인 논법으로 보면 균질매질(均質媒質)이 아니고는 빛 속성의 마음이 굴절하고 왜곡할 것이므로 일치할 수 없을 것이다. 공자 그의 논법 역시 심의(心意) 중심의 공간의 균질화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균질체로 통일된 드넓은 공간의 창조가 삶의 최종 목적이며 또는 진정한 의미일 수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신화시대의 명제이지만 영롱한 지성어(至誠語)이다. 홍익이란 허령공간(虛靈空間)을 동질화된 우리의 보편한 인격(人格)의 질체(質體)를 중심으로 통일해 나아가자는 말이다. 인격적 조화 관계를 지상의 최고 질서로 하는 공간을 확충하자는 말이다. 그를 위해서는 인격 질체가 일반 순수공간의 자격을 가질 만큼 열리고 균질화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최종 목표는 전우주의 인간화일 것이다. 다만 그 인간화 명제는 인간위주의 이기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과 보편질서와의 통일을 지향한다. 그 균질화의 노력을 수양(修養) 혹은 수행(修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최고운(崔孤雲)이 말했던 "우리 동방에 풍류도가 있다"는 말에서 풍류(風流)란 역시 바람처럼 흐르는 통일된 조화 균형의 울림을 말한다. 그것은 음악일 수밖에 없고 전통적 예악(禮樂) 정신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인격적 수행(修行)이라 할 행공(行功)은 원래 오래되고도 새로운 길이다. 머나먼 과거에서 시작된 초역사적이고 일상적인 길이면서 동시에 또 미래를 통관할 길이다. 행공이 새로운 미래의 길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현대인이 누구나 심신(心身)으로 짐 지고 있는 문명적 부산물로서 지워진 무거운 과제에 상당 정도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가장 큰 매력은 스스로 직접적인 순수 공간감각인 기감각(氣感覺)을 열어 도(道)를 체험하고 직접 시연(試演)하며 그 과정에서 산출되는 새로운 의미 속에서 강화된 자기 확신을 전향적으로 창출해 나아가려는 대담한 몸짓에 있다. 생명의 근원 실체와 직접 만나는 환희 즉 궁극의 통일적 일치감을 맛볼 수 있다는 거대한 도전과 희망과 가능성에 있다.

 

행공은 역시 오랜 자명명덕(自明明德)을 강조하는 <<대학(大學)>>의 전통 가운데 있으며 인간의 삶을 새롭게(新民)하고 사람이 도(道)와 친근하게(親民) 하는 그런 것이다. 여기에는 맹자적(孟子的)인 충실(充實) 본질(本質)의 튼튼함이 있고 명징한(明澄)한 자성(自省)의 투명함이 있다. 그렇게 행공은 실천적으로 수행되는 기론(氣論) 탐구일 수 있다. 그러므로 행공의 정체성이란 유교적 개념으로 도(道)의 본질인 인(仁)의 구현을 전제로 한 극기복례(克己復禮)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정의할 수도 있다. 즉 행공은 그 바탕에 있어 스스로 어진 행실에 속한다는 것이다. 어질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탐구적 생명존중정신이다.

 

오늘날 창조적 태도와 상상력의 부족이 만연하여 고유한 순수감성은 제한된 문명성으로 메말랐으며 생명의 원기(元氣)에서 발출하는 맑은 생기와 균형 잡힌 심성(心性)에서 나오는 공명정대(公明正大)한 활력이 왜곡되고 약화되어 나약해진 현대인이다. 그들에게 행공은 천품 자질에 대한 깊은 자기신뢰에서 출발하므로 우선 심신(心身) 영위의 현장에서 어떤 장벽과 혼란과 난관도 돌파하게 해줄 희망이 되고 튼튼한 자신감이 될 수 있다. 반문명적(反文明的)이고 편협함으로 넘치는 지성과 해체주의적 미학으로 허울마저 벗겨진 야성적 본능과가 서로 격돌하는 거대한 모순과 갈등의 충돌 굉음(轟音) 속에서 조용히 펼치는 행공의 장(場)은 안락하고 부드러운 호소력 있는 원초(原初)의 목소리가 살아나는 방음지대일 수 있다. 동시에 행공은 또한 질곡(桎梏)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처절한 고통을 밀고 가며 그 타개(打開)을 길을 찾으려는 눈물겨운 몸짓이기도 하다. 최근 필자는 식속의 일상 그 사사로움에 갇힌 백면서생으로서 그러한 행공의 의미를 새로 발견하고 가지게 된 큰 희망을 아직은 확고하지 못하지만 그대로 함께 나누고 싶어 몇 단락 그 소회를 더 적어보려고 한다.

 

모든 행공은 현실적으로는 수행(修行)이라는 넓은 의미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심신수양(心身修養)을 위한 신념 및 행동 체제이다. 전통적인 학적 삶의 여러 유형에서 수행은 학문과 현실간의 긴장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당연히 행공을 포함할 수 있다. 다만 대개의 모든 학적인 삶에서는 학문과 현실사이에 여과 없는 직접적인 부딛음의 긴장으로부터 모든 수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학문의 방식과 현실적 삶의 구조에 의해서 수행 방식이 왜곡되거나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행공의 장은 바로 학문과 현실의 대립의 충격을 중재하고 해소하여 삶과 학문의 중개자의 역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제3의 공간이며 자유 공간이고 평화로운 공간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공간 중에 특별히 준비된 이상적인 공간일 수 있다. 즉 세속적 이기적 목적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갈등도 해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행공은 당연히 광의로는 공부(工夫)에 속한다. 하나의 학이습(學而習 : 論語的 意味에서) 과정에 해당한다. 결국 행공과 공부 학습이란 같은 본질을 목표로 지향한다. 행공은 그러나 학문(學問)이나 문학(文學) 예술 종교 등과는 스스로 변별된다. 학문이라든가 문학 예술 종교 등은 문헌(文獻)과 상징의식 혹은 문화적 양식 체계나 상상력을 위주로 언어적 논리에 입각하여 학습을 수행 실천해 나아가는 것임에 비하여 행공은 심의 속에 모든 이상을 준비하되 몸을 통한 체감위주의 행동적(行動的) 공력(功力)의 구현을 통해 불립문자적 방식으로 공부를 수행한다. 행공은 보다 원대한 심의를 중심하므로 행동적 표현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자기화두로서의 경전적 텍스트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또한 무용이나 연기와 같은 유사한 행동과도 구별된다. 예술적 행동도 행위 예술을 포함하여 어떤 사상이나 미의식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점에서는 동질성이 있겠으나 결국은 그 외표적 표현성이 주제가 되기 때문에 내적 체험을 위주로 하는 행공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면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행공은 감각과 직관 직각을 위주로 전인적으로 기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것으로서 그 과정에서 역으로 철학적 학문적 문화적 여러 성과들을 수용하고 음미하여 그 탐색되고 파악된 기를 누리고 향유한다. 우리는 고대적 군무(群舞)와 축제(祝祭)에서는 아마 이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면에서 바로 그러한 그 동질적 전통이 지속 유지돼 왔지만 그러나 행공이 하나의 학습 혹은 공부의 범주에서 널리 일반적으로 본격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오늘날에까지 전해져오고 있는 무공 중심의 행공이나 오랜 양생술적 전통의 행공은 도관(道觀)이나 의가(醫家) 사원(寺院)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다. 그 이유는 전통시대의 행공은 일반의 세간에서는 문물을 강조해온 긴 역사로 인해 제도상 독립적으로 정규 교육 학문의 범주로 승화 수용되지 못하였으므로 자연히 그와 같은 이상적 도를 추구하는 전통 수행체제 속에서만 존속되어 왔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다른 의미에서는 일반의 사상사적 전통 가운데서 무(武)의 전통이 약화되어간 것도 그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 세속의 역사가 주로 무력과 경제력을 주된 힘으로 흥기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일반적인 국가의 통치는 문적(文的)인 방향을 추구해오는 오랜 역사의 성과가 있었고 그 결과 무공을 중심으로 전승된 행공은 광포되거나 일반화되거나 주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주(周)왕조가 일어나면서 이미 무(武)의 분야 일부가 문(文)의 문화로 발전한 것이 사실이고 사례(射禮)는 그 대표적인 양식이다. 물론 이것은 더 일반화되고 고양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기에 무는 6예(六藝)의 하나로서 음악 예절과 수학 글쓰기와 함께 사(射 : 활쏘기) 어(御 : 말 몰기)의 형식으로 문화화 하여 높은 정신을 표현하는 본격적 양식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 육례의 전통은 본래 문무조화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었고 이 문무조화의 사상은 공자시대에 이르러 문질(文質) 균형의 사상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그러나 한제국(漢帝國)이 유교주의를 표방한 이래 문치(文治)이 전통이 수립되어 2000년 역사를 지배하게 되면서 문자와 이념 도덕 중심의 수행이 학문과 삶의 중심주제로서 독존적 지위를 확보 유지하였다. 그것은 사상과 학문의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송대(宋代)의 성리학(性理學)에서 비판하였던 것처럼 그것이 유학의 원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미 송나라 시대에 그와 같은 비판정신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문치주의 전통은 변함이 없었다. 오랜 역사상의 정신지향성과 도덕적 가치 위주의 사회 문화 이상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학문과 삶의 관계를 충분히 주목하였지만 더 구체적으로 정신과 육체와의 학문적 관계는 깊이 고려되지 못하였다. 아마도 여기에는 육체적인 욕구나 느낌을 독점하거나 부정시 하려는 전근대 가부장 중심의 엄숙주의 학자들의 전통이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교는 긴 왜곡의 시대를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공자나 맹자의 경우에도 사람의 육체적 감성을 죄악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 정감을 강조하였던 것이 공자였으며 천품의 기질을 강조한 맹자가 사람의 감성과 욕구를 하얗게 표백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들의 시대가 춘추전국시대로서 무력적 살벌함을 위주로 한 야욕에 찬 시대였기 때문에 청빈함이라든가 검소함과 함께 무력의 사용은 극히 혐오스럽게 대하였고 그 대극 점에서 문덕(文德)을 강조하였었다. 그렇지만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문무균형의 이상을 저버린 적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그 균형을 다시 생각할 필요를 우리는 매우 강하게 느낀다. 그를 위해서 오랜 동안 버려두었던 학문적 수행의 한 분야로서 행공을 고양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특히 기계화 전자화 되는 현 추세 위에서 향기로운 인격이 탈화되어가는 건조한 시대를 살면서 그리고 또한 전통시대의 문약성(文弱性)과는 달리 디지틀화 한 문벌(文閥)에 의해서 다양한 횡포(橫暴)가 나타날 수 있는 지금 우리들 일반의 삶의 균형을 위하여 전통 수행의 양식을 온전히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계와 인간을 함께 받아들여 사유할 수 있는 양식도 유학 밖에 없다.
새 세기에 들어 우리의 사상적 전통인 유학에 대한 전망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동의어로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일반 지성계에서 이미 유학의 정신을 반추하려는 깊은 움직임이 대세로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그 유학의 새로운 역동의 힘은 아직 미미하다.

 

1)유학의 본질에 대한 각성의 불철저함
2)오랜 시공에서 일어난 역사상의 유학의 제한성과 왜곡성의 이해 부족
3)우리 근대 내지 현대의 문화가 유교에 대하여 가한 가치파괴 실상 이해의 결여
와 같은 극히 표면적인 일차적 원인이 아직 강인하게 남아 있다. 그 문제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풀어주기는 어렵고 오히려 정공법으로서 유학의 특장인 경험과 사고의 1)일반성 2)포괄성 3)균형성을 철저히 실천함으로서 유교적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정공법의 중요한 한 수단이 행공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유학의 중대 특장을 원초적으로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절 일반수행(一般修行)으로서의 행공에 대하여
우리의 모든 불안정함과 뼈아픈 갈등들과 불확정성을 딛고 삶의 이상인 <명상(冥想)과 관조(觀照)와 체험(體驗)이 일치하는> 바람직한 인생을 위해서 가져야할 적지 않은 숙제들이 있다. 그 중에 기(氣) 일원론(一元論)은 우리가 체험해야할 하나의 영원한 명제(命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기(多岐)하기 그지없는 사회 자연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체험이 어떤 것이었든지 대개 모두 좋아질 것이라는 또는 나아질 것이라는 소위 낙관적 전망 혹은 진화론적 관점을 믿는다. 그런 눈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 실제적 삶의 유일한 동력이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기일원론의 영육이며 생명이다. 성리학적 이기론쟁이 각각 유의미하고 정당한 논거를 가지고 있으나 인생과 철학이 일치된 세계를 열망하는 몸짓이라는 점을 주의하면 일원론의 가치는 영원할 것이다.

 

기일원론은 우리 세상에 오직 힘찬 생명의 기운이 넘친다는 생각이다. 그에 적극 동참하려는 믿음이다. 또한 나의 육신과 마음이 그 폐쇄회로의 영역을 열어 생명의 원기와 같이 호흡하려는 대담한 몸짓이다. 나를 연다는 것은 생명의 적인 죽음과 왜곡과 당당히 마주하겠다는 의미의 표현이기도 하고 생성과 사멸의 궁극의 자연스런 공정에 뛰어들려는 적극적 모험정신 이기도 하다.

 

또한 일상에 매몰된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로 인한 지성적 암울함도 연륜과 함께 밝은 광휘를 행해 진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기주의와 조급함으로 자신을 조여 오는 좁디좁은 일상의 도식도 드디어는 언젠가 트이고 열려 넉넉하고 화평한 인생의 내적 조건들이 성숙할 것으로 생각한다. 삶이란 그렇게 난관과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결국은 소망과 희망을 점진적으로 성취해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의심 없이 그렇게 받아들일 때 우리들의 현세는 가망 있는 것으로 위대한 질적 전환을 이루게 된다. 밝은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행공의 요체는 그와 같은 강한 생명적이고 창조적인 관점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어떤 삶도 귀중한 것이고 어떤 동작도 유의미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다만 의미와 가치를 진정 음미하려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공에서 생은 역사적 이상을 실현해가는 과정이라는 역사주의적 관점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역시 다시 말하면 기일원논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도 좋은가 하는 심각한 궁극의 질문에 지금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봉착하고 있는 것도 또한 물질문명과 과학정신이 이룩한 <세련된 근대문명>이 가진 절실한 현상황적 엄중 사실이다.

 

정치권력과 각종 문화 권력의 생성이라든가 파워엘리트의 발호 등등 사회문화체제가 대중에게 가하는 다중의 억압구조의 견고화현상은 우주의 원기로서의 기일원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현대문명이 본의 아니게 본원 지성의 세계에 가하는 일종의 횡포한 테러와 같은 것이다. 행공은 그 반생명적 환경에 적극 대응하려는 정당하고 숭고한 행동양식이다.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배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데에 이의를 달수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무한한 다종의 현상을 대상으로 한 무제한의 분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양적 팽창은 당연한 일이기도하다. 지식의 양적 발전은 광속에 가까운 경이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으며 기술과 과학의 새발견의 영역은 거의 무한대로 넓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문명의 발전과 균형을 이룰 정도의 적절한 삶의 확신이나 지성적 명도(質的明度)를 창출하지 못한 채로 사람의 구상과 그들의 손으로 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 십 년 후에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참담한 말이 나오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인간의 끝없는 지적 자신감과 자존의 식 및 작위(作爲)의 증대는 우리들이 속해있는 이 현상 세계에서 진정 영원한 깊고 중대한 의미를 인위적 영역에서 확보할 수 있는 것인가를 반추해볼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궁극의 의미에서 혹은 본질적인 뜻에서 과연 사람이 그런 조작적 작위를 삶의 중심 공간에서 계속할 수 있으며 그래도 좋은가를 우리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또 그러한 진전이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생명을 더 잘 보존하고 그 삶을 진정 윤택하고 안락하고 보다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대다수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수많은 대안적(代案的) 사고와 노력이 있어왔지만 그에 대한 답도 결국은 이 기 일원론의 체험으로부터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권위와 기술과 지식과 조직과 같은 현대적 성취들이 <조건화>라고 하는 중요한 가능을 구현하고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조작과 기술과 지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적극적 긍정적으로 발견하고 조화롭게 겸손하게 운용할 수 있는 균형회복의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행공이란 "하나의 잘 고안되고 설계된 행동적 공력양식의 반복적 수행을 통해 추구하는 체험위주의 수행이다"라고 할 수 있다. 행공도 하나의 조작적 행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넘어서서 자연적 기의 실체와 활력을 직접 대하여 체험하고 보존 유지하려는 것이 그 이상이므로 일반의 조작적 행위들과는 의도에 있어 크게 다르다. 말하자면 인위 자체에 대한 성찰과 실험을 통해서 인위와 자연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것이며 양자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오늘의 문화적 상황에서 몸 공부로서의 행공이 주목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우리의 현재의 의미 있는 노력들의 움직임 속에서 전통기론(傳統氣論)의 무한한 가능성은 아직 그 응분의 가치에 비해 매우 소홀히 또 부적절하게 다루어진다거나 나아가서는 막연한 것으로 또는 허황한 것으로 취급되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유학(儒學)에서는 인문(人文)과 천문(天文)을 구획하여 구분한 일이 없었으므로 그러한 이상(理想)은 본래 유학이 지향하는 본질적 목표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여하튼 예를 들어 사람의 수명은 획기적으로 길어지고 있고 인구는 늘고 있으며 생활은
어느 때 보다 풍부해지고 있다. 수많은 수도자들의 고행이 있고 지식인들의 학문적 업적과 과학 기술의 성과가 이루어지고 있는 한 그 성과들이 분명 효용성이 있고 유의미하고 귀중한 것이라는 믿음에는 흔들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인간 공동체가 위기를 느끼는 강도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유에 대해 절실히 우리들 몸으로 그리고 직접 반추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 현 시대의 명제인 제3의 길이라든가 제3의 물결이란 뜻하지 않게 행공과 같은 직관과 직각의 차원에서 구체적 실효적으로 개척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확고하고 경험 가능한 텍스트의 형태로 전환되고 구현되는 실질한 성과에 의해서만 그리고 삶과 문화체제 사이의 상호융통성과 교환성의 증대를 이룩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의 결과는 끊임없이 텍스트로 요약 결행되고 다시 반성돼야할 것이다.

 

제3절 조화와 균형 회복의 요구
많은 부조화 현상을 경험하면서 자연히 제일 먼저 감성과 지성, 정신과 물질, 의지와 정서 등등의 대극적인 생명영위(生命營衛) 요소간의 불균형이 지적될 수 있고 학문과 예술 일상(日常)과 이상(理想) 등의 삶의 양식체제(樣式體制) 사이의 부조화가 아울러 생각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장 중시해왔던 조화 중용(調和中庸)의 정신을 잃은 데에 결정적 원인이 있지 않은가를 당연히 생각하게 된다.

 

그와 같은 상대적인 여러 정신과 가치를 포함하는 문명의 빛과 그림자의 사이에서 또한 실질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기초적 방향타 구실을 해야 할 우리의 배움과 학문이 혹 균형을 잃었거나 형식화하고 있으며, 경험적 세계의 삶의 중심에서 멀어져 한 추상적이고 모호한 의미 영역으로 한정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혹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개인차원의 이성과 감성 혹은 의지와 정서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의 균형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대개 모든 사고와 학문과 삶은 정서적(情緖的)인 형태로 최종 귀결되는데 이는 환언하면 기(氣)로 승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기(氣)는 사람이 체감 가능한 형태로 다양하게 전환되어 나타날 수 있고 또 그러므로 경험되고 느껴지고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대개의 삶이 그 정서적 기화작용(氣化作用)에서 순조롭거나 원활하지 못한 것이 결국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입장에서든 이 같은 중대한 근본 문제에 대한 의문과 해답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사변적이거나 신비주의 일변도의 해결방향을 찾아 나아가기가 쉬운 것이므로 상시 체험하고 재현이 가능한 항상적(恒常的)이고 실체적인 경험적 확고성에 바탕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의 필자는 개인적 체험 속에서 오늘의 학문과 지성 혹은 감성의 체계를 직관적으로 음미해볼 수 있는 중요한 한 분야가 기공수행의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용기를 내게 된 이유이다.
그것은 기공의 수행과정 자체가 그와 같은 문제들과 직 간접적으로 밀접히 관련되고 있다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도통(道通)을 추구하는 명상객(冥想客)은 전연 아니며 철저한 경험주의자이다. 그러나 경험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길 혹은 그 경험의 종류나 유별 자체는 어떤 이유에서도 제한될 수 없다고 믿기에 자유로운 생각을 그대로 적어보기로 하였다. 물론 이 글은 자연히 나의 기년간의 유학 경전공부로 얻은 새로운 생각들의 일부 성과를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제4절 18로 나한공의 재발견 - 일반적 가치성
이 책은 소림사 18나한공이라는 범욱동(范旭東) 선생의 행공서(行功書)에 대한 평론적인 소개서이지만 단순한 소개가 목표가 아니며 원저에 들어있는 귀중한 역사 문화적 요소를 일반 생활사적 명상의 친근함으로 반추하고 재해석해보려는 글을 정리한 것이다.

 

그 기초적 발상과 논점은 유불선 삼교의 합일이라는 오랜 전통적인 묵계가 그 안에 상당한 문제성이 있을 수 있다는 반성적 사실에서부터 출발하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약술하면 삼교합일의 이상은 정당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보편 일반론으로서의 유교사상의 기본 주제이기도하다. 다만 그 목표와 이상을 추구함에 있어 삼교를 아울러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삼교 가운데 어느 한 학적 사상적 종교적 자리에 확고히 서서만이 그 문법과 어법으로 깊이 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막연한 삼교절충이나 삼교합일을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상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학문은 엄밀한 개념 구축과 정의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언어의 선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보편사상으로서의 유교적 사유법에 근거하여 학문을 대하듯이 이 나한공을 재해석해보려고 하는 것은 그 같은 믿음을 모색하는 수단이며 이유이기도 하다.

 

논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원문의 저술가가 어떤 학문적 종교적 견지에 자리하고 있었든 그 위치를 불문하고 내용의 여러 부분에서 놀라운 학문적 수행의 진성함을 보았다. 그 속에 조용히 깃든 삶의 여적(餘滴)으로서 그가 도(道)를 추구하는 낙도(樂道) 생을 영위하였다는 개인사적(個人史的) 혹은 역사적이기도 한 성과들을 진절한 체감으로 재발견하였다. 그는 꼭 새로운 우주론과 인생론을 필요로 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소림공의 전승인은 아마도 학문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종교적 입장보다는 일반의 그저 자유로운 인격의 수행자의 입장에서 행공의 법어를 서술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유교경전의 언어는 물론 생활언어 그리고 불교 언어와 도가적 논리가 아울러 구사되고 있고 그가 3교의 밀과를 탐닉해 즐기며 수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우리 문화권에서 오래 가져 왔던 이상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오직 나의 몸속에 이미 도가 충만히 채워져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맹자의 학도이다. 그러나 또한 그 도를 자연스럽게 운용하고 사용하고 자유롭게 해석 표현하고자 하는 즐거운 모습과 자신에 찬 모습을 보았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 라든가 "진정으로 학문과 도를 즐길 수 없다면 군자가 아니다"라는 생활명제를 실천적성과로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18문로의 각 제목과 <노서(路序)>로 표현된 문장 속에는 천년을 전승하여 그에게 전달된 소중한 의미들이 깊은 의취의 절실함을 놀랍도록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 글들에 넘치는 균형된 감각과 깊은 통찰력 그리고 진성스런 보편정신의 관철을 통해서 바로 그곳 소림사(少林寺)를 중심한 그 지적 외연까지의 소림문화권(少林文化圈)이 단순한 불교도량이 아니며 동서문화교류의 일대 안목으로 개안한 문명정신의 일대 성장의 요람임을 알았다. 그 내용은 깊고 넓고 누천년 연면의 빛의 맥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문명권의 다민족적 성과를 직솔하게 고루 반영하고 역사 시초로부터 근세에 이르는 모든 지적 성과를 집약하였으며 이를 구체적인 개개인의 삶으로 투영하여 빚어낸 문명권적 지성의 성과임을 알았다.

 

하남(河南)에서 대성된 성리학문화권(性理學文化圈)과 그 지성적 외연과 더불어 전통 도가의 이념을 여기에 수용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간 중요하고도 절실한 그리하여 도저히 빼어놓을 수 없는 삶의 기록임을 알았다. 우리는 이성적인 철학의 최고봉인 성리학도 유불도(儒佛道)의 융통을 통하여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이념적 상호 변별성에도 불구하고 심성적 상호 교류의 위대함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하여 서로의 영역을 넓히고 고양하는데 크게 공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행공의 단순 명쾌한 상징적 혹은 설명적 서술 속에서 세속적 희망과 높은 이상의 합일이 시도되었고 소화하기에 따라서는 거의 전 영역에서 오늘의 삶의 지침이 될 만한 주옥같은 경구와 구체적 수행의 언어들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물론 성리학이 유학의 본질을 완전히 회복하거나 그 사유법을 다한 것은 아니다. 또 유학이 어느 종교와 대극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 정신의 통합의 이상 자체는 귀중한 생각이다.
소림 행공은 하나의 무공 수련 양식이지만 그 수련의 철학과 이념 그리고 방식 속엔 극히 보편적인 가치관과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고 학문과 지성의 일반성을 견지하는 등 균형조화의 본질성 굳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당당히 학문론(學問論) 혹은 학습론(學習論)으로서 받아들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반의 학인(學人)들이 탐구와 수행의 일환으로 읽고 참고해도 좋을 것이라고 확신하여 몇 자 적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유교(儒敎) 학자들이 오랜 동안 적극적으로는 관심두지 않았던 이 분야를 새로이 회복하여 적극적인 학문적 경험대상으로 삼아 인간의 일반 행동영역으로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각 전문분야의 지성인들에게도 일반의 선남선녀 생활인들에게도 역시 유용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흔히 유학이 도가나 불교를 배척한 것으로 날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상은 아니다."불교와 도교의 해가 이단학설보다 크다"라든가 "불교의 해는 더 크다"고 했던 것은 도교와 불교 더 나아가서는 이단의 학문이 전연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느 한 문파가 세상을 덮으려 하는 바로 불균형이 문제로 지적된 것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유학이 균형을 생명으로 하기 때문에 유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데도 이를 동일시하려는 오류를 단적으로 지적한 것일 뿐이다. 물론 좁은 의견의 유학자들이 그런 의미를 다소 극적으로 왜곡하여 광포한 오류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제5절 퇴계(退溪)의 도인법의 의의
끝으로 이글과 연관해 생각보다 중요한 사실로서 퇴계 선생이 남긴 활인심(活人心)이란 도인술(導引術)을 보면 퇴계의 그와 같은 열린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도 퇴계 선생은 선구적인 한 분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활인심방은 명(明) 나라 때 도가사상가 주권(朱權)의 저작이었다. 그의 저작은 마음의 평안을 위주로 몇 가지 도인술을 게재한 것이었다. 오늘날 6자결공(六字訣功)으로 알려진 것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유행되는 6자결공의 내용
(1)허(噓xu ,sh -쉬)-
(2)가(呵he ,a ,a ,a ,a ,o ,ke ho,-허)
(3)호(呼hu -후)
(4)희( hsiie-쉬에)
(5)취(吹chu -츄이)
(6)희( x -시)

 

퇴계선생이 소개한 6자결호흡법
'휴(噓)'-(肝若噓時目爭精).-간
'사( )'(肺知氣手雙擎). -폐
'훠(呵)-(心呵頂上連叉手). -심
'취(吹)'-(腎吹抱取膝頭平).-신
'호(呼)'-(脾/憑呼時須撮口).-비
'희( )'-(三焦客熱臥喜寧) -삼초

 

위에서 이들이 서로 유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이 건강을 유지하고 정신을 맑게 하려고 애썼던 것은 그의 학문 수행의 과정상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행공이나 양생술등 도가적 수행 공부에 대해서도 수용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학 사상 자체가 보편적 학문으로서 새로이 주목되어야하는 현재의 우리 사상사적 과제에 대해서도 간접적인 참고가 될 것이다. 실제 조선시대의 대유(大儒)들도 대개 그 같은 폭넓은 학문수행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아울러 유의할만하다.

 

대개 몸을 수련하는 일은 어느 배움의 영역에서도 공통되는 것이다. 유교의 독서 불교의 좌선과 예불이 이미 몸을 제외한 배움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배움도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배움은 일반의 모든 삶의 행위들과도 분리될 수 없다. 바로 그러한 일반 행위를 통한 수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학이나 행공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배움의 영역에 따라 행공이 가지는 의미는 본질상 다소 독특한 차이가 있다.

 

사원의 불교적 수도자들에게는 행공이란 그들이 초월하고자 하는 세속의 생활을 재현하고 극복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세속적 행위를 재현하면서 가지게 되는 심의는 그들이 처음 수도를 시작할 때의 심경과 동일한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행공은 배움의 대상을 확인하고 제시해주는 의미적 측면을 아울러 가지게 된다.

 

일반인들에게는 행공은 일상의 삶에서의 실용적 효용을 위하여 주로 행해지게 될 것이다. 무술의 연마라든가 건강의 회복을 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배움이라는 긴장된 삶의 양식은 그들에게는 부차적인 것이나 역시 부분적 개인적으로 배움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유교적 삶에의 행공은 위와 같은 일반인적인 지향성을 지니면서도 그들의 배움인 학습(學習)의 연장선상에서 수행하게 될 것이다. 유자들의 학습에서는 불자들이 경우와는 반대로 세속의 삶을 견지하고자하고 그 세속의 행위들을 귀중히 여기고 담담히 음미하고 동작과 행동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탐구적이고 삶을 있는 순수한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자락적(自樂)인 행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안빈낙도(安貧樂道)로서의 행공이 가능하다는 중대한 의미를 보유하고 있다. 유자들은 이를 <학습>이라고 불렀으므로 유자들의 공부는 <학습행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6절 현대 유자이고자 하는 자의 감상
유학의 의미를 오늘에 반추하며 살고자하는 현대의 유자의 한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해석학적 시도를 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우연적이고 또 필연적이기도 한 계기가 있었다. 그 계기들 가운데 자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유학사상이 그 존립과 발전이라는 심각한 문제와 연관해서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활로의 개척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그 문제란 내부적으로는 유학 스스로의 내면적 논리의 정체성을 깊이 천착하고 있지 못한 학문적 문제가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교한 과학적 발견기술과 초정밀 가공기술에 의해 뒷받침되는 대중화사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정보통신시대의 문명 속에서 유학은 그 본래의 귀중한 특장을 거의 매몰당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 그것이다.

 

유학의 논리와 특장은 분명 재발견되어야하는 것인데 오랜 유학 왜곡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허다한 편견들이 유학의 실체를 호도하거나 억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 현재의 학문 사상적 일반 상황하에서 유학은 그 가치를 의심받고 있고 분명하고 확고한 힘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그 진정한 힘을 한꺼번에 다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힘을 발견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유학의 사유기법을 직접 사용하려는 새로운 노력을 적극 시도해서만이 그 정체성과 진실이 드러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유학은 우리 문명권에서 수 천 년의 장구한 기간을 통하여 각 시대의 중심사상으로 군림해오면서 반대로 각 시대의 역사적 모순과 한계의 영향을 받아 불가피하게 그 광대한 사상적 영지를 상실해야하였다. 우주 간에 유학의 범위를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인데 역사의 진전은 각 시대의 각각의 필요에 의해 그 군림사상을 제도적으로 또는 일종의 시대정신에 의해 일정하게 제도적으로 정념적으로 재단하고 제한 규정함으로써 그 가치영역을 자의적으로 축소해 왔었다.

 

지금 현재는 현대의 합리적 지성에 의해서 똑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 여기에 한포기의 민들레가 있다고 할 때 그 꽃을 기술 집약 제품인 펜티엄 컴퓨터와 의미상 전연 구별을 두지 않고 사유할 수 있는 사상체계는 사실 유학 밖에 없다: 는 점을 단적으로 지적해두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유학을 단순한 휴머니즘이나 조화사상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유학을 해치는 일임을 알게 된다. 유학은 개체의 병립이나 조화를 넘어 완전한 경험적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조건 없는 사랑"이 지향하는 진정한 심의(心義) 바로 그런 차원이다, 그이상의 보편 정신의 수립은 거의 불가능하다. 유학에서의 중용 조화란 그 같은 경험적 사고와 수행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목표는 큰 데 있지 않고 더 미세한 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이 글을 통해서 유학이 극히 보편적인 그리고 구체적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 학문 체계임을 조금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각각의 학문과 예술 종교 등의 문화적 가치와 의의 해석에 있어 유학은 어떠한 설명의 체계보다도 뛰어난 논리와 사고의 새 길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단 구체 행공의 의미 부여나 실제 자세와 모양에서는 18로 나한공의 그대로를 유교적 수행자가 꼭 그대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유교적 수행으로서의 행공은 여기의 나한공 보다 한층 더 생활 친화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나한공에서 일상성을 더 가미할 수 있다면 유교적 수행으로서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시습(時習)을 강조하는 유교에서는 일반의 행공보다 더욱 현실구현적 일반적 의미가 있는 행공자세를 요구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부자청례(父子請禮)>와 같은 행공의식(意識)은 유교적 수행의미로서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그 동작의 해석이 예(禮)의 의미를 구현하는 보다 명확한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유교에서의 행공은 항시 익힘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할 것이다. 학적 본질성을 긴장되게 견지하려는 필요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유교적 <학습행공>의 양식을 생각했던 것을 말미에 첨부하여 두었다.

 

제7절 자신의 정체성 인식
<<논어>>에 '자화(自畵)'라는 말이 나온다.
염구( 求)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저의 힘(능력)이 부족합니다" 하였다.
공자는 말하기를 "(능력보다는) 힘씀(노력)이 부족한 자가 배움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법이다. 지금 너는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금을 긋고 있구나" 라고 하였다.

 

공자의 제자 염구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같이 스스로 금을 그어 가지고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는 바로 인생에 있어 자기인식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이라 해서 금을 긋지 말고 지키려는 중심선도 없는 분방한 자의적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기인식의 폐쇄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람은 이미 그 힘에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가 정해진 힘을 다시 제한하여 더욱 좁히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자기인식의 폐쇄성은 결국 자기의 힘을 가두는 일이다. 공자의 말씀대로 오직 '힘쓸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위의 공자의 말씀을 연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힘(능력을) 씀이 부족함을 반성하라"
공자의 힘씀은 중단되는 순간이 없었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예를 들어 그가
"잠잘 때는 시신(尸:옆으로) 같이 눕지 말라"
"취침 중에는 말하지 말라"
"식사 중에는 말하지 말라"
고 한데서 보면 하루 내내 그 수행노력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시동같이 눕지 말라는 것은 마치 누워서하는 행공과 유사한 이유에서이다. 말하지 말라는 것은 호흡을 중시한 때문이다. 시동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전신을 긴장하지 말하는 뜻이며 웅크리거나 굽히지 말하는 뜻이다. 몸의 기혈의 순환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지 말하는 것은 기도(氣道)를 유지하라는 의학적 우려를 표현한 것이다. 공자도 양생술이나 기공적 행공에 가까운 의식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수행적 모습을 표현한 글 구는 적지 않다.

 

<술이(述而)> - 공자는 사사롭게 한가히 생활하실 때는 신신요요(申申夭夭:긴장한도 없고 나태함도 없는 자세로 화락한 모습)하였다.
<술이> -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하였고 위엄이었으면서도 맹폭하지 않았으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였다.(溫而  威而不猛 恭而安)
<향당(鄕黨)> - 빨리 걸을 때는 날개편듯(翼如)하였다. 옷자락을 잡고 당(堂)에 오를 때는 몸을 굽히는 듯이 하고(鞠躬如) 숨은 막아 숨쉬지 않는 것 같이 하였고(屛氣似不息者) 그의 자리에 돌아와서는 발을 피하듯이(  )하였다.
<향당> - 군주가 소환하여 손님 접대를 시키면 얼굴색을 상기하고 발은 피하는 듯이 하였다.(足 如)
<향당> - 공실(公室)의 문에 들어갈 때는 몸을 굽히는 듯이하고 문 가운데 서지 않았으며 다닐 때 문지방을 밟지 않았다.
<향당> - 홀(笏)을 잡을 때는 몸을 굽히는 듯이 하였고 이길 수 없는 듯이 하였으며 홀을 위로 올릴 때는 읍(揖)하는 듯이 하고 내릴 때는 물건을 주는 듯이(授)하였고 얼굴은 상기하였으며 발걸음은 종종걸음(  如有循)으로 하였다.
<위령공(衛靈公)> - 자장(子張)이 행실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말이 충신하고(忠信)하고 행동이 독경(篤敬)함은 오랑캐나라에 가서도 행해야할 것이다.

 

서 있을 때는 그 정신(精神)이 눈앞에 동참(同參)하여 있어야 하고 수레에 있을 때는 그 정신이 멍에(衡)에 의지해 있어야 한다.
위의 예문을 보면 그의 모든 행실이 자신의 정신을 절제 있게 표현하려는 동작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절제와 정신의 표현이야말로 행공 수행의 근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색과 호흡을 가다듬고 행동 속에 의지와 의미를 포용하고 부여하려는 쉬임 없는 그 노력은 그의 가장 전통적인 학습(學習)적 삶의 모습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공자의 행실은 보편적 가치성이 있으므로 사람은 노력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능력과 자질을 높이려는 것도 그 노력에 포함되겠으나 이미 가진 자질을 충분히 쓰려는 노력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도통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주어진 능력을 유감없이 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인류학에서 인간은 수백만 년간 진화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한 세대에 그 진화의 경험을 직접 해볼 수는 없다. 세대적 분절을 살아가야만 하는 인류에게는 그 능력을 진화하려는 노력보다는 제대로 쓰려는 노력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또 사람의 삶은 그 원질성(Our Life the Originality)과 문명성(Our Life The Civilization or Culture)이라는 양면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삶은 이 두 요소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힘의 조화를 통해 무한한 활력과 창조력을 발양한다고 믿는다. 그 조화와 균형은 철두철미할수록 좋을 것이며 그 균형을 유지하는 힘은 촌시도 중단되지 않을 수 있다면 더 덮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이상은 쉽게 성취하기 어려우므로 현재로서는 대개의 경우 개인적으로 처한 입장에 의하여 그 어느 한쪽에 서서 그 상대 요소를 부단히 수용-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느 한쪽 요소에 국한하거나 편파 될 때 그 삶은 가식적으로 변하거나 야성적(野성적)인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것이 또한 중용(中庸)정신이 가진 중대한 의미측면일 것이다.
행공은 그와 같은 자기의 정체성을 아는 데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동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가장 광범한 그 실천의 분야일 것이다. 행공은 내적으로 자신의 기를 체험하고 의식적으로 학-습(學而習之)하려는 노력이지만 이는 동시에 높은 정신가치와 의지를 표현하려는 동작으로 승화되어야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기론신단서설 氣論新端緖說
만물(萬物)과 같이 인간의 존재도, 또 존재를 생각하는 마음도, 존재의 한 성과인 문물(文物)까지도 기(氣)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짧지 않은 내 인생의 여정의 뒷자락에서서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것이 우주적 존재적 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통일된 그 무슨 존재의 당당한 일부라는 생각이 많은 자긍심을 주었다. 나의 온갖 오류와 부끄러움마저 그 밖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심지어 나를 구원해주는 메시아 그것이었다. 삶의 궁극의 의미를 확신할 수 없다면 아마 나는 혹은 그 누구든 죽은 목숨일 것이다.

 

그럼에도 기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철학과 논리학의 영역으로 밀어두고 잠시 불문에 붙여두어도 우리의 경험적 삶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 보일 것이다. 그 궁극 의식은 잠시 잠시 우리들 생명의 축제를 위해서 혹은 일상의 절실한 욕구를 위해서 우리의 일상 의식 속에 크고 작은 깊이로 수시로 참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 지성의 삶에서 그 기의 가장 명징한 표현으로서 생사(生死)의 순환이라는 면모를 삶의 의례와 양식으로서 수용한 이외에는 대개 일상의 표면에서는 그 문제의식이 잠복해 있어 실생활로부터 거의 유리되어 있는 듯이 보일 뿐이다. 나는 돌아가신 외조모님 영전에 <생사론>이라는 글을 바쳐 편안한 사후세계를 기원해드린 적이 있었다. 유난히 이승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여기 서술하는 기론에 준하는 것이었고 이래의 인문은 그 초고이다.
維歲次庚辰三月癸巳朔二十二日甲寅外孫德朝敢昭告于顯外祖 孺人密陽朴氏伏以春秋實無常奄流人生許多年卒當不得侍奉之大故已往已所以不得盡誠者大不肖身何口敢進其何語歟其不似千萬自責乎然再拜而望惠顧小孫之意矣慘惶之中忽一念新生死論則幸勿回而試容則樂無上矣旣爲人子爲人之孫化生斯世已五十年雖每有百千辛苦而心常可悅而樂者無他追慕祖先之思念一而已耳這間敢得竝立天下間亦以無限垂賜之愛念之懷之所以莫大無垠昊天之恩永爲刻得乎裔孫魂裏矣賢傳聖訓曰有始有終者若如是則或亦是爲一道而然與這間生涯亦有多樣悅樂辛酸喜怒好惡不一其情而恒被厥恩但以才思其愛仁者便常常萬難溶雪消矣禦吾落惡則是厥情也禦吾入蕩是厥愛也禦吾失氣亦厥仁也吾生無依其恩則渺身何可立于今乎哉身形音德旣隱迹不可復侍然靈物人間之親情仁愛者生死何間之哉甚至病床乙支賜下之命敎其所以地厚之懷寧可忘乎其憐憫之至惠胡頃勿思乎嗚呼與親去而受孫在餘然存在者果何爲之哉自問自問問而問矣然伏惟道理世上應有一理不可有二也生及死果是二事則寔無能爲道矣又死之生之果爲一物者則生亦及死不得爲異矣前後左右何以論之亦是死生果無二致可知矣然則其爲一而常存在而永之遠之者又果何乎愚敢曰神也矣孟子曰誠責而信進則光而大而聖而爲神矣神者實有之名光者實有之形通者實有之運矣實有則光而在前通而爲用何可以實有敢而爲之無存乎仁愛之實充溢乎玆切可得以知矣已嘗超越死生自明矣故宜曰可謂生死無貳也者果是然者信矣哉何有一毫疑乎今始知其理何由一於無極哀乎憐與生死非二物親念無二致而越越超超通通無之彼此間者果是人生矣果是世上果是宇宙矣胸中流動心谷嚴然在矣當身嘗無隱迹事矣今同在斯世矣乎次元雖異然吾有通達藝則何有乎哉六藝之中無不通達者禮樂射御書數則以通運心身達道窮理修身爲義者矣哀亦在其中悅亦在其中何必超去焉乎哉今玆嚴然覺得疏之乎實在而未相互爲懸隔矣春秋一見無常實未嘗不相與矣其所現存者必期消滅其所虛無者必回生其所謂無者實虛名有無相通者而已矣此雖淺言惟祝庶幾以惠信而安之矣敢以微誠謹告虔告

 

우리의 생애는 매 순간 혹은 세대간에 상호 분절적으로 전개되지만 중절됨이 없이 시공을 통관하는 궁극의 명제들에 대한 사유가 대개 사소한 일을 결정하고 수행함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우리의 살아감과 함께 실은 잠시도 현실과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항시 우리는 죽음과 함께 하고 있다는 엄연한 실상을 가운데에 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가같이 죽음이란 그러나 기의 허무한 소멸은 아니라는 인식을 상시 다시 떠올리고 견지하는 일이 필요하다. 단지 기의 존재와 그 변환의 영역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많은 새로운 의미들을 삶 속에서 건져 올리게 된다.

 

이는 실제로는 우주론이며 실재론을 구성하는 기초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 같은 자아에 대한 쇄신이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 사유나 이념과 사상이 반드시 정답으로서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단지 궁극적으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양식이며 자유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새로움과 자유로움이 그 최대의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잠시도 생의 욕구를 추동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고 살고자 하는 생의 의욕을 고동하는 다양한 <생명충동>의 모습은 항시 우리들을 고무하고 있다. 사랑과 애정 그리고 그 표현과 행위가 사람에게 주는 환희가 그것이고 일상의 기호와 취미 안락한 생활환경 이늑한 분위기나 좋은 경치 정다운 가족과 이웃과 친구 혹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성취가 주는 여러 기쁨과 보람도 그것이다. 또는 어떤 중대한 보람을 줄 수 있는 과제의식 사명감 인간적 도리 등도 그런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항시 실감하며 살지 않는 이는 없고 그러한 감각들은 필연적으로 인생론적 정의를 수반하기마련이다. 이를 유학에서는 명(明)이라고 불러왔다. 사실 실제로 자신들이 전인적(全人的)으로 파악한 일종의 우주론의 대지를 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론은 본질상 인생에서 불변의 기초 의식이며 동시에 지상과제인 셈이다. 엄밀히 말하여 그 과제에 대응하는 각자의 태도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기에 대한 생각이란 사실은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일상에 친근한 어떤 것이지만 엄연한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적이고 실천적이며 근원적 사유는 이미 우리들 삶의 기저(基底)를 이루고 또 실질적으로 결단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삶 속에서 하나의 중대한 내기(內氣)를 형성하여 의미 있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있다. 기(氣)의 체감과 기의 발출과 기에 대한 사유나 논의는 또한 사람이 하나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일대통로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지금 현재 진정 무엇인가"하고 물었을 때 이는 결국 기로서 현상화 된 생명현상에 대한 보편적 물음이며 비록 명확한 논리적인 답을 즉시 내지 못할지라도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하나의 심의(心意)나 정의(定義)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이해나 정의상의 갱신과 상호 융통이나 접근은 개별 인격간의 가장 큰 화합 혹은 결합 일치의 길이 된다. 예컨데 "유한한 인생인데 서로 너무 지나치지 말자"라든가 하는 등 일상에서 흔히 듣게 되는 인생론적 통속 생활철학은 그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와 같은 일반학인(一般學人)의 정서와 견지에서 현실의 삶에서 만나는 제반 복잡현상을 직접 경험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모색을 시작한다거나 혹은 작심을 하고 논하려 할 때일지라도 먼저 직접 자신의 심신을 통해 체험적으로 직각하고 있는 확고한 개별체험에 의한 기론(氣論)을 시도하는 것이 그 기초적 모습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자기체험 중심의 기 의식은 불가결한 급선무이며 선결적 요소일 것이다. 그 개별체험을 확충한다면 고도한 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한 특질을 말하여 주자(朱子)는 "하늘 땅 사이에 기(氣)가 아닌 것은 없다"고하였다. 이 명제는 주지하듯이 후일 조선에서 품위 높고 격렬한 이기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발단이 되었었다. 사람은 누구든 기를 통해서 다시 말하여 경험적으로 감각 가능한 현상을 사유하는 생활을 통하여 세계를 그리고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일상을 초월하여 새롭게 정의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기론도 일종의 초월적 삶의 일상적 체제이다.

 

구체적 대소의 기론(氣論)은 학습적 태도나 전승상(傳承上)의 다양한 여러 형식이나 입장에 따라 많은 계통과 논법들이 있을 수 있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소중하여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체험기론(體驗氣論)을 중심으로 기에 대한 단도직입적이고 직접적인 새로운 이해를 추구할 경우에는 먼저 그 직관적 체감을 손상함이 없이 내외적으로 탐색하고 표현해내야 하므로 논리적 비약이 수반되더라도 과감한 직설법과 상징적 어법들을 총동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사고하고 결론을 내릴 수만 있다면 이미 완벽한 기론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때 당연히 확고한 감각적 융통성과 절실한 경험의 친근성이 그 대전제가 된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어법이란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자기화두이며 자기와의 대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미 <논어(論語)>에는 그와 같은 자기화두를 권면하는 언어로 가득차 있다. <논어>가 통달의 길을 직접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그럴 수도 없다. 논(論)은 조리 있는 생각을 의미하며 어(語)란 원래는 자신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사람은 남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수행에서 모든 텍스트는 결국 주옥언어를 위한 자기화두로서 이루어진다. 정확하게는 자신에게 질문되고 스스로 대답되는 것으로 이는 <자기개념>을 확보하기 위한 의미창출의 구체적 기술적 과정인 것이다.

 

어느 기론이든 논리적 설명이나 해석논설 내용 그 자체가 기현상(氣現象) 논의의 진정한 핵심은 아니며 기 체험 혹은 기현상 자체가 그 중심에 있다. 그러나 기의 실재(實在)를 보다 새롭게 파악하고 확보하고 나아가 이를 확충함에 있어 역시 일정정도의 논리적 언어적 모색이나 표현은 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즉 기를 사유(思惟)함에 있어서는 그 언어적 표현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기에 관한 텍스트가 우리들에게 기를 자유롭게 다루고 가치를 보존하고 발견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유용한 장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그 유용성 무시하지 못한다. 기(氣)의 직각(直覺)을 위해서도 몸 공부만으로는 결국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생활어로써일지라도 진지한 그리고 상당정도 엄숙한 본격적인 기론이 어떤 형태로든 또 누구에게나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대 주술이란 것도 사실은 자기화두적인 상징적 텍스트 기론일 것이다.

 

일반의 실용위주의 삶의 표면에서는 기의 감각은 우선 다소 특수한 것이다. 극히 미세하고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중용>>에서 언급하듯이 < 그 미세한 것들이 명징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탐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 대개의 학습적 탐구 혹은 일반적 수양의 과정에서는 어떤 현상의 개별적 특수성과 일반적 보편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모든 발론의 대원칙이다.

 

구체 체험을 중심한 특수성의 논의는 결국 논리 텍스트로 구성되어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일치된 의미로 귀결될 때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경험자체를 구체적인 사유나 학문과 체험으로 전환하여 그 논설을 갱신하고 새로운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반적 학습-수양론으로서 언어적으로 정의하고 창조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면 그 기론은 결국은 불안정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위의 통속철학에서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한 경우 세속에서 생활문제를 풀어가는 데에 의외로 유력한 명제인데 이 역시 그 안에서 논리적 이해와 의미의 재구성이라는 기초적 과정을 거쳐 언어적으로 수립되었고 넓은 일반성과 융통성을 확보함으로써 상당한 의미적 힘과 실용성을 확보하였다고 생각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순수현상체험을 튼튼히 중심으로 삼고 여기에 직각과 논리를 병행하는 해석태도를 자유롭게 견지할 경우 그 체험기론은 설명적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기론 해석의 중심공간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새로운 해석의 방향과 여지를 얼마든지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즉 특히 행공적 체험기론은 경험적이지만 극히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기해석(氣解釋)을 자신이 엄연히 유지하고 있는 <자기인체와 그 동작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해석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므로 보다 확고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일상적으로 자신과 대화하듯이 스스로 기를 다루고 논의할 수 있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행공에 공부가 필요한 단적인 이유이다.

 

그 해석은 일상적일 수도 있고 미학적일 수 있고 문학적일 수 있으며 실용적일 수 있고 의학적일 수 있으며 자연과학적일 수 있고 문화적일 수도 있다. 곧 시일 수 있고 평론일 수 있으며 논설일 수 있고 일기일 수도 있으며 단순한 독백일 수도 있다. 세상만사 만물 중에 기가 아닌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어 가지 논의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

 

(1) 기의 현상이나 통일적 본질성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하여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경험적으로 확인재현 가능한 자신의 기 체험을 바탕으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

 

(2) 자신 스스로 지닌 이 기를 인정하고 유지하고 관리하고 응용하는 노력이 제일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동적으로 체감되는 것들에 대한 자기 인식이 일어나는데. 그 때 실험적 모색과 시도를 포함한 극히 개척적인 방면으로 그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점

 

(3)그 체험을 동시적으로 스스로 적극적으로 전향적으로 해석하려는 일관된 욕구가 항상적으로 필요하다는 점
(4)어떤 해석의 방향이 설정되었을 경우는 그 해석이 가져올 제반의 이해상의 혹은 태도상의 쇄신이나 변경의 가능성 등 해석 이후 사태에 대한 가치배려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는 기적인 사유는 생활로서 즐겨야 하는 것임을 말한다.

 

기(氣)란 우리가 살아있다는 가장 분명한 근거 내지 증거들을 말한다. 그리고 나아가 동시에 우리가 사멸할 수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믿음의 바탕을 제공한다. 현재의 정적이면서 동적인 생명상태나 존재 자체를 지속하려는 일반 관성으로서 불후의 초역사적인 존재이며 역동하는 힘이다. 관점을 전환하는 능력만 가진다면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이를 중대한 가치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고정된 사유나 가치의식은 바로 우리의 희망과도 다르고 존재의 진상과도 다른 죽음과 사멸의 시그널인 것이다. <생노병사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왜 영원하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은 <생노병사는 과연 부당한 현상인가> 하고 물음으로서 간단히 의미 차원을 전환하게 된다. 우리의 사유는 단지 그렇게 차원이동만을 행하더라도 새로운 영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경험세계에 드러난 생명의 장에서 기는 가장 생동하는 그리고 모든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기적인 그 무엇이라고 믿는다. 하나의 반응체제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기는 예를 들면 소망이나 의욕 의지 같은 어떤 성향의 결집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의 세계에서는 행복이라든가 평화 풍요 등과 같은 일정 형식으로 규정되거나 정의 한정 될 수 있는 개별적 삶의 진보란 그 부분적인 여사(餘事)일 뿐이다. 개별 욕구에서는 포괄적이고 선택적 갱신적인 충만한 순수 의욕 자체가 중심 본질이라는 생각이다. 발전과 진보라는 인간의 성과지향성을 총괄하고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결국 우리들의 기란 특별한 세속적 조건에 구애됨이 없고 스스로 정당하고 영원하고 유일한 궁극의 존재적 실체이며 자유로운 무한 가능성과 연관된 일반적인 세계의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다. 즉 기는 상호 변별적이라기보다는 상호 친화적인 영속하는 힘의 그 어떤 총체일 것이다.

 

또한 탈생명의 장에서는 기는 고요한 것 같지만 오히려 생명의 장에서보다 그 작용력은 더 강하다. 우리는 생명 없는 돌덩이를 죽음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스스로 하나의 존재의 기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돌이 존재적 형식 특성을 벗어나면 기의 원래로 돌아간다. 존재 형식은 오히려 기를 가두고 제한하는 그 무엇일 수 있다. 기의 본원은 존재와 역동 가운데 역동에 가깝고 현상화 된 기는 존재 형식에 가깝다. 존재의 허울이 기를 제한하는 한 현상일 것이다. 그 제한성이 기 논의의 또 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존재는 스스로 기의 역동을 절제함으로서 존재 상호간의 격렬한 충돌을 자제할 수 있게 되고 그 자제된 기의 결합은 점점 원본의 기와 유사한 속성을 지니게 된다. 존재란 기의 절제된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 절제성은 기의 원질작용을 강화해줄 것이다. 생명체라든가 혹은 그 중심으로서 인간은 그와 같이 존재형식과 역동을 아울러 유지하고 관리하는 주체일 뿐이다.

 

사람은 대체로 늙어가면서 그 늙음을 슬퍼한다. 아름다운 육체와 힘과 용기가 감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이 20대 중반을 넘어서면 늙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늙어감은 슬퍼할 일은 아니다. 늙음이란 자신의 기가 벌이는 하나의 축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형식에 가두어졌던 기가 자유를 회복하는 일대 운동이기 때문이다. 슬픈 것은 오직 나라고 하는 허울이며 기 자체인 나는 스스로 슬플 일은 전연 없는 것이다. 내가 여기 서서 저 쪽을 향하여 부메랑을 던지면 나에게 돌아온다. 창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면 일정 정점에 도달한 후 나에게 떨어져 돌아온다. 탄생과 죽음은 그와 완전히 동일한 현상일 뿐이다. 그 포물선적 변화의 공간 속에 나는 언제나 있는 것이다. 나의 육체 자체도 그러하다. 나의 육체의 외선이 허물어지는 것은 나의 자아가 나의 중심을 향해 항해하고 있는 노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육체는 나의 자아 그 기의 궤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론에서 생사문제의 긴장과 함께 불가결한 또 하나의 전제가 있게 된다. 기가 당연히 전혀 순정신적인 것이거나 물질일변도의 존재가 아니라는 막연한 믿음을 더 치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세계의 궁극의 바탕에 있는 우리의 정신과 동질적인 그 무엇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물질과 정신의 그 어느 한 쪽에 서서 도리어 양자 사이의 배타성과 변별성을 해소하려는 작업인 것이다. 성리학에서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는 생각이 나타난 까닭이다. 무극이 태극이라는 말은 결국 전체 현상계가 기작용의 소장(消長)이라고 보는 태도일 것이다. 물질과 현상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단지 기의 다른 상태일 뿐일 것이다. 기일원론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물론 정신 자체가 미립자와 같은 물질계의 기본적 존재요소라고 보아도 양자를 구분할 수는 없다. 그 경우에는 작용과 변화의 문제는 별도로 논해야만 하므로 별다른 해석상의 새로운 공헌은 거의 없는 것이다. 특히 현재의 사고 관습상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이해하려하는 물질문명 일변도의 현실적 이해추세 아래서는 아직은 그 통합된 논의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 객관적 합리적 과학적 측면으로는 그 실증적인 면이 제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부분적 개별적 현상의 이해에 보다 치우치게 되므로 일반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의 이해와는 상당한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수학적 공식으로 생명을 설명할 수 있다고는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와 감각으로 이루어진 체감적 확신이 필요하다. 기를 산채로 그대로 다루려는 경이로운 시도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선현들의 이해에서 기(氣)는 정신성을 위주로 한 그 통합적 본질성을 부정한 적은 없었다. 결국 단적으로 오직 우리들의 생각 속에 일어나고 있는 정신성의 탐구가 육체와 완전히 합치된 균형을 이루면서 중요한 핵심 주제로서 병행견지 되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졸(師卒)이라는 개념으로 기와 의지를 논하고 의지와 의리 이념을 강조했던 맹자의 '호연지기론(浩然之氣)'이 바로 그 이상적 기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인(仁)에 살고 의(義)"를 걸어간다는 그의 말은 기공 해석의 튼튼한 기초일 것이다. 또한 그는 <<시경>>의 구절 "하늘이 만물을 낳았으니 만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를 인용하여 "사람은 어질고 물은 흐른다"는 너무나도 자연스런 현상을 스스로 진리의 해석언어로 구축하였으므로 우리는 그의 양능(良能說) 성선설(性善說) 심정설(心正說)에 입각한 기론에 편안히 안주하여 안전하게 기를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맹자의 사색의 성과를 밀고 나아가는 것이 안전한 기론의 출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맹자가 기가 의지를 움직이는 경우는 열에 한둘이요 의지가 기를 움직이는 경우는 열에 여덟 아홉이다 라고 한 것은 일반의 생활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며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의지와 기는 동등한 존재이다. "호연지기란 의를 집적하여 이루어진다"고 한 그 의(義)를 그 중심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 나는 모든 현상경험의 일반성을 확신하고 있다. 이는 나의 학구의 초반부에서부터 견지되었던 기초적인 생각이며 하나의 직관적 감각이기도하였다. 역사 사상 문헌들에 대한 약간의 검토를 진행해오면서는 그 생각은 갈수록 확고해졌다. 최근에는 논리와 문자와 모든 형상들 예컨데 문채일반(文彩一般)의 경험체 스스로가 모든 현재적 질체들과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곤 한다. 인간과 기의 상호작용력 아래서 창출된 제3의 현상이 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과 원기의 사이의 중간에 언어 문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물은 그 중개자이며 그 같은 사람과 기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념을 통해서 드디어는 확고한 이념에 이르게 된다. 이념이란 기 자체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며 기의 원형과 가장 가까이 근접한 존재일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경험적으로 구별되는 사물들과 변별할 수 없는 실체의 상정적(想定的) 세계가 만나는 접점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양대 세계가 구별될 필요가 없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확인하고 증거하며 실현해줄 대표적인 행동양식의 하나가 기공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 인간과 기와의 접점인식(接點認識) 가능성과 연관해서 자유로운 일반의 거동(擧動)의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구성하는 몸체와 힘과 정신작용이 운동의 매 순간에 함께 관여하고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곤 하였다. 사실 우리의 깨달음이란 전연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그 어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큰 깨달음이 기존의 정서와 생각을 초월하는 것일지라도 역시 있어왔던 기지(旣知)의 의식과 정념을 소스라치게 새로이 깨닫는 그런 것일 것이다. <대학(大學)>의 일신(日新)이란 바로 그 점을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모든 의식을 포함한 내면에서의 그와 같은 작은 나의 직접적 체험들이 극히 소중한 것임을 역시 믿는다. 그것이 기해석의 현실적 목표이며 공능이다. 철학적 논쟁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론은 삶의 어느 계층 어느 단계 어느 상황에서도 필요하며 전연 차별 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어떤 계통이나 종류의 진리 이해-체현 노력이나 방식도 인간에게 더없이 유용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이해의 노력과 결과가 보편적인 정신과 일반의 일상적 삶으로 환원될 수 없다면 결국은 아직은 무의미할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삶을 지탱하고 삶의 힘을 증진하는 건전한 것으로 작용할 수 없다면 역시 무용한 것일 것이다. 건강이나 기쁨 편안함이거나 신비로운 미감 활력이거나 판단의 명쾌함 그리고 비록 죽음일지라도 서슴없이 택할 수 있는 신념이거나 결의를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해석은 이미 그대로 극히 창조적인 자유를 지향하는 일상적 삶의 현상성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기의식(氣意識)은 일반 의식의 새로움을 이끄는 생명적 작용으로서 생활 일상과 분리됨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또 그것이 바로 진리와 도의 추구 모습일 것이므로 기는 그 주도자인 일반 마음으로서의 정신과도 유리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그와 같은 종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운동과 수련이 학문과 수양과 다를 수 없다. 공자가 말한 학습(學習)이란 바로 그런 점을 보편언어로 지칭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예로 한 떨기 야생화의 고운 자태 속에서 나와 동질적인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어야하고 폭우와 폭풍 속에 선 순간 우주와 자연의 힘을 느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반의 느낌과 감성의 내용이 기의 실체를 싣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그림으로 그려 간직하거나 사진을 찍어둘 수 있다. 기현상의 명징한 한 끝이기 때문이다. 그 향기나 기류를 느끼고 내 영혼 속에 두어둘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 감각과 의미를 통합하여 사유함으로써 그대로 자연이나 우주 인간과 기를 논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꽃이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면 그 물음의 절실한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해답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순수한 의문이 들었다면 우리는 그 꽃의 고운 빛을 논하거나 산야의 청명한 초원을 배경으로 피어난 경이를 말할 수 있다. 색의 아름다운 생명의 경이로운 힘 이런 것들이 그대로 자연론 우주론 혹은 인간론이나 생체론 혹은 기론의 주제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한숨 무료한 팔 벌림 바쁜 걸음걸이 말소리나 외침 일하는 사람들의 솜씨와 근력 이 모든 단순하면서 확고한 것들도 그와 같은 논의의 깊숙한 중심어가 될 수 있다. 행공은 그러한 기 탐구의 명징한 영역과 대상을 차별 없이 창조해내고 넓혀 나아가는 제한 없는 모든 행위일 수 있다.

 

즉 여러 개별적 체험으로서의 기가 현실의 생생한 삶 속에서 경험적으로 확고하게 드러나 약동하는 모습으로 힘차게 영위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중시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들은 주역의 64괘이거나 각각의 괘사 혹은 효사일 수 있다. <<시경>>의 시구일 수 있고 경전의 문장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여러 경험주체들 사이에 연결의 통로가 개척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로 공감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런 확고한 것들에 대한 신뢰를 내 마음의 중심에 통합하려는 것이 바로 집중(執中)일 것이다. 이 집중의 힘으로 모든 지성을 통합하는 것이 중용(中庸)일 것이다. 기론은 결국 중용을 구체 수행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삶의 매 순간에 우리는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좌절에 빠지곤 한다. 그런 순간에 만일 <아무 조건 없이 나의 심신을 자연적 일반 보편의 조건구조 속에 그냥 흐르도록 두어둘 수> 있다면 즉 내 존재의 일반성을 확신할 수 있다면 나는 그 한 순간의 갇힌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했다>는 경험을 나는 가끔 하게 된다. 여기 행공해석에서는 그와 같은 분명한 체험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행공자세를 평가해보려고 하였다. 이는 구체적 행공세의 분석과정에서 오로지 고안된 것이므로 자세한 내용은 실제의 각로 행공식 검토부분에서 세론하기로 한다.

 

첫째는 힘의 기공론이라 할 것으로 기와 육체 사이에 근육과 뼈의 지지력을 바탕으로 한 힘을 중개로 하여 그 형태적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상정을 분석의 기초로 삼았다. 즉 기는 힘으로 힘은 기로 상호 유전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기는 보편적인 존재로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는 차원은 제한이 없다고 보고 일반적 힘과 에너지의 형태로 상호 전환될 수 있는 것이므로 육체 내의 기와 힘의 상호작용을 인지할 수 있다. 힘은 가장 확고하게 기를 느낄 수 있는 통로라고 하는 너무도 당연한 생각을 특별히 주목하였다. 기의 차원 초월성을 인체 내에서 조건화하고 수용하여 주목하려는 것이다.

 

둘째는 기파동설(氣波動說)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으로 사람의 각 지체의 힘의 소장에 의해 혹은 보폭과 자세의 변화를 통해 즉 향상의 구조적 변화를 통해서 몸 내부의 기의 상태에 파동을 부여하고 그 외부적 파동에 적응하여 기는 갇힌 존재로서의 제한을 극복하고 활성화될 수 있는 힘을 회복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기에 주어진 파동은 기의 본질적 원질을 깨워 각성케 함으로써 그 본질을 반추하고 회복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행공(行功)이 바로 그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동작과 자세의 중요성과 실질기능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생각된 것이다.

 

셋째는 허령공간설(虛靈空間說)이다. 일반 보편 공간을 정신 물질의 통합적 일치적 존재로 본다. <<대학(大學)>>에서 사용하는 허령(虛靈)하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이(理)와 기(氣)가 합치된 상태를 말한다. 명덕(明德)을 설명한 말인데 밝다는 것은 심성적 깨달음이나 감각상의 존재적 확고함과 충실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인체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그 일원적 일반바탕인 허령 공간에서 나서 그 공간을 차지하고 그 공간을 영위하는 존재로서 그 자신의 생명의 계선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 그 개체의 존립에 필수적인 조건이지만 동시에 그 개별존재의 경계선의 좌우의 기가 투명한 본질성을 가져야만 융통된다고 보았다. 그 결과 모든 생체는 행동의 과정에서 그 경계선을 강화하는 생동과 계선의 의미를 열어 일반 공간과 융통하려는 두 가지 작용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통상 촌각도 쉼 없이 행하는 호흡은 바로 그 융통작용의 한 증거라고 생각하였고 호흡을 통하여도 외부공간과 나의 공간은 상호의 격막을 열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여는 동작의 단초는 정신적 긴장과 이완으로 조성되는 근육계의 긴장 이완작용으로 발출한다고 보았다. 즉 긴장과 이완의 사이의 틈(闖)으로 기가 상호 틈입(闖入)할 수 있는 작용의 여지가 열려 있다고 보았다. 물론 이는 완전한 공간융화는 아니지만 상호교섭의 의미차원에서 의식적으로 수행되는 합일의 노력이란 점에서 유의미한 본질을 보려고 하였다.

 

넷째 기의 공간적 정체성에 대한 해석이다. 기란 획정된 특정 공간이 일으키는 원질작용(理)인데 그 일반적 속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질적 균형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힘이다. 그 힘은 형성 구축된 공간적 형태에 의해 반발 혹은 충동되어 스스로 발출된다고 볼 경우 존재의 형식구조(形) 자체가 기 움직임의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형(形)은 균일하고 정돈된 정적 질서를 변환 핍박하는 기초적 압력을 가하는 회복기제의 발출의 장이다. 그 압력에 의해 일정의 형상공간은 파동으로 넘치게 된다. 이 때 정적이고 정형화된 구조나 형식은 그 내부의 기의 움직임을 일정한 질서와 규율을 가지게 한다. 자세가 기와 연관을 가지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경락의 흐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외형 형상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일 경우에는 그 움직임에 따라 2차적으로 그 기존의 형식 속의 내부의 기에 제3의 압력을 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이 그 인체를 움직이고 근육을 긴장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내부의 기는 더 활성화된 파동을 일으킬 것이며 새로운 안정의 길을 적극 모색하게 될 것이다. 이를 형체와 동작 공간사이의 긴장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육체와 동작을 일반 공간론으로 이해할 필요에서 생각되었다. 따라서 자세와 운동과 이완은 기적 변환에 작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초적 상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과 전통사상 특히 유학의 사유법과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두 방식이 널리는 전통사상 의 일부로 수용되어야하는 것이므로 모두 귀중한 것이라는 인식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실재에 접근하는 방식상 과학은 미시적이고 개별 구조적 분석을 위주로 모든 현상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추구해 나아간다고 볼 수 있고 유학은 통일적 전인적 감각으로 모든 경험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개별적 현상에 적용 대응하여 나아간다고 비교할 수 있다.

 

이 때 두 경우 모두 전체현상과 개별 현상간의 긴밀한 관계를 이해하려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므로 두 관점은 상호보완적이라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유학에서의 현상 통합적 이해는 상상을 불허하는 강력한 통합력과 놀라운 포용력을 중심사유력으로서 그 바탕에 유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물론 유학적 논리에 대한 방대한 분석 서술 공간이 필요하므로 약론에 그친다. 이들 모든 논의의 기초에는 <기 논의는 무차별한 개방적 자유성과 자율성을 허용한다>는 생각으로 관철되고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사고가 어느 것도 기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논의의 특수화>는 당연히 경계하여야한다는 생각이다.

본서는 바로 그 개별적 생활 체험 속에서 발견한 <18로나한공>의 일반적 가치를 소개하고 주로 일반 기론의 입장에서 평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작게는 하나의 독서평이나 일반 평설에 가까운 것이며 크게는 기의 인식과 연관한 역사적 문명적 의미를 초민족적 초문화적 관점에 서서 일상성을 중심으로 한 이해태도로 그 문명권적 동질성의 시공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원저의 의도나 가치나 권위를 왜곡하거나 훼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삶에서 오는 여러 제한을 돌파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루어졌으며 단지 문자적 학문의 체험을 넓히기 위한 필자의 학구적 노력의 일부를 담담히 서술한 것일 뿐이다. 다만 굳이 논설적 유별을 해야 한다면 학습기공(學習氣功) 내지 문명기론(文明氣論)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 해석과 분석에서 결례되는 표현이 있었다면 고개 숙여 양해를 구한다. 기공으로서의 보편성을 이해하고자하는 의식이 앞서고 준비와 사려의 미비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여기 기론상의 오류가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원저의 직솔 담백하고 진절한 의도를 잘못 해석한 필자의 책임이다. 원저자의 위위진전(威偉眞傳)의 경건한 성심(誠心)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다만 여기의 모든 글들은 오로지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보기 위한 해석적 모색임을 끝으로 밝혀둔다.

3.심의기론설 心意氣論說
예로부터 도(道)를 찾아 천하를 주유(周遊)하던 이들은 고요한 자신만의 동굴 속에서 깨우치어 그 도가 자기 안에 이미 자리해있음을 알았다. <<중용(中庸)>>에서 신독(愼獨)을 강조한 까닭이다. 혹은 절망과 피로가 극에 달하여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소망이 일어나는 그 속에 이미 도가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공자가 만년에 "돌아갈진저! 돌아갈진저! 내 고향의 젊은이들은 아직 은 뜻이 크고 고상(狂簡)하다!" 하면서 귀국하여 교육에 전념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또한 도는 사멸할 수 없는 불후한 그 무엇이라고 믿었던 것이고 그 도를 향한 정념과 의지가 열려 있는 곳이 도를 구현하는 희망의 소재처라고 보았던 것이다. 공자가 구이(九夷) 지방에 살고자 하였던 것도 이곳이 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이어 사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었기 때문이었다. 곧 광간(狂簡)한 이상과 신독(愼獨)의 실천은 그대로 도학적(道學的) 삶의 츨발이며 행공의 본질이기도 하다.

 

세상이 한없이 넓으나 자기가 갈 곳은 결국 자신의 마음 속 뿐이다. 이 곳이 바로 가장 강한 생명을 향한 절대적 확신이있고 그 소망이 응결되어 밀도 높은 결정체를 이루는 중심이다. 궁극적 관점에서는 나의 육신 질체가 궁극의 원기와 합일하려는 열망으로 넘치어 모든 격막을 무의미화하고 융통하려는 초월적 화해의 허령한 일대장(一大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기론적(氣論的) 논법으로 말하면 일반의 천심(天心) 자체인 원기(元氣)가 천부의 천품(天稟)으로 인간화한 혈기의 가운데서 승화되어 그 정제상태(淨濟狀態)가 발출하는 초월적 기화작용(氣化作用)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혈기적 요소와 일반원기의 이상적 요소라는 상반된 측면을 공유한다. 사람의 삶은 사실 이 두 요소를 조화하여 균형을 실현하는 거대한 힘(大氣) 시연의 우주적 기제이며 그 과정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허다한 사물이 지천으로 있으나 수많은 경계로 인해 나와 합치될 수 있는 것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오직 기를 싣고 유동하는 우리들 내부의 생명적 혈맥의 흐름만이 그 중심에 하나의 일대 수용력으로서의 허령함을 내포하고 모든 개체사이를 유동해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조건을 창출 모색하며 그 보편한 힘을 적극 구현하고 통일을 지향 이룩하면서 만고불변의 중심으로 사람과 사물의 근간(根幹)으로 용사(用事)하고 있을 뿐이다. 삶은 그 혈기(血氣)를 타고 결국 넓고 넓은 영원한 생명의 원 근원으로 돌아가는 힘의 유동의 그 외 길 이라는 말이다.

 

그 적극적인 합일과 일치를 위해서는 기의 탐구는 당연하고 유일한 대망이 된다. 다만 혈기(血氣)는 신성한 힘이지만 사람의 형상에 엄연히 제한되어 있어 그 계선(界線)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마음은 그런 혈기(血氣)의 영향을 받으므로 우리는 이를 정제(淨濟)하는 즉 그에 상응하려는 자기절제과정(自己節制過程)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문이며 수행이다. 행공은 바로 다름 아닌 그 보편을 지향하는 기초적 힘(基礎力)에 순응하여 나아가는 절대적(絶對的) 원기를 회복하려는 확고한 결단과 결행(決行)의 양식일 것이다.

 

기(氣)는 여러 모양의 형상지워짐으로 표출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지향한다. 모든 존재들과의 교류의지와 감성적 통신을 주도하며 그 상이한 실체들 사이의 합일의 이상을 도출한다. 혈맥에 실린 그 맥동하는 나의 고유한 기(氣)야말로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고 동시에 또 나를 영원으로 이어 전승해주는 유일한 형식이며 힘이요 기능이다. 오직 나의 더운 피 속에 내 마음 온갖 심의(心意)가 깃들고 거기서 모든 인애(仁愛)와 의리(義理)의 정념과 의지 그리고 미의식등의 일반이상이 피어나게 되는 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방성한 혈기(血氣)는 나의 존재를 기로 승화하는 그 대전제 그 실체이다. 힘찬 혈기가 없다면 나의 이상(理想)도 자각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혈기는 감각하고 운용하는 경우에만 의미를 더할 수 있다. 맹자가 혈기지용을 경계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건재함(健在)을 추구하는 행공은 그 또다시 그 대전제(大前提)가 된다. 혈기라할지라도 적극 감각하고 관리함으로써 힘과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용감한 의협(義俠) 전사(戰士)를 두고 맹자는 혈기지용(血氣之勇)이라고 하였다. 그 혈기의 힘이 심의화 하여 인의(仁義)의 꽃을 피울 수 있을 때 빛나는 것임을 말하려는 하나의 장본설(張本說)인 것이다. 사람과 동물이 똑같이 혈기의 존재인 것이나 그 마음의 작용으로 인한 생각과 처신의 구별로 인하여 의미와 이름이 달라졌다. 그 구별의 분수령은 혈기 자체보다는 그 혈기가 빚어내는 기의 투명함과 정대한 심의(心意)에 있다는 말이다. 정대하다는 것은 결국 순수하다는 것의 궁극의 이름이다. 그 속에 잡것이 없다는 말이다.

 

특별히 정대(正大)하다는 말이 필요한 것은 사람이 공(公)과 사(私)의 양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공(公)에서 태어나 사(私)의 공간을 차지한 존재이므로 그 사의 공간 속에서 공을 추구하는 것을 바르다고 하고(正) 그것은 광대한 우주의 본질과 통하기 때문에 크다(大)고 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사람을 향하고 사람은 우주를 향한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사람이 우주를 바라보는 마음을 정대(正大)하다고 하고 우주가 사람을 향하는 것을 공명(公明)하다고 한다. 정대한 것을 의(義)라고 하고 공명한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 우리가 인의를 행하는 것은 내안을 그대로 우주로 만드는 일이다. 맹자는 그래서 인(仁)을 "나의 가장 넒은 거처"라고 하였다. 의(義)는 진인(眞人)이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큰 길"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심의화(心意化)된 이후에야 진정 혈기(血氣)를 논할 수 있고 일반의 대소의 기를 논할 수 있다. 혈기론은 순수한 기론(氣論)으로 승화하고 기론(氣論)은 다시 궁극의 심의(心意)라는 중심 실체을 얻게 된다. 심의란 허령(虛靈)한 그 무엇이다. 텅 비어 있으나 진공(眞空)이 아니란 말이다. 허령하다는 것은 모든 내외(內外)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한 관계의 힘의 본질을 말한다. 어째서 존재의 차체보다 존재의 사이 그 공간이 더 중요한가. 그 공간의 고유하고 허령한 조화력이 이룩하는 고요함 가운데서 존재를 뛰어넘는 제3의 세계가 비롯되어 창출되기 때문이다. 허령 공간이란 모든 경험적 상태와 조건을 그 조건의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는 공간고유력량(空間固有力量)을 말한다. 허령공간이란 입자와 에너지가 더 이상 분별되지 않는 완전한 일치의 공간이다.

 

내 마음은 나의 모든 혈기의 그릇들 심장 폐 대·소장 신장 간장 팔다리 머리 등의 존재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그 의념(意念)은 머리의 두뇌에서 모아지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바로 내 안의 존재 사이의 거리와 공간이 빚어내는 긴장된 상호관계와 모든 부딛음과 조화의 숨결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은 나의 존재개체 사이의 공간에 일어나는 모든 역동이 그려내는 파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삶은 결국 그 귀일운동(歸一運動)의 파장으로 통일되고 재편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기관은 역시 허령공간을 배경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나와 남이라든가 나의 존재와 모든 타의 존재들은 구별된다. 그러나 그 기의 원질화 작용인 사멸(死滅)의 궁극에서 본다면 모두 하나로 공간으로 돌아가는 같은 물질이다. 생과 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모든 나와 타자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바로 나와 타자들이 그 거리와 공간을 타고 조율해내는 또 하나의 거대한 마음을 연주해내는 중심 영역의 크기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거리와 공간은 진정 위대한 영원한 가능성의 여지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으로 친근하지 않고 상호 고립되어 먼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상을 담은 가능성의 보고일 것이다. 우리들이 모든 소원함(疎遠)함과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모든 적막함과 외로움 쓸쓸함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원래 공허의 주인이며 공허함은 그 진정한 삶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통로적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의식적으로 고독하지 않은 존재는 짐승 중에도 없을 것이다. 사물마저도 식물도 고독하지 않은가? 소월이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한 것은 꽃의 고독이 나의 고독이라는 통일된 정감의 표현이었다. 그 고독함이 진정한 융회의 기초일 것이다.

 

그러므로 기(氣)는 고독한 나의 혈기에서 발출하나 그 혈기를 초월하여 모든 공간과 융통하는 절대의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 기는 어떤 상대적인 크기가 의미를 스스로 가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와 존재의 사이를 유통하고 중개하는 새로운 정의(定義)의 힘으로 빚어내는 전연 새로운 그리고 항상 갱신되는 영생체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기(氣)란 단지 결정적으로 새로움을 지향하는 존재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대학(大學)에서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기란 자연히 존재의 무거움을 초월하므로 가볍고 상쾌하고 밝다. 그런 기능을 명덕(明德)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모든 학습이 지향하는 유일한 목표이다.

 

내안의 기는 혈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혈기는 그 혈기가 유영할 공간을 절대전제로 하여 의미 있는 현상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혈기는 그 공간에 가두어져 있지 않으므로써 그 본질을 지키려한다. 어느 혈기인들 사실은 신성하지 않은 것은 없는 까닭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영원 궁극의 보편한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말이다. 맹자가 가장 높은 천작(天爵)이라고 불렀던 그 실체이다. 혈기야말로 궁극을 지향하는 구체적 힘이다. 힘은 또한 성(聖)스러운 것이다. 활 쏠 때의 힘이 성스럽다고 하였던 것은 기교(技巧)를 앞서 존재하는 가능성의 바탕이라는 의미에서였다. 그 기 작용의 원천은 따라서 존재 자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존재의 외부의 모든 허령공간의 가능성에서 마련된다. 나는 결국 원기공간(元氣空間)의 사용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같은 혈기의 본질성(本質性)을 추구하는 것을 절제(節制)라고 한다.

 

나 안에서 이미 나는 위대한 공간의 사용자이고 이 공간의 사용자적 위상을 외부로 의식적으로 수행하고 확산 표현하려는 것이 바로 기공(氣功)이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 자각적 공간유영술(空間遊泳術)로서의 기공(氣功)은 그러므로 내안의 기의 유영(遊泳)과 일치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내 내부 근육의 긴장과 이완은 가장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나의 내부의 공간의 유영의 느낌이다. 그 긴장과 이완의 감각적 공간작용은 호흡과 근력(筋力)의 사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공은 바로 그 호흡과 호흡의 사이 근력운동과 근력운동의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인식 기제인 감각적 공명감(共鳴感)에 그 뿌리를 두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기공이 일반적인 존재 사이의 공간작용으로 확충되기 위해서는 나아가 일대 보편화하여 승화되기 위해서는 나의 내부의 절실한 내부파동인 공간 감각이 극히 널리 파동해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 동작이 극히 자연스러워야하는 까닭이다. 자연스런 동작으로 그 힘의 파동이 무한 공간과 함께 울리기 위해서는 역시 나의 내부 사적(私的)인 조건을 완전히 공적(公的) 조건으로 전환하여 사적이며 유목적적인 영역을 비워 공허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내안비우기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에 있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비우기는 나의 내부를 모두 삭제한다는 의미는 전연 아니다. 나의 형상과 질체는 나의 존재의 절대적 전제조건이므로 그 조건 자체를 소멸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나의 형상과 질체 안에 기의 공로(公路)를 활짝 연다는 의미이며 내부의 조직과 규칙사이의 갈등을 억제한다는 의미이다. 그로 인해 열리는 조직 사이의 넓은 그 공로(公路)의 허령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의 세계에서는 기의 힘의 크기보다는 그 공간의 유지와 그 순정함이 더 유의미하다. 우주 공간의 어떤 강력한 힘의 덩어리일지라도 그 내부에 공간을 간직하지 못하는 힘들은 충돌하여 소멸될 뿐이다. 우주는 그런 충돌의 힘은 의미의 기호로서 수용하지 못한다. 사라져야하는 무의미한 힘으로 세상사와 우주역사에 순간으로 기록될 뿐이다. 기공은 내 안의 가능한 노선(路線)을 기의 공로로 개척하려는 움직임이다.

 

행공은 힘의 유동이므로 육체를 근거로 하여 그 동선은 다양할 수 있고 그 동속(動速)은 드높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초는 동선의 단순성과 상호 연결성 동작운행의 균질성의 정도에 따라 진정한 가공의 정체성이 가름된다. 그리고 동작과 동작 호흡과 근육 운동과 지체운동이 힘의 질과 크기와 형태의 양면에서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해야할 필요가 있다. 동작과 동작 사이의 형태와 힘과 스피드는 상호 완벽한 의미적 미학적 질적 균형성에 기초해야하고 그 바탕에는 그 중심체로서 의식과 정념의 강력한 동질성이 결부하여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조화와 균형과 동질성이 절제의 극으로서 허령함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생명존재의 공간은 바로 그런 중심화 작용이 성숙되어야하는 그런 곳이다. 물론 그곳은 이미 우주본질 자체이다. 동시에 우리들 몸 자체이기도 하며 마음 속이기도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 몸 속에 이미 여러 차원의 허령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몸의 내외 마음의 내외에 공간이 없다면 모든 움직임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공간을 좋아한다. 공간은 보호의 벽이기도 하고 안락의 터이기도 하고 일치의 접점이기도 하고 공유의 장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국 평화의 거소인 공간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사람이 마음과 정신을 중시하고 시간이나 역사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그 본질의 무한한 공간성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이 총집된 아름다운 지평선이 있는 무한지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존적 존재체 자체는 단순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내부의 눈으로 보면 그 실존 공간의 진정한 의미는 유한함 속에 무한한 공간의 여지를 넓히려는 의지로 충만한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공간 넓히기>를 수행하는 기제를 보유하기마련이다. 나의 외부의 일반의지로 보면 나의 질체는 일반공간의 무한한 가능성의 일회적 확인이다. 나의 공간의미 넓히기란 나의 내외기의 본질의 접점에서 성취되는 공간화 작용의 크기를 경신하는 경이로운 길이며 이는 행공의 당연한 이상이다.

 

한 알의 모래알은 작은 것이지만 그 내부는 이미 공간개척의 경이로운 업적으로 충만하다. 작아진 만큼의 새로움을 세우는 것이다. 모든 물질의 내부에 존재하는 바위의 풍화와 같은 미세입자로 향하는 끊임없는 축소화는 바로 내부 공간 넓히기를 위한 자기 비우기 작용의 일환이며 죽음과 소멸이란 그런 현상의 일부이다. 그 결과로서 세포 분자 원소의 3차원에서 무한한 내면개척의 내공간 확장이 수행 되어 나아간다. 그러므로 우주의 물질은 공간화작용의 힘에서 본다면 생명이 없는 것은 없다. 지극히 작은 것은 내부가 없다고 한다. 지극히 큰 것을 외부가 없다고 한다. 자신의 질체의 고집이 없는 것이 진정한 공간정신인 것이다. 결국 공간은 삶과 죽음을 통합하는 시공 균일의 조건이다. 모든 존재의 크기가 바로 공간의 크기임은 자명하다. 건축은 그 내면공간의 구현체이며 모든 운행과 행동은 외면공간의 확장의 전선이다. 기공은 내공간의 울림을 조성하고 외공간으로 통하여 확산하려는 움직임이다. 사람은 바로 행공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자각적으로 그 공간을 다룰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결국 어떤 물체가 자각적으로 공간지향성을 가질 때 그 존재는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 기공은 결국 공간지향의 가장 절실한 동작이어야 한다. 힘은 나의 내부 공간을 넓혀 나아가고 신체운동은 그 외부 공간을 넓혀 나아간다. 그리고 마음은 그 중심에서 무한히 넓어지는 내외 공간의 중심 한 가운데를 기쁨으로 지키며 의미의 새로움으로 충만히 채운다. 새로운 색 빛 형상 그리고 유동(流動)을 일어나게 한다. 그리고 그 공간 넓히기의 진정한 에너지를 무한히 공급한다.

 

4.일반청의미 一般淸意味
제1절 청야음(淸夜吟)

달은
하늘의
중심에 이르고
바람이
수면 위를
스치며 지나가는
이 순간

분별함
없고
오직 한
맑음으로 통일
되어버린 아스라한
무한 의미 속에

여기 언제나 함께 있음을
지금껏
느낄 줄 몰랐었구나
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

 

일반청의미란 소강절(邵康節) 선생의 도학시 구절이다. 고문진보에 소개된 그의 오언고시이다. 어느 여름밤이었을 그 순간 송학(宋學)의 선구자이며 본격적인 선구적 도학자(道學者)의 한사람이었던 소강절 선생은 역사와 시간성에 민감했던 그답게 새로운 자각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여름밤의 밝은 달 아래 스치는 시원한 맑은 바람처럼 그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스치고 지나가며 그의 지성의 눈을 단번에 투명한 유리처럼 비추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그 새로움으로 열려오는 의미의 세계를 맞으면서 그는 그가 읽고 공부했던 수많은 책들과 문헌 그리고 수많은 날들을 고뇌하였던 깊은 사려와 숙고의 과정을 넘어 자연 그대로의 의미를 온몸으로 직접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도달하고 싶은 경지인가? 그러나 그가 진성한 학구의 일념으로 매진한 오랜 수행의 노력이 이미 깊고 두텁게 쌓여있지 않았었다면 그가 그와 같은 새로운 지견(智見)에 도달하는 일은 불가능하였을 것 은 또한 스스로 자명한 일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가 새로운 지각의 세계을 보았고 그 핵심어는 <일반(一般)>과 <청의미(淸意味)>라는 두 마디였다고 확신한다. 일반이란 무엇인가. 만물과 오만가지 현상이 지니는 독특한 개성과 각자적 존재이유를 넘어서서 모든 물상을 통관하여 항존하는 진정하고 이유 없는 통일된 세계가 진정한 세계의 영위의 힘임을 말한다. 청의미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는 그 애련함과 의미적 제한 속에서도 그 궁극의 바탕과 본질에서는 결국은 아름답고 맑은 것임을 말한다. 맑음으로 통일된 여름밤의 청량함과 은은한 어둠 속에 아름답게 빛나는 달은 모두 적어도 의의에 있어 정감에 있어 그리고 미학적 가치에 있어 전연 동일한 같은 것임을 직감하여 알았음을 말한다. 나아가 그가 읽었을 8만자에 이르는 한자가 내포한 각각의 뜻들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그가 역시 크게 깨달았으리라고 나는 단언한다.

 

그것은 바로 맹자의 성선설이며 공자의 인의 경지이다. 그 지고한 텍스트를 스스로 경탄할 만큼 새로운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도학자로서 일획을 긋는 바로 그런 순간이 이처럼 고요한 자연의 완상(玩賞) 속에서 정말로 뜻하지 않게 그러나 우연하지 않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그 여름밤에 전율하는 소스라침으로 우주 자연의 공간의 목소리를 감지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학문이나 사려나 모든 수행은 그와 같은 본질성을 지닌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2절 일반논적 긴장의 필요
꼭 소강절 선생의 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모든 생의 여정의 매 순간에 일반 보편의 의미와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사실 매우 좁고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황이나 정서 인간관계 등의 여러 요인에 의해 바로 그 점을 잠시 잠시 혹은 매우 오랜 동안 망각하거나 밀쳐두고 산다. 그런 삶은 진정 행복한 삶이 아님을 느끼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차선에 차선을 무한이 거듭 거듭 하향적으로 선택하며 축소지향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를 오하(汚下)라고 한다. 인생이 그런 것이어서는 좀 아까운 것임이 분명하다. 이점을 지적하여 일반논적 긴장감이 필요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안연(顔淵)을 평하여 "3개월간 인을 어기지 않았다"고 한 것이 바로 일반논적 긴장의 힘의 크기를 말한 것이다. 맹자의 부동심(不動心)이라는 말도 다른 뜻이 아닐 것이다.

 

일반논적 긴장은 궁극의 진실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에게 지고한 힘을 주는 길이다. 그 긴장은 매일 매일 모든 순간에 견지하여도 더없이 좋고, 나쁠 일이 없는 편안한 긴장이다. 이점을 지적하여 맹자는 ""아무도 막지 않는데 행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우리의 기론(氣論)이나 행공론(行功論) 역시 그 일반의미적 긴장을 수행해야할 대표적 양식이라고 해야 할 것임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제3절 생활론-기(氣) 일반론
기(氣)란 특정한 대상어가 아니다. 자연 상태의 아지랑이나 구름 물의 흐름이나 나무의 자람 빛의 찬란함이나 색의 고아함 조약돌의 단단함과 흙의 부드럽고 친근함 등등 어느 것이든 존재하는 것은 기 아닌 것이 없다. 기는 모든 존재이며 도 그 모든 존재의 움직임이며 그 존재의 시작됨과 끝남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천지의 사이에는 오직 기(氣)만이 충만할 뿐이라고 하였다. 철학적 용어로 현상이며 인간적 용어로는 삶의 모습, 용기나 기운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자들은 사람의 기(氣)를 "몸에 가득한 그 무엇"이라고 정의하였다. 몸에 가득한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언어 몸짓 표정 체취 자세 표정 행동 어느 것이나 기 아닌 것이 없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각 물질에 가득한 것 그것이 기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에 가득한 것은 우주의 기이다. 맹자는 그 각각의 기의 정체는 같다고 하였다.

 

맹자(孟子)는 천지(天地)에도 마음이 있고 인간(人間)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천지 가운데 존재하는 일반적인 그 무엇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사람과 사물(事物)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 또한 전연 구별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의 천명설(天命說)이 민심(民心)과 천심(天心)의 일치를 근거로 한 까닭이다. 생성과 소멸이 우주의 일상사이듯이 생사는 인생의 일상사이다. "그 무의미한 듯한 순환의 과정은 정말 공연히 돌고 도는 것인가."하고 우리는 여기서 조용히 마치 나의 친지나 친구의 맘을 헤아려보듯이 우주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하늘에 뿌려진 눈에 시린 광채를 띤 성좌를 바라보며 저 빛나는 영채들이 할 일 없어서 둘러서 있다거나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감히 생각할 수 없다. 휴식시간에 시원하게 목뒤를 돌아 전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자락 바람이 장난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성좌의 운행과 우리 자연의 경이로운 변환을 허깨비라고는 더욱이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무슨 마음으로 유동하는가? 공맹은 그것은 바로 인(仁 )이며 다름 아닌 생명을 위한 축제라고 생각하였다. 사랑과 합일을 위한 공연이며 만남을 빛나게 하는 이별이라든가 생명을 가치롭게 하는 죽음이라든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명을 위한 교향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자들은 그림을 사랑하고 음악을 즐기며 모든 흐르는 것들을 승차하듯이 동참하여 탑승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우주와 자연의 마음은 오직 인애요 또 그로부터 비롯되는 잉태이며 생성이요 그 생명의 즐김이라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기(氣)의 세계에서는 물질과 공간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기질(氣質)의 질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란 무엇인가. 차지한 기의 크기를 말한다. 사물 스스로에게 있는 크기와 넓이 높이 깊이 굳은 정도와 부드러운 정도 등등의 물색(物色)의 차이를 말한다. 그 차이란 결국 기의 집적(集積)의 정도를 말한다. 그 집적의 정도를 논하는 것은 정녕 물리학적 논법과 동일할 수도 있다. 맹자는 이점을 일컬어 "충실(充實)한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맹자의 견해는 예를 들어 인격을 논할 경우 사람들이 행하고 싶은 것을 선(善)이라고 한다. 그 선함을 자신 속에 진실로 확고하게 가진 것을 신(信)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한 마음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소망이지만 그 선의(善意)와 선행(善行)은 때때로 가변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견지(堅持)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 선한 마음과 행실이 확고하게 소유 유지되는 상태를 신(信)이라고 한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충실(充實)해진 것을 미(美)라고 하였고 충실함이 극에 달하여 고밀도가 되면 빛(光)을 발한다고 보고 빛을 발할 정도로 집적된 인격을 대(大)라고 하였다. 대(大)의 경지를 달관하여 그 지극한 충실함을 자유자재로 운용하여 자연을 감화시키는 힘을 발휘하는 것을 성(聖)이라고 하였고 더 나아가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묘한 성과를 거두게 되는 것을 신(神)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사람의 인격을 선인(善人) 신인(信人) 미인(美人) 대인(大人) 성인(聖人) 신인(神人)의 6 품등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준 천부적 양심의 소유(所有) 견지(堅持)등의 그 집적도(集積度) - 즉 진실과 양심의 밀도에 따라 나눈 것이었다. 아마 이것이 인류사상 최초의 본격적 보편 일반적 기론이 될 것이다. 그 논리의 자유로움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것이다.

 

모든 존재는 나와 남의 대립으로 성립한다. 나를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보면 존재적 경계가 없다는 뜻에서 무외(無外)라고 한다. 바깥이 없다는 뜻이다. 남을 중심으로 나를 바라보면 무내(無內)라고 한다. 존재적 내부 즉 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유로운 존재적 전환의식이 학문이며 삶이며 또한 행공이다.

 

제4절 기일반론에 대한 상념
사람의 삶은 한 순간도 새로움을 따라 흐르지 않을 때가 없다. 인생은 자체가 갱신일 것이다. 그 본질과 바탕이 어떨지라도, 그 흐름의 새로움의 위에서 사람은, 태도(態度나 용자(容姿) 혹은 생활양식의 새로움이나 감각의 새로움 또는 기쁨이거나 앎의 새로움 등 모든 자기 경험의 새로움을 원하고 구축해 나아간다. 만일 그 흐름과 나의 삶에서의 새로움의 지향이 어긋날 때는 크나큰 혼란에 이르게 된다. 바로 그 새로움을 추구하는 태도는 "새로운 받아들임"으로 실현되므로 궁극적으로는 넓은 의미의 학(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낡은 틀을 기휘(忌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한 진상일 것이다.

 

학(學)은 다름아닌 득(得)인 것이다. 그 같은 가치의 새로움을 얻고 추구하는 모든 구체 행동을 덕(德)이라고 한다. <<대학(大學)>> 첫머리에서 명덕(明德)을 말한 까닭이다. 덕(德) 자의 좌변은 행한다는 뜻이며 우변의 윗 부분은 눈을 크게 뜬 모습으로 발견하려는 자세를 그 아래는 일심(一心) 즉 하나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행하며 관찰하고 느끼어 합치되려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인 해석에서 덕이란 "도(道)를 행하여 뿌듯한 것(行道有得)"이라고 하였던 것은 그 같은 공능을 말한 것이다. 새로움 혹은 학(學)으로서의 행공은 "궁극의 것을 얻음"을 의미하며 하나의 덕행(德行)이 되어야할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행공(行功)은 덕행(德行)이다"라는 명제가 필연적으로 성립하게 된다.

 

갑골문(甲骨文)의 유(儒) 자에서 우리는 몸에 물을 끼얹으며 수도(修道)하던 무자(巫者)의 모습을 생생히 보게 된다. 금문시대(金文時代)에 이르면 농경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B.C 8세기 이후 문헌시대(文獻時代)에 이르면 무릅을 꿇고 앉아 시초(蓍草) 풀줄기를 던지는 군자(君子)들의 주역점(周易占)을 본다. 이어서 경학(經學)의 시대가 발흥하였다. 이 경학이전의 시대를 우리는 유학(儒學)의 원시체제(元始體制)라고 부를 수 있다. 유학은 그 원시체제와 결별한 적이 없었다. 경(敬) 직내(直內) 등을 강조하는 이학(理學)의 근칙(謹飭)함은 그 끝의 계승모습일 것이다.

 

유학(儒學)의 시각에서는 사람의 전 생애 중에 배움이 아닌 것이 없다. 배움은 삶을 이끌어가는 모든 힘이다. 고로, 배움은 어느 순간에도 가능하고 또 수행해야만 한다. 그와 같은 배움의 삶을 본격 시작한 것은 고대의 동이군자(東夷君子)를 포함한 대륙의 현자(賢者)들이었으므로 동아시아 인류가 세계에서 가장 빨랐다고 할 수 있다. 그 남상은 원시문화를 벗어난 직후에 곧바로 시작되었다. 동물이 인간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구석기 시대 돌도끼에서 배움의 시작을 본다. 그들의 벽화와 암각화에서 그 배움이 이미 완숙하였음을 본다. 그러나 그 배움은 직관적이었고 대개 일종의 기능적 지식중심이었다고 생각된다.

 

배움은 역사적으로 생성 발전되어 왔다. 이미 신석기 시대의 도구와 기물을 만드는 재주와 기능과 예술적 창조의 발전상 등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새로운 지적 경지를 개척하고 있음을 본다. 그들이 남긴 추상적인 무늬와 사생적 그림을 통해 사물의 핵심을 파악하려는 과감한 의욕을 본다. 그들은 직관과 사려를 균형 있게 사용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진정한 지성의 삶을 시작하고 준비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의 중요성을 삶의 전면에서 주체적으로 구현할 수 없었고 그러한 삶 자체를 자각하는 정도는 다소 약하였다고 생각된다.

 

배움은 모든 자각이다. 소위 역사시대 즉 청동기 시대 이후에 들면 그들의 자각적 창조력의 크기가 비약적으로 굉대하여졌음은 알 수 있다. 신석기 말에 일어나 청동기시대의 사이에 발전하고 철기시대를 통해 비약한 새로운 자각적 학문의 삶이 새로이 혁신적 생활양식으로서 출범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아직 간직하고 있는 유교(儒敎) 경전(經典)이 그 대표적 증거이다. 공자는 그러한 가르침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현한 위대한 선교자(宣敎者)였다. 당시의 배움이란 삶의 전 국면에 걸치는 넓은 의미의 균형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때 이미 '배움문화권'은 중국과 한반도 북부를 포함하는 광범한 범위에서 주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문헌적 전승상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주(周)왕조에 이르는 기간의 일이었고 단군(檀君)에서 삼국(三國)의 형성에 이르는 동안의 일대(一大 ) 사변(事變)이었다. 홍범구주(洪範九疇)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은 그 양대(兩大)의 위대한 중심적 결과물이었다.

 

오늘날은 그 오랜 학적인 삶이 전통적 본질과 전인적(全人的) 균형을 잃고 있으므로 배움의 역사를 회고하는 일은 우리들 스스로에게 귀중하고 마땅하다. 그런 뜻에서 행공(行功)은 배움의 삶을 원초대로 그대로 회복 복원하여 몸으로 결행하는 의외로 가장 손쉬운 양식일 수 있으므로 그 새로운 가능성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나 행공이 일반의 삶이나 긴장된 학적인 삶에서 오직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시대에 그 왜곡된 면모를 교정하여 새로운 쇄신의 힘을 줄 수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한다.

인생은 항시 생명의 근원 중심인 우주의 한 가운데로 일치해 향하여 서고 싶다. 심신이 편안하고 싶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심은 다름 아닌 순수함이며 명결함 자체이다. 이는 실재(實在)하는 현실이며 이상이며 또한 꿈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삶은 이미 다름 아닌 중심에 서려(執中)는 공부(工夫) 행공(行功)일뿐이다.

 

우리에겐 스스로 중심을 지향하여 울리는 몸의 목소리가 있다. 나의 팔다리와 보폭이 던지는 사소한 모든 파동까지 실은 언제나 그 중심점에 닿는다. 모든 그 파랑(波浪)의 중심점은 다시 중심원(中心圓)을 향하여 누층적으로 원점회귀(原點回歸)하며 나의 닫힌 중심심(中心心)을 깨워 흔든다. 근고(勤苦)하는 생활인의 정신이 그 중심지향력으로 인해 질적으로 태안(泰安)한 이유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항시 공유하며 생명을 새롭고 평화롭게 하는 신비한 일반 자연의 실존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의식 무의식을 불문하고 이미 어떤 형태로든 그 같은 생명본질을 견지(堅持)하고 발양(發揚)하고 있는 것이며 그 내면은 중심지향(中心指向)의 환기(喚起)로 충만한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밀쳐두었을 뿐이다. 중용(中庸)의 도(道)가 바로 그것이고 <<서경(書經)>>에서 윤집궐중(允執厥中)을 말한 이유이다.

 

중심은 곧 하늘(天)이다.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직솔 순선한 마음이므로 중심은 어질다(仁)고 한다. 공자가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자는 어진 경우가 드믈다"고 한 그 뜻이다. 언제나 없는 곳 없는 때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중심에 사는 자가 적다는 것은 중심을 잊었다는 것일 뿐이다. 공자 말씀대로 중심 생각이 너무 지나치거나 부족한 것일 뿐이다. 중심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고 그렇게 있으므로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맹자의 말을 빌면 그런 천부의 공능을 양지양능(良知良能)이라고 한다. 바로 성선설(性善說)의 바탕이다.

 

중심은 유일한 존재이나 시공차원의 중심점은 헤아릴 수 없다. 중심의 드러남은 모든 생의 위상 마다 다른 것이므로 중심의 집점(執點)은 그 수가 별 보다도 많은 것이다. 모든 차원과 위상의 중심은 다 사람 속에 귀결된다. 그리고 나아가 모든 사물 가운데로도 수렴된다. 그러므로 중심은 크나큰 크기로 무한수(無限數)의 접점(接點)을 가진 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심은 또한 넉넉하다고 한다. 중심은 아집이나 고집 잡착과는 다른 자연스런 기제이므로 유학에서 여러 차원의 중심을 구현하는 권도(權道)를 중시한다.

 

개체와 중심과의 일관된 긴장 관계를 우리는 존재한다고 한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은 중심과 개체가 서로를 행동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중심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견지하는 것을 또한 중용이라고 한다. "중용(中庸)을 행하는 자가 적다"고 한 것은 왜냐하면 이를 보다 더 적극 자각하고자 수행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며 바로 "배우기를 좋아하는(好學) 자가 적다"는 공자의 그 말이다.

 

시각의 차원에서 중심은 북극성의 별빛이다. 공간의 차원에서는 중심은 점이며 둥글고 의지의 차원에서는 중심은 인(仁)이며 운동의 차원에서는 중심은 인력(愛)이다. 마음은 불인(不仁)의 힘으로 흔들이고 북극성(明)은 구름으로 막히며(蔽) 공간은 점의 이동으로 흔들린다(亂). 우리는 행공으로 몸으로 이 모든 모멘트를 흔들 수 있다. 흔듦을 위한 흔듦이 아니고 중심을 찾으려는 소통과 환기의 선의의 흔듦(德)이다.

 

일종의 조건화된 인위로서 실험적인 탐구와 동질적인 것이다. 맹자의 인격론에 의하면 중심을 찾아가는 마음을 선(善)이라고 한다. 그 마음을 진실로 행하는 것을 신(信)이라고 하고 그 행실이 쌓이는 것을 충실(充實)이라고 하고 그 모습을 미(美)라고 한다. 그 아름다움이 성장하여 빛나는 것을 대(大)라고 하고 위대한 경지에 올라 상상을 뛰어넘는 중심 융통의 힘을 갖추는 것을 성(聖)이라 하고 자연 조화의 경지로 신비롭게 승화된 것을 신(神)이라고 한다. 사람은 상시 신(神)의 한 가운데 있다. 사람이 신이 되고 신이 중심이 되는 논리적 성취의 바탕에는 그와 같은 수행의 과정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가 경이로운 생각으로 전율할 때가 있는데 이를 역으로 구현하자는 것이며 지성의 모태였던 신관과 무당의 동작에서 새로 배우자는 의미도 된다. 우리의 현 배움이 왜곡되었으므로 그 원래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이다.

 

우리는 어진 마음을 일시 놓쳐도 언제나 그 마음이 돌아옴을 안다. 기울어 선 자세로는 금방 피로해짐을 알게 되는 이치와 같다. 모든 왜곡된 판단은 결국은 그릇된 것임을 알게 된다. 내 행동거지의 지나침은 무리라는 것을 곧 안다. 모든 마음과 행동은 어질고 순리적인 곳으로 다시 반복해 돌아올 때마다 크게 쇄신된다. 행공(行功)은 심신의 새로움을 위한 선의의 작은 <시도적 탐색적 일탈>인 것이다. <<대학(大學)>>의 '신민(新民)'이란 바로 그런 적실한 실천적인 행동을 전제로 한 것이다.

 

행공이란 그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행동이다. 가장 진절한 역설어로는 이것을 건너서 보는 마음 서(恕)라고 한다. 그러므로 서심(恕心)이란 결국 자기(自己) 절제(節制)를 의미하는 것임을 안다. 행공이란 결국 적극적인 자기절제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제는 무한정한 것이어선 아니 되므로 그 말을 바꾸어 의(義)라고 한다. 행공은 결국 의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주옥어(珠玉語)들의 실질적 통일성이 바로 기공의 감각과 통하는 것임을 느낀다. 의란 단지 우리의 방자하고 방만함에 대한 절제의 의미로서 성립되었다.

 

우리가 바로 꼿꼿한 자세로 무엇인가를 견지하여 서서 "있을 때" 그 이상의 가치와 역동은 사실 없다. 여기에서 그 외에 특별한 어떤 목적이나 신기한 체험을 보이려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간단한 동작과 호흡에 대한 <의도적 적극적 절제(節制)>를 결행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근사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맹자가 "기로써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렵다. 의지가 기를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하였지만 굳은 의지를 잃고 사는 오늘은 반대의 경우가 가능하다. "기 수행으로써 마음을 움직여야만 하는" 역리적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 삶의 장에서 만나는 여러 차원의 힘에서 각자가 자유롭게 진절한 실체감을 느끼는 여유와 여운을 갖는 것으로부터 작지만 중요한 쇄신의 계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필자는 탐구적 수행자이지만 기공도사가 아니다. 일반 학인 혹은 생활인으로서 생각할 수 있었던 그 보편적 유용성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삶이란 사실은 단순히 이해하면 방기(放氣)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은 자신의 내기의 방사로 이루어진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기분의 발산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는 응축 혹은 축적하는 과정과 발출하는 과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맹자는 야기(夜氣)라고 하여 자연의 순환 가운데서 인간의 기가 회복되고 응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기를 발산하는 공로(公路) 즉 기발산의 양식을 의(義)라고 하였다. 물론 응축의 과정은 인(仁)이다. 결국 전통적 인의사상은 기의 축적과 발산에 관계되는 수행의 과정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맹자는 그 양대 과정에서 자연적인 소여성과 인위적인 작위성의 위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별도로 확언해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기의 바른 인식은 유학적 사유법으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마 그는 이 양대 과정의 작용자체를 절실하게 의식해 아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강조하려고 하였다고 믿어진다. 그가 <의를 모아 큰 용기를 이룬다>고 한데서보면 의식적 수행을 매우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의는 내면적인 것이다>라고 한데서 보면 자연적 소여성을 받아들인 개별 인격체가 이를 바탕으로 의식적으로 그 소여성을 견지하려는 의지를 중요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환언하면 자연적 소여성으로서 양심이란 하나의 이상을 모색하는 자기모색의 긴장된 유지를 요구하는 의미를 일차적으로 지닌다고 생각된다.
제2장 소림사 18문로나한공 전의

1 18로나한공의 연원 十八路羅漢功淵源
제1절 18로나한공 이황서합록(十八路羅功漢二黃序合錄)

황면홍서(黃綿洪序)에서 말하기를: "나한공(羅漢功)은 당랑파(螳螂波)에서 기력을 보강하기 위한 법식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었다. 선배이며 조사인 범욱동(范旭東) 선생은 체중이 300여 파운드였고 나이가 93세였던 때에 그 전술자인 나씨(羅氏;羅光玉) 또한 200파운드의 체중을 이루었으니 이 공이 사람들에게 막대한 유용함을 준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전체 공식( 功式)은 18로(路) 69세(勢)이다. 500여 가지의 일련의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처음 익힐 때는 점진적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전체 공식을 익히게 되면 각 로의 연습에 시간적인 필요에 따라 가감할 수 있다"고 하였다.
황한훈자서서(黃漢勛自序)에 말하기를: "나한공은 오랜 동안 전승되어오면서 아주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범공(范旭東)의 유저에서 '소림진전(少林眞傳)' 이라고 하였으므로 이 나한공이 소림사에서 시작된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소림(少林)의 무술이 우주에 널리 펼쳐졌다.'는 데서 그 전승이 광범하였음을 역시 알 수 있다."

 

한훈(漢勛)은 "여기의 우주란 전국(全國)을 지칭하는 것일 뿐이다. 당연히 전세계를 말한 것은 아니다." 라는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원래 범공이 전한 도본은 간략한 것이어서 각 로마다 몇 개의 그림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명사(明師)의 지도가 없이는 그 전체 공법(功法)과 호흡법을 이해하기 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한훈(漢勛)이 비록 불민(不敏)하나 당시 나선생께 전수 받은 안식(按式)을 제자 광거당( 鉅堂)의 연식(演式;漢勛의 校勘)으로 재정립하여 그 연습 자세를 바로잡는 데에 편리하게 하려고 고안 정리하였다. 실은 단지 그 착오를 줄이려는 의도에서였을 뿐이었다.
연전에 무술잡지(武術雜誌)에 기고하였던 글을 정리해 이번에 새로이 간행하면서 범공(范公)의 고본(古本)을 축쇄하여 본서의 말미에 첨부해 참고 되게 하고자 한다.
정유년(丁酉年) 중동(仲冬) 장무항회(精武巷會)에서
1957 황한훈(黃漢勛)

 

제2절 이황서 합록의 의미 검토(二黃序淵源說演義)

소림사 18나한공은 당랑문파의 일원인 범욱동(范旭東) 선생이 창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선 그의 소전인 나한공 원문을 통해서 보면 그는 도인(道人)의 경지에 있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어법과 문맥에 흐르는 감성은 아름다운 예술적 안목으로 승화된 세련미가 있으며 유불도 혹은 의학 경혈학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거나 사변적인 방향으로 지나치게 광간(狂簡)한 면모를 볼 수 없으며 반면에 너무 견개( 价)한 아집도 없다. 거의 자절사(子絶四) 균형적 자세를 배워 힘써 견지한 것으로 확신된다.

 

그가 인용하는 지식의 공간적 범위는 중국과 인도 동북아시아 북방의 동이세계의 일반 의취를 아울렀고 지성적 개념의 범주는 유교경전과 불경 사원의 삶과 일상의 삶을 통섭하고 신화와 전설과 문학 그리고 사기와 한서 명대의 교양서인 명심보감 같은 경구에도 관심이 미쳤다. 그는 천년 문명사의 성과를 고루 섭취한 행복한 지성인 이었으며 용무한 무도인이었고 문필에 능한 문인이었다. 그리고 생각컨데 특히 "동승(東昇)" 이라든가 "금오(金烏)" "옥토(玉 )" 등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빛의 고향(故鄕)인 동이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동이족에 대한 향수는 공·맹 이래의 오랜 것이기도 하다.

 

위의 이황서로 소개한 그들의 두 종류의 서문에서는 그러나 그와 같은 조사의 풍모를 전해주지 않고 있어 커다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 황서에서는 조사의 체중과 그 전승자인 나광옥(羅光玉) 선생의 장수와 체중을 소개하여 나한공이 유용한 건강술임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행공수련의 기본 법으로서 점진적 가감적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나아가 그이상의 이미와 깊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황한훈 자서에서는 나한공의 보편적 전승성을 지적하였고 원저를 인용하여 소림진전(少林眞傳)"임을 의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한공 원문에서보아 조사의 위치는 일반적 도인의 삶을 추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삶이 불교적 분위기와 양식의 것이었음은 일부 원문에 나타나고 있지만 유교적 학문어도 충만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소림진전"이란 그의 행공의 양식이 소림사의 행공식을 연구한 결과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컨데 사원의 행공식을 받아들여 일반적 도학적 견지에서 해석하고 발전시켜 이루어낸 것이 이 나한공이라고 믿는다.
이상의 판단으로 미루어 범공의 행공을 전승한 나광옥 선생과 광거당선생 그리고 황한훈 선생의 노력은 더없이 귀중한 것이다.

 

한편 모든 가치의 전승과정에서는 그 원의 그대로의 온전한 계승은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다. 유학의 각 문파와 그 제자들의 경우에서 미루어볼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도 공자학과 유학의 원상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고 있듯이 법공의 행공도 역시 새로 회복되어야할 부분이 있고 행공의 본질과 정체를 바르게 찾아야할 책무가 따르게 됨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법공의 행공의 본질과 정체가 더 연구되고 발전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미 황한훈 선생은 그와 같은 전승의 과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역시 알 수 있다. 이 <전의>도 그 같이 범공의 행공의 가치와 본질을 논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공과를 가지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전의>에서는 그 이상의 희망으로서 이 행공이 실천적이며 체험적인 경험주의에 입각한 일반 보편적인 학문의 한 중요한 부분으로 승화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약간의 일반화론을 아울러 개진하였음을 밝혀둔다. 실은 이것이 졸고 평역저의 최종적 이유이다.

 또한 최후에 행공의 응용적 방면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하여 별록으로 태권행공론과 64괘 행공론을 시도하고 이를 혹 연구에 참고할 수 있도록 첨부하였다.

 

2 십팔로나한공 전의 少林寺十八門路羅漢功傳義
제1로; 선인공수(仙人拱手) : 신선이 손을 내밀다.

<제1로> 제설 - 제설 통론을 겸하여 : 신선 세계 표상

<제1로>의 명칭을 「선인공수(仙人拱手)」라고 한 것은 주지하듯 책을 여는 개권초지(開卷初志)로서 행공의 실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함이다. 선인이란 도가(道家)의 이상적 인격으로 천지의 도를 온전히 구현한 영생불사의 존재를 지칭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인이라고 한 것은 오직 그 도가적 인격을 꼭 말한 것은 아니다. 심신이 활기를 얻어 강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이상과 소망을 표현한 말이다. 동시에 우리 문명권에서 장구한 동안 수행해온 명각(明覺)과 정신성을 탐구했던 유구한 전통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행공이 그 같은 하나의 철학적 수행이며 양생술이고 일반 학문이며 삶이었음을 표현하였다.

 

기공을 통해 일상의 생활을 <진절(眞切)히> 음미하고 그에 깊이와 창조성을 부여하고 고양 재편함으로써 완성도 높은 삶의 경지를 개척하는 경우를 지칭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그 때 설계적 행공 구상의 범위는 매일의 삶이 견지하고 있는 강인한 형식성과 인위성으로 인한 촉급제한적(促急制限的)인 일상성(日常性)을 해소하기에 족한 것이어야 하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우며 단순한 동작의 정도를 너무 멀리 넘어서는 즉 작위성이 지나치게 강한 것이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나아가 그 이상적 삶의 경지가 세속적인 목적이나 풍류에 있지 않다는 말을 표현하려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네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할 신비한 순수 생명현상을 체험할 수 있다는 즉 의외의 과감한 희망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공수(拱手)란 손을 높이 들어 사람에게 예를 표하여 인사하는 모습이다. 역시 세속의 세계에서와는 판이하게 다른 순정한 인격체를 상정하고 높은 경지의 삶을 실현한 그 선각자적 인격체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기공이란 비유컨데 그와 같은 초월적인 어떤 취향과 의지가 있어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물론 초월의 진정한 의미는 비현실을 말함이 아니고 현실의 의미를 시공을 통하여 차원 넓게 그리고 관습이나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인식하려는 의식의 표현이다. 동시에 당연히 손을 올렸다가 지면에 닿도록 내리는 동작으로 조성되는 긴장을 풀어주는 극히 실효적 기능을 아울러 의미하고 있다.
일상을 뛰어넘어 새로운 감각과 믿음으로 새 생명의 힘을 개척하고 유지하려는 것, 시공을 초월한 기의 세계를 의식하고 나를 그 세계에 합일시키는 것 즉 전연 새로운 인격의 체현을 갈망하는 몸짓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새로운 인격이란 현재의 나를 쇄신하여 도달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영원한 소망이라 할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로> 서
<생극치화(生剋治化)> : 온갖 생심(生心)들을 극복하고 정제된 치화(治化)를 실현한다. - 들숨 날숨을 이용하여 호흡을 안정되고 일정하게 하여 자신의 기를 스스로 핍박(逼迫)해 북돋우고, 정신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제1로>는 마음속의 사심을 비우고 장부(臟腑)를 충실하게 하며 기혈을 기르려는 것이다. 진액을 생성하고 장부를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안정된 자세로 한결같이 단전에 기를 채워 가득하게 하고 자신의 심장(心臟)과 비공(鼻孔)이 상응하게 상시 체감한다. 기를 발분(發憤)하되 마음에 보존하고 그 자연의 도를 따른다. 공부를 행하여 노력이 진전되고 기가 조야(粗野)해지도록 성장하면 장대한 힘을 얻을 수 있다. : 바로 기공이 지닌 근원 회복의 힘을 말한다. <치화>란 그 근본을 지향하는 긴장된 삶의 견지와 그 성과를 말하고 있다. 그 대전제로서 생심은 내성을 말하며 극은 극기복례의 이념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生剋治化
以呼吸定息 用 氣全神 是虛心實腹養氣血生津
實腹一使丹田氣滿 應心鼻孔 提氣存於心
聽其自然行功 積力旣粗則力壯

<제1로> 서의 음미 - 극기(克己)와 핍기( 氣) 그리고 예(禮)로서의 행공
제1로의 의의와 행공의 자세를 언급한 것인데. 행공의 첫 순서로서 먼저 강조된 것으로 여러 가지 마음의 자의적(恣意的) 발동(生心)을 극복하라는 점이 유의된다. 생심극복이란 마음의 혼란함을 가지런히 하여 얻게 되는 균형된 심의(心意)가 절대적으로 긴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그 구체적 과정으로서 들숨 날숨의 호흡 안정되도록 절제함으로서 기를 돋우고 정신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음미적 호흡을 통한 젤제일 것이다.

 

이 때 정식(定息:호흡안정)이란 호흡에서 안정성과 일정한 규율성을 견지함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전체 18로에 공통된 지침으로서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핍기( 氣)>라든가 <제기(提氣)>라는 개념은 자신의 동작과 호흡으로 야기되는 기에 대한 인위적 선의적(善意的) 절제와 압력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창조적 절제를 창출해내는 것이 기공임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기조(氣粗)>라는 표현은 야기(野氣)를 말한 것으로서 가공되지 않은 본연의 기를 의미한다. 조야(粗野)하다는 것은 질박(質朴) 박실(朴實) 혹은 소질(素質)과 통하는 말이며 문식(文飾)이나 사식(史飾)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용어이다.

 

지침과 같은 이 로서의 언급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지향했던 일반 학인(學人)의 자세와 다를 것이 없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를 이룬다고 하였을 때 극기란 자신의 사욕이나 사정을 말하고 그를 적절히 운용하여 선의적 절제를 적극 결행함으로써 천부(天賦)의 질서에 부합하는 예(禮)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복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것이 원래 사람의 양지양능으로서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핍기작용>이 내포한 <의외의 활력유도적(活力誘導的) 성분>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인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기능과 심성의 온전한 본질을 활성화하여 구현하는 것이 가장 큰 생명의 축복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주의해야할 것은 선천적인 고유한 양지양능을 회복하는 전제로서의 자기절제가 너무 지나쳐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사념과 사욕마저도 일정한 정도는 바로 그 양지양능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없애라(無)고 단언하지 않고 이겨내라(克)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에서는 절대적 단언보다는 스스로의 자각과 조절을 중시하여 수치(羞恥)를 알라는 가르침으로 그 단언을 대신하고 있다. 겸손이라는 개념이 단순한 도덕율을 넘어 여기에 천리적(天理的) 요소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로의 공용으로 제시된 것은 마음의 사심제거, 장부의 충실화, 기혈의 배양, 진액의 생성을 들 수 있다. 나아가 수행의 중점으로서 안정된 자세 단전에 기를 축적할 것, 심장과 비공의 상응을 지적해두었고 일어나는 기를 심장에 보존하여 지킨다고 하였다. 다만 이미 언급하였듯이 여기서 사심의 제거(虛心)라는 말은 극기(克己)의 문의에 비하여 약간의 불일치함이 있다. 그리고 기공의 효과를 너무 성급하게 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말일 수 있다. 우리가 삶을 포기할 수 없듯이 인생에 있어 애련(愛憐)함을 초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삶에서 묻어나는 오욕칠정과 공심(公心)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일이 보다 실질한 의미를 지닌다. 대전제가 되는 말과 그 아래의 구현언어는 일치해야할 것이므로 그 대전제언어를 중심으로 그 구현어들을 반추하여 적절하게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허심(虛心)이란 사심의 극제(克制) 결과를 표현한 말로 이해해야하겠다.
특히 <핍기( 氣:기를 북돋움)>란 표현이 <결정적>으로 다시 주목되는데 자신의 일상(日常)의 기(氣)에 대해서 그 쇄신을 목적으로 자극이나 파동을 가하여 적극적으로 그 활성을 유도하려는 것이 기공의 본질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쇄신된 기는 어찌되는가 하는 그 향후의 체험의 과제와 목표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결국은 행공은 <핍기>의 과정이며 그 <핍기작용>을 감지하고 유지하고 적극 관리하는 기술일 수 있다.

끝으로 유의사항으로서 자연의 도를 따를 것을 지적하였는데 전체 행공에 있어 무리를 범하는 오류를 경계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나친 동작이나 어떤 형태의 조급한 안배포치(按配布置)는 도(道)의 구현에 해롭기 때문이다. 기의 성장과 함께 장대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수련의 과정에서 힘으로 실감하며 체현해 나아가야할 행공의 체감적 지표를 언급한 것이므로 전체 행공시에도 항시 유념해 두어야할 대목이다.
전체적으로 <힘을 사용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힘의 성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중요한 기공적 표상 메시지로 들린다. 예를 들어 아래의 동작 설명에서 <쇠 솥을 들 듯이 하라>는 경우는 손과 팔에 힘을 가하라는 의미로 읽어야할 것이다. 동작의 자체에 적절한 힘을 게재하여 그 힘의 소장을 조절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말하자면 힘의 감각을 바탕으로 한 핍기의 과정을 위주로 하여 호흡과 균형을 이루면서 행공 동작을 수행해야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제1로> 통설해의- 통론을 겸하여
: 힘과 공간의 의미 그리고 그 찬연한 가능성의 탐구 여정
힘과 공간 : 이(理)가 근원적인 것이라면 기(氣)도 역시 근원적인 그 무엇이면서 동시 에 경험적인 모든 것이다. 이(理)리는 로고스이며 기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理)를 알기 위해서도 기(氣)를 탐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理)는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이전의 존재이므로 현실의 언어로 직접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사유의 세계에서 상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감각 가능한 경험적인 영역에 국한한다면 결국은 오직 기를 통해서 그 기의 넘어서의 존재를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자가 "삶도 모르고 죽음을 논할 수 없다고 한" 의미와 상통한다. 맹자의 "말하지 않아도 사지(四肢)가 밝게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기가 흙이 되고 흙이 돌이 되고 돌이 다이어먼드가 되듯이 이를 물질의 궁극의 근원으로 보고, 기를 그 집적(集積) 작용으로 본다면 - 맹자는 이미 이점을 인식하여 충실(充實)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고 인격의 완성이란 실재(信: 신의 우주적 근원 양심 實在)의 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개념을 구사하고 있다 - 기에 가까운 존재와 이에 가까운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경험의 강도나 조절 가능한 체감도의 크기에 따라서 어느 정도 궁극 근원의 이해방식으로서 근사치를 구하기 위한 차천적(次善的) 유별(類別)을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공기는 이에 가깝고 유동하는 힘은 기에 가깝다. 인체에서는 호흡되는 공기자체는 이에 가깝고 모든 생체로서의 그에 반응한 힘과 동작은 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확대하면 모든 크고 작은 공간 자체는 이에 가깝고 모든 구획된 형상과 운동은 기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의 동작이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理)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때 공간성을 강조하면 주리론이 되고 힘과 운동 모양을 강조하면 주기론이 된다. 주리론에서는 변치 않는 인의예지의 마음이 이(理)이고 사람의 일반 오욕칠정의 마음은 기(氣)이다. 주기론에서는 모든 마음이 육체나 물질과 함께 기라고 본다. 마음(心)도 이 기공간론(氣空間論)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이해의 차이는 결국 처음 언급했던 대로 경험성을 강조하느냐 초경험성을 강조하느냐하는 체험적 명징성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체험기론에서는 경험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므로 마음도 모두 기라고 정의하게 되고 나아가 육체와 정신이 동질적인 것이라고 보게 된다. 따라서 공간과 힘과 운동은 서로 질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공간자체가 형성력과 운동력으로 오로지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기발설(氣發說)이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기발설은 생명론과 현상론으로서 유용하다. 삶과 행동 정치와 사상과 정서 문화와 가치를 추구할 경우의 중심명제가 된다.

 

순수한 사유의 단계나 순수 창조의 단계에서는 백지와 같은 지면적(紙面的) 성격을 가지는 바탕으로서의 이(理)가 생각될 수 있게 된다. 여백에 그림을 그릴 때를 비유할 수 있다. 새로운 선을 그릴 때 그 선은 백지위에 일정한 구획을 정하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 구획화 된 기하학적 형체들이 그 내부 공간 속에서 스스로 의미와 힘을 창조하여 작동 운동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림이 정서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발설이 가능한 이유이다.

 

모양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공간 자체를 주목하는 그런 입장에 서면 행동의 동작모양 자체가 극히 유의미하게 된다. 자유의지보다는 그 이전의 구조와 상황이 문제가 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행공시에 동작자체 보다는 그 모양 내부의 공간이 더 궁극적인 것으로 이해되므로 이 이중심(理中心)의 이론도 유용한 것이다. 이 경우 기(氣)의 역할은 막연해지고 오히려 리의 내재적 직용이 그대로 경험화 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를 리발설(理發說)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발설은 일종의 창조론으로서 유효하고 자유로운 실험적 해석 시도의 근거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순수예술과 종교와 미학과 이상의 세계 등을 현상의 근원으로서 본질적 궁극적 철학적으로 다룰 경우에 중심 명제가 된다. 이 경우에는 경험과 체험은 어디까지나 창조의 부산물이며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것이 된다.

 

이발설과 기발설은 그러나 이와 기의 개념을 부정하거나 떠나지 못하며 그것은 통일적 궁극 개념의 이해상 중대한 문제이므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 나오게 되었다. 최종 궁극의 이름을 자처하기를 서로 사양한 것이다. 아니면 이미 그 궁극의 존호(尊號)로서의 이름은 인(仁)으로 사용하여 왔으므로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통적 사유에 충실한다면 인(仁)을 중심한 의(義) 예(禮) 지(知) 관계를 더 심화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서 새로운 이론적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한다. 요컨대 이기론(理氣論)이란 사변적 논변일변도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은 인(仁)을 설명하기 위한 궁극의 노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러한 분리적 생각 아래에서는 사단(四端) 과 칠정(七情)은 대등하게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칠정은 인(仁)의 구현과정에 관계하는 것으로 논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개념간의 위차 관계 규명이 우리의 이해력의 질을 가름하는 핵심과제라는 엄중 사실은 삶의 어느 순간에도 그리고 어떤 동작의 상황이나 경우에서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미래의 대담한 목표는 4단론(四端論)이 결국 온 세상을 하나로 이해하기 위해서 인(仁)의 독존적(獨尊的) 위상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서 확립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존재 이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仁) - 우주 자연의 정신을 말하고 그 생명 창조 지향성을 지칭한다.
도(道) - 우주 자연의 내재적 질서성을 표현한 말이면서 그 질서의 구현이 인생의 본 질이라는 이해를 포함한다.
덕(德) - 우주의 정신을 이해하려는 힘과 체계 그리고 실천하려는 모든 행동을 아울 러 지칭한다.
경(經) - 우주 자연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경험적 질서의 모습과 특질을 지칭
의(義) - 우주 자연의 질서를 지키는 모든 노력과 벗어남을 제제하는 구체적 의식과 행동
예(禮) - 우주의 정신을 인생에서 적극 구현하는 여러 창조적 양식
지(智) - 우주적 정신을 새로이 해석하고 그 의미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확충하여 넓 히는 지성능력을 지칭한다.
신(信) - 질서에 대한 일반적 믿음과 실행의지를 지칭
락(樂) - 악(樂) :질서와 합일된 삶의 기쁨과 그 기쁨을 표현한 창조적 연주 시가 및 무용 군무 그리고 모든 사랑의 행위
문(文) - 인의예지 정신에 따라 구체적으로 창조된 모든 성과를 지칭
물(物) - 각종 개체 사물이 지닌 독자적인 질서와 의미 물(物)을 규제하는 힘을 칙 (則)이라고 한다.

 

위에서 개관된 일연의 의미의 개념들을 간결한 한 문장으로 통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와 같은 이해를 위하여 새롭고 다양한 발상을 추구할 필요성이 있다. 그 일환으로 이(理)와 기(氣)를 힘과 공간 혹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으로 환치하여 극히 단순하고 일반적 판단으로 재구성해볼 수도 있다. 이하의 시론은 그 같은 가능성에 대한 시도로서 자유롭게 발상된 것이다.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것 : 우리는 사변적 궁리론(窮理論)의 영역에서는 기(氣) 일원론 (一元論)이 가능하고 이기(理氣) 이원론(二元論)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론에서 혹은 일반 법칙론으로서 그러하다는 것으로 단적으로는 만물의 설명의 방식이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우주의 근원이 둘이라는 뜻은 전연 아니다. 그러므로 이원론과 일원론은 본질적 믿음(仁)에 있어서는 전연 차이가 없다. 하나로서의 우주를 설명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다는 전통적 이해태도가 그와 같은 직관을 유지 반영함에는 조금의 변함도 없다.

 

도대체 차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실은 간단한 것이다. 우선 이원론은 우주와 그에 포함된 만물의 물질성과 공간성을 나누어 그 경험적으로 다른 면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 구분 방식을 그대로 궁극의 실체와 그 드러남이라는 양대 현상세계에 대담하게 연장 적용하려는 것이 주리론이다. 반대로 그 변별적인 현상 특징을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논의의 단서를 개척적으로 과감히 열고 있는 것이 주기론이다. 예를 들어 일정한 형태나 크기 무게 색을 등을 보유하는 어떤 정적인 사물의 존재적 특질과 반대로 형색이 없는, 즉 특별히 감지할 수 없는 공허허령한 세계와 그 여타의 자유유동의 힘만이 작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허령한 공간세계적 특질과를 구분해서 생각해 볼 경우 전자를 기(氣)라하고 후자를 이(理)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이원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세계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동질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일원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차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이의 눈과 관점에 달려있는 것일 뿐이다. 맹자의 경우는 그 논점의 일반 특질상 단연히 일원론의 태도를 단호하게 견지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맹자의 시대가 통일을 갈망하는 여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세의 궁극론은 시대성과 유리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 논자의 시대성을 제외하면 어떤 결론도 의미를 확보할 수없다. 유추하건데 공자는 아마도 이(理)를 강조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고 해석해야할 것인데 역시 그의 원리지향적인 시대성 때문이다. 시대성을 초월할 경우에는 오로지 논자의 개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는 궁극의 이해욕은 언제나 상존하기에 우리의 시야는 다양해지고 깊어질 수 있다.

 

한편 퇴·율 같은 성철(聖哲) 대현(大賢)이 공허한 담론을 위해 논쟁의 장을 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의 발론에는 어떠한 사심도 없었으므로 이기논쟁은 그 시대의 삶에 대한 결론을 위해 촉발된 것이다. 우선은 학문적 형식주의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며 사고의 자유에 대한 모험적 시도이다. 그리고 형해화해가고 있는 인의(仁義) 정신에 대한 심각한 활로 개척의 언설이다. 유학적 사유를 일상의 삶으로서 영위하려는 학습(學習)의 본질에 대한 치열한 맹성의 결과이다.

약간 관점을 달리해 보면 리(理)는 "영원한 힘 자체"라고 정의할 수 있고 기(氣)는 그 "영원한 힘을 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와 기는 상호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것이 된다. 전자는 존재 자체를 의미하고 후자는 존재의 의미를 의미한다. 이미 언급했던대로 공자가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힘씀>이 부족하다고 한 그 말일 것이다.

 

한편 영원함의 여부는 역사성으로 설명될 수도 있는데 인생을 포함한 모든 우주적 사건들은 시간 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일정한 사상(事象)을 형성한다. 그 조성된 사상은 그 사상의 지속의 시간적 크기에 관계없이 조성 싯점의 사상조영(事像造營) 의미를 그대로 지속하지는 못한다. 고요한 공간의 입장에서는 어떤 사상도 이상현상(異常現像)이기 때문에 그 이상현상은 순간적으로 의미를 상실하고 그 사상은 공간의 의미를 강화하면서 일정기간 존속하게 된다.

 

사람의 역사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일정한 시점에 이루어진 사건이나 문물은 그 발생 당대에 절실한 의미를 보유하지만 그 의미 그대로 지속되지는 못한다. 역사적 환경이 변전되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우주공간과는 달리 의미 분절적으로 지속된다. 하나의 선행 분절은 이어지는 새로운 분절 마디와의 사이에는 역사사상형식(歷史事象形式)의 이어짐은 있으나 그 동일한 의미의 절실함은 그대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차원에서는 사건이나 사상은 기(氣)가 되고 지속되는 영원한 시간은 리(理)가 된다.

 

역사상의 선행분절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 단지 새로운 역사에 대응하는 새로움으로 재편성됨으로서 새로운 당대적 절실함을 확득할 수 있다. 역사 해석이 필요한 까닭이다. 예를 들어 공자사상은 그 당대의 특별한 소임를 가진다. 그러나 그 소임은 후대의 역사 속에서는 그대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새로운 소임으로 인하여 전승된 경전은 새로운 의미로 채워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때 경전 텍스트는 분절의 형식이며 새로운 해석은 새로운 당대성을 부여하는 기제(機際)가 된다. 전승된 분절들은 새로운 의미로 수혈되면서 새 역사의 배경을 이루고 이 위에 또 다른 당대성 분절이 창조된다. 이 경우 지속되는 분절의 이어짐은 리(理)가 될 것이며 그 분절에 부여되는 새로운 의미는 기(氣)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기론의 결합으로 얻을 수 있는 이상적 결과물의 하나이다.

 

즉 역사에서는 그 지속력을 분절에서 찾을 수 있고 분절이 가지고 있는 사상형식이 역사의 배경을 이루는 데 이 배경은 바로 우주적 공간과 같은 하나의 역사 중심 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가 있는 모든 공간은 특정화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분절이 지니는 최대의 특질은 본래의 의미를 일시적으로 절제하고 새로운 의미를 향하여 열려 있다는 데에 있다. 분절의 기초적 특질도 역시 절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절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대로의 존재는 스스로 영원한 우주 공간 자체 밖에 없다. 우주간의 삼라만상은 오직 절제를 통해서 영원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물절제의 영원성은 이(理가 될 것이며 절제로 이루어지는 지속력은 기(氣)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현상은 기(氣)라고 분류하게 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시간의 영원성과 공간의 무한성이 단적인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적절하게 질문할 수 있다면 생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아직 질문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 우리의 절실한 경험이 아직은 너무 부족해서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향후의 일대 과제는 성급한 질문의 시도보다는 이제는 적극적으로 창조적 경험을 창출해 내야할 때이다.

 

창조적 경험이란 실험적인 방식도 그 하나이나 그 실험은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 경험은 만들어진 왜곡된 특별경험으로서 일반성을 논하기에는 부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경험의 원초는 이미 우리 신화 가운데 있다 "열손가락을 깨물어보아라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하는 것이 그것인데 '비일상적 시도로서 얻어지는 자연스런 일반지감'이라고 하는 경험적 특징을 지닌다. '비일상적'이긴하나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즉 정상경험의 범주에서 개척된 새로운 경험인 것이다. 그런 경험의 축적이 긴요하다.
역사상 최초의 충격적 새 경험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한 동이족(東夷族) 순(舜)의 신화에서 찾을 수 있고 그 새로운 경험은 도덕의 필요성을 크게 각인시켰다. 병리(秉彛) 정신의 초석이 되었고 신의 의지보다 인간의지의 절실함을 자각하는 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도덕 인의 개념이 발흥하였다. 그 여운 속에서 공자 맹자가 성인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과 비물질의 동질성 이해의 길 : 이 때 위의 두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즉 기일원론적 영역에서는 사물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경험적 물질과 비경험적 공간이 동질적인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그 경험적 존재의 의미를 일정한 동일한 질서로서 받아들여야한다. 동일한 질서로 받아들이려고 할 경우 역시 그 경험가능성이 비경험체와 서로 다르다는 그 지감(知感) 때문에 서로 나누어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경험체의 처리가 그 관건인 것이다.

경험의 불확정성 : 그 해결 방식의 하나는 경험속에 내포된 불확실성과 확고박약성이다. 우리의 확고하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경험이 우리 세계의 모든 현상을 망라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예컨데 똑같은 사물에 대한 각 사람의 느낌이 다르게 나타난다거나 초자연의 세계의 존재를 느낄 때, 혹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많은 사실들과 심령적인 현상들이 그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는 차단된 어떤 극단의 세계가 있다고 느낀다.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죽음의 문제는 그중 대표적인 것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 우리의 심성적 존재는 어찌 되는가 우리는 현실 경험으로는 도저히 접근하거나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경험이 우리들 존재의 본질을 보여주는 전부가 아니며 우리들 존재현상의 본질은 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신비적 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점이 있다. 당연히 우리는 현실적 실 경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양보하여 평가절하 할 수 밖에 없다. 현실 경험이 보여주는 모든 변별력과 시비가 그리 확고하고 대단한 혹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이해가 자연히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함으로서 우리는 오히려 경험적 존재와 공간적 존재 사이의 거리를 다소 좁힐 수 있다. 이를 경험적 감각에의 회의 방식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렇게 볼 경우 경험과 초경험 사이에 동질적 성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기(氣)는 그 동질화 작용의 실체라고 보게 된다.

 

이질성 통일의 방식 : 또 다른 해결 방식은 물질과 비물질 혹은 일상경험현상과 초월적 현상사이의 문제를 임의의 다른 조건과 시각에서 보는 방식이다. 이는 시점의 변경을 통한 조건화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방식 중에 가능한 한 예는 물질 질체와 공간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성을 매개로 하여 물질자체보다는 그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실존체 라고 보는 방식이다. 공간이란 존재의 일반적 원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건물을 지을 경우 그 건물의 뼈대를 건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뼈대를 세워서 얻게 되는 공간이 더 유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다. 거대한 산은 그 높음만으로는 의미를 보유하기는 어렵다. 등산의 경우에는 그 산이 제공하는 공간적 높이와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산의 공간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천연의 요새로 사용할 경우에도 적의 침입을 곤란케 하는 공간 격막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산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 경우 아마 첨단의 강력한 유리질 방어 막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러한 거대한 산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산이 존재는 공간성의 규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 때 <공간이란 당연히 유의미한 공간>이라는 정의로 통합 이해된다.

 

공간의 의미적 본질인 힘 : 한편 물질과 비물질에 공통되는 요소가 공간인데 물질 내부 에도 수많은 공간이 존재한다. 동시에 이 우주간의 허령한 공간 속에도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공간과 별의 관계는 물질과 물질 내부 공간과의 관계로 역대응된다. 환언하면 공간 속에 별들이 있는 것은 물질들 사이에 공간이 있는 것과 같다. 우리의 상식으로 각 물질의 질량이 다른 것은 그 물질 내부에 있는 공간의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간과 질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별이 없는 공간을 상상할 수 없듯이 공간이 없는 물질도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는 과학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불랙홀 이론은 그 자체로서는 거의 무용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이론은 공간과 질체의 사이의 어떤 관계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활용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불랙홀 이론은 특별한 현상이 전연 아니며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들과 전연 다른 것이 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이해에는 비약과 무리가 생긴다.. 즉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괴이한 이해라는 뜻이다. 도대체 완전히 특별 독립한 현상이란 없다고 보는 것이 유학의 기본 명제이다.

 

반면에 또 예를 든다면 미립자로 구성되었다는 우주물질을 상정하면 우주간에도 소립자가 가득하므로 그 소립자의 물질성을 감안하면 자연감각을 기준으로 보아 특정 질체와 일반 공간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다만 경험의 세계에서는 질체의 집적이 이루어져 있고 공간은 질체의 결합 집적이 이루어져 있는 정도가 약할 뿐이다. 그러므로 공간성을 존재의 근원으로서 주목하면 질체와 공간은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다른 존재로 느끼도록 특별 현저한 경험성을 나타낸 것은 결국 무엇인가. 물질질체의 집적도의 차이일 뿐이다. 다만 그 집적이 단순한 집적이냐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집적이냐 하는 집적의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경우 기(氣)는 바로 집적의 힘이다. 송학(宋學)의 개념으로는 그런 공간은 무극(無極)이며 경험된 현상은 태극(太極)이다.

 

우리는 이같이 공간과 질체의 사이를 주목할 수도 있지만 경험적으로는 직각적으로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다. 즉 그 구분은 이해의 차원에 따라 동질적인 것으로도 이질적인 것으로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경험성을 위주로 생각하면 공간과 개체는 동질적인 것이며 오직 자화적(自畵的) 공간정의로 인해서만 의미와 작용이 결정되는 통일된 존재로 보게 된다.

 

일반 현상으로서의 공간 : 이 두 관점을 조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 든 현상은 일정한 집적 공간인 질체를 배열하는 공간의 형상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경험적 물질성을 결정하는 주체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 작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즉 질체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힘이다. 우리가 현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공이란 바로 그러한 공간성을 주목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정한 유목적적인 의미를 위해 일시 계선을 그어 구획된 것이 개별체이기 때문에 이 개별체는 그 원단(元段)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그 구획작용의 의지나 배경 혹은 실상과 의미가 문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 소립자의 세계는 물질과 비물질의 차이를 점점 최소화해 나아가고 있다. 실존체와 공간의 차이는 점점 적어도 무의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절대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절대 질체가 없다는 사실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힘이란 바로 그 통일일반의 공간을 형상적으로 기하학적으로 구획함으로서 야기되는 변별의 혼돈을 벗어나 즉시 다시 정돈통일을 지향하는 본원적 에너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간의 최대 의의는 단지 그것이 통일의 힘으로 충만한 장(場)이라는 데 있고 각 단계의 질체들을 융통시기는 통합의 질서라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힘은 공간의 의지이며 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영원과 유한의 이해 : 한편 관점을 바꾸어 보면 영원히 흐르는 시간의 차원에서 본다면 특정한 사물은 그 시간 공간이 제한되어 생성과 소멸 혹은 생노병사의 과정을 흐르면서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를 반복하므로 사실 특정한 존재란 영원한 것이 아님을 현시한다. 그리고 인간의 감각으로 한정할 수 없는 비존재의 세계가 오히려 영원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의 바탕에 있는 비존재로서의 공간이 더 궁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영원한 그 무엇임을 알 수 있다. 결국은 공간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강력한 것이므로 오히려 바로 그 허령한 공간의 특별한 작용에 의해 존재가 영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공간은 존재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그 공간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성을 띠고 작용하는 그 무엇을 힘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공간의 정체를 하나의 지속적인 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란 단지 힘의 결집체일 뿐이므로 비로소 우주 만물은 동질적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때 힘이란 그 질체성보다는 그 질체성을 뛰어으려는 모든 움직임의 근원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이 경우에도 힘 또는 움직임이란 궁극적으로 형평(衡平)을 지향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힘은 곧 평화와 평화 사이에 존재한다.

 

공간의 힘으로서의 의미적 본질 : 다시 말하여 적어도 최소한 존재를 힘으로 전환할 때 우주와 통하는 통로가 열린다는 생각이 가능하다. 즉 하나의 일반의미에서의 작용으로 환원할 경우 새로운 통로가 열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힘은 본질적으로는 구체적이어야 하므로 내면(無內의 상대개념)을 가진 존재의 속성을 전환한 그 어떤 내부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외부적으로 가해지는 외향적 혹은 강제적 규제적인 것을 주로 말하지는 않는다. 안에서 일으키는 힘이 본질적 의미를 보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안으로 수렴 작용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표현한 말로 고대 제자백가의 논리학 개념으로서 <무내(無內)> <무외(無外)라는 표현이 있다. <무내>란 그 질체성을 거의 무의미화한 단계의 개념이고 <허령(虛靈)>하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무외>란 어떤 질체가 그 질체성을 무한 확대 강화한 개념이다. 고대 신화상 무한대 크기의 인간형인 반고(盤固)라는 존재가 그 대표적 실체이다. 다만 우리는 단적으로 우주공간의 온전한 실체를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 한 면모로서의 힘을 지각할 수 있으며 이를 기(氣)라고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를 논할 때 힘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 힘이란 오로지 근육의 긴장으로 나온다. 근력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 사물은 산화하거나 다른 힘의 압력이나 충격을 받아 여러 형태의 힘 즉 에너지가 나온다. 그러므로 일반물질은 폭발력 산화력 지탱력 연장력 등등의 형태로 힘을 드러낸다.
인간도 그러한 힘을 드러낼 수 있지만 생명현상의 범위에서는 그러한 일반 물상적 형상성의 의미는 감소되고 생체의 작동에 의해 일어나는 새로운 본질인 내면적 힘을 조절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 유의미해진다. 그것이 바로 역시 근력의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기획되고 조절가능한 근력은 우주상 전연 새롭고 신성한 물리적 현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또한 기라고 부를 수 있다. 환언하면 인간에게 수용된 우주성 혹은 공간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단 우주적 공간이 살아있는 그 무엇이라고 볼 때 그 같은 상정이 가능해진다.

육체의 외선으로 규정된 인체는 그 외선의 내부 공간은 통일 균형력으로서의 힘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인체는 그 힘의 공간을 육체의 외부 계선인 자세와 동작 그리고 내부 계선인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좁히고 넓힐 수 있다. 이 출렁임 작용이 내기에 변화를 주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과 우주의 합일 : 즉 인간은 우주의 원 힘을 적극 운용 함축하여 쇄신하고 새로워 질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고 또 무한한 희망을 중 수 있다. 물론 일반 물질도 유의미한 공간성과 특정 영역적 범주로서 우주 자체를 함축할 수 있다. 예컨데 사람의 세포 사이 물질의 분자와 원자 소립자의 사이가 역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人間)은 그의 공간의 정체인 힘을 스스로 조절하고 생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물질과 전연 다르다. 물질 내부의 공간은 그저 존재하는 공간일 뿐이요 그저 수용된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런 물질의 내부공간은 우주의 원공간의 지배를 받는다. 즉 물질의 존재적 독립성과는 대립적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인간은 원 공간의 힘을 감지하여 직각하고 적극 수용하고 누린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근력으로 구현된 인체의 힘은 공간성을 내포하고 가지면서 동시에 하나의 존제체인 인체와 친화력을 지니고 있고 인간의 편에 소속한 공간이다. 이를 인간공간(人間)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공의 목적은 모든 인체 내외의 공간 까지를 그와 같은 친화적 내부공간인 인간공간으로 쇄신적으로 확장 전환하려는 데에 있다. 그것이 우리 신화에서 제시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인간적 의미 질체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인間)이란 인간의 본질로 충만한 세계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나누어 생각하는 전통이 있으나 사실 출세간의 세계는 꼭 이상적 세계라고 볼 수는 없다. 진정 이상적인 세계는 인간(人間)으로서의 세간(世間)일 것이다.

 

생과 사의 사이 공간 : 이런 의미에 본다면 신선(神仙)이란 생과 사의 사이의 공간의 존 재 혹은 영원과 순간의 사이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육신을 힘으로 자유롭게 교환 융통하고 혹은 공간화하여 인간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아울러 동질화한 이상적 존재의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제체가 그 물질성을 떠나 일반적 힘과 힘으로 만날 때 통일 융합 융통의 이상을 구현함을 체험한다. 신선은 그러한 극치체험의 자유자재한 구현자일 것이다.

 

따라서 신선이 손을 내민다는 것은 육신을 내민다는 뜻은 아니다. 힘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숨을 쉬는 것은 공기 물질을 들이고 내보내는 것만이 아니다. 힘을 당기고 힘을 내미는 것이다. 외부로 출현한 기인 힘은 외부공간에 파장을 일으킨다. 외부 공간으로 파급된 힘은 무한정한 공간에 투사되므로 그 스스로 일반 공간의 공간성을 자극한다. 공간성이란 공간이 가진 절대의 균형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균형력의 정체는 무제한의 질량적 고요함으로 드러난다. 기공은 그 고요함을 흔들어 깨워 각성하려는 내·외의 동작이다.

 

반면에 외부 발출을 억제한 순간 힘은 내부지향화하여 내부의 공간에 파동을 주게된다. 그리고 행공 주체의 내부에 있는 <형상으로 핍박된> 공간력으로 활류(活流)하는 내부 활기를 자극한다. 그러나 그 활류는 새로운 쇄신된 균형을 지향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기공은 힘의 상호작용일 뿐이며 끊임없는 조화의 작용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기공은 일종의 외 공간수용의식(空間受容儀式)이면서 내공간 변전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이란 내외를 막론하고 균질화된 힘의 장(場)이다. 집중(執中)이란 그 균질화된 힘의 평정상태를 유지하는 힘의 중심을 말한다. 나의 몸 자체를 역시 하나의 균질적 힘의 공간을 지향하는 작용을 그 기초적 역원(力源)으로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힘의 드러남이란 일시적인 균형의 파괴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정상적 우주적 질서의 상태(常態)는 아니지만 중요한 우주적 영위의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형평 균형 조화의 의의 : 집중의 의미를 확대하여 음미한다면 자유로운 힘의 속성론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재음미해 볼 경우 집중이란 순수한 힘의 측면에서는 내부지향화를 의미한다. 행공체 내부에 조성된 힘이 외부공간과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는 그 동적인 힘은 그대로 외부지향화하여 정적인 본질로 이루어진 공간과 변별성 분리성을 강화하고 고정적 계선작용(界線作用)으로 전환되어 우주 공간과 대립하는 존재로 변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힘의 평정은 외부적으로는 힘의 절제를 통해 정지(停止) 상태라고 하는 원상(原狀)을 지향함으로써 힘과 외부 공간 사이에 그 상호 존중과 대화가능성 높임으로써 구현된다. 이런 작용을 역시 집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절제력이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된다.

 

반면 그 같은 동작은 역으로 내부적으로는 격발의 동작으로 작용하여 균질한 행공 주체 내부의 정의공간(定義空間)에 힘의 질서상의 파장을 일으킨다. 기공현상 혹은 작용이 비로소 발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공이란 일상의 행동에 비해 그 정지적 성분을 강화함으로서 비로소 출발되고 시작될 수 있다. 이런 측면도 역시 집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기공이란 독립 개체인 자신의 <힘의 사용상의 절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힘의 크기는 매우 클수도 있다. 그러나 적절히 조절되어야하고 그 발동은 힘의 정지 상태를 지향할수록 공간과의 갈등이 해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억제를 그 근본 수단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기공이란 힘과 공간과의 팽팽한 조화 긴장의 절제적 공존술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기공의 요로적 통로 : 행공은 임의의 동작으로 구성되지만 내부에 일어나는 그 힘을 통한 기감(氣感)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일상의 행동양식 가운데 일부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강화한 동작으로 되어 있다. 그때 일정한 가치와 의식에 의해 각 동작은 스스로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된다. 또한 내·외부 기와의 상호 영향을 교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각 동작은 일상과는 다소 구별되는 특별한 동세와 근육의 의도적 긴장과 절제와 이완을 상정한다.

 

그 같은 특징들을 감안하면 기공이란 사람의 동체와 지체의 동작을 선택 절제하고 심미적 직관적 가치적으로 설정하여 창조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시작되는 힘을 매개로한 기체험의 증진을 위한 의도적 행동설계의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때 그 기본적 동작과 행동의 체계는 그 내부에 몸 운동과 힘과 호흡이라는 3대 힘 작동영역의 완전한 상호 일치를 그 기초적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기공은 동작과 힘과 호흡이라는 3대요소를 중추로 허여 의도적으로 구성되는 압축된 삶의 행동이며, 이상적 기현상화 체험의 구현양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생활 속에서의 실효적 구현을 최종적 전제로 하므로 기공은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기공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 전체 과정에 일관되게 생명으로부터 발출하는 기화된 힘을 경험하고 모색하려는 의지가 확고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공은 생명과 그 직관적 입체적 체감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기공은 힘과 감각에 의지하고 또 표현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기공이란 힘과 감각의 제련술이다 라고 할 수 있다. '몸에 충만한 그 무엇이다' 라는 일반적 기의 정의는 감각적으로 체감된 생명의 총체적 힘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하겠다. 일상 동작의 절제적 선택과 내부 기체험의 증진을 목표로 하므로 그 가장 기초적 이론적 여건은 결국 공자의 <극기복례>와 맹자의 <호연지기설>이라는 양대 학설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1로세
1세-쌍수직추 양각병립(雙手直推 兩脚竝立)
두 손을 끌어올려
허리에 머무르고
두 발은 나란히 선다
두 발을 나란히 하고 서서
두 손은 주먹을 쥐고
최대한 높이 끌어 올려 머무른다.
눈은 전방을 주시하고
호흡은 순순히 자연에 맡긴다. (제1도)

2세-번수거정 뇌일구기( 手擧鼎 賴一口氣)
손을 뒤치어
솥을 드는 자세를 취한다.
이 때 입으로
배출되는 기에 의한다.
두 발은 변함없다.
두 주먹은 허리 쪽에서
앞으로 똑바로 내민다.
주먹을 내면서는 숨을 내쉰다. (제2도)
주먹이 끝에 도달하면
10지를 활짝 펴 긁는( ) 모양으로 한다.
다시 주먹을 쥐고 서서히 거두어들여
허리로 돌아온다. (제1도)
숨은 들이마신다.
주먹내기- 10지 펴기- 주먹 거두어들이기를
모두 8차례 반복한 후 그친다.

3세-곡슬하요 복저시례(曲膝下腰 伏底施禮)
무릅굽혀 허리내리고 낮추어
업드리어 예를 행한다
1세의 자세에서 쌍권을 허리로부터
들어 올려 위로 부딪듯(衝擊勢) 올린다.
숨을 들이쉰다. (제3도)
다시 위로부터 아래로
주먹의 방향을 바꾸어
똑바로 떨어뜨려(由上轉下直落) 땅에 이르러
맞닿게 한다. (至貼地爲合度)
숨을 내쉰다.(제4도)
상하동작을 8차례 반복하고 그친다.

4세-앙면조천 철요전두(仰面朝天 凹腰  )
얼굴을 하늘을 향해 들고
허리는 오목하게
배는 넉넉하게 한다
제4도에 따라서
땅에서부터
주먹을 펴 손바닥으로 하여
다시 위로 올려 일으킨다.
머리는 뒤로 젖히되(仰下)
많이 젖힐수록 좋다.(下愈下愈佳)
그대로 선채로 오래 있을수록
묘효가 있다. (愈久愈妙) (제5도)
서 있으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호흡한다.
서 있는 자세를 마치면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기식(氣息)을 고르게 조화를 기한다.
그 후 제2로를 이어서 연습한다.

<제1로> 각세분석
고생인류학의 성과에 의하면 인류가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최대의 특징은 직립보행이라고 한다. 기립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한 본질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섬으로써 인간이 되었다. 선다는 것은 대지구체의 힘을 딛고 서는 것이므로 그 기립이란 힘의 방향에서 보면 우주상의 선의(善意)의 위대한 반역이기도하고 우주의 힘을 시험하고 밀고 당기는 도전적인 말하자면 하나의 우주와의 대등한 싫지 않은 상호작용이기도 하다. 일어섬으로서 비로소 우리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은 많은 시사점(示唆點)을 드러낼 수 있다.

 

한편 모든 사물은 스스로 초월의 욕구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초월의 욕구란 사물이 지니는 시간적 공간적 모든 제한을 넘어서려는 욕구이다. 그 초월의 욕구는 사실 내면에서는 하나의 충족의 욕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물이 빈 곳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말하여 채우려는 욕구라고 할 수 있듯이 모든 빈 것을 충만히 하려는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욕구를 지닌 것이 만물의 물정(物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예컨데 영원하지 못한 존재들은 그 같은 방식으로 영원의 욕구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립한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일반물정을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역시 우주상사(宇宙常事)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파생되어 존재하는 정적인 것들은 그 근원적 일차 질체(지구 등)와 '부합하고자' 하고 동적인 몸들은 그 생명의 근원 질체로부터 자유롭게 '유리되고자' 한다. 다른 용어와 개념으로 말한다면 모든 질체는 다른 질체와의 사이에 서로 당기는 인력이나 반발력 등 모종의 역학관계를 보유한다. 이러한 상호간의 역학관게란 본질적으로 다른 질체와 나와의 일정한 관계를 조성함으로서 서로 정돈 혹은 합일되어 안정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한 질체는 자기중심적인 구심력이나 원심력 등 인력의 역학관계상의 힘에 의지하고 순종함으로써 그 질체의 질체성을 공간적으로 확장하려한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은 지구질체에서 생성되어 태어난 존재이므로 안정된 자연적 상태하에서는 지구 질체 그자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그 중심을 지향하는 힘을 시험하며 서서히 밀치고 높이 일어서고자한다.

 

인간 일어서는 기립의 역사는 최소 백반년을 넘는다. 그 장구한 인류사의 힘은 일어섬으로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기립은 위대한 창조적 동작 그자체이다. 적절히 벌여선 다리는 기립을 지탱하는 두 축이다. 그러므로 다리는 인간이 자기를 수립하는 바탕이며 위대한 힘의 원천이다. 제1세에서 바로 서는 동작이 중요한 까닭이다.

 

손은 반대로 생명의 중심인 지구질체의 중심을 향하는 것이 정상태이다. 인력이나 구심력의 끌림에 순응하고자하는 자연적 표현이며 사람이 가진 상대와의 조화 융통 화합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손을 늘어뜨리고 선 자세는 순수 의미상으로는 땅과 인간이 팽팽한 긴장속에서도 조화를 이루어내려는 자세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손을 늘어뜨린 자세는 정적인 자세이며 '부합되고자 하는'의 자연적 자세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조화를 깨드리고 관계 공간을 변화로 출렁이게하여 기존의 지구와 우주와 인간간의 지루한 공존의 힘과 가치를 선의적 미학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기공의 동작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재편은 그들 사이의 역학적 힘의 크기에 따라 조화 균형의 의미를 새롭게 쇄신하고 그 의미와 가치의 크기를 확장하고 그 공존력을 보다 크게 혹은 넓게 확대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기공의 시작은 싫지 않은 모든 선의적 파문이다. 그 파문은 우선은 손끝에서 시작된다.

 

먼저 바로선 자세에서 무릅을 굽혀 대지에 대한 순응의 태도를 보이고 차후 자신의 모든 동작이 화합을 전제로 한 것임을 표현한다. 굽힌 상태애서 손 끝을 쥐어 올린다. 대지의 기존 역학적 추향에 반하는 동작이다. 이어서 그 반인력의 움직임을 팔을 굽혀 끌어 올림으로서 점점 키워 극대화한다. 이 때 서서히 숨을 들이쉬어 나의 중심내부 어떤 편안한 곳에 기를 충분히 모은다. 공간은 힘의 본질적 근저이므로 두 팔로 끌어 안은 그 힘의 공간을 의식함으로 마시는 것이다.

 

다시 팔을 앞으로 천천히 힘차게 뻗어낸다.그 때 역시 서서히 손을 펴 수평 즉 역학적 중립의 자세를 취한다. 수평으로 구현되는 균형과 조화의 힘은 근력에서 나온다. 즉 평상근력으로서 중립의 태도를 구현한다는 말이다. 팔이 내몸에서 수평으로 서서히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즉 나의 본체의 힘을 중립 수평의 방향으로 구사하기 때문에 인력이나 반발력은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에 평정상태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때 숨을 내쉰다. 그,러므로 수평은 평화의 도형이다. 나와 자연질체가 결국은 고요히 평화롭게 공존하리라는 예언과도 같다.

 

동시에 또한 나의 체구 동체를 모든 여타 팔 다리 등 지체의 중심으로 삼고 나와 타 지체와의 사이에서 저항하며 공존하는 또하나의 질서의 공간을 조성한다. 내몸과 손의 관계는 지구와 그 위에 직립한 나와의 관계와 같다. 손과 나와의 긴장과 이완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나와 손 사이에 있는 팔길이 직경의 공간은 새로운 힘으로 넘친다. 무의미한 허공이 힘의 공간으로 박진감이 넘치는 활기로 재편되는 것이다.

 

다시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제끼어 고요히 선다. 자연 호흡으로 돌아간다. 행공을 마친다. 조용히 서 있을 때 나의 주변에는 새로운 함성이 들린다. 지주중심의 힘과 나와의 팽팽함으로 한껏 넓혀지고 팽팽하게 긴장된 공간의 소리를 듣는다. 나와 대지 양자는 모든 힘의 파동이나 파문을 정지하고 그대로 고요해져 우주 공간의 뜻에 순응한다. 그 순간 우주 나 지구는 하나가 된다. 다른 선의의 반란을 꿈꾸기 전까지는 그렇다. 제1로 4세는 고아한 기공의 본질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구현한다. 그 평화를 구현하는 것은 역시 나의 근력과 대지의 질량이 내 몸에 가하는 인력의 크기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제2로:패왕거정(覇王擧鼎): 패왕이 정을 들다

<제2로> 제설
제2로의 제명인 '패왕거정'이란 기를 사고함에 있어 힘의 요소를 강조하는 말로 해석 된다. 힘이란 생명의 발출력 자체이다. 패왕(覇王)이란 춘추시대의 패자(覇者)에서 기원한 말로서 힘과 의리를 갖춘 존재이며 평화와 안녕을 구현하는 중심적 인격체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한초전(漢楚戰)의 시대 후일의 한고조 유방(劉邦)과 격돌했던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의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지칭하는 말이다. '정을 든다'는 것은 청동이나 철제로 된 솥을 든다는 용력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정이란 제사에 사용하는 중심의기(中心儀器)로서 인간이 예의로 살아야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기공에서의 힘과 예의적 속성을 말한 것으로 해석해야할 것이다.

 

대체로 예의(禮儀)란 인격체 속에 구현된 하늘의 질서를 의미한다. 예의(禮儀)가 단순히 인간적 질서인 것은 아니다. 본래 이 말은 도(道)를 구현하는 구조 혹은 체계나 시스템을 지칭하는 말이다. 나아가서는 도(道)를 응용하여 창조적으로 설계한 삶의 양식을 말한다. 바로 그 예의 천리성(天理性)과 설계성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기공의 본질과 잘 합치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천리와의 균형이란 대립된 존재로서의 상호 조화의 차원을 넘어 완전한 동질적 일치 내지 균질화를 추구하는 것임을 유의해야하겠다. 이와 같은 일치의 철저성에서 행공은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물론 그 생명적 일치의 전형적 모습은 한국역사상의 의열한 죽음의 결행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제2로> 서
가슴에서 손바닥을 펴 매가 날개를 허허롭게 드리운 것 같이 한다. 항문은 꼭 닫아 수화(水火)가 의지되게 한다. 두 귀는 늘어뜨려 붉은 매미처럼 되게 한다. 높이 일어서 양쪽 신장에 힘을 주고 허리를 굽혀 무릎은 내리고 다리는 가볍게 한다. 이 공을 행함에는 그 비법(秘法)을 얻을 필요가 매우 절실하다. 언제나 길이 본심을 기르고 보전하려는 생각을 다투어 마음에 새겨야 한다.
當胸分手 兩推撑 鷹兒挺翅
懸空空 肛門一開 水火 
雙耳卦紅蟬了了 起落全要兩腎力
曲腰下膝脚輕輕

<제2로> 서의 음미
2로 행공은 <비법(秘法)을 얻어야한다>고 하였다. 이는 이 행공 가운데 비전(秘傳)의 특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창안자의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므로 그 이해는 자기체험적이고 주관적인 것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다만 "비법을 얻어야한다"는 말은 추상적인 말은 아니며 실제적으로 체감해보려는 경험적 시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뜻으로 보인다. 아울러 항문 수축으로 강장함을 얻을 수 있다는 양생적 효과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므로 당시로서 그 효과를 주로 언급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 체감가능성은 구체적으로는 단언컨데는 체구 동체(胴體)의 수직운동이라는 근력을 요하는 움직임이 있는 행공이므로 제1로에 비하여 각부 근육의 근력이 사용되는 정도가 높은 행공이라는 사실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예컨데 발을 좌우 일직선으로 두고 무릅을 굽히는 과정에서 자연히 힘의 조절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 정갱이와 대퇴부의 근육이 긴장되고 항문괄약근이 긴장될터인데 다시 일어서는 동작에서 그들 근육이 이완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을 적절히 몸으로 체감하며 각부의 힘을 조절해 수련해야한다는 경험을 밝힌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신장에 힘을 주라>는 말은 허리의 좌우변으로 근육을 긴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허리선의 좌우는 신장이 위치하는 곳이고 복부와 배부 중앙의 좌우와 가장자리 내외에는 신장과 그 연관 경락이 흐르고 있다. 임맥(任脈)의 좌우와 독맥(督脈)의 좌우가 그것이다. 이 역시 다리를 벌려선 자세에서 굽히는 동작중 자연히 옆구리 근육이 간장 되는데 그 긴장을 체감하라는 언표로 보인다. 이 행공동작시에는 물론 자연히 장기의 내부 신장부분이 힘의 중요한 충추가 되게 된다. 좌우로 다리 벌려 무릅을 굽히는 동작에서는 다리 좌우의 긴장력이 이완되었으므로 허리 좌우부분이 힘의 지도리로 되어 근육 역학적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역시 앞서 언급한 대로 힘을 자각적으로 느끼고 조절해야한다는 힘의 체감성을 강조한 점을 특히 항시 유념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패왕거정으로 표현된 표제에서 보듯이 그 힘을 강조하고 있음을 특히 주목해두어야 할 것이다. 전체 <로>의 행공에서 힘의 문제가 중요한 주제임을 먼저 밝히려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된다.
무릅을 벌려 굽힌 자세에서 합장했던 양손을 좌우로 힘껏 밀쳐내는 행공동작은 상당한 힘이 좌우로 불출되는 동작으로 좌우 손끝은 손등 쪽에서부터 위로 반전된다. 이는 패왕 거정으로 표명된 로제(路題)에 부합하는 다음의 행공인 들어올리기 행공의 힘을 비축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물을 가르는 자세>란 수영시에 느끼는 정도의 힘을 구사하여 행공하라는 의미로 읽혀진다. 팔을 좌우로 외향해 미는 동작의 행공은 근육의 방향상으로도 자연히 들어 올리는 동작에 비해서는 소량의 힘이 소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패왕거정>이란 항우(項羽)와 같은 역발산(力拔山)의 기개로 행공하라는 의미이므로 매우 힘찬 행공을 요구하는 말일 것이다. 정(鼎)이란 중국의 은주(殷周) 왕조 시대 이래로 주로 제사의례에 사용하던 제기로서 원래는 청동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제물(祭肉)을 굽거나 보온ㄹ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신분에 따라 두 개 이상 여러 개를 쓸 수 있었다. 오늘날의 쇠솥이나 대형향로와 유사한 것이었다. 이를 들어 올린다는 표현을 쓴 것은 도수(徒手)로 그와 같은 강함 힘을 발흥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대붕이 날개를 들듯이 한다>는 것은 다음의 들어올리는 힘찬 동작의 직전에 앞의 어깨부분에 힘을 축적하여 강고한 근력을 준비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대붕이 날개를 들듯이 하라는 것은 힘을 비축할 때 어깨 팔의 동작을 장대한 기상으로 수행하라는 요령을 말한 것이다.
<제4세>는 천근 무게를 들어올리는 힘을 구사하고 무거운 방패를 가슴 앞에 견지하는 힘으로 근력을 유지하라는 의미로 생각된다.
<제5세>에서 "화련금단(火鍊金丹)"이라고 한 것은 이 행공이 가져오는 기공의 효과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말로 생각된다. 불을 지펴서 선약(仙藥)을 고아서 복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므로 높은 양생(養生)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행공임을 말한다. 1-4세의 행공에 이어서 5세의 수공동작으로 그와 같은 양생의 효를 거둔다는 의미일 것이다.

 

<황금소반으로 달을 안는다>는 것은 그 음양 2기의 양생의 효를 거두어들임을 상징하는 말이다. 소반은 음식을 섭취하는 기물이며 황금이란 빛나며 귀하다는 의미이므로 적극적 섭생(攝生)의 효를 나타낸다. <달을 안는다>고 하였는데 달이란 음을 상징하고 정감이나 생리적 변화를 나타내므로 음양조화의 양생기공(養生氣功)으로서의 일어나는 신비적 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2로> 통설해의
힘으로 충만한 기공을 추구하는 18로 행공가운데 <패왕거정>은 그 힘을 수평 수직 양 방향으로 중후하게 구사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무릅을 굽혀 몸을 낮추고 체중을 하강함으로서 기공적 겸손함을 표현하면서 족기(足氣)를 열어 동체의 증심으로 결집하고 좌우로 팔을 열어 밀치어 다리 체구에서 좌우로 벌려선 두 굽힌 다리의 내선으로 흐르는 근육의 긴장된 힘과 균형을 이루도록 역시 좌우로 팔의 내선 근육을 팽배하게 하고 있다. 다리와 팔의 내선근육의 긴장은 기공적 힘의 내부적 통일 균형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곧게 선 자세에서 두 다리를 열어 좌우로 벌려서서 무릅을 굽혀 내림으로써 이루어지는 힘의 중심이동은 다리로부터 복부 아래의 근육의 만남을 긴축되게 하고 다시 그 좌우로 흐르는 근육을 긴장되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근력의 중심이 북부 아래로 집중되는 힘의 중력의 이동이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이 때 복부 아래서 좌우 다리에 이르는 곡선적 힘의 흐름은 아치형을 이루게 된다. 그 아치형의 기하학적 중심은 항문이 된다. 항문 괄약근으로 모아진 힘의 질량은 복부근육과 등 근육을 타고 전달되어 양 팔의 내선근육을 타고 두 손바닥에 이르게 된다. 좌우로 직선화된 긴장으로 시작된 힘의 간장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항문과 둔부근육에 모아지고 이 모아진 힘이 겨드랑이 근육을 타고 일부는 양 팔로 연결되고 항문에서부터 복근과 배근의 근육 갈래를 타고 상승하여즉 임독맥을 통하여 목과 머리에 연결된다.

 

이 중심으로 흐르는 힘의 상승하는 분출력을 어깨에서 거두어들여 두 팔로 밀어내는 동작을 통해 외부지향성을 타나내게 된다. 즉 몸의 동체 줄기를 타고 직상승하는 힘은 무릅을 굽혀 내리는 힘에 대한 반동인데 그 반발력을 팔로 흡수하여 외부로 서서히 배출함으로서 상하 사이의 힘의 파동을 좌우 수평방향으로 전환하여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양팔을 밀치는 동작시에 손바닥에 자극적인 힘의 전기적 유동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근육작용으로 조성되는 힘의 흐름은 다리와 발이 다르고 지체의 형상지음도 반대이므로 상호 그 힘의 흐름이 서로 상반된다. 부연하면 다리근육은 정상의 선 상태에서 지면에 대한 반발기능을 정상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평상시 힘의 흐름은 두 다리의 직선을 따라 상승하여 어깨 팔에 이른다. 팔의 경우는 정상상태하에서는 팔의 늘어뜨림은 근육의 지지력을 제외하고는 지면에서 이끄는 힘에 상응하여 반발력은 소극적이다.

 

반면에 다리를 굽혔을 경우는 근육과 골격을 통한 지면에 대한 반발력이 약화되면서 골격의 지지력이 일시다소 무력화하면서 상하로 반발력이 출렁이게 되므로 상응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된다. 무릅을 굽히는 동작 자체가 지면의 인력에 대한 상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반면에 팔은 반대로 굽혔 경우에 지면에 대한 반발력이 강화되고 폈을 경우 순응력이 강화된다.

 

그러므로 대개 무릅을 굽히고 팔을 펴내리거나 좌우로 펴서 밀어내는 동작은 순응적 동작이며 무릅을 펴고 팔을 굽혀드는 동작은 지면에 대한 반발적 긴장작용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대지와 나와의 힘의 균형을 출렁이게 하여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는 의도적인 기의 소장(消長)은 팔다리를 굽히고 펴는 동작으로도 구성되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손을 앞으로 합장하듯이 하였다가 좌우로 원을 그으며 열어 밀쳐내는 팔펴기 동작인데 이 경우는 팔을 굽힌 것이긴 하나 수평선상에서 굽혔으므로 지면과의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조성되지는 못한다. 마치 누워서 발을 굽히고 펴는 경우와 같다.
팔펴기 동작을 세분해보면 처음 허리로부터 팔을 들어 합장하는 과정에서도 원을 그으며 손을 모으고 다시 손을 굽히는 과정을 지나 펴는 과정도 원을 그으며 수행되므로 상하로 조성되는 역학관계보다는 상하와 수평의 두 종류의 작용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힘의 대립은 제로상태에서 수행된다. 즉 수평이나 원의 행공선은 중화의 과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거쳐 연출되는 팔펴기 동작이 최종적으로 수평을 지향함으로서 팔펴기 행공이 지니는 고유한 특질이 발휘되어 그 힘의 순응성을 타고 다리에서 올라오는 근육긴장의 큰 순응력을 외부로 발출하게 된다.
즉 다리는 순응함으로서 내부 근육의 힘의 조성이 가능하고 손은 반발함으로서 내부적 힘의 흥기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대개 호흡은 내부에 힘이 조성되는 과정에서 함께 들이키고 힘이 소멸되는 과정에서 내쉬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힘은 인체 내에 허령한 공간을 조성하는데 힘으로 조성된 긴장력의 크기만큼 확장된 공간 속에 힘이 근원인 기(氣)가 자연의 유동법칙을 따라 깃들게 된다. 이 기의 깃듦은 기공의 최종 목적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동체 스스로의 근력이 지면과 나와의 힘의 대립을 중화하는 수평운동에서 그 긴장도를 증강하여 그 이상의 힘을 발출할 경우에는 2차적으로 나의 동체와 지체사이에 힘의 상충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항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 때의 힘의 상충력은 근육이 조성하는 2차적인 근원의 힘이므로 자연적 근원의 힘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하다. 이 경우엔 오로지 앞에서 언급한 팔펴기 원리에 따라 몸 내부의 힘이 발출되게 된다.

 

그러므로 대개 일반논으로 말하면 굽히는 동작에서 내부 힘을 조성하고 펴는 동작에서 힘을 중화하게 된다. 굽히는 동작과 펴는 동작에서 공히 강대한 초월적 힘을 구사할 수 있고 이 균형관계에 소요되는 정도의 힘을 초월하는 힘이 일정하게 발출되고 유지될 경우에는 질체와 질체 사이의 관계력은 무의미해지고 굽히고 폄에 구애되지 않으며 오로지 근육의 힘에 의한 제3의 힘의 존재세계가 일정한 구조로서 구축된다. 그러므로 팔은 힘을 구축하는 적극적 기구가 되게 된다. 팔의 동작이 다양한 까닭이다.

 

요컨데 <패왕거정>의 행공에서는 기공의 중심요소의 하나로서 힘의 문제를 직각하는 과정임을 말하고 있다. 인체에 기의 흐름을 집약 표현한 힘의 작용이 사실은 기공의 사작이며 그 끝일 것이다. 기의 근원이 육체이고 힘의 근원은 근육이다. <육체와 기>의 관계는 <힘과 근육>의 관계로 전환 내지 환치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행공 수행의 정도가 높아지면 근육과 힘의 상생관계가 민감해지고 효율화되므로 평상시의 근육 속에 힘이 넘치게 될 것이다.

 

힘이란 결국 무엇인가 규정된 일정의 구현된 공간 속에서 그 공간 내부의 누층적 다면적 질체행동 사이의 교류의 작용을 증강하기 위한 것이다. 힘은 곧 질체와 질체의 상호 교류 대화의 통로를 넓히고 확대하는 개척적인 그 무엇이다. 힘의 길이 곧 교류의 길이다. 자연의 기는 그 에너지의 형상과 크기에 따라서 자유롭게 유동할 수 있는데 반해서 인체의 기는 경락과 골격과 근육의 도선을 따라서 발출될 수밖에 없다. 육체 내부의 근육은 평소 여타 육질과의 변별력을 표출하지 않고 있으나 일단 힘의 유통하게 될 때에 일반 육질의과의 사이를 넓히며 힘의 통로를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인체에서는 몸 자체가 그대로 힘의 공간이다. 믈론 인체 내부에서 기의 유동은 인체의 생체선을 따르지만 정상상태에서의 기의 모습은 인체를 중심으로 완전한 기하학적인 형태(圓)를 유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힘의 유통은 근육의 건실함과 주변 일반 육질의 치밀함에 좌우되고 이를 힘의 유통계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힘의 유통계는 그 내부의 혈관이라는 전신조직에 의해 개선되고 갱신되는 것이므로 혈행력의 원활한 작용이 그 기초 관건이 된다. 혈행의 힘의 근원은 심장의 근육운동에 있고 혈행의 효를 발휘하는 과정은 근육과 육질로 구성된 힘의 질체구조의 상황 즉 유통통로의 크기와 원활성에 달려 있다. 혈행과 근육의 통로와 힘의 유동이 하나로 합치되어 전체로서 유동하는 에너지의 상태를 기(氣)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氣)란 신비적인 개념이 아니라 총화적 개념일 것이다. 질체사이의 모든 상호관계로서 조성되는 전체분위기의 총체상 그것을 기(氣)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는 체온 색 밝기 물리적 에너지 음성 기하학적 형상 질체의 존립태 행동과 동작 등등의 목습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기를 표현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모든 관계력이 하나의 덩어리로 모여 이루는 기의 불가시적 기하학적 형상을 기단(氣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기단의 느낌은 위의 모든 체감적 요인의 복합체로서 감지될 수 있다.

 

이 기를 통해서 하나의 질체는 모든 대소의 질체적 구조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교류를 이룩할 수 있다. 기(氣)는 결국 질체를 초월한 유동-유통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 질체 내부에 중심권을 형성하고 존재하면서 상황에 따라 그 기를 발출하게 된다. 상황이란 그 질체의 존립-유지-발전-변화와 연관된 모든 환경적 작용을 포괄적으로 말한 것이다. 인체에서 그 기의 존재 형상을 경락이라고 한다. 마치 나무와 같은 그 경락의 모습은 그 내부에 균질한 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기를 물에 비유하면 그 경락의 통로 내부에 같은 수압으로 균등하게 채워져있다. 기는 물질이 아니므로 모든 질체의 질체적 상호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질체의 전체 관계양식의 균등한 조화의 선을 따라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는 총체적 조화의 그림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기는 인체의 내부 공간을 통해 결국 유동하면서 그 본연의 정체성을 인체 내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기본적인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람이 몸은 어떤 훈련과 학습 이전에 스스로 허령공간(虛靈空簡)의 실체이며 주인인 기(氣)와 동질화하고 합일하려는 작용과 의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생명의 힘의 기초적 정체라고 볼 수 있다. 즉 인체는 허령공간적 힘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의 힘을 바탕으로 역동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 장부론은 의학의 소임이므로 일반법칙론으로서의 기론은 기의 근원론과 기의 형상론 그리고 기의 존재론을 중심으로 검토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체의 특정 내부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 연관하는 것은 우선은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일반체험으로서의 생체작용에 대한 개별적 지감을 위주로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수시로 인체론이 병행될 것이다.

 

도대체 기(氣)란 무엇인가를 더 논하기 전에 우선 기는 무엇을 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적 확론으로서 오행론이 있지만 그 오행론은 기의 일반 규칙을 말한 것이므로 기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다. 기는 우선 모든 존재질체에서 발출하므로 <기란 하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성된 질체가 표현하는 기는 사실은 갑자기 질체의 형성과 함께 생성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기는 원래부터 존재질체의 존재 이전에 이미 있었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기는 존재의 그림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는 점을 더 말해야하겠다.

 

기가 어째서 가장 근원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선은 중요하다는 말이다. 간단히 보아 기는 우선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지각되는 그 무엇이다. 물질이 아니라는 말은 물질 이전의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나 지각된다는 것은 물질 이후에도 관계하는 그 무엇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란 존재이전의 근원적 존재로서 존재이전과 존재 이후를 연결하고 유통하는 질체존재와 비질체존재의 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현상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란 질체존재와 비질체존재 사이의 경계선에 자리한 중개적이며 모든 가능성의 결집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경계선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 경계선 물질은 질체나 생명에 관계하여 그 질체와 생명을 질체답고 생명답게 하고 죽음의 세계 혹은 사멸의 세계에 관계하여 근원물질의 가치를 유지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기란 우주의 일반 에너지이다. 작동력 존재력인 것이다. 곧 <유지되는 것은 리>이며 <유지하는 것>은 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바다가 우주라면 그 안의 물의 요동을 기라고 할 수 있다. 물은 물로서 존재하나 하나의 공간의 일반존재이다. 어느 구석에나 없을 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에서 생성된 모든 물체나 특히 생명체도 물을 함유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바닷 속의 모든 생명체는 그 내부에 역시 바다와 동질적인 물의 세계를 함유한다.그 생명체는 바다와는 형식상 격절되어 있으나 바다와 교류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를 마시고 바다 위를 유영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죽음은 바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생명이전 바다의 일반성으로 돌아간다. 생명이 사멸하여 바다의 일반물질이 되었다가 다시 소멸하여 일반 바다 자체가 된다. 바다는 기의 정체를 잘 보여주는 명징한 현상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바다는 물이상의 존재다.

 

지구상의 대기도 그 같이 검토할 수 있고 대지의 토양도 그같이 설명할 수 있다. 소립자로 가득한 우주도 그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상적 경험을 기준으로> 말하면 기의 진정한 본질은 없음이다. 그것도 완전무결한 없음이다. 없는 것이 기이다. 없다는 것은 어떤 <물질성도 없다>는 것이다. 완전히 공허한 것이므로 진공(眞空) 즉 진정한 공간을 말한다. 이 진공을 구성하는 <초경험 질체>는 기의 기초물질인데 이 기의 기초물질은 <특정하지 않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바다의 기는 물을 지구 대가는 공기를 기초물질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정한 원기(元氣)는 아니며 원기에 실려 있는 존재이다. 물론 우주의 진공 공간은 진정한 기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기는 근원적으로는 우주의 기초물질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그 기의 물질성은 역시 아무 것도 없음이다. 공간의 존재라는 뜻이다. 어떤 기감을 느끼거나 감지되는 것은 그 기가 물질성을 극복하고 드러나는 힘이다. 기는 그저 텅빈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물질을 교류유통하게 하는 공간이다. 사람의 기란 인체 내부의 공간구조 속을 인간 질체의 일반기초물질이 유통하는 현상이다. 기공에서의 힘이란 바로 그 공간을 조성하는 내외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기공(氣功)은 기공(氣空)이라는 일면을 아울러 가진다. 결국 행공은 생명의 공간 지향력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주란 무엇인가 하면 경계 없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무외(無外)가 그것이다. 우주의 본질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하면 크기와 질을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무내(無內)라고 한다. 무내이며 무외인 존재 그것이 기(氣)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 그러한 기가 내 안에 있고 그것을 감각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것이 행공일 것이다.

 

제2로세
1세-쌍수분수 양퇴쟁력(雙手分水 兩腿 力)
두손으로 물을
가르는 자세를 하고
두 넙적다리에 힘을 모은다.
두 다리를 좌우로 벌리고 선다.
한 발자국과 발자국이 서로 직선이 되게 한다.
(足與足間成直線形)
두 손바닥은 가슴 앞에서 합장(合掌)한다.
마음은 평정하게 기상은 고르게 가진다.
(心平氣和)
서서히 호흡한다.
앞쪽을 정면으로 정시(正視)한다. (제6도)

2세-쌍추분당 반안기마(雙 分  搬鞍騎馬)
두 손을 양쪽으로 뻗어
방어자세로 밀치고
기마자세를 취한다.
제1세 제6도의 원보법(原步法) 그대로
양 손바닥을 좌우를 향하여
서서히 곧게 펴 머무른다.
양손을 열면서 숨을 들이쉰다.

손이 끝에 이르면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며 숨을 내쉰다. (제6도)
다시 팔을 열어 편다(張開) (제7도)
두 도식을 합쳐 9차례 이어 행하고 그친다.

3세-대붕정시 전신사력(大鵬挺翅 全身使力)
대붕이 날개를 들듯하고
전신에 힘을 준다.
1,2세 제6도의
원래 자세 그대로 하고

다만 손바닥을 주먹 쥐어
당의( 衣:배자) 아래로 내려
아래막기 자세를 한다.
(제8도)

4세-역거천근 제저기마(力擧千  提杵騎馬)
힘차게 일어서
천근을 들듯하고
방패를 가지고
기마한 자세를 취한다.
제8도에서 팔을 벌려
물건을 가슴에 채어가져 안은 듯이 하고

다시 주먹을 쥐어 위쪽으로 들어올려
팔이 어깨와 가지런히 평행되게 한다.(제9도)
다리는 제8도 같이하여
두 발을 곧게 편다.
3세로 돌아가 다시 8차례 이어 반복한다.
주먹을 내려 떨어뜨릴 때 숨을 내쉬고
주먹을 위로 올릴 때 숨을 들이쉰다.

5세"화련금단(火鍊金丹:숫불지펴 듬단약을 달이다)"
-금반포월 전신정력(金盤抱月 全身精力)
황금소반으로
달을 안는다.
전신의 힘을 정제(精製)한다.
주먹으로부터 시작해서
손바닥을 펴
위로 곧바로 들어올린다.
눈은 대략 위쪽을 향하고
호흡의 조화를 기한다.
정지하여 오래 서(站)있을수록 좋다.(제10도)
(站立愈久愈佳)
제2로를 거두는 수공(收功)이다.

<제2로> 각세분석
제1로에서의 설명과 중복되는 개념은 피하고 2로에 독특한 부분을 위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제1세에서 물을 가르는 자세를 취한다고 하였다. 물을 가른다는 의식은 사실은 기를 가르는 것이다 나의 기를 가슴 앞에서 좌우로 열어 변동을 주면서 제정 렬한다는 개념이다. 물론 그 좌우 정렬의 기적 운동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을 좌우로 일자형으로 정렬한다. 이는 기를 갈라두려는 미연의 위상적 동작이므로 호흡은 순임자연이다. 이 때 다리와 발의 모양은 기마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발과 대퇴골이 좌우 일직선이 되도록 강한 힘을 발출해 준비한다. 말하자면 기를 낮추어 일직선으로 배열하고 그 기를 하부에 존재하는 힘의 형식으로 변환하여 기를 체험적 현상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제2세는 그 힘으로 변환된 기를 끌어올려 좌우로 밀치어 좌우 면으로 존재하던 기의 단면을 상하로 확장하여 재차 좌우로 넓히게 된다. 인체의 직립선을 따라 상하로 긴 타원으로 존재하였던 기는 이 동작을 통하여 좌우로 확장되면서 완형의 원꼴을 나타내게 된다. 즉 타원에 비해 기의 긴장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3-4세에서는 원형의 기를 살며시 그대로 두고 다시 손을 거두어 손을 상하로 교대하여 올리고 내림으로써 그 원형으로 구축된 기의 내면 영역을 두드린다. 기의 원형의 선을 흔들고 파문을 주어 기의 범주를 활성화려는 동작이다. 기의 형상의 변화를 기도하는 가역적(加力的)손동작이 아니므로 이 경우에는 손에 어떤한 힘을 가해서는 아니된다. 나이 몸이 기의 내부에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인정동작일 것이다.
<5세>에서는 활성화된 기를 두 손으로 밀치며 일어서서 일시 조성된 긴장된 원형의 기 돔 속에서 스스로의 육신을 일으켜 고요히 선다. 기의 중심이 일어서면서 활성화된 원형의 기는 나의 본래의 타원의 여유로운 기신으로 돌아오고 내 몸에는 기의 본원성이 강화된다. 이 과정에서 평소의 타원형으로 타성화된 나의 기가 상당한 정도 육신화하였던 탁함을 뱉어내고 원래의 기의 본질성을 강화함으로서 육신과 기와의 상호작용을 극명하게 활성화한다.

 

우리는 기가 육질화 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기가 힘과 오감으로 그 형태를 자유자재로 전환할 수 있을 때 이를 생명이라고 한다. 기는 힘이며 냄새이며 온도이며 견고함이며 무름이며 모든 경험현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기는 바로 교환의 힘이다. 그 육질을 흔들어 기를 원래의 자리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려는 것을 기공이라고 한다. 내안에서 그런 중대한 사변이 일어날 때 나의 생명은 춤추며 활기를 회복한다. 한 존재와 타존재의 육질이 부딪으면 그 각각의 존재의 기는 그 부딪음을 타고 육신을 빠져나와 그들 원래의 자리 우주의 허령함 그 완전한 자유의 존재로 되돌아가고 각각의 육신들은 생명력을 감쇄당하게 된다. 싸움이 생명의 적인 까닭이다. 기가 원형으로 존재하는 것은 통함의 힘작용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의 경우엔 그러한 빠져나감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가 바로 몸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다면 나의 몸은 원기와 융통할 것이나 사실은 생명자체가 긴장이므로 완전히 해소는 불가능하다. 다만 순간적 해소는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기공의 또한 목표일 것이다.

 

기는 우주 그 자체이다. 존재란 질체이며 육신이란 그 무형의 경계 없는 공간에 금을 그은 공간이다. 즉 제한된 공간을 질체라고 한다. 금을 긋는 것은 도형적 기하학적 동선의 연결로서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실재들은 도형으로 출발하며 그 도형이 3차원적으로 확장되어 형성된 것이 질체이다. 그러므로 모든 질체는 기의 공간적 봉쇄와 제한을 존립의 근거로 한다.

 

생체의 내부 기는 시간처럼 흐름이나 유동만 있고 질체가 없는 이름이다. 말하자면 특정화할 수 없는 기하형이다. 그 일정 공간화한 내부의 허령한 기를 제한하고 감지하기 위해 경계선 물질로서 질체소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질체소자(質體素子)로서의 기는 미세조직상으로는 비닐상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물적 망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상호 유통하며 전방위 교환이 가능하다. 그 도선은 완전한 자유전도 도체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질체란 무엇인가. 질체도 그 기초는 역시 기일 뿐인데 그 기가 일정한 기하형의 도형작용으로 집적되어 형상소자(形狀素子)를 이루고 그 형상소자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질체(質體)이다. 기질(氣質)이란 바로 그 점을 지칭한다. 하늘의 청명 순정한 천품을 받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기(氣)도 질(質)로 전환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그 질소(質素)를 총칭하여 별도로 리(理)라고 부른다. 경험적 감각적으로는 이와 기는 다르나 본질에 있어 이기(理氣)는 동질적인 존재이다. 비유해보면 우주적 현상은 해수(海水) 속에 간직되어 경험적으로 재현된다. 바다의 출렁임 자체는 기(氣)이며 그 출렁임을 타고 드러나는 질체들은 리(理)이다. 그러므로 기는 "충만한 것" 이라고 정의한다.

우주의 언어는 세속의 언어와 다르므로 우리의 경험이나 말로 표현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바로 질과 기를 나누는 생각이 그러한 제한성을 보여준다. 사람은 자신의 육체에 집착하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 같은 비질체를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주적 논리에서는 단지 드러남과 사라짐이라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드러남을 신(神)이라 하고 소멸하는 현상을 귀(鬼)라고 부른다. 그와 같은 궁극의 언어로써만 우주 언어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기(氣)는 그와 같은 우주언어로서 효과적으로 정립될 수 있다. 경험의 세계 즉 세속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우주 언어적 관점에서는 이과 기가 구분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 중심적 의념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자기 중심적 의념을 벗어난다는 말은 자신을 말살하여야한다는 말은 전연 아니다. 자신의 일회적 존재성과 우주간에서의 우일무이한 창조성을 직각하되 이 역시 우주적 현상의 일상사(日常事)로서의 한 시공의 열고 닫힘을 이르는 말임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각로의 각세는 그와 같은 넓은 의식으로 넘치는 표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3로 좌우삽화(左右揷華):좌우에 꽃을 꽂다
<제3로> 제설
'좌우삽화'란 좌우등산식의 자세와 맨 끝의 수공동작(收功動作)을 표현한 말이다. 꽃이란 부처의 연꽃일 수도 있고 선비의 난초일 수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꽃말처럼 열정을 의미하는 장미일 수도 있고 자족의 수선화일 수도 있으며 구석기시대 인류가 생명을 축도하면서 사지에게 바친 히야신스일 수도 있다. 꽃의 화려한 색감은 사람의 열정이나 감정 뿐만아니라 지성을 분발케 한다. 그것은 각종 동물의 화려한 깃이나 모피일 수도 있다.

 

아름답다는 것은 일반의 질채가 창조해내는 제3의 기현상(氣現狀)이다. 사람의 고운 미소 근실한 마음 씀 웃음과 춤일 수 있다. 그와 같은 것을 물채(물彩)라고 한다. 바로 손끝에 아름다운 물채를 창조한다는 말과 통하는 것일 것이다. 좌우란 사람의 모든 주변을 의미한다. 어느 곳에서나 아름답고 활력있는 기를 발현하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한편 아름다움이란 질채 궁극의 성취이다. 나의 좌우의 기를 긍극의 선미함(善美)으로 경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좌우의 손에 아름다운 꽃을 한 아름씩 받쳐 들고선 모습은 그 스스로 미려할터이다. 나아가 그 꽃은 자신이 소망하는 어떤 대상에게 바치거나 보여주는 의미를 내포하므로써 꽃의 의미를 확충하고 있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며 회화설(繪畵說)의 미목(美目)이나 문명(文明)과 문채(文彩)의 의미가 역시 그 밖에 있지 않을 것이다. 기는 힘에 관계하는 것이지만 기공은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하는 경이로운 의외의 역설로서 새로운 경지를 말하고자 하였다고 생각된다.

<제3로> 서
<발력근신(拔力伸筋)> 두 손을 하늘로 올려 옥 기둥을 희롱하듯 하고 두 손을 왕래(往來)하여 땅을 흔들 듯 한다. 기운과 숨을 가득히 머금고 근골을 강장하게하고 음양의 순역의 작용으로 절기(節氣)를 맞이한다. 360마디를 펴고 열어 기혈이 화평하게 인력(人力)을 스치게 한다. 하늘 땅의 기상으로 태양을 옹위(擁衛)하고 봉황이 구름 처럼 날개를 펴 해를 막는다.

拔力伸筋
兩手擎天賽玉柱 兩手往來似 地
提滿氣息壯筋骨 陰陽順逆 節氣
伸開三百六十節 氣血和和過人力
乾天坤地擁太陽 鳳凰展翅雲遮日

<제3로> 서의 음미
'발력근신'이란 힘을 일으키고 근육을 한껏 편다는 뜻이다. 근육을 편다는 것은 나의 내부의 힘을 발출하여 싣는다는 의미가 있다. 힘을 일으키는 이유는 나 자신을 전체로서 나의 기(氣)로 힘의 형태로 전환하여 하나의 경험체로서 다루기 위한 기본 공작과정이다. 가공이란 기와 힘 사이의 교환 변전을 통하여 구현되는 기의 작용을 체험하고 이를 통해서 나의 기를 진단하고 원활히 하고 나아가 기의 본질을 순정하게 정화하여 기의 작용을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발력근신은 여타 각로의 동작에서도 그 기초적 과정이 된다.
기는 힘의 도선을 타고 조성된 공강을 통해 유동 표출될 수 있으므로 발의 자세와 손의 동작을 통하여 힘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이 구조를 통해 기가 발출된다. 손을 올리는 동작은 자아의 중심에 있던 기를 끌어 올려 팔과 손의 직경 공간에 머무르게 하고 그 손을 움직여 나의 기에 파동과 쇄신을 주려는 것이다.

 

이 때 나의 중심을 벗어난 기는 기 자체의 중심과 나의 육질의 중심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지니게 되고 이 거리의 간격 사이에는 힘으로 조성된 공로(空路)가 조성되는데 이 공로는 자연적 상태하에서는 기가 다시 나의 내부로 틈입하여 중심을 지향하고자 하는 힘으로 넘친다. 자아의 내에 갇히어 있던 기는 그 중심을 벗어나면서 원래의 기상을 회복하고 육질화 되었던 기 내부의 오염을 털어내게 된다. 힘의 공로를 타고 육체의 계선에 집결한 기는 힘을 정지하는 순간 경계를 넘어 원기와 교환된다고 볼 수 있다. 그 공로 개척의 수단이 바로 힘의 발출일 것이다.

 

손의 그같은 의도적 형질(形質的) 동작은 그 원형의 기를 움직이고 다루어 기의 내부에 파동을 전달함으로서 기이 본모습을 회복하게 하고 최종적으로 기의 내부를 순화한다. 이 순화된 기를 힘의 공로를 통해 나의 내부 심처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호흡이다. 즉 호흡으로 열리는 호흡근육의 육로를 통해 나를 중심한 허령한 원기가 나의 중심으로 다시 진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존재의 내외에 기적균형(氣的均衡)이 수행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하지에서 발출한 근육의 힘으로 전환된 기가 다시 손동작을 통해 팔근육의 육로로 상승해 기의 쇄신 작업을 지속하게 된다. 기는 힘으로 교환되는 것이므로 힘의 발출 기제인 근육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양을 옹위하고 봉황의 날개를 펴듯이 해를 막는다는 것은 나의 기가 자연의 거대한 기의 일부이며 또 그와 동질체임을 인식하는 동작으로서 그 상상을 초월하는 대담한 의의와 스케일을 지적한 말이다.

 

절기를 말하고 360 마디를 열라고 한 것은 나의 전신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기를 영합 일치하려는 의식이 필요함을 말한 것이다. 사람의 골격의 마디들은 근육으로 움직여 기의 모양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의 양식이다. 기혈이 인력(人力)을 스치게 하라는 것은 바로 골격으로 조성된 기하학적 형상의 내부를 육질의 힘으로 충만하게 하여 그 내부에서 기를 힘으로 전환하여 수용하고 다루어야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기와 기들은 당연히 교류할 수 있다. 인체에 깃든 기들은 육체가 지니는 도형적 기하구조의 흡인력에 의해 수용되고 근육의 힘으로 유동할 수 있다. 기가 육체에 깃듦과 근육을 타고 유동하는 움직임으로 스스로 순화되면서 동질의 외기와 교류 유통할 수 있다. 무한한 외기는 내의 내기를 따라 나의 기로 수용될 수 있지만 근육의 힘으로 내면 확장된 공간의 크기에 따라 그 수용의 정도가 정해진다.
내면확장공간이란 근육의 외연의 크기를 말함이 아니고 근육의 내부의 질적 균제도를 말한다. 체내의 산만한 질체 입자들을 일정한 계통과 계선으로 정돈함으로서 기의 공로가 활성화되며 열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길이나 통로란 역시 결국은 힘의 작용이다.

<제3로> 통설해의
<제3로>는 육체 내부의 기를 힘으로 전환한후 이를 좌우로 운동함으로써 나의 원기 내부의 좌우유동성을 활성화하는 기 작용론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기의 좌우 이동적 운동시에는 기의 수평적 이동에 따른 상하 위축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등산식 자세를 취할 때 다리 근육의 힘을 강화하여 전환기의 역량과 기하학적 외선의 팽만도를 유지-강화할 필요가 있다. 발 -다리 근육을 한껏 열어 기의 착근성을 높이고 기적 인력을 강화해야한다는 것이다.

 

기는 힘으로 표현되고 그 힘의 극한적 모습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 공기중이나 우주공간에서 물이 둥글게 엉기는 것은 그와 같은 기의 형상이루기의 도형적 궁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는 근육과 힘줄의 육로를 통해 이동하지만 이동 전후의 모습은 언제나 궁극형인 원형이다. 그러므로 그 궁극형상에 가까운 기공 동작으로서 기의 원상과의 일치도를 더할 수 있다. 우등산식에서 손의 밀침이 그 한 극한이며 고개의 돌림이 또 하나의 상대 극한이다 이 양극한의 사이가 긴장된 힘의 파동으로 연결되고 충만해질 때 기는 그 원형을 잘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동작의 기하형과 그 기하형 내부의 힘의 유동이 미미할 경우 기는 나의 몸의 내부로 잠복하여 육질화하거나 아니면 나의 몸 밖으로 일시 벗어나서 유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의 이동과 운동은 새로운 쇄신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육체와 힘을 통해 나의 기의 중심을 조영해두고 이를 견지하려는 노력은 불가결하다. 이를 집중(執中)이라고 한다. 집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집중의 힘은 내부의 중심에서 육질을 이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외부선형의 도형적 완성도와 긴밀도를 더하는 것이다. 사람의 지체의 힘을 일정한 방향으로 발출하는 것은 사실은 원형의 기의 도형적 직경의 크기를 확장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 확장된 직경의 외연은 대개 사람의 체절의 마지막 마디의 힘과 모양 위치에 의해 결정되므로 체절 끝마디의 닫고 열음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중심의 힘의 크기와 지엽말단의 한계표현력의 크기는 비례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체는 대소의 원형의 무수한 기권(氣卷) 조직의 점철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동체와 지체를 구성하는 원형기권은 디스크의 형태로 존재할 것으로 상정된다. 기는 그 원형의 외선과 내부의 공로조직을 통해 유통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컨데 기공의 동작이 그 방향에 따라 최선의 기하형이 되도록 하여야한다는 의미이다. 공기가 가득 든 풍선의 외연선과 같은 충만함이 동작의 범주선에 표현되어야 한다. 그 충만함의 정도는 바로 기의 외공간성을 넓혀주고 기의 활력을 더욱 강화해줄 것이다. 근육의 충만함으로 발출되는 근력은 그 긴장력의 형태도 역시 원(圓)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일반의 경험적 운동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결에 던져진 힘은 원형이 복수의 힘의 파동을 이루며 나아가는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근육의 힘은 던져진 힘이 아니고 조성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작용의 물결로 그 기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 조성된 근력 자체가 이동하는 것이므로 힘의 질적이동이다. 따라서 원형으로 조성된 힘은 그 원형의 내부에서 다른 힘의 유인자(誘引者)에 의해 이동해 갈 것으로 보인다. 그 제1의 유인자는 생체구조상의 조직계선일 것이고 그위에 힘 스스로의 이동력을 산출함으로서 그 이동을 촉진하게 될 것인데 조직계선의 이동선은 경락의 이론에 따라 항시 흐르는 기의 상류(常流)를 이미 형성하고 있으므로 그에 새로운 쇄신을 가하는 기공의 힘의 파동은 그와는 다른 계통의 기제를 통해 기존의 경락선 위에 영향을 준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힘을 쓴다는 것은 근육의 긴장을 의미하고 근육의 긴장은 근육의 팽만을 의미하는데 기하학적으로는 원형적 본질성을 강화함으로서 근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힘 자체는 근육 내부에서 원형의 운동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기는 이 원형의 운동성에 탑승하여 파동을 형성할 수 있으므로 경락과 다소 다른 새로운 형태의 운동성이 가능해진다. 움지임 보다는 자세 폼 같은 부분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행공(行功)으로 조성되는 기파동(氣波動)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운행경로를 생각해보면 인체에서 적어도 머리 가슴 배 부위에 3개의 기의 작용의 범주를 나타내는 원형중심권이 복합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사지에 다시 복수의 작은 중심권이 있어 지체별로 장방형의 원형중심권에 통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들 중심권이 발로 이루어진 하부기단과 손으로 구성되는 상부기단으로 일차 통합되고 교류하면서 상하기단의 접점인 심위(心胃)하단의 간극을 통하여 내면화하고 상하 수직 타원의 내기중심권을 구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끝에 머리의 상부 중심권이 위치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들 기파동으로 일어난 개개의 원형 중심권은 서로 내접원의 모습으로 일부 중첩된다고 생각되는데 그 중첩되는 양쪽 접점이 발출하는 평행공선의 안쪽을 따라서 기는 상하로 이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슴하단에서 상하좌우의 기파의 공로가 만나서 직립의 힘에 의해 상하 방향의 거대한 직선기공로(直線氣空路)가 형성되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 직선기공로는 상부는 두정골로 막혀 내부 유통을 촉진하고 하부는 열려 기의 외부융통을 이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임맥(任脈)의 말단인 입(口脣)은 하양음(下兩陰)에 속하는 별지(別枝)이며 척추의 하단 돌기(突起)는 독맥(督脈)의 상단인 두뇌의 별지이다. 기는 이 양대 경락의 줄기위에 새로운 기의 파동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즉 기공의 기파동은 인체의 경락의 구조와 별개의 차원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교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3로세
제1세-쌍수부거 양각병립(雙手扶鉅 兩脚竝立)
두손을 힘차게
들어올리고
두 다리는 나란히 선다.
먼저 쌍축세( 蓄勢)로 정법(正法)으로 선다.
눈은 오른 쪽을 주시한다.(11도)
다시 오른발을 열어내밀고
우등산식(右登山式)을 이룬다.
허리에서 두 주먹을 손바닥으로 펴고 걸음에 따라
장단(長短)을 나누어 오른쪽으로 밀친다.
손바닥을 내밀 때 눈은 돌아와 왼쪽을 주시하며
호흡은 12도와 같이 한다.
다시 두 손바닥을 오무려( ) 주먹을 쥔다.
돌이켜 다시 오른 발에 무게를 두고
11도와 같이하고 호흡을 들이킨다.
한번 열고 한번 거두어 8차례 반복하고 그친다.

제2세-선인지로 기마곡슬(仙人指路 騎馬曲膝)
선인이 길을 가리키고
기마(騎馬)가
무릅을 굽힌다.
제1로와 정반대의 과정이다.
왼발을 열어
왼 손바닥을 밀친다.
시선은 반대로 왼쪽으로 한다
13도 14도와 같다.
연습횟수와 호흡법도 같다.

제3세-단수과뇌 핍기실복(單手過腦  氣實腹)
한 손이 머리(腦)를 지나며
기를 제압하고
배를 실(實)하게 하다
좌우 다리는 옮겨 열어 (移開)
八자가 되게 한다
왼 주먹을 높이 들고
오른 주먹은 떨어뜨린다.
오른 주먹을 반대로 올리고
(16도)와 같이 한다.
호흡은 자연에 맡긴다.

제4세-수조포협 곡슬구각(垂釣抱脇 曲膝句脚)
낚시를 드리워
가슴에 안고
무릅을 굽히고
다리를 굽힌다
오른쪽을 향해
우칠성보(右七星步) 자세를 한다.
왼 주먹은 높이 들고 오른 주먹은
가로로 복부에 막듯이 붙인다.(橫 )
(17도)와 같다.
전신을 아래쪽으로 걸터 앉듯 하고( 下)
왼 주먹은 곧게 오른발을 향해 뻗는다.
잠시 자세를 정돈하고 18도 같이 한다.
상하로 8차례 반복한다.
몸을 올릴 때는 들이마시고
내릴 때는 내쉰다.
8차례 행한 후에 몸을 왼편으로 돌려 19도같이 한다.
자세는 걸터앉은 자세로 역시 8차례 행하고 그친다.

제5세-쌍수교합 수공제기(雙手交合 收功提氣)
두 손을 합쳐
공력을 겨두고
기력을 높인다
19도의 칠성보에서 등산보로 바꾼다.
왼쪽 장심(掌心)이 하늘을 향해 올려
머리와 나란히 한다
오른쪽 장심도 올려 왼편 어깨에 붙인다.(20도)
호흡의 조화를 이루고
정지하여 오래 서있을수록 좋다.
힘이 이완되면 방향을
바꾸어 대조되게 하여 머무른다
(21도)

<제3로> 각세분석
두 손을 힘차게 끌어 올리는 것은 에너지화한 기를 두 손으로 다루어 거두려는 동작이다. 오른 발을 열어 우등산식 자세를 하고 두 손을 미는 것은 기의 영역을 우측으로 최대 확장하려는 기 영역 개척의 몸짓이다. 좌등산식을 통하여 역시 좌측으로도 확장한다.
칠성보의 자세는 생성된 힘기를 팔로 안아 다지는 의미를 지닌다. 힘기의 내면에 선의의충격과 파동을 주어 확장된 기의 공간을 활력있게 한다. 역시 좌우 양방향으로 시연한다.

 

다시 좌우에서 확장되고 활성화된 기를 동체부로 거두어들이기 위해 좌우 등산보 자세에서 두 팔을 굽혀 들고 장심을 상부로 열어 긴장된 기를 스스로 순화롭게 한다. 이들 전체 과정에서 기의 드나듦과 근력과 기와의 누차례에 걸친 전환과정에서 체내에 상당한 쇄신의 충격이 일어난다. 그 충격이 거친 호흡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최후의 수공자세를 오래 견지하여 호흡을 안정한다. 각 로와 로 사이의 수공자세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다른 로로 행공하는 것은 그 가중된 충격으로 상당한 생체적 무리가 수반될 수 있으므로 유념해야할 것이다.

 

제4로 고수반근(枯樹盤根): 마른 괴목 튼튼한 뿌리처럼
<제4로> 제설 - 모든 힘은 발에서
'마른 나무 틈실한 뿌리'란 기와 생체사이의 관계를 직시할 것을 촉구하는 말이다. 물론 모든 질체는 이미 스스로 일정한 영역의 기를 보유하는 것이지만 그 비생명질체의 기란 그저 존재하는 기일 뿐이다. 우주 스스로가 이미 기이지만 그 기의 존재 자체가 우리들의 세계를 새롭게 하거나 적극적으로 변경하지는 못한다.

 

이때 튼튼한 뿌리란 나의 기의 중심이 발에 있음을 직관적으로 묘사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순수한 원기는 어느 방향과 위치에 제한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체의 내기는 대지의 힘의 질서 위에 생성된 것이므로 지상의 제한을 받게 된다. 그 때 대지와 생체의 관계를 긴장되게 하여 나의 내기의 영역을 확보하는 공로현상은 처음 발의 기립력으로 출발된다. 그러므로 힘으로 활성화되는 기의 작용이란 발의 작용에 힘입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것이 "고수반근'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생명질체는 구조로서의 존재체인 육질과 그 내부를 유동하는 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기는 그 생체가 발휘하는 육질 계통의 힘의 발출형식을 타고 하나의 현상으로서 전환 표출된다. 이 때 질체자체와 기의 작용을 상정할 필요가 있게 된다. 바로 그 상호전환성을 보면 기와 질체는 동질성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마른 나무란 투보식 자세를 취하여 나의 지체를 결합하여 그 생체의 질체성을 강조하는 부분을 지칭한 말이다. 나의 질체를 중심으로 새삼 생명의 필수요소로서 기의 운용을 느끼고 감지하고 조절해야 함을 말한다. 질체 자체도 하나의 우주 원기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질체가 비록 원기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기의 운용의 공간적 중심임을 자각할 것을 말하고 있다. '튼튼한 뿌리'란 고목을 되살리는 회생력을 의미하고 나의 질체가 나무 뿌리와 같은 생명이전의 구조체 자체로서의 순수 질체적 본질에 충실함므로서 존립할 수 있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기의 작용과 운용이 바로 그 순수질체를 중심으로 수행되어야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순수질체가 기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을 말한다. 만일 이와 같은 질체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면 기공의 목표로서의 기는 육체를 초월하는 신비적인 것으로 전환하여 추상적인 일반의 무구별현상으로 우주간에 무산될 것이다. 그 경우는 종교적 성향을 띠거나 허무주의에 함몰되게 된다. 아니면 극단적인 정신 지상주의로 흘러가게 된다.

<제4로> 서
<금단원전(金丹遠轉)>느린 소가 달을 바라보듯 두 손을 내민다. 몸을 돌려 허리를 고정하고< 뉴> 가슴은 전방을 향한다. 보폭을 변경하여 교차되게 얽히게 하여 한쪽 발에 힘을 주중한다( ). 한 팔은 나오고 한 필은 들어가게 두 팔을 포갠다. 크게 멀리 몸을 돌려 두 넙적 다리에 힘을 넣는다. 기운을 정돈하여 입에 호흡을 거둔다.

金丹遠轉
遲牛望月推雙手  身 腰胸前走
偸步纏句 單膝 一出一入積雙 
遠轉須用兩腿力提氣呼吸收在口

<제4로서>의 음미 - 균질된 힘의 균형
'금단원전'이란 신선(新船)의 방술(方術)같은 이상적인 기공효과의 실현법을 말한 것이다. '원전'이란 '멀리 돌린다'는 의미인데 멀리 돌린다는 것은 팔의 근력을 통하여 기를 힘으로 전환한 후 확보된 경험화된 기의 영역을 널리 열어 넓힌다는 의미를 지닌다. 당연히 손끝을 궁극의 지점으로 인식하고 손 끝에 까지 충만하게 기의 범주를 확장하여야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손 끝을 나의 규구(規矩)로 삼아 그어지는 도형적 원의 최대영역을 의미한다. 아마 그 영역까지가 최소한의 기초적인 나의 기(吾氣)의 영역 범주일 것이다.

 

기의 영역확보는 왜 중요한가? 기는 공간의 조영술이기 때문이다. 기의 유통 공간을 넓히고 활성화 하는 것이 그 하나이며 확보된 기의 공간을 나의 힘과 질체와 넉넉하게 공유하는 것이 둘째 이유이다. 나의 몸은 절대공간의 일반 기운 가운데 영역화된 부분이므로 이 영역을 열거나 넓히려는 이와 같은 영역 확보의 기공으로서 나의 기의 영역 자체가 쇄신성을 띠어 전체적 기의 크기나 질이 개선되고 오장 육부의 운용의 힘과 질서가 원활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각 독자적으로 기의 중심으로서 독립적인 작용을 수행하고 있는 각 인체 기관들이 그 기관의 독자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관간의 기의 유통이 필수적인 것인데 기의 활성화를 통해서 그 유통 교환작용이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4로>의 기공 운용은 힘의 운동을 통해서 몸체 전체와 일관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좌우로 치중하여 선 발과 다리에 흐르는 힘의 크기와 균질한 힘을 팔에 전달하여 팔과 다리가 힘의 동질공간으로서 화합작용을 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즉 체내의 힘으로 전환된 기가 팔과 다리 혹은 복부의 어느 한곳으로 편중됨을 경계하고 온 몸에 고루 퍼진 상태에서 서서히 팔을 좌우로 확장해서 수평적 원형 공간을 상정하고 체감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전체적으로 팔길이 최대한의 원을 그리는 도형적 동선을 따라서 균질의 힘이 유동가능하도록 그 동작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4로세
제1세-지우망월 추송쌍장(遲牛望月 推送雙掌)
느린 소가 달을 보듯
두 손을 내뻗는다
왼발은 뒤로부터 오른 쪽으로 보내어
투보식(偸步式)을 이룬다
두 손은 나누어 오른 손을 길게 왼손은 짧게
오른 쪽으로 내민다.
호흡은 내뿜는다(22도)
다시 두 손바닥을 오므려 주먹 쥐고 거두어
왼쪽 허리부분에 붙인다(23도)
숨을 들이쉰다.
한번 내뻗고 한번 거두어 8차례 행한다.
즉 22도와 23도를 합쳐
양도는 역도(力道)를 다하여 행한다.

제2세-요자번신 와리포추( 子 身 窩裏抱 )
새매가 몸을 돌려
새집에서 날개치다.
오른 발을 뒤쪽으로부터 변경하여
왼쪽으로 보낸다.
투보식(偸步式)을 이룬다.
두손바닥은 왼쪽으로 내뻗는다.(24도)
숨을 내쉰다.
다시 손을 오무려 주먹쥐고
오른쪽 허리로 거두어 붙인다.(25도)
숨을 들이쉰다.
24도와 25도를 8차례 반복한 후 그친다.
제1세와 함께 좌우로 나누어 수련한다.

제3세-해저로월 곡슬하요(海底撈月 曲膝下腰)
바다 밑에 달을 잡듯이(撈)
무릅을 굽히고 허리를 낮춘다
왼발을 뒤로부터 오른 쪽으로 옮긴다.
낮게 앉은 자세를 취하여
좌반식(坐盤式)을 이룬다.
두 손바닥은 좌우를 수직(垂直)되게 드리운다.
어깨에 힘을 주어 힘차게
손바닥을 서서히 좌우로 흔든다.
모두 8차례 반복한다.
호흡의 조화를 이룬다(26도)
손의 모양은 변함이 없이하고
다만 다리만 좌우를 바꾸어
두 손을 앞에서와 같이 운동한다.(27도)

제4세-배면수첩 양폐수공(背面手貼 兩閉收功)
손등으로 얼굴에 붙이어
양쪽을 닫고
행공(行功)을 거둔다
두 다리는 나란히 선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어깨를 지나게 한다.
팔뚝을 굽히고
장심(掌心: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한다.
28도와 같이하여 호흡을 고른다.
오래 정지하여 있을수록 좋다.
본로(本路)의 행공을 모두 거둔다.

<제4로> 각세분석 - <사무사(思無邪)> <동무사(動無私)> <행무방(行無放)>
'느린 소가 달을 본다'는 것은 행공시의 팔 동작에 졸속성을 띠거나 과대한 힘을 싣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행공의 속도를 서서히 해야 함을 말한다. 1회 행공후 특히 손바닥을 거두어 주먹 쥐어 들이는 동작은 이 로의 기공 목적이 몸체와 일치된 그리고 확장된 전체로서의 기를 활성화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두는 동작은 바로 확장된 영역을 체내 일반의 힘의 형태로 수용하려는 동작이다.

 

'새매가 새집에서 몸을 돌려 날개를 드리운다'는 것은 나의 육신 형질 속에 있는 기를 그대로 넓히고 둥글게 원전하는 동작을 비유한 것이다. 나는 기의 집이며 나의 모든 동작은 기의 영역 속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기의 집 속에 들어 있는 새라고 표현하였다. 그 새집을 넓히는 동작이 원전이며 그것은 나의 기의 중심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수행하라는 의미이다. 이 때 행공시에는 나의 육체는 새인 것이며 그 지체의 움직이는 영역이 새집에 해당한다.

 

'바다 밑에서 달을 잡듯이 허리를 낮추라'는 것은 허리를 굽혀 원전하는 동작에서도 무리한 힘을 가하지 말고 균질한 힘을 유지하라는 의미이며 균질한 행공 동작의 스피드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달을 말한 것은 내 중심의 기를 말한 것으로 원전의 동작으로 얻어지는 원형기의 중심을 느끼라는 말이다.

 

손을 외반하여 얼굴에 붙이고 수공하는 동작은 새로이 확장된 기의 영역 한 가운데로 돌아와 조용히 안주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손을 외반하여 얼굴에 붙이는 것은 기의 외부로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상징한다. 내가 기 속에 깊숙히 이미 존재한다는 그런 의념을 표현한다. 이 때 자연히 충만한 순수기감(純粹氣感)을 느끼게 된다.

 

기란 그 존재적 본질이 문자 그대로 무한정자(無限定者)라고 생각된다. 아무런 사념없이 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의 기가 원만하게 그 본무를 다하게 되는 것을 흔히 느끼게 된다. 심신이 편안할 때 모든 생활이 안정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육질이 내면에 힘의 분포상 균형을 상실할 경우 그 기는 제한되게 되고 그 본래의 무한정자로서의 기능도 제한 받게 된다고 믿어진다.

 

기의 본질이 무한정자라는 것은 기가 바로 보편 일반의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와 같이 보편 일반의 속성을 강화한다면 이른바 생활력이 강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장수(長壽)한다는 것은 기의 운용을 이상적으로 수행했을 경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국내 최초의 장수 통계에 의하면 중상류층에 100세이상의 장수인구가 많다고 한다. 상류와 하류는 수치가 적었다. 일반 보편의 생활 양식이 기의 운용에 정합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것이다. 냉채류보다는 가볍게 데친 채소를 즐긴다거나 젓갈류의 선호도가 적었다든가 기름에 튀긴 음식을 기피하였다는 그들의 음식선호도도 자연과 인공의 적절한 조화와 균형이 필요함을 말해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기는 결국 자연의 정상태(正常態)를 구현하고 집약하는 의미를 지닌다. 과연 정상태로서의 기는 어떤 특질을 내포하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기공의 기초적 방침도 그 정상태를 유지하는 몸짓이어야 할 것이다. 기공의 측면에서 기의 정상태란 가장 손쉽고 명확하게는 인위적인 작위성(作爲性)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동작으로 예를 들면 노동과 오락의 중간쯤에 자연동작으로서의 기공이 존재할 것이다. 유목적적인 성격이 비교적 해소된 동작 그런 것을 작위성이 적은 동작이랄 수 있을 것이며 움직임이 비교적 단순하고 큰 것을 작위성이 적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제4로>는 특히 그러한 측면을 경험하는 동작일 것이다. 영리적 동작이 가장 인위적인 동작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행공은 행동적 무사(無私)이므로 "동무사(動無私)"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시경>>을 평하여 "사무사(思無邪)" 라고 한 것과 잘 합치된다. 행공은 시심(詩心)과 공적결행(公 決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행동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는 <<예기>>를 평하여 "무불경(無不敬)"이라하였던 셩리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제반행실행(諸行)로서의 예(禮)가 "행무방(行無放:방자함은 공경의 반대 어의)" 예는 천리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역시 행공의 원의와 일치된다. 그러므로 행공은 <사무사(思無邪)> <동무사(動無私)> <행무방(行無放)>의 3대 원칙성을 가진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제5로 야차탐해(夜叉探海): 야차가 바다를 더듬다
<제5로>제설
'야차(夜叉)가 바다를 더듬는다'는 것은 투보식 자세에서 허리를 굽혀 손을 땅에 대는 동작을 의미화한 설명이다. '야차'는 사람을 벌주거나 함부로 죽이는 귀신이지만 기의 불가항력적인 큰 힘을 '바다'는 기의 무한정한 거대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기의 크고 강한 에너지를 몸으로 느껴보라고 권하는 투의 말이다.

 

아마 한두번 쯤 혹간 두려움으로 몸을 떨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느낌이 바로 '야차'일 것이다. 또 가끔은 우리들 삶이 모래알 같은 미미한 것임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들 생명이 파리목숨보다도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런 느낌이야말로 야차적(夜叉的)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드믈지 않게 거대한 운명과 마주하고 있는 나자신을 느낄 때가 있다. 물론 운명론이란 믿을 것이 없지만 운명론자가 아닐지라도 내가 실려있는 현재의 생명이나 삶의 실상황의 본바탕에 어떤 거대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이야말로 비유컨데 '바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처음 일상에서 느꼈던 그와 같은 기감은 사실 기 자체를 우리 자신과 유리된 그 무엇으로 받아들인 경우인데 사실은 기란 우리 스스로 자신이기도 하다. 순수한 힘의 차원에서는 사람의 힘보다 큰 기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이미 기의 덩어리이고 사람의 움직임은 그 기의 덩어리를 움직여 확장하는 기의 작용이다. 모든 일반의 기를 나의 기로 느끼고 거두어 들이려는 의지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 생체는 기를 간직하고 수용하는 그릇일 수 있다.

<제5로> 서
한 손은 엽구리에 붙이고( 肋) 한 손은 든다. 한번 올리고 한번 내리며 반복하되 양쪽 다리 대퇴골 근육에 힘을 주고 허리엔 힘을 빼어 조절한다. 제비새끼가 진흙을 물 듯이 몸을 낮추되 방촌(方寸가슴,마음)을 고정하고 입의 호흡을 일정하게 한다. 두 손을 상하로 가르되(劈) 혼신의 힘을 머리끝까지 오르게 다한다. 눈을 감고 정신을 안정하고 기운과 숨을 고른다.
一手 肋一手去 一上一下返身起
兩腿度盡腰節筋 燕兒含泥身伏底
方寸按定一口氣 兩手左右上下劈
渾身使盡過頭力 閉目全神定氣息

<제5로>서의 음미
'한 손을 엽구리에 붙이고 한 손을 든다'는 것은 내 몸을 수직체로서 하나로 인식하고 기의 높은 끝을 만져보듯이 하라는 뜻이다. 기립으로 조성된 나의 기는 머리 이 언저리에서 가장 활성화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퇴골과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에 힘을 빼라고 한 것은 나의 기를 아래에서 근육 육질의 힘으로 전환하여 그 아래 위로 유동성을 힘화한 그 기를 그대로 몸 끝에 이르게 하여 손끝으로 감지하라는 말이다.
'두 손을 상하로 갈라 혼신의 힘을 머리 끝가지 오르게 하라'는 것은 힘으로 전환된 기가 나의 몸 속에 고루 퍼져 충일하게 하라는 것이며 육체의 어느 한 곳에 막힘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나의 육질은 드디어 기의 본체로 전환될 수 있고 육신의 문법을 벗어나는 초월적 힘과 기력 즉 상상 혹은 사려와 만나는 새로운 차원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평소 어려웠던 동작도 쉽게 시연된다. 육체의 제한성이 감소되었기 때문이며 기가 지닌 일반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설명은 체감하는 나의 힘에 대한 감각의 미묘한 변화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눈을 감고 정신을 안정하고 기운과 숨을 고른다"는 것은 나의 호흡과 동작의 과정에서 그 은미한 기의 유동을 느끼라는 뜻이며 그 시점은 힘으로 전환된 기가 다시 힘의 본질을 벗어나 기로 복귀 전환되는 때로서 그러한 기제 작용 속에서 순수한 기를 직접적으로 직각할 수 있다. 먼저는 마음으로 정서로 육체에 흐르는 편안함으로 그 순서에 따라 점점 명확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제5로> 통설 해의
우주간에 가득하고 그리고 또한 내 안에 넘치는 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체험할 것인가. 오직 힘의 유동이나 그 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팔다리는 힘의 진원이며 동체는 힘의 근원이다. 팔다리로 힘을 당기고 밀어 파동을 조성하고 내 동체 속의 힘을 불러일으킨다. 힘의 변동을 감지하고 받아들이는 민감한 체험을 축적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력감을 느낀다면 이는 1)나의 내부의 기가 위축되어 있다는 의미 2)생체로서의 육신 근골이 가능상 장애가 일어났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바로 행공을 통해서 위축된 기를 전신에 고루 융통하여 활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전신을 완전히 이완하고 기 스스로의 유동력에 의지해 몸을 풀 수 있다. 그러나 이 양자가 결합된 경우라면 오로지 호흡으로 의지와 정서의 안정을 통해 그 회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행공 요소로서의 호흡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고요히 정지한 힘을 근골 속에서 이끌어 손끝으로 들어 올려 나의 기의 끝자락에 이르게 하고 다시 당기어 나의 발아래 이르게 한다. 상하로 넘나들어 막힘없는 나의 기를 확인하려는 체감을 위해서이다. 힘의 유동과 변화를 민감히 감촉함으로서 그러한 신비한 감각을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한다.
내가 서 있을 때 존재하는 나의 존재의 영해(領海) 그곳 까지가 나의 기의 영토이다. 내가 팔을 뻗었을 때 닿는 곳 바로 그곳 너머 언저리 까지가 나의 영해 기의 영토이다. 전후좌우 상하사방 구체(球體)의 공간이 나의 영토이며 내 육신의 영해(領海)이다. 이는 다름 아닌 나의 영해해역(靈海海域)이기도하다. 내 생각이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신성한 곳이다. 내 영혼의 제국인 것이다. 그 제국의 위상과 권위는 천지간에 그 무엇으로도 손상할 수 없다.

 

노자(老子)의 도(道) 그 부정사(否定詞)가 필요 없는 곳이다.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知) 같은 정신의 장이며 오직 공자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순수문헌(純粹文獻)에 실린 유자(儒者)들의 이상이 실현되는 곳이다. 나아가 그 성과로 구성되는 역사세계와 같은 것이다. 내가 보유한 영해는 일반의 공간과 같은 동질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힘으로 넘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오직 의미 있는 현상은 온전한 그 순수공간적 완전체(完全體)와 나와의 합치를 이루어내는 일이다. 나의 결단으로 그 존재의 여부를 좌우할 수 있는 절대공간이라는 의미이다.

 

나의 영해는 나의 발끝과 손끝 머리끝에 이르고 나의 호흡과 한숨이 이르는 곳까지이다. 나의 손이 흔들어 일으키는 파동이 전달되는 곳까지이다. 나의 발이 딛고선 자리에서 받치는 힘의 깊이까지이다. 나아가 아울러 나의 보폭이 움직임에 따라 나의 기의 배경공간이나 여건이 달라지고 나의 기는 그 변전되는 상황에 즉응하여 각 상황을 수용하고 융통한다.
나의 영해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므로 나의 영해해역은 거의 무한하다. 내 발걸음이 옮길 때마다 나의 새로운 영해는 개척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나의 영해를 온전히 확보함을 완성하는 일이 먼저 시급한 일이므로 나는 나의 자리에서 고요히 나의 영해를 느낀다. 그리고 나의 영해를 운용하여 누린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하다..

 

기는 사실 오랜 홍익인간 정신의 실체이기도 하다. 동이족(東夷族) 반만년의 청사를 뚫고 온 신화의 힘 바로 그 역사의 힘의 영역이기도 하다. 문화 문자를 초월하고 숨소리로 모두 만나는 영해 그곳이 나의 공간이며 우리들의 공간이며 모두의 공간이다. "내 공간으로 들어오는 자여 아무도 환영하리라. 무엇도 받아들이리라."하는 듯한 우렁우렁 목소리만 감도는 영공적영공(靈空領空)이다. 그 안에 내 육체는 편안하고 편안하다. 내 마음은 고요하고 고요하다. 그 상하사방 동서고금을 통관하여 막힘없는 실체는 성인의 과화존신(過化存神)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공간의 원래 의미를 살려야한다는 메시지는 깊은 의미를 준다.

 

우리는 <주역(周易)>의 첫 명제로서 원(元) 형(亨) 리(利) 정(貞)을 만난다. 이를 4덕이라고 하는데 이는 매우 보편적인 언어로서 이를 육화(肉化)하지 않고는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육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 나아가서는 우리의 육체 자체는 통일된 그 무엇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 통일의 장을 영위하는 신묘한 현상변화 인식의 요체는 우리가 느끼는 여러 의미분야에 유기적이며 계기적인 변화와 파동을 주는 실질적이고 유용한 구체 요건을 아는 것이다.

 

어떠한 특정한 현상이든 원(元)이란 원 관념으로는 머리를 뜻한다. 사람들 자신에게 특히 인체 가운데 머리가 주목되었던 것은 사람의 느낌과 정신이 이루어지는 중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머리를 중요한 화두로 쓰이게 되었던 것은 아마 고안의 중요성이 부각된 단계 이후의 일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元)이란 인체의 머리를 의미하는 용어였지만 이를 유의미하게 사용하는 단계에서는 마음과 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이나 정서와 생각이나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사람은 의식적인 존재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마음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원(元)은 마음이며 행동이고 인체이기도 하다. 그 문자는 시공 통합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경우 회화적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문자와는 다른 것이지만 그 당시 세상과 사물을 받아들이는 의식이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문자와 동질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들이 참고 된다. 거기 표현된 고래는 지금도 고래인 것이다. 다만 그 고래의 현재적 상황과 사람들의 받아들임은 그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 문자의 현 상황도 우리에게는 바로 원(元)이다. 단적으로 생각이나 행통의 기초나 출발을 의미하고 창조의 시작을 말 할 수도 있다.

 

<주역>은 어떤 사물을 일반적 어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의미적 통달성(通達性)을 중심으로 논의할 수밖에 없다. 한 시대의 어법이 다음시대의 어법으로 연결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그 의미적 통달성에 달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통달된 의미로 본다면 형(亨)은 의식적 행동이며 원(元)은 그 바탕의 마음이다. 리(利)는 특정한 일이며 정(貞)은 그 삶과 행동의 결과물이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일하고 영위한다는 삶의 모습이 그대로 원형리정이다. 즉 사람의 삶에 내포된 4단계의 구분되는 생활상을 특정 혹은 조건화하지 않은 상태로 그 일반 속성을 말한 것이다. 그 구체적 과정은 모두 기의 성장 소멸을 설명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기공으로 말하면 기공 자체는 원(元)이다. 의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공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과 그 형식은 리(亨)이다. 개인에 맞게 빈도와 강도를 조절하여 실천하는 것은 리(利)이다. 기공 실천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확신이나 효과 그리고 새로움은 모두 정(貞)이다
다만 그렇게 일반적인 어법으로 말한 것이라면 나머지 63괘는 왜 필요한가. 그리고 한 괘를 구성하는 음양을 나타내는 기호와 그 누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아가 왜 3개씩 조합하여 이를 배가하여 괘를 만들고 이를 다시 순열조합의 원칙에 따라 64괘로 정하였는가. 이런 문제들이 부수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이해의 과정과 기공의 동작은 일치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18로 500여세의 동작은 일련의 64개 동작계열로도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는 대목이다.

 

제5로세
제1세-단수거정(單手擧鼎)
한손으로
정(鼎)을 들다
왼발을 뒤에서 오른 쪽으로 옮긴다.
오른발에 튼튼히 의지해서서
왼 발을 발돋움하듯 올린다.
오른 손을 높이 든다.
왼 팔은 도수(刀手)로하여
팔을 굽히고
등으로 교차되게 한다.
그 뒤에 29도와 같이 한다.

제2세-곡슬박지(曲膝撲地)
무릅을 굽혀
땅을 친다
전신을 굽히고 앞에서 높이 들었던 손을
도수(刀手)로 하여 아래로 떨어뜨린다.
땅에 대고 머물러 30도와 같이한다.
다시 몸을 일으켜 곧게 세운다.
몸을 일으킬 때 오른손(刀手)를 굽게 오므린다.
등뒤로 교차되게 보낸다.
그리고 좌도수(左刀手)를 펴 손바닥으로
하고 위로 향해 올린다.(31도)
손을 올릴 때는 들이마시고
손을 내릴 때는 숨을 내쉰다.
29도 30도 31도를 모두 8차례 이어 행한다.

제3세-단추비요(單 備腰)
한손을 던져( )
엽구리(脅)에 붙여 준비한다.(備)
들어 올렸던 오른 손을
그대로 부동자세로 둔다.
두 다리를
반대가 되게 조절한다.
30도와 같이 한다.

제4세-파삼국수(把渗 水)
손을 움켜 뜬 손에
새는 물을 받다.
전신을 굽힌다.
오른 손바닥을 도수(刀手)로 변경하여
아래도 떨어뜨린다.
30도와 같이 한다.
다시 왼손을 위로 들어올린다.
35도와 같이 한다.
33도 34도 35도 식을 8차례 행한다.
손을 들 때는 숨을 들이쉬고
손을 내릴 때는 숨을 내쉰다.
그런 후에 고요히 서서 행공을 거둔다.

<제5로> 각세분석
'한 손으로 정을 든다'는 것은 힘으로 전환된 나의 기를 다루어 머리 위에 까지 확장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때 나의 힘기를 생성하고 올리는 추동력은 투보식(偸步式)의 발돋움 자세로부터 나온다. 한팔을 등뒤로 돌리는 것은 힘이 오르는 중간에서 그 힘의 유동을 방해받지 않게 하려는 순리를 위한 배려이다. 내 내부의 기는 지체로 조여져 상하로 선 동체를 타고 충일하게 기립한다. 발끝에서 손끝까지 기로서의 일관된 힘을 느낀다.
'무릅을 굽혀 땅을 친다'는 것은 들어올린 기를 다시 내리어 기의 내면을 활성화하는 첫 동작이다. 허리 굽힘으로 전신의 기는 중간 부분에서 휘어져 상하의 기 사이에 일시적인 분화의 구조를 가지면서 그 상하 유통력은 시험받게 되고 보다 활성화 된다.
같은 동작을 반복함으로서 나의 신기(身氣)는 그 존재를 드러낼 것을 요청받게 되고 자연스런 움직임을 타고 상하를 오르내리며 그 실체를 몸속에서 서서히 드러낸다. 목 등 부분이 가볍고 시원한 느낌이 오는 것이 그것이다. 음 경락과 양경락이 교류하면서 전신의 맥동이 활기차게 깨어난다. 들어올려 뻗은 손바닥 피부로 기운이 부딪음을 생생히 느낀다.

 

제6로 추창양격(推窓亮格): 창문을 밀어 달빛이 오도다
<제6로> 제설
"추창양격"이란 "창문을 민다"는 뜻이다. 이는 당연히 제6로의 좌우등산보 자세와 밀어낸 손동작을 의미화한 말이다. 생각해보면 창을 민다는 것은 외기의 맑은 공기와 태양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생체는 상시 외기환경과의 적극적 교환을 통해서만이 촌시도 존재할 수 있다. 외부의 자연적 본질을 수용하고 그와 하나됨으로서 끊임 없이 나를 쇄신한다. 나의 존재는 어느순간도 쇄신의 힘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공도 역시 받아들임의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호흡으로 피부로 그리고 내장기관을 통해 우주와 세계의 질체들을 수용한다. 그 받아들임은 자연적 섭생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모든 물정(物情)으로서의 자연의 마음 우주심 까지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육신은 쇄신된 영육의 존재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생체의 기는 외부의 기를 직접 접수해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나 신체의 각 계선에 강하게 기가 결집될 경우 그 기는 신체 계선의 미세한 공극을 통하여 융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융통의 순간이란 근육과 피부의 계선작용이 극에 달하였다가 정지하는 시점의 일순일 것이다. 그 융통력은 신체 내의 중심기의 인력을 통해 내부의 기로 영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공에서 기중심(氣中心)의 형성과 유지는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중심을 잃고 분노하는 것이 위험한 까닭이다.

<제6로> 서
<일월생광(日月生光)> 힘껏 밀어 태산을 움직일 것을 생각하되, 화평한 바람이 군마(馬)에 불어들듯 환희의 기쁨을 배우도다. 손을 돌려 황금탑을 꺾어(拉倒) 엽으로 뉘어 길이 몸 옆에 가지듯 하도다. 주색(酒色)과 재기(財氣)를 누를 수 있나니 긴 눈썹의 신선 이태선에 스스로를 견주도다. 만약 음양의 기운을 조절해 숨쉬게 될 수 있다면 하늘이 사람 몸 되고 사람 몸은 하늘과 같아지리라.

日月生光
度力推動太行山 倣學沖風馬撒歡
回手拉到黃金塔 橫 長存在身邊
能戒酒色 財氣 敢比長眉李大仙
若能調息陰陽轉 天作人身人比天

<제6로>서의 음미
"일월생광"이라 제(題)한 것은 해와 달이 빛을 발하듯이 나의 기를 발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기는 소리일 수도 있고 빛일 수 있으며 색일 수 있다. 태산을 움직일 듯이 민다는 것은 나의 전신의 힘을 기울여 미는 기분으로 행공하라는 뜻이다. 사실은 자신의 닫힌 기운을 미는 것이다. 바람이 군마에 불어들 듯이 하라는 것은 나의 육신 내부의 기를 열어 외부의 기를 영합하는 관념으로 행공하라는 뜻이다. 모든 생명체는 영합을 통해서만 산출된다. 기인 생명이 구상적인 몸와 가시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나의 육기가 외부의 대자연 우주의 불변의 원기와 교류하지 않고는 쇄신과 성장의 공업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좌에서 우로 또 우에서 좌로 행공을 변화하면서 황금탑을 꺾어 좌우로 누여 몸 옆에 가지도록 하라는 것은 손과 팔에 그리고 다리에 충만한 기힘을 실어 움직이라는 의미이다. 왜 그 같은 살벌한 무예적 용어를 쓰고 있는가 생생한 그리고 생각보다 거재한 무한한 실체감을 가지고 행공하라는 뜻에서 이다. 기공의 특장은 탈무예성에 있다. 인간의 모든 몸과 행동은 처음 생존을 위한 무기 그 자체였다. 공격과 극복의 수단이었고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행동적 설계를 수행할 여우는 없었다. 사람의 인지와 문화 사회와 정치가 발전하면서 인간은 점점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그 처음의 여유동작이 자유로운 동작으로 나타났다. 그 공격적이고 무술적 동작에서 초탈하면서 자신의 몸과의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나아가 그 화평한 몸으로 자연 우주와도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쳐 나아갔다. 주(周) 무왕(武王)의 혁명 이후 실전적(實戰的) 활쏘기가 사례(射禮)라는 엄숙한 의식으로 발전한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고대의 육례(六禮)란 사실은 그와 같은 탈무예성을 바탕으로 창조된 문화적 교양이었다. 따라서 무예적 동작이면서 탈무예적 동작의 자유로움이 있고 여유가 있고 그 동작의 하나하나에 의미가 실리고 "환희와 기쁨"으로 행공적으로 행위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기공의 유쾌성과 자유성과 의미적 상징성이 둘 아니고 그대로 하나의 혼후한 합일체이다. 의미 없는 기공은 있을 수 없고 진정 유쾌하지 않은 기공은 의미가 없고 진정 자유로운 동작을 위해 설계된 극기(克己)의 동작 아니고는 효용이 없다. 따라서 동작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실리어야하고 체감하는 힘과 기쁨이 있어야하며 일상화된 형식적 동작을 개선하는 행동적 자유의 메시지가 들어 있어야한다. 동시에 이것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일 수 밖에 업으므로 인간의 여러 역사적 동작의 원형에서 출발하여 그 동작의 경직성을 해소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의미를 실을 수 있어야한다. 추창양격의 동작은 그와 같은 기공의 본질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일상의 동작을 초월성을 위해 다소 강화한 것이다.

 

세속의 욕기를 누르고 신선의 세계를 말한 것은 창조적이고 자유의 이상을 표현하는 동작을 추구해야함을 말했다. 사람에 의해 평가되고 구애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다. 부끄러울 것도 오만할 것도 없는 행공자세가 필요함을 말한다. 그것은 당연히 아름답고 힘차며 활기에 넘치는 즐거운 그 무엇이다. 무용일 수 있고 체조일 수 있고 대화하는 자세일 수 있고 사랑하는 몸짓일 수 있으며 일하는 모습일 수 있고 가족을 지키는 행동일 수 있다. 사냥하는 역사적 추억의 동작일 수 있고 은주혁명의 승리의 동작일 수 있고 자연을 음미하고 오나상하는 모습이거나 꽃의 아름다움을 향기를 감상하고 느끼는 몸짓일 수 있다.
하늘이 사람 몸되고 사람이 하늘 몸 된다는 것은 나의 경계를 열어 대자연과 우주와 호흡을 같이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행공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바로 나 속에 갇히지 말하는 중대한 메시지를 "<추창양격>-창문을 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제6로> 통설해의
우리의 삶은 열림과 닫힘으로 구성되고 영위된다. 나의 삶은 열림이요 죽음은 닫힘이다. 그것은 우주의 일상사로서 어떤 특별한 사변 사건도 아니며 사고인 것은 더구나 아니다. 비록 야차일지라도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예외의 벗어난 존재는 아닐 터이다. 우리의 모든 동작들도 역시 닫힘과 열림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몸을 펴는 동작은 기의 열림이요 굽히거나 당기는 동작은 기의 닫힘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한 닫힘과 열림은 아니지만 닫힘과 열림을 시연하고 그 닫힘과 열림의 동작을 통해서 우리 생체는 직각적으로 그 존재의 본질을 감지하고 이에 영합하고 일치하고자한다. 나아가 그 영혼은 마음의 닫힘을 거두고 널리 널리 스스로를 열어 호연(浩然)한 그 본 모습을 회복하고 획득한다. 호연지기란 크고 넒은 기운이지만 단적으로는 열린 기운이다. 제발 나를 활짝 열라고 6로 텍스트는 말한다.

 

공자는 그 인간적 열림의 길은 서심(恕心)이라고 하였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남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은 차원에서 같은 공간에서 실질체험으로서 만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나의 영육의 질체를 열어 닫힘을 거두고 모두 하나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일은 고귀하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여는 일은 그 출발이 된다. 열인 것을 공(公)이라 하고 닫힘 것을 사(私)라고 한다. 결국 기공은 나의 몸이 공기(公器)로 재편되어 다시 태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기공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 마음과 의지를 전하고 실연하는 초월의 길이므로 신선의 길이라고 말한다. 몸으로하는 언어이며 언어를 넘은 기초적 행동이며 삶 그자체이다. 그러므로 기공은 결국 삶에 대한 직관적이고 불립문지적인 순수 통달의 기호학적 응시를 의미한다. 인생에 있어 깊이를 갖춘 그리고 진성한 울림의 응시보다 좋은 것은 없다.

 

기의 열림과 닫힘은 근육의 긴장과 이완으로 이루어지고 지체와 동체의 자세의 형상으로 이루어진다. 좌등산보자세에서 팔을 밀 때 팔과 무릅의 근육은 팽만 긴장하여 외계 계선이 강화되고 나의 내기는 외기에 대하여 극히 대립적인 자세를취한다. 그러나그 대립자세는 선의적인 것으로서 바로 직후에 근육을 이완하는 자세로 바뀐다. 이 때 외기와 내기의 계선이 느슨해지면서 양대기는 상호융통한다. 그 순간에 몸이 경쾌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는 그대로 방치하면 무용하므로 이 기를 끌어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밀어 이완된 팔을 서서히 거두어 들이고 발은 그대로 둔다. 팔을 양 가슴 쪽으로 거두면서 팔의 내선 근육을 긴장하여 45도 각으로부터 힘을 가하고 팔을 밀착하여 머무르며 숨을 들이쉰다. 이 때 발을 거두어 편안한 자세로 선다. 호흡이 다하면 팔을 서서히 내려 수공한다. 이와 같은 과정은 모든 행공에서 동일하다.

 

제6로세
제1세-왕래뉴은(往來 銀)
은기(銀器)를 가지고
노닐다( )
두 다리는 나란히 한다.
두 주먹은 끌어올려
사평식(四平式) 같이 한다.
눈은 전방을 보되
36도와 같이 한다.

제2세-추산파목(推山把木)
산을 밀쳐
나무를 잡다
앞의 행공식에 따르되(36도)
먼저 오른 발을 열고 다시 왼발을 앞으로
내밀어 좌등산보(左登山步)를 이룬다.
두 주먹을 두 손바닥으로 바꾼다.
허리로부터 왼쪽 방향으로 밀쳐낸다.(37도)
숨을 내쉰다.
다시 두 손바닥을 봉수(封手)로 오므리고
먼저 왼발을 거두고 다시 오른발을
거두어 되돌아온다.(36도)
숨을 들이쉰다.
반복하여 8차례 행공한다.

제3세-제망등력(提網 力)
그물을 들고
힘차게 올리다.
위의 자세를 돌려
오른 쪽으로 향한다.
바로 먼저 왼발을 열고
오른 쪽 발을 내딛어
우등산식(右登山式)을 취한다.

두 손바닥은 왼쪽으로 밀어낸다(38도)
숨을 내쉰다.

제4세-영풍쌍장(迎風雙掌)
두 손바닥으로
바람을 맞이하다
위의 자세를 이어 손바닥을
봉수(封手)로 바꾼다.
먼저 왼쪽 발을 후퇴하고
다시 오른 쪽 발을 후퇴한다.
다시 36도로 돌아간다.
숨을 들이쉰다.
두 방향으로 8차를 반복한다.
바로 서서 행공식을 거둔다.

<제6로> 각세분석
"은기를 가지고 논다"는 것은 기를 은빛으로 인식하라는 의미와 은처럼 가벼운 육감으로 통하라는 의미를 전한다. 은은 반짝인다. 그리고 맑고 신비한 색조를 지닌다. 그리고 거울같은 자신 스스로의 비춤을 이룬다. 그와 같은 직감의 질체를 인식하고 몸속의 적절한 무게의 자유로운 힘으로 주먹에 힘을 거두어 가슴 아래로 한껏 올려둔다. 은기를 가지고 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두 손으로 은쟁반을 들어 올려 가슴 앞으로 들듯이 하라는 뜻이다. 상상 만으로도 눈부신 기를 의식하고 느끼게 된다. 그 은빛에 아(我)의 힘 타(他)의 기(氣)를 실어 올려본다는 의식을 말한다. 애 이런 의식이 필요한가하면 함으로 발출되는 기는 나이 동체나 자체 밖으로 원형으로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나의 손에 은기가 들린 것 같은 미세한 기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지칭한다.

 

"산을 밀쳐 나무를 잡는다."는 것은 등산보에서 밀치는 동작을 표현한 말이다. 산을 밀듯이 하라는 말은 제한 없는 나의 의식의 거대함으로 힘을 기울여 밀라는 말이다. 사실은 기립으로 조성된 나의 상하로 기립한 기의 타원 기둥을 의식하는 것이다. 나의 기 속에서 나를 미는 것이다. 다만 주먹이 허리로 돌아올 때는 나무를 잡듯이 움키어 들여오라는 의미는 밀침 동작 후의 이완과정에서 영입한 동형의 외기를 거두어들이는 과정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평식의 허리로부터 앞으로 나란히 내민 주먹에서 장법으로 바꾸어 밀고 다시 악권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물을 든다."는 것은 좌우로 방향을 바꾸는 과정에서 힘의 배분을 말한 것이다. 그 전환동직의 순간에도 팔과 주먹에 실은 힘을 유지하라는 말이며 동시에 지면에서부터 손 팔에 이르는 충만한 기를 육감으로 직각하며 수행하라는 의미이다. 문자 그대로 물 속에서 고기가 가득 든 그물을 들어 올려 옮기는 감각으로 동작을 옮기되 그 그물 끝에 뛰는 물고기의 옴직임의 파동 같은 기의 충동을 느끼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내 손이 기와 힘의 파동으로 떨림을 표현한 말이다. 그물도 역시 나의 기이다. 둥산보에서 일어서며 방향 전환 시에 낮추어진 기가 일어섬을 의식하라는 말이다. 기는 대체로 나의 전체적 자세와 유사한 형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손바닥으로 바람을 맞는다."는 것은 제2의 자세에서는 손밖으로 기의 넘나듦을 느끼게 됨을 말한 것이다. 행공 중에 실제로 손바닥으로부터 쏴아 하는 듯한 청량감을 느낄 것이다. 아마 손이 시릴 수도 있다. 그 느낌은 뻗어내는 손바닥의 스피드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기화(氣化)한 손에서 직감하는 것이다. 기의 내부 공로가 장심의 <외표 중앙>으로 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공로선>의 선단인 <외표 점>은 상시 외기와 유통하는 도선이 된다고 생각한다.

 

제7로 위사헌저(韋蛇獻杵): 부드러운 뱀이 방패를 들다
<제7로>제설
"부드러운 뱀"이란 좌우로 벌린 두 팔을 상징한다. 이 때 뱀은 나의 육신 내부의 순수한 기를 힘으로 전환하여 이를 두 팔에 올렸을 경우의 감각을 말한 것이다. 이 때 양 팔이 힘의 기질(氣質)상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로 인식한 것이다. 방패를 든다는 것은 그 기에 근력을 더하여 무형의 기를 근육으로 느껴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근육과 힘과 기 사이의 자유로운 교환과정에서 감각과 비 감각을 넘나드는 기의 출입을 의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방패를 든다는 것은 "은기를 든다"는 것과 같은 의념이다. 손에 형성된 기의 원형기장(圓形氣場)을 힘으로 느낌을 말한다. 결국 민감한 감각으로 기의식을 유지하며 행공을 시도하라는 뜻이다.

 

사람의 몸은 사실 만물로 비유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만물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 몸은 흙이며 물이요 나무이며 쇠이며 바람이고 불이다. 힘은 호랑이이며 소이고 그 모양은 새이며 물고기이며 말이다. 그 앉고 선 모습은 산이며 밭이요 나무이며 잎이다. 그들의 말은 바람이며 물소리이고 만물에 부딪는 마찰음이기도 하다. 사람은 결국 모든 만물을 내포한다. 즉 기공언어로서 절실히 감각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만물 일반성을 자유로 체현하여 드러내고 다루어 나의 본체를 직각할 통로를 열수 있다. 나의 몸은 그대로 우주적 혹은 자연적 현상이며 사건이요 아무런 구별이 필요 없을 그런 순간과 공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직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 경우에는 다만 우주적 조화의 길을 따라 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호흡도 발놀림과 팔놀림도 자세도 그대로 우주자연의 일반현상으로서 우주와의 균형과 합일 조화됨을 어기지 않으면서 우주에 넘치는 음향이나 파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우주가 균형력과 조화력을 힘의 원천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파동이란 바로 그 균형력의 넘나듦일 것이다.

 

우주의 균형력에 가해지는 그러한 파동이야말로 우주의 최대 활력이며 미학일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이 저리 높은 것도 필리핀 구암섬 부근의 해구가 저리 깊은 것도 남극과 북극이 저리도 시린 것도 적도가 그렇게 뜨거운 것도 다 그런 형평작용으로서의 기작용 결과이다. 만일 그 산과 해구가 없다면 냉기와 열기가 없다면 지구구체는 기에 있어 무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인간의 실존성을 강화하려는 기공은 그와 같은 균형력의 한 파동적 공간 작용일 것이다. 사람의 심의로 따지면 산과 해구는 사람의 높은 이상과 욕망과 같은 기에 작용하는 힘일 것이다.

<제7로> 서
<배력성공(排力成功)> 기운을 올려 척추를 세우고 근골을 식씩하게 한다. 동작을 열고 합치고 거두고 닫되 난새(鸞)와 봉황새(鳳)가 춤추듯이 한다. 대퇴골 다리를 버티어 서고 손을 합쳐 충만한 힘으로 들어올린다. 가슴을 펴고 엽구리를 튼튼히 하여( 肋) 뇌고(雷鼓)같이 한다. 효심을 모으듯이 하되 호랑이를 잡을 힘을 얻고자하고 사지(四肢)를 힘차게 행공(行功)하되 근고(謹苦)히 하도록 한다.

排力成功
提氣立脊壯筋骨 開合收閉鸞鳳舞
撑腿合手 滿力 挺胸 筋似雷鼓
欲得存孝搏虎力 四肢勤功要勤苦

<제7로서>의 음미
"배력성공"이란 육신의 중심에 존재하는 기를 힘의 발출을 통해 전신에 고루 펴서 끌어 올려 행공을 수행하라는 의미이다. 먼저 기를 펴기 위해서는 전신에 무리 없이 통일된 긴장력을 주어야 하고 이 전신적 긴장은 기의 유통 경로를 열어주게 된다. 바른 자세로 곧게 서는 데서 나온다. 이는 주로 안정된 자세로서 가능하므로 다리를 다소 벌리어 서거나 특수한 입세를 취함으로서 역시 가능해진다. 기의 공로를 연 후에는 발쪽에서부터 근력을 통한 이의도적인 힘의 발출을 통해 근력의 흐름을 일으켜야한다. 모든 존재의 실체들은 균일화 하고자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리의 단순한 동작에서 나오는 힘은 상승해 움직이면서 내 중심의 기를 흔들어 유동하게 하기에 족하고 충분히 흔들린 기는 자연히 힘의 공간을 타고 충분히 퍼지게 된다. 자신의 기에 일종의 직접적 파동을 주는 행동이 입세이후의 가역(加力) 자세이다. 힘이 전신에 고루 퍼지는 순간 나의 기는 새로운 쇄신의 차원에 들어선다. 그런 이유에서 먼저 척추를 바로세워 근골을 씩씩하게 하라고 하였다. 바른 자세는 기의 상하유통을 가능케하는 기의 간선(幹線) 공로(公路)를 구조적으로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봉황과 난새가 날개를 펴듯이 하라"는 것은 팔을 벌리는 동작에 장중한 힘을 싣고 기의 흐름에 따라 행공하라는 의미가 된다. 날개는 바람을 타는 동작이므로 손동작이 내부의 기의 상승하는 흐름 즉 상승기류의를 감각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 때 기류를 의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는 감촉에 따라 상응하여 적국화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슴을 펴고 허리를 튼튼히 한다는 것은 허리에 장중한 기력을 싣는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이 때 근고(勤苦)히 하라는 것은 근육의 힘을 극대화하여 기를 최대한 활성화하라는 뜻이며 분산된 확산기가 중심작용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므로 허리의 자세는 중요하고 특히 "뇌고"처럼 팽만한 근기를 실어 상대적으로 강고한 힘으로 기를 집중되게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팽만된 나의 지체와 동체는 그 외부에 거대한 기장(氣場)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 형상은 크고 자유롭고 다양하기 때문에 난새와 봉황으로 비유하였다.

 

보세와 근력으로 인해 그 힘을 타고 확산된 기는 크게 활성화된 동세를 유지하면서 직선화된 척추의 근로를 타고 뇌고(雷鼓)처럼 팽만된 허리 중심으로 지향해 모여 융통하게 된다. 평상시의 기의 중심보다 한껏 활성화된 기의 유동이 새로운 역동적인 중심공간을 형성하면서 주변의 함의 관계와 수위를 갱신하며 새로운 동적인 기의 구조가 일시적으로 형성된다.
결국 힘에서 나오는 기의 발흥은 다리에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확산되게 되는데 이 때 팔을 중심한 근력의 변화로 다리에서 올리온 상승기에 역파동을 주면서 허리부분의 체중과 결합한 결함한 근육력의 강장함이 그 우세한 힘의 집적력으로 그 상하의 기를 조절해 상충성을 해소하고 기의 중심역을 수행하게 되면서 상하의 상충력은 순기(順氣)로변화한다. 이 쇄신된 기는 근육경로를 타고 유동해 퍼지면서 극적인 활동성을 띠게 된다.

 

그 기는 순기화하는 순간에 신체의 외부한계선을 팽만하게 구획하던 근력선의 이완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근육의 순간적인 이완선을 따라 투명화된 육신의 계선을 넘나들며 외부의 일반기와 교류하면서 2차적으로 쇄신되는데 그와 같은 2차적인 외부 교류성 때문에 중심의 인력을 강하게 유지하는 일이 그 선행의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다리와 허리 동체의 중후한 인력으로 당겨흡입된 2차기 일단 그 끄을림에 의해 하복부의 최저부에 부딪어 복강의 하부에 파동을 전한 후 단전중심의 너른 공간에 내기와 융합하여 안주하게 된다고 생각된다. 그 공간의 상부를 고항(膏 )이라고 한다. 물론 기존의 내부기는 순정한 외부기와 충돌될 일은 전연 없다.

 

<제7로> 통설해의
맹자는 의지(意志)가 기를 움직이는 경우는 10에 8-9요 기(氣)가 의지를 움직이는 경우는 10에 1-2이라고 하였다. 그같이 기는 힘과 교환될 뿐 아니라 우리의 정서 정신과도 가장 잘 교환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사람이 마구 달려간다면 그 달려가는 것은 기(氣)이며 달려감으로 인해 나의 기는 불안정하게 파동친다. 이 기의 파동은 의지에 작용하여 마음이 급해진다"는 예를 들고 있다. 이러한 예에서 보면 힘과 동작이 명백히 기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맹자가 중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그 기는 역으로 정신과 의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하고 있다. 즉 힘기 정신과 기의 3자 사이의 융통성을 그가 주목한 것이다.

 

사실 의지와 정신은 나의 신체를 움직이는 신호체계이기도 하다. 이 신호체계는 기의 상응으로 실현되어 경험화되고 현상화되어 드러나므로 기와 정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동시에 기 자체는 무형 무상의 정신과 동질적인 화학적 기제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서 오직 중심화의 힘으로 조정되는 존재이다. 환언하면 균형을 이루고자하는 근본적 속성이 모든 차원의 힘의 근원이며 그 원리에 따라 모든 유동과 변화가 초래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는 맹자의 설명에 의하면 빈곳을 채우려는 성향으로 인한 것이다. 빈 곳을 채운다는 것은 물이 균형된 수위(水位)를 회복하려는 영원한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바로 그 속성이 인간의 마음의 속성과 통한다고 보았으므로 맹자는 이를 성선설의 기초논리로 이용하고 있다.

 

마음이 화학적 연변의 가능성의 결집체라면 기는 물리적 변동의 가능성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의 정체는 변동을 통해 동적인 균형을 이루는 데 있고 마음의 실체는 혼란을 이기고 고요한 편안한 정체(停滯)에 있다. 마음은 물과 같아서 그 안정된 수면의 맑음은 눈으로 투명하게 비치어 나타나고 유동중의 기는 바람 같아서 그 자유롭고 활발한 유동은 내부에서 육체피부로 부딪어 나오는 탄력적 질감으로 감각되며, 그 공간적으로 활성화된 피부진피를 거쳐 체표면의 외부로 반투명 반사광으로 배어 나타난다.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할 때 마음은 그 자세선의 최외부(崔外部) 긴장 부위에 작용하여 민감하게 변환하기 때문에 기와 마음은 근육계를 매개로 상호 직결되는 기제(機際)를 형성한다. 활성화된 공간이란 투명한 기의 공로가 확충된 것을 말하므로 시각적으로 밝게 된다.

 

제7로세
제1세-흉전분수(胸前分手)
가슴 앞에서
손을 나누다
양쪽 다리를 좌우로 열고 옮겨 딛어
八자형을 이룬다.
발은 서로 상대가 되게 하고
두 손바닥은 가슴 앞에서 모아
배불상(拜佛狀)을 이룬다.
호흡을 조화되게 한다.
기운은 단전에 모은다.
(39도)

제2세-이랑단산(二娘 山)
두 사내가
산을 밀치다( )
39도를 따라 두 손바닥을
좌우를 향하여
부드럽고 견인(堅靭)한 맛으로 갈라 연다.
40도와 같이 하고 숨을 들이 쉰다.
제3세-합수거정(合手擧鼎)
손을 합쳐
정(鼎)을 들다
40도의 보폭 자세를
변경하지 않고
두 손바닥을 좌우로부터
위로 들어올려 손뼉쳐 합친다.(拍齊)
41도와 같이 하고 숨을 내쉰다.

제4세-기마수폐(騎馬收閉)
기마(騎馬) 자세로
거두고 닫는다
41도에 이어서 두 손바닥을
위로부터 다시
아래로 나누어 연다.(42도)
숨을 들이쉰다.40도와 같게 한다.
39도에서 40도,
41도에서 42도를 한 차례로 삼아
모두 8차례를 행한 후에
바로 서서 행공을 거둔다.

 

<제7로> 각세분석
기마자세에서 올라오는 힘을 좌우로 나누어 팔에 힘껏 거두어 싣고 다시 서서히 가슴 앞으로 끌어 손을 모은다. 배불상이란 손을 모은 모습인데 경건한 심의를 표현한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으며 꼭 손바닥을 꼭 맞닿도록 합칠 필요는 없다.
두 사내가 산을 밀친다는 것은 두 팔을 좌우로 갈라 거대한 힘을 의식하며 밀어내는 것을 말한다. 부드럽고 견인하게 밀어낸다는 것은 급작한 힘을 가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다.

 

손을 합쳐 정을 들다라고 한 것은 지속되는 기마자세로 팔을 좌우로 밀친 상태에서 실려진 힘을 그대로 유지하며 들어올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손바닥을 소리나게 부딪되 다소 둔탁한 소리가 되도록 힘을 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최상부에서 합친 상태에서 역시 그대로 최종적으로 극한의 힘을 실어 유지하여 전신에 힘이 충만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양팔의 수평으로 가해진 발출된 힘 상태에서 들어올려 손벽치는 행공까지는 혹 힘을 이완할 수 있으나 그 경우 합친 직후 최상의 용력상태를 잠시 손끝까지 주어 유지해야 할 것이다.

 

18로 각세를 행공하면서 시종 인식해야할 일은 기의 정체성에 대한 해석의 길을 찾고 또 기존의 기관념(氣觀念)을 쇄신하여 나아감으로서 실체접근도를 높여야한다는 것이다. 힘으로 전환된 체감을 통하여 기를 느끼되 최종적으로 순수한 기 자체를 느낄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기는 그 순수한 본질 자체로서는 경험적으로 다루거나 실감하기 어러운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인 기판단감각(氣判斷感覺)으로 인해 기의 실체 이해가 적실하지 못할 가능성이 상존(常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주의를 기울인다면 항시 나의 고유한 기를 의식하고 사는 삶은 유용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8로 노승입선(老僧入禪): 노승이 좌선(坐禪)에 들다
<제8로>제설
노승(老僧)은 해탈을 앞둔 도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좌선이란 제4세를 형상화한 말로 <제8로>를 집약한 말이다. 경건한 마음과 엄숙한 행동 자세를 유지할 것을 말했다. 기공의 행공은 무술이기도 하고 일반의 삶이기도 하다. 나아가 한편 전통적 관념으로 학(學)의 일환으로서 수행되어야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행공의 그 같은 본질로 인해 기공의 본질은 유불선(儒佛仙)의 어느 학파에서도 수행되어야하는 수행(修行)의 양식이다. 그런 점에서 "노승입선"이라는 표현은 행공의 본질을 적확하게 잘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은 "유자독서(儒者讀書)"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고 그 의미는 상징어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제8로> 서
대퇴골 다리를 뻗어내어 바지 자락은 팽팽하고 마음을 밝게 가져 신(神)을 보고 눈은 빛나도다. 정면을 응시하는 노승(老僧)이 좌선(坐禪)할 때 바람은 대나무 그림자를 헤치고 비단 드리운 창에 비추우네. 한잔의 등잔불은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꿈에 본 홍의(紅衣) 낭자(娘子)는 서쪽 침상에 이르르고. 깊은 마음은 책상 위 경전에 머물러 동방(東方)에 앉았으니 소승(小僧)의 독한 마음은 그 굳기가 구리쇠 같아라. 공(功)을 이루어 뜻이 가득하면 생각이 어딘들 마치지 않으랴. 어찌 반드시 부처를 구하여 서방(西方)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腿 筋緊閉  明心見神眼生光
正是老僧左禪時 風擺竹影照紗 
一盞明燈吹不滅 夢見紅娘到西廂
膏 着床傳書東 小僧性烈硬如銅
功成志滿按不住 何須見佛求西方

<제8로> 통설해의
기는 신(神)이며 그림자 같고 바람 같으며 꿈결 같다고 본 로서의 표현은 기의 실체를 묘출하고자 한 말이다. 심의(心意)와 구별 없는 실체로 인식하고 있다. 안연(安淵)이 공자의 학문을 말하여 "뚫고 들어가려하니 더욱 단단하고 올려다보면 더욱 높고 앞에 있는가 생각하면 뒤에 있다"고 하였다. 바로 그 경지는 학문과 기가 웅합된 경지를 말하고 있고 과화존신(過化存神: 공자 성인이 지나는 곳에 신이함이 있다)의 신묘한 삶과 같은 말이다.

 

기는 그러나 사람의 마음으로서의 정신과 언제나 스스로 일치하는 존재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신 자체도 하나의 존재현상체(存在現狀體)이므로 인간의 질체와 그 류별이 다를 뿐 동질적인 존재구조이다. 마음과 육체와 기 사이의 3자관계가 결국 차별 없이 경험 내지 순수한 실감차원(實感次元)에서 규명 되어야만 한다. 3자의 개별적 본질이나 넘나듦의 의의는 끊임없이 탐구해 나아가야하고 그 탐구력의 진전은 바로 그 실감으로서의 3자를 더 가까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또 의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유를 증진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의 진전이 절대적인 궁극의 과제라기보다는 자연적 과제이다. 궁극의 과제의 첫단계는 오히려 기 자체를 실감하는 것 그자체이다. 그러므로 이해의 증진이란 것도 결국 구체적으로는 실감의 방식과 정도를 확고화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문을 앞세우기 보다는 실천역행이 더 절실하다.

 

홍의 낭자를 말하고 경전을 말한 것은 세속의 초탈을 지향하는 수도적 의지를 말한 것이다. 즉 발을 향해 분노의 기세로 치는 동작을 의미화한 것으로 세속적 정감의 혁파를 상징하는 동작에 관한 기 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소승의 독한 마음이 구리 같다고 하고 다시 공을 이루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어찌 반드시 부처를 구하여 서방으로 갈 것이냐"라고 설파하고 있다. 행공 자체의 수행성(修行性)이 수행의 양식보다 중요하며 그 중심에 자신의 의지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학파를 초월하여 행공의 일반적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극기(克己)의 심의를 표현하였는데 "공자의 극기복례"의 정신과 동질적인 면이 있으나 상이한 점도 있다. 우리는 우선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의 극(克)의 의미를 적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를 극복(克復)한다는 말은 당연히 자신의 사심과 사욕을 절제할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심과 사욕의 절멸을 말한 것은 아니다. 비록 수도자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가 사사로운 영역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사사로움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게 된다. 수행은 죽음을 위한 축제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움의 영역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사로움의 영역을 보존하면서 그 사사로움의 영역을 한 단위로 하여 그대로 우주적 공적 질서의 한 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사사로움의 사적 영역의 내질을 공화(公化)함으로써 공사(公私)의 사이의 계선(界線)을 열어 상호 융통되게 하려는 방식이 비로 극기복례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 내질의 공공화의 방식 중에 하나가 수치(羞恥)를 아는 것이다. 즉 의(義)를 추구하는 단호한 행동이다. 비록 의(義)일지라도 나의 결단으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는 사사로운 것이지만 그 행동의 방향은 나의 상대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므로 공적인 것이다. 극기복례란 내적인 사성(私性)을 절제하여 외적이 공성(公性)을 구현하려는 바로 그 절묘한 공사조화(公私調和)의 이상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극(克)이란 "이길극"은 아니다. 내가 나를 이긴다고 할 경우 공적인 나가 사적인 나를 이긴다는 의미가 될 것인데 실제 그런 압제(壓制)의 의미는 없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즉 압제가 아닌 절제(節制)를 의미한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절제라는 말에서 중점은 바로 절(節)에 있다. 절이란 원래 군사적 신표(信標)로서 좌우를 맞추어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절제의 절은 공사균형(公私均衡)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절제의 실질적인 요체는 자신의 사사로운 정념을 어떻게 누를 것인가 하는 소극적 의의에 주로 있지 않고 자신의 사사로움 정념을 여하히 공적인 질서와 공감 속에서 이루고 실현할 것인가 하는 적극적인 면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결론이 바로 예(禮)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동철(銅鐵) 같은 나의 폐쇄(閉鎖)만으로써는 공사균형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로서>는 바로 그 점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승려들의 의지의 방향을 높이 사면서도 "행공을 이루어 뜻이 가득하면 어디엔들 미치지 않으랴" 라고 단언하고 "어찌 반드시 부처를 구하여 서방으로 갈 것인가"라고 자문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히 지나친 "엄격함은 사(私)의 향기를 멸절하는 반생명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그 안에 내포되는 것이다.

 

제8로세
제1세-강룡복호(降龍伏虎)
용(龍)이 내려오고
호랑이가 엎드리다.
먼저 오른 다리를 열어
복태식( 腿式)의 거리(距離)를 유지하고
발끝을 들어 칠성보(七星步) 모양을 한다.
왼손은 허리로 거두고
오른손 주먹은 발끝을 목표로해 내지른다.
43도와 같이 한다.

제2세-핍딩벽분(  劈忿)
다리를 팽팽히 내밀고
분노의 기세로 치다
43도를 따라서 전신을 들어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왼편 보폭과 왼쪽 주먹이
상반(相反)된 형세를 취한다.
좌우로 각각 8회 타격을 가하여 내지른다
호흡을 조절한다.
44도와 같다.

제3세-분당기마(分 騎馬)
옷자락 날리며
말을 타다
두 다리를 소리나게 딱붙여
가지런히 한다
발끝은 힘껏 열어
벌려 一자형으로 한다.
두 손바닥은 합십상(合什狀)으로 합치고
가슴 앞에서 교차한다.
숨을 내쉰다.(45도)
다시 위의 자세를 따라 팔을 좌우로 벌리고
숨을 들이쉰다.(46도)
45와 46의 도식을 모두 8차례 행한다.

제4세-연자쌍비(燕子雙飛)
제비 두 마리가
날아들다
두 발은 먼저 열어
마식(馬式)의 거리를 유지하고
발끝을 열어 밀치어 一자가 되게 한다.
두 손은 가랑이를 향해 내려 안으로 잡고
이 때 신체는 반드시 당기는 힘을 받아
앞으로 기울 듯이 한다.
견고하게 가랑이를 잡은 후
자세가 안정되면
몸을 빼어 일으킨다.
힘차게 몸을 일으켜 곧게하여 그친다.
그런 자세로 오래 머무를수록 좋다.
호흡을 조절한다.(47도)

 

<제8로> 각세 분석
"용이 내려오고 호랑이가 엎드린다."는 것은 복태식 자세를 취할 때의 의기와 기세가 장중 강력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몸의 동체와 지체에 유동하는 힘 자체의 크기를 최대화 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지체와 동체의 입세의 정돈 정칙성과 자세 갖기의 형태적 포용성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용호의 기상이 무용적(武勇的)인 의미를 띠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앞의 봉황이나 난새와 같은 비유법이다.

 

분노의 기세란 모았던 기 힘을 일시적으로 급격히 쏟아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며 문자 그대로 분노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즉 단지 노도 같은 기세로 타격하는 자세를 취하여 기를 발출해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오히려 가격 후 일시적으로 힘의 정지상태를 조성하고 그 정지 순간을 통하여 지체의 외표계선을 열어 기를 영합하려는 것이다. 전체 18로 행공 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격돌을 나타내는 자세는 없었으므로 약간의 의도적 이해가 필요하다.

 

그와 함께 직접적으로 분노의 타격자세가 목표로 하는 것은 무술적인 데에 있지 않다. 제1로에서부터 8로가지의 행공수행을 통하여 체내에 축적된 힘중 잔여된 여분이 동체와 각지체에 잔류하고 있게 된다. 그 잔류된 힘이란 원래 기를 싣기 위해 발출된 것인데 충분히 기화(氣化)하지 못한 힘이 몸의 내부에 유동하면서 무리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불필요한 동작을 유발한다든가 힘을 발출하는 근육체계가 과민해져서 무목적적으로 지속적인 힘의 발출을 유도 내지 유인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잔류 힘량을 배출하는 해소행공 동작 과정을 수행의 중간쯤에 두어 조정균형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고안된 것으로 생각하여야하겠다. 이 타격자세가 내부기의 충격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는 보기 어렵지 않은가 한다.

제9로 철우경지(鐵牛耕地): 힘센 소가 밭을 갈다
<제9로> 제설
"강철같은 소가 밭을 간다"는 것은 환보자세에서 이루어지는 상하동작을 표현한 말이다. 각로의 대개의 행공이 힘을 수반하는 것임을 이미 강조적으로 언급하였는데 이 "철우경지"도 그와 같은 힘을 바탕으로 한 기공의 본질을 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사의 의미적 외연을 통하여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힘센 소가 가진 생체의 힘과 그 대상 농경지로서의 대지의 자생력을 동시에 말하되 이 두 생명의 주체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그리고 화합 융합되어야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대체로 독립 생체와 그 바탕인 대지와 자연이 어떻게 융합 일치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명제일 것이다. 사실 기공이란 나의 내기를 계발하는 것이므로 밭을 갈아 산물을 생산하는 일과 매우 유사한 면이 있다. 동시에 나의 기는 근본적으로 천기(天氣)와 교류하기 이전에 먼저 지기(地氣)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아래 있다. 대지와 나와의 사이의 긴장관계를 확인하고 조절하며 유지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자연의 자생력과 나의 생명력을 통하게 하는 도선은 사실 도처에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 속에 대지를 밟고 서 있는 매순간은 그대로 교류 융회의 그 큰 생명의 유통도선 위에 서 있는 것이므로 우선은 직접 호흡이 열린 피부와 마음으로 대지와 대기를 영접하려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마음으로 수용하려는 편안한 준비가 있어야하겠다. 제한 없이 개방된 마음의 준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실제적 수공 행동의 과정에서는 개별 생체로서의 닫힌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체를 펴고 거두는 동작이나 동체를 올리고 내리는 동작의 경우 그 행공 과정에서 내면에 발출되는 힘의 생성 소멸의 과정을 서서히 하고 또 동작의 속도도 서서히 수행하는 것이 그 첫 번째 문을 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 서서한 동작에서 힘의 소장을 의도적으로 일으켜 상호 융통의 문을 열어야할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자신 내부의 기와 외부의 기와의 대화의 통로를 열고 나아가 나의 외부세계 대지와 대기와 직접 융통하는 물고를 틀 수 있다. 그리하여 나와 자연이 나와 모든 외기가 미세한 균형의 경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9로> 서
<탁마공(琢磨功)> 발(簾)을 드리우듯 팔을 합쳐 기운과 호흡을 고른다. 윗몸 상체를 굽혔다가 등을 세운다. 음(陰)을 향하고 양(陽)을 덮으니 미세하기가 실(絲)같도다. 심장(心)의 화(火)를 낮추고 신장(腎)의 물을 올리니 음(陰) 가운데 양(陽)이 생기고 양에서 음이 생겨나도다. 천지만물이 모두 한 가지 이치러니(一理) 행공(行功)이란 순전히 기혈(氣血)을 생(生)함을 배우는 것이니라. 그리하면 근골이 장대하고 몸체가 견고해지리니.

垂簾合 調氣息 舌柱上臥立後脊
向陰覆陽細如絲 心火下降腎水擧
陰中生陽陽生陰 天地萬物皆一理
用功純學生氣血 且壯筋骨更堅體

<제9로> 서의 음미
<제9로서>에서 탁마공이라고 한 것은 이 행공이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임을 말하려한 것이다. 내 내부의 힘을 사용해보는 힘의 운용과정에서 갖는 여러 관련 느낌이 행공의 전부라고 오해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체험을 넘어 생명을 느끼고 기르는 과정임을 말한 것이다.

발을 드리우듯 한다는 것은 굽혀 올린 팔을 밀어내는 팔뚝 선이 몸과 평행되게 하는 동작을 형상화한 말이다. 상하동작으로 활성화된 내기를 두 팔로 밀어 걸치어 들어올린다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동시에 발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방문에 발을 치는 것이 방 안의 노출을 막으려는 것이듯이 내 몸 안의 기를 지키는 동작임을 말한 것이다. 행공 중에 그같이 기인식이 가능하고 자세에 따라서는 내가 나의 기의 타원형의 돔 같은 내부에 있다는 의식도 자연히 가능하다. 행공동작의 미세함이라든가 근육의 일정한 긴장이 기 감각 노력과 함께 시종 유지돼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힘으로 충만한 가슴 앞으로 놓여진 팔을 말한다.
신장의 기를 올리고 심장의 기를 낮춘다는 것은 무릅을 굽히는 동작과 장과 권으로 두 팔을 합수하여 밀어내리는 동작의 행공본질을 이미화한 말이다.

 

상체를 굽혀 몸을 세운다는 것은 수공 동작을 설명한 말로서 몸을 굽히되 등 쪽을 긴장되게 하여야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발을 드리우는 동작이 신체의 전면 즉 음(陰)적인 방향의 수호를 의식하는 것임에 비하여 등을 긴장하는 것은 양(陽)적인 방향의 기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여야 하겠다. 대개 일정한 긴장된 힘이 가해지는 부위가 외부와 계면을 이룰 경우 그 힘의 계면은 기가 집적되는 기적인 분면으로서 내기를 방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수평 팔 힘의 경우 그 힘의 긴장이 팔 내선에서 복부와 그 아래로 이어지기 때문에 발(簾)이라는 표현이 가능하고 등을 위주로 한 수공동작에서도 등의 팽만된 곡선면이 그와 같은 대외적 방호작용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양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한편 특정한 방향의 방호동작은 그 상대부위의 약화된 힘이 전연 그 스스로 체내의 힘의 중심을 구성하여야하므로 내면의 기적 활성작용은 그 반대쪽에서 극히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인식에 의해 음이 양을 낳고 양이 음을 낳는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역시 내부의 기에 변동을 주어 그 충동의 위상적 힘으로 기의 활동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이라는 형세론이 기론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사물은 그 맡겨진 위상에 적절히 대응하여 작용하는 힘이 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위치에너지라는 것도 그와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에너지 개념으로 비유하여 <위상에너지>라고 바꾼다면 인문학적 철학적 개념으로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 내부에는 여하한 주어진 역할도 수행해내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수공 동작에서 호흡을 조정한다는 것은 일반 수공의 경우 큰 힘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다르나 호흡 자체도 내부 근육의 긴장을 통하여 일상적으로 기를 활성화하는 자연의 체제이므로 다소 의식적 호흡을 통하여 힘과 호흡의 일치를 적극 도모하고 몸 안의 기의 변동을 수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다만 호흡은 힘의 가역(加力) 상태에서도 이루어지고 이완(弛緩) 상태에서도 이루어지나 그 역할과 의의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또 흡기(吸氣)와 호기(呼氣)의 구별도 역시 가역상태와 이완상태와 동반될 수 있으나 역시 그 의미가 다르다고 생각된다. 대개 호기는 힘의 발출상태와 동질적이고 흡기는 근력의 이완상태와 동질적이다. 그러나 힘의 발출부위의 건너편에서 이루어지는 내기의 활성화작용에는 오직 호흡의 기가 유용할 수 있으므로 근력의 특정한 발출 상태에서도 흡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반대로 이완상테에서도 호기를 의도적 적극적으로 활용학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의 행공에서는 근력과 호흡의 힘의 질적 방향은 일치하여야 할 것이다.
수공동작에서의 호흡은 힘의 이완을 동반하므로 적극적 행공의지는 오로지 호흡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그 절제가 더욱 극명히 필요해지는 것일 것이다.

 

제9로세
제1세-병립비혈(竝立備血)
발을 나란히 해 서서
경혈(經穴)의 기(氣)를 비축하다.
왼발은 뒤로부터 오른쪽으로 보낸다.
발끝은 돋움하듯 들고
오른쪽 다리를 당겨 긴장되게 한다.
오른쪽 주먹을 쥐고 팔뚝을 굽혀 위로 올린다.
가슴에 이르러 왼쪽 손바닥으로 힘껏 내려 밀친다(抵)
두 팔이 서로 부딪어
강한 역도(力道)를 발출(發出)한다.
숨을 들이 쉰다.(48도)

제2세-파력분근(把力分筋)
힘을 모아 쥐고
근육을 분출(分出)하다.
위의 행공식에서 두 손을 원래대로
아래로 곧바로 내린다.
주먹 끝이 땅에 이르러 닿게 한다.
숨을 내쉰다.(49도)
48도와 49도를 모두 8차례 반복한다.

제3세-찬권적력( 拳積力)
주먹을 모아
힘을 축적하다
오른 발을 뒤로부터
왼 쪽으로 옮겨 딛는다.
발 끝은 돋움하여 들고 왼발은 당겨 팽팽하게 한다.
왼쪽 주먹은 팔을 굽혀 위 쪽으로 들어올리고
오른 손바닥은 힘껏 밀친다.
두 팔이 서로 용력(用力) 하게 한다.
숨을 들이 쉰다.(50도)

제4세-배면정식(背面定息)
등(背面)으로
숨을 안정하다
위 두 도식에 따라 왼 주먹을
아래로 똑바로 내리고
주먹이 땅에 닿게 하여 머무른다.
숨을 내쉰다.(51도)
50도 51도를 합쳐서 모두 8차례 행한다.
두발을 나란히 하고
발 끝을 올려 돋움하여 든다.
두 주먹은 얼굴앞(面前)에서
만나 가리게 하여
오래 머무를수록 좋다.
호흡을 고른다(52도)

<제9로> 각세 분석
"경혈의 기를 붇돋운다"는 것은 용천혈(湧泉血)의 자극을 통해 신기(腎氣)를 활성화 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힘에 의해 전환되는 기는 경락을 통해 유동하는 것이므로 용천혈에서 일어난 기는 지체의 동작으로 파동을 받으면서 발 끝 밑에서 가슴위에 이르는 과정에서 활성화되게 된다. 이 때 아래에서 올라오는 기운은 손으로 거두어 장심으로 수렴하여 내린다. 이를 "힘을 모아 분출한다"고 하였다.
"등으로 숨을 안정한다"는 것은 수공 동작을 논한 것으로 두 팔과 어깨 그리고 용천혈에 이르는 기의 흐름을 온몸으로 거두는 동작이다. 눈 높이로 들어올린 힘찬 주먹은 충만한 기의 높이가 전신에 고루 퍼짐을 나타내고 긴장된 등의 곡선을 통해 내기(內氣)를 고양하면서 전체 신기(身氣)를 유도하고 그 음양 두 방향의 상이한 기혈을 조절하며 방호하는 행공이다. 이 때 용천혈(湧泉穴)의 신기(腎氣)와 장심(掌心)의 노궁(勞宮穴) 심기(心氣)가 등의 방광혈(膀胱經絡)을 타고 극히 활발하게 교류되면서 내기의 활성화를 자극하고 주도한다. 이를 표현하여 "등으로 숨을 안정한다"고 하였다. 이 등쪽의 함의 긴장을 호흡으로 유도하여 전신적 균형력으로 일반화하는 기의 유동을 도출하기 위해 호흡은 더욱 극히 절제될 것이다.

제10로 청룡파미(靑龍擺尾): 청용이 꼬리를 흔들다
<제10로> 제설
청색은 양목(陽木)의 색이며 용은 양물(陽物)이다. "청룡이 꼬리를 흔든다"는 것은 나의 신기(身氣)를 양의 덩어리로 보고 그 지체를 흔들어 신기를 깨우는 의미를 함축한다. 천부의 인체는 스스로 완전한 본질을 타고 나는 것이므로 새로운 기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여 나의 기를 충실히 하는 것보다는 나의 완전한 천품으로서의 기를 활성화 하는 일이 긴요함을 말한다. 이는 유교경전(儒敎經典)의 기초 논리이며 맹자(孟子) 성선설(性善說)과 호연지기론(浩然之氣論)으로 집약되는 이념이다. 물론 천부의 기품은 청탁이 있을 수 있으나 수행을 통하여 순정한 천품(天稟)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적 믿음이다.

 

이 때 기에 파동을 주는 힘은 근육적 힘과 동체의 운동으로 이루어지므로 그에 필요한 영양소를 적절히 섭생하고 적합한 운동과 긴장의 출입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천부의 생체를 온전히 유지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맹자에 의하면 자신의 온전한 기품을 회복하는 일은 기질이나 육신에 국한된 일은 아니며 주로 정신지향성에 의해 보다 중요하게 성취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정신성이란 우주의 원의로서 인(仁)을 이해하고 그 구현체제로서 의(義)를 행하는 자각적 신념과 의지를 지적하는 말이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고 조절하는 중심이기 때문에 정신적 긴장의 여하가 전육체적 긴장의 정도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모든 기공보다도 정신적 지향성이 가장 기초적 기의 본질에 관계된다. 이 정신적 긴장은 주로 가장 전통적인 학적(學的)인 긴장의 유지를 통해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학적 긴장이란 정신적 긴장의 중심 체제로서 순간의 촌시(寸時)도 해이됨이 없는 전감각적 의미발견 행동의 긴장된 지속으로서의 학적일상화(學的日常化)를 의미한다. 학문(論語의 '學而時習'的 의미에서)이란 가장 뛰어난 심신 집중술(執中術)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기공에서 시연하는 힘의 긴장의 조절적 시도는 그대로 정신적 긴장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며 기공의 힘의 시연이 결국은 정신적 긴장의 궁극의 수단임을 인지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역의 경우 즉 심기의 중심 집중력이 무력화된 그러한 학적 긴장이 결여된 상황에서라면 기공은 오히려 생체를 불안정하게 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나 소멸을 단적인 용어로 분산(分散)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른 말로 집중(執中)의 결여상태를 말한다. 집중(執中) 이 집중(集中)과 다른 것은 전자는 심신이 통함된 개념이고 후자는 그 어느 한 쪽을 말하는 것이다. 행공에서의 용어로는 집중(執中)이 적합한 것이다. 의식적인 집중은 정신적 견지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었다.
이 집중의 중요성은 이미 고대 경전이 아니고도 이미 2-3천 년 전의 선사시대인들도 직감하였던 그런 것이었다. 예를 들어 고대인 들이 옥(玉)을 신물(神物)로 존중하였던 것은 그 암석적 결정질의 치밀한 결집성(結集性)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고인돌과 선돌도 같은 발상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하겠다. 일본 선사시대의 장례제도상 사자의 가슴에 돌을 놓고 매장하는 풍습도 그와 같은 혼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힘과 정신의 관계를 고대인이 동질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제10로서>
<신근발골(伸筋拔骨)> 미려혈(尾閭穴 : 大海 아래 혈) 한번 들어 심기(心氣)의 출구(出口)를 지키고 아관혈(牙關穴)을 굳게 다물고 급히 손을 드노라. 좌우로 서리(盤)고 선회(旋廻)하니 대퇴골이 따르네 몸은 굳고 날카로우나( 鑽) 바람이 버들을 헤치듯 하고 사지(四肢)는 힘을 다하고 복기(腹氣)는 충만하네 걷고 몸을 놀리니 무릅을 일으켜 팔을 올리기 좋고 내뻗고 거두는 손동작은 쌍칼 같도다. 앞을 들고 뒤를 낮추어 말을 돌려 달리네.

伸筋拔骨
尾閭一擧存心口 緊咬牙關忙擧手
左右盤旋腿徊逐 身似 鑽風擺柳
四肢度盡滿腹氣 行使起膝好盤 
一來一往雙刀勢 前 後 回馬走

<제10로서>의 음미
"신근발골"이란 근육을 펴고 골격을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청룡파미의 행공동작은 기존의 힘의 발출을 기초로한 원기의 활성을 도모하는 점에서는 동질적이다. 그러나 좌우 등산보자세에서 기마자세로 보형을 바꾸어가면서 동시에 손과 팔을 거두어 들고 돌리는 동세를 그 중요한 본질로 하고 있다. 이 때 손과 팔을 들고 올리는 자세는 힘과 함께 전체구조로서의 행공자세 모양 자체를 주목한 수행이다. 이를 구조적 혹은 구조를 주목한 행동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행공동작도 역시 구조적 모양을 지니고 있고 어느 행공양식이든 구조성을 아울러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10로의 독특한 자세의 교환은 그와 같은 동작이 특히 전적으로 구조적인 특성을 보여줌으로서 행공적 행동양식 자체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기공이 힘의 발출기제로서의 행공이라는 특질 그리고 자세적 모양을 통해 체내를 유동하는 전체 기의 유동형을 조절함으로서 이루어내는 특질을 아울러 지닐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타원 구조 속을 맴도는 유체의 동제와 완형의 원형구조 속을 도는 동세의 모습과 작용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유로를 흐르는 강물이 그 강의 길이나 양 강안의 구조에 의해 그 흐름이 다를 수 있고 지상에 흐르는 기단의 흐름도 역시 지형구조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행공의 기흐름 구조도 그와 같은 일면이 있다고 느낀다.

 

일상 상태에서의 인체의 동정형세도 중요하고 특정한 모든 동작의 자세도 중요하나 특히 기공의 안배된 힘균형의 자세형 자체가 보다 유의미한 작용을 겨냥한 것이고 실제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수행 당시의 행공 자세는 가능하면 큰 동작으로 충만한 모양감을 그려내도록 동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각 단계 동작의 외형선이 팽만감을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청룡파미의 경우 그와 같은 자세 모양의 필요가 특히 두드러지기 때문에 거대물상(巨大物象)인 용형을 지칭하며 큰 자세의 볼륨주기의 필요성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행공 동작 상호간의 좌우상하의 균형이 일련의 동작 속에서 시차를 두고 역시 구현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제10로> 통설해의-용(龍)의 드러남이 뜻하는 모든 것
기(氣)는 파동성과 응집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자유변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 형상은 용(龍)으로 잘 상징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주역에 말하는 현룡재전(見龍在田) 혹은 천하문명(天下文明)이라는 말은 순수한 기가 지상의 경험 현상으로 재현된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때 현룡은 군자(君子) 혹은 왕(王)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사실은 인격과 계층에 관계없이 누구나 "현룡재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용에 대한 주석에서 보면 변화불측(變化不測)한 존재라고 하였다. 경이로운 생명적 변화로 넘치는 이 세계의 경험 현상을 집약한 말이다. 건(乾) 괘의 효사(爻辭)를 좀더 살펴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초효에서는 "연못에 잠긴 용이라"하였고 어찌할 수 없다(潛龍勿用)고 하였다. 이는 순수한 기의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 이를 사람이 다룰 수 없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둘째 효는 현룡재전이견대인(見龍在田利見大人: 드러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유리하다)이니 지상에 경험적으로 발출된 기를 말하고 있다. 이는 풀싹이거나 나무일 수 있고 아기의 탄생일 수 있으며 사람의 일의 시작일 수도 있다. 대인을 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비로소 발출하는 힘으로 현재화된 기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그 기의 그릇으로서 주체 인격의 그릇이 크게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군주가 어진 신하를 만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해석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유용한 해석이다. 그 경우에도 그 어진 신하란 군주가 주도적으로 포용하는 인격적 포용력에 의해 결행되는 것으로 말해왔으므로 서로 어긋난 해석이 되지는 않는다.

 

세 번째 효는 군자가 종일토록 변함이 없어 저녁에 이르도록 몸가짐을 근심(긴장)하여 엄격히 한다면 낭패될 일이 없을 것이다(君子終日乾乾夕 若 无咎) 라는 것이다. 군자란 학문적 의미의 삶을 살아가는 이를 지칭하고 군자로서의 정신적 긴장을 유지하고 사는 삶이 엄격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나 그 긴장은 우리 생명에 결코 해가되지 않고 그 생명력을 돋우어주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4번째 효사에서는 혹약재연무구(或躍在淵无咎)라고 하였는데 이는 혹 약동(躍動)하는 경우라도 순기(純氣)에 마음을 두고 행동하면 해될 일이 없다는 것으로 독해된다. 이 순기(純氣)란 기의 근원이나 양심을 의미하는 말이다. 천품의 온전한 기를 유지하려는 의지로 행동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기공에 적용하면 어떤 격한 기공동작일지라도 자신의 중심기를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5번째 효는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大人)이라고 하였다. 높이 나는 용이란 뜻을 성취한 군주로 비유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상승유동하는 시기의 처신을 말한 것으로 예를 들어 고조된 기가 충만히 파동하고 있을 경우 처음의 기의 발출 당시와 마찬가지로 결국 그 인격적 그릇의 크기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심신의 양 측면에서 준비된 인격이 없이는 순수한 천기가 최대한의 활성을 성취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끝의 6번째 상효(上爻)는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것인데 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용인 비룡이 상승변동하는 기인데 비해 항룡은 상승하여 안정된 기이다. 상승하여 안정된 기는 상승지향의 기를 말하고 기의 근원인 연못을 멀리 떨어진 기이다. 환언하면 영육일체의 경험체인 용이 그 육질성(肉質性)을 벗어나 너무 추상의 경지에 머물 경우 생명에 해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함이다. 곧 생명의 그 원은 정신이지만 극단적인 이상주의나 경험적으로 튼튼한 바탕을 경시할 경우 해를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말로 이해되어 왔다.

 

물론 건괘(乾卦)의 괘사(卦辭)에서 건원형리정(乾元亨利貞)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순수한 천품으로서의 기가 가진 가능성과 운용의 범주를 궁극적으로 포괄해 말한 것이다. 순수한 천품으로서의 기는 리(理)라는 개념과 현상적으로는 분별되기 어려운 경지이다. 이 때 건이란 하늘의 본질을 말한다고 해석해 왔다. 우리가 사용하는 순수한 천품의 기의 개념이다. 원형리정이란 그 천품기의 본질을 설명한 것이다. 물론 정(貞)이란 확고부동한 경험적 정상성(定常性)을 말하고 있다.
천품기의 4대본질로서 원(元)이란 그것이 만물의 바탕임을 의미한다. 형(亨)이란 그 질체의 무한한 가변성을 지칭한다. 리(利)란 원기가 지닌 창조적 생명지향성을 지칭한다. 정(貞)이란 천품의 기는 문명을 통해 현재 경험으로 출현하는 것임을 말한다. 정이란 확고하다는 뜻인데 이는 경험적 확고성을 말하고 동시에 형상 없는 천품기가 강력하기 그지없는 현상적 발휘의 힘을 가진 실체임을 말한다. 역사상의 문명이나 문물이란 그와 같은 천품기의 힘에 의해 인간적양식(人間的樣式)으로 구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적 양식으로 구현된다는 말은 사람의 창조물이거나 사람이 감질할할 수 있는 경험으로 확고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연(自然)과 인위(人爲)의 분별은 거의 무의미해진다.
이상의 예들은 기공의 동작이나 힘 혹은 모양새가 그 상하의 균형을 잃거나 자세모양과 그 내부 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잃을 경우 해가 된다는 의미와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제10로세
제1세-탱퇴합수(撑腿合手)
버티어 서서(撑腿)
손을 모으다
보폭을 열어
우등산식(右登山式) 자세를 한다.
왼 손바닥은 오른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내뻗고(撑出)
오른 손바닥은 겨드랑이 아래로
거두어 들인다.
숨을 내쉰다(53도)
다시 왼손바닥을 아래로 내렸다가
들어올려 얼굴을 지나 내반전(內反轉)해
머리 위에 둔다
오른 손바닥은 一자 모양으로
가슴 앞으로 옮긴다.
동시에 등산식으로부터
기마식(騎馬式) 자세로 바꾼다.
숨을 들이쉰다.(54도)
53도 54도를 합쳐서 모두 8차례 행공한다.

 

제2세-양편기마(揚鞭騎馬)
채찍을 휘날리며
말을 탄다
좌등산식(左登山式) 자세를 취한다.
오른 손바닥은 왼쪽을
향하여 힘차게 뻗는다.
왼 손바닥은 겨드랑이 아래로 거둔다.
숨을 내쉰다.(55도)
다시 오른 손바닥을 아래로 내렸다가
들어올려 얼굴을 지나
내반전해 머리 위에 머무른다.
왼 손바닥은 一자형으로
가슴 앞으로 둔다.
동시에 등산보(登山步)에서
기마식(騎馬式)으로 자세를 바꾸어
숨을 들이 쉰다. (56도)

제3세-제보전봉(提步纏封)
자세를 가다듬어
방어세를 하고
내기(內氣)를
전봉(纏封;지켜 막음)한다.
기마식(騎馬式)자세를 한다.
오른 손바닥은 길게
왼 손바닥은 짧게 하여
동시에 오른쪽으로 힘차게 밀어낸다.
오른 쪽 방향을 주시한다.(57도)

제4세-초전당후(招前 後)
앞을 부르고
뒤를 막는다
위의 기마자세를 그대로 유지한다.
손바닥을 바꾸어
왼손을 길게 오른 손을 짧게 한다.
힘껏 왼쪽을 향해 밀어낸다.
왼쪽 방향을 주시한다.(58도)
57도와 58도를 합하여 호흡을 고르고
거듭 8차례 행공한다.
바른 자세로 서서 행공을 거둔다.

 

<제10로> 각세 분석
대개 일반적인 가치로운 여러 의미(意味)들은 생체적 유기구조(有機構造)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생성 창조된 동체의 실용적 미학적 철학적인 모든 유의미함이란 실은 유기적 조직체의 삶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의미가 생명현상과 같은 생성 진화의 동질적 과정을 그대로 동시에 같이 경과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반 사상사의 기초명제와도 상호 유통할 수 있는 논법이다. 같은 삶의 시공 속에서 생성 계승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의미의 한 체제인 언어나 문자도 살아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결과물인 문자 언어 의미 행동 상태 모양 등의 생명현상은 어느 순간에나 전연 동일한 존재 좌표위에 공존하는 성향을 실현하려는 본질성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해야하겠다. 특히 사람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역시 생체적 의미와 정감의 표현이므로 언어 문자와 다를 것이 없다. 언어와 행동의 표현성을 구분하지 않고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기호학이라는 넓은 학문 범위가 필요하게 된다.

 

실은 우리 전통 사상에서 문물(文物)이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 의미를 집약한 언어이므로 전통사상은 기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18로 기공의 각 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은 그대로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단순히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기공 자체일 수도 있다.
"버티어서서 손을 모은다"는 것은 좌우 등산보에서 기마자세로 돌아갈 때 팔꿈치와 장심이 내반전의 모습과 한일자 모습으로 병행하여 마주하는 자세를 설명한 것이다. 모은다는 표현은 좌우로 내밀었던 팔과 손을 몸 중심으로 모은다는 뜻이 된다. 지체를 외발하였다가 거두어들이는 동작은 사실 우주의 변환 전개 법칙과도 일치하는 현상이다. 펴고 거둠이 우주의 기초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표현한 아래 위 손 동작이 충만함과 기쁨 혹은 만족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어니다.

 

"채찍을 날리며 말을 탄다"는 것은 좌우 등산보의 공용과 팔의 공용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이다. 등산보를 통하여 내기를 튼튼히 하부에 집적하고 이를 다시 손동작으로 이끌어 상체와 유통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세를 가다듬어 방어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상체로 이끌린 기를 다시 거두어 좌측으로 유통하려는 것이며 앞을 부르고 뒤를 막는다는 것은 우측으로 유통시키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활성화된 기는 육신의 상하 사방에 고루 파문을 주어 몸을 깨우게 된다. 그리고 쇄신된 육질은 다시 기를 활성화하는 호환작용을 하게 된다. 이 호환작용을 상당한 기간동안 반복유지되는데 그 지속되는 이유는 인체의 내부가 인력에 저항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어 우주적 운동법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히 영속되지 못하는 것은 육질이 만감한 감각작용을 통해 수시로 긴장함으로서 그 지속 관성을 흡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기의 활성화를 위한 기파동적 기공은 적절한 규칙성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수행되어야 활성의 효를 발휘할 수 있고 급격하고 강한 일회적인 기공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공은 일상에의 파동 내지는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꼭 특정한 동작이 특정한 공효를 발휘하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그 파동과 쇄신의 일반적 효용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사람에 따라 신체의 약점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 보완작용으로서의 기공의 역할도 세심히 배려하여 동작을 선택하여야할 것이다.

 

제11로 좌우편마(左右騙馬): 좌우로 말을 타다
<제11로> 제설
말(馬)을 탄다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좌우로 발을 드는 동작을 표현한 말이지만 외부의 기를 의식한 것이라기보다는 내부의 기를 지면으로부터 끌어 올리는 공력을 말하고 있다. 하늘에 비견된 용에 비하여 말은 땅을 상징하는 것인데 특별한 물상(物象)의 형상 자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경험적 일상성과 확고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건(乾)의 괘사인 원형리적(元亨利貞)에 비하여 곤(坤)의 괘사는 원형리빈마지정(元亨利牝馬之貞)이라고 하였다. "빈마지정"이란 암말같은 곧음을 말한다고 이해해왔는데 이는 역시 기가 경험화된 것 가운데 사람에게 친근하고 유용한 경험체로서의 확고성을 지적한 말이라고 보아야하겠다. 그 경험적 확고성이란 기공에 있어서는 힘의 감각의 명징성을 지적한 말이다. 힘을 조절하고 감지하는 기공의 동작을 말하고 있다.

<제11로> 서
허리와 등을 세우고 손은 가슴에 이르네. 세 번 일어나고 세 번 내리어 다리는 허공에 매달리고 홀로서서 아침 기운으로 강직하니 모든 힘줄은 일어서네. 소나무에 앉은 학은 만년을 가도 길이 청춘이요. 비장(脾臟) 기운을 돕고 일으키니 근기(根基)가 돋우어지네. 만약 기도(氣道)문을 얻는다면 내 어찌 거치름( )을 즐기랴. 아래 허리 풀고 대퇴골에 힘을 넣어 땅에 엎드리니 수레에 멍에 얹어 달리듯 참으로 놀랍도다. 비로소 공을 이루어 인간 세상에 몸을 드러내니 아홉 마리 소와 두 마리 호랑이 힘으로 기의 무거움을 느끼도다.

立起腰脊手當胸 三起三落腿懸空
獨立朝剛千 擧 松鶴萬年 長靑
助氣脾土培筋基 如得關竅豈肯 
下腰鋪腿緊伏地 能駕車輪實可驚
 是功成顯人處 九牛二虎力不輕

<제11로>서의 음미

말(馬)로 상징된 곤(坤)괘의 효사를 보면 괘사(卦辭)에서 빈마(牝馬)를 언급하였을 뿐 말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는 마치 건(乾)의 괘사에서는 용을 언급하지 않았고 효사에용을 언급한 것과 같은 표현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곤괘의 본질이 말로 표현된 것이다.

이어서 군자가 갈 곳이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군자가 일정한 의지를 수립하여 삶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삶의 지향성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체적인 삶의 행동이 계획되고 생각되는 단계는 모두 초효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선미후득주리(先迷後得主利)라고 하였다. 계획이나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나아가는 첫 단계에서는 생각과 실제 환경의 차이로 인해 혼미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 경험적 이해를 하게 되며 이는 천지가 스스로 지닌 이물적(利物的)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의미로 읽혀진다.

 

다음으로 서남득붕동북상붕안정길(西南得朋東北喪朋安貞吉)이라고 하였다. 서쪽과 남쪽 동쪽과 북쪽이라는 방위표시는 어떤 의미인지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자연적 지리개념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므로 서남쪽은 농경어로지대로서 재화(朋)을 얻을 수 있고 동북쪽은 산림지대로서 재화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행공동작 선택이나 결행의 3단계에 이르면 경험적 환경파악이 완료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들어가는데 이 경우 방향에 따라서 이해가 갈려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바로 경제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말하는 것인데 이 경우에 안정길(安貞吉)이라고 한 것이므로 경험적 확고성(貞)에 따라서 안정된 선택을 하는 것이 길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결국 기공에서 체감의 경험적 절실성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으로 추상적 관념으로 수행함을 경계한 말일 것이다.

 

다소 부언한다면 초효에서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어는 계절에 이른다고 하였다.(履霜堅氷至:이상견빙지) 어떤 일연의 경험현상이 진행될 경우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현실적 경험이 점진적으로 확고해진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계절의 진행으로 그 점을 상징하였다. 행동적 선택을 계획하는 첫 단계의 본질을 말하였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제2효에서는 직방대불습무불리(直方大不習無不利)라고 하였다. 자신의 의지를 현실의 경험세계에 투영하여 행동을 시작하였을 경우 나의 행동은 특정한 대상성을 필연적으로 지니게 된다. 사냥이라면 동물이 그 대상이 되고 농경이라면 땅이 그 대상이 된다. 그 나의 전체 대상세계의 포괄적 효용에 대한 언급이다. 경험적 행동 대상인 이 세계는 일정한(直) 큰 힘의 구체 질서(方)에 의해 일정하게 움직인다는 것과 그러한 질서의 범위가 무제한 적으로 통용된다(大)는 점 그리고 자연히(不習) 생명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無不利)이 대원칙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우주 대자연의 경험적 본질이 그러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제3효에서는 함장가정혹종왕사무성유종(含章可貞或從王事无成有終)이라고 하였다. 이는 위와 같은 정상적 행동과 생태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확고불변(含章可貞)하다는 것과 그와 같은 일상의 삶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왕의 통치로 이어지는 것이며(或從王事) 특별히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지 않아도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메시지이다. 곧 무위자연의 이상을 말한 것이다.

 

제4효에서는 괄낭무구무예(括囊无咎无譽)라고 하였다. 괄낭(括囊)이란 자루를 묶는다는 것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조심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방호하려는 자위적 행동을 말한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행동을 말한다. 이러한 자위적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뜻을 말하고 있다. 내것을 지키려는 행동이 탓할 일은 아니나 명예로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 행동이 결국 개인의 한계만을 지키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제5효에서는 황상원길(黃裳元吉)이라고 하였으니 제 4효에 대비하여 삶의 행동에 대한 방향을 언급한 것이다. 괄낭이란 유목생활이나 혹은 무장을 하고 공격이나 토벌하던가 혹은 이동위주의 계산적인 삶을 말하는데 황상이란 문자그대로 농경생활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즉 농경위주의 즉 스스로 생산하는 생산적 삶이 자연의 근본이고 길하다는 경험율을 말하고 있다. 대개 치마는 농경적 삶의 생활패션을 말한다.
상효(上爻)에서는 용전우야기혈현황(龍戰于也其血玄黃)이라고 하였다. 용이 들에서 싸운다는 것은 매우 그로우테스크한 개념이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의 삶에 있어 이상과 현실의 격돌을 의미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용이란 마음을 나타내고 말이란 행동하는 육신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 원상에 있어서는 곧고 정대한 것이지만 현실의 세계에서 왜곡되기 마련이고 마음이 왜곡되는 것은 그 본질을 상실할 경우일 것이다. 본질을 상실하고 물질화된 마음은 현실의 괴물로서의 용으로 전환하여 피를 흘리게 된다. 히틀러의 잔학행위라든가 폭군의 학살을 그에 비유할 수 있고 세상의 대부분의 범죄나 과오가 그 범주안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피로 얼룩진다고 표현하였다.
기공 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이 그 정상적 이상과 정념을 상실할 때 생명에 대한 잔학한 해를 끼칠 것임을 극히 리얼한 인상적이고 강조적인 필치로 말한 것이다.

 

제11로세
제1세-제수독립(提手獨立)
손을 올리고
독립(獨立)하다
먼저 바로선 자세로
오른 손바닥을 왼쪽을 향하여
횡격세(橫擊勢:옆으로 치는 자세)를 한다.
가슴 중앙선에 이르러
왼쪽 손바닥으로 오른쪽 팔뚝부분을
힘껏 밀친다.
서로 밀치는 동작시에 양 팔의
역도(力道)가 모두 지극히 강해진다.
동시에 왼발을 비스듬히 오른 쪽으로 향하여
차올려 손의 방향과 일직선이 될 정도로 든다.
숨을 들이쉰다.(59)
다시 차올린 발을 땅에 내린다.
몸을 틀어 왼쪽 방향을 향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오른 쪽을 향해
횡격세를 한다.
가슴 중앙선에서
오른손바닥으로 왼 팔뚝을 밀친다.
동시에 오른 발을 비스듬히
왼쪽을 향해 차올린다.
손바닥이 있는 중앙선과
일치할 정도로 든다.(60도)
59도 60도를 합하여 모두 8차례 행공한다.
자세를 고정하고 숨을 내쉰다.
왼편으로부터 오른편으로 몸을 틀거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몸을 틀 때는 숨을 내쉰다.

제2세-철문등슬(鐵門 膝)
철문(鐵門)을
무릅으로 딛다.
먼저 오른발을 열어
복퇴( 腿;종아리와 대퇴골)의
거리를 두어 디딘다.
다만 발끝을 들어올려
칠성보(七星步)를 한다.
왼손 주먹을 쥐고 팔을 굽히어
위로 향해 곧게 든다.
오른손 주먹을 쥐고 역시 팔을 굽혀
가슴 앞에 나란히(橫) 두고
자세를 정돈하면 거의
좌추법(挫 法)과 유사한 자세가 된다.
눈은 오른 쪽을 주시한다.(61도)
다시 왼쪽으로 틀어 왼 발을 열고
오른 주먹을 밀어 올린다.
왼 주먹은 가슴 앞에 나란히 하여
62도와 같이 한다.
좌 우로 각각 8차례 행공한다.
자세를 고정할 때 숨을 들이쉰다.
몸을 틀 때는 숨을 내쉰다.
바로 서서 소금 쉬고 행공을 완결한다.

<제11로> 각세 분석
손을 올리고 독립한다는 것은 횡격세의 팔꿈치를 밀어 힘을 조성하여 내기를 끌어올리고 동시에 발을 들어올려 기의 상승을 구현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 내부의 저부에 존재하는 기의 중심에 변화를 주어 활성을 유도하려는 단순명쾌한 행공이다.

철문을 무릅으로 밟는다는 것은 칠성보 자세에서 상승된 기를 다시 하강하여 역시 내기의 활성을 유발하려는 행공동작이다.
특별한 수공 동작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극히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면서 행공하여야하기 때문에 행공 도중에 이미 수공을 염두에 두고 병행함을 의미한다.
독립한다는 것은 발을 모으는 동작보다 직선적 입세를 더 강조한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입세를 통해 무형의 기를 힘의 형태로 구현하는 것이므로 입세의 강조란 기의 강한 발출을 의미한다.

 

제12로 연자탁수(燕子 水): 제비가 물을 쪼아 먹다
<제12로> 제설

제비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한록편(旱麓篇)의 구절이며 연비려천(燕飛戾天)이란 말처럼 제비가 날아 하늘에 이른다는 뜻으로 어약우연(魚躍于淵:물고기는 연못 속에 뛰논다)는 말과 댓구를 이루는 표현이다. 중용(中庸)에서는 세상의 상하를 고루 살펴야한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그 말의 의미는 자연 우주계의 모든 생태와 현상들이 주목할만한 우주자연의 경이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적실하게 살펴 이해하려는 노력이 인생에서 절실한 것임을 말한 것이다. 단적으로는 무형의 우주의 질서와 의지가 표현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으로 자연 가운데 그를 벗어나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상(上)이란 경험을 초월한 질서의 세계를 하(下)란 직접적 경험의 세계를 의미하는데 물고기에서 제비에 이르는 질체들이 바로 그 상하의 의미를 구현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환언하면 일상으로 느끼는 경험의 세계가 그 내부에 일정한 이상과 정신과 정서로 구성된 불변의 질서라고하는 배경적 힘에 의해 지탱되는 공간임을 말한다. 당연히 그 힘이란 생명 혹은 물체적 실존의 형태로 표현된다. 구체적으로는 <나의 내기>와 <외기>의 공존과 수용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제비가 물을 마신다는 것은 사람의 행공이 <상하의 자연적 질서를 반영한 이상>의 체현이면서 동시에 현실 생태적 조건에 순응하는 <현실과 이상의 조합 균형체제>임을 말한다.

<제12> 로서
두 팔은 대들보 뽑듯이 기둥을 놀리듯이 노니나니 한번은 왼쪽으로 한번은 오른 쪽으로 몸을 접노라. 밟고 선 팔과 무릅에 한결 같은 힘이여. 손은 들고 발은 내려 허리 근육에 거두우고 단전(丹田)에 기운 일으키어 허리를 돌리네. 오직 기운과 숨이 진기(眞氣)일으키도록 애쓰도다. 오로지 행공을 이룸은 10에 10이 다 노력이니. 간기(肝氣)를 요동(搖動)하여 폐금기(肺金氣)를 기르라. 천가지 생각 만가지 염려가 무슨 걱정일까. 때때로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 세심(細心)히 체득하라.

抽樑換柱雙手兮 一左一右兩摺身
 盡 膝一般力 手起脚落盤腰筋
提起丹田腰腎轉 唯恐氣息調不眞
一成工夫十兮力 搖動肝力助肺金
千頭萬緖有何慮 時時勤學得細心

<제12> 로서의 음미
독립세와 발을 들어올린 띄운 자세로 좌우의 발로 번갈아 지탱해 서고 동시에 손을 들어 균형을 이루는 동작을 말하고 있다. 이 자세에서는 허리의 좌우측이 긴장하게 되고 간경의 장문(章門)혈을 자극하게 되어 허리에서 원기가 활성화된다. 동시에 발을 뒤 쪽으로 뛰워 올리고 손바닥을 들어 머리 위로 올리는 동작에서는 굽힌 팔의 폐(肺)경락이 긴장되고 가슴부위가 긴장되므로 가슴 상부의 폐경이 자극되고 동시에 흉중선의 좌우를 지나는 신(腎) 경락도 열리게 된다. 그러므로 근심(憂)을 담당하는 신장과 분노(怒)를 담당하는 간(肝) 경락이 활성화되므로 "천가지 생각 만가지 근심이 무슨 걱정인가"하였다.

 

독립세의 균형으로서 마음과 육체의 조화를 말하고자 하였고 발의 굽힘과 띄움 손의 올림으로 상하의 기의 유통을 강조하였으며 그 고른 조화를 통해 심심의 편안함이 유지되고 정서의 안락함이 지속되어야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세심히 얻으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심신의 균형을 말한 것으로 행공시에 그 의지가 육체적 기질적 방향으로 경주될 위험성이 있음을 경계한 뜻으로 생각된다. 일상의 행공시에 극히 명심해야할 사항이다.
특히 진기(眞氣)를 일으키고 간기(肝氣)를 요동하라고 한 말은 18로 행공의 요체를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의미를 아울러 지닌다. 앞에서 이미 핍기( 氣)의 중요성을 언급하였고 여기서는 특히 그 표현을 노골화하여 요동(搖動)하라고 하였다.

 

이 말은 10분공부(10分工夫)라는 말로 다시 설명된 셈인데 이 십분공부란 최대한이 근력을 사용한 행공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독림세의 자세로부터 발출되는 힘은 양립세에 비해 그족경에 흐르는 힘의 강도가 가장 강하게 된다. 그 강한 족경의 힘은 균형원리에 의해 그 상대지체들의 강함 힘을 유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10분이라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발출된 힘의 크기는 당연히 핍기의 수준을 넘어 기의 동요를 불러올 것인데 매우 강한 기의 쇄신작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특히 독립세의 균형작용은 몸의 도처의 전후좌우를 끊임 없이 교대적으로 극도로 긴장하게 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체형의 전 외계선(外界線)이 극도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 이어는 매 순간에 그 이 대외적 문호를 반복해서 열고 닫게 된다. 그러므로 전체 계선에 결쳐 외부기와의 유통 작용이 광범하게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때때로 세심히 얻으라"는 말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활상화된 내기를 바탕으로 그 다음 단계로서 외기를 수용하려는 적극적 대외 행공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제12로세
제1세-추량환주(抽樑換柱)
들보 뽑듯이
기둥을 다루듯이
왼 발을 들어
독립세(獨立勢)를 취한다.
두 손바닥은 뒤로 펴 열어
약익상(掠翼狀 날개편 모습)을 한다.(63도)
63도를 이어 왼발을 오른 쪽으로 옮겨
내려딛어 좌입환보(左入環步)자세를 취한다.
왼손바닥은 팔뚝을 굽혀
허리 위를 향하여 치켜올린다
오른 손바닥은 팔뚝을 아래를 힘을 주어 받친다.
64도와 같이한다.
두 자세를 합쳐 8차례를 행공한다.
63도는 숨을 들이쉬고
64도는 숨을 내쉰다.

제2세-회마포선(回馬捕蟬)
말을 돌려
매미를 잡다
오른 발을 들어 독립세(獨立勢)를 한다.
두손바닥은 뒤쪽으로 벌려열어
약익상(掠翼狀)으로 한다.(65도)
다시 65도를 따라 오른 발을 왼 쪽으로
옮겨 내려딛어 우입환보(右入環步) 자세를 한다.
오른 손바닥은 팔을 굽혀
어깨를 향해 치켜올린다.
왼손바닥은 팔뚝 아래를 힘차게 받친다.(66도)
두 행공식을 합하여 8차례 행한다.
65도는 숨을 들이쉬고
66도는 숨을 내쉰다.

제3세-번신합수( 身合手)
몸을 틀어
손을 합치다
두 발을 바르게 선다.
두 손바닥은 팔을 굽혀 허리에 붙인다.
장심(掌心)을 밖으로 향하고
오른 손바닥은 복부(腹部 : 배)에
횡(橫)으로 둔다.(67도)
다시 67도를 이어서 왼 발은 무릅을 굽히고
땅에서 들어올려 지면 위에 띄운다.
오른 손바닥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린다.
머리에 이르러 가지런히 하고
왼손바닥을 오른 편 겨드랑이 아래로
거둔다.(68도)
위 두 행공식을 합하여 8차례 행한다.
67도는 숨을 들이 쉬고
68도는 숨을 내쉰다.

제4세-금계독립(金鷄獨立)
금계(金鷄)가
홀로 서다
두 발을 바로 선다.
오른 손바닥은 팔을 굽혀 허리에 붙인다.
장심(掌心)은 밖을 향하여
왼손바닥은 복부(腹部)에 횡(橫)으로 둔다.(69도)
다시 69도를 이어 오른 발 무릅을 굽히고
땅에서 들어올려 띄운다.
왼손바닥은 천천히 위로 든다.
머리에 이르러 가지런해지는 정도로 멈춘다.
오른 손바닥을 왼편 겨드랑이 아래로 거둔다.(70도)
두 행공식을 각각 8차례 행한다.
69도는 숨을 들이쉬고
70도는 숨을 내쉰다.
8차례 행공한 후 바로 서서 잠시 그친다.

<제12로> 각세 분석
"두손을 올리고 걸치어 머무른다"는 것은 이 12로의 행공이 주로 수렴(收斂)적이고 정지된 동작을 통하여 기의 내적 체감을 구현하는 과정임을 말한다. "말을 돌려 매미를 잡다"고 한 표현에서 보듯이 사려있는 조심스런 행공이 요구되고 특히 미묘한 감성을 발휘하여 그 예민한 체감을 유지하라는 의미로 보인다.
"몸을 틀어 손을 합친다"는 것은 동작의 방향전환을 통하여 기감을 쇄신 연기하며 기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실험적으로 음미하라는 말이며 "금계가 홀로선다"는 것은 육신의 기체적 실체의 감각이 미려함을 미학적으로 직각하며 행공하라는 것으로 그 행공 지표성을 초월감각적으로 표현한 의미로 들린다. 극히 의식적으로 상상적 관념으로 연행되는 바르고 안정되고 좋은 자세가 중요함을 말하였다. 금계는 강한 기감을 표현한 말이다.

 

제13로 호달인신(虎達人身): 호랑이가 사람이 되다
<제13로> 제설
호랑이란 가열한 맹수로서 인류사회 초창기부터 강열한 인상을 주어온 대상이다. 초기 인류 사회의 신앙적 관념에서는 공포의 관념으로 자리잡았었고 주역(周易)에서는 사변(事變)의 단서(端緖)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호랑이 꼬리를 밟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성적 사회가 열린 이후에는 용과 대비되는 존재로서 신비화된 기(氣)를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초경험적인 순수한 기를 룡(龍)이라고 표현하고 지상화된 현실계에 구현화된 경험적인 현실적 기를 호(虎)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호랑이는 기를 생생하게 체감함을 상징한다. "용은 구름을 따르고 호랑이는 바람을 따른다"는 관념이 그것이다. 호달인신이란 사람의 몸이 바로 그러한 생생한 기를 함축하는 존재임을 자각하라는 의미이다.

<제13로> 서
신기(神氣)을 정돈하여 고요히 서서 용천혈(湧泉血) 일어서는 기운을 다리의 중심으로 밟노라. 가슴을 세우고 겨드랑이에 기를 모으고 신기(腎氣)를 닫나니. 가슴을 펴고 손을 뻗어 열 손가락 근육을 펴네. 가득한 복기(腹氣)가 일어나 전신은 힘차고 음양(陰陽)이 화합하고 기혈(氣血)은 고르고. 오목한 허리에 두터운 배( )로 땅을 치나니( ) 접히고 겹치는 마디는 고르고. 돌고 돌아 다시 시작하는 가득한 물처럼 미려혈(尾閭穴:大海 밑의 혈-海水가 쉴새 없이 새는 혈)을 거두어 비로소 기(氣)는 온전(全)하네.

 定神氣立住根 提起湧泉 脚心
挺胸 筋兩腎閉 出手伸筋十指兮
堤起滿腹全身力 陰陽合合氣血均
凹腰  手 地 摺摺疊疊摺節準
周而復始兮量水 挽住尾閭始兮全
<제13로> 서의 음미
13로서에서는 신기(神氣)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기를 논함에 적절한 용어일 수 있다. 우리의 기에는 청탁(淸濁)이 있고 순잡(純雜)이 있다고 보는 것은 맹자(孟子)이래의 믿음이며 이 기가 현상경험(現象槪念)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주목한 성리학(性理學)적 견해로는 순수한 맑은 천기(天氣)가 경험 가능한 현상으로 전환 발전되는 과정을 신(神)이라고 하고 본래의 순수한 기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귀(鬼)라고 한다. 기의 실체를 전통적 귀신개념을 빌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 귀신논(鬼神論)을 확충하여 보편언어 혹은 논리적 언어로 대할 때 그 설명은 극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고 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순수한 본연의 기와 나의 기와의 관계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의 기의 근원은 우주자연이로되 나의 생명과 함께 나의 질체(質體)로 확정된 기는 오직 나의 기이다, 나의 생명과 관계하고 나의 존재의 기초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나의 기를 개별화된 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 개별화된 기는 외부에 존재하는 일반의 무한정의 불획정(不劃定)의 근원적인 기와는 분별되면서도 동시에 동질성을 지닌다.

 

동질성이란 개별적인 기가 일반 보편의 기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유추되는 것이다. 개별성이란 그 동질성이 일정한 구조 안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기의 이 양면성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균형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화담 서경덕선생에 의하면 기는 시작도 없고 범위도 없는 것이지만 이화(二化) 일묘(一妙)의 작용을 행한다. 그 작용의 주재력(主宰力)을 리(理)라고 부르지만 이 두 가지는 동질적인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주의 근원물질로서의 기는 현상 경험체와의 사이에도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작이 있고 존재의 범주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묘화작용(妙化作用)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신기는 문자 그대로 순수한 기의 본연이 모습을 말한다. 내 내면의 그 신기는 나의 의지와 결합하여 행동으로 변환하면서 나의 개별기로서의 특징을 발출하게 된다. 개별기로서의 나의 기는 그 개별적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오로지 나만의 이유속에 제한된다면 나의 순수한 원기는 그 제한의 수조 속에서 제한되고 묶이어 그 본연의 효용을 발휘할 수 없게된다. 그러므로 의지와 사려의 개방성이 필요하고 행동의 절제가 필요하다. 행동에서의 절제란 내마음만을 따르고자 하는 편의적 행동이며 바로 그 편의적 행동을 절제함으로서 자연히 사적 제한성을 완화하고 기로서의 본질성을 확충하게 된다.
그같은 관점에서 기공의 동작은 자연스럽고 단순성이 강한 동작으로서 혹은 일상의 동작의 관습성을 탈피하는 방향을 추구함으로써 그 절제의 묘를 실현할 수 있다.

 

비정형의 원기인 신기(神氣)는 발바닥 상부 중앙의 신기를 타고 가슴으로 올라 활성화된다. 흉중선의 좌우가 그것이다. 가슴을 세우고 겨드랑이에 기를 모아 신기(腎氣)를 닫는다는 것은 제3세를 언급한 것으로서 겨드랑이에서 팔에 이르는 근육의 긴장과 손의 수세(收勢)을 통해 자신의 내기를 확고히한다는 말이다.
가득한 복기(腹氣)가 일어난다는 것은 3세의 공용을 말하였고 이 동작에서 임맥(壬脈)이 팽만하여지게 되고 그 근육의 긴장선을 따라 그 안 선 배부인 복부의 기가 활성화 됨을 말한다. 제 3세를 마치고 서는 동작에서는 굽힌 손의 외반한 손바닥의 팽만함이 족부와 연결되면서 이미 활성화된 복부 내의 기가 상하로 원활하게 유동하게 된다.

 

<제13로> 통설 해의
호달인신의 의미는 호랑이가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제13로서에서 말한 신기(神氣)를 신기(腎氣)로 거두는 과정을 싱징한 말이다. 바로 팔을 지면에서 붙였다가 상체를 들어올리는 그 동작을 말한 것인데 발 끝이 지면에 닿아 외반하면서 용천혈을 열게되므로 팔과 복부근육으로 발출된 강한 힘이 그 내면에서 내기의 급속한 활성을 유도하고 그 활성은 흉선을 타고 열린 용천혈로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그러므로 호랑이란 결국 나의 강한 힘의 발출로 유도된 최상의 활성화된 기의 표출상을 두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어서서 손바닥을 외반하여 굽혀올린 동작을 두고 말한 것이다. 가득한 복기가 일어난다는 것은 복근의 긴장에 비례하는 복강 내부의 기의 전환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람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장난이 아닌 놀이'일 수 있다. 기공도 크게 그와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장난이 아니라는 말은 현실의 삶이며 생명의 영위와 직결되고 생노병사와 연관된 실체의 흐름이 바로 우리 삶이라는 뜻이며 놀이란 사람이 고안하여 즐기고 기쁨과 유쾌함을 느끼며 심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여유를 넓혀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굳이 유아나 어린이 용어를 구사하는 것은 사람의 지성과 과학와 철학의 심오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어느 선에서 스스로의 판단력과 기호에 따라 의심함이나 주저함 없이 자연스럽게 결단하여 살아야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잘 짜여진 매너나 예의 형식도 사실은 그와 동일한 이유 위에서 성립한다. 다만 예의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보다 엄숙주의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계획된 의도적 행동 가운데 심정적으로 지나치게 인위적 엄숙성이나 실용적 효용성을 일탈해 벗어난 것을 기공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기공이란 초탈을 지향하는 행위예술이기도 하다. 칼을 쥐어도 공격을 위함이 어니고 주먹을 쥐어도 타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힘찬 타격을 행해도 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칼을 휘둘러도 남을 해치려는 것은 아니다. 모두 스스로를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일환이다. 나의 세계 안에서 나의 공간에서 결국은 나의 우주 곧 나로 인해 의미를 오직 획득하는 그런 시공에서 우리가 스스로 벌이는 그런 순수한 퍼포먼스이다. 그러므로 그 동작의 하나하나에는 완전하고 독립된 의미가 자유롭게 부여됨으로 인해서 더 초월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런 동작이다. 글겁지 않다면 군자가 아니다라는 논어의 학문적 명제는 기공에서 그대로 체감되고 실현된다.
그러므로 기공은 즐겁고 가장 간편하고 쉽게 인지되는 행동양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라도 조급하거나 유목적적이거나 하는 이유로 체감적 의미적 행위 이외의 원인을 가지려는 것은 기공에 대한 모독이다. 기공은 학(學)의 즐거움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기공은 순기(純氣)의 청정함을 그리고 막힌데 없는 광통성(廣通性)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13로세
제1세-양협생풍(兩脇生風)
양쪽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다
두 발은 바로 선다.
두 손바닥은
아래로부터 서서히 들어올린다.
손바닥과 팔이 어깨와 거의 나란히 하고
숨을 들이쉰다.(71도)

제2세-사주현공(四柱懸空)
4기둥을
허공에 매달다
위 행공식에 이어 두 손바닥을
아래로 곧바로 내린다.
숨을 내쉰다.(72도)
71도 72도를 올리고 내리기로
8차례 행한다.

제3세-사사탑지(死蛇榻地)
죽은 뱀이 땅에
길게 드리우다
전신을 아래로 엎드린다.
두 손바닥과 발은
그 끝을 땅에 대고
그 나머지 전신은 나란히 지면(地面)에서
떨어질 정도로 붙인다.
숨을 내쉰다.(73도)
다시 팔뚝의 힘으로 전신을 버티고
머리는 조금 든다.
숨을 들이 쉰다. (74도)
8차례 오르내린 후 그친다.

제4세-흉전괘인(胸前掛印)
가슴 앞에
관인(官印)을 걸다
바른 자세에서 두발 옮기어
一자형으로 한다.
두 손바닥은 팔뚝과 함께
수평(水平)되게 하고
장심(掌心)은 밖으로 향한다.
호흡을 고른다.
오래 정지해 있을수록 좋다.
피로해지면 바로 서서 잠시 쉰다.(75도)

 

<제13로> 각세 분석
양쪽 겨드랑이에 바람이 인다는 것은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극천(極泉)혈을 연다는 의미로서 유두 주변을 지나 임맥(任脈) 전중혈( 中血)을 중심으로 흉중선을 상하로 연결해 눈과 소장에 이르는 기혈을 열어두게 된다. 복근 중심의 힘의 발출을 위한 준비동작일 것이다.
4기둥을 허공에 매단다는 것은 두팔을 땅으로 내려 짚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다음 자세의 준비를 위한 동작이며 극천을 열어 그 내부 경락의 흐름을 체감으로 거두어 팔을 지면으로 늘어뜨린다. 이 동작만으로도 복강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죽은 뱀이 길게 드리운다는 것은 전신을 땅으로 가까이 굽혀서 대는 동작의 자세를 설명한 것이다. 뱀은 화기(火氣)를 조장 상징하므로 이 행공이 내기의 활성을 거두는 동작임을 상징한다.
가슴 앞에 관인을 단다는 것은 수공동작으로 곧은 정립의 자세를 지칭하려는 말이다.

 

제14로 진단대곤(陳團大困): 진단이 크게 고단함을 이기다
<제14로> 제설
진단이란 인물은 진단(陳 )의 단( ) 자를 음사하는 과정에서(團tu n과  tu n은 동음) 단(團)으로 표기하게 된 것 같다. 그는 10세기 말의 인물로 오대(五代) 후당(後唐)에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무당산(武當山) 화산(華山)에 은거하여 스스로 부요자(扶搖子)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송(宋) 태종(太宗)은 희이선생(希夷先生)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진단은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는데 여러 대를 전하여 주돈이(周敦 )의 태극도(太極圖)가 되었다. 퇴율(退栗) 성학도(聖學圖)의 선구적 도식으로서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상수철학(象數哲學)의 기초로 확립되었다. 특히 그의 저서로 지현편(指玄篇)이 있는데 도인(導引) 양생(養生) 환단(還丹 : 還魂蘇生,不死丹方)을 논한 것이었다.
기공의 근원이 이학(理學:性理學)에 기초를 두고 단구(丹邱:신선의 밝은 세계)의 방술(方術) 같은 청정한 의념으로 양생(養生) 도인(導引)의 길을 따라 수행되어야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제14로> 서
노승(老僧)이 진단(陳 )을 찾아 휴면(休眠)을 배우노라. 대퇴골 일으켜 힘차게 딛고 현현(玄玄)한 도(道)에 오르도다. 배에 가득 단전(丹田)의 기(氣)를 모으니 팔벼게 하고 번잡한 세속의 풍진 속을 벗어나 쉬도다. 다리를 펴 허리 아래 기를 내리고 등뼈를 곧추세우니 해와 달은 빛나며 눈앞에 있도다. 옥토끼는 동편에 올라 아득히 깨지도 않았고 황금 까마귀는 서쪽으로 져 선좌(禪座)에 들었도다. 평생 온갖 문자에 매인 가르침 받아 다하였더니 구차한 화초(花草)보다 좋으니 등한(等閒)할 일 아니로다. 만약 뜻이 굳고 공부가 커진다면 음양이 모두 고르고 탐하여 애련함이 없으리로다.
老僧訪學陳 眠 腿起 力膝玄玄
滿腹提盡丹田氣 曲肱而枕休厭煩
鋪腿下腰立後脊 日月生光在目前
玉 東昇遠未醒 金烏西墜 入禪
生平受盡盡字累 善於偸花非等閒
若能志堅工夫大 陰陽兩兮莫貪戀

<제14로> 서의 음미
노승(老僧)이란 속기(俗氣)의 일탈을 강조한 말이며 진단(陳 )을 말한 것은 성리학적 발전의 여맥을 받고 있음을 말한다. 진단은 당말 송초의 새로운 학풍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불교 도교에 치우친 중국의 정신계를 다시 전통적인 지성과 종교의 균형을 중시하는 고전적 원상으로 돌아가게하는 문예부흥적 분위기를 열어간 선구적 학자의 한사람이다.

 

현현의 도란 성리학적 발상으로 재편된 도불융회(道佛融會)의 정신을 지칭한다. 옥토끼는 신화적 언어로서 월신(月神)의 음기를 까마귀는 태양신의 양기를 상징한다. 문자(文字)의 가르침을 다하고 선좌(禪座)에 들었다는 것은 경전(經典)의 정신과 유교의 봉선(封禪)에서 말하는 천제(天帝)관념과를 통달하고 도불융회의 경지를 추구함을 말한 것이다.

 

삼족오(三足烏)로 표현된 고구려의 상징문장(象徵文樣)과 상통하는 등 신화시대(神話時代) 이래의 장구한 이상추구 전통을 집성한 수행(修行)과정임을 말하였으며 동이족(東夷族) 천자인 요순(堯舜) 이래의 성인설화(聖人說話)에 전하는 것임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환단(還丹)이라는 용어가 환단(桓檀)과 통하는 의미임은 의심하기 어렵다. ( 桓hu n 丹d n 桓hu n 檀t n) 환이란 밝다는 의미나 소생의 의미롤 나태내어 소생과 양생의 의미를 지니고 단이란 신선술 혹은 신선의 세계를 지칭하여 선계(仙界)라는 이상세계를 나타낸다. 선성(仙聖) 융통(融通)의 이상을 말하고 있다.
특히 "문자(文字)의 가르침을 다하니 여러 화초(花草)보다 좋다"고 한 언설은 경이로운 빛나는 텍스트어로서 문자와 자연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깨우쳐 말한다. "탐하여 애련함이 없다"는 것은 자연성정(自然性情) 대로 살되 지나침이 없다는 중용의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이상을 설파한 말이다.

<제14로> 통설 해의
진단대곤(陳 大困)이란 진단의 도설(圖說)을 문자적으로 체득하는 여려움과 그 문자적 가르침을 수행하여 다하는 바로 그 배움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가의 신선방술이나 불가의 선교적 기르침에 치우치지 않고 경전과 문자의 가르침을 회통하는 공부의 중요함을 지적한 핵심적 언설이다.

 

문자의 가르침을 다하였다는 것은 문자를 살아 있는 의미의 세계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문자란 무엇인가하면 경전의 문장일 수 있고 삶의 예의 형식일 수 있으며 친근한 말일 수 있고 삶에서 느끼는 일상의 정념일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변화상도 그 밖에 있지 않다. 모든 경험적 현상을 문자(文字)라고 말하였고 문자를 다하였다는 것은 그 경험을 뛰어넘어 오로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마음이 없으면 만물도 없으므로 여러 초목보다 좋다고 하였다.

 

도인술 양생술 등으로 신비로운 비술로 여겨온 기공이 사실은 우리문명권의 시초부터 모색해온 이상적 삶을 살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이었고 이 문명권의 여러 민족과 문화를 관통하여 유통하는 보편한 일대 운동이어왔음을 직솔하게 인정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국가 초기시대의 군무(群舞)의 축제시대를 반영하고 산정에 도시를 건설하고 천지를 경배하며 태양을 숭앙하고 달을 숭배했던 고구려의 신앙과 통하였으며 인도의 명상술과 불교의 좌선법을 수용하였다. 요순 시대 이래의 삶과 문명적 이상을 표현하고 공자 맹자 이래의 군자학의 성과로 집대성한 유교 경전의 주옥같은 문장을 그 속에서 새롭게 용해하여 성리 도학의 아름다운 미학으로 재정립하였으니 우리 문명권의 한떨기 꽃이다.

제14로세
제1세-정저재화(井底裁花)
우물 밑에
꽃을 심다
먼저 정중(正中)의 자세로
바로 서서
오른 손바닥과 머리가
가지런해 보이게 한다.
왼손바닥은 오른 쪽 겨드랑이 아래로 거두고
오른 편을 향해서 내미는 자세를 취한다.
동시에 왼발은 뒤로 뻗어 펴낸다.
오른쪽 전방(前方)을 주시(注視)한다. (76도)
다시 위 동작을 이어
왼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손과 발은 서로 상반(相反)된 자세를 한다.
좌우로 각각 8차례 행공하고
호흡을 고른다(77도)

제2세-찬권벽차( 拳劈 )
주먹을 모으고( )
팔을 갈라(劈 )치다
오른 쪽을 향해 오른 다리를 곧게 펴고
복퇴식( 腿式)자세를 한다.
오른 주먹은 배에서 횡(橫)으로 걸친다.
왼 주먹은 팔을 굽혀 아래로부터 위로 들어올려
좌추식(挫 式:꺾고치는 자세)을 한다.
오른 쪽 전방을 주시하여
78도와 같이한다.
다시 자세를 바꾸어 왼편을 향하고
손과 자세는 앞의 자세와 상반되게 한다.(79도)
각각 모두 8차례 행공하고
호흡을 고른다.

제3세-유전진과(劉全進瓜파)
유전(劉全)이
외(瓜)를 올리다
두 다리와 발을 모으고
발과 다리를 열어 八자형을 이룬다.
두 손바닥은 위로 높이 들고 (80도)
숨을 들이쉰다.

제4세-부수탁력(浮水度力)
물에 떠서 힘을 가누다
위 행공을 이어 두 손바닥을 위로부터
서서히 내린다.
어깨와 나란해지면 그친다.
숨을 내쉰다.(81도)
위의 행공과 함께 8차례를 행하고 그친다.

<제14로> 각세 분석
우물에 꽃을 심는다는 것은 기의 근원을 북돋운다는 말일 것이다. 어깨를 들어 겨드랑이를 노출하는 동작의 의의를 말한 것이다. 수기를 띠고 있던 심경(心經)의 극천혈(極泉穴 : 일종의 샘:팔 겨드랑이 내의 유두측 중앙 위치 내선 점)을 깨우고 심포경(心包經)의 천천혈(天泉穴: 팔의 유두측 내선 점)을 쇄신해 바람이 들어 그 자극으로 기공이 생성되기 시작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주먹을 모은다는 것은 심포경락(心包經絡)의 노궁혈(勞宮穴)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발을 갈라친다는 것은 복퇴식 자세를 말하는데 한 발은 신경(腎經)의 용천혈(湧泉穴:발 끝 중앙)을 또 한 발은 역시 신경(腎經)의 수천(水泉血: 뒷꿈치 위 앞 복숭아뼈 아래)을 딛는다. 이 역시 천혈(泉穴)이다.
유전(劉全)이 외를 올린다는 것은 아마 한 대(漢代)의 악부(樂府) 시에 전하는 전설상의 협객(俠客) 유생(劉生)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외(瓜)를 올린다는 것은 이팔십육(二八十六:瓜分의 나이=瓜를 두 개의 '八'字로 이해한 경우)의 젊은 혈기를 지칭하는 말로 생각된다. 여덟팔자의 보폭과 손동작을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다.
물을 떠서 힘을 가눈다는 것은 발과 겨드랑이에서 발출하는 3개의 천혈(泉穴)의 기를 거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제15로 부자청례(父子請禮)부자가 예를 청하다

<제15로> 제설
부자가 예를 청한다는 것은 우주간의 생명생성(生命生成)의 기본정신을 묘현한 말이다. 행공시에 부자 사이의 친근한 의식으로 천기(天氣)로서의 자신의 순기(順氣)를 엄숙하고 자연스럽게 느끼고 받아들여야함을 말한 것이다. 허리 쪽에 권(拳)과 장(掌)을 모으는 동작과 좌우로 한 팔을 낼 때 다른 한 팔을 팔뚝에 붙이는 자세를 형상화한 것이다. 대개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삼강(三綱)의 첫머리로서 천도(天道) 인륜(人倫)의 중심이다. 자연정념(自然情念)에 기초하고 격물궁리(格物窮理)의 자명(自明) 정신에 따라 수행한다. 그리하여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정신에서 비롯하여 효(孝)로 발전하며 인(仁)으로 완성하는 충실광휘(充實光輝)의 경위(經緯) 대법(大法)을 세워나아간다. <<논어(論語)>>에서 효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한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맹자(孟子)>>의 친친급인(親親及人)이란 말씀이 역시 그와 같은 의미를 설파한 것이다.

<제15로> 서
갇힌 기운을 일으키고 허리를 낮추어 버티니 몸을 돌리는 좌우마다 열 사람의 틈이로다. 결국 자연을 따라 행공을 이루리니 어찌 반드시 노력하여 무리하게 행하랴. 다리의 중심을 펴고 충만한 힘으로 딛고 서서 허리와 신기(腎氣)를 돌리되 세미(細微)한 동작이 되도록 하라 음양이 다 온전하니 무엇을 염려하랴. 언제나 고르게 조기(調氣)하여 닦고 길러야 하리라.
提起 腰崩 掌 返身左右十家闖
終須自然功有成 何必勞力使勉强
挺挺脚心 滿力 轉轉腰腎細回想
陰陽兩兮有何慮 摠是調氣要修養

<제15로> 서의 음미
갇힌 기운을 일으킨다는 것은 나의 기가 나만의 것으로 폐쇄적으로 인식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의 육신과 마음 나의 정서와 기분은 적어도 의미(意味)의 세계 속에서는 무구별적(無區別的)인 것임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허리를 낮추어 버틴다는 것은 행공시에 겸손한 경외의 념으로 나를 지킨다는 뜻이다. 몸을 돌리는 좌우마다 열 사람의 틈이라는 것은 인간(人間)을 주목하라는 말이다. 인간(人間)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국조(國祖)이신 단군(檀君)의 신화(神話)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한 말씀이 그 깨달음의 단서를 열었던 것이니 천상의 언어요 지상의 빛이다. 나의 생명과 기운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뜻이다. 모두 함께해야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의 사이는 사실 위대하다. 사람과 사람의 틈은 우주의 뜻과 자연의 의지가 유동하는 의미충만(意味充滿)한 공간이다. 우리는 공간의 존재라는 깨달음을 말한다. 내 스스로 그 의미로 충만한 세계 나의 주변의 그 가까운 세계에 나를 열어 영접하라는 말이다. 나 스스로 나 속에 닫히어 갇힐 때 나의 생명은 결코 빛나지 못한다. 내 생명은 활기를 더하지 못한다. 나의 생명과 자연 우주의 생명이 교류하여 유통할 때 나의 영적 질체는 비로소 그 의의를 다하게 된다.
"부자청례란" 결국 나의 행공자세를 오로지 의미로서 받아들인다는 행공의식을 표현한 말이다. 의미를 통해서만 나의 육신과 마음은 격의 없이 삼라만상과 교류하고 유전될 수 있다. 행공을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물론 다른 행공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제15로> 통설해의
하나의 도(道)의 깨침의 과정으로서 행공수행(行功修行)을 논할 경우 우리는 그 본질의 일반성에 주목하게 된다. 행공은 문자적인 도의 탐구가 아니고 불립문자적 명상적 직관적인 도에의 접근도 아니다. 또한 신비적 양식의 극한 일치의 체험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그 무엇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행공은 실천이나 결행의 행동주의적 입장으로 정의하지 않을 수 없다. 매 순간의 행동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나의 삶의 양태 중에서 바로 그 행동들을 주목하는 것이다. 나의 몸이 가는 길 - 발걸음 팔 벌림 숨쉬기 손들고 발 들고 몸을 흔들거나 굽히는 동작 - 그 모든 나의 몸의 자유로운 모습 갖기 그 자체가 행공의 주제어(主題語)이다.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도에의 접근을 지향하는 시도로서 행공수행론은 자연이 행동의 중심인 심의 의지와 연관을 지우게 된다. 맹자(孟子)의 "의지가 기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정의가 유효하고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가 행동과 동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행동양식에 대한 의미론이 필요하게 된다.

 

환언하면 행동주의는 필연적으로 의미나 미학을 그 도에의 접근의 통로 혹은 매개 수단으로 하여 행공을 일반의 심오한 도론(道論)의 경지로까지 승화 고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단 한 줄의 필선으로 구성된 예술작품에서 일정한 승화된 품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이므로 하물며 고결한 의지를 몸으로 함축하는 인간의 동작을 반추하는 것은 스스로 진정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여기 15로에서 행공을 예(禮)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그 스스로 빛나는 행공론(行功論)일 수 있다. 행공의 본질과 핵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의 본질은 천지(天地)의 절문(節文)이다. 다시 말하여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질서이며 미학이라는 말이다. 예학(禮學) 스스로가 도학이며 철학이고 예술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방대한 이미의 기공론이 힘차게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위대한 문명의 힘이다.
우리는 우리 문화권이 폭넓고 무한한 깊이의 사유의 힘을 축적하게 된 것은 그들 역사적 삶의 개방성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문명교류사의 주축으로서 3 S 통로라는 개념을 말한다. 북방의 Steep Road Silk Road 그리고 해로인 Sea Road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문명 교류의 통로는 상상을 불허할 만큼 자유로웠고 활발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서 우리 문명권은 적어도 3중의 십자가 모양(Triple Cross Shape)의 문명적 틀을 형성해왔다고 믿는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최북방의 구이(九夷)문명권 남방의 황하문명권을 상하를 관통하는 중심선을 바탕으로 하여 그 요람적 구조의 주축 위에 동서의 제2의 삼중 문명구조가 탄생하였다. 예를 들어 상부에는 중앙아시아 화북 동북아시아라고 하는 연결선이 하나의 십자가를 이루어왔고 그 위에 다시 인도 화중 한반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연결선이 제2의 십자가를 이루었으며 이 제2의 십자가는 역사상 최후로 분화하여 인도-하남 성리학문명권과 소림문명권 - 조선왕조 성리학문명권 불교문명권으로 최종 완성되었다.
십자형의 완결된 문명 구조는 사람의 사유와 창조의 폭을 무한대로 확대해주었고 각자의 도론을 심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문명의 혜택 속에서 무공이었던 행공은 높은 정신과 도를 구현하는 이상적인 형식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를 전통적 개념으로 문무(文武)의 만남이라고 정의할 수 있고 유불도(儒佛道)의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단적으로는 인도 중국 한국의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십팔로 나한공의 행공도식은 그와 같은 교류와 화합의 정신을 유감없이 완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중국 불교에서 신라의 승려가 나한으로 봉안되었다는 최근의 연구는 그러한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제15로세
제1세-반신당추(返身撞 )
몸을
돌려 치다
왼발을 뒤로부터 보폭을 변경해
오른 쪽으로 향하고
오른 주먹은 왼편 허리에 거두고
왼편 손바닥은 오른편 허리에 붙인다.(82도)
숨을 내쉰다.
(註 : 原文에는 父子가 3번 禮를 청한다고 하였는데
편찬자가 일단 三字를 삭제하였다. 양해를 바란다.)
위 행공을 이어 다시 발을 열어
왼발을 왼쪽으로 옮긴다.
등산식(登山式) 자세를 한다.
오른 주먹은 똑바로 왼편으로 내뻗고
왼 손바닥은 오른 팔뚝부분에 붙여
83도 같이 밀어낸다.
숨을 들이쉰다.
위의 두 행공을 합쳐 8차례를 행하고 그친다.

재2세-파도천근(把刀千 )
온힘(千 )으로
칼을 쥐다
제1세의 82도와 83도를
상반(相反)되게 한다.
(84도와 85도와 같이 함)
각각 8차례 행공한다.

제3세-반신고수(返身 手)
몸을 돌이켜
손을 당기다
오른 발을 왼쪽으로 변경한다.
두 주먹은 나란히 오른쪽 허리로 거둔다(86도)
숨을 들이쉰다.
위 자세를 이어 오른 쪽으로 몸을 튼다.
등산식(登山式)을 이룬다.
두 주먹을 가지런히 평행되게 내민다.(87도)
숨을 내쉰다.
다시 왼쪽을 향해 몸을 튼다.
86도의 자세로 돌아온다.
위 두 자세를 모두 8차례 행한다.

제4세-패왕예방(覇王 方)
패왕(覇王)이
배를 끌다( 方)
위 자세 86도 87도와
상반되게 한다.
(88도와 89도같이 한다.)
역시 모두 8차례 행한다.

<제15로> 각세 분석
몸을 돌려 친다는 것은 투보식 자세에서 주먹과 손바닥을 허리에 거두었다가 등산보로 전환하면서 좌우로 내밀어 벌리는 동작을 말한 것이다. 투보식과 허리 수렴 동작은 나의 기를 자각하는 과정이며 정돈하는 과정이다. 다리를 열고 밀어 내미는 동작은 나의 기에 변화를 주어 쇄신을 추구하는 동작이다.
다른 로의 행공에서보다 이 행공은 더 심의적 측면이 강조되었고 나와 외부의 관계를 음미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온 힘으로 칼을 쥔다고 하고 다시 몸을 돌려 손을 잡는다는 이식이나 패왕이 배를 끈다는 표현은 역시 인간적 기공의 경우도 언제나 나의 튼튼한 기를 중심으로 해야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말하자면 개념적으로는 자명(自明)을 특히 강조하는 뜻으로 보아야한다. 환언하면 명덕(明德)이 행공의 이상이지만 그것은 명확한 자기체험 즉 자명(自明)을 통해 이루어져야하는 것임을 말한다. 대학(大學)의 제1장에서 "모두 자명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 <제15로서>에서 세미한 동작을 강조하고 바르게 조기(調氣)하라고 한 것은 그러한 의미를 음미하는 행공이 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제16로 리어타정(鯉魚打挺): 잉어가 차오르다.
<제16로> 제설
"리어타정"은 자연 형세로서의 행공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인다. 다리를 넓게 열고 몸을 뒤로 떨어뜨리는 동작을 표현한 말이다. 제 1세 표제에서는 "황룡이 몸을 뒤틀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현세의 구체적인 용을 거론하여 자연형세 표현한 말임을 다시 보였다. 아울러 일상에서 시연하기 어려운 역동작을 수행함으로써 고유한 나의 내기(內氣)의 절실하고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자각할 것을 말한 것이다.

<제16로> 서
천각(千脚)이 땅을 치고 몸을 뒤틀어 올리네. 기력(氣力)을 올리니 혈기(血氣)는 용솟음치고, 오목한 허리에 배는 틈실하고 뼈마디 단단하도다. 행공을 이루어 자만하지 않아 힘은 맹폭(猛暴)하지 않고 몸은 견고하고 체격은 장대하여 쉽게보지 못하리니. 기혈을 고르고 장중히(莊重) 정연히(整然) 있도다. 18문호(十八門路) 행공은 다함이 없나니, 각각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를 깨치기 어렵도다. 현명한 스승도 찾아드는 벗처럼 오묘하지 못하리니 겸허한 마음으로 항상 한결 같으라.

千脚 地 身挺 登盡氣力血氣湧
凹腰  合節骨 功成未滿力不猛
身堅體壯非容易 調調氣血在重整
十八路門用不盡 各有奧妙竅未醒
賢師不及訪友妙 虛心常在成一摠

<제16로> 서의 음미
"현명한 스승도 자주 찾는 벗처럼 오묘하지 못하다"라는 말은 형언하기 어려운 수행의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도(道)에 대한 열정은 겸허한 자기탐구를 위주로 수행되어야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학습(學習)임을 통렬하게 지적한 말이다.
<<논어(論語>>>서두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또한 않은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왔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분하지 않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배움이란 나 속에 있으며 나에게 달려 있으며 인격체로서의 나 스스로가 그 목적임을 말하고 있다. 행공이 본질적으로 배움-학습의 과정임을 말한 것이다.

 

대개 학습이란 어떤 주어진 진리이해 결과를 습득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진정한 학(學)의 본의는 그런 것은 아니다. 학(學)이란 스스로의 눈으로 만물을 수용하고 의미를 풀어낼 수 있는 즉 순수한 자기 체험으로 세계를 자신 있고 당당하게 상대하는 지적 소양을 말한다. 그리고 습(習)이란 그 소양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창조적으로 수행하는 생활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벗이란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동시에 그 학습의 상대 시공초월적(時空超越的)으로 지칭한다. 학습적인 삶의 장에서는 그 벗은 문헌일 수 있고 한 떨기 꽃일 수 있고 흐르는 물일 수 있고 흐르는 바람일 수 있다. 의식 속의 역사상 현인일 수 있고 이름 없는 촌노일 수도 티 없는 소년 소녀의 미소일 수도 있다.

 

습(習)이란 일상의 흐름 속에 재구성한 학의 체험이다. 칠순 잔치 같은 공식적으로 장중하게 표현된 경애의 념일 수 있고 국경일 같은 공동체험의 경험일 수 있고 예를 들면 해방의 감격이나 월드컵 승리의 기쁨일 수 있으며 부모 자녀사이의 자애를 구현하는 정겨운 삶일 수 있고 한 순간으로 일치의 정점을 체험하는 부부의 사랑일 수 있다. 목숨으로 지키는 곧고 굳은 정절일 수 있고 사투를 헤쳐가는 강철같은 책임감일 수 있다. 깊고 깊은 고뇌를 이겨내는 인내의 처절함일 수 있고 화가의 붓끝에 혹은 지휘자의 손끝에 일어나는 예술의 혼 불일 수 있다.
행공 수행이 그러한 일반의 학적인 삶의 일환임을 말한다.

<제16로> 통설 해의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끔 묻게 된다. 왜 사느냐고... 그러나 그 스스로에 대한 물음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은 인위적 이유에서가 아니고 자연의 의지의 표현이며 우주 자체의 자연적인 힘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묻는 것은 사실은 삶이 고통스럽거나 소망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나 세계 이해에 혼란이 생기게 된다. 심신이 평온한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자연적인 받아들임 그 자체가 스스로 진리와 일치되기 마련이다. 자하(子夏)가 "비록 배움이 없어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리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를 지칭한다. 성인이 "생이지지(生而知之)"하였다는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도전으로 가득하며 사람의 생명은 매순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인간(人間) 가운데서 침해되는 모순을 일으킨다. 사람이 그 뛰어난 능력으로 인하여 자연의 제한과 장애를 이겨내고 자신들의 생명의 영역을 확보하고 넓히는 성과를 이룩하여왔으나 오히려 그 과정에서 2차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구성하는 제3의 공간인 인간계(人間界)를 구축하였다. 가장 강고한 생물학적 공동체인 인간구조(人間構造)는 개인의 자연인격성을 침해하고 나아가서는 자연계를 침해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러한 모순을 초탈하고 자연성의 회복을 위해서 역으로 다시 필요하게 된 생태학적 생물학적 체계가 학습(學習)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든 학문이 진리를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이해나 해탈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수행과 학습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바로 우주적 본질성과 자연적 환경성 인간적 구조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서만 우리가 이상적 삶을 이룩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고안된 개념이 삼재사상(三才思想)이다. 그 삼재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중용정신(中庸精神)이다. 중용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 대학(大學)이다. 대학의 골간은 명덕(明德)과 자명(自明)인데 명(明)이란 모든 창조된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미학어(美學語)이다. 자명이란 그 창조의 구체적인 과정을 통칭한다. 그 과정은 고통과 보람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모순과 격돌이 굉음을 일으키는 역동의 과정이다.

 

행공의 과정은 바로 그러한 자명 수행의 실험적 과정이다. 우리는 가장 생생한 삶의 고통의 현장에서 그 모순의 한 가운데서 끝 간 데 없는 좌절의 중심에서서 우리의 문명이전의 소박한 본질로 돌아가는 자세로서 그 삶의 원초의 육체를 그대로 딛고서서 그 야만의 몸짓을 팔다리로 그리며 행공을 시작하고 그 행공의 장 앞에 문명의 핵심어들을 텍스트로 바라보며 야만과 문명을 되새김질하며 바로 그 야만과 문명을 잇는 외길을 새로이 개척하고자 한다.

 

제16로세
제1세-황룡반신(黃龍返身)
황룡(黃龍)이
몸을 뒤틀다
두 다리를 열어
1척(尺)의 거리로 밟는다.
전신은 뒤쪽으로 꺾어 내라고(拗落)
두 손바닥은 땅에 버티어 전신을 지탱한다.
무릎과 배와 가슴은 모두
평평하고 반듯하게 두고
90도 같이 한다.
다시 90도에서 손을 굽히고
몸을 땅에 밀착시킨다.
숨을 내쉰다.
다시 손을 똑바로 펴 일어난다.
숨을 들이쉰다.
모두 8차례 거듭한다.

제2세-곡궁고현(曲躬 絃)
몸을 굽혀
활줄을 당기다
왼발을 뒤로부터 오른 쪽으로 옮긴다.
오른 발을 당겨 붙인다.
오른 주먹을 아래로부터 뽑아올려
오른편 어깨에 머무른다.
왼 손바닥은 오른쪽 팔뚝 아래를 힘껏 밀친다.
91도 같이 하고 숨을 들이쉰다.
다시 오른 발을 돌려 뒤로부터
왼쪽으로 밟고
왼 발을 당겨 붙인다.
왼손 주먹을 역시 뽑아올려 힘차게
왼쪽 어깨에 붙이고
오른 손바닥으로 왼편 팔뚝아래를 밀친다.
92도 같이 하고 숨을 들이쉰다.
좌우로 동작을 바꿀 때는 숨을 내쉰다.
좌우로 각각 8차례 행공한다.

<제16로> 각세 분석
"황룡이 몸을 뒤튼다"는 것은 행공의 동작은 자연의 형세로 의식하되 기하학적 도형성이라든가 추상적 의미를 상상하라는 말이다. 전통적 용어로는 이를 천수상(天垂象)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왼편을 동쪽 혹은 목(木)으로 이해하고 오른편을 서쪽 혹은 금(金)으로 인식하고 앞을 남쪽 혹은 화(火)로 생각하고 뒤를 북쪽 혹은 수(水)로 이해하는 오행적 이해라든가 바로선 상태를 양(陽)으로 굽힌 상태를 음(陰)으로 파악하고 음양이 교차된 것을 태극으로 이해하는 경우와 같은 질서체계에 대한 이해의 노력을 행공의 한 순간도 쉼이 없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꼭 기존의 오행론이나 음양론은 그 한 방식이나 예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거기에 꼭 제한될 필요는 없다.

 

몸을 굽혀 줄을 당긴다는 것은 그물을 당기는 동작을 형상화한 말로서 기공의 동작이 문명어로 요약되어야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기공의 수행도 넓은 의미에서 문물(文物) 구현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고 창조적인 본질에 입각해 일상생활일반의 행동으로 구현되어야함을 말한다. 물(物)이란 생활상의 가치성을 문(文)이란 추상적인 절대가치나 미학을 말한다. 행공이란 전통적인 문물구현의 수행과정임을 강조한 것이다.

 

<<주역(周易)>> 곤(坤) 괘에서 현룡재전(見龍在田) 천하문명(天下文明)이라고 하였는데 용은 나의 심의(心意)를 나타내고 재전(在田)은 일상의 삶의 주체로서의 나의 삶을 말한다. 천하문명이란 "바른 심의(心意)로 살아가는 삶을 구현하여 온 세상이 아름답고 평화로워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제17로 장요헌포(張遼獻袍): 장요(張遼)가 도포를 바치다
<제17로> 제설
바로 위에서(16로 각세분석설) 이미 행공이 진절한 생활어이며 문명어임을 말했었다. 당연히 그 뜻은 역사자체 및 역사적 행동을 포함한다. 장료(張遼)는 A.D 171-221 년간을 살았던 사람으로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장수였다. 그는 조조(曹操)에 의해 순욱(荀彧) 곽가(郭嘉) 서황(徐晃) 등과 함께 발탁된 문무대신의 한명으로 으로서 190년 동탁(董卓)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의병을 일으켜 성장했던 조조의 세력에 동참하였다. 조조는 바로 호족세력을 포함한 그 문무신료를 성공적으로 영입함으로서 세력을 이루었다.

조조(曹操)에게 도포를 올린다는 것은 천하(天下)에 왕도(王道)를 구현하라는 진언(進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장료는 무력(武力)을 상징하고 헌포는 문덕(文德)을 나타낸다. 문무(文武)의 조화를 말하려 함이다.

<제17로> 서
어깨를 들고 손바닥을 밀어 한 발로 서니 용천(湧泉) 혈기(穴氣) 일어나 미려혈(尾閭穴)로 흘러드네. 단전(丹田)은 한 기문(氣口)을 열어두고, 용천혈은 열려 신경(腎經)을 뚫고 등으로 흐르노라. 기운이 움직이고 혈기가 충만하여 행공성적은 만족하고 4계절 공을 닦아 마음은 급할 것 없어라. 호흡으로 숨을 고르고 신기(神氣)를 기르나니, 무릅을 굽히고 허리를 낮추고 힘주어 몸을 낮추어 구부리라..
提肩推掌起單膝 挺挺湧泉轉尾閭
丹田閉住一口氣 湧開兩腎串後脊
氣行血足功成滿 四時用功莫心急
呼吸定息養神氣 曲膝下腰緊伏底

<제17로> 서의 음미
행공의 매 순간에 자신의 몸 질체 내부의 기의 흐름을 경락에 따라 민감하게 체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립세의 행공은 발 앞의 용천혈의 기를 강력하게 일으키는 내공의 힘을 위주로 한 행공이다. 이 경우에는 호흡조절이 극히 중요하게 된다. 다리에서 복부 아래로 올라오는 힘과 기를 거두기 위해 복부와 임맥(任脈)을 긴장하는 공(拱)의 자세로서 균형을 이룬다.
실제 행공의 과정이란 나의 심의(心意)에 이해 설계되고 의미가 부여되지만 전연 육체를 위주로 힘에 의해 수행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몸속을 흐르는 감각과 힘의 유동을 민감하게 지각하고 이를 호흡을 통해 감각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한다. 이런 점에서 경락(經絡)의 이해는 필수적이다. 경락이란 지체에서 몸의 중심을 통관하여 흐르는 12개 기의 길을 말한다.
그러나 도식적인 경락의 이해를 위주로 행공하는 형식을 강조한 것은 아니며 체내의 기의 순환을 스스로 조절하고 활성화하고 이를 감각하려는 노력으로서 충분히 그 의미를 다할 수 있다.
신기(神氣)를 기른다는 것은 힘을 위주로 한 행공의 과정이 결국은 심의적(心意的) 체험으로 승화 고양되어야하는 것임을 말한다. 심의적 체험이란 모든 일치적 감성을 말하는데 그 감성이란 의지(意志)와 오관(五官)과 육감(肉感) 사단(四端) 칠정(七情)을 포함한다.

 

제17로세
제1세-기슬포월(起膝抱月)
무릅을 들어
달을 안는다
왼 발을 들어
독립세(獨立勢)를 한다.
두 손바닥은 앞으로 서서히 펴고
공형상(拱形狀)을 한다.
숨을 들이쉰다.(93도)
다시 왼발을 땅에 착지하고
두 주먹을 허리로 거둔다.
오른 발을 뒤로 서서히 뻗어내밀고
94도 같이 한다.
숨을 내쉬고
다시 오른 발을 착지하고
93도로 돌아온다.
두 자세를 합쳐 8차례 행한다.

제2세-등력곡슬( 力曲膝)
힘차게 밟고
무릅을 굽히다
동작과 호흡과 횟수 등은
모두 위와 같다.
단지 좌우 동작의 차이만 있다.
95도 96도 같이 한다.

제3세-쌍추경붕(雙 硬崩)
양쪽으로 힘차게 짓쳐
힘차게 뻗어(雙 ) 내리다
오른 발을 열어 오른 쪽으로 보내어
등산식(登山式)을 한다.
두 손바닥은 가지런히 평행되게 내민다.
97도와 같이 하고 숨을 내쉰다.
다시 97도를 이어 몸을 돌려
오른쪽을 향하여 좌등산식을 한다.
두 손바닥은 동시에 밀어낸다.
98도와 같이하고 역시 숨을 내쉰다.
움직이는 동안에는 숨을 들이쉰다.
각각 8차례 행하고 그친다.

제4세-기마륵강(騎馬勒 )
말을 타고
고삐를 잡다
두 다리를 열어
八자형으로 한다.
발꿈치는 서로 반대되게 한다.
두 주먹은 팔을 굽혀 어깨와
평행되게 하고
호흡을 고른다.
99도와 같이 한다.
정지해 서서 극히 피로할 때가 되면
잠시 쉬어 행공을 완결한다.

<제17로> 각세 분석
무릅을 굽혀 달을 안는다는 것은 용천혈(湧泉穴)에서 올라오는 활성화된 새 기운이 몸의 음측(陰側) 임맥(任脈)의 파동으로 수렴된다는 기의식(氣意識)을 표현한 것이다. 올라온 가운을 공(拱) 자세의 포옹세의 두 팔의 내선(內線)을 타고 수(手)의 태음(太陰) 소음(少陰) 궐음(厥陰) 경락을 맴돌게 된다. 동시에 들어올린 발의 족(足) 소음 태음 궐음의 경락과 조응하게 된다.
힘차게 뻗고 무너뜨려 내린다는 것은 발출된 신기(腎氣)를 거두어 좌우로 펴고 확산하여 일반 경락과 교류되도록 확충한다는 기의 교환을 의식하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좌우 등산보 자세에서는 발의 무게 중심이 발의 외선(外線)인 족태양경(足太陽經) 족소양경(足少陽經) 족양명경(足陽明經)으로 주중되게 되어 양의 경락이 자극된다. 동시에 곧게 세워 팽배된 등의 독맥(督脈)이 이와 연결되어 새로운 기의 흐름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팔자형(八字形)의 굴립세(屈立勢)에서는 역시 위의 양의 경락이 고르게 추동된다. 위의 등산보에서 좌우로 출렁거리던 양의 경락이 안정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신(腎)의 정혈(井穴)에서부터 그 기의 유동이 확산되어 영락(營絡) 수락(輸絡)을 지나 합혈(合穴)에 이르러 안정되고 해혈(海穴)의 기의 파도로 수렴된다.

 

제18로 금구괘병(金鉤掛甁): 금 띠쇠에 병을 걸다
<제18로> 제사
"금구괘병"이란 금 띠쇠에 병을 건다는 의미이다. 우리 역사의 유물로 등장하는 동물형 대구(帶鉤)에서 보듯이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 유목문화의 유산에서 그 모습을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삼국시대 능묘유적에서도 금구(金鉤)는 대표적 유물로서 자리하고 있다.
병(甁)은 유목문화보다는 농경문화의 상징이다. 유목세계에서는 그 이동의 필요에 따라서 가죽 용기(容器)가 애용되었고 농경정착문화에서는 병 종류의 토도(土陶) 용기(容器)가 애용되었다.
그러나 금구(金鉤)란 표현은 이미 그 고도로 융합 발전된 문화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띠쇠에 병을 건다"는 것은 휴식을 의미하게 된다.
모든 격렬한 행공을 마치고 최종적으로 고요히 수렴한다는 의미를 싣고 있다.
<제18로> 서
한 밤에 행공하니 몸이 노고롭다. 음양(陰陽)을 정돈하고 자오(子午)를 분별하니 기식(氣息)은 충만하여 고르고 다리는 정강이와 교차하도다.두 손을 들어 해를 받드니 정신은 근골에 배고 힘줄을 펴 기운(氣運)은 화평하니 수양(修養)의 효 높도다. 한번 펴고 한번 밀어 두손을 치니 원마(猿馬)의 심의(心意)는 사라지고 없도다. 기운이 응하고 기이한 힘 솟아나 혈기(血氣)는 발동하지 못하는 도다. 마음을 안정하여 신기(神氣)를 기르나니, 효험은 빠르고 성공은 속하도다.

半夜用功身勞苦 起定陰陽分子午
調調氣息腿交脛  手捧日神筋骨
舒筋和氣善修養 一 一堆兩手 
心猿意馬鎖不住 氣應力怪血丕足
安定方寸兩神氣 立見效驗成功速

<제18로> 서의 음미
18로는 전체 행공을 완결하는 행공이다. 한 밤에 행공한다는 것은 맹자(孟子)가 말하는 밤의 자연의 야기(夜氣)를 수렴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밤은 인체의 생명의 기를 샘물처럼 고이게 하는 시후(時候)이다. 해자(亥子) 시의 수기(水氣)로 응축되는 기는 새벽의 인묘(寅卯)시의 목기(木氣)로 성장하는 원동력이다. 시간으로는 대개 밤 9시에서 시작하여 아침 7시에 이르는 시간이 야기의 범위에 든다. 그러므로 밤의 행공이란 9시경의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수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맹자의 야기설(夜氣說)은 조조청명지기(早朝淸明之氣)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며 천부의 양심(良心)을 바탕으로한 것으로 성선설(性善說)의 핵심을 이루는 논제이다. 인의예지(仁義禮知)라는 사단(四端)을 그 논의 골간으로 하고 의리지념(義理志念)을 중핵으로 한 것이다.
"원숭이와 말의 심의(心意)는 사라지고 없다"고 한 것은 역시 맹자의 금수론(禽獸論)을 풀어 말한 것이다. 맹자는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금수(禽獸)이며(仁과 관계됨) 수치를 알고 악을 미워할 줄 모르면(義와 관계됨) 금수이고 사양할 줄 모르면(禮와 관계됨) 금수이고 옳고 그름을 가릴 줄 모르면(知와 관계) 금수라고 하였다. 즉 맹자는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때 금수(禽獸)란 짐승이라는 말이지만 비인(非人)이라는 뜻을 강하게 표현한 말이다.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에 있어 인의예지는 최소한의 인간의 조건이었다.
인간의 범주 사람의 경계 즉 Hunan Territory 로서의 인간(人間) 개념은 우리 단군 신화의
기본 명제였으며 이는 공간적 사람의 세계를 넘어 질적으로 인간다운 공간을 넓힌다는 이미에서 문자 그대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을 구현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 때 익(益)이란 이익이나 이로움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 원 의미는 넓히고 확충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비하여 중국의 도가적(道家的) 개념으로는 출세간(出世間)이라고 하여 속된 세상과 이상적 세계를 구별하는데 세간(世間)이란 질적으로 인간성이 박약한 세상을 출세간(出世間)이란 이상적인 상상의 세계를 지칭하므로 홍익인간의 인간(人間) 개념과는 다소 다르다.
"밤에 행공하니 몸이 노고롭다"는 것은 낮 동안의 소위(所爲)로서 "자자위선(孜孜爲善)" 즉 요순(堯舜)의 도를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으로 "인간다운 생활에의 충실"을 의미한다. "우(禹)가 9년간의 치수(治水)를 위해 천하를 주유하면서 3번 자기의 집 앞을 지났으나 들어가지도 못하였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공자의 천하주유(天下周遊)도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결국은 이 말은 일상의 치열한 삶을 수렴하는 동작으로서의 행공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18로> 통설 해의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모든 인간의 힘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우리들 삶을 크게 전제하는 최대 궁극의 일대전제(一大前提)이다. 그러나 생명이 무엇인지 확고히 알 수 있다면 오히려 세상은 좁은 제한된 의미의 영지(領地)로 좁혀질 것이다. 다시 말하여 생명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반대로 생명의 영역이 무한하다는 반증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영역은 지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면 전연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 지성의 대상성을 충동하는 의미적 기제를 제공한다.

 

우리는 알지는 못하지만 생명을 항시 느끼며 누리며 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꼭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알려고 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 반생명적인 일등 생명을 위해하는 행위들이 다반사로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생명의 소중함을 지키려는 필요에서 생명의 정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미 맹자의 4단론은 확고한 생명론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오늘날 더 이상의 생명론을 필요로 하는 것은 맹자시대를 능가하는 강도 높은 파괴력과 사악함과 교묘한 기술로 무장한 반생명의 활동이 크게 확충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론은 그 불가지론(不可知論)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오히려 그 불가지론적인 특질이 생명론의 특장을 구성하게 된다. 첫째는 생명론은 제한 정의되기 어렵기 때문에 역으로 무한히 자유롭다. 극히 다양한 생명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모든 지각을 총동원해서 접근해야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영성을 포함하여 이성과 감성 일반의 의식과 정서가 모두 생명론에서 튼튼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무한히 자유롭다는 것은 생명론 자체가 생명현상 그 자체와 똑같이 무한히 창조적인 것이라는 본질성을 제시한다. 생명론은 문자로 글로 언어로 할 수도 있고 행동으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무용으로 수행할 수도 있으며 기공 수행으로 탐구되고 수행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산 것들과 존재하는 것들은 스스로 생명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산천초목과 생물군 기타의자연현상과 천문현상이 사실 생명론이 아닌 것이 없다. 다만 그 개개의 생명론의 문장들을 일관되게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다만 어떤 양식에서이든 의미적 통일성이 가장 강하게 추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생명론이라고 말할 수 있고 창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론과 창조론은 동의어로서만 그 성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공자의 인(仁)은 극기복례를 통하여 이룩한 인류 최초의 빛나는 행동적 생명론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서(恕)의 정신을 확충한 것으로 최초의 정밀하고 내면적인 심리적 생명론이다. 맹자의 호연지기론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이며 과학적인 종합적 생명론으로 진정한 생명론의 남상(濫觴)이다.
단군신화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인류에게 생명론의 필요를 극히 자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구체 제시한 최초의 확신적 생명론으로 모든 생명학의 조종(祖宗) 원맥(原脈)이다..
기공 수행은 생명의 탐구이며 그 실연이다.

 

제18로세
제1세-시목교경(翅目交脛)
날개(翅)를 보고
정강이를 교차하다
땅에 앉아
두 다리를 곧게 한다.
두 손바닥은 장심(掌心)을 위로
하여 높이 든다.
숨을 들이쉰다.
100도와 같다.
(註 : 원문에는
金鉤掛玉甁이라고
하였는데 원 편자가 玉字를
삭제하였다.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제2세-첩신존신(疊身存腎)
몸을 중첩하여
신기(腎氣)를 보존하다.
위 자세를 이어 전신을 굽힌다.
두 손은 두 발을 굳게 잡고
신체는 낮은 자세일수록 좋다.
101도와 같이하고 숨을 내쉰다.
100도에서 101도까지를 8차례 행한다.

제3세-경천옥주(擎天玉柱)
옥 기둥을
하늘로 들다(擎)
두 다리를 옮겨 열어
八자형을 한다.
발 뒤꿈치는 서로 반대되게 한다.
두 손바닥은 장심(掌心)을 하늘로 향하여
높이 들어 곧게 한다.
호흡을 고른다.
102도 같이 하고 정지해 있다가
그치고 바로 서서 전체 행공을 완결한다.

<제18로> 각세 분석
날개를 보고 정강이를 교차한다는 것은
<<시경(詩經)>>의 <국풍(國風)> "종사( 斯)" "초충(草蟲)"을 연상케 한다.

메뚜기 날개 슥슥거리니
당연히 네 자손 무진하리라
메뚜기 날개 훙훙거리니
마땅히 네 후손 무한하리라
메뚜기 날게 직직거리니
분명 너의 분신들 넉넉하리라
<종사( 斯)>

요요히 우는 풀벌레여
여기 저기 나는 메뚜기로다
군자와 이별한 슬픈 이맘은
오직 한번만이라도
다시 만날 생각으로 위로하노라
저 남산에 올라 고사리 캐노라면
군자를 그리는 이 마음은
언젠가 꼭 이루어지리니
저 남산에서 고사리 캐노라면
그리워 상한 이 마음은
평화로워지리니

 


<초충(草蟲)>
사람의 삶은 가을 녘 들 가득히 뛰노는 풀벌레들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등 풀벌레의 부지런한 움직임과 다를 것이 없다. 수많은 소망과 활력으로 넘치는 자연을 보고 시의 작자는 결국은 그 생명적 자연 요구대로 평화롭게 성취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지금 그리움이 넘칠지라도 기다림이 한없을지라도 말이다. 이 시경의 시대는 사실 살벌한 시대였다. 인육으로 제사하던 시대였고 수많은 전쟁터에 남편과 자식과 아들들이 나아가 돌아오지 못하는 서민의 한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고사리로 상징되는 기아(飢餓)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도 시인이 있어 그 정한을 토로하고 미래를 그렸다. 오직 확신하는 생명론으로 고통을 이겨낸 셈이다. 그 생명 수호의 서사시적 생명의 역사는 <<서경(書經)>>에 생생한 실록으로서 기록되었다.

 

기공의 수행이 그러한 진절한 삶의 일환으로서 의식되어야함을 말하고 있다고 직감한다.
신기(腎氣)를 보존한다는 것은 사실 절제를 의미하기도 하고 경락학상 생명의 근원인 신장기의 수호가 행공에서 극히 중요한 것임을 말한 것이다. 옥기둥을 하늘로 든다는 것은 기마자세로 서서 손을 드는 동작을 말한 것인데 옥(玉)이란 근본적으로 신물(神物)이다. 구림낭간(球琳  )이라는 서왕모(西王母) 신화의 구성언어이다. 그러므로 고결한 심의로 행공하라는 예의 지론을 거듭 강조한 의미를 지닌다. 옥은 당연히 실물 옥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행공시에 느껴야할 고결 신비한 어떤 지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꼭 신적인 것이어야만 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직관의 형태는 다른 영상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은 세속적인 힘의 발출을 억제하고 극복하여 힘을 초월하는 기의 본원을 느끼고 회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읽어야하겠다. 세속을 억제한다는 말은 세속의 가치를 말살하라는 것은 아니다. 세속은 우리들 삶의 두 주축 중에 중요한 그 하나이다. 억제하라는 말은 단지 사람의 삶의 차원에는 세속과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보아야하고 그 세계를 의식하고 세속의 삶을 균형되게 유지하라는 말이다. 물론 그 다른 세계란 역시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실은 우리들 삶 자체가 이미 신비롭고 더 이상 경험의 세계를 뛰어넘어서 그 무엇을 더 느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꼭 특이하고 신이한 제3의 감각을 개척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가진 감각과 지력 그리고 사유력은 이미 모든 감각보다 우월한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확실하고 분명하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느낌이 필요하다는 것은 역시 하나의 중대한 역설이다. 현재의 감각과 사유 그리고 제3의 감각이 서로를 존중하는 균형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오로지 현재의 감각을 중심으로 현세를 살아가는 길로 삼는다는 오랜 원칙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미 2000년전 내지 3000년전에 수립된 경험율이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물론 괴이한 현상이나 초능력 혹은 혼란을 초래하는 신을 말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물론 약간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공자에게 있어 "말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무시하였다"는 뜻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공자는 괴력난신만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론(本性論)과 천도론(天道論)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으며 더욱이는 인론(仁論)에 대해서도 자주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공자의 메시지는 "신중하라"는 것이다. 준비 없이 자신의 학문의 단계를 건너뛰어서 그러한 극론(極論)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이다.

 

아마 그런 일들은 현재도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 같다. 드믈게 나의 연구실은 찾는 학습자들 가운데 아무런 준비 없이 <<주역>>을 읽고 싶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다이렉트로 <<주역>>에 뛰어드는 것은 지적으로 위험하다고 경고하곤 한다. 물론 텍스트를 위주로 공부하겠다면 문제가 없으나 다른 조급한 마음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 언어로 표현 가능한 경험적 현상을 능가하는 경험은 사실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수행을 하는 것이 그 명징한 사실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결론으로 말하고 싶다.

 

끝으로 부언하고 싶은 것은 행공은 몸 수련으로 시종일관할 수 없으므로 행공의식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자세와 동작 그리고 손과 발의 형태에 대한 의미를 상시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권수(拳手)와 장수(掌手)의 행공적 의미를 논할 경우 손은 무예의 극단으로서 무(武)를 상징할 수 있다. 행공은 그 무예적 속성을 승화 초탈한 그 무엇이므로 그 구체적 초탈의 방식은 1)권수성(拳手性)을 약화하여 손가락 끝이 장심에 닿지 않도록 하는 방법 2)권수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불의타격(不義打擊)의 심의롤 확고히 가지는 방식 2)권수성과 타격성을 규정하지 않고 나의 내부의 속기를 타격해소 한다는 심의를 다지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물론 장수의 경우도 그와 우사한 사고방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끝에서는 결국 나의 사유(思惟)의 쇄신(刷新)이 달성되어야할 것이다.

 

행공(行功)을 마치며_황 한 훈(黃漢勛)

행공이란 항시 수양이 필요하니
부지런히 익히고 연습해 밀쳐 나아가라
원숭이 마음과 말의 마음을 막아내고
행공 동작시에는
근골(筋骨)과 신기(神氣)를 상쾌하게 하라
사람을 혼미하게 하는 것들은
쇠구두(鐵鞋)로 밟아 없애며
자오(子午) 경맥(經脈)을 안정하고
음양(陰陽)을 분별하라
원대한 뜻으로 전신의 기력을 쌓으면
오묘하고 무궁하여
심상(尋常)하지 않으리라
논공(論功)을 마치며
하이안자(夏夷案者)

한 줌 먼지로 봉래산에 날아들어
영롱한 영채의 중심에 서서
이미 젖도록 노닐었나니
단번에 꿈결 같은 희망을 보았다
몸놀림은 무도하듯예악(禮樂)을 따라
팔다리는 장구(章句)를 밀치고
숨은 경전(經典)을 호흡하니
문자의 획을 따라 해는 빛나고
달은 곱고 바람은 상쾌하였더라
이제 담장 가 새로이
아담한 정원을 하나 얻었으니
의자 놓고 서상을 열고 모든 창을 밀치어 두고
바람과 구름과 함께 싫컷 읽으리라
발끝 손마디로 독서하고
대기를 가르는 소리로 책장을 넘기고
호흡으로 보고 땀으로 이해하리라
숨쉬는 모든 순간이 학습이게 하리라

 

에필로그
남은 이야기
우리들 삶의 의미 있는 부분은 거의 배움과(學) 그 결행(習)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움과 결행의 양쪽 측면은 제한 없고 자유로운 것이면서 서로 견제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조화에 필적하는 창조적 공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넓고 크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되 동시에 가장 절실하고 정밀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과 생명에 대한 논의는 장황할수록 좋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순간의 혼돈을 초래할지라도 말이다.

 

용무한 남아 수행인들의 순기로 가득한 힘찬 행공을 물정모르는 백면서생이 아무렇게나 논설하는 것 같아서 내내 망설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전승된 글들 속에서 많은 의외의 학적(學的) 깊이를 그리고 그 본모습의 일단을 친근한 정감으로 볼 수 있었으므로 대담한 마음으로 담론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행공 수행자 자신의 자평보다도 객관적 관찰자가 부여하는 새로운 의미론도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발견의 기쁨이라할 수 있는 이 새로운 학적 소망이나 지견을 가지게 된 것은 오직 행공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짦은 시간에 생각의 쇄신을 이룰 수 있었고 오랜 타성이라는 진부한 부자유스런 허울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큰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 이번 작업으로 얻게 된 최대의 성과이며 귀중한 선물이다. 특히 <노서>를 읽어 나아가면서 나는 상당한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본문에서 누차 언명하였다. 끝에 이르러 생각하니 그것은 확실히 나에게는 그 이상의 하나의 개인사적 사변이었다.

 

수백페이지 천명론(天命論)을 읽는 것 이상으로 심상의 투명함을 위하여서는 실질적이었다. 경전의 주석를 세상살이처럼 그냥 읽었듯이 행공을 살아가듯이 의식하고 행하는 것은 매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스스로에게 은혜로운 길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의 호흡 한번 작은 몸놀림 하나 하나가 얼마나 귀중할 수 있는가를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자체가 이미 깊은 학구(學究)이며 근면한 삶이요 진성한 의지가 되는 것임을 또한 알았다. 그리고 더욱이는 그것은 이미 수많은 선현들이 일상사로 행해오던 학습(學習)의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음도 진절하게 새로이 알았다.

 

필자는 인문학 특히 역사 사상사 분야에 소소하게 종사해왔다. 처음 직선적이고 양적인 즉 논리적 발견 위주의 지식을 추구하는 연구생활을 얼마간 지속해왔다. 대개 80년대 초부터는 다소 심각한 기력이나 운동의 부족을 느껴 나름대로 기체조(氣體操)라할 것을 수행해왔다. 주로 팔을 사용하여 아주 느린 동작으로 여러 종류의 방향과 크기를 가지는 원이나 선을 그리면서 밀고 당기는 동작을 바탕으로 하고 힘을 점차적으로 증가하여 손끝에서 극대화되도록 한다든지 모았던 손끝의 힘을 순간적으로 소멸시키는 동작이 주로 행해졌다. 동작의 기본은 아래에서 위로, 또는 몸 중심을 향하여, 몸 밖을 향하여 자유롭게 이루어지며 모든 가능한 어느 동작에서도 힘의 가감이 시연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관습화된 비교적 오랜 경험적 시도의 내용은 비록 일상화되는 데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시종 나에게 새로운 감각이나 느낌 심지어는 어떤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주어왔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은 막연하고 신비적 의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최근 그 단순한 동작도 삶의 주변일 수 없고 인생의 한 중심을 점할 수 있는 학습과정의 당당한 일부로서 유의미한 것임을 알았다. 이 글은 아마 다만 그 새로운 작은 감동을 적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끝으로 본서의 구성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해 두려고 한다.
(1)범선생님의 원저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18로의 노제(路題)였고 18문로의 각 제목에서 이미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제설(題說)>이라는 제목으로 평하고 논하였다.
(2)<노서(路序)>는 각 문로의 제목 아래에 그 행공의 의의와 공효를 서술한 것으로 본서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그 아래에 이어서 번역문을 싣고 원문을 그대로 붙어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풀기 위해 <노서의 음미>라는 난을 새로 만들어 자유롭게 <노서>를 해석하고 음미하였다.
(3) <통설해의(通說解義)>난은 <노제>와 <노서> 그리고 <제설>과 <노서의 음미> 각 분야의 내용 가운데 서술이 미진한 부분을 택하여 자유로운 입장에서 논하기 위해 마련하였다.
(4)<각세분석(各勢分析)>은 각문로의 <세제(勢題)>가 함축한 의미를 해석하고 이들 위의 각 단계 해석과 연관 행공 동작을 직접 기론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설명하기 위해 마련하였다. 이 부분은 상당히 시도성이 강한 글로 이루어졌다.
(5)부록으로 서술한 <태권행공론(跆拳行功論)>은 일반적 의미에서 융통될 수 있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행공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응용 서술한 것이다. 무예성을 승화한전통고유 양식의 필요성을 논하기 위한 것이다.
(6)이어서 별도로 첨부한 <태극행공론(太極行功論)>도 행공의 일반성을 시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 두 부분은 특히 오로지 행공이 지니는 일반적 의미를 탐구하고 이를 적극적 전향적으로 오늘에 응용해보려는 활로를 찾는다는 뜻에서 서술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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