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용헌의 영지 기행_05

醉月 2012. 6. 9. 05:33

혁명과 주술의 결합 ‘도솔암 마애불’

호남 미륵불이 도솔암 매개로 동학 발발시켜

영호남의 관계는 미묘하다. 상충되는 것 같으면서도 보완적인 측면이 있다. 백두대간의 주맥은 경상도로 흘렀다. 경상도가 등뼈 역할을 한다. 경상도가 척추뼈에 해당된다고 하면 전라도는 아랫배가 된다. 창자와 위장을 비롯한 내장은 전라도에 있는 셈이다. 척추가 자세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면, 창자와 위장에는 먹을 것이 들어가서 소화를 시켜줘야 한다.


수천 년간 호남은 한반도의 먹을 것을 제공하던 지역이었다. 한반도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 바로 호남이었던 것이다. 풍수적인 관점에서 영호남을 보자면 ‘영골호육’(嶺骨湖肉)이라고 볼 수 있다. 경상도는 산이 높고 많아서 농사지을 땅은 부족하다. 이에 비해 전라도는 넓은 들판이 깔려 있고, 남서해안가를 따라서 ‘뻘밭’이 널려 있다. 경상도는 ‘뻘밭’이 적은 편이다. 뻘밭은 바다의 밭인 ‘해전’(海田)이다. 육전(陸田)의 농작물이 흉년 들었다 할지라도 바다의 해전(海田)에는 흉년이 없다. 갈쿠리만 하나 들고 뻘밭에 나가면 조개도 잡고, 낙지도 잡고, 짱뚱어라도 잡는다.


뻘밭에서 일하는 돌쇠를 ‘갯땅쇠’라고 불렀다. 뻘은 갯가의 땅인 것이다. ‘갯가의 땅’을 줄이면 갯땅이 된다. 뻘밭을 끼고 있는 전라도의 해안가 사람들은 갈쿠리만 하나 들고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남해안으로 연결된 경남은 상황이 전라도와 비슷하지만, 동해안으로 연결된 경북 쪽은 바다로 멀리 나가면 망망대해 태평이다. 뻘밭도 없을뿐더러 멀리 나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육지의 들판과 해안가의 뻘밭을 보유하면서, 중국대륙이라는 세계의 제국으로 통하는 해로를 아울러 지니고 있는 곳이 호남이다.


▲ 선운산 바위맥의 끝지점에 도솔암이 있고, 바로 그 아래에 마애 미륵불이 있다.

바다를 통한 물류의 흐름은 제국인 중국으로부터 사람과 정보가 제일 먼저 들어온다. 풍부한 물산과 첨단 정보의 종합은 호남을 혁명의 발원지로 키웠다고 본다. 절대적인 빈곤상태에서는 혁명도 못 한다. 절대 기아상태에서는 체제전복 시도가 불가능하다. 최소한의 먹을 것이 있어야만 반체제도 가능한 것이다.


개성이나 한양 같은 한반도의 중심체제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면, 호남에는 물산과 물류의 기지가 집중되어 있었다. 중심부를 위협하는 대항세력의 거점은 자연히 돈이 있고, 정보와 사람이 몰려서 살던 호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지형적 차이는 기질과 행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무래도 먹을 것이 풍부하면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 여유는 의식주 문화 전체에 나타난다. 판소리, 한정식 요리, 의상, 주택 구조, 인간관계 방식, 발효음식, 성격과 기질이란 부분에서 호남은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지역인 것이다.


호남엔 물산과 물류 기지 집중돼 사람 몰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보자. 동학의 원료는 최수운(崔水雲)이  경주(慶州)에서 제조했다. 수운은 경주에서 태어나 잔뼈가 굵은 경상도 사람 아닌가. 그런데 이 동학이 폭발한 지점은 전라도이다. 화약제조는 경상도에서 했다. 그 화약이 경상도에서 폭발하지 않고 전라도에서 대폭발했다. 물건은 경상도에서 만들었지만 마케팅은 전라도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어떤 각도에서 해석해야 할까.


‘왜 동학이 만들어진 경상도에서 폭발하지 않았을까?’는 품어볼 만한 의문이다. 화약이 쌓여 있더라도 이게 폭발하려면 불씨가 있어야 한다. 성냥이나 부싯돌로 불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인화물질이나 불쏘시개가 있어야 한다. 그 부싯돌 역할을 한 장소가 전북 고창의 선운사 도솔암의 칠송대라는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이다. 약간 황토색이 들어간 바위벽에 음각과 양각을 혼합해 새긴 약 14m 크기의 마애불이다. 최근 들어서 미술사학자들이 절벽 단애(斷崖)에 새겨졌다고 하여 미술사적으로 마애불이라고 하지만 원래 이름은 미륵불이고, 미륵불이 맞다. 마애불은 족보가 없는 이름이다. 아마 천년도 넘게 미륵불이라 불렸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해 새긴 부처님이라고 한다. 선운사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절이니만큼 검단선사가 새겼다는 전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여간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사찰의 절벽 미륵불이 동학의 부싯돌 역할을 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오지영의 <동학사>를 보면 도솔암의 미륵불에 숨겨진 비결(秘訣)을 꺼내기 위해서 손화중의 포(包)에 속한 접주들은 회의를 갖는다. 도솔암 미륵불의 명치 부위에 미래세상의 변화를 예언한 예언서, 즉 비결이 감추어져 있는데, 이걸 꺼내는 사람이 새로운 용화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던 것이다.


▲ 선운산 마애 미륵불의 모습. 동학의 손화중이 배꼽에 봉인된 미륵불 비결서를 꺼낸 것으로 전해진다.

미륵불의 명치 부위는 약 15~16m에 달하는 높은 절벽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위치다. 통상 불상 속에는 복장(腹藏)이라고 하여 불상을 처음 조성할 때에 다라니 경전이나 금붙이, 또는 귀중품을 불상의 배 안에 넣어두는 풍습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미륵불이지만 여기에도 ‘복장’을 넣어두었던 것이다. 처음 미륵불을 조성할 당시에 미륵불의 오목가슴 부위를 사발만 한 크기로 둥그렇게 파낸 다음, 여기에다가 비결서(秘訣書)를 복장 대신으로 집어넣어 두었다는 이야기가 천년이 넘게 쭉 전해 내려왔던 모양이다. 민초들 사이에서는 이 미륵불의 비결이 꺼내지면 한양이 망하고 새 세상이 시작된다는 믿음도 같이 이어져왔던 듯하다.


미륵불은 새 부처님을 뜻한다. 석가불이 죽은 부처라면 미륵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부처님이었으므로, 미륵불이 출세한다는 것은 곧 낡은 세상이 끝나고 새 세상이 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미륵불은 곧 혁명하는 부처님, 즉 ‘혁명불’(革命佛)로 인식된 것이다. 종교적인 구세주가 혁명을 부추기는 지도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유교를 정도로 생각했던 조선시대에 불교의 미륵불은 위험한 신앙이요, 정권을 뒤흔드는 반체제의 신념체계였다.


1894년 당시 동학의 3대 지도자라고 하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꼽을 수 있다. 해월(海月)의 지도를 따른 이북지역의 북접(北接)을 빼고 이남의 남접(南接)만 가지고 하는 이야기이다. 전봉준은 동학의 얼굴마담이자, 전체 전략을 이끌었던 전략가형 지도자였고, 김개남은 가장 전투적이었던 무장 대원들을 이끌었던 행동 대장형이었고, 손화중은 지역사회의 인심을 얻었던 재력가이자, 조직가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혁명이 되려면 초기 단계에 인원동원이 필요하다. 사람이 모여야 힘이 생긴다. 주변의 인망을 얻은 손화중에게 사람들이 따랐고, 손화중은 이 사람들을 도솔암 미륵불 아래로 집결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