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민족의식과 한시
1. 머리말
1906년 봄, 對馬島 嚴原衛戍營에 수감되어 있던 勉菴은, 함께 잡혀 온 문생들의 추라한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처연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持斧伏闕하여 斥和議疏를 올리고, 請討五賊疏를 올렸으며, "간쟁은 도움이 되지 않고 자결은 필부의 하찮은 의리"(徒煩諫爭,不濟於事,自經溝瀆,又不過爲匹夫之諒)라고 결단코 擧義의 길을 택하였던 선생이었다. 선생은 상투를 드러낸 채 염발질도 제대로 못하고 있던 문생들에게, 상투를 싸맬 크기의 검은 베 조각을 구해 緇布冠을 만들어 쓰라고 권하였다.
서양 바람 쓸어와 우리 풍속 뒤바꿔
머리 깎고 갓 찢는 한심한 지금
검은 베 치포관은 유법을 따르는 것
기거엔 부디 이로써 예갖추길
捲地西風俗尙移, 毁形裂冕此何時.
緇冠依倣宣尼制, 動止從今可用儀.
제국주의의 침탈 앞에서 민족의 자존심만은 고수하자는 것이 勉菴이 지녔던 민족의식의 일단이었다. 대마도를 오가는 군함, 높은 누대, 맑은 물을 끌어들여 행 하는 蠶業, 八幡神社의 떠들썩한 마쯔리를 눈으로 보았고, 손량한 통역 및 보병들과 접하여 "타국에도 이웃 있음을 알았던"(始識殊方亦有隣-[通譯阿比留爲人遜良書贈一絶]) 시점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古禮의 재해석을 촉구하였다. 緇布冠制의 선택은 古禮의 맹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세 침략과 그것에 대응한 민족 자존심의 고수라는 절박한 요구 속에서 강구된 것이었다.
한시문은 형식의 질곡이 내용의 발전을 저해하는 면이 있는 반면, 그 자체 고도한 예술형식으로서 어떠한 주제나 소재도 다 포괄할 수 있다는 개방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시를 통하여 읽을 수 있는 자의식적 경향과 현실 비판의 특징은 그 이전 시기의 시에서도 구현될 수 있었다. 반면, 우리 민족사의 한 전환기였던 조선후기에 있어서 한시문은 그것이 지닌 형식 요건상의 장애 때문에 마땅히 담아야 할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면도 없지 않았다.
전근대 시기의 한시에 줄곧 반영되어 온 주제이면서, 조선후기에 중심주제로 부각된 것 가운데 하나가 민족주의적인 지향의식일 것이다. 이 지향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주제나 소재면의 몇몇 특징에 제한하여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민계급의 사상으로서 파악하거나, 제국주의의 등장과 함께 대두된 피압박 민족의 자결의식이란 의미로 이해한다면, 전근대 시기의 조선에 있어서 민족주의적인 지향을 운위한다는 것은 어쩌면 논리상 근거를 얻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매 역사 시기마다 주변 제 민족과의 대립과 투쟁을 거치면서 邊境意識과 民族成員意識, 그리고 運命共同體 意識을 심화시켜 왔고, 사회경제 구조상 큰 전환이 있었던 18세기 이후로는 민본주의적 원칙 위에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코자 하는 문화적 민족주의가 발흥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우리 한시는 줄곧 나름대로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담아 왔고, 특히 18세기 이후로는 민족문화와 민족사에 대한 반성을 담는 일이 많아졌다.
臆見에 불과하지만, 조선후기 한시는 내용상 ①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의 표출 ②변경의식의 고양 ③민족역사에 대한 관심 표명 ④자국 언어 및 국문문학에 대한 관심 표명 ⑤독자적인 문명의식 ⑥민족 정서의 재발견과 소외된 민족성원에 대한 재인식 등의 주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담음으로써 민족주의적인 지향을 뚜렷히 드러내고 있으며, 그러한 주제사상의 내용화와 더불어 형식면에서 ①중국 문단에의 예속이나 추종을 포기하고 ②기존의 문학형식을 자기화하거나 ③새로운 문학형식을 창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높아졌다고 생각된다. 이하 이러한 몇몇 특징들에 대하여 간단히 보고하기로 한다.
2. 조선후기 한시에 반영된 민족주의적인 지향
(1)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의 표출
임진, 병자의 양란을 겪으면서 한시는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는 일이 많아졌다. 치욕적인 과거를 돌이켜 분개하는 내용이나, 저항운동에 뛰어든 義士들의 영웅적 행위를 칭송하는 내용이 모두 그러한 예에 속한다. 전자의 예로는 三田島碑를 읊은 영사시들을 들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후자의 예를 하나 들면, 鄭文孚를 따라 鏡城에서 거병한 李鵬壽의 사적을 노래한 洪良浩의 [臨溟大捷歌]({耳溪集} 권5 {朔方風謠})가 있다. 정문부의 사적은 함경도에 좌천되거나 유배되었던 문인-학자들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칭송되었는데, [臨溟戰勝碑](崔昌大)나 {彰烈誌}가 전하여서겠지만, 그 뒤에는 역시 민중적인 구비전승의 세계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는 7언 가행체 47운의 장편으로, 사적을 서사적으로 제시하고 李鵬壽의 伸雪 褒贈 경위를 서술하였으며, 말미에 다음과 같은 史評을 첨부하고 있다.
지난날 김종서, 윤관이 강토를 개척한 것은
나라 위엄, 군대 강성에 의존하여서였네
공은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빈주먹을 휘둘러
우뚝하기가 마치 미친 물결 속 砥柱山같았네
그렇지 않았더면, 두만강 안 땅이 우리 차지 안 되었을 뿐 아냐
上國에 잠식당하는 것이 이로부터 있었으리
昔日金尹拓疆土, 國威兵力是憑倚.
公遭板蕩奮空拳, 屹若狂瀾障一砥.
不然不惟豆江以內非吾有, 蠶食上國從此始.
北地에서 叛賊을 막아낸 일을 두고, 우리 강토의 경계를 분명히 하여 淸에 의한 국토 잠식을 예방한 공적이라고 평가한 점이 주목된다.
한편 徐有本의 {左蘇山人集}(大阪府立圖書館所藏 筆寫本)에 수록된 [謁忠賢祠]는 姜邯贊·徐甄·李元翼의 위업을 追想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다.
금양은 이름난 옛고을, 산악이 精英을 내었네.
지난 날 고려 중엽에, 어진이가 우뚝 났으니.
太師는 尊攘 의리 잡아서, 쏟아지는 江河를 막았다.
미친 칼은 북새에 걷고, 妖氣는 東海에 못 와
백성들 그 혜택 입어 문물이 법식대로 빛나라
아아, 徐掌憲은 의리지켜, 周京[李朝의 漢陽]에 조회 않았으니
천년토록 관악산은, 首陽山같이 우뚝하여라.
완평군은 선조조에 내달려 성명을 보익하니
계책으로 조정 정략 넓히고, 군사 다스려 변경에 씩씩했도다
중흥 대업을 거듭 도와서 나라안이 길이 평안하였다
높은 공은 사서에 빛나고, 맑은 이름은 해와 별처럼 밝아라
시대가 달라도 지취가 同調하고, 길은 달라도 충정은 한결같네.
소요 사실은 아무 개울에 전하고, 수양하신 곳은 북쪽 묘지 가까이.
공렬이 길이 보답받아, 예에 맞는 祭典이 거행되니
세 현인을 食케 하고 경내는 엄숙코 청결하다.
강당에는 絃誦하는 학도들 나열하고, 부엌에는 祭器들이 늘어 있네
내 와서 영정을 바라보며, 옷매무새 고치고 문지게에 절하고는
문지방 언저리서 예갖추니, 산 분을 대하는듯
九泉서 다시 일어나, 나라의 楨幹[곧 근본]을 맡아 주셨으면.
천년 뒤 지금에 굽어보고 우러르며, 탄식하며 깊은 생각 잠기노라
衿陽古名邑, 山嶽毓精英. 往在麗中葉, 名賢此挺生.
太師秉尊攘, 隻手障河傾. 狂鋒斂北塞, 昏 豁東溟.
于今民受賜, 文物煥章程. 亦 徐掌憲, 義不朝周京.
千秋冠岳岑, 高與首陽幷. 完平鬱匡時, 馳驅翊聖明.
運籌恢廟略, 詰戎壯邊聲. 再贊中興業, 區永輯寧.
嵬勳耀竹帛, 淸名皎日星. 異代可同調, 殊途一忠貞.
釣遊記某水, 托體隣北塋. 勞烈報永世, 祀典揭禮經.
三賢倂 享, 廟貌肅且淸. 講堂羅絃歌, 泡序列豆 .
我來瞻遺 , 肅容奉戶 . 周旋簾 間, 公靈.
九原如可作, 邦國賴幹楨. 仰千載下, 感歎有餘情
이 시의 詩眼은 '忠貞'이다. 謝靈雲 [七里瀨] 시의 "誰謂古今殊, 異代可同調"에 점화하면서, 강감찬이 거란을 물리친 사적, 서견이 고려 유민으로 남은 사실, 이원익이 선조조의 중신으로 왜적 격퇴에 공을 세우고 인조조에 협찬한 사실을 贊詠하였다. 현인들의 출현을 바라는 구세적 열정과 함께, 衿川 즉 始興의 정영을 예찬하는 지방주의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강감찬의 행적을 尊攘으로 본 것이 반드시 중화주의의 표출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청의 간섭을 받고 있던 조선조의 문인에게 있어서, 尊攘은 排淸自主의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으리라고 생각된다. 정조는 즉위 19년(을묘, 1795)에 충현사의 三位를 위하여 致祭를 하였는데, 이것은 곧 조선 조정의 자주관을 표명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들은, 구한말에 집중적으로 출현하였다. 義兵抗爭歌나 救國忠節歌의 한시들은 애국가사, 우국가사, 항일민요와 함께 특히 왜적에 대한 저항의식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어 주목되어 왔다. 이 시기의 시 가운데 하나로 悔堂 朴貞洙의 [秋風高]를 들어본다. 悔堂은 乙巳 이후 원주를 거점으로 元容八과 함께 의병 투쟁하다가 1917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元容八이 1905년 9월 원주에서 招導兵丁과 使令들에게 붙잡혔다가 梨湖를 건너 서울로 압송되는 것을 전송하면서 지은, 통곡보다 더 애절한 長歌이다. 秋風辭調에 화운하면서도 고독감과 불안감, 權貴들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였다.
가을바람이 회회불고 한강물은 차디차건만
떠나는 그대를 보내노니 어느 때나 돌아올건가
물결이 날름거려 조각배는 흔들흔들
그대 도리어 웃어보이니, 그 기운 씩씩하도다
에워싼 관솔 불빛은 황황하고
번뜩이는 적의 검빛이여
나는 소매를 뒤집어 흐르는 눈물을 닦네
어느 뉘 이 마당에 허허 한숨 않겠는가
한스럽네, 열사가 한 목숨 가벼이 여기는데도
하늘은 어찌 우리나라를 돌아보지 않으시는지
의사를 결박하여 시랑의 떼에 던져 주거늘
이 내 속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훈귀들이 하는 잘난 짓이라는 것이
다투어 호랑이 앞 창귀 되는 일이라
국시가 전도됨은 자고로 이렇다만
만고에 이보다 애간장 끊는 일 어찌 있으랴
하늘에다 지극한 원통을 호소하나
만리 높이 긴 하늘은 막막하기만 하네
긴 노래가 통곡보다 더 애절하여
슬픔과 한을 그 속에다 얽노라
秋風高兮冽水寒, 送君去兮幾日還.
波搖搖兮舟不定, 君笑語兮氣桓桓]
擁火城之煌煌兮, 閃賊鋒之光芒]
余反袂兮淚漣 , 孰不爲之 ]
嘆固烈士之輕生兮, 天 眷顧夫吾東方.
束縛義士而納之豺狼兮, 抑胡然於心腸.
云是勳簪之 所爲兮, 甘心爭作虎前 .
國是顚倒自昔然兮, 萬古安有此斷腸]
訴穹旻以至寃兮, 邈然萬里一長空.
長歌甚於痛哭兮, 悲與恨繃其中].
이 시는 秋風辭調와는 달리, 훨씬 자유로운 句法과 轉韻을 이용하여 심경의 굴곡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었다. 사상감정의 직접 토로를 지향하는 이 방향은, 한시 형식의 질곡을 깨어부수는 내용의 힘을 느끼게 한다.
(2) 변경의식의 고양
조선후기에는 富寧 북쪽과 車踰嶺 바깥의 서북지방에 대한 변경의식이 높아졌다. 淸과의 접경지인 이 지방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국방상의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고, 그러한 관심이 시로도 표출되어 왔다. 한편 獨島에 대하여는, 숙종년간에 對馬島와 江都幕府 사이의 갈등 속에서 幕府가 조선의 소유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하는데, 朝日間의 현안으로 남아있었던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변경의식을 담은 시문들도 나왔을 법하다. 그러나 과문의 탓인지 아직 그러한 시문들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胡亂 뒤 淸은 반도내의 胡人들을 소환하고 동시에 조선인의 만주 유입을 禁封하는 政策을 시행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서북지방의 방어를 위한 아무런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에 藥泉 南九萬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이후 舊土回復의 열정에서, 厚州에 군읍을 재설치하고 폐사군을 재설치하자는 西北防禦論을 내어놓았고, 서북지역에 대한 관심을 [咸興十景圖記]와 [北關十景圖記] 등의 敍事體 散文으로 표출하였다. 그러나 시로 그러한 관심을 표명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 뒤 숙종 38년(1712) 5월에 백두산 定界碑가 세워져 두만강 북쪽 칠백리(천여리)를 淸에 빼앗긴 뒤, 李瀷·申景濬·洪良浩·丁若鏞 등의 학자들에 의하여 失地回復意識이 고양되었다. 이들 학자들은 論辯類 散文으로 변경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耳溪만은 실지회복 의식을 시로써도 담아내었다. 서북면 개척에 공이 있던 尹瓘의 일을 회상면서 耳溪는 [侍中臺]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여러번 전쟁으로 경략한 땅을
중간에 버리길 헌신짝처럼 하였던가
神武하신 우리 聖祖 아니더면
어찌 옛 강토를 수복할 수 있었으리
아아, 육식자들[權貴] 먼 계책 없어서
접때 경계 정하길 아이 장난하듯 했네
先春嶺 아래를 되는대로 가르쳤으니
古碑 묻힌 곳이 어디란 말인가
奈何百戰經略地, 中間棄擲如弊 .
微我聖祖神且武, 安能收復故疆理.
嗟哉肉食無遠謀, 向來定界兒戱耳.
先春嶺下漫指點, 古碑埋沒何處是.
신무한 성조 덕에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는 것은, 태조가 李之蘭의 공으로 長白山에서 訓春江까지 천여 리를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겼던 일을 가리킨다. 선춘령의 古碑는 윤관이 세운 경계비이다. 耳溪는 정계시에 문제된 土門江이 "源出白頭山卯方, 流至坤方, 北甑山前, 流爲豆滿江"한다는 지리적인 사실과, 백두산 북쪽의 땅이 기자·고구려·발해·이조가 흥기한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厚州 등지에 鎭堡를 설치하는 정책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변경에 대한 관심은 蔡濟恭의 [載筆錄] 所收 詩 등, 조선후기 시에서는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일일히 다루지 않는다.
(3) 민족사에 대한 관심
조선후기 문인들은 민족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주로 詠史詩로 표출하였다. 영사시의 주제구현 방식은 ①역사사건을 서술 중심에 두고 수사적 면에서 주관을 드러내는 방법 ②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직접 전개하는 방법 ③과거 사실을 비판하거나 예찬함으로써 당대의 정치현실을 유비적으로 비판하거나, 역으로 비판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이다. 또한 그 창작동기는 畵屛에 대한 題詩, 역사서의 독후감, 현실 문제로부터 과거 역사의 연상, 여행시의 起筆, 月課나 廷試에서의 課詩 등등에서 찾아질 수 있다.
고려중기 이후 영사시는 민족사를 소재로 한 것이 많다. 李奎報의 [東明王篇]과 金坵의 [過鐵州](고종18년=1231에 撒禮塔의 공격에 맞서 鐵州를 고수하다가 憤死한 李元禎의 사적을 회상)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전기까지는 通鑑學이 발달하면서, 李穀에서 金時習·沈義·金安老·申光漢·蘇世讓·沈彦光에 이르도록, 중국의 사실을 의론하는 속에 현실비판을 의도한[感今思古] 영사시가 많이 나왔다. 또한 權近의 [應製詩]나 김시습의 [詠東國故事]·[詠百濟故事] 같이 민족사를 소재로 사관을 담아낸 영사시들도 없지 않았다. 악부체를 차용한 김종직의 [東都樂府]는 조선 후기의 '해동악부' 계열 작품들의 先聲을 이룬다.
조선후기에는 柳得恭의 [二十一都懷古詩] 같이 근체시의 형식으로 된 영사시 뿐만 아니라, 고체시의 영사시와 악부체 및 宮詞體의 양태를 도입한 영사시들이 많이 나와 양적, 내용적으로 풍부해졌다. 특히 17세기 중엽 이후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악부체의 連作詠史詩形인 해동악부체 양식이 성립한 것은 문학사적인 의의가 크다. 이 양식은 엄격한 규범성을 확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작품들 상호간에 계승관계가 인정되며, 소재 선택, 형상화 방식, 시편의 구성에서 일정한 틀이 지켜졌다. 또한 우리의 상고사를 虛誕神異한 것으로 비판한 면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민족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궁사체는 본래 후궁사를 소재로 하여 艶風 취향을 담는 시 양태이지만, 許筠의 [宮詞]({惺所覆부藁})는 호사가적 흥미와 염풍 취향을 지니면서도, 군왕의 기거동작을 소재로 하여 宣祖朝를 '훼손되지 않은 과거'로 제시함으로써 광해군조 당대를 '훼손된 현실'로서 비판하는 의도를 담아내었다. 朴珪壽의 [鳳韶餘響絶句一百首]({ 齋集})는 역대 군왕의 기거동작과 관련된 國朝故事를 광범하게 다루어, 과거의 昇平을 제시함으로써 君臣之分이 문란된 당대 현실을 개탄하였다.
민족사에 대한 연찬이 깊어지자 史學的인 관심을 표출한 시도 출현하였다. 阮堂 金正喜의 [石弩詩]는 靑海의 土城에서 발굴되는 石斧·石촉에 대한 考證을 행하면서 그 학적 관심을 읊고 있다. 완당의 시는 유득공의 [肅愼弩歌]와 같은 소재를 다루되, 유득공이 北虜 來服의 과거사실화를 안타깝게 여기는 민족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박물고증학적인 관심을 더 짙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관심은 결코 喪志를 초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민족사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추동하고 있다. 시의 끝부분에는 孤證을 증거로 强通하는데 조심하는 考證之學의 방법론(하나만의 증거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 고증지학의 기본 태도이다)과, 사적 증거를 토대로 상고사를 재서술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드러나 있다.
경학과 경제에서 큰 업적을 남긴 丁若鏞은, 젊어서부터 [鷄林懷古]·[扶餘懷古]·[金井懷古]·[靑石谷行]·[過延安城] 등의 시로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여 왔다. 그리고 解配되어 마재로 돌아온 뒤인 순조 20년(경진, 1820년)에 伯氏 丁若鉉의 아들 學淳이 춘천으로 逆女하러 가는 길에 동행하면서 [和杜詩十二首]({與猶堂全書} 권7, 新朝鮮社本)를 지어 상고사에 대한 학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杜甫의 [成都府]에 和韻한 陽韻의 5언고시 [牛首州]는 牛首州가 현재의 春川 일대임을 논하여, 춘천 일대가 일찍부터 민족의 활동공간, 역사공간이었음을 논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貊國이었던 것을 신라 善德王 6년에 牛首州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산은 나무껍질이 얇고 오곡이 자라는 사실을 들어, 漢書 晁錯傳의 '胡貊之地, 木皮三寸,氷厚六尺'이라든가 {孟子} [告子·下]의 "貊, 五穀不生, 惟黍生之"라고 한 貊鄕을 이곳으로 비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茶山은 牛頭山에 [彭吳通道碑]가 있다 없어졌으며 신라 基臨王이 우두주에까지 순행온 뒤로 漢吏가 오지 않게 되었다고 注記하였다. 이 해석은 基臨尼師今이 300년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을 望祭한 뒤 樂浪과 帶方이 귀속되었다는 {三國史記}의 기록과 그것을 계승한 {東國通鑑}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현재 이 기록은 의문시되고 있지만, 茶山이 古地名의 해석에 우리 史書를 적극 참고하려 한 태도는 충분히 드러나 있다. 茶山은 南袞의 "東國通鑑有誰讀之"라는 말을 끌어다, 국사에 대한 연찬이 없는 것을 개탄하였다.
(4) 국어와 국문문학에 대한 관심의 고조
조선후기의 한시 작가들은 국문시가 가운데 가장 완성된 단형의 형식인 時調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漢譯하여, '小樂府' 혹은 '短曲'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金萬重과 申緯의 소악부, 洪良浩의 [靑丘短曲] 등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한시 작가들은 민요를 한역하거나 그 意象을 빌어다 樂府歌行體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시조의 한역은 음악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그 意象을 빌어오려는 데에도 있었다. 江華學派의 한 사람인 信齋 李令翊이 鄭敾의 [騎牛訪牛溪圖]에 제하고 松江의 시조를 한역한 예를 하나 들기로 한다([題騎牛訪牛溪圖, {信齋集}, 고려대 도서관 소장 필사본). 信齋 나이 스물 셋, 이미 집안은 당쟁의 와중에 寒灰가 되었으니, 순수한 인간 관계, 灑落한 交遊를 희구하는 마음이 더더욱 컸다. [騎牛訪牛溪圖]는 鄭澈이 牛溪 成渾을 찾아가는 것을 그린 그림인데, 현재는 소장처를 알 수 없다. 畵題는 이러하다.
오른쪽 화폭은 副正 정선이, 정문청공이 소를 타고 성문간 선생을 찾아가는 것을 그린 것으로 평주인 신대우가 소장하고 있다. 시는 영익 내가 문청공의 노래를 번역하여 뒤에 쓴다. 이 그림을 보고 그 노래를 읊조리면, 선배들의 풍모를 想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교우 관계가 쇄락하여, 아첨을 일삼는 오늘날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으니, 백대 뒤의 사람들을 감탄케 한다. 신대우가 이것을 소장하고 있는 것도 깊은 뜻이 있어서이리라.
足蹴臥牛起, 置薦按跨着.
童子, 汝家勸農在. 爲報鄭座首來此
재너머 成權農 집의 술 닉닷 말 어제 듯고
누운 쇼 발로 박차 언치노하 지즐 고
아 야 네 權農 계시냐 鄭座首 왔다 殆㈅
(5) 자주적 문명의식의 고양
조선후기의 학자-문인들은 자주적인 문화의식을 小中華意識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소중화 의식은 중화의식의 한 연장으로서 부정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역사현실을 올바로 파악하는데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對淸 從屬化에 빠져들지 않게 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후기 문인들의 청국에 대한 자주의식은, 明의 멸망 후에도 崇禎 年號를 사용하거나 干支를 사용하여 日字를 기록하는 書寫方式에서부터, 大報壇을 설치하여 제례를 올리는 조정의 제향의식, {四庫全書}를 구입하려다 {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하게 된 정조의 書籍購買慾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사실이 시에 나타난 예는 일일히 들지 않는다. 여기서는 明實錄의 大報壇(명말의 神宗·毅宗을 제사지내던 곳) 저장 사실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기록인 趙秀三의 [明實錄歌]({秋齋集})를 한 예로 들어서, 그러한 자주적 문명의식이 어떻게 굴절되어 나타나 있는지를 살피는데 그치고자 한다. 이 시에는, 순조 29년(己丑 : 1829)에 중인인 李錫汝가 '明列朝實錄 461卷'을 구입하여 조정에 바쳐 大報壇에 봉안하게 된 경위를 밝힌 서문이 붙어 있다.
明列朝實錄 461권은 洪武에서 시작하여 天啓에서 그치고 있다. 崇禎實錄은 갑신 사변 때문에 찬술할 겨를이 없었던 것일까. 이 책은 사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谷氏가 全史를 편수할 때 근거로 하였던 것인데, 그 뒤 곡씨 후손들이 궁하여 보관하지 못해 세상에 흘러나온 듯하다. 기축년 겨울에 사신을 따라 연경에 갔을 때, 이석여와 玉河館에 같이 있었는데, 이군이 高價로 서점[燕京 南의 琉璃廠街 서점]에서 사서 나에게 함께 편정할 것을 청하였다. 다 끝난 뒤 수레에 싣고 한양으로 돌아와 조정에 바쳐 北壇의 尊閣에 봉헌하니, 존각 속의 책들을 다 징험할 수 있게 되었다. 아아, 변경 오지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이 책을 보면 한숨쉬고 슬퍼하며 눈물흘려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明의 遺民인 우리로서는 명이 왜놈들이 날 뛸 때 두번이나 군대를 파견하여 준 은혜가 있어서 백대가 지나더라도 잊지 못할 것이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군은 집안이 가난하고 시세에 굴하였는데도 천금을 선뜻 내어 국가를 위하여 훌륭한 일을 하면서 조금도 언쨚은 빛이 없다. 진실로 옛 義士의 풍모를 지닌 자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長歌를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한다.
秋齋 시의 후반부를 보면, 明實錄의 東傳을 두고 "동북방의 箕宿과 尾宿 별자리를 보니 알록달록 무지개 이네"(箕眉仰看文虹起)라고 하여, 동방에 문풍이 진작될 조짐으로 찬미하였다. "대국의 문헌이 이 작은 나라에 있으니, 夏‘殷 성대의 예제를 宋·杞에서 징험함이로세"(大國文獻在小邦, 夏禮殷禮徵宋杞)라는 구절을 통하여, 조선 후기의 고급 문인들이 지닌 소중화의식이, 자주적인 문명의식의 성격을 지녔던 사실을 잘 살필 수 있다.
秋齋는 李錫汝가 구입한 明實錄이 史館舊藏本으로 谷應泰의 {明史紀事本末} 80권의 저본이었다고 하였다. {明實錄}은 현재 미국 국회도서관에 紅格抄本이 수장되어 있고, 1962년에 臺灣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에서 그 마이크로필름을 이용하여 校印本을 낸 바 있다. 李錫汝 구득본은 권수가 다른데, 책수를 권수로 기록하였는지 모른다. 黃彰健의 [校印國立北平圖書館藏紅格本明實錄序](臺灣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 校印本 {明實錄})에 따르면, 미국 국회도서관의 紅格本은 民間傳抄本의 하나로서 誤字가 많다고 한다. 李錫汝 구득본이 進呈寫本이었는지 민간전초본 가운데 하나였는지, 현재 그것이 어디에 수장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6) 민족적 정서의 재발견
조선후기의 한시 가운데는 우리에게 친근한 소재를 택하여 민족적 정서를 노래한 것이 많다. 詠物詩 가운데 우리 것을 소재로 한 작품, 竹枝詞 등 譜風土의 의도를 담은 작품, 민요적 소재를 취하여 민요적 정서를 추구한 작품들이 다 그러한 예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시들은 동시에 민중적인 생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어, 그 자체 현실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를테면 茶山의 [ 城雜詩](총 27수, 1수 缺)·[長 農歌](10장)·[耽津村謠](총 20수, 5수 결)·[耽津農歌](10수), [耽津漁歌](10장) 등의 칠언절구 연작시들은, 생동적인 비유, 토속어의 과감한 채용, 공감각적인 표현 등을 통하여 농어촌의 곤궁상과 함께 인민들의 힘찬 노동현장을 선명한 필치로 그려낸 훌륭한 풍속화들이다. 이 작품들은 민풍토속을 칠언절구로 담아내는 죽지사체의 풍격을 취하고 있다. [기성잡시]에는 아직 詠懷詩가 포함되어 있으나, [탐진촌요]에 이르면 주관적 서정 토로가 배제된다. 본래 죽지사는 남녀애정을 애절하게 읊은 민간가요로, 劉禹錫이 連作의 新詞를 짓고 나서부터 지방풍물을 묘사하면서 남녀애정을 농염하게 표현하는 模作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다산은 이 죽지사체를 이용하여 농염한 감각을 추구하지 않고 인민들의 생활상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려고 하였으며, 그만큼 민중적인 정서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였다. 洛下生 李學逵의 [金官竹枝詞]와 徐有英의 죽지사에서도 그러한 기능 변화가 두드러진다. 다산의 죽지사에서 女心을 소재로 한 작품의 경우도, 艶風을 추구하지 않고 시골 여성의 순박한 정을 시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기성잡시] 제8수에서 다산은, 풍랑을 무릅쓰고 몇달만에 돌아온 남편을 대하고 만선된 것을 더 기뻐하는 여인을 형상화하여, 어촌민의 순박하고 건강한 부부애를 역설적으로 드러내었다.
한조각 돛배로 먼바다를 떠다니다
고침[낭군]이 막 울릉도서 돌아왔네
부부 상봉에 험한 파도 겪은 고생은 위문도 않고
고죽[오징어]이 만선이자 얼굴이 환해지네
一片孤帆雲海間, 藁砧新自鬱陵還.
相逢不問風濤險, 竹盈船便解顔
추석날 고운 옷 입을 것을 손꼽아 기다리며 모내기에 바쁜 새신부, 陳璘廟에 복전을 던지면서 고기잡이간 남편의 무사를 비는 여인, 남포 신랑의 납폐를 받아놓고 기쁜 듯 물오리같이 헤엄을 치는 아가씨. 다산의 죽지사가 형상화하는 여성은 사대부의 노리개인 기방여성이나 淫奔한 여인이 아니라, 농어촌의 생기발랄한 여성들이다.
위에 든 다산의 시에서, 한대 악부 이후 낭군을 가리키는 은어인 고침(藁砧)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나, 흰 오징어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하는 고竹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 시의 토속적인 정서를 살리려는 用詞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죽지사 작품들 가운데는 아직도 그 지시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만큼 토속어와 특수한 物名 및 成語가 과감하게 채용되고 있는 것이다.
3. 조선후기 한시의 형식 탐구
(1) 중국문단 추종의 거부
조선 후기의 한시단은 중국 문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性靈派와 格調派의 대립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맹목적인 추종을 거부하였다. 후기 문인들은 나름대로 깊이 있는 시론을 전개하여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풍을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 다산의 이른바 '조선시선언'이다.
다산은 일찍부터 한위 악부·당시·송시·명시·청시를 두루 공부하였으며, 중국의 시풍은 시운에 따라 바뀌어 왔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소박 유물론적인 문학사관에 따르면 조선의 시풍은 조선의 시운에 따라야 할 것이다. 1832년에 지은 [老人一快事六首 效香山體](제5수)에서 다산은 중국문단에의 추종을 거부하는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 시는 제2구 "縱筆寫狂寫"가 白居易의 "走筆操狂詞"([北窓三友])에 點火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조탁을 일삼지 않는 白居易風을 취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시가 "效香山體"한다는 말은 白居易의 [丘中有一士]와 같이 首句를 제목으로 삼아 連作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뜻이다.
늙마에 즐거운 건 내키는대로 써내리는 일
운자 고르려 끙끙대쟎고 다듬느라 미적이쟎네
흥 나면 뜻 움직이고 뜻 되면 쏟아낸다
나는 조선 사람, 조선시를 지으리
그대는 그대 방식대로 하지, 말많은 자 누구
자잘자잘 격률은 나같은 원방인이 어찌 아나
싸늘히도 李樊龍은 우리를 東夷라 비웃었겠다
하지만 袁宏道(袁枚?)·尤 이 李樊龍을 쳐도 중국서는 군말 없었다
탄알 낀 자 뒤에 있어 매미 볼 겨를 없어서.
나는 山石 구절 따르려니, 계집이 비웃겠지
그렇다고 억지 슬픔 꾸며내어 애간장 끊을 수야 없지
배와 귤은 맛이 달라 입맛대로 할 일
老人一快事, 縱筆寫狂詞.
競病不必拘, 推敲不必遲.
興到卽運意, 意到卽寫之.
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卿當用卿法, 迂哉議者誰.
區區格與律, 遠人何得知.
凌凌李樊龍, 嘲我爲東夷.
袁尤槌雪樓, 海內無異辭.
背有挾彈子, 奚暇枯蟬窺.
我慕山石句, 恐受女郞嗤
焉能飾悽 , 辛苦斷腸爲.
梨橘各殊味, 嗜好唯其宜.
晉의 王衍이 庾개를 卿이라 부르는데 유개는 왕연에게 君이라 부르면서 "我自用我法, 卿自用卿法"이라고 하였다는 世說新語 方正篇의 故事에서 따온 말이다. "遠人"은 大雅 民勞의 "柔遠能邇"의 遠(遠方之民)의 뜻을 함축하며, 여기서는 조선인을 가리킨다. 특히 錢謙益은 [跋皇華集]에서 "東國文體平衍"이라 하고, 중국 사신들은 "격조가 낮아지는 것을 아끼지 않고 조선시에 맞추어서 원방인을 달래는 뜻을 담아"(不惜貶調, 就之以寓柔遠之意) 가작이 없다고 하였으며, 자신이 오인한 줄은 모르고 "저자들이 말하는 동파체"(彼國所謂東坡體) 운운하여 조선을 업수히 여긴 바 있다. 그러나 이번룡이 우리를 두고 東夷라 멸시한 사실은 획인되지 않는다. 제11구의 "격과 율"(格與律)은 詩格(詩律)을 가리키지만, 이번룡의 格調論을 의식한 말인 듯하다. 제14-15구는 이번룡이 袁宏道(袁枚?)와 尤통에게 비판당한 사실을 말한다. 제17-18구는 戰國策 楚策에서 따온 말로, 자신은 일없다 생각하지만 강자가 뒤에 버티고 있는 법이듯이, 중국 시단에서도 앞사람을 쓰러뜨리는 자가 계속 나옴을 말한 것이다. 제20구의 女郞은, 왕사진의 秋柳詩에서 형상화된 애상에 젖은 여성을 가리킴으로써 왕사진을 빗댄 말인 듯하다.
다산은 억지로 감정을 꾸며 물컹거리는 시를 쓸 수가 없다고 말한다. 韓愈의 [山石] 시에 "인생이란 이처럼 스스로 즐기면 되지, 어이 남의 속박의 받을 건가"(人生如此自可樂, 豈必局束爲人 )라는 구절이 있다. 다산은 그 뜻을 사모한다고 하였다. 다산의 조선시 선언은 일차적으로는, 중국 문단의 변화를 추종하려고 급급하지 않고 독자적인 시풍을 고수하겠다는 선언이었다(혹자가 말하는대로 평측을 따르지 않는 새 형식을 따른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선언 속에는 정녕, 주체성의 자각을 바탕으로 조선인의 문학활동이 지닌 독자성을 주장하려는 신념이 들어 있다. 개성을 중시하고 형식주의를 배격하는 다산의 이러한 시관은 竹欄詩社의 詞伯 격이었던 南皐 尹持範(奎範)의 시관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南皐는 1788년에 쓴 文集 自敍(영남대 도서관 소장 필사본 {洌水雜著} 所收)에서 정조 연간의 여러 문인들이 중국을 내려볼 정도로 융성한 문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조선 문단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천부적 자질[天姿]을 중시하였으며 형식주의를 배격하는 주장을 한 바 있는데, 그러한 주장은 정조 연간의 우리 시단의 향배를 잘 반영한다고 하겠다.
(2)기존 형식의 자기화
한시는 중국에서 고정화된 문학형식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문인들은 전통의 구속력을 지닌 이 한시 형식을 자기 것으로 충분히 소화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감정 및 논리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한시 형식의 자기화 속에는 위에서 말한 중국문단 추종에 대한 배격 의식이 반영되어 있고, 그것은 또 조선 후기에 민족주의적인 지향의식이 성장하게 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산의 시, 특히 유배초기의 시는 주관적이고 개인적 서정을 극복하고 보다 보편성을 지닌 서정을 획득하여 가는 궤적을 보여주며, 매 단계마다 형상화의 방식이 서로 다른 시형식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사환기와 유배초의 다산은 중단형 오언고시의 연작을 통하여 사상 감정을 직서하고, 5언·7언·장단혼합의 장편으로는 심경의 복잡한 흐름을 표출하거나 모순된 현실을 서술적·우언적으로 제시하였다.
오언고시 연작체는 阮籍의 [詠懷詩](82수), 陳子昻의 [感遇](38수), 이백의 [古風](59수)로 이어져오면서 질박한 풍격 속에 서정적 자아의 강개한 뜻을 담는 시형식으로 확립되었는데, 다산은 이 형식을 이용한 [古詩二十四首]와 [古詩二十七首]에서 현실에 대한 위기감을 짙게 담아내었다. 다산의 이 시들은 평성운에 국한되지 않고 평상거입 4성에서 골고루 운자를 선택하여 각 편마다 一韻獨用하였으며, 異端의 횡행, 농촌의 궁핍, 用人의 잘못, 문벌가의 전횡, 학맥의 괴란등을 사상정서적으로 논하였다. 한편 1801년 장기 유배로 농어촌 인민의 생활환경과 그들의 노동현장에 가까이 접하자 다산은, 그 낯선 모습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자 칠언절구의 민요풍 단시로 대상화하기 시작하였다. 이것들이 [ 城雜詩] 등 칠언절구 형태의 竹枝詞體 작품들이다.
그러다가 45세 되던 1806년 봄에는 갑자기, 근체-고체시와는 전혀 다른 시양식인 詞를 9수 지었다. 사의 제작은 塡詞라는 기계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구법 및 편법에 색다른 굴곡이 있는 詞 형식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에 감추어진 추억과 애증과 비감을 격정적으로 드러내기에 적절하였다. 仕宦의 모든 영욕을 초월한 玩世之人의 형상을 漁父에 가탁한 滿江紅調 [漁父]는 그 대표적 예이다. 다산은 塡詞에서 반드시 詞牌의 정격을 따른 것만은 아니지만, 정격-변격 여부에 관계 없이, 사 양식을 통하여 순수 서정적인 내면 표출을 시도한 점이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1809년(己巳)의 가뭄 뒤 다음해 유랑민이 길을 메우는 참상을 눈으로 보고, 다산은 四言詩體를 이용하여 그 참상을 형상화하고 목민관의 失職을 풍자한 [田間紀事] 6수를 남겼다. 4언시의 구법과 주제선정 방식은 시경 국풍에서 배워온 것이지만, 소재 선정이 현실적(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주제사상의 표현과 형상방법도 독특하다. 여섯 수 가운데 單章體가 두 편([蕎麥]과 [有兒])이나 있다는 점은, [전간기사]가 국풍의 전통적 틀을 벗어나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본래 시경 중에는 單章詩로 周頌 31편 모두와 商頌 3편(那,烈祖,玄鳥) 등 34편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風·雅와는 악곡상 구별되며 반복영탄의 필요가 없는 祭歌인 頌의 시편들이다. 그것도 周頌의 경우, 10구 이내의 짦은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다산의 단장체 4언시 두 수([蕎麥]과 [有兒])는 장편이다. 더구나 다산은, 본래 집단창작에 기원을 둔 반복영탄(즉 疊詠體)을 도입하지 않음으로써, 상투성, 형식성을 극복하고자 한 뜻이 역력하다. 다산은 國風을 민간가요로 보지 않고, 憂世恤民의 뜻을 지닌 大人이 창작하여 낭송함으로써 풍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보았는데, [전간기사] 6편에서도 그러한 기능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4언시는 用韻, 시어 선택, 구법, 수사법에서 고답성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인민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형상화하고 우세휼민의 뜻을 시적으로 표출하는 데는, 질박한 풍격을 억지로 꾸미는 4언시보다도, 평소에 익히 사용하였던 시양식인 5언·7언 장단혼합의 고체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 나았다. 다산은 특히 5언 및 7언고시를 통하여 蒼勁·奇堀·雄渾·閒遠· 亮·動 之音을 만들고자 하여, 7언고시 各句押韻의 柏梁體는 한 편도 남기지 않았고, 부화하고 수식에 그치기 쉬운 四句一轉韻 連環法(四傑轉韻之格)을 선호하지 않았다. 유배이전에 다산, 韓愈가 즐겨 사용한 一韻獨用 측성운의 7언고시 장편 형식으로 굳굳한 기격을 살리면서, 서정 표출과 현실 直敍를 행하였는데, 유배기에는 주로 서정 표출에 그 형식을 사용하였다.
그와는 달리, 모순된 현실을 우언적으로 혹은 서술적으로 제시할 때는 7언 齊言의 형태보다 樂府歌行에 연원을 둔 7언 중심의 장단구 형태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굴곡 있는 내면 표출과 현실 제시를 위하여 5언고시 장편도 구사하였다. 5언고시 장편은 본래 일운독용이 보통이며, 악부를 선성으로 하는 서사시의 전통과 건안기에 융성한 질박하면서도 웅대한 풍격을 담는 영회시의 전통 두 맥이 있는데, 다산의 5언고시 장편은 그 두 맥을 다 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다산은 현실의 서술적 제시를 위해, 일운독용보다는 換韻의 고체시 장편을 더 선호하였으며, 5언고체시 장편에서도 일운독용하지 않고 韓愈의 [룡吏]를 따라 환운을 이용하였다. 최근에 발굴 소개된 [道康 家婦詞]는 그 한 예이다.
다산의 예를 통하여 전통 시형식이 조선 후기 시인에 있어서 자기화되는 방식을 살펴 보았거니와, 이밖에 蔡濟恭의 歌行體, 여항문인들의 잡체시 등이 모두 전통 시형식의 자기화란 관점에서 의의가 높다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또다른 한 예로 江華學派 문인들의 聯句에 대하여 언급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순조 24년(갑신, 1824) 4월에 宛丘 申大羽의 세째 아들 絢이 江華留守로 임명된 후, 縉·綽·絢 삼형제가 外家 山墓를 省掃하면서 李勉伯과 그 아들 是遠을 참석시켜 함께 100운의 [甲申四月椒園次 * 城聯句](閔泳珪 소장 殘卷)를 지은 것이 있다. 聯句는 본래 각인이 한 구씩 지어 每句押韻 一韻到底하는 栢梁體가 기본이되, 각인 2구 혹은 4구씩의 것과 句首長短不定의 것이 파생되어 나왔으며, 오언배율 聯句의 就對도 있다.
韓愈는 每聯押韻 일운도저의 형태를 개척하였는데, 위의 [椒園聯句]는 五言 매련압운 入聲藥韻 一韻到底의 형태로, 韓愈 [納凉聯句]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聯句는 分韻이나 마찬가지로 雅士들의 雅戱로 선호되어 왔다. 洪吉周는 {孰遂念}(서울대규장각 소장 필사본)에서, 연로자들의 雅戱로 聯句 제작을 권장하고 유희 규칙을 세세히 규정하고도 하였다. 그런데, 강화학파 문인들은 同行間만이 아니라 노소가 어울려 聯句를 지어, 暢懷·結束·推掖을 행하였다. 圓嶠 李匡師의 두 아들인 肯翊(燃藜室)과 令翊(信齋)이 족형제들과 같이 [寒井聯句]와 [城南聯句]를 지어 富寧으로 보내오자, 원교는 그것에 次韻하여 시의 習熟度를 평가하였으며, '敦學誠身'의 뜻을 가상히 여기었다.
원교는 省親온 信齋와 함께 [立春聯句]을 짓고, 다시 두 아들과 함께 [晩秋聯句]를 지어 내적 심상과 정감논리의 공감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信齋와 燃藜室 및 종형제들은 [淸潭聯句]·[憫旱聯句]·[喜雨聯句]를 지어 특유의 심상을 계발하였고, 李聖源과 李忠翊도 聯句를 지은 것이 있다. 李天翊과 信齋 및 燃藜室은 窩山子 純士의 죽엄 앞에 [聯句祭獻納族兄]을 지어 致祭의 엄숙한 언어로 대신하기까지 하였다.
(3) 새로운 시형식의 모색
조선후기에는 '古風'이라는 독특한 시형식이 있었다. {雅言覺非}에 보면 당시 학동들이 갓 시를 배워 협운하지 않고 짓는 시[無韻詩] 가운데 오언단편을 小古風, 칠언장편을 大古風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 형식은 그 자체로서는 문학적인 높이를 지닌 것이 아니며, 또 주체적인 민족형식의 탐구 의식 속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無韻의 古風은 이른바 坊刻本 소설의 삽입시로 이용되어 소설 속의 정황을 설명하는 장치로 사용되는 등, 나름대로 의의가 없지 않다. 申光洙의 [關山戎馬] 등의 科詩가 私宴에서 가창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金笠의 시는 평측과 압운에서는 종래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시어의 배열, 시상의 전개에서는 일탈되어 있다. 이러한 예들은 민중생활 속에서 전통 시형식의 파괴가 급속하여 진 사실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조선후기 시인들은 전통 형식의 큰 틀을 지키면서도 세부 형식면에서 많은 시도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악부체에서 새로운 압운법을 강구한 것이나, 근체-고체 형식 내에서 시어의 배열을 달리하고자 한 예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富寧에 유배간 圓嶠가 큰 며느리 윤씨(坡平尹相時女)·둘째 며느리 鄭氏(延日鄭厚一女)·어린 딸을 생각하며 樂府 三婦艶體로 지은 [婦女思]({斗南集}, 일본 天理圖書館 소장 필사본)의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한다. 圓嶠의 애절한 정과 추억과 통한이 雜言의 형식, 그것도 換韻과 通押(심지어 平去聲, 平上聲 通押을 하였다)을 통하여 마구 쏟아져 나온 시이다.
大婦忠正孫 小婦祖文康. 俱出大家 善知禮法.
將丈人老幼女生, 大品珍珠瑞世瑛.]
長兒長弟二齡, 小婦遜 兩年. 大婦小婦, 間世入門, 雙璧照華筵.]
大婦始入門, 德容萬人稱. 小婦始入門, 令聞四里騰.]
幼女始行走, 自樂二嫂間. 舅姑坐平床, 喜色滿容顔.}
大婦 讀書, 小婦制 .]
大婦 美酒, 雉齊油醬. 小婦 魚膾, 細絲一尺長.]
幼女無所事, 對父待餘賜.}
四月林楙, 黃鶯號樹. 櫻桃始熟, 爛若錦鋪.]
大婦 深枝, 小婦引遠條. 綠葉護素手, 筐 滿瓊瑤.]
幼女始行走, 原高不得上. 呼嫂來携手, 草盛多荊棘未遽往.
能作小姑驕, 作聲恣 讓.]
長 薦丈人, 丈人見櫻愛樂新.
非爲見櫻愛, 爲愛新婦獻.}
八月秋氣入園中, 栗殼단( +旦), 微風至, 紅實落, 婦與女爭拾爲樂.]
大婦守火爐, 灰勤 炙. 小婦秉彎刀, 剝皮如小鼓.]
幼女坐兩間, 取食不停口. 小姑莫盡食, 將以進舅姑.}
年年日日, 日以歡娛. 生爲聖世民, 頌祝過閒歲.]
歡娛去, 厄運屆. 姑歸泉下, 舅竄塞外.]
婦與女獨在家, 淚長垂. 婦與女, 莫垂淚, 厄運如此將恨誰.]
莫垂淚, 塞外亦是吾王地.]
吾王聖明, 願聖壽, 萬萬齡, 永康寧.}
(큰 며느리는 충정공 손녀, 작은 며느리는 문강공[鄭齊斗] 손녀, 모두 대가 출생으로, 예법을 잘 아네. 이 시아비 늙어서 어린 딸 태어나니, 진주같은 기품이 더없는 瑞玉이로다. 큰아들은 아우보다 두 살 많아, 작은 며느리는 윗 동서보다 두 살 적은데, 큰며느리와 작은 며느리가 집에 들어오자, 두 구슬이 華筵을 빛내었다. 큰며느리가 집에 들어올 때, 덕과 용모로 모두들 칭찬하고, 둘째 며느리 들어올 때, 아름다운 이름이 사방에 등등했다.
어린 딸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올캐 들 사이에서 즐기고, 시부모는 평상에 앉아 희맥이 만면하였다. 큰 며느리는 꿇어앉아 글읽고, 작은 며느리는 바느질 . 큰 며느리는 좋은 술 빚고 저민 꿩고기에 기름 장 골고루하며, 작은 며느리는 생선 회를 자르는데, 실같이 가는 것이 한 자 길이씩. 어린 딸은 일없이, 애비와 마주하여 노닥노닥. 사월에 숲이 우거지고 꾀꼬리가 울면, 앵도가 막 익어, 비단을 깐 듯 난만할 때, 큰며느리는 속가지 비틀고, 작은 며느리는 먼뎃 가지를 끌어당겨, 푸른 잎새로 흰 손 덮으며, 광주리에 옥같은 열매를 가득채웠다.
작은 딸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동산 높아 못오르면, 올캐 불러 손잡아 오르는데, 풀우거져 가시 많아 선뜻 가지 않으면, 小姑[아가씨]랍시고, 소리질러 꾸짖었다. 앵도들 찬 샘에 씻어선, 돌아와 옻소반에 담았다. 꿇어 이 시아비에게 바치면, 시아비는 앵도보고 愛樂이 새로우니, 앵도보고 애락하는 것 아니라, 신부가 바침을 애락함이었다. 팔월에 가을기운이 뜨락에 들면, 밤껍질 검붉어지고, 미풍이 불면, 붉은 열매가 떨어지니, 며느리들과 딸이 다투어 주우며 즐거워하였다.
큰 며느리는 화로가를 지키며, 재를 뒤적여 잘 굽고, 작은 며느린 彎刀 잡아, 작은 북 모양으로 껍질벗겼다. 어린 딸은 둘 사이에 앉아, 먹느라고 입을 연신 오물오물. "아가씨 다 드지 마세요, 시부모님께 드릴거예요." 해마다 날마다, 즐거웁게 지내어, 나서 태평세 백성 되어, 송축하며 좋은 세월 보냈더니, 즐거움 사라지고, 액운이 닥쳐, 시어미는 九泉 가고, 시아비는 塞外로 유배가, 며느리들과 딸만 집에 남아, 하염없이 눈물 떨구네. "며늘아가야 딸아이야, 눈물 흘리지 마라, 액운이 이런 걸 누구를 한하겠냐." 눈물 흘리지 마라, 塞外도 우리 임금 王土인걸. 우리 임금 성스럽고 밝으시니, 오래오래 사셔서, 만만 세 잡수시고, 영원히 평안하시길 빕니다.)
圓嶠는 {海東樂府}를 지어 樂府體를 실험하기도 하였는데, 이 [婦女思]에서의 散句 鋪置나 換韻 및 通押의 활용은 그러한 실험의 일환이기도 하다. 19세기 이후 조선한시는 王士禎의 古詩平仄論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고 또 그것에 대한 반발로 고시에서의 압운법과 평측법을 나름대로 강구하게 되지만, 이 시는 그러한 영향을 받기전에 이루어진, 이를테면 자유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말
지금까지 조선 후기에 민족주의적 지향의식이 한시의 주제(소재) 선정과 형식 탐구의 양면에 반영된 사실을 개괄하여 보았다. 민족의식 혹은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고찰이 없이 한시를 민족주의와 연관시켜 논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라 할 수 없으나, 이처럼 무모한 개괄을 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더구나, 마땅히 참고하여야 할 학계의 최근 업적들을 꼼꼼히 참고하지도 못하였고, 부분적으로 착상을 얻은 玉稿에 대하여도 일일히 언급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黨色이 나뉘어 각각 독특한 정국 운영 방식과 학파적 이념을 내세웠으며, 그러한 차이가 문학사상 면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拙論에서는, 각 당색별로 문학작품 속에 민족정신이 구현된 모습을 차별적으로 논하지 못하였으며, 그저 窺見에 따라 민족주의적 지향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만을 임의로 추출하고 나열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시에 구현된 민족주의적인 지향의식들이 민본주의적인 토대 위에서 발화하였다는 억견에 대하여도, 본론 속에서 입증하지 못하였다. 여기서는 다만 우리 한시에 대한 애정, 우리 문인-학자들에 대한 외경을 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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