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에 환호하고 있지만, 사실 제주는 이미 이보다 훨씬 더 크고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주는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지정한 자연유산이고, 세계생물권보전지역이자 세계지질공원이기도 합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하거나 인증하는 자연분야의 3개 부문 타이틀을 모두 갖고 있는, 이른바 ‘3관왕’은 전 세계에서 딱 한 군데, 제주뿐입니다. 그러나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으로 주목받는‘제주의 풍광’은 어쩌면 제주가 가진 것 중의 극히 일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를 찾는 외국인들이야 아름다운 자연과 경관에만 눈길을 주겠지만, 우리에게 제주가 어디 풍경뿐이겠습니까. 제주가 가진 매력은 풍경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돌담을 두른 해안 마을의 소박한 정서와 억새 숲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섬 전체에 가득한 평화로운 기운, 한때 고독한 땅이었던 유배의 정서와 같은 제주의 매력을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사는 우리들말고 또 누가 느낄 수 있겠습니까.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에 맞춰 제주를 다시 갔습니다. 평화, 바람, 화산, 유배, 초록, 돌, 귤. 제주를 읽는 7개의 키워드를 들고 떠난 여정이었습니다. # 평화 제주에서 평화는 두 개의 축으로 이해가 가능하겠다. 하나는 눈으로 보이는 풍광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운 기운이다. 너른 초지가 펼쳐진 한라산 중산간의 목장에서 소와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풍경은 ‘평화’라는 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이런 풍경을 대할 때마다 도회생활의 번잡스러움을 벗어나 제주 땅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이 느껴진다. 이때 ‘평화’란 ‘번잡’ 혹은 ‘소란’의 반대되는 의미다. 제주 풍경에서 느끼는 평화로운 분위기는 절물오름에서 구좌읍 평대리까지 이어지는 1112번 도로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하늘을 찌를 듯 도열한 삼나무를 울타리 삼아 곳곳에 목장이 있다. 너른 목장에는 말과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다.
평화를 해석하는 또 하나의 축은 전쟁과 고난의 반대말로서의 평화다. 제주의 역사는 고난과 배반으로 요약된다. 근래에 제주가 ‘평화의 섬’의 기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런 역사에서 기인한다. 어쩌면 ‘평화’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은 평온하고 안락했던 과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반목과 학살 그리고 슬픔을 넘어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주의 고난의 시작은 탐관오리의 학정에 항거하는 민란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근대부터 제주의 민란은 끊이질 않았다. 양제해 모변, 강제검의 난, 방성칠의 난, 이재수의 난…. 그 끝에는 좌우대립의 비극적인 사건인 4·3사건이 있다. 비극의 역사로 평화를 반추할 수 있는 곳이라면 단연 다랑쉬마을이다. 다랑쉬마을에는 지난 1991년 11구의 유골이 발견됐던 다랑쉬굴이 있다. 4·3사건 당시 토벌을 피해 동굴 속으로 피신했던 일가족이 떼죽음을 당한 자리다. 이정표 하나 없는 동굴은 여간해서는 찾기 힘들고, 설사 찾는다 해도 돌로 덮여 있어 그 자리에 동굴이 있었음을 분간하기도 어렵다. 60여년이 지난 뒤에도 견고한 벽은 아직도 여전해서 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도 엇갈리지만, 이 땅에 다시는 전쟁과 반목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제주는 이제 ‘평화의 땅’이어야 한다는 명제만큼은 확실하게 다가온다. # 바람 제주에 당도했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사시사철 부는 ‘바람’이다. 지금이야 제주의 바람은 풍향과 풍속으로 해독되고 때때로 그곳이 섬임을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만, 돛 달고 항해하던 시절, 바람은 ‘길’이었다. 육지의 모든 것은 바람을 타고 섬으로 왔다. 제주에 분포하는 자생 식물들도 그랬을 것이고,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찾으러 서귀포까지 항해해 온 서복도 필시 바람을 타고 왔을 것이었다. 제주로 부임한 벼슬아치들도,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주까지 온 유배자들도 다 바람을 타고 제주에 당도했다. 제주에서 바람은 육지와 소통하던 해상교통의 동력에 다름아니었다. 어디 이뿐일까. 바람은 고기잡이를 나선 제주사람들의 목숨도 좌지우지했다. 바람을 관장하는 ‘영등신’이 제사의 형태로 제주에 여태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주에서 바람을 눈으로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때는 딱 지금이다. 제주의 들판과 오름에 가득 피어나는 억새들은 끊임없이 몸을 뒤채면서 제주의 바람을 그려 보여준다. 해안가 마을마다 심어진 폭낭(팽나무의 제주방언)도 이때쯤 잎을 다 떨구고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쪽으로 뻗은 가지를 선명하게 드러내며 바람의 방향을 보여준다. 여기에다가 해안가에 세워진 풍력발전기도 휙휙 소리를 내며 돌면서 제주 바람의 위용을 과시한다. 제주에서 바람을 보겠다면 단연 제주 동쪽 1112번 도로에서 아부오름과 칡오름 사이로 나 수산2리 사거리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추천한다. 길 양쪽 어깨에 풍성한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누일 때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이 길을 따라 드라이브하는 맛이 각별하다. 풍력발전기가 늘어선 제주 서부의 한경면 일대 해안가는 제주 바람의 속도를 볼 수 있는 곳. 제주에서 관측한 순간 최대 풍속인 초속 60m의 기록이 여기서 세워졌다. 억새 만발한 해안도로에 거대하게 서서 휙휙 쇳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발전기의 프로펠러 앞에 서면 제주의 바람이 가진 속도와 힘을 느낄 수 있다. # 화산 제주는 두말할 것 없이 화산섬이다. 한라산을 필두로 제주 곳곳에는 화산의 흔적이 즐비하다. 정상에 왕관 같은 암석을 쓰고 있는 성산 일출봉은 5000년 전 분출한 분화구이고 제주 서남쪽에 우뚝 솟은 산방산은 종형화산체의 흔적이다. 제주의 곳곳에 펼쳐지는 부드러운 곡선의 오름 또한 기생화산의 흔적이다. 제주의 화산은 가깝게는 1000년 전쯤인 고려 때 용암이 분출했다. ‘탐라의 산에 4개의 구멍이 뚫리며 붉은 물이 솟아나오다 5일 만에 멎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옛 사람들에게 화산분출은 자연의 분노 혹은 경이였을 터. 설문대할망을 앞세운 한라산과 제주의 신화와 전설은 이런 통제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 투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제주 곳곳에 남아 있는 용의 전설 또한 마찬가지다. 설문대할망은 제주의 지형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신화 속의 여신. 치마에 흙을 담아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일곱 번 흙을 떠서 한라산을 만들었으며,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퍼나르다 흘린 흙이 368개의 오름이 됐다고 전한다. 또 한라산 봉우리가 너무 뾰족해 정상부분을 잘라 바다로 던지니 정상을 잘라낸 부분이 파여 백록담이 됐고, 바다 쪽으로 던진 윗부분이 산방산이 됐다고도 한다. 제주에서 화산의 흔적이 가장 뚜렷한 곳은 두말할 것 없이 한라산의 백록담이 으뜸이겠고, 그 다음으로는 성산 일출봉을 들 수 있다. 성산 일출봉은 오래전부터 명소 중의 명소로 일컬어져왔다. 제주로 유배왔던 남상헌은 ‘남사록’에서 성산 일출봉 정상에서 발밑을 내려다본 당시의 흥분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홀하고 다리가 떨려 마음이 두근거리고 사늘하여 안정되지 않았다. 그 형세로 말한다면 뛰어난 경승지인 것이다.’ 그의 말대로 성산 일출봉은 내국인 관광객뿐만 아니라 중국인 관광객들까지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제주 최고의 관광지다. # 유배 제주는 지금 달콤한 여행의 땅이지만, 한때는 멀고 먼 절해고도의 거친 유배의 땅이었다. 제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광해군을 비롯해 고승 보우, 우암 송시열, 백산 이세번, 김정, 정온, 김상현 등이 사화와 당쟁에 휘말려 모두 이곳 제주로 유배를 당했다. 제주로 유배된 이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이는 단연 추사 김정희다. 제주에서 추사는 초의선사와 교유했고, 추사체를 완성했고, 마른 붓질로 황량함이 물씬 풍기는 세한도를 완성하기도 했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는 추사가 머물던 유배지가 복원돼 있다. 일대의 거부였던 강도순의 집의 한칸짜리 방에서 추사는 가시울타리를 치고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았다. 복원된 유배지 옆에는 추사의 서찰과 글씨, 기록들을 모은 전시장인 추사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9년여의 제주 유배 기간에 겪은 경제적 궁핍과 참담한 심경 등이 느껴지는 편지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추사 유배지에는 도보로 대정 일대 유배의 흔적을 돌아볼 수 있는 ‘추사유배길’이 만들어져 있다. 인연, 집념, 사색을 주제로 한 3개 코스로 이 중 3코스인 ‘사색의 길’을 걸어볼 만하다. 추사가 자주 찾았다는 안덕계곡에서 출발해 대정향교와 세미물을 거쳐 추사유배지에 이르는 10㎞ 남짓의 길이다. 도보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이 길에는 추사의 옛 흔적은 거의 없고, 대신 근래에 도보길을 놓으면서 세운 시나 아호를 새긴 바위나 시비 등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까닭은 추사유배지로 이어지는 길에서 추사가 쓴 현판을 내건 대정향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허술하게 복원된 향교는 옛 맛을 느끼기에는 어림없지만, 주위에는 제법 굵은 소나무와 팽나무들이 우뚝 서 있다. 찬바람이 부는 이즈음 찾아간다면 추사의 세한도에 등장하는 마르고 거친 필치로 단번에 그려낸 소나무와 잣나무를 눈앞에 대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 초록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이 바로 ‘초록’의 빛깔이다. 내륙의 땅에 낙엽이 다 지고 황량할 때, 혹은 눈이 내리고 엄동의 추위에 갇혀 있을 때도 제주의 곶자왈과 들판은 온통 초록빛이다. 육지의 여행자들이 제주에서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는 것은 한겨울에도 바래지 않는 선명한 초록빛 때문이기도 하다.
들판의 초록이 가장 짙은 곳은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일대의 밭이다. 용당리에서 반포리까지 이어지는 해안일주도로를 달리다보면 해안 쪽으로 깜짝 놀랄 정도로 선명한 초록의 밭이 펼쳐진다. 밭담으로 가른 너른 밭마다 심어진 양배추와 무, 양파, 비트, 브로콜리가 이즈음부터 한겨울까지 계절을 잊게 할 정도로 성성한 초록빛을 뿜어낸다. 그 밝은 색감만으로 본다면 한여름이래도 믿을 정도다. 제주에서 겨울철에도 초록을 만날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곶자왈이다. 곶자왈이란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독특한 숲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주에만 있다. 거대한 상록 활엽수와 덩굴식물들이 한데 어우러진 곶자왈의 숲은 마치 ‘숲의 정령’이 깃들여 있을 것 같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안겨준다. 이런 곶자왈이 제주의 한경·안덕과 애월 일대, 조천·함덕, 구좌·성산 등에 있다. 그중 가장 감격적인 곳 한 곳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의 곶자왈 난대림이다. 겨울에 그 숲에 들어선다면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후박나무, 종가시나무 등의 상록 활엽수들이 원시림을 이룬 숲을 송악과 후추등, 마삭줄, 콩짜개덩굴 줄기가 감아오른다. 그곳에 들면 어찌나 초록빛이 진한지 몸은 물론 마음까지 다 초록으로 물들 듯하다. 난대림의 숲 사이로 난 나무덱을 따라서 천천히 걷다보면 푸르름으로 충전이 되는 느낌이다. 곶자왈이야말로 한겨울에도 제주가 푸른 숨을 쉬는 곳이다. # 돌 제주는 ‘돌의 섬’이다. 육지에서도 어디든 돌이 없는 곳이 있을까만, 제주의 돌은 다르기도 하고, 많기도 하다. 밭에도 들에도, 해안가에도 어장에도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색의 현무암이 있다. 제주 사람들은 심지어 무덤에도 정방형의 돌담인 산담을 쌓고 산담 옆에는 돌로 거칠게 깎은 동자석을 세워놓는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밭이나 들에서 캐낸 돌을 한데 모아 쌓아놓은 이른바 ‘머들’도 곳곳에 있다.
제주의 돌을 이야기하자면 일찌감치 제주의 아이콘이 된 ‘돌하르방’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툭 불거진 눈에 큰 코를 가지고 두 손을 몸 안쪽으로 모은 해학적인 모습의 ‘진짜’ 제주 돌하르방은 제주 전역에 모두 48기가 세워졌다. 그중 1기가 소실됐고, 2기는 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 옮겨놓았으니 제주에 남아 있는 것은 45기다. 그렇다면 제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은 다 어찌된 것이냐고? 그건 모두 돌하르방을 1971년 민속자료로 지정한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제주에서 산담이나 돌담은 구태여 찾아다닐 것이 없다. 제주에서는 시내 한복판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든 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돌담 중에서 규모면에서 자못 위용을 자랑하는 곳은 바로 환해장성이다. 고려 때 삼별초의 제주점령을 막기 위해 세워진 뒤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다시 쌓인 환해장성은 제주 동북쪽 김녕해수욕장 부근과 성산 부근, 그리고 서북쪽의 애월 부근에 남아 있다. 제주의 돌의 매력을 집약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돌문화공원’이다. 돌이 뭐 볼 게 있을까 싶기도 하겠고,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노린 그렇고 그런 관광지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제주의 돌에 관한 모든 것을 전시한 돌문화공원은 제법 품격이 느껴지는 곳이다. 특히 제주에서 캐낸 자연석으로 한라산 영실에서 내려오는 제주를 지키는 전설의 오백장군을 형상화한 돌 군상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 귤 제주에서 귤은 강력한 ‘아이콘’이다. 전국 각지에 특산물이 있지만, 제주의 귤처럼 ‘그곳 아니고서는 나지 않는’ 작물을 찾기는 어렵다. 제주에는 사과와 배가 없는 대신 귤이 있다. 귀한 농산물이 나는 게 축복인 듯 하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근대 이전까지 제주의 귤은 고단함을 상징하는 작물이었다. 조정은 끊임없이 귤을 제주의 공물명단에 올렸고, 백성들은 귤 농사를 지어 벼슬아치들에게 바치느라 뼈가 부서졌다. 탐라에서 백제나 신라에 감귤을 바쳤다는 기록이 보이니 귤의 상납 역사는 무려 1000년을 헤아린다. 조정은 귤을 세금으로 거둬 진상하기 위해 귤나무 한그루 한그루까지 통제했다. 제주 전역에 이야기로 남아 있는 37곳의 이른바 ‘금물과원’은 진상을 위한 귤농사를 짓던 흔적이다. 열매가 달리면 관리들은 하나하나 숫자를 세서 관리했다. 바람에 떨어지거나 날짐승들이 파먹으면 귤나무를 울 안에 둔 집주인이 물어내야 했다. 착취도 이런 착취가 없다.
품종개량 이전의 제주 귤은 지금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즈음 제주의 귤은 흥진과 궁천 품종으로 단일화되다시피 했지만, 과거 토종 귤의 품종은 훨씬 다양했고 맛은 시고 쌉쌀했다. 귤의 대중화 초창기에 심어진 토종 귤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농민들이 토종나무를 죄다 뽑아내고 맛이 좋고, 키가 작고, 생산량이 많은 품종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간혹 마을 어귀에서 드물게 오래된 거목 귤나무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의 서귀포 농업기술센터에는 수령 100년을 넘긴 귤나무들이 옮겨 심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귤나무들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귤따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이즈음 제주에서는 돌담 너머로 귤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서귀포시 위미리 일대와 하효리 일대의 귤농장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특히 위미리 일대는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삼나무 뒤편에 어김없이 주황색 귤이 물결치는 장관을 이루고 있어 따로 찾아가볼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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