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의 정신적 갈증 풀어준 선승 범휴 스님
● 스시, 요가, 명상에 빠진 미국인
●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
● 한국불교 청화문중과 티베트불교 닝마파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라”
“최근 미국 상류층의 관심사는 스시(초밥), 요가, 명상입니다. 돈 있고, 학벌 있고, 지위도 있는 상류층의 일상 대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가 이 세 가지예요.”
11년간 미국에서 불교 수행을 지도하면서 현지 지식인 및 주류계층 사람을 만나온 조계종 범휴(梵休·56) 스님 이야기다. 그는 수행자같이 생겼다. 눈이 작고 눈빛이 예리한데다 몸이 호리호리한 편이다. 이런 체형이 고행을 감내한다. 수행은 고행을 감내해야 문턱을 넘어간다. 이런 몸과 관상을 타고나는 것은 아마 전생(前生)에도 수행자 생활을 했다는 증거이리라.
전생 성적표가 금생의 체형에도 반영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법명에 인도(印度)를 뜻하는 범(梵)자가 들어갔는가? 눈빛이 예리한데, 어딘지 모르게 평화로운 느낌도 배어 있다. 눈빛이 예리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면 수사기관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범휴는 미국인이 은퇴한 후 가장 머무르고 싶어하는 도시이자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지낸 바 있는 캘리포니아 주 카멜(Carmel) 시의 삼보사(三寶寺) 주지를 지냈으며, 세계적으로 기(氣)가 세다는 애리조나 주 세도나(sedona)에서 토굴을 짓고 4년간 집중 명상을 하기도 한 선승(禪僧)이다. 서양식으로 이야기하면 ‘젠 마스터(Zen master)’인 것이다.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다. 유럽보다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훨씬 심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백인은 겉으로는 개방적이고 평등한 척해도 유색인종에 대한 멸시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아시아인의 피부가 유색(有色)이라면 백인은 무색(無色)에 해당한다. 유(有)에 대한 무(無)의 우월감이라고나 할까. 이런 미국에서 백인이 그래도 대접을 좀 해주는 아시아인이 바로 불교 승려다. ‘멍크(승려·monk)’는 우선 복장이 독특하다. 잿빛 장삼은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보기에는 매우 개성 있고 특이한 패션이다. 특이한 옷을 입고 있으면 백인은 호기심을 가진다. ‘뭔가 다른 게 있나 보다’하고 말이다. 속은 알 수 없으니 우선 눈에 보이는 껍데기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멍크는 패션이 튄다. 그다음 멍크는 서양 백인이 잘 모르는 명상의 세계, 즉 마음의 고요함과 평화에 대한 전문가로 인식된다. 명상에 대한 집중 수련을 거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게 약간 존경심을 우러나오게 하는 요소다. 그들은 멍크를 ‘영성(靈性)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먹고사는 데 대한 스트레스가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음의 평화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라는 걸 누구보다 절절하게 인식하는 인종이 백인이다. 아르마니, 페라가모보다 한 급 높은 패션이 회색의 가사 장삼이 아니겠는가.
미국 상류층에 부는 동양 열풍
▼ 스시, 요가, 명상은 모두 동양 문화 아닌가? 스시는 일본의 초밥, 요가는 인도의 육체수행법, 명상은 불교 계통의 호흡법과 관법(觀法)이다. 초밥을 먹으면서 요가를 하고, 요가를 해서 몸을 푼 다음 명상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인데, 왜 갑자기 서양에서 이런 동양적인 가치가 고급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인가?
“비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미국인은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 어지간한 성인 남자 대부분의 체중이 100㎏에 육박한다. 인류 역사상 국민의 상당수가 100㎏씩 나가는 시대는 없었다. 비만은 ‘전염성이 가장 강한 질병’이라고 정의되는 실정이다.”
▼ 비만이 전염된다는 뜻인가?
“그렇다. 주변 사람이 배나온 것을 보고 ‘저 정도 나와도 괜찮네’ 하는 마음이 드는 게 전염이다. 비만은 치료가 힘들다. 아울러 각종 성인병이 발생한다. 당뇨, 고혈압, 심장병 등은 고치기 어렵고, 병원비도 많이 든다. 휴식과 여가(餘暇)에 써야 될 돈을 병원비로 쓰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삶의 질이 엄청나게 떨어지고, 사회가 무기력에 빠진다. 그러면 결국 사회가 망하는 것 아닌가. 대략 보면 미국이 198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이런 슬럼프에 진입한 것 같다. 베트남전이 끝나고부터 건강하던 미국 사회가 점차 도덕적으로 느슨해진 느낌이 든다. 개척자 정신이 쇠퇴했다. 주택 규모가 필요 이상으로 커지고 자동차도 대형화됐다. 유럽은 소형차로 갔는데, 미국만 대형차로 갔다. 몸의 비만이 비만에서 끝나지 않고, 생활환경의 비만, 즉 과소비로 이어졌다고 본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과소비 아닌가. 이는 탐욕에 해당할 뿐 아니라 도덕적 해이와도 연결된다.”
평화를 위한 명상
▼ 초밥은 밥 위에 날생선 조각을 얹은 음식이다. 불에 고기를 익혀 먹는 식습관이 있는 앵글로색슨족이 초밥을 먹는 것은 식생활의 큰 변화인 것 같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변하면 나오는 것도 변한다. 그 중간 과정에서 생각도 약간 변할 수 있지 않나.
“미국 상류층은 음식을 신중하게 가려 먹는다. 초밥을 다이어트 음식으로 여긴다. 아울러 채소를 많이 먹는다. 고기를 많이 먹으면 서민이고, 채식을 많이 하면 상류층이다. 묘한 역전이다. 소득이 많은지 적은지는 몸을 보면 안다. 뚱뚱하면 소득이 적은 하류층이고, 날씬하면 상류층이다. 음식을 조절해서 먹으려면 소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요가를 한다. 요가는 공원이나 운동장을 뛰지 않고 무거운 헬스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집에서 조용히 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이완해 준다. 육체 단련을 통해 마음을 다스린다는 게 요가의 특징이다. 요가를 통해 몸이 어느 정도 정비됐다 싶으면 그다음에는 명상으로 들어간다. 보다 집중적인 정신 훈련을 하려면 명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미국인이 파악했다. 요약하면 스시를 먹고 비만에서 벗어나, 요가를 해서 몸을 날씬하게 만든 다음, 정신집중을 위해 명상으로 들어가는 코스다.”
▼ 미국인은 지금 왜 동양사상과 명상에 관심을 두는가.
“첫째는 물질적 풍요에 대한 반동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는데 살아보니 깊은 행복감이 없지 않나. 세계 여행도 다녀봤고 배도 부른데, 가만히 혼자 있으면 마음이 공허하다. 평화가 그립다. 평화는 두 차원이 있다. 안으로의 평화와 밖으로의 평화다. 밖으로의 평화는 전쟁 반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원론적인 대립구조로 세계를 파악하는 한 평화는 없다. 선과 악, 너와 나를 완전히 다르게 파악하면 긴장이 따를 수밖에 없고, 결국 싸워야 한다. 싸우면 평화가 있는가? 미국인의 생각이 여기에 도달한 셈이다. 둘째는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계관, 우주관에 변화가 왔다. 첨단과학의 극미세계로 들어가면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첨단과학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흔드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이원론적 세계관의 흔들림은 명상으로 진입하도록 해주는 사상적 기반이다.”
▼ 명상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가만히 앉아 한 시간 이상 보내는 것은 고통에 가깝다. 서양인은 의자생활에 익숙해 가부좌도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명상을 한단 말인가?
“명상 붐은 앞서 말했듯 물질에 대한 집착, 과소비, 비만, 종교가 사라지고 난 뒤의 정신적 공허함 등에 대한 반작용이다. 미국의 요가 인구는 2000만 명을 넘겼다. 대다수가 먹고살 만한 중산층 이상 계층에 속한다. 요가를 하면 일정 부분 명상 효과가 있다. 이후 조금 더 들어가고 싶으면 명상 수행으로 이동한다. 그러다보니 명상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단 책을 보는 것부터 시작한 젊은이들은 다음엔 자기 거처에 명상실을 만든다.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고 향과 초를 사다놓는다.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켜놓고 앉는다. 일상에서 격리돼 향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눈감고 앉아 있는 것만 해도 명상이다.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 승복을 입고 걸으면 젊은이들이 같이 사진 찍자고 하고, 어딜 가느냐며 따라오기도 한다. 멍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이다.”
혼자 촛불 켜놓고 앉아 있는 단계가 지나면 명상 마스터와 명상센터를 찾아다닌다. 아이쇼핑 단계에 해당한다. 그러다가 자기와 맞는다 싶으면 몰두한다. 미국인은 집중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곧 떠난다. 사정없이 떠난다. 미국의 젊은 층은 제도화된 종교에 관심이 없다. 종교를 갖는 것을 어떤 틀로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명상에는 관심이 많다. 자기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것에는 관심 있지만, 교회나 사찰에 가서 의례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따분하게 여기는 상황이다.
틱낫한의 성공
명상은 동양 문화권에서 개발됐기 때문에 동양인의 문화에 맞는다. 서양에 맞는 명상법은 21세기 들어 개발 중이다. 동양의 명상법을 서양에 적용해 성공을 거둔 구루(Guru)는 베트남 출신 틱낫한 스님이다. ‘플럼 빌리지(梅花村)’가 그것이다. 틱낫한이 서양인의 기질과 문화에 맞는 수행법을 개발하는 데는 16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사이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봐야 한다.
한국의 숭산(崇山) 스님도 시간이 걸렸다. 처음 미국에 가서는 서부 LA에서 교포들을 상대했다. 그러다가 버클리에서 미국 학생을 가르쳤다. 버클리는 서부에서 중요한 정신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태평양 너머의 동양 문화를 수용하는 첨단 기지라고 봐야 한다. 버클리에서 경험을 쌓은 뒤 동부의 아이비리그로 갔다. 하버드대에 다니던 현각(에세이집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저자)이 제자로 들어와 스님이 된 것도 이때다.
동양의 명상법을 미국에 전달하는 데 효과적인 장소는 대학 도시다. 젊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의 틱낫한이 뿌리를 내렸고, 한국의 돌아가신 숭산스님이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중국이나 일본의 마스터는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스 이후 미국과 유럽에 어필할 마스터가 배출되지 않은 상황이다. 20세기 초까지는 서양인이 일본의 불교를 배웠다. 발달한 일본의 불교학과 스즈키 같은 걸출한 인물이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와서는 스타가 없다. 일본에서 시작된 동양 수행법에 대한 탐색은 동남아시아로 갔다. 미얀마, 태국, 그리고 인도다.
미얀마는 ‘위파사나’ 수행법의 본고장이다.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는 위파사나의 원형은 미얀마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미얀마가 군부독재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남방불교의 전통이 고스란히 보존된 순수한 나라다. 미얀마, 태국을 거쳐 인도에서 힌두교의 다양한 영적 전통을 탐색하던 미국인의 관심은 티베트에서 멈췄다. 로마교황청의 교황이 서구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달라이 라마는 동양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영적 스승으로 대접받는 인물이 바로 달라이 라마다. 역사상 유색인종이 서양인에게 이렇게 스승으로 추앙받은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할리우드 스타 리처드 기어가 그 흐름을 대표한다. 할리우드 스타는 미국에서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다.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나름대로 자기 인생관과 철학을 가진 상류층으로 대접받는다. 그 리처드 기어가 유색인종 달라이 라마에게 성금을 보내고,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염주 끼고 두 손 모아 합장하는 모습이 미국인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요즘은 달라이 라마가 독일이나 프랑스에 방문하면 그 나라에서도 국빈대접을 받는다. 의전도 대통령급이다.
티베트불교 전성시대
21세기 티베트불교가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계기는 드라마틱하다. 중국의 흡수병합 때문이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니 승려들이 탄압을 피해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티베트의 오래된 예언 가운데는 ‘라싸(티베트 수도)에 아이언 버드(Iron Bird)가 날아올 때 티베트의 불법이 세상에 퍼지리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아이언 버드’가 뭘 의미하는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면서 라싸에 비행장이 설치되고, 비행기들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그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 고대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티베트불교의 전파와 달라이 라마의 등장은 미국의 정치적 이해와도 연관돼 있다고 봐야 한다. 달라이 라마를 지렛대 삼아 미국은 중국을 흔든다. 그러다보니 달라이 라마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됐다. 문제가 생기면 달라이 라마는 미국으로 간다.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인 후원자는 미국인 것이다. 물론 중국 견제용이다. 세상사가 그렇듯 어떤 현상의 원인에는 이판적(理判的) 요소와 사판적(事判的) 요소가 얽혀 있다. 영적(靈的)인 원인과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 미국에서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시기는 언제인가?
“베트남전쟁 이후로 본다. 이때 미국 젊은 세대가 반전(反戰)을 모색했고, 그 사상의 뿌리를 불교와 노장(老莊)사상에서 찾았다. 미국 부통령을 지내고 부시와 대선에서 맞붙었던 앨 고어는 베트남전 반전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20대에 책으로 불교를 접했다. 그러다가 동양에 와서 머리 깎고 수행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미국 UCLA에 쭉 있다가 근래 컬럼비아대로 자리를 옮긴 미국의 불교학자 로버트 버스웰 교수 같은 사람이 이 범주에 속한다. 버스웰 교수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전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구산(九山)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며 승려 생활을 했다. 그 세대는 동남아시아의 사원이나 티베트, 인도, 한국 등지에서 10~20년씩 고행하다 서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다시 머리를 길렀지만, 서양의 일반 대중에게 명상을 지도한다. 파란 눈의 머리 기른 재가(在家) 승려라고나 할까. 벽안(碧眼)의 장문인(掌門人)이 태동하는 중이다.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마음(心)을 배우는 셈이다.”
▼ 서양불교 내지 미국불교의 특징은 뭔가.
“승단(僧團)이 없다는 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전해졌기 때문에 머리 깎은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없다. 그러다보니 머리를 기르고 사회에서 생활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참여불교라는 점이다. 산속에 있는 불교가 아니라, 세속도시 한가운데 있다. 사회참여 분위기가 강하고, 환경보호운동과 평화운동의 사상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 티베트불교의 강점은 무엇인가. 어떤 훈련을 받기에 티베트 승려는 자본주의 한가운데서 살면서도 무너지지 않는가?
“티베트에서 승려가 되려면 15~30년 동안 매일 열 시간 이상 경전 공부와 참선, 고행을 해야 한다. 자질에 따라 기간이 달라지긴 하지만, 최소한 15년은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티베트인은 삶을 거시적으로 본다. 보통 3생(生)을 본다. 첫 번째 생(生)은 계획을 짜는 기간이다. 두 번째 생은 그 일을 시작하는 단계다. 세 번째 생에 가서 일을 완성한다. 20~30년에 일을 끝내는 게 아니라, 거듭되는 환생을 통해 성취한다는 환생관(還生觀)을 갖고 있어서 어떤 일을 할 때 당장 결판을 내겠다고 서둘지 않는다. 준비를 철저히 한다. 한국에서는 서두르는 사람이 이익을 볼 때가 많다. 남이 자는 새벽에 일찍 출발하면 아무래도 목적지에 먼저 도달한다. 당일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만약 목적지가 석 달 걸려야 도착하는 곳이라면 새벽에 몇 시간 앞서서 출발하는 게 별 이득이 안 된다. 해발 5000~6000m 되는 눈보라 치는 고개를 수십 개씩 넘어야 하는 여행의 경우 자칫 서둘렀다가는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영하 30도의 혹독한 추위에서 살아남는다. 이처럼 가혹한 환경적인 요소는 티베트 사람의 체질에 박혀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티베트에서는 교수를 가르칠 수 있는 최상급 수준의 승려를 ‘겟세’라고 한다. 다른 말로 ‘교수사(敎授師)’인데, 서양의 대학교수를 지도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쌓은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다. 겟세가 세계에 500명 정도 파견돼 있다고 한다. 티베트 망명정부에서는 최정예 부대를 세계에 전도사(傳道師)로 파견한 셈이다. 선생이 훌륭하니까 티베트불교가 서구 유럽의 지성에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겟세의 최고봉이 달라이 라마다.”
▼ 미국 명상센터 중 티베트불교를 접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중 동부 이타카(Ithaca)의 ‘지혜의 황금지팡이(Wisdom?s Goldenrod Center for philosophic Studies)’는 달라이 라마와 관계가 깊은 곳이다. 이타카는 코넬대가 있는 소도시로, 티베트불교 서적만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스노 라이언(Snow Lion)’ 출판사도 여기에 있다. 1979년 달라이 라마는 미국 첫 방문길에 이타카에 갔고, 1991년에도 방문했다. 1972년 앤서니 다미아니(Anthony Damiani)라는 뛰어난 인물이 설립한 이 단체는 철학과 영성을 배우는 공부단체라고 보면 된다. 앤서니는 철학과 종교, 천문학에 능한 지도자였다. 그는 직업이 없는 사람은 센터에 출입하는 것을 금했다. 공부와 명상을 빙자해 무위도식하는 사람을 경계한 것이다. 본인도 노동을 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고된 직업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돈을 모아 조금씩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황금지팡이 건물은 길이가 40마일(약 64㎞)에 달하는 세네카 호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호수변에 미국 동부의 전통적인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포도밭이 많아서 전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이 단체는 197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점차 소문이 났다. 코넬대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서로 모여 토론도 하고, 동양 정신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스승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가끔은 멤버들이 스승 앤서니가 일하는 톨게이트에 찾아가 새벽까지 같이 종교와 철학, 영성을 토론했다고 전해진다. 미국 서부에서 버클리대가 동양의 영성으로 유명하다면, 동부에서는 단연 코넬대다. 1984년 앤서니가 사망한 뒤에도 50~60대가 된 제자 그룹은 계속 이타카에 모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주로 코넬대 출신인 핵심 구성 멤버 30~40명은 전문직 종사자로, 정신과의사, 코넬대 교수, 출판사 사장, 유엔본부 스피치라이터 등이라고 한다.”
지혜의 황금지팡이
▼ 황금지팡이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1994년 전남 곡성 태안사 청화(淸華·1924~2003) 스님이 미국에 건너갔다. 삼보사에 계셨는데, 한국의 고승이 그 절에 머문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금지팡이 멤버가 찾아갔다고 들었다. 청화 스님 문중인 내가 2001년부터 삼보사 주지를 맡으면서 황금지팡이 이야기를 듣게 됐고, 2007년 그들의 초청을 받아 한국의 선(禪) 수행법을 지도해준 적이 있다. 그 후 멤버들과 같이 과학과 불교에 관한 세미나를 하면서 티베트불교의 세부 사정을 알게 되고, 교류도 계속하게 됐다.”
▼ 미국인에게 불교와 명상을 이야기할 때,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불교는 경전도 많고 교파마다 골짜기가 많다. 어느 골짜기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각기 접근법이 다르지 않은가.
“미국 식자층이 가장 많이 묻는 것은 ‘무아(無我)’다. 미국은 개인주의 사회다. ‘나’에 대한 의식이 개인주의의 기반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내가 없다’(無我)를 주장하니 납득이 안 되고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내 설명은 이렇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부정모혈(父精母血)에서 왔다.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여기에 비물질적인 건달바(乾흜婆·의식)가 더해져야 수정이 된다. 세 가지가 합일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물질적인 그 무엇이 있어야 잉태가 된다는 게 불교의 관점이지만 이건 복잡하니까 빼고, 우선 부정모혈만 따지고 올라가보자. 나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할머니), 아버지의 아버지(할아버지)가 뭉쳐서 된 생명이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계속 윗대로 소급해보자. ‘나’는 내 위로 조상 수백 대(代), 수천 대(代)가 뭉쳐 조합된 존재다. 내 안에는 수백만 년간 진화해온 조상의 유전자가 모두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결국 나는 완전히 독립돼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먹는 것을 보자.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고, 물도 먹고, 호흡도 한다. ‘나’는 이런 요소들로 채워진 존재다. 고기, 채소, 물, 공기가 어디서 왔는가? 우주로부터 왔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독야청청(獨也靑靑)할 수 없다. 나는 우주적 연기(緣起)의 일시적 조합물이라는 게 무아(無我) 사상의 핵심이다.”
진공묘유의 신비
▼ 그렇지만 늙고, 병들고, 고통 받는 ‘나’는 있지 않은가? 고통 받고 시달리는 지금 여기의 ‘나’가 어찌 없단 말인가?
“맞다. 그걸 현상은 있는데, 본질은 없다고 한다. ‘유업보 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다. 현상이라고 하는 업보는 그 순간에 있는데, 그 근원을 파고들어가면 업보의 실체는 없다고 본다. 늙고 병들어서 고민하는 ‘나’는 누구인가로 시각을 전환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 ‘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우주적 연기의 조합물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아(無我)보다 비아(非我)가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내가 없다’는 관점보다는 ‘내가 아니다’라는 관점이 현대인에게 더 설득력이 있다. 인간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본다. 똥을 예로 들어보자. 똥이 몸 안에 있을 때는 더럽지 않다. 그러나 몸 밖에 나오면 더럽다고 여긴다. 똥은 더러운 것인가, 안 더러운 것인가?”
▼ 몸이 그렇다고 한다면, 마음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없다고 하기에는 작용이 분명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마음이다. 비어 있으면서도 묘하게 작용하는 것은 있다.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다. 말장난 같기도 하다.”
▼ 진공묘유라는 모호한 개념을 논리적 사고로 무장한 서양인이 받아들이는가.
“첨단 물리학의 이치를 빌려와 설명하는 게 효과적이다. 물질의 극미세(極微細) 단위, 원자든 쿼크(quark·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를 구성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기본적인 입자)든 그런 미세한 단위로 들어가면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찰하는 과학자의 마음과 극미세 단위의 물질이 서로 교감한다는 게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다. 마음과 물질이 교감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관찰자가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 미세원자의 파동이 달라진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진공묘유의 관점과 일치한다. 극미세를 진공이라고 보고, 묘유는 마음이 될 수 있다. 극미세계에 들어가면 물질은 물질이 아니다. 물질의 원재료는 비물질인 에너지다. 물질과 비물질이 둘이 아닌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발견을 받아들인 서양인들은 진공묘유를 납득할 수밖에 없다.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현대 물리학의 이치를 많이 인용한다.”
▼ 현대 물리학과 불교를 엮어서 설명하려면 현대 과학의 성과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어렵지 않나.
“내가 출가한 청화(淸華)문중이 유별나게 물리학에 관심이 많다. 은사 용타(龍陀) 스님도 그렇고, 용타의 스승인 청화, 그리고 청화의 스승인 금타화상(金陀和尙)도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금타는 일제강점기에 내장산 벽련암(碧蓮庵)과 백양사 운문암(雲門庵)에 주석했는데, 출가 후 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잠시 환속한 적이 있을 정도로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다부지고 굳세어 번뇌를 부수어버리는 부처의 삼매)에 들어가서 체험한 것을 ‘마음천문도’로 그려 남겨놓기도 했다. ‘과거에 도를 깨달은 아라한들이 금생에 물리학자로 태어나 석공(析空·공을 쪼개다)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물리학을 중시하는 가풍은 청화로 이어져서, 그 제자인 용타 스님과 나도 영향을 받았다. 이게 이타카에서 미국 식자층과 교류할 때 좋은 발판이 됐다. 현대 물리학과 진공묘유는 궁합이 맞는다.”
보리방편문
▼ 이런 원리적인 설명만으로 명상이 되나. 마음의 평화를 이루려면 머리에서 이론적으로 납득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실천적인 방법이 필요하지 않나.
“그 핵심은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에 압축돼 있다.”
금타화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보리방편문의 내용은 이렇다.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한 조각 구름이나 한 점 그림자도 없이 크고 넓고 끝없는 허공 같은 마음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러한 허공 같은 마음세계에 해와 달을 초월하는 금색광명을 띤 한 없이 맑은 물이 충만한 바다와 같은 성품바다를 관찰하면서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생각하며,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형체 없는 중생과 밖으로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내와 대지 등 삼라만상의 뜻이 없는 중생과, 또는 사람과 축생과 꿈틀거리는 뜻이 있는 중생 등의 모든 중생들을, 금빛 성품바다에 바람 없이 금빛파도가 스스로 뛰노는 거품으로 관찰하면서 천백억 화신인 석가모니불을 생각하고, 다시 저 한량없고 끝없이 맑은 마음세계와, 청정하고 충만한 성품바다와, 물거품 같은 중생들을 공空과 성품性品과 현상相이 본래 다르지 않는 한결같다고 관찰하면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이 원래 한 부처인 아미타불을 항시 생각하면서, 안팎으로 일어나고 없어지는 모든 현상과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덧없는 행동들을 마음의 만 가지로 굴러가는 아미타불의 위대한 행동모습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이 보리방편문이 청화문중의 수행 요지다. 염불선(念佛禪)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국의 불교 전통은 간화선(看話禪)이다. 화두에 집중하는 수행법이다. 세계적으로 간화선의 전통이 가장 잘 보존된 나라가 한국이다. 간화선의 원조인 중국은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이 전통이 단절됐지만, 한국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니, 간화선의 종주국은 이제 한국이다. 근래에 해인사의 성철(性徹) 선사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면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의 돈점(頓漸) 논쟁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청화문중은 염불선이다. 간화선과는 다른 가풍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간화선이 주류라면 염불선은 비주류의 수행법이다. 그런데 이 염불선의 근거가 금타화상으로부터 나온 보리방편문이고, 이 보리방편문은 금타화상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용수(龍樹)보살로부터 받은 법문이라고 한다. 용수보살이 누군가. 나가르주나, 연기(緣起)를 통해 공(空)을 입증한 중론(中論)의 저자이자 대논사(大論師). 남천축국, 즉 인도 출신의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 사람 아닌가. 2000년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1930년대인 일제강점기, 내장산 벽련암에서 수도하던 금타화상이 삼매중(三昧中)에 이 법문을 전수받았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종교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있다.
▼ 삼매 중에 용수보살로부터 ‘보리방편문’을 전수받았다는 것이 신비롭다. 종교적 초월의 경험, 즉 삼매를 체험해보지 않은 보통 사람이 왈가왈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렇지만 궁금증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2007년 미국에서 티베트 고승을 만난 적이 있다. 황금지팡이에 티베트 고승을 만나고 싶다고 부탁하니 연결해줬다. 파드마삼바바 센터의 ‘켄첸 팔덴 린포체’였다. 티베트에서 가장 오래된 문파인 닝마파(派)의 장문인급 고승이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쪽에서는 ‘보리방편문 수행’을 한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이건 티베트 닝마파에서 비전(秘傳)으로 내려오는 수행법이다. 우리는 ‘족첸’ 수행법이라고 한다. 족첸은 용수보살로부터 유래된 수행법이라고 한다. 티베트불교는 용수보살로부터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닝마파의 역대 고승들이 보리방편문 비법을 수행했고, 티베트의 예언에는 이 수행법을 티베트 밖에서도 전수받을 수 있다고 돼 있다. 과연 그 전설대로 한국에서 ‘족첸’ 수행법이 전승되고 있다니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닝마파 불교
티베트불교에는 몇 개의 문파가 있다. 닝마파, 카담파, 사캬파, 카규파가 4대 교파이고, 나중에 생겨난 겔룩파도 있다. 닝마는 티베트어로 ‘오래됐다’는 뜻이다. 이 교파는 자신들의 전통이 8세기의 대도인인 ‘파드마 삼바바’로부터 전승됐다고 한다. 티베트에서 7세기 초부터 9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던 토번(吐蕃)왕조 시기에 번역한 구(舊) 밀주(密呪)를 주요 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뿌리가 아주 깊다는 의미에서 ‘닝마파’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만년의 이야기 티베트, 지토 편집부 지음, 박철현 옮김 124쪽 참고),
닝마파는 티베트 토착 신앙인 본교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가 결합된 문파다. 그래서 주술적인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다. 초기 닝마파의 밀법(密法)은 가족 사이에서만 전승돼왔다고 전해진다. 사원과 경전이 생긴 시기는 11세기 후반부터다. 그만큼 비밀스러운 성격이 강하다. 이후 중국 원(元)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닝마파 고승들을 존중해 법사로 임명했다. 닝마파 고승들을 원나라 궁전으로 초대해 불법을 전하게 했고, 왕실에서 대접했다. 즉 원나라 황제가 신봉했던 왕실불교의 중심에 티베트 닝마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에도 간접적으로 닝마파의 교법이 전수됐을 가능성이 있다. 어찌 되었건 티베트 닝마파의 ‘족첸’ 수행법과 청화문중의 ‘보리방편문’이 같다는 건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 보리방편문, 즉 염불선을 일반인이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명상 초보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초보자에게는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라’고 강조한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먼 곳에 가 있는 것처럼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되는 게 가장 비명상적인 태도다. 몸이 음식을 먹고 있으면 음식 먹는 일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지금 내가 이것을 하고 있구나’ 하고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 그다음은 호흡이다. 들숨과 날숨을 쉴 때 숫자를 세라고 한다. 호흡을 들이쉴 때 하나, 하나, 하나 하고 들이쉰다. 내쉴 때도 하나, 하나, 하나 하고 내쉰다. 이 숫자를 열까지 센다. ‘둘, 둘, 둘’ 이런 식이다. 10분 정도 앉아서 열까지 세라고 시킨다. 이걸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한다. 이 단계에 익숙해지면 숫자를 세는 동안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숨 쉴 때 공기가 코와 입술 사이 부분의 피부와 접촉하는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노력한다. 이 느낌을 가지려면 반복 연습이 필요하다. 그다음 단계도 있지만, 이 단계까지 오지 못한 사람에게 그 이상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전남 장성 축령산 휴휴산방에서 범휴 스님과 2박3일간 같이 숙식하면서 인터뷰를 했다. 산방 마당에 단풍나무의 초록색 잎과 해당화 잎이 올라오는 5월 초였다. 산방 주위에 온통 신록이 우거진 가운데 생로병사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방대한 대담을 주고받았다. 아궁이에 장작을 때 방바닥은 따뜻했다. 자본주의의 정신없는 쳇바퀴에서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된 대화였다. 대담 중 최고의 대담은 도담(道談)이고 영담(靈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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