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列仙小傳_왕중양[王重陽]과 전진칠자[全眞七子]

醉月 2009. 10. 26. 08:41

 

ⓒ 삽화 박영철

 

흉년이 들어 재물을 약탈당하였으나
王喆(왕철)은 자가 知明(지명)이고, 호가 重陽子(중양자)이다. 京兆(경조) 咸陽(함양)사람인데 후에 終南山(종남산) 劉蔣村(유장촌)으로 이사해서 살았다. 그의 모친이 왕중양을 낳기 전에 이상한 꿈을 꾸고 난후 임신을 하였으며 24개월이 지나서야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때가 宋(송) 徽宗(휘종) 政和(정화) 2년(1112) 12월 22일이었다.

왕중양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고독하여 혼자 있는 것을 즐기었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성장한 후에는 그 풍모가 대장부답게 위엄이 있었다. 얼굴에는 아름다운 긴 수염이 있었으며, 호탕하고 준걸스런 태도에 豪俠(호협)하여 義理(의리)를 숭상하였다. 그는 어려서는 儒學(유학)을 공부하였는데 문장을 잘 지었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생각이 민첩하였다.

20세 때 禮部(예부)에서 시행하는 진사시험에 응시하였으나 落榜(낙방)하였다. 그 후에는 武藝(무예)를 닦았다. 왕철(왕중양)의 원래 이름은 中孚(중부)였고, 자는 允卿(윤경)이었다. 武科(무과)에 응시하면서 이름을 世雄(세웅), 자를 威德(위덕)으로 바꾸었다. 나중에 수도를 시작한 후에 비로소 이름을 王喆(왕철), 자는 知明(지명)으로 고쳤다고 한다.

金(금) 太宗(태종) 會元(회원) 8년(1130) 劉豫(유예)가 왕으로 봉해지고, 국호를 濟(제)라 칭하고 연호를 阜昌(부창)이라 하였다. 당시 관중 일대는 매년 흉년이 들어 飢餓民(기아민)들이 발생했으며,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되는 지경에 처하였다. 함양·예천지역 일대에서 오직 왕 씨 가문만이 부자로서 기근을 면하였다.

왕중양의 조부는 남은 곡식을 出捐(출연)하여 난민들을 구제하였다. 왕 씨와 멀리 떨어진 고을의 사람들은 구제를 받지 못하자 몰려와서 식량을 강탈하였고, 인근의 사람들 또한 이 기회를 틈타 재산을 掠奪(약탈)하였는데, 왕 씨의 재산이 순식간에 모두 없어졌다.

그 지역의 지방관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식량을 훔쳐간 자들을 붙잡아서 죄를 물었다. 왕중양은 현장에 나온 책임자 관리에게 “지방민들은 기근 때문에 식량을 약탈하여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 나는 그들이 이것 때문에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한다. 지방관은 왕중양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순리에 따라 식량을 훔친 자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스스로 미친 자 행세를 하다

金(금)나라 海陵王(해릉왕) 4년(1159)의 어느 하루 왕중양은 갑자기 탄식하면서 “孔子(공자)는 四十不惑(사십불혹)이라 하였고, 孟子(맹자)는 四十不動心(사십부동심)이라 하였다. 내 나이 48세인데 아직 보잘 것 없이 無爲徒食(무위도식)하고 있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벌레와 같지 않은가?”한다. 이후부터 왕중양은 점차적으로 奔放(분방)하여 제멋대로 행동하였으며, 더 이상 자신을 단속하지 않았음은 물론 자신 스스로를 미친 자처럼 행동하였다.

일가친척들은 모두 그의 이러한 행동을 嫌惡(혐오)하면서 “그는 害風(해풍)(관중지역의 방언으로 미친 자를 해풍이라 부름)이다”라고 하였다. 왕중양은 미친 자라는 호칭에 대하여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농담하듯이 스스로 미쳤음을 인정하였다.


 

ⓒ 삽화 박영철

여동빈이 나타나 가르침을 주다

미치광이로 지내던 王重陽(왕중양)은 이해 6월 甘河鎭(감하진)에 갔는데 술에 취했다. 취중에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났다. 蓬頭亂髮(봉두난발)을 한 긴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몸 위에는 털로 짠 담요 같은 것을 둘렀다. 그 두 사람의 나이나 모양새는 닮은 듯이 비슷하다.

왕중양은 만나자마자 전해져 오는 느낌이 奇異(기이)하여 두 사람을 따라가면서 간절히 가르침을 청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뜸을 들이다가 한마디 하였다. “이 사람은 가히 가르칠 만하다.” 말을 마친 후 왕중양에게 修眞(수진)의 口訣(구결)을 가르쳐 주었다. 왕중양은 이때까지도 그가 지금 우연히 만나고 있는 이 두 사람 노인이 당나라 때 仙翁(선옹)인 呂洞賓(여동빈)이 幻術(환술)을 써서 나타난 것임을 몰랐다.

그 다음해 중추절 날 왕중양은 또 醴泉(예천)에서 우연히 여동빈을 만났는데, 서둘러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예의를 차렸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웃으면서 말했다.

“저 사람 왕중양은 미친 사람이다. 어찌 신선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여동빈은 왕중양을 술집으로 데려가 함께 술을 마셨다. 왕중양은 마주 앉은 여동빈에게 고향과 나이, 이름 등이 궁금하여 물었다. 여동빈이 대답했다.

“나는 濮州(복주)사람이다. 금년 나이 22세이다.”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이어서 ‘秘語五編’(비어오편)을 조용히 건네주면서 왕중양에게 읽어보라고 하였다. 읽기가 끝나자 회수하여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왕중양에게 말했다. “너는 곧 동해로 가서 ‘投譚捉馬’(투담착마)(譚담을 던지고, 馬말을 잡으라)하라”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지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말을 마친 후 도인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

墓穴(묘혈)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수련하다
여동빈과 헤어진 후 왕중양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드디어 처와 자식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였다. 왕중양은 줄곧 걸어서 행각하면서 終南山(종남산) 일대까지 갔는데 행동거지는 미치광이 형색이었고, 그곳에는 그의 來歷(내력)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왕중양은 한참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되돌아 왔다. 고향에 돌아와 庵子(암자) 하나를 만들었다. 몇 자 높이로 흙을 쌓아 올리고 아래에다 한 키 정도 깊이의 墓穴(묘혈) 같은 구멍을 만들었다. 이곳에 거처하면서 스스로 ‘活死人墓’(활사인묘)라고 불렀고, 또 ‘行菆’(행추)라고 불렀는데, 菆(추)는 ‘매 둥지’라는 뜻이다. 왕중양은 거처하는 이곳 묘혈 위에 간판을 하나 걸었다. 이 간판에는 ‘왕씨 미치광이 신위’(王害風靈位왕해풍영위)라고 쓰여 있었다.

묘 사방에는 해당화 한 그루씩을 심었다. 이때 왕중양과 같이 거주하던 和公(화공)이라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러한 모양으로 해당화를 심어 묘 주위에 배치하는가?”물었다. 이에 왕중양은 “나는 앞으로 내가 사방에 심은 해당화 나무와 같이 사방을 敎化(교화)하고 싶다”고 하였다.

3년이 지난 후 왕중양은 고향인 유장촌에서 북쪽인 水中央(수중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때때로 술 호로병과 술 표주박을 들고 두루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길을 가면서 한편으로 노래를 부르고, 한편으로는 술을 마셨다. 어느 때 한번, 왕중양이 감하라는 곳에서 술 한 호로병을 구해서 돌아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 왕중양을 불렀다.
 

ⓒ 삽화 박영철

 

거주하던 암자를 불사르다
갑자기 나타난 낯모르는 사람이 왕중양을 부르더니 “害風해풍(미치광이라는 뜻)아! 네 손에 들고 있는 그 술병을 나에게 줄 수 있겠는가?”한다. 왕중양은 군소리 없이 술병을 그 사람에게 건네준다. 그 사람은 단숨에 그 술을 다 마셔 버리고 만다.

술을 다 마신 후에는 왕중양에게 길옆에 흐르는 시냇물인 甘河水(감하수)를 떠오도록 명령한다. 왕중양이 술병에 가득 물을 떠오니 맛보라고 하는데, 맛을 보니 놀랍게도 신선들이 마신다는 神仙酒(신선주)처럼 향기로웠다.

그 사람이 또 묻는다. “너는 劉海蟾(유해섬)을 아는가?”한다. 왕중양은 “단지 그림 속에서 유해섬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사람은 큰소리로 웃으면서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때부터 왕중양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타인들이 그를 초대해서 술을 마시자고 해도 그는 맑은 물만 마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상대방이 취하면, 물만 마신 왕중양도 똑같이 취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왕중양은 자신이 머물던 암자에 불을 질렀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달려와 불을 끄느라고 야단이다. 왕중양은 오히려 불타고 있는 암자 옆에서 기쁜 듯이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 불을 지른 연유를 묻는다.

왕중양은 다만 “3년 후에 어떤 사람이 이곳에 와서 이 암자를 수리할 것이다”한다. 이 일이 있고 난후 왕중양은 동쪽으로 雲水行脚(운수행각)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출발에 앞서 왕중양은 道友(도우)들에게 이별시를 남겼다. 이별시에는 寓意(우의)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이 모두 이해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仙道(선도) 역사에 있어 ‘全眞道’(전진도) 출현

왕중양은 손에 쇠 밥그릇 하나를 들고 걸식을 하면서 동쪽으로 나아갔다. 函谷關(함곡관)에서 출발하여 동쪽 동해바닷가 登州(등주)까지 가는 행로였다. 어느 날 밤, 이름 모를 도관을 빌려 잠을 자게 되었다. 이 도관의 벽 위에다 시 한수를 남겼다.

一別終南水竹村, 家無兒子亦無孫 [일별종남수죽촌, 가무아자역무손]
三千里路尋知友, 引入長生不死門 [삼천리로심지우, 인입장생불사문]
종남산 아래 수죽촌을 한번 떠나고 나니,

집에는 자식도 없고 또한 대 이을 손자도 아무 것도 없다.

삼천리 나그네 길에서 뜻이 맞는 친구를 찾아,

장생불사문(道家)으로 끌어 들이겠노라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도관을 떠나 옷깃을 털면서 동쪽으로 출발했다.

金(금)나라 世宗(세종) 大定(대정) 7년(1167) 7월 왕중양은 寧海(영해)에 도착했다. 유생 範明淑(범명숙) 집을 찾아 갔는데 그 당시 범명숙은 영해군 사람인 馬宜甫(마의보) 집에 식객으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날 집주인 마의보는 꿈속에서 한 마리 仙鶴(선학)이 그의 정원 남쪽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왕중양이 자신의 집에 머물게 되자 왕중양이 거처할 곳에 작은 庵子(암자)를 하나 세우려고 하였다. 암자 자리를 정하는데 왕중양이 마의보가 꿈속에서 본 선학이 솟아 오른 그 자리를 가르치자 그곳에 암자를 세우게 되었다. 암자이름을 ‘全眞’(전진)이라 하였는데, 이로 인해 ‘全眞道(敎)’전진도(교)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되었다.

왕중양은 한번은 마의보를 청해서 함께 서쪽으로 유람을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마씨 집안은 지방의 巨族(거족)으로 만석군 부자였는데, 많은 재물과 안락함 때문에 줄곧 서쪽으로 유람할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특히 마씨의 부인인 孫不二(손불이)는 재물에 미련이 남아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 삽화 박영철

 

마단양을 첫 제자로 삼다
이해 겨울 王重陽(왕중양)은 全眞庵(전진암)에 들어가 고요히 수련하였다. 100일간 암자문을 잠그도록 마의보와 약속하고 매일 한차례만 음식을 넣어주도록 했다.

왕중양은 가끔 배와 밤을 마의보 부부에게 보내어서 먹게 하였는데, 과일을 보낼 때마다 일정한 개수였으며 매번 시나 글 또는 偈頌(게송)을 적어 보냈다. 그 내용은 주로 신비하고 기이하며 禍福(화복)은 報應(보응)이 있다는 등 경각심을 주는 것들이었다.

왕중양이 100일간 수련을 끝낼 즈음에는 마의보도 상당히 많은 깨달음이 있었고, 잡다한 세상일의 상당한 부분을 포기하게 되었다. 마의보는 道家(도가)의 의관으로 바꿔 입고 왕중양에게 절을 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이때 왕중양은 馬宜甫(마의보)의 이름을 바꾸어 馬鈺(마옥)으로 부르며 字(자)를 玄寶(현보)로 하고 號(호)를 丹陽子(단양자)라고 하였다.

마단양 아내, 손불이도 제자가 되다
마옥의 아내 孫不二(손불이)에게도 일장 훈시를 하고 도호를 淸淨散人(청정산인)이라 지어 주었다. 이들 마옥 부부는 왕중양의 첫 제자가 되었다.

손불이(1119∼1182)는 금나라 때 도사이다. 법명은 ‘不二’(불이)다. 일명 ‘孫仙姑’(손선고)라고도 불려진다. 지금 산동성 牟平(모평)사람이고 왕중양 수제자인 마단양과는 부부지간이었다. 金(금) 大定(대정) 9년(1169)에 왕중양에게 제도되어 出家(출가)하였다. 修道秘訣(수도비결)을 전수 받았는데, 손불이는 홀로 조용한 방에 거처하면서 面壁(면벽)하여 마음을 닦은 지 7년 만에 공을 이루었다. 도를 이룬 후 낙양일대와 남방을 두루 유람하면서 사람을 제도하였다.

대정 22년(1182)에 낙양에서 羽化登仙(우화등선)하였다. 손불이를 따르는 무리를 全眞敎(전진교) ‘淸淨派’(청정파)라고 하였으며, 北七眞(북칠진)중의 하나로 받들어졌다. 원나라 至元(지원) 6년(1269)에 ‘淸淨淵靜順德眞人’(청정연정순덕진인)으로 봉해졌다.

세 번째 제자, 譚處端(담처단)을 제도하다
왕중양은 일찍이 마옥 집에 머물면서 譚玉(담옥)이라 부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이 담옥은 몸에 만성적인 고질병이 있었는데, 왕중양을 찾아와 뵙기를 청하였으나 왕중양이 거절하였다.

담옥이 재차 그의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요청하자, 왕중양은 비로소 담옥을 자신이 머물고 있는 전진암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담옥이 이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고질병도 회복되었다. 그래서 담옥은 집에 돌아가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 혼인을 취소하고 출가했다.

왕중양은 그의 이름을 譚處端(담처단)으로 고쳐주고 자를 通正(통정), 道號(도호)를 ‘長眞子’(장진자)라고 하였다. 왕중양은 이때 마단양, 손불이, 담처단 등 총 세 명의 제자를 거두었는데 이전에 여동빈 선인이 이야기한 ‘投譚捉馬’(투담착마)(譚담을 던지고, 馬말을 잡아라)의 뜻을 이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담처단(1123∼1185)은 금나라 때 도사이며, 영해 즉 산동 牟平(모평)사람이다. 담처단은 어려서부터 공부에 전념하여 經典(경전)과 歷史(역사)를 두루 섭렵하였고, 초서와 예서에 뛰어난 서예가였다.
 

ⓒ 삽화 박영철

 

담처단의 제자, 전진교 남무파로 성장하다
왕중양의 세 번째 제자 譚處端(담처단)은 사람된바가 기개가 있고, 孝義(효의)를 중시했다. 본래 수족마비의 중풍이 있어 약과 침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었다.

금나라 大定(대정) 7년(1167), 왕중양 진인이 산동에 와서 傳道(전도)할 때 몸을 의탁하고 몸에 있는 고질병 치료를 희망했다. 하룻밤을 넘기고는 그 고질병이 나았다. 이 때문에 성심을 다하여 全眞敎(전진교)에 귀의했다.

왕중양을 따라 조석으로 가르침을 구하여 眞道(진도)의 玄旨(현지)를 얻었다. 일체의 생각을 끊고, 너와 나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고심 수련하였다. 왕중양 진인이 우화등선한 후 낙양 근처에 은거하였다.

금나라 대정 25년(1185) 낙양 ‘朝元宮’(조원궁)에서 우화했다. 담처단을 따르는 무리를 全眞敎(전진교) ‘南無派’(남무파)라고 한다. 나중에 北七眞(북칠진) 중 한분으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원나라 世祖(세조) 至元(지원) 6년(1269)에 ‘長眞雲水蘊德眞人’(장진운수온덕진인)으로 봉해졌다.

네 번째 제자, 王處一(왕처일)을 제도하다
이어서 성씨가 ‘王’(왕)이라는 노인이 牛仙山(우선산)에 살고 있었는데, 왕중양 진인이 이 지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인사를 올렸다. 나중에 철사산 雲光洞(운광동)에 머물고 있었는데, 왕중양이 그의 이름을 王處一(왕처일)이라 개명시키고, 道號(도호)를 傘陽子(산양자)라고 하였다.

이 王處一(왕처일)(1142∼1217)은 금나라 때 도사이다. 北七眞(북칠진)중 한 사람이다. 도호가 ‘玉陽子’(옥양자) 또는 ‘傘陽子’(산양자)라고 하며산동 牟平(모평)사람이다. 금나라 大定(대정) 8년(1168)에 왕중양의 제자가 되었다. 장기간 문등현 雲光洞(운광동)에 은거하면서 수련했다.

“9개월 동안 陽氣(양기)를 받기위해 서서 있었고, 3동 겨울에는 차가운 눈(雪)을 안고 잤다”고 하는데, 形體(형체)를 단련하기 9년 만에 마침내 大道(대도)의 요결을 체득했다고 한다.

금나라 章宗(장종) 承安(승안) 2년(1197)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養生之道(양생지도)와 性命之理(성명지리)”를 물었다. 왕처일은 “도가는 淸靜無爲(청정무위)와 內丹造化(내단조화)를 위주로 하여 作爲(작위)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고 답변하였다.

금나라 宣宗(선종) 貞祐(정우) 5년(1217)에 성수 玉虛觀(옥허관)에서 우화했다. 왕처일을 따르는 문도를 全眞敎(전진교) ‘崳山派’(유산파)라고 한다. 원나라 지원 6년(1269)에 ‘玉陽體玄廣度眞人’(옥양체현광도진인)으로 봉해졌다.

다섯 번째 제자, 점쟁이 郝升(학승)을 제도하다
占卜(점복)을 업으로 하여 먹고사는 郝升(학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학승은 ‘易理’(역리)에 정통했다. 어느 날 하루 학승이 정기적으로 시장이 서는 날 점을 치기위해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데, 왕중양이 다가왔다.

왕중양은 등을 맞대고 자리에 앉는다. 학승이 “청컨대 상공께서는 머리를 좀 돌려주십시오!”한다. 왕중양이 “그럼, 당신은 왜 머리를 돌리지 않는가?”한다. 그 한마디에 학승은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듯, 느낌이 놀랍고도 이상하였다.

왕중양은 일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를 떠난다. 학승을 자기도 모르게 왕중양의 뒤를 따라 ‘朝元觀’(조원관)에 까지 가게 되었다. 동행하여 가는 도중에 왕중양이 隱語(은어)로 된 간단한 쪽지를 하나 건네주는데, 학승은 읽어본 후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 자리에서

왕중양에게 절을 올리고 스승으로 모셨다

 

  

 ⓒ 삽화 박영철

 

말을 하지 않은 ‘不語(불어)선생’
학승 즉 郝大通(학대통)(1140∼1212)은 금나라 때 도사다. 학승이 왕중양을 찾아 煙霞洞(연하동)에 왔을 때 학승의 이름을 郝璘(학린)으로 고쳐주었다. 자는 太古(태고)이며, 도호를 恬然子(염연자) 또는 廣寧子(광영자)라고 하였다.

스스로 太古道人(태고도인)이라 하였다. 법명을 大通(대통)이라 하여 흔히 세상에서는 郝大通(학대통)이라 부른다. 寧海(영해) 즉 산동 牟平(모평) 사람이고 일찍이 黃老壯列方外(황노장열방외)(황제·노자·장자·열자 등)의 서적을 널리 공부하였다. 특히 卜卦(복괘) 占竺(점축)의 술법이 뛰어났으며 易學(역학)에 정통하였다.

왕중양 진인을 만나 全眞敎(전진교)에 귀의했다. 금나라 대정 15년(1175) 沃州(옥주)지역에서 걸식하다가 돌연 깨달은 바가 있어 드디어 옥주다리 밑에서 靜坐(정좌)공부를 시작하였다. 形身(형신)을 잊고 6년간 연공하였는데 종래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사람들이 ‘不語先生’(불어선생)(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9년간 연공하여 完功(완공)한 후 지팡이를 짚고 북쪽지방을 두루 편력하면서 도를 폈다. 崇慶(숭경) 元年(원년)(1212) 영해소재 ‘先天觀’(선천관)에서 우화등선했다.

全眞敎(전진교) ‘華山派’(화산파)를 창립했다. 현재 이 화산파의 맥을 잇는 장문인이 한국의 여성분이며,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한다. 원나라 世祖(세조) 至元(지원) 6년(1269)에 ‘廣寧通玄太古眞人’(광영통현태고진인)으로 봉해졌다.

여섯 번째 제자, 구장춘을 제도하다
얼마 후 왕중양은 마단양 등 제자들을 이끌고 산동성 동부에 있는 昆崳山(곤유산)으로 가서 머물게 되었다. 곤유산에 막 도착하였을 때 왕중양은 산을 가르치면서 “이 산중에는 煙霞洞(연하동)이 있는데, 내가 이전 생애에 수도하던 곳이다” 한다. 제자들에게 산 동굴을 파라고 명령한다. 그곳에 이전 생애에 사용하던 그릇과 집기 및 샘물 등이 예전그대로 땅 밑에 묻혀 있는데, 그릇과 집기 등은 이미 쓸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

어느 날 하루 제자들이 산위에서 돌을 줍고 있는데 암자위에서 소나무같이 생긴 큰 바위가 떨어져 내려온다. 이 거대한 바위가 제자들 머리위로 날아 떨어진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왕중양이 화나 난 듯 고함을 지르자 떨어지던 그 바위가 순간 그 위치에서 딱 멈추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 栖霞(서하)사람 丘長春(구장춘)이 막 19세였는데, 비록 道門(도문)에 막 귀의하였으나 머물 곳이 없었다. 왕중양 진인이 전진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래를 부탁하기위해 찾아왔다. 왕중양은 구장춘을 보자마자 그의 앞길이 遠大(원대)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왕중양은 구장춘에게 시를 지어 내려주고, 이름을 丘處機(구처기)라고 지었다. 자를 通密(통밀), 道號(도호)를 長春子(장춘자)라고 하였다. 이 사람이 도가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丘長春眞人(구장춘진인)이다. 이제 全眞七子(전진칠자)(전진교의 가장 뛰어난 일곱 명의 제자) 중 여섯 명이 모였다. 이때부터 왕중양의 문하에는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왕중양은 문하생들을 상대로 하여 호되게 욕을 하거나,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심지어 몽둥이로 두들기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제자들의 의지를 고험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문하를 떠났으며, 뜻이 굳세어 마음의 동요가 없었던 사람은 단지 

마단양, 담처단, 구처기 등 몇 명에 불과하였다.

  

ⓒ 삽화 박영철

 

왕중양의 背光(배광)이 불처럼 밝게 빛나다
금나라 大定(대정) 8년(1168) 왕중양은 곤유산 煙霞洞 (연하동)에서 문등에 있는 姜實菴(강실암)으로 옮겨 왔다. 이해 9월에는 다시 현 북쪽에 있는 蘇翁菴(소옹암)으로 가서 거주하였다. 이곳의 우물 물 맛이 쓰고 짜서 먹기가 거북하였다. 왕중양이 마음을 가다듬어 주문을 몇 번 외우자 우물 물맛이 순식간에 엿과 같이 달콤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멀리에서 밝은 불빛이 나타났는데, 환한 것이 낮과 같아서 모두 불이 난 것으로 여겼다. 이상하다고 여긴 몇 사람이 불빛을 향해 달려가 획인해 보니 바로 왕중양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머리 뒤에는 발광해 나오는 환한 背光(배광)이 빛나고 있었다.

또 어느 날, 왕중양이 바닷가에 있는 蓬萊閣(봉래각)에서 바다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 큰 바람이 왕중양을 말아 올려 그대로 바다 속으로 빨아들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당황하여 右往左往(우왕좌왕)하면서 한참 시간이 지났다. 그때 왕중양이 바다 속에서 솟아올라서 물 밖으로 나오는데, 온 몸에 상처하나 나지 않았다. 다만 머리에 꽂는 비녀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비녀가 바닷물위에 둥둥 떠 있다가 저절로 왕중양의 수중으로 되돌아 왔다.

오래지 않아 이곳 萊州(래주)에서 平等會(평등회)를 세웠는데, 모인 자 들이 일천여명이 되었으며, 遠近(원근)에 바람을 일으켰다.

금나라 대정 9년(1169) 9월, 왕중양은 마단양, 담처담, 구장춘 등 3명을 데리고 登州(등주)로 갔다. 그곳 태수 紇石烈(흘석렬)이 스승으로 그들을 대접했다. 이별할 때 왕중양에게 “앞으로 언제쯤 다시 재회할 수 있겠습니까?”물었다. 왕중양이 “남경에 간 후에 아마 볼 수 있다”고 한다. 나중에 왕중양이 남경에서 羽化登仙(우화등선)할 때, 흘석렬이 마침 남경 副留守(부유수)로 발령을 받아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왕중양이 등주 망선문 밖에 있는 다리를 가리키면서 등주군 사람들에게 “나중에 이 다리는 반드시 헐릴 것이다”한다. 이로부터 정말 12년 후에 이곳 태수 하방언이 이 다리가 가파르고 牛馬(우마)가 다니기에 불편하다면서 고치도록 하였다. 예언한대로 모두 영험이 있었다.

일곱 번째 제자, 유처현을 제도하다
掖城(액성)에 왔을 때 왕중양은 劉氏(유씨) 성을 가진 제자를 거두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全眞七子(전진칠자) 중 마지막으로 거두어들인 劉處玄(유처현)이다. 이 劉處玄(유처현)(1147∼1203)은 금나라 도사이다. 자는 通妙(통묘)이고 道號(도호)는 長生子(장생자)이다. 산동 掖縣(액현)사람인데,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삼가 공손히 섬겼으며 부귀영화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금나라 대정 9년(1169)에 왕중양이 마단양 등 제자를 거느리고 ‘액성’에 傳道(전도)하러 왔다. 이때 왕중양의 문도가 되었다. 스승을 따라 다니면서 밥을 빌어먹고 육체를 단련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숙여 가르침을 청하여 丹經단경을 깨우쳤다.

왕중양이 우화등선한 후 독자적으로 京洛(경락)지역에 은둔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고 성품을 연마하였다. 금나라 대정 28년(1188) 창양 땅에서 제단을 세우고 祈雨祭(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醮祭(초제)를 주재하였는데 상당히 영험하였다고 한다. 承安(승안) 3년(1198) 금나라 章宗(장종)이 사자를 파견하여 궁중으로 불렀다. 귀빈으로 대접을 받았다. 다음 해에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장종이 ‘靈虛’(영허)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泰和(태화) 3년(1203)에 우화했다. 유처현을 따르는 문도를 全眞敎(전진교) ‘隨山派’(수산파)라고 하며, 北七眞(북칠진) 중의 하나로 받들어졌다. 원나라 지원 6년(1269)에 ‘長生輔化明德眞人’(장생보화명덕진인)으로 봉해졌다.
 

ⓒ 삽화 박영철

 

일곱 제자 중 뛰어난 네 제자
王重陽(왕중양)은 劉處玄(유처현)을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여 그의 문하 7명의 이름난 제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7명의 제자를 세상에서는 全眞七子(전진칠자)라고 한다. 흔히 중국무협 소설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이들 7명중 뛰어난 제자를 소위 ‘馬譚劉丘’(마담유구)(마단양·담처단·유처현·구장춘)라고 한다.

왕중양이 오래전에 지은바 있는 ‘竹杖歌’(죽장가)에서 이야기한 네 사람이다. ‘죽장가’ 시속에 “…昨霄夢裏見諸虯 內有四虯能跳躍.(작소몽리견제규 내유사규능도약)(간밤 꿈속에서 많은 규룡을 보았는데, 그중 네 마리 규룡만 능히 도약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왕중양과 제자 일행은 남경 즉 개봉에 도착한 후, 왕씨반점에 머물렀다. 당시 그곳에는 자를 友之(우지)라고 하며 이름이 孟宗獻(맹종헌)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벼슬이 單州同知(단주동지)였다.

神風(신풍)선생 杜哥(두가)라는 사람이 일찍이 ‘맹종헌이 장차 과거시험에 일등으로 합격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예언한 적이 있었다. 이 두가의 예언은 몹시 영험하여 맹종헌은 두가를 신선처럼 받들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두가가 맹종헌에게 “元帥(원수)가 왔다. 나는 응당 가서 인사를 올려야 하겠다.”한다.

인사도 받지 않고 책읽기에 몰두
맹종헌은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서 몰래 두가의 행적을 추적하게 했다. 두가는 왕씨반점으로 뛰어 들어가 무릎을 꿇고 왕중양에게 절을 올린다. 왕중양은 마침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데, 책만 읽고 있을 뿐 두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맹종헌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다.

나중에 두가가 다시 두 번째 인사하러 갔으나 왕중양은 그저 한번 힐끗 쳐다 볼 뿐이었다. 두가가 세 번째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왕중양은 그때서야 얼굴에 웃음을 띠우면서 두가의 인사를 받는다. 그러자 두가는 기뻐서 참새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맹종헌은 이 사실을 옆에서 지켜보고서 무엇인가 대단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자신도 왕중양을 만나러 왕씨반점에 찾아갔다.

그때 왕중양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역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맹종헌은 왕중양에게 ‘무슨 책을 읽습니까?’ 물었으나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맹종헌은 앞으로 나아가 확인해보니 柳永(유영)이 쓴 ‘樂章集’(악장집) 한 권이다.

그래서 맹종헌이 “이 책이 전부 입니까?”하니 왕중양이 “다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책 한권이 전부이다”한다. 맹종헌이 서둘러서 “저희 집에 全集(전집)이 있는데, 가져오겠으니 마저 보시겠습니까?”한다. 그 자리에서 사람을 보내서 전집을 모두 가져와 왕중양에게 바쳤다.

왕중양은 남경에 온 후 마단양 등을 시켜서 저자거리에서 구걸을 하게 했으며, 돈을 받아서는 한 근 무게의 잉어를 사서 먹었다. 그 잉어 무게가 한 근이 되지 않거나 혹은 한 근이 넘어도 모두 먹지 않았다고 한다.
 

ⓒ 삽화 박영철

 

잉어를 통해 과거 합격을 미리 암시하다
왕중양은 제자들이 탁발한 돈으로 사온 잉어가 한 근이 넘거나 한 근이 모자라면 먹지 않았다. 그것을 본 맹종헌은 마음속으로 자못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도사가 樂章集악장집을 보는 것도 그리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안에 무슨 도리가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느 날 왕중양이 ‘악장집’을 돌려주었다. 맹종헌이 책장을 한번 쭉 넘겨보는데, 책 가운데 빈곳 여백에 매 편마다 모두 물음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글을 써놓았다.

그 글을 읽어본 후 탄식을 하면서 ‘이것은 정말 신선의 작품이다’한다. 그래서 맹종헌은 얼른 沐浴齋戒목욕재계하고, 왕중양에게 달려가 향을 사르고 가르침을 청했다. 이때부터 왕중양을 더욱 공경스럽게 받들어 모셨다.

그러나 왕중양은 이로부터 더 이상 잉어를 먹지 않았는데, 이것으로써 맹종헌이 과거시험에 일등으로 합격한다는 것(龍門용문의 大鯉魚대리어 : 登龍門등용문이라 하여 용문은 황하강 상류에 있는 급류로 잉어가 거기에 올라가서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立身出世입신출세에 연결되는 어려운 관문 또는 운명을 결정짓는 시험 등을 비유하는데 가장 큰 잉어이니 일등 합격)을 미리 암시한 것이다.

왕중양은 우화등선할 날이 점차 다가옴을 알아채고 각종 嚴酷엄혹한 방법을 사용하여 제자들을 단련시켰다. 하루는 제자들이 탁발해온 돈을 전부 모아 땔 나무와 숯을 사오라고 하였다. 거처하는 협소한 작은 방안에 나무와 숯을 모아놓고 불을 붙였다.

마단양과 담처단은 방안에 서 있게 하고 유처현과 구장춘에게는 방밖에 서 있도록 한다. 실내에는 열기로 인해 서있기조차 어려웠으며, 밖에서는 살을 에듯 매섭게 바람이 불어와 유처현은 감히 견딜 수 없어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왕중양은 마단양, 담처단, 구장춘 세 제자를 침상아래 불러 세워놓고 “마단양은 이미 도를 얻었다(得道). 담처단도 이미 도를 안다(知道). 나는 이제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다. 구장춘은 배울 것이 있으면 마단양을 의지해서 배워라. 유처현은 담처단에게 가르침을 받아라” 한다. 구장춘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은 나중에 지위가 매우 높을 것이다. 필연코 全眞敎門전진교문을 널리 알릴 사람이다” 한다.

숨을 거두었다가 다시 눈을 뜨다
다음해 정월, 왕중양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나는 이제 스승님들과 만나기로 한 기한이 되었다”한다. 마단양 등은 유언을 남겨달라고 한다. 왕중양은 “나는 이미 경조 난촌 呂道人庵여도인암의 담장 벽 위에 써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절대 울지 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후 바로 숨기운이 끊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통곡을 한다. 그때 죽은 왕중양이 홀연히 눈을 뜨고는 “더 이상 이와 같이 울지 말라”고 한다. 또 마단양에게 “이후에 관서지방으로 가거든 나의 고향사람들을 제도해 다오”하면서 재삼 부탁한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逝去서거하였는데 향년 58세였으며 그 당시가 大定대정 10년(1170)정월 초 4일이었다.

나중에 마단양 등 제자들은 스승 왕중양의 고향인 종남산 劉蔣村유장촌을 찾았다. 왕중양은 예전에 고향에서 미치광이 짓을 하여 고향사람들로부터 다소 홀대를 받았는데, 제자들이 와서 傳敎전교를 시작하자 마을사람들 모두는 이때서야 그 진상을 알고 後悔莫及후회막급이었다.

제자들은 남방으로부터 왕중양의 靈柩영구를 모셔와 고향인 유장촌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무덤가에 띠 집을 짓고 3년 侍墓시묘살이를 하고난 후 각자 뜻 한바 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원나라 世祖세조 至元지원 6년(1269) 정월, 왕중양을 ‘重陽全眞開化眞君’중양전진개화진군으로 봉해졌다. 그 후 武宗무종 3년(1310)에는 ‘重陽全眞開化輔極帝君’중앙전진개화보극제군으로 받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