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시 양식의 소통성과 그 양상

醉月 2011. 12. 20. 11:04

1. 시작하는 말
전근대의 한자문화권내에서 漢詩는 정서의 환기와 정화라는 문학 본래의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와 외교, 교육 등 다방면에서 역할을 수행한 사회적 公器였다. 이처럼 한시가 여러 방면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확장된 것은 한시문을 통해 사회적 통제를 시도하려는 지배층의 의지에 따른 제도화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즉 取才를 위한 수단화, 곧 科擧制 실시가 그것이다. 특히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과거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한시문 숭상 풍조를 조장하고 한시를 짓고 향유하는 계층을 더욱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런데, 한시는 다른 문화권의 시가 양식에는 보이지 않는 뚜렷이 다른 기능을 더 가지고 있었다. 이 또한 과거제의 시행과 한시문 숭상 풍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즉 사람 사이의 관계를 트는 交遊의 수단으로 쓰였고, 나아가 사람 사이의 의식상의 단절이나 차이를 극복하고 심적 갈등이나 고통을 해소하는 疏通的 역할을 수행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소통적 역할을 하는 한시 양식으로서 聯句와 唱和에 의한 작시 방식을 주목하였다. 특히 창화 방식은 한자문화권내에서 지식인들 사이에 '酬唱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시가 시인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적어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대중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라서 질적 수준이 낮은 시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중국의 한시문화를 받아들여 향유하였다. 고려 광종 때에 실시한 과거제는 한시 문화가 이땅에 정착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조선시대에 이르면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문장이란 뜻의 '東文'을 의식할 정도로 중국에 버금가는 한시 문화를 이룩한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 생산된 개인 문집을 보면 贈答 등의 酬唱詩나 學詩的 성격이 강한 和韻詩가 태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擇韻의 수월성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작품들은 문학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수창시나 화운시가 본래적 성격과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본고는 한시 작품의 질적 수준을 가늠하는 한시 작품 자체의 문학성 탐구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한시를 짓게되는 과정과 그렇게 하여 지어진 시의 내용을 살피고 그것들이 끼치는 영향과 효과를 고찰하는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본고는 먼저 연구와 창화의 성격과 그 소통성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 구체적인 양상을 한국한시사상의 인물과 작품들을 예로 들어서 살펴보되, 보다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서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임의로 선택하여 살피고자 한다. 곧 시를 매개로 한 노소간의 소통, 양반계층과 천인간의 소통, 남녀간의 소통 등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 시를 고찰해본다.

 

2. 聯句와 唱和 양식의 소통성
전근대에 있어 한시는 한 사회를 주도하는 중심적인 양식이었다. 사대부 계층에 있어 그것은 높은 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심적인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상사에 있어서도 사람을 만나거나 헤어질 때, 또는 잔치자리에서 한 수 읊을 필요가 있을 때, 누가 운자를 내면 한 구 정도는 짝을 맞출 수 있어야 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이루어지던 한시 양식으로 聯句와 唱和의 방식이 있었다.
이 장에서는 연구와 창화 방식의 성격과 그것의 소통성을 살펴보도록 한다.

 

2.1. 聯句
간략하게 말해 연구는 두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한 구 또는 몇 구를 지어서 한 편의 시를 완성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시체는 漢 武帝가 柏梁臺에서 신하들을 모아 놓고 한 구씩 짓게 하여 26구를 이룬 것에서 유래한다. 연구시는 두 사람 이상이 한 구에서 네 구에 이르기까지 지어서 한편을 이루게 해야한다는 것 외에는 일반적으로 고정된 격식이나 통일된 주제 사상이 없다. 연구시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대체로 다음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진다.

 

(가) 한 사람이 각기 1구 1운으로 짓는 방법.
(나) 한 사람이 각기 2구 내지 2구 이상을 1운으로 짓는 방법.
(다) 한 사람이 4구씩 지어 한 편의 시가 되게 하고, 나누면 스스로 한 편의 시가 되게 하는 방법.
(라) 한 사람이 먼저 한 구를 내면, 다음 사람이 거기에 대를 맞추어 한 연을 이루게 하고, 다시 한 구를 낸다. 앞사람이 다시 거기에 대를 맞추어 한 연을 이루게 하고, 다시 한 구를 낸다. 이런 식으로 반복 순환하면서 한 편의 시를 이루게 하는 방법.

 

이중에서 (라)의 방식이 훗날 거의 상례가 되었다. 이 방식은 나머지 세 가지 방식에 비해서 서로 상대를 밀어주고 이끌어주는 힘이 강하면서도 같다. 이런 때문에 다른 방식에 비해 많이 지어지고 연구시 형식의 상례가 되기에 이른 것 같다.
그런데 연구시는 짓는 이들이 서로 의기투합하고 필력이 서로 비슷할 때 가능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연구시는 동료들 사이에서 많이 지어졌으며, 서로의 흥취를 돋울 때 많이 활용하던 양식이었다. 다음 예시를 통해서 연구시의 성격의 일단을 살펴보자.
(1)
步出荒林下晩洲(東岳),
거친 숲을 걸어나와 저녁 물가에 내려가니,(동악)
淺灘搖月席邊流(月沙). 옅은 여울에 달 흔들리는데 물가에 자리하다.(월사)
杜鵑不管終宵哭(鶴谷), 두견새 제멋대로 밤새도록 울어대니,(학곡)
海谷仍知特地幽(東岳). 해촌 골짜기 매우 그윽한 곳임을 알겠네.(동악)
坐久醉顔臨水醒, 오래 앉아 있다 취한 얼굴 물에 임하니 깨이고,
夜深眠鷺伴人留(月沙). 밤 깊어 잠든 백로 사람과 함께 머무르네.(월사)
然共占忘機樂 소연히 함께 점을 치며 망기의 즐거움에 젖으니,
可得濠梁續勝遊(鶴谷) 濠水가의 즐거운 놀이 이을 수 있을진저!(학곡)
 
(2)
只恨坐中無石洲,
한스러운 것은
좌중에 권석주가 부재하는 것이니
東 共是舊風流.(月沙) 예적의 동사시절 함께 풍류를 벌이던 이들일세.(월사)
梨花開處月華滿, 배꽃이 피는 곳에 달빛도 가득하고
蜀魄啼時山意幽.(東岳) 두견이 울어예니 산도 더욱 그윽해라.(동악)
遞江城不可致, 아득한 그 때의 강성을 이르게 할 순 없으나
團圓村酒暫相留.(鶴谷) 둥그런 달 아래 촌술로 잠시 머무르네.(학곡)
論文未覺春宵盡, 글 짓다 봄밤이 다 새는 지도 모른 것은
似龍灣秉燭遊.(月沙) 용만에서 등불 잡고 노니던 때와 같아라.(월사)
 
이 연구시는 東岳 李安訥(1571-1637)의 東谷山莊에서 月沙 李廷龜, 鶴谷 洪瑞鳳이 모여 함께 지은 것이다. 산장 주인인 동악이 먼저 한 구를 지어서 봄밤의 정취를 읊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어 월사와 학곡이 비슷한 격조로 한 구씩 지어 잇고, 또는 두 구씩 돌아가며 지어 두 수를 완성하였다. 배꽃이 피고 달빛이 가득한 산장 근처 계곡의 봄밤의 정취가 잘 드러나 있는 시다.

 

그런데 이정구, 이안눌, 홍서봉, 권필 등은 모두 시와 문장으로 입신한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 문장가로 1602년 明의 사신 顧天峻을 접반하였던 인물들이다. 이 때 월사는 원접사였고, 동악과 학곡은 종사관이었으며 石洲 權 은 제술관이었다. 때문에 두 번째 시의 수련과 미련에서 월사가 그것을 환기한 것이다. 당시 석주는 월사의 추천으로 포의로서 접반에 참가하는 영광을 입었고, 동악은 '崔顥題詩黃鶴樓'라는 시구가 들어 있는 율시 한 수를 지어 우리 접반원의 시적 수준을 인정하지 않던 명사 고천준의 오만을 꺾고 나라의 모욕을 면하게 했다고 한다.

 

지금 이 밤이 권필이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 때 용만(의주)에서 접반에 대비하면서 밤새워 수답을 하던 밤과 같다는 것이다. 시를 매개로 의기투합했던 지난날을 추억한 시다. 이 연구시는 동료들간의 봄밤의 宴飮席에서 즉흥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동류 집단내의 정의를 확인하고 우의를 다지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구성원 각 개인의 서정을 동료들과 공유하면서 심정적 동일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런 점은 그것이 동류집단 내라는 것에 국한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간에 심정적인 소통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연구시는 대체로 연음석에서 유희를 위해 지어지고 판이 벌어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읊어지기 때문에 작품적 성취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많은 시 양식이다. 그리고 작시 구성원들간의 필력이 엇비슷해야 수준작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기 어려운 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연구 양식에 의한 작시는 작시 구성원들의 정의를 증진하고 同道的 우의를 강화하면서 그들간의 심정적 동일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연구 방식에 의한 작시 역시 소통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2.2. 唱和
창화는 시를 지어 酬答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唐代에 들어 생긴 양식으로 高適과 杜甫, 두보와 裵迪, 두보, 王維, 岑參이 賈至의 시에 화답한 것에서 그 유래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상대의 원시의 운을 따서 짓지는 않았다. 상대가 지은 시의 운을 따서 서로 주고받는 시 짓기 습속을 일으킨 것은 중당의 元 과 白居易, 그리고 만당의 皮日休와 陸龜蒙 간의 酬答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때부터 화운 방식의 창화가 크게 성해 송대 이후로 사대부들간의 사교의 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이상에서 창화의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 原韻을 사용하지 않고 화답하는 방식과, (나) 화답하고자 하는 작품의 운을 따서 짓는 방식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가)의 경우는 상대가 작품의 운을 의식하지 않고 화답하는 시 양식을 말한다. 대체로 이것은 원작에 대한 和意的 성격이 강하다. 이런 경우는 贈答·送別시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증답시와 송별시는 당대에 들어서부터 성황하였는데 이는 시인들이 시를 교제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작시 능력을 取才의 수단으로 삼는 제도적 장치 곧 과거제의 실시와 더불어 시문을 숭상하는 사회풍조의 형성 기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원시의 韻에 화답한 시라하여 和韻詩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또 아래와 같이 세 가지 방식이 있다.
(1) 次韻 : 시를 화답할 때 반드시 원시 구말의 압운에 따라서 짓되 그 차례를 따라야 하는 방식. 이는 서로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과 같으므로 步韻이라고도 한다.
(2) 用韻 : 원시 구말의 압운을 따라 짓되 차례를 무시할 수 있는 방식.
(3) 依韻 : 원시의 운자와 같은 운목에 속하는 운자를 써서 짓는 방식.

이상의 화운시의 세 방식 중에서 형식상 차운시가 가장 많이 원시의 형식에 한정됨을 알 수 있다. 화운시의 예를 들어서 그 성격의 일단을 살펴보자.
念念如遊劫外春, 생각 생각이 淨土에 노니는 것 같으시고,
和光何足嘆因循. 빛과 어울리거늘, 어찌 머뭇거림을 탄식하오.
不唯養素資靈覺, 바탕을 기름이 신령한 깨달음에 의할 뿐 아니라,
況復說玄服遠人. 게다가 玄理를 말하여 멀리 있는 저를 조복시켰소.
善繼祖風行正道, 조사의 풍도를 이어서 정도를 걷는다면,
誰嗟叔世溺邪津. 뉘라서 말세의 삿된 길에 빠진다 탄식하겠소.
在家已得忘家久, 집에 있으면서 집을 잊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眞樂軒中樂日新. 진락헌에서의 즐거움 날마다 새로우리다.

(原韻)
伴食黃扉已八春, 無功可立 因循. 若爲去作社中客, 應導何曾林下人.
四軸初成傳異迹, 百篇時出指迷津. 遙知一榻香烟畔, 恒見靈山面目新.
앞 시는 고려시대 白蓮社 第四代 眞淨國師 天 이 당시 侍中이던 李藏用이 백련사에 들어오겠다는 뜻을 보인 시에 화운하여 답한 시다. 아래 부기한 原韻은 이장용의 원시이다. 천책 시의 운자가 春, 循, 人, 津, 新인데, 원시의 운자를 그대로 쓰고 순서도 바꾸지 않은 점을 보면 이 시는 차운시임을 알 수 있다.

 

원시의 뜻을 참조할 때, 이 시는 入社의 뜻을 보인 이장용의 인품과 말씀, 행위 등으로 보아 그는 재가인이지만 출가인과 다름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하여 상대를 칭송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자에게 현리를 말해주었다고 하여 한층 치켜세우고 있다. 제5구는 화자의 시적 대상에 대한 칭송으로 보느냐, 아니면 화자의 견해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곧 전자를 따르면, '그대가 조사의 풍도를 잘 계승하고 있으니 누가 그대를 보고 삿된 길에 빠졌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석되며, 후자의 경우는 '세속에 있더라도 조사의 풍도를 따라 정도를 걷는다면 누구도 그대가 삿된 길에 빠졌다고 비난할 수 없다'는 언명이 된다. 따라서 전자는 칭송의 의미가 들어가고 후자는 권면의 뜻을 유도한다고 하겠다.

 

어쨌거나 이 구는 '조사의 풍도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언명은 공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8년이 되도록 조정을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원시의 작자 이장용의 환로에 대한 회의에 대해 일종의 가르침과 답안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장용의 환로에서의 갈등에 대해 어디에 있거나 공과 비난에 크게 얽매이지 말고 조사들의 가르침대로 정도를 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장용의 심적 갈등과 고통이 국사의 따뜻한 다독임과 굳은 언명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예지할 수 있다. 그것은 원시 제5,6구에, 이 이전에도 이장용은 천책과 적지 않은 수답을 통해서 자신의 속내를 전하고 천책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진술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방식과 예시를 통해서 드러난 화운시의 성격을 정리해보자.

 

화운시는 먼저 다른 이가 지은 원시의 운을 사용하여 짓는 시 양식이다. 이처럼 화운시는 출발부터 그 형식적 제약을 받으며, 따라서 작자의 用韻상의 개성이 줄어든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화운시는 문학 형식이 주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데 그 태생상의 결함을 안고 출발한다.

 

특히, 應制라든가 윗사람의 呼韻에 따른 應酬 등 강제된 擇韻은 그 작시의 형식에 제약을 가함은 물론, 그 작품의 내용과 주제사상에도 어용적 폐단을 끼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화운자가 순수한 동기와 주체적 입장에서 원작자와의 교통을 목적으로 택운하는 것은, 그것이 문학성을 끌어올리는데 다소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동일한 형식 속에 서로의 관심을 넣는 것이 되므로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고 초점화하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관심의 공유와 초점화를 통해서 의기투합할 수도 있고, 시공간을 초월한 교유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택운은 작시의 형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내용 및 주제사상의 선택과 동시적으로 관련이 되기도 한다.

 

한편 작시의 목적상, 화운시는 원시의 작자와 사귀거나 이미 형성된 친분을 확인하고 다지기 위해서 쓰는 시 양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화운시는 交遊詩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서로간에 화운한 것이 한 두 번으로 끝난 것이라면 그 화운시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내용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적인 화운을 통해서 교유가 지속된다면 그 화운시들은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는 심적 교유의 수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들간의 교분은 더욱 깊어지고 정의도 더욱 돈독해질 것이다. 그리고 위의 천책과 이장용처럼 서로에게 가름침과 깨달음의 계기를 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화운시는 소통적 성격의 일면을 가진다고 하겠다.

 

창화는 상대의 운을 사용하건 하지 안 하건 간에 모두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지어지는 작시 방식이다. 이런 태생적 성격은 작시에 임하는 자에게 자신과 원시의 작자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때문에 시의 성격은 서정적이기보다는 서사적 성격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둘 사이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관련된 이야기들을 시화하는데 중심을 놓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창화에 의한 작시는 교유의 수단으로 사용하기에 아주 적합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창화에 의한 작시 방식은 소통지향성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방식이라 할 것이다.

 

3. 한시의 소통적 매개성과 그 양상
3.1. 노소간의 소통과 忘年交
옛 시화나 문집에서 노소간의 교유를 다룬 시문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때론 연륜상 현격한 차이에도 그들간에 교유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벌어진 呼韻에 대한 應酬의 이야기 또한 가끔 볼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대체로 어린아이의 영민한 재주와 기발한 시적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6세기 후엽의 시인 林悌와 어떤 재상간에 벌어진 다음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에 속한다.
백호 임제는 회진 사람이다. 어릴 때 놀러나갔다가 얼굴이 아주 예쁜 여자 종을 만났다. 백호가 그녀를 보고 좋아하여 뒤를 밟아 쫓아가 어떤 양반집에 이르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백호가 바깥채에 이르렀을 때 주인이 종을 시켜 그를 끌어다가 섬돌 아래 오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어떤 아이이기에 감히 당돌하게 우리 집을 침범할 수 있단 말이냐?' 하였다. 백호가 이실직고하고 감히 위엄을 무릅쓴 행동을 사과하였다. 주인이 '내가 부르는 운에 따라서 네가 곧 시를 지을 수 있다면 죄를 면해 주고 그리 못하면 매를 때리리라.'라 하고 운을 부르니 백호가 곧 응답하기를 아래와 같이 하였다.

 

聞道東君九十薨, 듣자니 어른께서는 구십에 돌아가신다 하시니,
惜春兒女淚盈升. 봄 계집아이 눈물을 되로 쏟을까 안타깝습니다.
尋香狂蝶何須責, 향기 찾는 미친 나비를 어찌 나무라시는지요?
相國風流小似 . 상국 어른의 풍류가  나라처럼 작군요!

주인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여종을 그에게 주었다.
이 예화는 홍만종이 {詩評補遺}에서 임제의 시적 재능을 말하기 위해서 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임제는 어릴 적부터 거침없는 성격과 뛰어난 응수의 시적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예화는 노인과 소년의 관계를 시적 매개를 통한 그들간의 소통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표면적으로 이 이야기는 소년 임제가 미모의 여종을 쫓다가 그 여종의 주인집인 대가집을 범해 주인으로부터 벌을 받을 처지였으나 그의 시적 기지로 풀려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임제의 시를 살펴보면 相國인 주인에 대한 풍자가 매우 심각하다. 90이 되도록 살아서 어린 소녀를 독차지하는 것은 그 소녀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노인이 노욕을 부리며 天理를 어기는 것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 하겠다. 때문에 노인의 노욕에 비하면 소년이 소녀를 쫓는 것은 마치 향기를 찾는 나비와 같은 것이니 전혀 나무람의 대상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 나라의 재상인 주인은 이런 소년의 춘심을 살피지 못하고 나무라기만 하니 너그럽기는커녕 속 좁고 욕심 사나운 노인네와 같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욕에 가까운 풍자이다. 그런데 주인은 소년 임제의 시를 보고서 처음 혼을 내주려던 마음을 바꿔 기특하게 여기고 그 여종을 내주고 있다. 이는 주인이 임제의 시속에 투영된 그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 소년 임제의 춘심과 상국인 주인의 위엄이 만나 문제를 야기했으나 임제의 시 한 수로 상국의 위엄이 관용으로 바뀌면서 소통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통시대 한자 문화권내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한시를 할 줄 아는 능력이 출세의 바탕이 되고 그로 인해 계층적 위상이 결정되었던 사회구조와 그 문화에 기반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소년 임제가 보인 행위와 시 한편이 소년과 한 나라의 재상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좁혔을 뿐 아니라, 상국에게 위엄만이 아닌 관용성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준 그 소통적 의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예화와 비슷한 이야기로 시화나 개인의 체험록에 전하는 것이 적지 않다. 어린이 洪瑞鳳과 노인 李恒福 사이의 이야기나 어린이 閔仁伯과 사헌부 관리 사이에 이루어진 呼韻 應酬에 관한 기록 등도 여기에 든다고 하겠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성향이 서로 맞는 이들끼리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가끔 만나 시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기던 관행이 있었다. 나이가 많은 쪽에서 이를 忘年交라 하였다. 한 예로 17세기초의 시인 鄭斗卿(1597-1673)은 손자뻘 나이의 시비평가 洪萬宗(1643-1725)과 친했고 그를 시제자로 두었다. 한번은 폐병으로 칩거하던 홍만종을 다른 시벗들과 함께 방문하여 위로하며 풍류를 즐긴 일이 있었다. 홍만종의 추억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내가 전에 폐에 병이 있어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東溟 鄭노장(鄭斗卿)께서 休窩 任有後(1601-1673)와 더불어 방문하셨다. 이어 栢谷 金得信(1604-1684)과 晩洲 洪錫箕(1606-1680)도 왔기에 술을 내오게 하고 서너 명의 여악(女樂)을 불러서 노래를 부르고 현악기를 연주하도록 하였다. 술자리가 익어가자 여러 공들이 시를 짓거나 노래를 하며 즐기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후로 6, 7년 사이에 동명선생과 휴와가 죽고 만주와 백곡은 시골땅을 유전하게 되었다. 하루는 만주가 찾아와 율시 한 수를 지어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吾 行樂向來多, 옛적 우리들이 놀던 일 풍성하기도 하였지,
玄 蒼顔間綺羅. 검은머리 하얀 얼굴 속에 기생들도 끼어 있었네.
栢谷風標元不俗, 백곡(김득신)의 풍모와 인품 본래 속됨이 없었고,
豊山才格亦同科. 풍산(홍만종)의 재주와 격조 또한 그들과 같았지.
波瀾浩蕩任公筆, 파도처럼 호탕했던 임공(임유후)의 필력,
天地低昻鄭老歌.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렸던 정노장(정두경)의 노래.
聚散存亡還七載, 모이고 흩어진지 어언 7년,
逢君今日意如何. 그대를 만난 오늘의 심사 어떠한가?

 

옛 일을 회고하고 지금의 일을 가슴아파하는 정이 시속에 넘쳐흘러 읽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떨구게 한다.
이 글은 홍만종이 20대 때, 70대의 정두경, 60대의 임유후, 김득신, 홍석기 등이 만나 정담을 나누고 시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감상하던 시절의 한 장면과 6,7년 뒤의 일을 추억한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 만주의 시는 70대의 노인과 역시 이순을 넘긴 60대의 노인들이 손자와도 같은 새파란 20대 청년과 통정하며 한판 놀아본 광경을 회상하여 인생사 무상함을 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놀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시란 매개체였다. 홍석기가 지은 시에서 재주와 격조면에서 볼 때 홍만종은 백곡과 같다고 하여 그들 무리 속에 홍만종을 당당히 넣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간의 친교에서 나이가 크게 좌우한 것 같지는 않다. 시가 그들 사이에 놓여있던 연륜상의 장벽, 그리고 그에 따른 의식상의 장벽까지도 허물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시를 매개로 한 모임에서 그들은 이미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사실 홍만종은 정두경이 의발을 전해줄 만큼 아끼던 제자였다. 그런 때문에 70대의 노인이 제자를 문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연배가 다른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노는 일은 상대적으로 어른들의 위엄이 약화된 오늘날에도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모임이 시란 매개체가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한편 망년교는 시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때로는 적극적인 詩社적 모임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선조 때의 시인 李安訥(1571-1637)은 시우 權 과 함께 당시 시명이 있던 鄭 (1533-1603)을 따라서 湖山간을 노닐며 수창을 하였고, 선배 詞宗이었던 尹根壽(1537-1616), 李好閔(1553-1634) 등과 수창하며 망년교를 하였다. 한편 이안눌은 이호민, 李廷龜(1564-1635), 車天輅(1556-1615), 권필, 홍서봉 등과 함께 자신의 거처와 그 곁인 東岳詩壇에서 시사 모임을 자주 갖고 시적 교유의 폭을 넓히기도 하였다.

 

3.2. 양반과 천인간의 소통과 교유
신분적 차별이 있었던 조선시대 천인 신분으로 한문을 익히고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바탕이 절륜하여 상전의 어깨 너머로 또는 상전이 독서하는 거처 문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글자를 깨치고 能詩자의 반열에 든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이러한 작시 능력을 바탕으로 양반 사대부들과 수답을 하면서 그들의 능력과 처지를 인정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시화나 만록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기의 시화집엔 白大鵬과 劉希慶이 단골로 등장한다. 특별히 유희경의 경우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있던 柳夢寅에 의해 입전될 정도였다. 다음 기록은 유몽인이 지은 [劉希慶傳]의 주요부분이다.

 

劉生은 이름이 희경이고 호는 村隱으로 서울의 한미한 가계 출신이다. 손수 하는 일이 없고 오직 시와 禮를 일삼아 늙도록 다른 기술로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 비록 곤궁하여 굶으면서도 오히려 청렴하였다. …(중략)…

 

서울 장안 북촌에 淨業院이 있다. 그 땅이 후미지고 산이 가까워 맑은 시내 한 줄기가 바위 골짜기 사이를 흘러 나왔는데, (유희경은) 그 땅을 사서 살며 복숭아 살구나무 너 댓 그루를 직접 심고 돌을 쌓아서 작은 臺를 만들어 놓고 매일 그 위에 앉아 지내며 그곳을 枕流臺라 이름지었다. 그 대와 관련된 시편 약간 수가 있다. 오늘날의 文士인 車天輅, 李 光, 申欽, 金玄成, 洪慶臣, 許筠, 任叔永, 曺友仁, 成汝學 등이 그 대에 올라 시를 짓거나 혹 그의 시를 보고서 화운하였으며, 혹 그 풍모를 듣고서 수증하기도 하여 여러 편을 묶어서 한 질을 이루었다. 모두 글로써 세상을 울리는 사람들이다.

 

내가 유생과 면식이 있은 지 이미 40년이다. 처음 장의동 청풍계에 노닐 때 마침 李潑의 집이 청풍계변에 있어 유생의 淸疎함을 아껴서 그 집에 끌어들였다. 나는 洪永弼과 함께 영경전 앞에서 유생을 만났는데 홍영필이 말하기를 '자네 유생을 모르는가? 이 사람은 시인이다. 우리 백숙부들께서 막역의 교제를 하고 있지. 자네는 어찌 이리 늦게 그를 보게되었는가!' 하였다. 홍의 백숙부는 곧 시단의 哲匠들인 洪天民과 洪聖民이다.

 

나는 유생의 사람됨을 기이하게 여겼는데, 그는 雅朗恭謹하고 古禮에 밝았으며 시에도 능했다. 비가 온 뒤의 청산을 가리켜 운자를 불러서 시를 짓게 하니 유생이 응하여 대구하기를 '바위는 이끼를 띠어 늙고, 산은 비기운을 머금어 푸르다. 石帶苔痕老, 山含雨氣靑'라 하였다. 나는 그 시가 매우 淸麗함을 아껴 늘 심곡을 왕래하였고 이로부터 꽤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 이제 그 두루말이를 모아서 내 글을 구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간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 두루말이를 얻어 보니 생이 글과 학문을 좋아함이 칠십에도 오히려 독실하니 여기서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다.

 

내 비록 不 하나 스스로 겸손해하지 않고 망령되게 불후를 기약하면서 생에게 詩나 序, 記를 써서 주지 않고 傳을 지어 주는 것은 유생의 志業을 영원토록 전하기 위해서이다.

천예 출신이었지만 유희경이 사대부들과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시에 능하며 古禮에 밝은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시에 능하고 고례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주를 아낀 사대부들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는 思菴 朴淳에게서 唐詩를 배우고 일가를 이룰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예에 관한 것은 洪可臣, 安敏學 등에게 {家禮}를 배우고, {儀禮經傳}과 {杜氏通典}, {丘氏儀節} 등을 참고하였으며, 圖籍을 살피고 선유들이 남긴 논의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때문에 상이 나면 누구나 집례를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유희경의 예에 대한 박식함과 집행 능력은 유가이념을 통치수단으로 삼던 사대부들이나 그것의 내면화와 실제화를 추구하던 禮學者(도학자)들에게 환영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위의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사대부들과 돈독하고 폭넓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의 작시 능력 때문이었다. 유몽인은 그의 시가 매우 淸麗하여 아끼게 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유희경의 거처를 늘 찾았다고 하였다. 차천로, 신흠, 이수광, 허균 등 당대를 대표하던 시인 문장가들이 그의 거처를 찾고 그와 수창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를 매개로 하여 유희경은 사대부들과 신분의 벽을 넘어선 교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고담하고 청렴한 인격과 태도가 커다란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신분을 뛰어 넘는 교유 중에는 사대부와 승려간의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儒家 사대부와 佛家 승려가 교유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 알다시피 조선조는 불교를 이단으로 보고 신유학인 성리학적 이념을 내세운 유가 사대부들에 의해서 건국되고 지배된 사회였다. 승려는 신분마저 최하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친불교적이었던 세종의 시대와 불교신자였던 세조의 시대, 그리고 명종대의 승 보우와 더불어 문정왕후가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를 빼고는 불교가 지극히 억제되었던 조선조에서 사대부와 승려가 내놓고 교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대부와 불교 승려들 사이에 교유가 적지 않았는데, 그 교유의 가장 강력한 끈은 한시였다. 승려들이 사대부를 찾아 시권과 시축을 내밀면 사대부들은 거기에 시를 지어 주면서 자신의 속내를 전하곤 하였고, 승려들 중에 시에 능한 이들은 그들의 시에 차운을 하거나 수답을 하면서 이념을 초월한 교정을 나누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임진왜란 직후에 주로 활동했던 李安訥(1571-1637)과 당시 詩僧으로 이름이 있던 雲谷  徽선사와의 시적 교유를 들 수 있다.

 

이안눌과 충휘의 교유는 이안눌의 금산군수시절에 시작되었다. 금산관아 공관으로 어느 가을날 충휘가 국화를 보냄으로써 시작된 이들의 교유는 서로가 머무는 곳을 오가며 酬答을 할 정도로 그 교정이 깊었다. 이안눌이 충휘에게 주었던 다음 시는 그들간의 교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吏散重門閉, 아전들 흩어지고 중문도 닫히니,
春深小院空. 봄 깊어 작은 집 텅 비었네.
鳥回山影外, 새는 산 그림자 밖에서 돌아오고,
花謝雨聲中. 꽃은 빗소리 속에서 시들어가네.
眼看浮生理, 눈으로 뜬 생애의 이치를 살피고,
心知造物功. 마음은 조물주의 功役을 아는 일.
岳僧能啄剝, 나와 스님은 그 비밀을 쪼아 벗길 수 있으니,
應爲道情同. 응당 道情은 같구려.

太守本好道,
태수 본래 도를 좋아하고,
上人偏愛詩. 스님은 시 짓기를 편애하시네.
風塵異名迹, 풍진속에선 이름과 자취 달리하지만,
雲水一襟期. 운수에 둔 뜻과 기약은 똑 같다네.
古縣相邀地, 옛 고을은 서로를 맞이하는 땅,
春城枉過時. 성의 봄날은 외람되이 찾아준 때로세.
卽今支許契, 지금부터 허여한 이 맘 지켜서,
終老不 緇. 늙도록 닳아지지 않도록 합시다.

첫 번째 수에서 전반부는 작자가
수령으로 와 있는 금산관아의 적정한 풍경을 묘사한 것인데, 때는 비가 오는 늦봄 어느 날이다. 후반부는 삶의 이치와 우주조화의 묘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스님뿐이라고 하여 그들간의 교유에 대한 자부와 동지의식을 표출한 부분이다. 자신보다는 신분이 아래인 승려를 有道者라 하여 자기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둘째 수에서도 그 주조는 역시 작자와 스님은 한 동지라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명색과 자취는 서로 다르지만 운수에 둔 속마음은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그 우의를 지속하자는 것이다. 첫째수가 그들이 서로 도정이 같은 동지라는 것에 대한 선언적 진술에 중심을 두었다면, 둘째 수에서는 그런 선언에 대한 의론적 서술에 중점을 두었다.
요컨대 이 작품에서 작자는 그들이 비록 하나는 雲林에, 하나는 시정에 머무는 이로 명색을 달리하지만 자연에 마음을 두고 우주 만유의 도에 관심을 쏟는 점은 같다 하여 그들간의 道伴的 友誼을 강조하고 있다.
충휘 또한 이안눌의 뜻을 읽고 이 시에 차운하여 그에 상응하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喬木圍平野, 교목은 평야를 두르고
危樓出半空. 높다란 누각 반공에 솟아있네.
溪聲片雨外, 시냇물 소리 한 지점 비 밖에 들리고
山色亂雲中 산 빛깔은 어지러운 구름 속에 비친다.
地僻天公力, 금계 땅 치우친 것은 하늘의 힘이요,
高匠伯功. 관사 처마 높은 것은 장인의 공이라.
今來試一陟, 이제 와서 한 번 올라서니
更與使君同. 사또와 더 같아지겠구려.

臥閤民無訟,
안채에 누워 있어도 백성들 송사 없고
官閑晝 詩, 관사는 한가로워 낮인데도 시를 읊는다.
田園存晩計, 전원에 돌아갈 일 만년의 계획일지니
魚鳥待幽期. 자연속에 살아갈 그윽한 기약 기다리네.
月滿春城夜, 달빛 가득한 봄성의 밤
花開野店時. 야점엔 한창 꽃이 피었네.
文章眞小技, 문장은 참으로 작은 기예일지니
於道恐 緇 참된 도를 엷게 할까 두렵구려.

첫 번째 수에서 전반부와 5,6구는 이안눌의 관할령인 금산 관아의 수려한 풍경과 위치를 묘사하였다. 7,8구는 이안눌이 승려인 작자를 하대하지 않고 금계관 출입을 허여 해 동등한 위치에서 자기를 맞이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러내고 있는 구절로 읽힌다. 작자가 금계관에 오른 것이 단지 물리적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랐다는 의미만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이안눌이 먼저 '道情은 같다'라는 것에 대한 應酬라 하겠다. 두 번째 수에서 전반부는 이안눌의 수령됨, 곧 한 고을의 수장으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는 것을 칭송한 것이고, 5,6구는 그들이 교정을 나누는 시공을 묘사한 부분이다. 7,8구는 그들간의 교정이 문장으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작은 기예에 불과한 시 짓기에 골몰한다면 본래의 일에 긴장을 늦추는 것이 될 수 있음을 환기하는 구절이다.

 

곧 문장하는 일에만 치우치면 수령으로서, 승려로서 자기들의 본래 일과는 어긋날 수 있으며, 나아가 우정에도 금이 갈지 모른다는 염려와 충고가 배어 있다. 이러한 충고는 수령이란 상대의 신분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데서 가능한 것이고 또한 상대가 이를 받아들일만한 인격과 그릇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 수답시에 보이는 내용을 볼 때 이안눌과 충휘는 그들간의 신분적 차이를 크게 의식한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여 의식상의 소통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이안눌이나 충휘가 그들 교유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려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곧 이안눌의 경우 자신은 수령이지만 스님처럼 도 닦는 것을 좋아하고 스님은 도를 닦는 승려이지만 시 짓는 일을 편애한다고 하여 교유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둘 다 운수라는 자연 공간에 마음을 둔 처지이니 서로 크게 다를 게 없다고 하였다. 다시말해 이안눌의 논법은 그와 스님이 유가와 불가라는 서로 다른 이념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존재지만 서로의 삶의 방식과 기호가 인정된다면 문제될 것이 없으며 더구나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점에서는 서로 같기에 더욱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충휘 또한 그들간의 교유가 시를 잘하는 수령과 시승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酬唱 정도의 범상한 교유에 머무르기보다는 한 단계 높은 道友로서의 교유가 되어야함을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안눌과 충휘 간에 수답을 통해서 이루어진 시가 각기 40여 편에 이르는데, 이러한 반복된 酬答을 통해서 그들의 교정이 더욱 깊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한시의 창화 방식을 통해서 그들간에 존재하던 신분과 계층, 그리고 이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고 그 장벽을 철거해 차원 높은 교유로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3.3. 남녀간의 소통과 사랑
조선시대에 한시는 특별한 능력을 쌓아야 지을 수 있었고, 어느 계층이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한문을 익혀서 글을 짓거나 시를 짓는 일은 신분이 양반가에 속하더라도 권장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외의 경우도 있어 남자 형제들의 어깨너머로 배우거나 부모의 특별한 의지로 글을 배우고 시 짓는 것을 배워 일정한 식견과 문학적 능력을 쌓은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신분적으로 가장 천한 계층이었던 倡妓들 중에도 시조나 시를 지어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거나 사대부들과 唱和하여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장에서는 한시의 남녀간 소통의 역할로써 여성이 남성에게 준 한시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김시습의 소설집 {金鰲新話}를 보면 많은 작품들 속에 주인공이 짓거나 관련된 한시들이 끼어 들어 서사진행에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萬福寺樗蒲記]에서 주인공 梁生이 지은 한시는 하늘을 감동시켜 결국 그는 천생의 배필을 맞게 된다. 그리고 [李生窺牆傳]에서도 주인공 이생과 여주인공 최씨 처녀가 결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그들이 주고받고 있는 시문이다. [이생규장전]의 최씨녀의 한시와 이생의 한시를 살펴서 그 소통성의 측면을 알아본다. 이생이 최씨녀와 만나 맺어지는 과정과 그 때 그들이 주고받은 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생이 어느 날 학교에 가는 길에 최씨 집 담장 너머를 엿보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최씨 처녀가 봄날을 맞아 춘심에 겨워 수를 놓던 손을 턱에 괴고 아래와 같이 읊조리는 것을 듣는다.
獨倚紗窓刺繡遲, 사창에 홀로 기대 수놓기 더딘데
百花叢裏 黃 . 온갖 꽃무더기 속에서 꾀꼬리가 운다.
無端暗結東風怨, 까닭 없이 봄바람을 은근히 원망하며
不語停針有所思. 말없이 바늘 멈추고서 생각에 잠긴다.
路上誰家白面郞, 길가의 서생은 뉘집 댁 도령인가?
靑衿大帶映垂楊. 푸른 옷깃 큰 띠 버드나무 사이에 비친다.
何方可化堂中燕, 어떻게 하면 당 안의 제비가 되어
低掠珠簾斜度墻. 나지막이 발을 스쳐 담을 비껴 넘을까?

 

첫째 수는 작자가 봄을 당해 춘심이 발동한 것을 묘사하였다. 봄이 되어 온갖 꽃이 만발한 속에서 꾀꼬리가 울어대며 교태를 부리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 은근히 피어오르는 춘심에 겨워 수를 놓는 손길이 자꾸 더디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수는 서생을 만나고픈 원망을 표현하였다. 길가의 버드나무 사이로 어른대는 푸른 옷깃의 큰 띠를 두른 서생을, 제비처럼 사뿐하게 날아 높다란 담장을 넘나들며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다. 봄날을 맞아 춘심에 겨운 작자의 심경을, 작자의 생활과 그 공간 주위의 자연 경물을 묘사하여 잘 드러내고 있는 시편이다.
이생은 최처녀의 이 시를 듣고서 그녀의 심경을 알아차리고 흥분한다. 이에 직접적인 응답을 하고자 하지만 높은 담장과 깊숙하게 위치한 안채 등의 장애물 앞에 어찌하지 못하고 물러난다.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를 써서 기와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지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접근을 시도한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巫山六六霧重回,
무산 열 두 봉에 안개가 자욱한데
半露尖峯紫翠堆. 반쯤 드러난 봉우리 자취기에 쌓여있네.
惱却襄王孤枕夢, 양왕의 외로운 베개 꿈이 안쓰러워
肯爲雲雨下陽臺. 운우가 되고자 양대로 내려온다.
相如欲挑卓文君, 사마상여 탁문군을 꾀어내려 할 때,
多少情懷已十分. 가슴속에 품은 정 이미 충분히 깊었었다.
紅粉墻頭桃李艶, 붉게 칠한 담장 끝에 도화 이화 아름다운데
隨風何處落 紛. 바람 따라 어디론가 어지러이 떨어진다.
好因緣邪惡因緣, 좋은 인연인지 나쁜 인연인지
空把愁腸日抵年. 부질없이 시름 앓아 하루가 일년이네.
二十八字媒已就, 스물 여덟 자 시로 중매가 이뤄졌으니
藍橋何日遇神仙. 남교에서 어느 날 신선을 만나랴.

첫째 수부터 남녀간의 만남을 상징하는 고사를 사용하여 최처녀를 만나고 싶은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를 담았다. 이제 최처녀의 마음을 안 이상 머뭇거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수 역시 남녀간의 만남을 상징하는 고사를 써서 그들간의 만남이 때가 되어서 시도되는 것이니 이상할 것이 없다는 어투이며, 자연 경물 또한 그들의 만남이 곧 결실을 보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배경으로 처리하였다.

 

셋째 수는 상대와 좋은 인연이 될까 그렇지 않을까 하는 수심으로 하루가 일년 같은 날을 보내다가 이제 28자 시 한 수가 매개가 되어 그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신선 같은 그대를 언제 빨리 만나볼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들 사이에 중매자가 있어서 그들간의 연락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28자에 불과한 시 한 수가 그들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는 작자의 말이다.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 진정을 호소하는 수단으로 시가 제격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생과 최처녀 사이에는 그들이 청춘 남녀임에도 자유롭게 만나 정을 주고받을 수 없는 사회문화적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사대부가 출신이었음에도 이생은 가난한 집 출신이었고 최씨 처녀는 부귀한 집안출신이라 서로 통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생과 최씨녀는 그들의 심경을 시작을 통해서 드러내고 그것을 교환함으로써 서로의 심경을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도 서로 주고받는 한시를 통해서 그들간의 정분이 더욱 두터워지고 그들 앞에 놓인 난관들이 극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 아는 것처럼 조선 사회는 오늘날처럼 성인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반들의 경우 맨 하층의 妓女들과 정분을 주고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선조의 기녀들은 본래 관청에 소속되어 수령의 명에 따라 잔심부름을 하거나 노래를 불러주던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수령 또는 양반들과 시문을 수답하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연회에 나가 가무를 하던 기녀를 倡妓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창기들과 문인으로 알려진 선비들과의 정분을 그린 이야기가 야승류에 두루 퍼져 있는데 여기서도 시가 그들간의 사랑을 한층 더 촉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6세기 후엽을 살았던 李玉峯은 종실 李逢의 딸로 사대부 출신인 趙瑗의 첩이었다. 그녀는 한시 작시 능력이 대단해서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일컬어졌다. 이옥봉이 한번은 이웃 촌부의 남편이 남의 소를 훔친 죄로 옥에 갇히게 되어 그를 위해 소장을 대신 써준 일이 있었다. 소장을 다 쓴 다음 그 말미에 '첩의 몸은 직녀가 아니니, 낭군이 어찌 소를 끌고 오겠습니까?(妾身非織女, 郞豈是牽牛?)'라는 시구를 덧붙였다. 관장이 그것을 보고는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 예화에서 소장의 자세한 내용보다는 오히려 끝에 붙인 연구가 촌부의 남편이 풀려 나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옥봉의 고사를 곁들인 연구를 관장이 알아보고 옥사의 진위를 알 수 있었고, 이에 석방한 것이다.
그녀가 조원에게 부친 한시 한 편을 보도록 한다.
近來安否問如何, 요사이 임께서는 어떠하십니까?
月到紗窓妾恨多. 사창에 달이 뜨면 첩의 한은 더합니다.
若使夢魂行有跡, 꿈속의 혼이 가는 길에 자국이 있다고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 임 문전의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는 모두 28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에 담긴 옥봉의 조원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강도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읽을 수 있다. 1,2구는 임을 보지 못해 그리움이 사무쳐 한이 되어 달이 뜰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사연을 옮겼다. 특별히 꾸미지 않고 일상적인 구어를 한자로 옮겼을 뿐인데 무리 없는 표현이 되었다.

 

3,4구에서 그 비유의 특이함이 독자의 가슴을 휘어잡는다. 몽혼이 발자취가 있을 수 없으니 가정과 조건의 문형을 끌어 쓴 것도 이 시의 시적 묘미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임 계신 거처 문 앞의 돌길이 화자의 꿈 발자국에 의해 닳아서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애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곡진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는 고려가요의 "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유덕하신 님 여의고 싶습니다."와 같은 전혀 불가능한 경우를 표현하는 비유처럼 막무가내식의 통속적인 감정을 들어내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제4구에 쓰인 '半'자의 묘미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半이라는 글자는 화자의 겸손한 마음과 은근함을 읽게 하는 절제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에서 이 글자 대신 '모두'를 뜻하는 다른 글자를 넣는다면 묘미와 격조가 반감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半자는 이 시의 眼자라고 할 것이다.

 

이옥봉의 이 시에 대한 조원의 화답시가 전하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이옥봉이 조원과 사랑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이러한 뛰어난 한시 작시 능력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물론 거기에 담은 이옥봉의 진정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창기로서 문명을 떨친 이로는 黃眞伊가 으뜸일 것이다. 그녀의 소탕한 삶이 바탕이 된 그녀의 문학은 그녀의 뛰어난 문학적 창작력에 힘입어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런 그녀의 문학적 역량은 당대의 시인 蘇世陽에게도 인정을 받아 강장의 시인이라 자부하던 그의 마음을 휘어잡기도 하였다. 아래 인용문은 그 이야기이다.

 

양곡 소세양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剛腸의 사나이라고 자부하며 늘 '색에 유혹된 자는 남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송도의 창기 황진이가 재색이 매우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동료들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이 여자와 한 달을 동숙하고 곧바로 떠나갈 것이며 터럭만큼도 괘념치 않을 것이다. 만약 이 기한을 넘겨서 하루라도 더 머문다면 그대들이 날 사람이 아니라 해도 좋다' 하였다. 그리고는 송도에 이르러 황진이를 보았는데 과연 절세의 미인이었다. 서로 사귀며 놀다가 어느덧 기한인 한 달을 머물렀다. 다음날 떠나기에 앞서 황진이와 더불어 남루에 올라 술자리를 폈는데, 황진이는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다만 '당신과 이별하며 어찌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졸구를 올리고자 하오니 되겠습니까?'하였다. 소세양이 그러라고 하자, 곧 율시 한 수를 써서 바쳤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月下庭梧盡, 달빛 아래 오동잎 다 지고,
霜中野菊黃. 서릿발 속에 들국화 피었다.
樓高天一尺, 다락은 하늘이 한 자 될 만큼 높은데,
人醉酒千觴. 사람은 천 잔술에 취했네.
流水和琴冷, 유수곡은 거문고 소리에 화답하여 싸늘한데,
梅花入笛香. 매화락곡은 피리 소리에 들어와 향기롭다.
明朝相別後, 내일 아침이면 서로 이별하겠지만,
情意碧波長. 이 마음 푸른 강물처럼 끝이 없으리.

라고 하니, 소세양이 읊어보고 감탄하기를, '나는 아마 사람이 아닐진저! 그대를 위해 더 머무르리라.' 하였다.
위 예화와 시에서 소세양이 감탄한 것은 먼저 황진이의 작시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세양 자신도 시인이었던 만큼 그녀의 빼어난 작시 솜씨에 우선 눈이 갔을 것이다. 기실 이 시는 이별을 앞 둔 술자리의 정황을 빼어나게 그린 작품이다. 특히 5, 6구는 중의성이 뛰어난 구절이다.

 

여기서 '流水'와 '梅花'는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악곡명으로도 볼 수 있다. 곧 '流水'는 '流水曲'으로 중국 고대의 琴曲이고, '梅花'는 '梅花落曲'을 의미하는 것으로 漢代의 橫吹曲인데 軍樂으로 笛曲이다. 그리고 유수곡은 '知音'과 '伯牙絶絃'의 전고를 낳은 種子期와 伯牙의 고사가 끼어 들어 있다. 위 시의 시간적 배경이 오동잎이 지고 국화가 누렇게 피는 가을임을 고려할 때 이 시에서 '매화'를 곡조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하겠다. 한편 '매화락곡'은 장안의 才子들이 질펀하게 노닐 때 부르던 곡이고 변방에서 戍卒들이 고향을 그리면서 부르는 곡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곡은 遊樂的 성향을 가지며, 이별에 따른 相思曲的 성격을 가진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유수곡과 매화락곡은 이별의 술자리에 잘 어울리는 악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을 떠나보내면서 황진이는 술잔을 건네고 유수곡을 연주하며 지음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했을 것이고, 술자리가 익어가는 한밤중 어딘선가 들려왔을 매화락곡은 相別의 심경을 더욱 처량하게 하였을 것이다. 황진이는 이를 다시 시로 지어서 이별이 가져올 슬픔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엇보다 소세양은 이 시를 통해서 자신을 향한 황진이의 진정을 느꼈기 때문에 약조를 버리고 더 머물렀을 것이다. 한 달간이나 동숙하며 놀았지만 이별에 임해 황진이는 적어도 겉으로는 전혀 슬픔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시를 통해서 소세양은 황진이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둘 간의 진정이 시를 통해서 만난 것이다.
요컨대, 황진이는 창기 신분이었지만 당대의 명창이면서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장기를 살려 당대를 대표하던 시인 소세양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다. 자신의 뜨거운 사랑의 정을 시가 아니었더라면 전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는 사랑하는 임을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했을 것이다.

 

4. 맺는 말
한시는 이제 그에 대한 특별한 기호를 가진 사람이나 관계 연구자가 아니면 그것을 짓고 감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뒷받침했던 사회 문화적 기반이 사라지고 바뀌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시를 짓는 풍토를 다시 조성할 필요성도 없거니와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것의 외양적 틀을 다시 배워 운용한다고 해서 창조성을 획득하기는 힘든 일일 것이다.

 

다만 지금 한시를 다시 접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거기에 문학작품으로서의 의미와 감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시 창작 문화가 이제 다시 복원될 필요성이 없다하더라도 전근대의 끝자락까지 한 사회의 중심적 문화양식으로 성행했던 한시 와 그 문화를 이루어낸 틀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운용의 성격을 알지 못하고서는 안 될 것이다. 본고가 한시의 작품적 완성도보다는 소통성을 탐색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한시는 다른 문화권의 시가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기능이 있었다. 즉 작자와 타인과의 관계를 소통시키고 결속했던 역할이 그것이다. 그것의 사회적 역할은 작게는 동료집단의 우의를 증진하거나 크게는 한 사회의 기풍을 새롭게 조성하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한시에서 이와 같은 기능을 한 대표적인 양식이 聯句와 唱和에 의한 양식이었다.

 

연구시는 여러 사람이 한 구에서 네 구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며 지어 한 편의 시를 완성시키는 시체를 말한다. 이 시체는 주로 宴飮席에서 지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遊戱性이 많고, 판이 벌어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읊어지기 때문에 작품적 성취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작시 구성원들간의 필력이 비슷해야하기 때문에 수준작을 이뤄내기가 쉽지 않은 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결함적 요소와 단점에도 불구하고 연구 방식을 통한 작시는 작시 구성원들간의 情誼를 증진하고 同道的 또는 道伴的 友誼를 강화하면서 그들간의 심정적 동일성을 확인하게 하는 소통적 구실을 행하였다.

 

전근대에 한시의 역할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酬唱문화'를 떠올릴 만큼 한시의 唱和 양식은 중심적 문화양식이요 교유의 주요 수단이었다. 창화란 시를 지어 酬答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타인이 지은 시의 운을 의식하지 않고 和意에 중점을 두어 화답하는 방식과 타인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짓는 和韻의 화답방식이 그것이다. 화의시나 화운시는 타인의 처지와 그가 쓴 시를 염두에 두고 쓰는 시이므로 상대와 자신과의 관계된 일이 소재와 주제가 되는 일이 많다.

 

이런 점은 화답시로 하여금 交遊詩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한다. 화답이 한 둘로 끝날 경우 그것은 의례적이고 상투성이 강한 말의 성찬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화답이 계속 이어질 때 처음의 의례성과 상투성은 줄어들고 쌍방간의 심적 교유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단계로 나아가기까지는 쌍방간에 놓여 있던 의식상의 차이와 단절이 극복되어 소통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화답시의 태생적 성격과 교유시적 성격은 그 시를 매개로 한 쌍방간의 심적 소통에 기여할 수밖에 없게 한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중국의 위와 같은 한시문화를 받아들여 제도화하고 향유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면 중국에 버금가는 한시문화를 꽃피운다. 본고에서는 한시의 소통성을 매개로 한 노소간, 사대부와 천인간, 남녀간 등 세 가지 측면에 보이는 한시문화의 한 단면을 살펴보았다.

 

언뜻 생각할 때 조선시대는 유가적 엄숙주에 의해 노소간 장유간에 의식상의 단절이 심했을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예를 든 소년 林悌와 어떤 宰相간의 이야기나 20대의 洪萬宗과 70, 60대의 鄭斗卿, 任有後, 洪錫箕 사이에 이루어진 忘年交를 통해서 그렇지 않음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간에 닫혔던 의식이 열리고 소통이 되었던 것은 바로 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양반 사대부 출신인 柳夢寅과 천인 신분의 劉希慶이 40년토록 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귀고, 또 李安訥과  徽 대사가 귀천과 이념을 넘어서 사귄 것도, 李玉峯이 사대부 趙瑗과 사랑을 일궈낸 것, {金鰲新話}의 [李生窺牆傳]에서 이생과 최씨녀가 사랑의 결실을 이룬 것, 蘇世陽과 황진이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도 모두 시를 통해서 가능하였다. 즉 그들 사이에 이루어진 시를 통해서 진정이 전해지고 그들 사이에 놓인 장벽이 헐리는 소통이 있었기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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