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의학의 원류를 찾아서_01

醉月 2012. 6. 17. 13:13

화타

중국 고대 왕조를 이끈 전설의 삼황 중 두 번째 황제인 신농(神農)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하루 100여 가지 약초를 맛보고 효능을 정리해 병자를 구했다. 신농은 숱한 독초를 먹고 중독되어 쓰러지기도 하고 몸의 형태가 변할 정도였지만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신농이 당시 정리한 약의 성질과 효능은 훗날 한의학의 기초가 되었다. 삼황의 하나인 황제(黃帝)는 신하 기백(岐伯) 등과 함께 의학을 논했고 이를 정리한 황제내경은 한의학의 원전으로 불린다. 고대의 제왕에게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병자를 구하는 것은 중요한 사명이었으며, 훗날 세인의 추앙을 받은 명의들도 명예와 이익보다는 환자의 고통을 다스리고자 했다. 음양의 조화와 심신의 균형,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는 한의학의 이론 체계를 다졌던 고대 명의를 찾아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려 한다.

  

한(漢)나라 말기, 즉 동한 시기는 삼국지연의의 배경이 되는 시대로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했다. 군웅이 할거하면서 논과 밭은 전쟁터로 변하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역동적인 역사 뒤편에는 질병으로 신음하는 민초들의 애환이 있었다. 화타(華陀, 145~208)는 동한 시대 최고의 의사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지금의 안휘성 호현(毫縣)에 해당하는 패국의 한 마을에서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름은 부(敷)였고, 자(字)는 원화(元化)였으니 훗날 화타로 불린다.


화타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었으며 특히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큰 인물의 성장에는 큰 난이 있기 마련. 화타가 12세 때 화타의 어머니는 속병을 심하게 앓아 극심한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기억은 화타를 평생 의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화타는 가족을 떠나 수도 낙양에서 스승을 모시고 의학을 공부한다. 의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배움을 구했고, 좋은 처방과 의술을 수집해 정리했다. 당시 의관들은 돈벌이에 몰두했지만, 화타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2년 후 낙양을 떠나 화산 지역의 유명한 의관을 찾아 스승으로 모셨다. 여기에서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침구과 등 다방면의 지식을 축적했다. 야생에서 호랑이, 곰, 사슴, 원숭이, 새를 유심히 관찰하고 동작을 본 떠 화타 오금희의 기초를 만든다.


화타는 이후 평생 돈이나 명예보다는 환자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관리와 권세가들은 화타를 등용하려 했지만 화타는 매번 거절하고 환자 곁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화타는 화산에서 돌아온 후 초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진료를 시작한다. 지금도 안후이(安徽)성 보저우(亳州)시 옛 성 동쪽 문에는 화조암(華祖庵)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화타가 처음 의관을 연 곳으로 길 앞쪽으로 방이 2개 있다. 한 쪽은 화타의 진료실이었고 나머지 방은 병실이었다.


초현은 조조의 후방 방어 기지로 전쟁에서 다친 사람으로 넘쳐났다. 특히 칼과 창에 찔리거나 곪는 등 외과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많았다. 전무후무한 외과 의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화타의 탄생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처음에 화타는 독주와 약초로 소독과 지혈을 하고 치료했다. 하지만 마취 없이 수술을 받아야 했던 환자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화타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끊임없이 약초 연구에 매진한다. 초오, 남성, 백지, 백작약 등으로 탕약을 만들어 술과 함께 환자에게 복용하게 했더니 마취 효과를 보였다. 화타는 이를 ‘마비산(麻沸散)’이라 불렀고 수술 환자의 고통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마비산은 최초의 마취제로 수술 전 환자에게 마비산을 복용시키면 잠시 후 정신을 잃고 수면 마취 상태가 됐다. 수술이 끝나면 깨어나지만 고통은 적었다. 화타는 마비산 외에도 수술 후 봉합 부위와 상처에 바르는 외용제를 개발해 사용했는데 4~5일이면 상처가 아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 의학에서 마취제를 만들어낸 것은 이로부터 1600년 이후였다. 마비산의 명성은 대단했고, 이와 함께 화타의 명성도 높아져 갔다.


화타는 약, 침, 뜸, 심리치료에도 능했지만, 당대 의관과 크게 구별된 점은 뛰어난 외과의였다는 것이다.

 

한 관리의 아내가 병이 깊어 화타를 찾아와 진찰했다. 진맥을 마친 화타는 “뱃속에 죽은 태아가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지 않아 병이 생긴 것이다”고 말했다. 관리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아내가 유산하면서 죽은 아이를 꺼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태아를 꺼냈으므로 화타의 진단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병이 더욱 깊어지자 관리는 다시 화타를 찾았고, 화타는 진맥 후 여전히 처음과 같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화타는 애초에 쌍둥이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탕약을 복용하게 하고 배를 눌러 몸속의 죽은 태아를 끄집어내었다. 환자의 병이 나은 것은 물론이다. 이밖에도 개복 수술을 해 장기에서 병든 부위를 잘라 내 치료한 사례도 많았으며, 관우의 어깨뼈를 수술한 사례도 기록되어 있다.


현대 의학은 CT나 MRI 등 진단장비를 통해 병이 있는 곳을 찾아내지만, 화타는 별도의 장비 없이 정확하게 병을 유발하는 곳을 찾아내 효과적이고도 빠르게 제거했다. 다만 화타의 의술을 완전하게 전수받은 제자가 없어, 화타가 어떤 방식으로 진단하고 치료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현재 한의학계에서 사용하는 진맥 방법은 주로 오장육부의 질환을 판별하는 데 사용한다는 점에서, 조조의 뇌에 있던 종양까지 알아냈던 화타의 진단법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일설에는 화타가 ‘화타내사(華陀內事)’ ‘화타방(華陀方)’ ‘청낭서(靑囊書)’ 등 비결을 담은 저서를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남아 있는 저서가 없어 실존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후대에 화타의 이름을 사칭한 의학 서적이 다수 있었는데, 이는 화타의 의술처럼 신묘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일종의 대명사로 쓴 것일 뿐이다.

 

화타는 약, 뜸, 침, 수술 등 각종 치료법에 모두 능했으며, 인체의 원리와 구조에 해박했다.

 

한약으로 내장의 병을 치료한 사례는 부지기수고, 침과 뜸에도 능했다. 직접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가 하면, 병을 유발한 다른 원인을 간접적으로 치료해 모든 병을 한꺼번에 고치기도 했다. 원리에 능통하지 않고서는 자유자재로 의술을 운용하기 힘든 법이다.


화타는 치료시 혈자리를 2개 정도만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혈자리 두 곳에 뜸을 7~8장 뜨면 병이 호전됐고, 침치료시에도 침치료에 앞서 환자에게 어느 곳에 어떤 느낌이 갈 것인지 미리 말한 뒤 치료했다. 환자는 감각이 왔다고 답하기만 하면 됐고 화타가 미리 말한 것과 같았다. 화타는 침과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의 원인이 깊을 경우 외과 수술을 택했다.


간혹 무형의 심리 치료로 난치병을 치료하기도 했는데, 한 태수가 병이 위중해 화타를 찾았다. 화타는 진단 후 태수가 크게 화를 내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수는 화타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극진히 대접했지만, 화타는 태수를 심하게 욕하는 편지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태수는 분노했고 화타를 추격하게 한다. 태수의 아들은 자초지종을 알고 있던 터라 화타를 공격하지 않게 하고, 화타의 편지를 읽은 태수는 분노 끝에 피를 수차례 토한 뒤 병이 나았다. 이후 화타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몸조리를 돕는 약을 처방한다.


화타는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새를 본 뜬 오금희라는 체조를 만들기도 했다. 한의학에서는 체조 등을 통한 건강 관리방법을 도인 양생법이라 하는데, 화타는 오금희를 보급해 질환 예방에 활용하고자 했다.


화타의 제자 중 하나인 번아는 침에 능했는데, 일반 의사와는 달리 침을 내장과 신경이 있는 곳도 깊숙이 시술했다. 번아의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여러 서술에서 드러난 화타의 침술과 진단은 화타가 인체의 구조에 밝았고 해부학 지식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일설에는 화타가 극심한 두통을 앓던 조조를 진찰하고 조조가 발작할 때마다 격수혈(膈兪穴)에 침을 시술해 조조의 두통을 멎게 했다고 한다. 격수혈은 7번 흉추 극돌기 아래에서 양쪽으로 1.5치(약 4.5cm) 옆에 있다. 최근 한국 한의계에서도 치료에 활용하고 있는 협척혈도 화타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협척혈은 경추와 요추 극돌기 아랫부분의 양쪽 혈로 각종 척추 질환과 만성질환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협척혈은 흔히 화타협척혈로 불린다.


화타와 조조의 인연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하다. 화타가 조조를 만나면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과정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적벽대전 이후 조조의 두통이 잦아지자 조조는 급히 어지를 내려 명의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치료가 잘되지 않았고 화흠이 화타를 추천한다. 조조도 화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지만 의술에 대한 확신은 없던 터였다.


화흠은 화타가 약, 침, 뜸, 수술 등 환자에 따라 갖가지 방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명의라고 소개한다. 화흠이 든 사례 중에는 화타가 광릉태수 진등을 치료한 것이 있다. 진등이 가슴이 답답하고 음식을 먹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 시름시름 앓고 있었는데, 화타가 약을 처방하여 벌레 3되를 토하고 병이 나았다. 화타는 진등이 생선회를 먹은 것이 병의 원인이라고 말하면서, 3년 뒤 재발하면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떠난다. 진등은 아니나다를까 3년 후 같은 병이 재발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화흠은 화타가 이미 편작과 창공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조조는 급히 사람을 시켜 화타를 궁으로 불러들인다. 화타는 진찰 후 뇌 속에 풍이 있다면서 탕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고, 마취 후 두개골을 열어 수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크게 분노하면서 화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했다. 화타는 관우를 수술한 사례를 들면서 관우는 뼈를 긁는 수술에도 두려운 기색 하나 없었는데 조조가 더 작은 병임에도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있다고 답한다.


조조는 더욱 분노하며 투옥과 고문을 명한다. 가후 등이 화타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간언하지만 화타를 꺼낼 수 없었다.


감옥에 갇힌 화타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자신을 극진히 보살피던 오(吳)씨 성을 가진 옥졸(獄卒)에게 자신의 비법을 담은 청낭서(靑囊書)라는 책을 건넨다. 화타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의술이 잊혀지지 않으리라 믿었다.


훗날 화타가 죽고 옥졸은 화타의 책을 열심히 공부해 좋은 의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내가 마당에서 ‘청낭서’를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꾸짖는 남편에게 아내는 신묘한 의술을 가진 화타도 결국 자기 목숨을 구하지 못했는데, 당신이 이 의술을 배운다면 훗날 같은 신세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조조의 증상은 날로 심해져 훗날 눈이 보이지 않게 되더니 얼마 후 사망했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과 藥의 道를 말하다_03  (0) 2012.06.19
음식과 藥의 道를 말하다_02  (0) 2012.06.18
이기동 교수의 新經筵_03  (0) 2012.06.12
조용헌의 영지 기행_05  (0) 2012.06.09
이기동 교수의 新經筵_02  (0) 2012.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