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 이 물음에는 두 가지 답이 있다. 물이 된다는 것과 봄이 된다는 것, 그것이다. 물이 된다는 것은 현상을 말하는 것이고, 봄이 된다는 것은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흐름을 아는 사람은 눈이 녹을 때 봄을 준비하지만, 현상만을 아는 사람은 봄 준비를 하지 못한다. 봄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은 봄이 왔을 때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므로 흐름을 알고 미래에 대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눈이 녹을 때 봄이 왔고, 그전 해에도 눈이 녹을 때 봄이 왔으며, 그 전전 해에도 눈이 녹으면 봄이 왔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온다. 이처럼 세월은 사계절이 끝없이 순환하며 진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사계절을 끌고 가는 두 힘은 더위와 추위다. 봄은 더위가 끌고 가는 계절이고, 가을은 추위가 끌고 가는 계절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사계절은 더위가 끌고 가는 봄과 추위가 끌고 가는 가을뿐이다. 여름이란 봄에서 가을로 바뀌는 전환기일 뿐이고, 겨울이란 가을에서 봄으로 가는 전환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른의 나이를 물을 때 “춘추(春秋)가 얼마입니까”하고 묻기만 하면 된다. 굳이 “춘하추동이 얼마입니까”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사이클을 가지고 순환하는 것이 사계절뿐만은 아니다. 모든 진행은 사이클을 가지고, 파형을 이루며 진행한다. 화살이나 총알처럼 직선으로 바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파형을 이루며 날아간다.
역사의 진행도 그렇다. 인류의 역사도 사계절처럼 순환을 하며 진행한다. 그런데 역사의 진행은 사이클의 범위가 크다. 500년 단위로 진행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역사의 사이클을 경험할 수 없다. 역사의 봄이 올 때는 봄을 대비해야 하고, 가을이 올 때는 가을을 대비해야 하지만, 사람은 역사의 흐름을 경험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기록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다. 역사학의 중요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역사학의 목적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파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옛것을 익혀 다가올 미래를 알아야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고 했다. ‘논어’ 위정편에 나온다. 스승은 오늘날 말로는 ‘리더’다. 리더는 미래의 시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사이클 모르는 인간
역사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진행한다. 그 흐름은 하나이기 때문에 과거의 흐름을 알면 미래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은 강물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일정할 수 없다.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알 수 있어도, 미래에 일어날 역사적 사실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사실의 밑바닥에 흐르는 역사의 흐름 그 자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과거의 흐름을 알면 미래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리더는 이런 흐름을 살펴야 한다.
역사의 흐름을 끌고 가는 두 힘은 몸과 마음이다. 이 두 요소가 역사를 끌고 가는 견인차다. 역사는 몸을 중시하는 시대와 마음을 중시하는 시대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지금 세상은 서구 문화가 중심이 되어 있는 시대이고, 마음보다 몸을 더 중시하는 시대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몸짱’ ‘얼짱’ 등의 말은 쓰면서, ‘마음짱’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몸은 물질이고, 몸에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므로, 지금은 물질주의 시대이고 자본주의 시대다.
몸 중심의 시대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치열한 경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한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경쟁할 때보다 더 빠른 때가 없다. 그래서 지금은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했고, 그 때문에 물질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경쟁이 너무 치열해지면 정신적으로 여러 문제가 생겨난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사람들에게는 친구 개념이 사라진다. 친구도 경쟁자일 뿐이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많은 친구가 겉으로는 축하를 하지만 속으로는 배 아파한다. 나에게 나쁜 일이 있을 때 겉으로는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기뻐한다. 친구들의 말도 잘 새겨보면 나를 저주하는 것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차츰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개하고 노는 사람이 자꾸 늘어난다.
몸을 중시하는 시대, 마음을 중시하는 시대
미국의 한 병원에서 ‘누가 환자를 간병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하는 조사를 했다.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가족이 간호하는 경우도 아니고, 전문 간병인이 간호하는 경우도 아니었다. 개 한 마리씩 붙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보다 개에게서 더 많은 위로를 받는다는, 사람보다 개가 더 좋은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싫어진다면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한다. ‘행복이란 남의 불행을 보는 것’이라고, 그리고 ‘불행이란 남의 행복을 보는 것’이라고. 이러한 마음으로는 경영이 제대로 될 수 없다. 남이야 불행하든 말든 상관할 것이 없다. 오직 나의 이익만 챙기면 된다. 오늘날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의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쟁해서 이기는 것, 거기에 사람의 목표가 집중된다면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원만히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은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를 할 때도 경쟁적이다. A라는 친구를 사귀다가도 B라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더 유리해지면 서슴지 않고 A를 버리고 B와 사귄다. 이는 기업과 기업, 국가와 국가 간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있어도 외롭다. 나도 그를 바꿀 수 있지만, 그도 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외롭고 불안한 마음은 결혼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예부터 몸보다 마음을 더 중시하고 끊임없이 마음을 챙겨온 민족이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이다. 한국인들은 싸울 때 “네가 인간이냐” “제발 인간 좀 되어라” 하고 꾸짖기도 한다. 서양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큰일이 난다. 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내가 너에게 원숭이로 보이는가?”하고 심각하게 반발한다. 모욕감을 견디지 못해 총알을 날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이 말을 할 때는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인간의 마음을 중시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 사람이 짐승처럼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으로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5000년 전부터 우리는 인간이 되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간의 마음을 되찾아 참된 인간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진짜 곰이 동굴에 들어가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곰은 짐승처럼 되어버린 인간을 말한다. 범이 실패하고 곰이 성공했다는 것은 동굴에서 사람의 마음을 챙기기 위해서 곰처럼 진득한 끈기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동굴에서 인간의 마음을 챙겼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때는 불교라는 동굴에서 인간의 마음을 챙겼고, 조선시대 때는 유교라는 동굴에서 인간의 마음을 챙겼다. 동굴에서 되찾은 마음은 모두가 다 함께 가지고 있는 ‘한마음’이다. 한국인은 예부터 한마음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한마음은 남을 나처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 영향으로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다. 이 따뜻한 마음이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 녹아 있다. 한국인들은 따뜻한 마음 때문에 과거에 치열하게 경쟁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경쟁이 중시되던 시절에 한국인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사람들의 차가워진 마음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된 지금, 한국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면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다. 어떤 외국의 자폐증 환자는 드라마 ‘대장금’을 일흔 번 본 뒤에 자폐증이 나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한류 붐을 일으키는 근본 이유다. 이 한류 붐은 영화나 드라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의 노래와 춤에도 나타난다. 한국인의 노래와 춤에는 ‘한마음’이 녹아 있다. 한국인들은 한마음으로 어울리기 좋아한다.
영고, 동맹, 팔관회 … 신바람 한국인
옛날 부여에서는 가을에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영고(迎鼓)’라는 모임을 가졌고, 고구려에서는 10월에 ‘동맹(東盟)’이라는 모임을 가졌다. 수도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했다. 동맹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로 계승되었다.
한마음을 회복해 모두가 하나 되고 싶은 한국인의 염원이 최근 잘 발휘된 예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응원전이었다. 한국의 승리를 염원하는 붉은 악마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인들은 신바람이 난다.
최근 부는 K-POP 열풍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가수들이 함께 모여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에는 독특한 것이 있다. 그들의 춤동작은 단순한 몸의 동작이 아니다. 그들의 몸동작에는 한마음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신바람이 있다. 온 세계가 그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류 붐이 이는 현상은 따뜻한 마음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신호탄이다. 눈이 녹는 것을 보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한류 붐이 이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사건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를 보면 이제 인류의 역사가 대전환점을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스링크의 트랙을 달리는 스케이트 선수들은 일직선으로 된 트랙을 달릴 때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리지만, 코너에 진입해 회전할 때는 속도를 줄이고 조심한다. 일직선을 달릴 때는 순위가 별로 바뀌지 않지만, 회전 구간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일등이 넘어져 꼴찌가 되기도 하고, 꼴찌가 매끄럽게 회전해 일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회전 구간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이기도 한 구간이다. 선수들은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매우 조심한다.
역사의 전환점을 통과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몸을 중시하던 시대에서 마음을 중시하는 시대로의 전환점에 들어와 있는 지금은 혼란한 시기다. 이 혼란의 시기를 잘 통과하기 위해서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만약 조심하지 않고 과거의 성공 방식대로 질주하다가는 패망하기 십상이다.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챙기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만 성공적인 미래가 보장된다. 마음을 챙기기 위해 경쟁속도를 늦추면 당장은 다른 경쟁자들에게 뒤처질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챙기는 일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당장의 뒤처짐은 많이 뛰기 위한 개구리의 움츠림 같은 것이고, 약을 먹은 뒤에 나타나는 어지럼증 같은 것이다. 그것은 참아야 한다. 위력은 전환기를 통과한 뒤에 나타난다.
예부터 한국인들은 마음을 챙기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왔다. 원효 대사의 화쟁사상(和諍思想)과 일심이문(一心二門)의 법문은 불법의 진수를 다했고, 퇴계 선생의 거경사상(居敬思想·공경하면 마음의 욕심이 적어지고, 이치에 밝아져 성학(聖學)의 도(道)를 배울 수 있다는 이론)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성리학의 문제점들을 해결했다. 이제 한국인들은 이런 능력을 다시 발휘해야 할 기회가 왔다. 이런 기회를 흘려보낼 수는 없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오고, 붙잡는 자에게만 온다.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붙잡지 않으면 그 기회는 떠나가고 만다. 눈이 녹는 것을 보고 봄이 온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과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마음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한번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매우 부끄럽다. 사회 각계각층이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다. 정치인들은 여야로 나뉘어 이전투구를 계속하고 있다.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학자들이나 선생들은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학자들은 각자의 학문 영역에 안주한 채 현실적인 문제에는 외면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인문학의 위기’라고 외치는 것은 자기들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궁여지책에서 나온 말이다. 선생들은 자기들의 존재 이유가 학생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학생들은 또 얼마나 학생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지, 이 시대의 부모들은 부모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녀들은 자녀 된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
공자는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어왔을 때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부모는 부모답고, 자녀는 자녀답게 되는 것(君君臣臣父父子子)”이라고 답했다. ‘논어’ 안연편에서다.
君君臣臣父父子子
4·11 총선거 결과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결국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잘못된 나라를 제대로 된 나라로 바꾸는 것이 정치다. 바른 나라란 국가 구성원들이 각각 제 역할을 할 때 찾아온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구성원들은 제대로 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그런대로 꾸려가고 있는 것은 기업인들과 문화예술인들 덕분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서구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것이 그들의 성공비결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나타나 있는 병폐 중 가장 큰 병폐는 정신분열증 현상으로 생각된다. 개인의 삶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튼튼해야 하듯이, 나라의 안정이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도 그 국민들의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튼튼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개인은 개인대로 가치관의 혼란 때문에 정신적 안정을 찾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심각하다. 국가 단위로 보더라도,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해 평온할 날이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부딪치고, 좌파와 우파가 충돌하며, 각종 종교단체들이 난립해 교세 확장을 위한 총력전을 펼치기 때문에 국민은 정신 차리기 어렵다. 지금 우리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마음으로 뭉치던 우리의 전통을 빨리 회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모든 국민을 한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는 ‘현묘한 도’가 있었다. 그 현묘한 도를 풍류라 부르기도 했다. 그 내용을 해운 최치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풍류가 모든 사람을 교화시키는 원천이다. 그 내용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현묘한 도는 유불도 삼교를 다 포함할 수 있다. 이 현묘한 도를 가지면 모든 생명체에 두루 접하여 그들을 올바른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 집에 들어와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자연의 상태로 유유히 살며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에 나온다.
우리의 현묘한 도가 유불도 삼교를 포함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유불도 삼교만을 포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면 오늘날 모든 가르침을 다 포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현묘한 도를 빨리 회복해야 한다. 이 현묘한 도는 우리의 유전자 속에 녹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되찾을 수 있다. 이 도를 되찾기만 하면 오늘날 난립하고 있는 여러 가치관을 하나로 융합하여 우리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고, 나아가 온 세계를 안정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찾아온 기회를 붙잡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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