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한시의 자의식적 경향과 해동악부체
1. 머리말
조선후기는 기존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고 새로운 지배관계와 사회관계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경제사적으로는 17세기 말부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변화들이 더욱 촉진되었다.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한 17세기부터 문학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였나를 살펴보는 일은 문학 연구에 있어 앞으로의 전망을 확립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문학의 발전양상을 살핌으로써 조선후기의 주체적 근대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는 단정짓기 어려운 일이다. 문학은 사회경제사보다도 더 뚜렷하고도 정합적으로 발전한다는 일반론도 있을 수 있고, 문학은 사회현상의 기층에 깔린 구조가 아니므로 고작해야 사회경제사의 변화를 뒤따라가며 거기서 영향을 받을 뿐이라는 일반론도 역시 있을 수 있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조선후기에 있어서 모든 문학 장르 및 양식이 분화되고 발전되어 나간 모습을 살피는 일은 국문학의 총체적 발전과정을 재구하는 데 가장 주요한 일로, 비록 사회경제사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설명해주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신사의 흐름을 비교적 또렷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본고는 조선후기 문학이 스스로의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사실로서 부각되게 된 과정을 확인하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조선후기의 모든 변화는 사회관계의 모순과 갈등을 심화시켰고 그에 따라 그러한 변화를 내재화하는 자의식 속에도 모순과 갈등을 심었기 때문에, 문학의 세계는 시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산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조선 사회의 주체적 근대화와 더불어 민족문학으로서의 국문문학이 우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연구에 있어서, 공동체의 해체과정과 새로운 이상향의 정립과정이 아직까지 만족스럽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서 볼 때, 선비들의 내재비판 방식과 그 한계를 밝히는 일은 그러한 주된 연구방향에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이 밝혀지면 앞으로 조선후기 이래 근대화의 본질적 문제와 전망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기존질서의 모순을 안에서 느끼고 개념화하였던 인물들 곧 소외-선비층의 정신사를 재구성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이 담당했던 대표적 문학장르인 한시의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본고는 그 변화 중에서 특징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악부체의 도입과 해동악부체 양식의 정립을 주된 고찰대상으로 했다.
조선후기 한문학에 있어서 악부체는 중국 당 이전의 경우처럼 독립된 장르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민가적 시정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도입된 시풍을 가리키는 개념이었음을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 같다. 이에 비하여,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나타났던 연작형태의 詠史樂府들은 악부체를 도입하면서 단순히 시풍상의 특성만을 취한 것이 아니라 서사성이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장르적 성격까지도 끌어들였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공통으로 갖추고 있는 양식성을 가리켜 '해동악부체'라고 일컫고자 한다.
해동악부체 작품들은 小序를 부대한 여러 詠史詩들을 편집해 놓은 형태를 지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각 原詩는 대체로 雜言 형태와 換韻法을 취하여 악곡을 연상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또한 각 원시는 史實을 소재로 한 서정시가 아니라 사실의 事件 자체가 중심이 되는 서술서정시(Erz hllyrik)이다. ②소서와 원시로 이루어진 각 편은 편술상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역사로서의 連續性(Kontinuit t)을 지닌다. 이 해동악부 작품들은 명나라 시인인 李東陽의 영사악부('西涯擬古樂府')에서 직접적 영향을 받아 생겨났지만, 한국한시의 전통에서 볼 때 고려 중엽 李奎報의 '東明王篇', 李承休의 '帝王韻記' 및 조선 전기 權 의 '東國世年歌', 金完直의 '東都樂府'에 연맥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조선 후기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自己省察을 하게 된 선비들에 의하여 양식으로서 성립·공인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다.
전통적인 한국한시가 허구성이 배제되고 보편적 주제에 기초한 서정시임을 고려할 때, 한시론에서 보다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창작미학(Produktions esthetik)의 변화에 따른 양식의 분화·발전과정일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보면 조선 후기의 한시는 전기 시에 구속요건으로 작용하였던 주자주의 시의식을 벗어나면서 다음과 같은 경향을 지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편에서는 대부분의 전기 시와 마찬가지로 '言志'의 창작과정을 따르되 관념적 도를 내용으로 하던 전기 시와는 달리 事實과 時事를 내용으로 하는 시들이 대두되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言志가 아니라 '緣情'의 창작과정을 따른 순수한 서정시들이 나타났다.
이 두 경향 중 전자는 기존 질서에 대한 선비들의 內在批判과 관계 있고 후자는 기존 질서 자체를 붕괴시키려는 時代精神 一般과 관계 있다 할 것이다. 해동악부체는 그 중 전자의 한 내용을 이룬다. 즉 그것은 事實과 時事를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기존 질서의 모순을 해소할 이념을 제시하고자 한 儒家中觀이 시로 변용된 것이다.
이제까지 해동악부체의 여러 작품들에 대하여 소개한 문학사나 시학사의 기술 태도는 해동악부체를 하나의 독립된 양식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 작품들을 18세기 이후에 대두된 '朝鮮詩'의 한 내용으로 파악하고자 한 문제제기에서도 역시 그러한 태도가 고수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沈光世·林昌澤·李匡師·李瀷·安鼎福·朴致馥 등의 작가와 작품을 다룬 최근의 논문은 해동악부체를 독립된 양식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하여 해동악부체의 양식적 의의를 보다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해동악부체의 양식적 의의를 검토하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몇몇 주요 작품들을 구체적인 고찰 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본고는 그 양식을 한국한문학사에서 영사시의 전통과 관련시켜 살펴보지는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2. 조선후기 한시·한시론의 자의식적 경향
조선 후기 한시·한시론의 새로운 경향으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 세가지이다.
b. 道보다는 事實을 내용으로 하는 詩風의 대두
c. 自由形式의 실험과 表現方式의 공부
(1) 후기 시론에서 인식주관으로서의 시인의 자리를 문제삼게 된 것은 杜甫 시를 반영론에 따라 해석하거나 시인과 '窮達' 사이의 함수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삼게 된 점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杜詩에 대한 반영론적 해석은 그것을 '詩史'로 규정하는 경우에서 두드러진다. 杜詩는 유교 윤리를 강조하는 시정신, 형식·수사상의 아름다움과 애상성, 시대상의 반영 등의 특성을 지니는데, 전기 시론에서는 시정신이 특히 중시되었다. 杜詩諺解 서문에서 '指事陳實'보다 '傷時愛君'이 강조된 것은 그 대표적 예이다. 하지만 후기 시론에서는 시대상의 반영과 작가의 체험사이의 관계가 문제시되게 된다. 尹善道(1587∼1671)의 경우는, 비록 작가와 작시와의 관계에 대하여는 本心(즉 未發之中)을 요건으로 보아 여전히 작가 개인의 체험을 중시하지 않았으나, 시의 본령을 '敷陳物態'에 두어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張維(1583-1638)는 이보다 한걸음 나아가, 杜詩의 시정신과 교훈적 효용성을 논하지 않고, 작가의 경험과 창작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두보는……거듭 난리를 만나 좌절하고 떠돌아다녀 여기저기서 끼니를 때우며, 위로는 당시 일의 어려움에 느끼고 아래로는 신세의 고달픔을 슬퍼하였다. 득실을 살피고 잘잘못을 가리며 온갖일과 갖가지 사건의 눈에 보이고 마음에 느끼는 것을 한결같이 시에 드러내었으니, 말은 절실하고 뜻은 깊으며 사실은 핵심이 있어 풍자를 갖추고 있다.
杜詩에 대한 이러한 반영론적 해석에 기초하여 조선 후기에는 실제로 여러 '시사' 작품들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시인과 窮達 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본래 韓愈의 '送孟東野序'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기 시인인 徐居正(1420∼1488)은 현달한 사람만이 재주를 충분히 발휘하여 좋은 시를 남길 수 있다고 보아, 窮達을 현세적,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후기 시인인 林昌澤은 詩才가 정치적 현달과는 관계 없이 不朽한 자취를 남길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窮하여도 窮하지 않은 자가 있고 達하여도 達하지 않은 자가 있다. 신세를 達하게 하는 것보다는 신세를 窮하게 하여 자취를 達하게 하는 것이 낫다. 신세의 窮함은 한 때에 窮한 것이오 자취의 達함은 만세에 達하여 窮하지 않을 것이리니, 누가 이것을 저것과 바꾸겠는가.
(2) 후기 시는 앞서 지적한 자의식적 시관을 바탕으로 하여, 전기 시에 구속요건으로 작용하였던 주자주의 시관을 벗어나 전반적으로 사실화한다. 丁若鏞의 耽津樂府에 대한 사대부들의 비평 속에서, 후기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주자주의 시관의 편린을 찾아 볼 수 있다. 李學逵(1776∼1835)는 사대부들의 비평을 다음처럼 소개하고 있다.
일찍이 정약용은 호남에 6,7년간 유배되어 살며 탐진악부 수십 편을 지었는데 그것이 한양에 전해졌다. 사대부들은 혹 그것을 헐뜯어 "이는 진실로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하였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한 것은 그것을 좋지 못하다고 여긴 까닭이다.
懷其時 發其志 言成章
a. 時 ---------→ 志 ---------→ 言 ---------→ 詩
b. 物 ---------→ 情 ---------→ 聲 ---------→ 音
나와 그대[沈象奎]는 지금 세상에 살고 있으니 글을 배우는 데 마땅히 지금 세상에서 쓰이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의 도를 따라서 지금 말로 지금의 사물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쓸데없이 옛사람, 옛사람만 찾아 고매하기만을 힘쓰고 사실이 적다면 뒷사람으로 하여금 그 문장을읽어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하게 할 것이니, 논하여 글과 도가 둘이라 하는 말이 이래서 생기게 된다.
(3) 후기 한시에서 사실을 내용으로 취하게 되는 변화와 병행하는 형식상의 변화로서 특기할 것은 정형성을 벗어난 古詩나 장형의 고시가 많이 나타난 점이다. 이들 고시는 寓言이나 對話體를 이용하여 사실을 제시·서술함으로써 시 자체의 완결성·자족성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전기 시 중에도 잡언 형태를 취한 歌, 引 등의 고시들이 있었으나, 그것들의 리듬은 기본적으로 정형성을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전기 시의 '고체―근체' 대립에서는 풍격·내용상의 차이가 문제되어, 고체는 '縱橫 闔之氣'를 통하여 주로 淸遊의 주제를 펴는 것이 보통이었다. 허균은 盛唐詩 4體를 선하면서 五言古詩를 제외한 이유를, 玄妙한 道를 논하는 것은 위진 때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 한 바 있다. 그것은 허균이 전기 시인들이나 마찬가지로 고시의 특징을 여전히 내용에서 찾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따라서 전기의 시인들은 고체의 경우든 근체의 경우든 '筆墨之外'의 旨趣를 중시하였으며, 근체시를 짓는 일을 비판하더라도 시구를 꾸미는데 힘쓰는 것을 그릇되다 본 것이었지 근체 형식 자체를
폐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鄭道傳(?-1398)은 다음처럼 논술한 바 있다.
이처럼 전기 시에서 고체나 근체가 모두 정형을 취하며 완결되고 자족적이었던 것은, 시를 소우주인 心의 표현이라고 본 주자주의 시관과 관계 있다. 朱子가 시의 완결성·자족성을 강조하였음은, 그가 詩經 각 편을 정확히 읽어내기 위하여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 뜻을 찾고 원시를 반복하여 吟誦諷詠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던 점에서 잘 나타난다. 이 '反復吟誦'의 讀詩法은 객관적 사물이 갖는 현실성의 본질을 포착하기보다는 고립 고정된 각 사물이 공통으로 구비한 추상체를 파악하는 '格物窮理'의 사유방법과 통한다고 할 것이다.
후기 시에서는 삶의 보편적 의미통일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완결성·자족성이 추구되기 보다는 대체로 사회와의 연속이나 심정의 자유로운 표출이 중시되게 된다. 따라서 시 속에는 시인과 세계와의 갈등 및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담기게 된다. 후기 시에서 환운과 잡언 형식을 취한 비정형적 고시가 많이 나타나게 된 것은, 시인이 세계와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대상을 개념화하는 데서 형식 실험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散文的 構文이나 寓言, 對話體를 사용한 長篇 古詩가 많이 나타나게 된 것도 형식 실험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형식상의 변화가 앞서 지적하였듯이 사실을 제시, 서술하게 되는 내용상의 변화와 결합되어, 전기 시의 근간을 이루었던 서정시와는 달리 서사적인 요소가 개입된 述的 抒情詩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해동악부체는 이 서술적 서정시 중에서 하나의 독립된 양식으로서 성립된 것이다.
3. 조선후기 악부제 한시와 해동악부체
해동악부체의 양식적 의의를 검토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해동악부체와 '악부' 개념이 어떤 상관이 있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이 작업을 위하여는 중국문학에서의 악부 개념의 형성과 변화를 검토하고, 조선 후기에 나타난 악부제 한시들을 정리하여 악부 개념을 설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한국한문학에서 '악부'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주로 고려가요나 시조의 漢譯樂府詩(즉 小樂府)에서 국문학과 한문학 사이의 직접적인 교섭 양상이 드러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중국문학에서 각 시대마다 상이한 내용을 지시하는 악부 명칭이 아무런 반성 없이 한국한문학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악부 개념 자체는 대단히 모호하다.
중국문학에서 각 시대마다 樂府觀의 변천을 살펴보면 다음 두 사실이 주목된다. 첫째, '악부'는 御歌所를 가리키는 경우와 악곡이나 시를 가리키는 경우로 구분된다. 둘째, 詩歌史에서 唐 이전까지는 '樂府―非樂府(徒詩)'의 기본대립이 있었으나, 당에 이르러는 시ㅗ아 음악이 분리됨으로써 악부는 일반시의 범주에 편입되었다. 여기서 당 이전의 악부 장르는 양식적 특징과 양태(mode)에 따라서, 漢代의 儀式歌(ritual hymn)·南朝의 의식가 중 특수 부류·漢代의 民歌(anonymous ballad)·남북조의 민가·문인들의 樂府風 歌謠(ballad in Y dh-fu style) 등으로 다시 세분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당 이후의 악부는, 詞나 曲을 지칭하는 관습적 용례를 제외한다면, 장르(혹은 양식) 개념이 아니라 일반시의 특정한 詩風(style)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봄이 옳다. 즉 당 이후의 경우에는 악부 개념을 제한적으로 규정하여, '고체-근체'의 대립에 포괄되는 고시·절구·율시·배율 등의 각종 詩體에 다시 '악부계-비악부계'를 하위분류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한시와 중국시와의 직접적인 교섭은 신라 말 崔致遠(857-?)등의 唐 賓貢科 출신 학자들에게서 비롯된다. 이때 모범이 되었던 시는 唐詩이므로, 한국한시는 그 출발에서부터 '악부-비악부'가 아니라 '고체-근체'를 기본대립항으로 지녔다고 하겠다. 고려 중엽 이후 조선 전기까지는, '詞=樂府'라는 개념이 도입되었고 詞는 樂章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악부·악장·사의 명칭이 혼용되었던 듯하나, 이 시기에도 악부가 하나의 장르나 양식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는, 明의 前後七子의 시가 유입되어 그들이 지은 악부제 시에서 영향을 받아, 악부제 한시가 대거 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수용은 단순한 모방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명나라 시의 수준을 극복하려는 의식을 수반한 것이었다. 또한 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 후기의 악부제 시 제작은 明에서처럼 복고주의적, 반동적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주자주의 시의식을 벗어나서 새로운 詩境을 개척하고자 하는 진보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는 점이다. 李衡祥(1653∼1733)은 전통적인 禮樂論에 기초하여 논지를 전개하되,
라고까지 하여 자신의 악부제작 의의를 변론하고 있다. 이러한 변론의 배후에서 드러나는 것은 주자주의의 구속성을 옹호하는 전통주의자와 악부제작을 통하여 새로운 시정신을 확립하려는 문예주의자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이다. 이처럼 급진적 시정신을 담고 있는 조선 후기의 악부제 시들은 ①小樂府 ②擬古樂府 ③竹枝詞 ④雜歌謠 ⑤詠史樂府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다섯 부류는 형식·내용상의 규준이나 상호 사적 연계성을 지니지 않으므로 '악부'라는 단일 범주 속에 포괄될 수 없다. 즉 이 다섯 부류에서 사용된 악부 명칭은 일반시와 대립되는 장르 이름도 아니고 일반시의 한 양식 이름도 아니며 다만 특정 詩風을 가리킬 뿐이다. 악부의 시풍이란 한가지로 규정될 수 있다기보다는 다음 세가지 중 하나를, 혹은 둘 이상의 결합 양상을 뜻한다.
a. 古樂府에의 擬作性:주로 擬古樂府에서
b. 民歌風:小樂府·竹枝詞·雜歌謠 등에서
c. 雜言 형태와 換韻法에서 聯想되는 樂曲性:雜歌謠와 詠史樂府의 일부에서
이들 각 부류의 발전 양상을 살펴 봄으로써 조선 후기 한시의 한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다.
(1) 擬古樂府에는 엄밀한 의미의 '악부'에 의작된 것만이 아니라 唐樂府나 기타 新詞에 의작된 것도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악부라 지칭된 기존의 곡을 모방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조선 후기의 의고악부 중 주목할만한 것은 許筠(1569∼1618)의 '續夢詩' 40수이다. 이 40수 가운데는, 고악부에 의작된 것도 있고 新詞라 할 것도 있다. 후자의 시들은 악부 원사가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작가의 개인 시정이 어느정도 표출될 수 있었다. 또 전자의 시들도 구법·편법·압운법에서 전혀 원사를 따르지 않고, 句나 辭를 교체하거나 소재·주제를 변경하여, 개인 시정을 비교적 자유롭게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허균이 도학중심의 문학관에서 벗어나 개성중심의 문학관을 지녔었던 사실과 중요한 상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 小樂府作은 고려 말 李齊賢(1287∼1367)과 閔思平(1295∼1359)에서 비롯되었으나, 조선 후기의 소악부는 고려 말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고려 말 소악부는 '樂歌=樂府'라는 파악에 기초하여 '被之管絃'의 성격과, 觀風察俗을 통한 諷諭라는 목적성을 지녔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소악부 제작은 음악과 직접 관련이 없고 풍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申緯(1769∼1847)의 '小樂府' 40수는 그 대표적 예이다. 신위는 그 自序에서 시조 형식과 한시 형식과를 비교하여,
라고 하였고, 이형상보다 한걸음 나아가, 頌祝이나 說理가 주제인 시조들을 한역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위의 소악부 제작은 情感의 다양함이 드러날 수 있는 수사법과 언어배치 등 표현방식을 중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竹枝詞는 본래 建平 일대의 山歌를 唐의 劉禹錫이 고친 것이다. 이후에도 그것은 楊廉夫 등에 의하여 계속 지켜졌으며, 비록 창법은 일정하지 않게 되었으나 '譜風土'의 내용성만은 변함이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많은 죽지사들이 지어졌는데, 그것들이 특정 악곡에 맞추어 가창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譜風土'의 내용이 변함 없었음은 분명하다. 그것들 중 주목할 만한 것들은 申光洙(1712∼1775)의 '關西樂府'(일명 '關西伯西時行樂詞')와 丁若鏞(1762∼1836)의 耽津樂府 및 趙秀三(1762∼1849)의 '外夷竹枝詞'이다.
① 신광수는 善官을 칭송하거나 太平歲를 꾸미는 風謠를 악부라 보았고, '關西樂府'의 自序에서는 수령의 행락을 풍유하려는 목적으로 시를 짓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 시작품은 목적의식이 배제된 순수 서정시로, 다음에 드는 제98수는 특히 형상의 표현이나 수사가 뛰어나다.
月下西廂細路明 서쪽 좁은 길도 달빛 받아 또렷하네.
暗入冊房知印退 통인 간 걸 알고서 책방에 몰래 들어,
銀燈吹滅閉門聲 문 살짝 닫는 소리에 은등잔 불어 꺼요.
② 정약용의 '長 農歌'와 耽津樂府('耽津村謠'·'耽津農歌'·'耽津漁歌')는 그가 辛酉邪獄으로 귀양길에 올랐을 때 지은 작품들로, 그의 시정신이 현실인식과 상관을 맺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長 農歌'에서는 여전히 작가의 심경이 애절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탐진악부에서는 객관적 기사가 의도되고 있다. '耽津村謠' 제 8수는 반어법을 통하여 貢法의 폐해를 비판하고 있다.
天下皆聞此樹奇 온 천하가 이를 두고 떠들썩했네.
··
聖旨前年 貢額 기어코 지난 해 공액 매기시더니,
·······
春風 ■又生枝 죽은 등걸도 봄바람에 새 가지 내는구나.
③ 민속기사에 머무를 한계를 지닌 죽지사체를 이용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 조수삼의 '外夷竹枝詞' 122章이다. 이 작품은 가공의 세계를 가사함으로써 설화와 시를 연접시키고 있다. 설화와 시와의 연접을 통한 시세계의 확대는 그의 '紀異' 시편들에서도 나타나는데, 이제까지 시창작에서의 기본대립항이었던 '緣情―言志'는 전혀 문제되지 않고 설화적 흥미에 초점이 놓여 있어 주목된다.
(4) 雜歌謠體란 風謠·抒情歌謠를 총칭하는 것으로, 洪良浩(1724∼1802)의 '北塞雜謠'(耳溪集 권2)와 金 (?-1821)의 '思 樂府'( 庭遺藁 권5-6)가 각각 대표적이다.
① 홍양호는 '北塞雜謠'에서 時政에 대한 풍유를 목적으로 하면서 洪州산물과 北方人의 생활을 관찰·기술하여, '언지'의 창작과정을 따랐다. '叱牛'에서는 비탈밭을 가는 소와 북방인데 동일시된 작가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시인 스스로가 세계인식의 한계를 고백하고 있는 '朔風'에서는 대화체 속에 주관의 자기인식이 드러난다.
朔風日怒號 "북녘 바람아, 날마다 성내어 소리치누만,
問爾怒何事 그리도 성낼 일은 무어 있는가."
我本無心吹 "내야 맘 없이 부는 것이지,
寧有怒如喜」 성낼 일 기꺼울 일 무어 있겠소.
在東句芒圻 동녘에선 꽃눈 (구망: 나무의 신, 즉 꽃눈) 터뜨려주고
在南民 解 남녘에선 사람 마음 풀어 주는데,
每到北方聲激烈 예 오면 매운 소릴 해대는 것은
吾亦不知所以乃」 그 무슨 까닭인지 나도 모르오."
② 김노의 '思 樂府' 300수는 주변세계에 대한 작가 개인의 정감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있는데, 그 序는 다음과 같다.
問汝何所思 네 생각하는 곳 그 어디냐,
所思北海湄」 내 생각하는 곳 북녘 바닷가.
苦雨長夏漲溪 여름 내 모진 비에 개울 콸콸 넘치니,
五日不 蓮姬面」 연희 얼굴 못 본 지 닷새나 됐네.
今宵雨歇月在沙 비 걷자 모래톱엔 달빛도 고요,
水邊楊柳 綠紗 물가 버들은 푸른 깁인 듯 하늘거리고.
竹 鞋出溪上 대지팡이 삼날미투리로 나서를 보니,
信步擬往蓮姬家」 나도 몰래 걸음은 연희 집으로.
忽見沙際無限樹 문득 저 사장 끝 나무나무들,
樹梢微動人影度」 가지 살랑 흔들리고 사람 모습 어른어른.
短傘布裙提葫蘆 작은 우산 베 치마 술병 든 모습,
蓮姬已踏橋西路」 연희는 다리 건너 서쪽길로 들어섰네.
(5) 詠史樂府는 한민족의 역사를 소재로 한 악부제 시로, 조선 전기 金完直의 '東都樂府'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다. 17세기 초 沈光世의 '海東樂府'는 명나라 李東陽의 악부에서 직접적 영향을 받아 지어졌고,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그 둘의 편제를 따른 작품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들 조선 후기의 영사악부들은 중국의 악부와 구별되어 東國樂府나 海東樂府등으로 불리웠으며, 민족주의의 성장 과정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이들 영사악부의 문학적 양식은 동일하지 않다. 각 작품은 소서와 원시로 이루어진 여러 편이 일정한 사관에 따라 편집된 형태를 취하는데, 원시의 양식에 따라 다음 두가지로 구별된다.
① 원시가 단순한 찬영, 의론에 머무른 영사악부
趙宗鉉의 '三史異蹟' : 檀下熊부터 玉寶琴까지 20편
李裕元의 '海東樂府' : 箕子樂부터 眞勺까지 100편
② 원시가 서사적 요소를 지닌 영사악부
沈光世의 '海東樂府' : 借地恨부터 相公來까지 44편
林昌澤의 '海東樂府' : 檀君祠부터 白額虎까지 35편
李瀷의 '海東樂府' : 兜率歌부터 開閉門까지 111편
李匡師의 '東國樂府' : 太伯檀부터 杜門洞까지 30편
李學逵의 '海東樂府' : 借地恨부터 子規樓까지 56편
李福休의 '海東樂府' : 桓雄詞부터 龍山奴까지 257편
安鼎福의 '觀東史有感效樂府體五章' : 成己歌부터 白馬塚行까지 5편
趙顯範의 '江南樂府' : 江南美부터 至行歌까지 151편
朴致馥의 '大東續樂府' : 徒海家부터 大報壇까지 28편
이 두 부류 중 두 번째 것은 한국 한시가 서정시에서 서사시로 접근하게 되는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시 형태면에서도 이들 작품은 대부분 잡언을 사용하여 근체시의 형식적 제한을 벗어나서 서술을 개입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두 번째 부류의 영사악부는 양식적 성격이 비교적 뚜렷하므로 그 양식을 해동악부체라고 이름하고자 한다. 趙顯範은 '江南樂府' 自序에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조선후기의 악부제 한시는 다음과 같은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주로 의고악부에서 나타나는 고악부에의 의작성은 전기 시의 '고체-근체' 대립에서 엄격히 지켜져왔던 풍격·형식상의 규범을 벗어난 새로운 풍격과 표현수법을 낳게 하였다.
둘째, 소악부·죽지사·잡가요에 있어서 민가풍의 대두는 풍격면에서 전기 시와는 달리 典雅함 대신 俚함을 취하게 하고, 창작미학에서 '言志'와 '緣情'의 두 방식이 정립되게 하였다. 특히 일부 죽지사 작품은, 비록 객관적 기술에 그치기는 하였지만, 사실의 제시·서술을 촉발하였다.
셋째, 악곡을 연상시키는 잡언 형태와 환운법을 취한 잡가요 시들은 후기 시에 있어서 풍격·작법·내용상의 변화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유형식의 실험을 통해 세계를 개념화하려는 시인의 자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 시인의 자의식은, 홍양호와 김노의 잡가요에서 잘 나타나듯, 주관의 자기성찰이라는 운동성을 지닌 근대적인 것이다.
4. 해동악부체의 성립과 양식적 의의
해동악부체의 최초 작품인 沈光世(1577∼1624)의 '海東樂府'는 다음 세가지 요인에 의하여 출현하였다. ①직접적으로는 明 이동양의 영사악부('西涯擬古樂府')에서 영향을 받았다. ②서정시에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게 되는 한국 한시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났다. 이 점에서 그것은 김종직의 '東都樂府'( 畢齋集 권3)에 연맥되어 있다. ③조선 후기의 역사적 배경하에서 선비들의 역사의식이 성장하게되는 정신사의 흐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동양 악부는 각각 '小序-原詩-(史評)'으로 이루어진 101편을 총집해 놓은 것으로, 그 소재는 좌전, 사기, 고금주, 통감, 삼국지 등등에 수록된 역사적 사실과 설화이다. 각 편은 앞뒤에 위치한 편들에 의해 의미가 확장되거나 보충되지 않아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작품에서 '악부'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원시가 악곡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弄湖怨'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설화
後漢의 효녀 曹娥는 上虞 사람 旴의 딸이다. 旴는 婆娑曲을 절주하여 신을 즐겁게 할 줄 알았다. 그는 漢 安帝 2년 5월에 伍君(역주: 伍子胥의 神)을 맞아 파도를 거슬러 오르다가 빠져 죽었는데 시체를 건지지 못하였다. 娥는 14세 나이로 강을 따라 호곡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다가 17일만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曹娥碑와 後漢書) 옛적에 吳王이 오자서를 죽여 술부대에 넣어 강 가운데 띄웠다. 자서는 물살과 파도에 조수 따라서 왔다갔다 하였다. 혹 그 신을 보았다는 자가 있어서 屆를 세워주고 해마다 9월 16일에 조수가 제일 클 때 杭人이 깃발과 북으로 맞아들였다. 弄湖놀이는 여기서 시작되었는데, 혹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臨安志).
② 시
莫弄湖 조수를 놀리지 말아라.
湖水 殺人 조수는 사람 죽이는 길이라오.
莫射湖 *조수를 쏘지 말아라.
中有孝女魂」 조수 그 속에 효녀 혼 들었다네.
痛恨魂來父與遊 슬프도다 혼 와서 애비와 놀고,
魂去父女沈 혼 가서 애비와 잠기는구나.
湖能殺人身 조수는 사람 몸뚱인 죽일 수 있어도,
不能溺人心 사람의 마음은 빠뜨릴 수 없다오.
湖水有盈縮 조수는 차고 줄어도,
人心無古今」 사람의 마음은 예 이제 따로 없다네.
(*錢唐遺事 참고: 양 개평 4년 오 월왕이 임안성 아래 둑을 쌓는데 조수가 밀어닥쳐 부수었다. 이에 궁수 수백 명으로 쏘게 하였더니 물러갔다. 그래서 방파제를 완성했다)
설화 중 '臨安志' 기록은 曹娥說話의 주석에 해당한다. 조아설화는 설화적 인물(曹娥)이 자신과 세계와의 갈등(曹娥와 湖水 사이의 대립)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죽음을 통한 孝의 완성)을 서술한 '故事'이다. 원시는 그 설화를 서술하지 않고 그 설화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심정적 해석을 기술하고 있으므로 主情性이 강하다. 따라서 명의 문인들은 이동양 악부를 단순히 영사시로만 규정하기도 하였다. 영사란,
去年今日此門中 지난 해 오늘 이 문중에서
人面桃花相映紅 얼굴과 복사꽃 한데 어울려 붉더니,
人面不知何處去 그 얼굴 어디로 갔는가,
桃花依舊笑春風 복사꽃은 옛날처럼 봄바람에 웃는데.
이러한 본사시는 서사시 범주 속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本事를 이야기하는 별도의 글이 존재하고 있어서 독자성이 거의 없고 사건을 구성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으므로 서사시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이 본사시에는 이야기 서술이 가능한 發話狀況(Sprechsituation)도 없다. 이동양 악부의 원시는 이야기가 구성적으로 보고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본사시와 같으나, 이야기 서술이 가능한 발화상황이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그것보다는 서사적 성격이 뚜렷하다. 즉 '弄湖怨' 원시의 경우 환운과 잡언의 비정형형식에 의한 篇法을 통하여, 전반부에서는 서술자(작가)가 청자(독자)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서술자의 독백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 원시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심정 속에서 만족스럽게 해소하지 못하고 있어서, '리듬의 等長性을 통하여 주관이 自己同一性을 확인하는 것' 혹은, '주관과 객관의 혼융상태'라고 할 서정시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없다.
김종직 악부는 이동양 악부에서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한국 한시에서 서사적 공간이 문제되기 시작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으로서 의의가 크다. 이 작품은 '會蘇曲' 등의 7편으로 되어 있고, 그 각 편은 서로 연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각 편은 '小序一原詞'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시는 악곡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會蘇曲'의 원시만을 들면 다음과 같다.
會蘇曲 회소곡이여
會蘇曲 회소곡이여,
西風吹廣庭 서풍은 빈 뜰에 불어오고
明月滿華屋 달빛은 집안에 가득하다.
王姬壓坐理巢車 왕녀는 오똑히 앉아 실을 잣고
六部女兒多如簇 6부 계집들이 떼지어 모였다.
爾 旣盈我 空 "네 광주린 그득하고 내 것은 비었구나"고
酒揶揄疇相謔 좋은 술을 벌주로 웃고 떠드네.
一婦嘆 한 아녀자 탄식해도
千室勸 온 아낙네 권면하여
坐令四方勸抒軸 온 나라에 베틀 일 권장하였네.
嘉俳終先閨中儀 한가위놀이에 규중녀들 예절은 잃었어도,
猶勝跋河爭 줄다리기로 시끌댐보단 낫고말고.
이 시는 후반부에 주관적·심정적 해석을 첨부하여, 앞서 살핀 이동양 악부처럼, 한 정황의 제시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서정적이다. 그러나 제 5구에서 제 9구까지는, 비록 이야기를 모두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소서의 고사를 사건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이동양 악부의 원시보다는 事性이 높다. 그런데 이 원사에서 서술되어 있는 것은 공간·인물·사건의 요소를 갖춘 허구적 이야기가 아니라 단편적 사실이다. 따라서 김종직 악부는 이동양 악부보다 서술성이 높기는 하나 事 藝術(Erz hlende Kunst)에 접근될 수는 없다. 서정시에 기본해 있으면서 서술성을 지닌 이러한 김종직 악부의 특성은,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의 다른 시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舍方知'( 畢齋集 권3)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이야기
舍方知란 자는 사노비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 어미가 계집애로 변복시켜 화장을 하고 바느질을 배우게 했다. 커서는 조정 관리들의 집에 드나들며 하녀들과 통정하는 일이 많았다. 관인 金九石의 아내 李氏는 判院事 純之의 딸로 혼자 되어 있었는데, 사방지를 끌어들여 바느질을 맡기고 밤낮으로 함께 있기를 십여 년이나 그랬다/ 天順 7년(1464)에 司憲府에서 알고 국문을 하다가 본래 그자와 통정한 여승을 신문하니 여승은 "양기가 아주 셉니다"라고 말하였으므로, 女醫 班德을 시켜 더듬어 보게 하니 과연 그랬다. 주상께서 承政院과 永順君 溥, 河城尉 鄭顯祖등으로 하여금 이리저리 시험해보게 했다. 하성의 누이는 이씨의 며느리인데, 하성도 또한 실토하기를 "아주 셉니다"고 하였다. 주상께서 웃으며 더 이상 추찰하지 말게 하고, "純之의 집안을 욕되게 할까 걱정이다"고 하며 사방지를 순지가 다스리는 곳에 보냈다. 순지는 다만 곤장 십여 대를 쳐서 畿內의 노비 집에 보냈다. 이에 이씨가 몰래 사방지를 되찾아와 순지가 죽은 뒤 더욱 방탕하였다. 금년 봄에 宰樞가 연석에서 말을 꺼내 알게 되어 주상께서 사방지를 곤장 쳐서 新昌縣으로 귀양보냈다. 내가 이를 듣고서 두 수를 짓는다.
② 제1수
絳羅深處幾潛身 항아 비단 깊은 곳에 몇번이나 숨었던가.
脫却裙 便露眞 치마나 비녀야 내 던져 두었다네.
造物從來容變幻 하늘도 요상한 일 용납하여서,
世間還有二儀人 세간엔 두 인물 버젓이 남았었나.
③ 제2수
男女何煩問座婆 남녀 짓거리를 여승에게 다 묻고,
妖孤穴地敗人家 요사한 여우 굴이 인가를 망쳤네.
街頭喧誦河間傳 길 머리 강 어구에 떠들레 전하는 건,
閨裡悲歌楊白華 규중 속 슬픈 노래 楊白華더니.
②·③의 원시들은 이야기의 정황을 제시하고 풍자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단순히 서정시(즉 풍자성)만을 지니지 않고 서사성도 지니고 있어 본사시와 성격이 같다. 결국 김종직 악부는 이러한 서사적 요소를 지닌 시들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이며, 그것들은 모두 서정시 속에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게 되는 후기 한시의 변화를 豫料하고 있다 하겠다. 이와 같은 후기 한시의 변화는, 시정신에서 주·객 대립이 만족스럽게 해소되지 못하게 되었음을 잘 말하여 준다.
심광세 악부는 상고 시대부터 조선조까지의 사실을 소재로 한 4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이동양 악부에서 직접 영향을 받아 생겨났고 김종직 악부와 연맥되어 있지만, 그 둘과는 달리 서사적 인물·공간·사건의 요소가 비교적 잘 갖추어진 시들이 많다. '壽盡坊'은 鄭道傳이 부귀현달하고서 수명마저 극진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거처하는 곳을 수진방이라고 개명하였으나 芳碩의 亂 때 주살당하고 만 사실을 기사한 것으로, 그 원시는 다음과 같다.
壽盡坊 수진방이여
開甲第 제일가는 집 열었네.
相公一時官濟濟」 상공께선 한 때 관명도 높았다오.
當貴功名稱吾意 부귀공명은 이 내 뜻에 맞다면
但願百年長保此 바라고 바라는 건 백년 오래 보존할 일.
壽盡名坊良有久」 수진 이름난 곳 오래도 있었네.
壽盡坊 수진방이여
連北闕 북궐에 잇대 있었네.
街前甲騎紛如雪 길앞에 기마병들 먼지 풀풀 일구니,
禍機之來眞一髮」 화 닥칠 일 위험 천만이었다오.
小臣指使定可知 "제가 한 짓 정말 알겠나이다."
誰便從前爾反覆 누가 널 예전처럼 돌려 줄건가,
勿多言 "잔말 마라
口亦肉 입도 더럽구나."
言猶未已頸血注 하던 말 채 못하고 목 피를 The았네.
壽盡坊 수진방이여
屍橫路」 시체만 길에 비꼈다.
이 시에서 '開甲第→連北闕→屍橫路'의 3자구는 정도전이란 인물의 '顯達→處世의 잘못→被禍'의 과정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제1·2·3·5연은 서술, 제 4연은 대화의 인용을 통하여 서사적 공간과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서사성이 높다. 그런데 서술자(작가)가 전달하고 있는 것은 허구적 이야기의 전체가 아니라 단편적 사건이다. 즉 원시는 실제의 줄거리가 이미 진행되고 있거나 지나가 버린때에 시작되고 있으며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중단하고 있다. 이점에서 원시는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 사이에서 진동하는 民歌風을 지니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심광세 악부의 원시는 서정시이기는 하되 서술자가 전면에 나타나 이야기의 일부를 전달하는 서술적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심광세 악부가 이동양 악부나 김종직 악부와는 다른 또 하나의 특성은, 각 편들이 개별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역사로서의 연속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심광세는 역사란 개별 사실을 통해 감계하는 것이며 악부 찬술의 목적도 이러한 감계에 있다고 보아, 체계적인 역사서술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제 작품은, 비록 正統論과 같은 특정 사관에 따른 체계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 해도, 각 편이 상고조·삼국 및 통일신라조·고려조·조선조의 각 부분 속에서 특수한 사적 의미를 지니도록 편술되어 있다.
이상에서 볼 때 심광세 악부는 다음 두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① 원시는 서정시에 서사적 요소가 개입된 서술적 서정시이다. ② 각 편은 역사로서의 연속성을 지닌다. 이 두가지 특성은 심광세 악부를 모범으로 한 林昌澤(1682∼1723)의 '海東樂府'·李瀷(1681∼1763)의 '海東樂府'·李學逵의 '海東樂府'·安鼎福(1713∼1791)의 '觀東史有感 樂府體五章'·李匡師(1705∼1777)의 '東國樂府'·朴致馥(1824∼1894)의 '大東續樂府' 등등에 의하여 공유되었다. 따라서 이 두가지 특성이 갖는 문학사적·정신사적 의미는 곧 해동악부체의 양식적 의의이기도 하다.
春秋나 史記에서 잘 나타나듯이 일찍부터 역사는 발전적 문학화(fortschreitender Literarisierung)와 역행적 탈문학화(gegenl ufiger Entliterisierung)의 두 국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 전기까지에는 正史와 경합할 만큼 생활관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 줄 한문학 장르는 없었다. 소설 양식의 모태라고 할 笑話나 逸話는 단편성·자족성이 컸다. 시문학의 경우, 비록 宋純의 '聞 歌'·'聞隣家哭'( 仰集 권1)이나 魚無跡의 '流民嘆'과 같이 서사적인 시들도 있었지만, 이것들은 역사적 소산이라 하기 어렵다. 즉 전기 시에서는 세계와 개인 사이의 갈등을 문제삼지 않고 주관과 객관의 혼융상태를 드러내는 서정시가 주요 양식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는 士民의 自覺에 따라 한문단편들이 역설절 양태로 생활을 반영·제시하는 소설에로 이행한다. 또한 시문학에서도 서정시에 기본하면서도 서사적 요소를 지닌 고시들이 출현하게 된다. 해동악부체는 문학이 이처럼 역사와 경합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출현한 독특한 시 양식이다. 즉 해동악부체(원시)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시인이 형식 실험을 통하여 세계(즉 역사)를 개념화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는 서술적 서정시이다. 따라서 그것은 생활관계를 드러내 보인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또다른 형태(Paradigma)이다.
조선 전·후기에 있어서 한문학과 역사와의 관계를 도식화한다면 다음과 같다.
특히 正史의 체제로 신라조와 고려조를 편술한 이익 악부는, 정치 기강이 확립되면 臣民의 충효 정신이 발양되고 민풍이 순화되어 信義가 중시되며 나아가서는 陰助를 받을 수 있다는 전통 유가사관을 바탕으로 하여, 각 역사적 사실을 역사 발전의 계기로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이익 악부는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신라'와 같은 고대사 인식체계를 설정하였고, 안정복 악부는 '단군→기자→마한→(삼국 무정통)→통일신라'와 같은 체계를 보이고 있으며, 박치복 악부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 대내외 명분을 회복한 조선이 그 후계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해동악부체의 작품들이 편술상 역사 서술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조선 후기에 있어서 선비들이 자기성찰을 통하여 주체사관을 확립하게 된 정신사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해동악부체의 역사서술은 건국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서술 방식을 지양하고,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난 주체적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정통론을 전개하며, 이와 함께 고대사에 대한 체계적 인식을 펴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해동악부체는, ①시정신이 근대의식의 면모를 지니게 됨으로써 서정시에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게 되는 후기 한시의 변화와, ②선비들의 자기성찰에 따른 주체사관의 확립을 바탕으로 하나의 양식으로서 성립된 것이라 하겠다.
5. 해동악부체의 형식적 발전과 한계
해동악부체의 원시는 서사적 요소를 지닌 영사시이므로, 사실에 대한 이론과 이야기의 서술은 그 두 기본대립항이다. 안정복 악부 중 '成己歌'를 들어 그 대립의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소서
ㄱ.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할 때, 조선은 항복하였으나 王儉城은 항복하 지 않았다.
ㄴ. 右渠의 대신이었던 成己도 다시 吏荀 論을 공격하였다.
ㄷ. 그 백성이 성기를 주살하여, 비로소 조선을 평정할 수 있었다.
② 시
漢皇 武思遠略 한 무제가 멀리 쳐올 생각하니,
箕東殺氣彌天黑 조선에는 하늘까지 살기 뻗쳤다.
樓船掛帆下遼海 병선들은 쏜살같이 요동 바다를 내려오고,
左將躍馬由碣石 장수들은 갈석땅부터 말놓아 달리네.
諸縣幅裂王都傾 고을마다 짓밟히고 왕성마저 기우나,
但見紛紛賣國賊」 모두 다 적에게 나라를 팔자 할 뿐.
安危却有大臣在 나라 존망이 대신에게 달렸으니,
洙血飮泣守孤城 피눈물 흘리며 외론 성을 지켰네.
孤城勢急危如髮 외론 성 운세는 위험 천만이지만,
到此一死鴻毛輕」 예서 죽음은 터럭보다 가벼운 것.
浿水流洋洋 패수는 넘실넘실 흘러 가고,
王儉高 왕검성 아스라이 높아라.
成己大名留至今書 성기 큰 이름 이제도 남았다만,
反書誅 주살했다고 썼으니
是何義 이 무슨 말인가.
史臣秉筆逑書法」 정녕 사관이 잘못 쓴게지.
세 번째 부분은 사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안정복의 주체사관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의론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첫 번째·두번째 부분은 주 인물(成己)의 행적을 사건으로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서술된 내용은, 小序의 기록 중 서사적 인물 성기의 성격을 드러내어주는 ㄱ·ㄴ을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의론과 서술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해동악부체의 모든 원시들은 의론과 서술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데 그 대립 양상에 따라 ①의론이 강하여 서정적인 영사시에 가까운 시 ②의론은 없으나 서술의 성격도 약한 압축적 서사가요 ③앞서 든 안정복 악부처럼 의론과 서술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 ④ 보다 정교한 서사시 등으로 세분될 수 있다.
(1) 30편으로 이루어진 이광사 악부의 원시들은 다른 작품들보다 특히 서사성이 낮고 의론에 편중되어 있는데, 이광사는 古雅한 표현을 써서 平鋪直下의 病을 고치고자 하였다. 그 중 가장 설화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있는 '黃昌舞' 원시조차도 시사성이 낮다.
① 설화
ㄱ. 黃昌은 15,6세로 칼춤을 잘 추었다.
ㄴ. 신라왕을 찾아가 말하기를, "臣은 왕을 위하여 백제를 쳐서 왕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하였다.
ㄷ. 백제에 들어가 저자에게 춤을 추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두른 듯하였다.
ㄹ. 백제 왕이 궁중에 불러 춤을 추게 하였다.
ㅁ. 昌이 왕을 쳐서 죽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자들에게 죽었다.
*ㅂ. 그 어머니가 듣고 실명하였다.
*ㅅ.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어느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앞에서 춤을 추게 하고는 말하기를, "昌이 와서 춤 춥니다. 앞서 말은 잘못된 것입니 다"고 하였다.
*ㅇ. 어머니가 놀라 좋아하여, 다시 눈을 떴다.
② 시
黃昌兒 黃昌兒여,
年十五 열 다섯 젊은이여,
萬傑刺 큰 인물 찔렀도다,
褐夫刺」 천한 놈 찔렀도다.
劍舞西出斬百帝 칼 춤 추어 백제왕 베었으니,
報君千年養士義」 임금 은혜 갚아서 선비 도리 세웠도다.
此時溫祚祚已歇 온조 끼쳐준 영화는 이로써 끝났으니,
世知平濟蘇金力 백제를 평정한 건 소정방 칼이 아냐,
至今樂府登殊烈」 이제도 악부에 갸륵한 공 올라 있다오.
설화와 시와의 비교에서 잘 나타나듯, 시는 설화의 ㅂ·ㅅ·ㅇ 부분을 가영대상에서 제외하고, ㄱ에서 ㅁ까지 黃昌의 공적을 찬영하여 '報君千年養士義'라는 주제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그 주제는 昌의 행위가 백제멸망의 계기로서 개념화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보편적 의의를 지니고 있어서, 시 자체가 구체적 사건의 정황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시는 구체적 이야기를 서술하지 않아 서사적 인물·사건·공간의 요소를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의론에 편중되어 서정시의 차원으로 떨어질 한계를 지니고 있다.
(2) 임창택 악부의 원시들 중에는 압축적인 서사가요의 형식을 취한 것이 많다. 隱道者로 자처하여 고려 睿宗의 총애를 입어 金門羽客이라 불리웠던 郭輿를 비판한 '郭處士'는 간결한 謠的 事 속에 冷笑를 첨부하고 있다.
郭處士 곽처사는,
不宜處丘園 동산에 있는 건 마땅치 않아,
但愛金馬門 대궐문만 사랑한다오.
天道無知 하늘이 야속하여
朱悅無子 주열에게 자식 없네.
若道悅無子 열에게 子 없다면
嶺南按使竟誰是」 영남 안찰사는 누구요.
朱悅自言心如水 주열은 제 마음 물처럼 맑다 하나,
按使貪如縉雲氏 안찰사는 욕심 많아 진운씨같구나.
朱悅竟無子 주열에게 끝내 자식 없다면,
天道果無知」 하늘은 정말 야속하구료.
제 2연의 子는 자식이 아니라 이름을 뜻하므로, 해학적 효과를 낳고 있고 결미(제 4연)에서는 시 전체의 意接 상태를 전변시키는 반어법이 사용되었다. 즉 원시는 각 사실에 대하여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제시하지 않고, 작가와 독자간의 전체적·심정적 공감을 의도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의론이나 서술 그 어느 속성도 지니지 않는 압축적 서사 가요라 할 만하다.
박치복 악부 중에서도 압축적 서사가요의 형식을 지닌 원시들이 발견된다. 28편으로 이루어진 그의 악부는 각 편 3수씩으로 되어 있는데, 3수의 시가 서로 시점이 다르고, 하나의 시 속에서도 구법·압운법의 변환을 통하여 deixis(사건·사물에 대한 작가의 접근 위치)가 변화되고 있다. 명이 멸망하자 安陰에 둔거하여 소나무를 심고 소요하였다는 鄭蘊의 지절을 찬영한 '大明松' 제 1수는 다음과 같다.
門前松樹子 문앞 어린 솔을
莫以楚楚視 가련타 보지 마오.
松若不改靑 솔빛이 늘 푸르면,
先生有典型」 선생은 전형이오.
先生有典型 선생이 전형이면,
大明猶不亡 대명은 안 망하오.
先生植此松 선생은 이 솔 심어
萬古植綱常」 만고 강상 심었도다.
大明天地餘一松 대명 천지에 한 솔 남겨
至今遺民拜稽首 이제도 남은 백성 엎뎌 절하니,
歲暮天寒二百年 세밑 추운 하늘 이백 년을
■古株如相守」 그루터기 움과 싹이 서로 지키네.
(3) 심광세 악부와 이익 악부 및 안정복 악부의 원시들은 대부분 의론과 서술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익 악부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시점을 변환함으로써 서술과 의론을 결합하였는데, 각 시마다 새로운 형식 실험이 행해지고 있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갑자사화를 예언한 바 있는 鄭希良이 무오사화 때 연산군의 내침을 받고 있다가 강에 빠져 죽어 사람들이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연산군이 狂奴가 빠져죽었으니 시체는 찾아 무엇 하겠느냐고 하였다는 일을 두고 지은 '狂奴行'의 원시는 다음과 같다.
狂行雖可恥 미친 짓은 부끄러우나
古聖時或藏心 옛 성현도 간혹 마음 숨겼고,
奴稱非不賤 노예는 천하나
古聖故自爲人役」 옛 성현도 부러 남의 부림 받았다오.
臣狂信有爲 신하의 미친 짓 까닭 있다만
主狂胡乃爾 임금의 미친 짓 어인 일인가.
黃馬年間綱彌天 연산군 땐 죄망이 하늘까지 뻗어
血 朝端相枕死」 조정 신하들 피 흘리며 죽어갔다네.
衰燈點易問何人 어느 누가 꺼져드는 심지 갈아
夜聞伊吾曉無處 한밤중에 글 읽고 있었나.
乾坤莽蕩聲影絶 아득한 천지에 빛과 소리 끊기고
條忽神來與鬼去」 귀신만 문득 왔다 떠나네.
旁人莫道物色遍 "여봐라 두루 찾을 것 없다.
彼哉狂奴勿用來 그 자야 미친 녀석, 무엇에 쓰겠나"
嗟嗟小兒不知命 아아, 저 아이[燕山君] 제 명 모르고
眼底淪亡猶不休」 눈 앞서 망해가도 그치질 않았네.
中風雨幾晦明 나라 안 비바람은 몇 번이고 몰아쳐도
戒得靑蓮心已固 시인[虛菴]은 마음으로 경계하였으니,
試筆頹院亦偶然 *무너진 뜨락이라 우연히 붓대 놀려
天香桂子留遣句」 남겨 둔 싯귀는 그윽한 향태 풍긴다.
可笑咸關水尺壻 어쩌다 咸關 水尺 사위 된 이는
區區俗緣催歸轍 속세 정분 못 이겨 산을 나왔나.
至今人讀虛菴傳 이제도 사람들 虛菴 전기 읽고서
濬元弘利傳神術」 元亨利貞 신선술을 전하네.
(*加川院 벽 위에 절구 두 수가 쓰여있는데, 그 시에 '鳥窺頹院穴人沒……'이라 하였다.)
旣文且威武」 문채 나고 위엄 있네.
爰有惡鳥爪嘴 ■ 나쁜 새가 발톱과 부리로 못살게 굴며,
呼群引醜盤嶺之藪」 고갯마루 숲에 제 무리를 모았네.
班師振族大旗還 큰 깃발 날리며 행진해 오니,
萬姓歡呼爭鼓舞」 온 백성 다투어 춤 추었네.
朝典午於笠 아침엔 마차병에 계급 올려주고,
暮調鼎於相府」 저녁엔 재상부서 정사를 보네.
(4) 해동악부체 원시들 중에는 보다 정교한 서사시의 형태를 취한 것들도 있는데, 임창택 악부 중 '何以辦' 원시는 그 중 하나이다. 이 편은 고려 毅宗 때 한 役夫의 고난상을 들어서 당시 정치현실의 혼란상을 비판한 것이다.
延福亭下酒爲池 연복정 밑은 술로 연못 이루고,
衆美亭前役夫飢 중미정 앞 잡역부 배 곯고 있었다.
役夫飢欲死 잡역부가 배고파 죽어가니,
役婦來餉之 아낙이 먹을 걸 해 왔네.
家貧何以辦 "집엔 쌀 한 톨 없거늘 어이 해 왔지,
無乃與人私」 나몰래 딴 남자와 사통한 것 아니냐?"
貌惡疇肯顧 "얼굴 못 생겨 뉘 돌아 보겠나요,
視妾髮盡削 제 자른 머릴 보아요.
忍毁父母體 부모 주신 몸뚱일 차마 일그려,
充君一日食 낭군 하루 끼니를 채워드리나,
妾髮亦有數 제 머린 이 하나니
明日將奈若 내일은 또 어쩔꺼나요."
蘆花未發鳧 驚 갈대꽃 피기도 전 기러긴 놀라 튀고,
普賢院裏風雨作」 보현원 아늑한 곳 비바람만 드셌다.
이 시의 주제는 결미에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주제를 의론하지 않고, 잡역부와 아낙의 대화로 이루어 진 野史의 공간 속에서 문제로서 나타나게 하였다.
해동악부체 원시들중 가장 서사성이 높은 것은 박치복 악부의 '山谷 ' 제 3수와 '報恩錦' 제 3수이다. 이 중 '報恩錦'은 洪純彦이란 驛吏가, 나중에 명나라 병부상서 石星의 부인이 된 倡樓 소녀를 도와주고 비단 선물을 받게되었고, 임진난 때에는 請兵 사절로 가서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기사하였는데, 제 3수의 편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서두에서는 客이 '報恩'이라 새겨진 비단을 본 구체적 장소를 들어 전설 구연의 요건을 갖추고, 客과 老翁과의 문답을 통해 사실적 긴장감을 갖게 하고 있으며, 客의 독백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켜 '화자(작가)-청자(독자)'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b. 종결부 '그대는 어찌 이것을 못 들었오, 귀가 솥귀처럼 꽉 막혔구려'(客胡不聞此 有耳如鼎 )는 客가 老翁간의 문답의 종결이면서 동시에 '화자(작가)-청자(독자)' 관계의 종결이다.
c. 실제 설화의 내용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행위주체를 변환하여 施惠의 능동성과 報恩의 피동성을 적절히 드러내었다. 또한 홍순언과 석성부인이 만나는 장면에서는 대화 속에 동작 묘사를 삽입하여 긴박감을 갖게 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해동악부체의 원시들은 서술방식에서 일정한 규범을 따르고 있다 할 수는 없다. 또 그것들 중에는 史中贊論이라는 영사시의 기본 성격을 그대로 지녀서 의론이 주가 되고 서사는 단지 인용·예증에 불과한 것까지 있다. 趙宗鉉(?∼1800)의 '三史異蹟'이나 李裕元(1814∼1888)의 '海東樂府'는 편술상으로는 해동악부체와 유사하면서도 원시가 서사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은데, 이것들은 해동악부체가 형식상의 규범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다. 하지만 해동악부체 양식은 본질적으로 서사성을 뚜렷이 지녀, 압축적 서사가요에서 보다 정교한 서사시에로의 발전양상을 보이고 있다.
6. 해동악부체 작품들에 나타난 세계관
해동악부체 작품들은 역사 흐름 속에서의 선비의 역할에 대하여 반성하여 史眼으로 志節觀을 지니고 있다.
(1) 심광세 악부에서 찬영되고 있는 지절은 관념적 명분이 아니라 현실적·구체적 인간관계의 덕목이다. 김유신의 휘하 장수로 적진에 단신으로 뛰어들어 전사하였던 丕寧子의 일을 서술한 '知己死'는, 지절을 '士爲知己死'로 해석함으로써, 관념적 명분과 역사와의 관계를 직접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허위의식을 벗어나 있다. 하지만 심광세는 현실에 대처할 행위의 기준을 설정하지 않고 있어, 그의 지절관은 處世術의 성격을 띤다. '情平山'은 부귀현달할 수 있었으나 鵠卵巖에서 禪道를 닦은 李資玄의 일을, '相公來'는 연산군 때 상공을 지냈으면서도 종종반정 때 무사할 수 있었던 金壽童의 일을 기사하여 明哲保身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하여 최영을 징계한 '攻遼誤'와 정도전을 징계한 '壽盡坊'은 '처신을 道로써 하지 않으면 상복을 바라기는 어렵다'(處身不以道 欲 常福 難矣)라는 주제를 지닌 것으로, 이때 도는 고정불변한 초월적 윤리가 아니라 상황윤리로 나타난다. 심광세는 '壽盡坊'에서 정도전의 被禍가 부귀공명을 바라는 인간 본래의 욕구를 억제하지 못한 처세의 잘못('壽盡坊 連北闕')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積善必有慶 積惡必有殃'이라는 史記의 應報觀과는 달리 개개인의 파멸을 본래적이고 때로는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운명관은 그가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권세 다툼에 휘말려 희생되었던 사실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심광세의 지절관은 처세술의 성격을 지니므로, 가치지향적 행위는 현실에서 보상받지 못하거나 중요한 의의를 지니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三帥寃'에서 심광세는, 고려 말 홍건적 토벌의 공을 세운 鄭世雲·金得信·李芳實이 金鏞의 흉계로 모두 주살되고만 사실을 들어 '옛부터 이런 것이 충신의사가 스러지고 마는 이유이다'라고 분개하고 있다. 李石亨의 일을 기사한 '丙子作'에서는 가치지향적 행위가 현실 속에서 아무런 의의를 가질 수 없다는 그의 회의가 특히 잘 드러난다. 이석형은 전라감사로 益山에 순행갔다가 成三問 등의 옥사 소식을 듣고 다락 머리에 "병자년 6월 27일 시를 짓는다. '舜 임금 때는 娥黃·女英의 斑竹이오, 秦 나라 때는 五大夫 작위 받은 소나무라. 비애와 영광 서로 다르니, 차고 뜨거운 모습 지으리'(虞時二女竹 秦日大夫松 縱有哀榮異 寧爲冷熱容)"라고 써서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首陽은 시인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하여 鞫問하지 않았다. 심광세는 이 사실을 두고, '心與事違'라고 自註하고 있다. 이 心과 事의 어긋남은 곧 개인(士)과 전체(세계)와의 부조화 및 인식과 실천의 괴리를 뜻한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이전 시대의 조화론적 세계관을 벗어난 근대 의식의 성장을 豫料하고 있다 하겠다.
(2) 임창택 악부 중 역사적 인물의 立言·立功·立德을 찬영한 시들은, 사소한 사실을 기사함으로써 그 인물의 행적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고려가 망하자 마을 낚시회에서 술잔을 던져 깨어버린 李養中의 일을 기사한 '破 翁'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러한 서술에서 주목되는 것은 위대한 인물의 삶이 영웅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모든 사람에게 유형(Typus)으로서 숙지되어 있는 삶의 단계(예를 들어, 신이한 출생과 성장, 고난의 극복)들을 차례로 거치지 않는다. 즉 영웅은 그가 서 있어야 할 발판을 상실하였다. 사소한 사건의 서술을 통해 정신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것은 세계 자체가 이미 문제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음을 뜻한다. 임창택 악부 중 가장 서사적인 '溫達婦'와 '嘉郞歌'의 원시들은 각각 溫達과 嘉實의 영웅적 삶을 서술하지 않고 平崗王女와 薛氏女의 절개를 서술하고 있어서, 그것들이 전혀 영웅서사시에 근접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溫達婦' 원시는 다음과 같다.
貌龍鍾 생김은 추하고
食行乞 빌어 먹었다네.
沸水之男名溫達」 불수 땅 사내 온달이라고 했지.
王宮女兒啼復啼 왕궁 계집아이 울기만 하니
兒長王常戱 울 때마다 왕은 놀려대었네,
兒長必作溫達妻」 커선 온달 아낼 삼겠다고.
兒年十六卜駙馬 공주 나이 열여섯에 부마를 골랐네.
卜駙馬 부마를 고르는데
兒不可匹夫」 필부는 안되지.
食言猶不祥 식언은 좋은 일 아냐
王常有言兒不忘 공주는 왕 하던 말 잊질 않았네.
山中楡皮可共采 느릅껍질 함께 채취한대도
貧賤亦何妨」 가난하다 천하다 어찌 꺼리리오.
古人貧病不相負 옛사람은 가난해도 병들어도 저버리지 않았으니,
前有溫達後有白雲婦」 전에는 온달부인이요 뒤에는 백운부라.
이처럼 임창택 악부의 원시가 시사성을 띠면서도 영웅서사시에는 전혀 근접할 수 없는 것은, 해동악부체의 성립 기반이 근대의식에 있다는 사실과 상관된다. 앞서 심광세 악부를 통하여 살폈든이, 해동악부체는 개인과 전체 및 인식과 실천 사이의 균열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성립되었기 때문에, 개인과 세계와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웅서사시의 면모는 나타날 수 없다.
(3) 이익은 '海東樂府'를 正史의 체제로 편술하되, 조선조는 名臣의 列傳을 기사하여 선비의 실천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선비의 실천을 강조한 대표적 예로는 '白衣持斧'와 '臣不死'를 들 수 있다. 전자는 禹倬이 忠宣王과 金文衍 누이 사이의 간음 사실을 알고 흰옷을 입고 도끼를 들고 규찰한 일을 기사한 것이다. 후자는 연산군이 연석에서 추태를 부리자 극력히 간하여 막은 成俊의 일을 기사한 것으로, 그 원시는 다음과 같다.
臣不死 "신이 죽지 않는다면
口欲吐言心欲碎 말을 하고 싶어서 마음은 부서진답니다.
臣死愈於生 신은 죽어도 좋으나,
臣若不言臣職 말을 하지 않는다면 직분과 어긋나요.
疑丞曠位其刑墨 승도 맡은 일 않으면 묵형 받건만
國不敢負恩敢背 제 어찌 국은을 저바리리요."
筍班鷺行儼方設 악공과 무녀들은 의젓이 열지어 있건만
白日座上生衆態」 웃자리 임금만이 별별 추태 다 부렸네.
臣老願一死 "신은 늙었으니 죽기를 바라요만,
袞職不補誠不耐 임금을 보좌 못함 진정 안될 일.
先王陟降臨在上 선왕이 하늘서 굽어보시리니,
至今彷彿聞珩 이제도 패옥 소릴 듣는 듯합니다.
死當歸侍白雲駕 제 죽어 구름 수렐 곁에서 모시리니
世事何以爲前對 닥칠 일 근심할 건 무어 있겠습니까."
堂堂忠憤縱見憚 충성 어린 분노를 꺼리면서도
其陰終日晦 왼종일 어둠은 걷히질 않았네.
臣不死 "신이 죽지 않는다면
君不樂 임금께서 아니 즐거우시리니,
地下下從降干輩」 지하에 내려가 간신들을 누르려오."
이익이 지절을 적극적 실천윤리로서 강조한 것은, 그의 시론이나 사론에서 나타나듯 총체적 인식을 중시한 점과 표리를 이룬다. 즉 그는 부분으로서의 개인이 전체로서의 세계(역사)를 파악할 수 없다는 자폐적 사고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세계 해석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지절관은 실천을 통해 개인과 전체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4) 안정복은 전쟁사를 기술하여 역사의 발전이 세력들 사이의 대립·투쟁에 의해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였는데, 이것은 역사의 흐름을 예악의 성쇠와 연관시켜 일원적으로 체계화한 이익의 경우보다 급진성을 띤다. 또한 그는, 개인(士)의 실천과 역사 발전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정하지 않은 이익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직접적인 것으로 보았다. 羅唐전쟁 때 당의 설인귀와 싸워 이긴 文訓의 일을 기사한 '泉城行'에서 안정복은, 보통은 나라가 망할 때 敵人奮才가 나타나는 법이라 하지만 문훈의 재능은 主賢臣良의 융성한 국운을 타고 나타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그는 개인의 재능이나 지절을 단순히 개인사의 차원에 놓인 것으로 보지 않고 역사 흐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박치복 악부에서 찬영되고 있는 선비의 지절은 尊周意識과 동일한 것이다. 이 존주의식은 표면적으로는 명에 대한 사대의식으로 나타나지만, 박치복은 명이 멸망한 뒤에는 英祖 이후 대내외 명분을 회복한 조선이 정통성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상 自主意識과 일치한다. 청나라군을 맞아 싸우다 죽어 명나라에서 요동백으로 봉해진 金應河의 일을 기사한 '柳下將'과, 戊年之役(광해군 10년 명의 요청으로 파병) 때 광해군이 姜弘立에게 '觀勢進退之計'의 밀지를 주었음을 알고 후비 柳氏가 취소하도록 극간하였다는 사실을 기사한 '後妃諫' 및 鳳林·麟坪大君을 심양까지 호위하였던 金汝峻의 존주정신을 기린 '金壯士' 등에서는 이러한 지절관이 특히 잘 나타난다.
박치복 지절관의 또다른 특징은 지절을 선비만의 덕목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후비의 덕을 찬영한 '進白粥'·'後妃諫'이나, 효자의 덕을 기린 '祭田雨'. 논개의 일을 기사한 '論介嚴', 무장의 존주정신을 기린 '金壯士', 역리의 報恩譚을 기사한 '報恩錦' 등은 선비 계층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의 지절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미 朴珪壽는 선비의 덕을 '孝弟忠順'으로 넓혀 보고, 선비를 農·工·商과 같은 職分의 의미로 파악한 바 있다. 박치복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선비를 직분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지 않지만, 선비의 입덕·입언·입공이 서민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게 됨을 분명히 한 점을 볼 때, 선비가 특수계층이 아니란 사실을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趙靜菴의 업적을 노파의 시점에서 기리고 있는 '山谷 '에서 잘 나타난다. 이처럼 선비가 특수 계층으로서 파악되지 않게 된 것은, 기존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해동악부체의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이상과 같은 지절관의 변화는, 조선 후기에 있어서 유학의 기능 변화와 상응한다. 자각한 선비들의 유학은, 체제 유지를 위하여 요구되는 초월적 윤리의 제시에 주력한 조선 전기의 유학과는 달리, 기존 질서를 내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조선이 주체적으로 근대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선비 계층은 기존질서의 해체와 더불어 독자성을 상실하고 역사 발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유학은 새로운 이념과 이상향의 제시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각성된 선비들의 주체사관을 기반으로 성립된 해동악부체가, 박치복 악부의 '報恩錦'과 같은 시에서 나타나듯, 점차로 설화적 흥미를 부각시키게 된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계 있다 하겠다.
7. 맺는말
이제까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악부체 한시의 여러 부류 중에서 양식으로서 성립·공인되었던 해동악부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성립되었던 시사적 배경을 검토하고 그것이 지녔던 형식·내용상의 특징을 분석함으로써 선비들의 자기성찰 과정을 살폈다.
조선 후기의 시론은 전기의 교양적-유교적 시관에서 벗어나 자의식적 사관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생활 속에서의 시문학의 자리 및 인식주관으로서의 시인의 자리에 대한 검토가 있게 된 것은 그러한 현상을 대표한다. 또한 후기 시는 자의식적 시관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 사실(時事)을 내용으로 취함으로써 '言志'의 창작과정을 따르거나, 목적의식을 배제함으로써 '緣情'의 창작과정을 따르게 되었다. 한국한시가 서사예술과 대립되는 서정적 시의 전통을 지녔음을 고려할 때, 창작과정상의 이러한 변화는 시의 본질적 변화를 뜻한다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언지'의 창작과정을 따른 시들 중에는 자유형식을 실험하거나 대화·우언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서정시의 틀을 벗어나 서사시에로 근접한 것도 있게 되었다.
후기 시의 변화를 촉발하고 또 그 내용을 이루었던 것이 악부제 시들이다. 한국한문학에서는 '악부-비악부[徒詩]'의 대립이 없었고 시사상 '고체-근체'의 기본대립만 존재하였기 때문에, '악부'는 중국문학의 경우와는 달리 시풍(style)울 가리키는 개념이었을 뿐이지 일반시와 구분되는 장르 개념도 아니었고 일반시의 한 양식 개념도 아니었다. 하지만 '악부'라 題되어진 시들은 고악부에의 의작성·민가적 풍격·악곡을 연상시키는 형태적 특성 중 하나나 혹은 둘 이상의 결합상을 지님으로써, 擬古樂府·小樂府·竹枝詞·雜歌謠·詠史樂府 등의 일정한 부류를 형성하였다. 그중 의고악부에서 주로 나타나는 고악부에의 의작성은 전기 시의 '고체-근체'대립에서 엄격히 지켜졌던 형식·풍격상의 규범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수법과 풍격을 낳게 하였다. 또한 小樂府·竹枝詞·雜歌謠에 있어서 민가풍의 대두는, 풍격면에서 전기 시에서와는 달리 典雅함 대신 俚함을 취하게 되고, '언지'와 '연정'의 두 창작 방식이 자의식적 시관을 바탕으로 정립되게 하였다. 특히 일부 죽지사 작품은 사실의 제시·서술을 촉발하였고, 악곡을 연상시키는 잡언 형태와 환운법을 취한 雜歌謠 시들은 자유형식의 실험을 통해 세계를 개념화하려는 시인의 자의식을 담고 있다.
해동악부제의 최초 작품인 沈光世의 '해동악부'는 직접적으로는 명나라 이동양의 영사악부에서 영향을 받아 나타났다. 하지만 그 작품은 서정시에 서사직 요소가 개입하게 되는 한국한시의 발전과정 속에서, 선비들의 역사의식이 성장해 가는 정신사의 흐름을 배경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의의가 크다. 심광세 악부가 지닌 두 특성, 즉 원시는 서술적 서정시란 점과 소서와 원시로 이루어진 각 편은 역사로서의 연속성을 지닌다는 점은 林昌澤의 '海東樂府'·李翼의 '海東樂府'·安鼎福의 '觀東史有感 樂府體五章'·李匡師의 '東國樂府'·李學逵의 '海東樂府'·朴致馥의 '大東續樂府' 등의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즉 그 작품들은 하나의 양식―海東樂府體라고 명명될―을 이루었다. 따라서 해동악부체는 시정신이 근대의식의 면모를 지니게 됨으로써 서정시에서 서사시에로 접근하게 되는 후기 한시의 변화와, 선비들의 자기성찰에 따른 주체사관의 확립 때문에 하나의 양식으로서 성립된 것이라 하겠다.
해동악부체의 원시는 서사적 요소를 지닌 영사시이므로 사실에 대한 의론과 이야기의 서술은 그 두 기본대립항이다. 각 작품의 원시들은 의론과 서술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데, 그 대립 양상에 따라 ①의론이 강하여 서정적 영사시에 머무를 한계를 지닌 시 ②의론은 없으나 서술의 성격도 약한 압축적 서사가요 ③의론과 서술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 ④보다 정교한 서사시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따라서 해동악부체의 원시들은 서술방식에서 일정한 규준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趙宗鉉의 '三史異蹟'이나 朴珪壽의 '鳳韶餘響絶句' 및 李裕元의 '海東樂府' 등과 같이 편술체제는 해동악부체와 유사하면서도 원시가 서사성을 결여하고 있는 '詩史' 작품들이 파생되어 나오기도 하였다.
해동악부체의 각 작품들은 사관으로 지절관을 지니고 있는데, 이 지절관은 곧 조선 후기에 있어서 선비들의 세계관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17세기초의 심광세는 개인(즉 선비)이 세계와 조화된 관계에 있지 못하다고 보아, 지절을 상황윤리로 파악하여 부분과 전체 및 인식과 실천 사이의 결렬을 문제시하였다. 이에 비하여 근기학파의 이익과 안정복은 세계 내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중시하고 지절을 절대적 실천윤리로서 강조하여, 부분과 전체 및 인식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자 하였다. 특히 안정복은 지절을 개인윤리로서만이 아니라 역사발전의 계기로서도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후 기존 질서의 해체와 더불어 '선비'는 계층으로서가 아니라 농·공·상과 같은 직분으로서 파악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19세기 중엽의 박치복은 지절을 선비만의 절대적 덕목이 아니라 서민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상대적 덕목으로 보았다. 이러한 지절관의 변화는 조선 후기에 있어 유학의 기능 변화와 상응한다. 전기의 유학이 체제 유지를 위하여 요구되는 초월적 윤리의 제시에 주력하였다면, 후기의 각성된 선비들의 유학은 기존질서의 내재적 비판을 통하여 조선의 주체적 근대화에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심광세가 지절을 상황윤리로 해석한 것은 선비들이 초월적 윤리의 승인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며, 이익과 안정복이 지절을 적극적 실천윤리로 강조한 것은 선비들이 조선의 근대화에 한 역할을 수행할 만큼 자기성찰을 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선비계층은 기존 질서의 해체와 더불어 독자성을 상실하여 역사 발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유학은 새로운 이념과 이상향의 제시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사정과 결부되어 해동악부체는 일정한 규범을 지닌 민족적 고전으로서 확립되지 못하고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창작미학과 양식의 분화면에서 한국한시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특히 본고는 조선 후기 시에서 자의식적 시관을 바탕으로 '言志'와 '緣情'이라는 두 창작과정이 정위되고 서정시에 서사적 요소가 도입되는 변화를 문제시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미처 다루지 못한 여러 해동악부체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검토하는 자리에서 더욱 면밀히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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