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중국음식 기행_06

醉月 2011. 11. 30. 09:47

 

북방식 밀전병 ‘춘빙’으로 배 채우고 암울한 근대사 전시된 소피아성당으로

헤이룽장성 하얼빈

▲ 밀전병에 채소와 볶은 고기를 싸서 먹는 춘빙.
북으로는 북방 삼림지대를 병풍처럼 두르고 남으로는 동북평원을 펼치면서 북만주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 하얼빈. 중국의 동북에서 러시아와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성도입니다. 우리에겐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지요.
   
   12세기 초 여진족이 거란의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북방을 제패하면서 지금의 하얼빈시 아청(阿城)을 상경(上京)으로 하여 금나라를 세웠으니 하얼빈은 북방의 역사를 깊게 품고 있는 곳입니다.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중원으로 진출하여 청나라를 세운 뒤에 만주 지역은 한족의 이주가 금지된 만주족의 숨겨진 땅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는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남하하고 신흥강국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를 넘나드는 가운데 시베리아 철도가 1903년 완공됐고 하얼빈은 국제적 도시로 급격하게 성장했습니다.
   
   
   대륙과 유럽으로 통하는 길목
   
   중국 근대사에서 보자면 상하이와 하얼빈은 비슷한 도시입니다. 두 도시 모두 19세기 중반 개방 전에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양 열강에 의해 개방되면서 국제적 도시로 폭발적 성장을 했고 현대의 대도시로 이어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뭇 대조적인 것들도 많습니다. 상하이는 지명 그대로 바다(海)로 오르는(上) 곳이어서 대양을 통해 외국과 통했지만 쑹화강 강변의 나루였던 하얼빈은 철도를 통해 대륙과 유럽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상하이는 서부 유럽과 미국의 교류가 많았고 하얼빈은 러시아와 동유럽과 더 긴밀했던 도시라서 건축물과 같이 그들이 남긴 자취도 서로 다른 풍모입니다. 지금도 하얼빈의 중양다제(中央大街)를 비롯한 시내 곳곳에는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러시아풍의 건축물이 즐비하지요.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면서 하얼빈은 러시아풍의 국제도시에서 식민지의 음울한 도시로 변신하게 됩니다. 국제정치적 격랑이 감시와 검거라는 거친 손길로 몰아쳤고 731부대와 같은 극악한 만행이 은밀하게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원래의 북방문화에 새로 쏟아져 들어온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 문화가 뒤섞이고 대한제국의 망명객과 독립투사들까지 가세하면서 음울한 암투의 도시가 된 것입니다. 21세기 들어서면서는 하얼빈 빙등제(冰燈節)를 통해 백색의 눈과 투명한 얼음에 아름다운 조명이 한데 어우러진 겨울도시로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영하 30도를 넘나든다고 해도 하얼빈은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칩니다.
   
   
   북방식에 러시아풍 뒤섞인 음식
   
▲ 러시아풍의 옛 소피아성당.
하얼빈의 음식문화는 원래의 북방문화에 러시아풍이 얹혀진 특색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중양다제의 화메이시찬팅(華梅西餐廳)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식당은 1925년 유대계 러시아인이 문을 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명성과 인기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1층은 유럽식 맥주바를 중심으로 현대적 인테리어로 되어 있고 2층은 크렘린궁을 연상시키는 장중한 분위기가 연출돼 있어 러시아풍을 한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주요리는 러시아 다차이(大菜)라고 하는데 스테이크나 연어, 새우구이 등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다양한 양식이 있습니다. 중국식 주요리는 관먼뉴러우(罐燜牛肉)가 대표적입니다. 관(罐)이란 머그컵 정도 크기의 작은 항아리라 생각하면 되고 먼(燜)은 약한 불로 오랜 시간 익혀낸다는 뜻입니다.
   
   이 식당은 서양식 정찬도 유명하지만 하얼빈의 서민들에게 꽤나 사랑받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식빵입니다. 중양다제를 걷다 보면 식당 출입구 바로 옆의 매대에 하루 종일 긴 줄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식당에서 만드는 식빵을 사려는 줄입니다.
   
   이 거리에서는 홍차 한잔에서도 러시아풍을 맛볼 수 있습니다. 중양다제의 북쪽 끄트머리에 가면 시터우다오제(西頭大街)라는 골목이 오른쪽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골목으로 꺾자마자 ‘러시아(Russia·露西亞)’라는 이름의 작은 찻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찻집 역시 1914년에 문을 열었다고 하니 그 역사만으로도 홍차 한잔을 즐겨볼 만합니다. 출입구에는 역사문화 명가(名街)의 문화특색점이라는 명패도 달려 있어 눈길을 한번 더 끌기도 합니다.
   
   홍차 자체에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그저 ‘러시아식 홍차(俄式紅茶)’를 주문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차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티백으로 된 립톤 홍차를 주는데 그 옆에 딸기잼을 함께 줍니다. 설탕 대신에 잼을 넣으라는 것인데 이게 바로 러시아식이랍니다. 찻집 실내에는 러시아풍의 인테리어 소품이 한국 여행객의 시선을 끌어당길 만합니다. 다른 손님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테이블 사이를 다니면서 찬찬히 디카 놀이를 해도 좋은 곳입니다.
   
   
   주머니 가벼운 여행객은 물만두 ‘자오쯔’를
   
▲ 하얼빈 시내의 러시아풍 건물들.
하얼빈에서는 북방의 토속음식인 춘빙(春餠)을 찾아볼 만합니다. 춘빙은 입춘(양력 2월 3, 4일경)에 먹는 음식으로 춘판(春盤) 또는 야오춘(咬春)이라고 부르는데 밀전병에 채소나 고기를 볶아 싸서 먹는 요리입니다.
   
   밀전병은 밀가루에 뜨거운 물을 넣고 부드럽게 반죽하여 밀대로 어른 손바닥만하게 만들어 찝니다. 채소나 고기를 싸서 먹을 때 밀전병이 터지지 않도록 질기게 만드는데 연잎처럼 생겼다고 하여 허예빙(荷葉餠)이라고도 부릅니다. 밀전병에 싸 먹는 채소, 고기볶음을 허차이(和菜)라고 합니다. 콩나물이나 숙주, 시금치, 미나리 등의 채소나, 간장 넣고 삶은 돼지고기와 돼지족(醬肉, 醬肘花), 훈제한 돼지고기(熏肉), 구운 돼지고기(爐肉)나 달걀볶음, 당면 등 어떤 재료를 넣어도 어울리기 때문에 허차이라 부르나 봅니다.
   
   볶을 때 국물이 많이 생기지 않게 센불에 재빠르게 볶아도 먹는 도중에 국물이 밑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밀전병에 볶은 음식을 올려놓고 두어 번 말아 밑 부분을 한 번 접고 다시 말아 올라가면 국물이 떨어지는 어려움 없이 드실 수 있습니다. 춘빙을 먹어보면 밀전병은 질긴 듯하지만 안에 담긴 것들은 부드럽게 씹히면서 묘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채소나 고기를 볶은 허차이들은 가격이 싸지만 해삼을 채썰어 넣은 비싼 춘빙도 있습니다. 청나라 시절에는 황실에서 입춘이 되면 춘빙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술과 함께 하사하기도 했답니다.
   
   하얼빈의 중심거리인 중양다제에서 몇몇 춘빙 전문식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라오창춘빙(老昌春餠) 정도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합니다. 실내도 깔끔하고 서비스도 좋은 편입니다. 중양다제에 두 개의 분점이 있는데 행인에게 물어도 쉽게 찾을 수 있고 주소만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道里區 中央大街 180號, 전화 0451-8461-8963, 西十三道街店 주소 道里區 西十三道街 68-2號, 전화 0451-8768-5977)
   
   라오창춘빙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면 테이블마다 주문표를 주는데 표 위에 ‘단(蛋·계란)+러우(肉)+차이(菜)+총(蔥)+장(醬)=잉양허메이미(營養和美味)’라고 쓰여 있습니다. 먼저 밀전병, 춘빙, 파(蔥), 장(醬)에 체크하고 고기(肉)와 채소 볶음요리(菜)에서 원하는 것을 한 가지씩 고르면 됩니다.
   
   하얼빈에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북방음식은 쉰러우다빙(熏肉大餠)입니다. 기름을 두른 팬에 밀가루 반죽을 둥글게 지져서 반으로 자른 다음 그 사이에 훈제한 돼지고기 등을 넣어서 먹는데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기 때문에 춘빙과는 식감이 사뭇 다르지요.
   
   중양다제에 걸쳐진 골목 가운데 다안제(大安街)가 있는데 이 골목을 따라 50m 정도 빠지면 마오마오쉰러우(毛毛熏肉)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하얼빈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값도 싸고 맛있는 식당으로 첫손에 꼽히는 곳이지요.
   
   
   안중근 의사 기념관·731부대 유적도
   
▲ 쉰러우다빙에 넣어 먹는 훈제 돼지고기.
자오쯔(餃子)는 물만두인데 둥팡자오쯔왕(東方餃子王)이란 체인점을 찾아 드셔보시길 권합니다. 연쇄점이기 때문에 북방의 각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데 하얼빈에서 그 어느 지역보다 값싸고 맛있게 즐길 수 있지요. 특히 간단하게 한끼를 드시고 싶은 분, 젊은 배낭여행자, 주머니가 가벼운 분이 좋아하는 식당입니다. 겨울에 하얼빈을 가신다면 식당 안팎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만 보아도 식욕이 당깁니다.
   
   하얼빈을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안중근 의사가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과 조선족민속예술관 1층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제국주의 전쟁에서도 가장 흉악한 전쟁범죄로 꼽히는 일제 731부대의 유적은 누가 권하지 않아도 찾아가게 됩니다. 하얼빈의 역사와 문화 그 자체를 느껴보고 싶다면 러시아풍의 소피아(蘇菲亞)성당을 찾아갈 만합니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그 안에 전시된 20세기 전반의 하얼빈을 소개하는 사진이나 그림 등은 우리와도, 중국의 다른 도시와도 상당히 다른 이국적 풍미가 흥건합니다.
   
   1930년대 초반 국제정치적 갈등과 제국주의 전쟁의 거대한 위협이 온 도시를 뒤덮던 하얼빈에는 러시아 무희들의 현란한 공연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니나 안달리스라는 러시아 무용수가 유명했는데 그녀의 고혹적 자태가 고스란히 담긴 흑백사진 한 장을 바로 이 소피아성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암울한 세상의 음산한 도시 한구석에서 펼쳐지던 탐미와 매혹으로 버무려진 당시 분위기를 음미할 수 있으니 꼭 한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네이멍구자치구

한 손엔 양고기, 한 손엔 단도 들고 바이주 한잔
초원의 전사 기분 느낄 수 있는 초원의 음식

▲ 네이멍구의 초원
초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드넓은 하늘, 뭉게뭉게 피어있는 하얀 구름, 그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공간, 공간을 채운 여유로운 양떼들, 말을 타고 양떼를 모는 젊은 사내들…. 이런 장소는 21세기를 바삐 사는 우리들로서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의 초원이 제대로 새겨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일본 NHK의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방영 시기부터인 것 같습니다. 1990년대에는 유목민의 영웅 칭기즈칸이 지난 1000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로 꼽히면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발흥했던 초원에 한층 더 깊은 관심이 쏠리게 됐습니다. 국내에서는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가 한반도에서만 맴돌던 기존 사학의 옹색함을 깨뜨리고 북방과 유라시아로 시각을 넓히면서 멀게만 느껴지던 초원의 역사가 코앞으로 다가왔지요.
   
   아시아에서 초원이라 하면 몽골과 중앙아시아를 떠올리겠지만, 중국에서 초원이라 하면 바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입니다. 네이멍구는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여덟 개의 성과 접하면서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좌우의 길이가 3000㎞나 됩니다. 초원의 역사와 문화, 초원의 음식을 맛보기에는 적격입니다.
   
   네이멍구는 역사적으로는 몽골족의 강역이었지만 현재의 몽골공화국과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의 영토입니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대륙을 경영할 때 일부 몽골족이 만주족과 협력하여 청나라에 속했는데 당시 청나라에 협력한 몽골족들의 땅이 네이멍구자치구가 됐습니다. 당시 청나라에 복속하지 않았던 몽골족들의 땅이 오늘날의 몽골공화국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원은 네이멍구 동북부인 후룬베이얼(呼倫貝爾)입니다. 베이징에서 직선거리로 1000㎞ 이상 북으로 가야 하는 먼 곳이라 우리나라 사람의 발자취는 많지 않습니다.
   
   
   6~8월이 가장 아름다워
   
   적은 강수량에 기대어 낮게 자라는 풀로 가축을 키워 생존해온 유목민들의 고향은 5월부터 풀이 나면 6~8월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8월 말이면 초원이 벌써 누렇게 변하기 시작하고 겨울에는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이 몰아칩니다. 후룬베이얼은 후룬(呼倫)과 베이얼(貝爾)이라는 호수의 이름을 합친 것인데, 행정 단위로는 ‘시’지만 넓이가 남북한 면적보다 큰 26만4000㎢나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를 건국한 북방 민족들이 고구려 건국 이전에 머물던 곳의 인접지역이고, 훗날 북위를 세워 수당제국을 건설한 선비족들이 AD 1세기경 남하하기 시작한 곳입니다. 10~12세기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가 힘을 떨치던 시절에는 칭기즈칸의 가까운 조상들이 이곳에 살다가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동부지역으로 이동했고,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정복할 때에는 몽골제국의 후방으로서 몽골 정예군이 전쟁의 피로를 풀고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넓게 보자면 고구려와 북위·수당제국과 몽골제국 모두 이 초원, 또는 초원의 인근에서 발원한 것이지요. 실제로 초원은 아름다운 풍경보다 더 위대한 동아시아의 거대한 역사를 품고 있으니 역사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두고 여행한다면 후룬베이얼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요.
   
   후룬베이얼을 여행한다면 탁발 선비족이 남긴 족적을 따라가는 것도 좋습니다. 후룬베이얼 동쪽, 헤이룽장성에 가까운 어룬춘자치기(鄂倫春自治旗) 아리허전(阿里河鎭)에는 알선동(嘠仙洞)이란 동굴이 있습니다. 이 동굴은 AD 4세기 북위(北魏)를 세운 탁발선비족의 조상들이 AD 1세기경 서남으로 이동하기 전에 살던 곳이라는 사실이 완벽하게 고증된 동굴입니다.
   
   이들은 고구려 조상의 이웃사촌으로서, 역사를 조금만 넓게 보면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민족입니다. 이 동굴 앞을 흐르는 물이 아리허(阿里河)인데, 우리 한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와 똑같습니다. 압록강의 중국어 발음이 ‘야뤼’인데 모두 같은 발음입니다. 민족이 이동하면서 지명도 가져간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지역이 우리 고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고구려의 사촌인 탁발선비족의 자취
   
▲ 네이멍구의 양떼

   기원전 이 지역에 살던 탁발선비족은 남쪽의 고구려와 서남쪽의 한나라에서 전해지는 번영의 소식을 접했을 것이고 인구가 늘어나자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민족이동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고구려와는 다른 방향, 즉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이동해 초원으로 나갑니다. 지금도 아리허전에서 건허(根河)로 가는 기차나 버스를 타면 대흥안령 삼림지대를 통과하는데, 그 옛날 탁발선비족이 이동했던 루트와 같은 경로입니다.
   
   건허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어얼구나(額爾古納)로 가는 길은 삼림에서 초원으로 바뀌는 지역인데 초원을 흐르는 강과, 삼림에서 초원으로 바뀌어가는 차장 밖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지요. 자작나무의 하얀 줄기가 숲을 이뤄 햇살에 반짝이기도 하고, 넓은 구릉에 하얀 양떼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습니다.
   
   어얼구나에서 다시 진장한(金帳汗·깁차크칸) 몽골부락으로 내려가 초원의 집인 게르에서 유숙한 다음, 후룬베이얼의 중심도시인 하이라얼시(海拉爾市)를 거쳐 후룬호(呼倫湖)까지 가면 AD 1세기에 이루어진 탁발선비족의 1차 이동이 끝납니다.
   
   탁발선비족은 이 호수 인근에서 살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동을 계속해서 오늘날 네이멍구자치구 중부지역을 거쳐 산시성 다퉁(大同)에서 북위를 세운 다음 낙양으로 수도를 옮겨갔습니다.
   
   탁발선비는 한나라와 흉노제국이 수백 년간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여 두 나라 모두 쇠망한 것과는 반대로, 북방 유목문화와 남방 농경문화를 한데 융합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합니다. 북위는 북방에서 출생한 유목국가지만 중원의 백성을 포용하여 중원에 터전을 잡았고 남북 문명융합의 진통 끝에 수나라를 출산하여 썩어빠진 남조를 정벌하며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수나라는 대륙의 정치적 통일이라는 역사적 역할을 이루자마자 또 다른 탁발선비 왕조인 당나라에 동아시아 국제국가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물려줬습니다.
   
   북방이 주도하여 남방과 북방이 융합된 당나라는 아시아 최초의 국제국가라고 할 만합니다. 신라와 일본은 물론이고 서역과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동아시아 최초로 남북의 문명을 한데 융합해낼 수 있었던 초원의 힘을 후룬베이얼 초원여행에서 느낄 수 있다면 더 없이 귀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음식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21세기 초원으로의 여행은 로망일 수 있지만 전통시대 초원에서의 삶은 거칠고 척박하기만 했습니다. 강수량이 적어 생활용수는커녕 식수 조달도 수월치 않았습니다. 다만 순한 동물들과는 눈높이를 맞추고 야생동물에겐 활을 겨누면서 유목과 사냥과 전투와 이동 속에서 생존했지요.
   
   환경이 이러하니 초원의 음식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채소가 거의 없고 오직 가축에서 나오는 고기와 젖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원의 음식문화를 ‘홍과 백’이라고 하는데 붉은 고기와 흰 젖을 말합니다.
   
   
   양고기는 매콤한 양념장에 찍어 먹어
   
▲ 양고기 요리인 서우바러우. 옆에 놓인 단도로 고기를 잘라 먹는다.
후룬베이얼 초원에서는 전통적인 초원의 음식 서우바러우(手扒肉)를 즐겨볼 만합니다. 거친 초원에서 부드러운 고기를 음미하면서 호방한 북방 유목민의 기운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알선동에서 후룬호까지 가는 동안에 많은 식당에서 서우바러우라는 음식 이름을 볼 수 있는데 초원에서 가장 전통적인 음식입니다.
   
   바(扒)는 뜯어내다는 뜻으로, 서우바러우는 손으로 뜯어먹는 고기라는 말이지요. 실생활에서는 대부분 양고기이기 때문에 ‘손으로 집어먹는 양고기(手抓羊肉)’라고도 합니다. 주로 저녁식사 때 많이 먹는데 조리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고기가 붙은 뼈를 마디에 따라 큼직하게 자른 다음, 소금이나 양념을 일절 넣지 않은 맹물에 삶아냅니다. 너무 삶아버리면 고기가 퍽퍽해지기 때문에 7~8분 정도 삶으면 반쯤 익지요. 반숙을 하면 겉만 살짝 익어 부드럽습니다. 속은 덜 익었어도 느끼하거나 누린내가 나지 않으며 동물 체내에 있던 비타민이 살아있어서 영양학적으로도 좋다고 합니다.
   
   먹을 때에는 한 손으로 살이 붙어있는 뼈를 잡고 한 손으로는 멍구다오(蒙古刀)라고 하는 짧은 칼로 잘 익은 살점을 발라 매운 양념장에 찍어 먹습니다. 양념장은 파와 생강, 산초, 후추, 소금, 식초, 고추기름 등으로 만들어서 톡 쏘는 매운맛입니다.
   
   이때 보드카나 바이주와 같은 북방의 독한 술을 한잔 곁들이면 그야말로 초원의 풍취가 그득하게 됩니다. 양고기는 부드럽게 씹히고, 독한 술의 진한 향기는 코를 자극하고, 한 손에는 고깃덩어리를 잡고 있고, 한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으니, 그야말로 초원의 전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 수가 없지요.
   
   삼림에서 나와 초원을 거쳐 중원을 정복하여 당나라라는 위대한 국제국가를 탄생시킨 탁발선비의 호방한 족적과 잘 어울리는 음식이 아닐까요? 초원을 여행하면서 서우바러우를 진하게 즐겨보지 못했다면 초원을 여행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탁발선비족은 후룬베이얼을 떠나 지금의 산시성 다퉁에서 북위를 세우고, 북위가 중원과 북방을 통일하지만, 호한융합이라고 하는 강력한 정책을 둘러싸고 동위·서위와 북주·북제라는 왕조 격변의 곡예를 넘습니다. 그러다가 수나라로 통일되고 다시 이연·이세민 부자의 당나라로 탈바꿈을 합니다.
   
   당나라가 탁발선비 왕조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나라를 항상 중국이라고 배워왔으니 그렇겠지만, 당나라는 한족의 왕조가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당 고조 이연은 모친이 탁발선비족이고 부친이 한족인 혼혈입니다. 하지만 그는 몇 대에 걸쳐 탁발선비 부족에 속해 탁발선비의 문화와 습속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부모가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탁발선비족일 뿐입니다. 오바마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해도 오바마는 이미 미국인인 것처럼, 이미 탁발선비족 속에서 탁발선비의 일원으로 살아온 가문 출신인 이연으로 시작되는 당나라 황제들은 그저 탁발선비족일 뿐이지요.
   
   중국 또는 중국인이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났던 역사라는 의미에서 ‘중국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호한융합의 당나라, 최초의 정복왕조 요나라, 세계사 최초의 세계제국 몽골, 만주족의 청나라를 ‘중국이 말하는 중국의 역사’로 고정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 큰 ‘동아시아 역사’라는 넓은 시각으로 다시 조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중국식 햄버거 ‘두이자’ 먹지 않고는 츠펑 못 벗어난다

네이멍구자치구②

▲ ‘중국 햄버거’라 불리는 두이자.
전편에 이어 네이멍구자치구의 초원을 여행하면서 초원의 역사와 음식을 이야기합니다. 후룬베이얼을 떠나 서남 방향으로 내려오다 베이징에 어느 정도 다가오면 츠펑시(赤峰市)입니다. 츠펑(赤峰)은 시 외곽에 붉은색 바위 봉우리가 있어서 이름 붙여졌습니다. 홍산문화라고 하는 신석기시대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굴됐고, 흉노시대에는 동호(東胡)의 강역이었습니다. 흉노의 뒤를 잇는 선비족의 시대가 휩쓸고 지나가고 기원 10세기에는 거란이 흥성하여 요나라를 세웠던 곳입니다.
   
   탁발선비족이 호한(胡漢)의 융합을 통해 대당제국을 건설했으나 대당제국이 생명력을 다한 다음 5대10국이라는 혼란기를 거쳐 남쪽은 송나라에 의해 통일이 됩니다. 이때 화북지방과 북방에서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이 흥성하게 되니 이들이 요나라를 세웁니다. 요나라는 중국사에서 ‘최초의 정복왕조’라고 표현하듯이, 북방이 남방의 중원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정책을 취하지요. 그들의 조상인 선비족과 같은 호한융합 정책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공연히, 때로는 은근히 오랑캐라고 멸시해오던 북방민족의 하나가 거란인데, 아마 고려시대 때 우리와 수차례 전쟁을 치렀고, 발해 왕조를 멸망시켰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간단하게 오랑캐로 치부해버릴 대상은 아닙니다.
   
   유라시아에서 중국을 통칭하는 말이, 당나라 시대에는 탁발(중국어 발음은 퉈바)을 음사한 타브가치였고, 요나라 시대와 그 이후에는 거란의 중국어 발음을 딴 키탄 또는 키타이였으니, 동아시아의 역사가 이들 북방 유목민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키타이라는 말은 요나라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캐세이(Cathay)란 말이 되어 있습니다. 캐세이퍼시픽이란 항공사명의 캐세이가 바로 거란이란 뜻이지요.
   
   
   찬란한 불교문화 유적
   
   탁발선비가 북방과 중원의 문명 융합을 추진할 때에도, 거란이 북방을 통일하고 중원을 지배할 때에도 새로운 사회에 맞는 가치관으로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진흥했습니다. 중원의 가치관이 중원이 아닌 지역을 오랑캐로 멸시하고 차별한 것과는 달리, 불교는 훨씬 포용력 있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웠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탁발선비가 화북지방을 통일하던 때부터 운강석굴, 용문석굴과 같은 대형 불사가 많이 일어났고, 요나라 시대에도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특히 거란이 남긴 탑들은 그 웅장한 멋이 북방제국의 호방함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이징 시내에 남아있는 천녕사탑, 산시성 다퉁(大同)의 화엄사, 응현의 목탑, 네이멍구 츠펑시의 대명탑 등을 보면 거란이 오랑캐라는 선입견이 한순간에 가셔버릴 정도로 그 웅장한 멋이 그만입니다.
   
   2005년 미국에서 요의 진국공주와 부마의 묘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한 적이 있었는데, 전시회의 제목이 ‘문명인가 야만인가(Civilized or Babarian)’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란이 북방과 화북의 넓은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꽃피웠던 거란의 문화가 너무나도 찬란했기 때문에 한족과 중원의 기록에서 야만으로 묘사됐던 기존의 평가와는 너무도 판이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거란은 스스로 거란 문자를 창제하기도 했습니다. 북방에서는 일정한 수준으로 흥성해지면 곧바로 자신들의 문자를 창제했습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도, 여진족의 아골타도, 몽골의 칭기즈칸과 쿠빌라이도, 만주족의 누루하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종대왕의 한글입니다. 거친 환경에서 싸움만 잘하는 전사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북방의 유목문화 안에는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문자를 창제할 역량과 체제를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글은 인류 최후의 문자라고 할 만큼, 북방의 문자뿐 아니라 인류가 만들었던 어느 문자에 비해서도 너무나 잘 만들어진 문자이지만, 한글 역시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런 북방민족들의 문자창제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거란의 문화가 결코 오랑캐란 세 글자로 무시되고 외면될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황실 주방 훈제요리서 모방한 두이자도
   
▲ 고기소를 피로 싸서 기름에 지져내는 러우빙.
츠펑 시내에 있는 새로 지은 츠펑박물관에서 요나라의 광활한 강역이 멋있게 그려진 지도를 감상하고, 츠펑 북부 바린줘치(巴林左旗)에서 지금은 공터만 남아 있는 요나라 상경의 흔적을 거닐어 보고, 츠펑 남부의 닝청현(寧城縣)에 있는 요나라 중경 유지에서 대명탑(大明塔)의 웅장한 모습을 음미하고 나면, 츠펑의 특색 있는 음식을 찾아볼 차례가 됩니다.
   
   초원의 음식은 홍과 백이라고 하지만 츠펑은 약간 다릅니다. 이 지역은 온대 초원 기후로, 연간 강수량이 300~500㎜나 됩니다. 유목이 주였지만 약간의 농경도 있었기 때문에 곡식과 육류가 자연스럽게 결합되었지요. 단백질을 탄수화물로 싸서 먹는 것이라고 할까, 자오쯔(餃子)·러우빙(肉餠)·샤오빙(燒餠) 등과 같이 고기로 만든 소를 곡식가루 반죽으로 만든 피로 싸서 익혀내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계통에서 츠펑에서 가장 특색 있는 전통음식은 두이자(對夾)입니다.
   
   중국에서는 ‘중국 햄버거’라 부르기도 하는데 크기나 모양이 비슷합니다. 불에 구워낸 손바닥만한 빵의 옆을 갈라서, 잘게 썬 훈제 고기나 볶은 채소, 두부 등을 넣어 먹는 것입니다. 두이자의 빵은 옥수수가루로 만들기도 하는데, 바깥 부분은 바삭바삭하게 부서지고 빵의 안쪽은 부드러워 식감도 독특합니다.
   
   츠펑에 가면 두이자를 즉석에서 만들어 파는 노점상도 많고, 일반 식당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청난두이자스푸(城南對夾食府)가 제일 유명합니다. 중화라오쯔하오(中華老字號)란 명예도 주어졌고, 손님도 항상 많습니다. 소의 종류에 따라 가격 차가 있는데 채소를 넣은 것이 1.5위안, 고기를 넣은 것은 2~2.5위안으로, 두 개만 먹어도 속이 든든합니다.
   
   양고기가 아닌 소고기를 맛보기로 한다면 50위안(약 8800원) 정도로 펑간뉴러우(風干牛肉)의 맛도 괜찮습니다. 풀을 먹여 키운 소의 고기는 생고기든 말린 고기든 모두 초원의 특산물로 환영받습니다.
   청난두이자는 츠펑 시내 위안린루(園林路)와 하다시루(哈達西路)가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위안린루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황진다샤(黃金大厦)의 대각선 건너편이라고 해도 되고, 그저 청난두이자라고만 해도 츠펑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지요.
   
▲ 펑간뉴러우
겉으로 봐서는 별다른 특색이 없어 보이는 이 식당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 식당은 허베이 출신의 소문옥, 소문표 부자가 츠펑으로 이사 와서 장사를 하다가 개업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다훠샤오(哈達火燒)를 팔았습니다. 훠샤오(火燒)는 밀가루를 반죽해서 구워낸 빵에 고기를 끼운 음식입니다. 이후 돼지고기 대신 나귀고기를 넣은 루러우훠샤오(驢肉火燒)도 개발해 냈습니다. 소씨 일가 친척 가운데 자금성 안에서 요리사를 하던 이가 있었는데, 그를 통해 황실 주방의 훈제방법을 배워 자신들만의 특색 있는 두이자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훠샤오가 빵의 옆을 갈라 고기를 끼워 먹는 햄버거였다면 두이자는 햄버거의 밑을 꿰매 주머니로 만들어 고기를 넣었다고 할 수 있지요.
   
   
   200년 왕조, 10년 만에 멸망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청의 건륭제가 피서산장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를 추격해 잡았는데, 이때 츠펑의 홍산 근처에서 하루를 묵었답니다. 이날 황제의 요리사들이 38가지의 요리를 만들어 연회상을 차렸는데, 사냥에 참가했던 중신들이 두이자를 제일로 꼽았고, 이로부터 두이자가 이 지역의 민간인에게 전해졌다고도 합니다.
   
   두이자와 비슷하지만 소를 넣은 것을 기름에 지져내는 러우빙도 초원 어느 지역에 가든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크기는 우리 호떡만 한데 고기를 다져 만든 소를 넣고, 기름을 두르고 지진 것이라 우리 입맛에는 조금 느끼할 수 있습니다. 초원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식사입니다

 

조조·화타의 고향 약식동원! 보양식 발달

안후이성 보저우

▲ ‘보청구다오판디엔’의 상차림
안후이성은 남부에는 황산이 있고 중부에는 성도인 허페이(合肥)가 있지만, 독특한 음식기행을 위해 북부의 보저우(亳州)를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보저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후한의 명의 화타(華佗)의 고향이고 지금도 커다란 약재시장이 형성돼 있어 중국 4대 약도(藥都)의 첫 번째로 꼽기도 합니다. 중국의 4대 약도라 하면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안후이 보저우, 허베이 안궈(安國), 허난 위저우(禹州), 장시 장수(樟樹)를 말하지요.
   
   그런데 보저우에는 화타와 동시대 인물로 화타보다 더 유명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삼국시대의 영웅 조조입니다. 조조는 소설 삼국지에서 권력욕에 불타는 간웅이란 부정적 이미지로 덧칠되어 있지요. 사실 소설 삼국지는 실제 역사인물을 주인공으로 했지만 그 이야기 전개에서는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너무 극적으로 재미있게 꿰어 맞췄기 때문에 많은 역사인물들이 심하게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심한 경우가 바로 조조입니다.
   
   예를 들어 소설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실제 역사에서의 명의이자 조조와 동향인 화타가 등장합니다. 화타는 조조의 심각한 편두통을 진찰하고는 뇌수술을 하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하자, 조조는 화타가 치료를 핑계 삼아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하면서 화타를 죽여버립니다.
   
   그러나 화타(145~208)는 조조(155~220)가 죽기 12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화타라는 실존 명의를 등장시킨 것은 소설로서는 극적 재미를 잘 꿰어 맞춘 것이지만 역사로서는 조조를 의심 많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하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을 등장시켰으니 어처구니없는 왜곡이지요. 화타는 실제 마비산(麻沸散)이라고 하는 마취제를 개발하여 외과수술을 크게 발전시킨 명의입니다.
   
   
   음식이 곧 보약
   
   화타가 소설 삼국지에 뜬금없이 등장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관우의 유명한 에피소드 가운데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다가 독화살을 맞자 화타가 이를 치료하는데, 칼로 팔뚝의 살을 가르고 뼈에 묻은 독까지 긁어내는 동안 관우는 태연하게 바둑을 두었다고 하지요. 관우의 초인적 인내심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대목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관우가 화살을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의사는 화타가 아니었지요. 화타는 11년 전에 죽었던 것입니다. 화타의 명성 덕분인지 오늘날까지 약재시장이 크게 번성하고 있는 보저우에서, 식욕이 떨어진 여행객은 보양음식을 한번쯤 찾아볼 만합니다.
   
   중국에서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 해서 음식과 약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질병이나 체질 등에 적합하게 음식을 섭취하면 음식이 곧 약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약선(藥膳)이라고도 하고, 음식으로 몸을 보하거나 치료하는 것을 식료(食療)라고 합니다. 보저우는 약재시장의 전통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음식에 약재가 첨가되는 보양식이 자연스럽게 발달한 것 같습니다. 보저우에서 유명한 보양식 전문식당으로는 보청구다오판디엔(亳城古道飯店)이 있습니다.(주소 亳州市 三曹路 133號, 문의 0558-516-6999, 559-8989) 광밍루(光明路)와 싼차오루(三曹路)가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20미터 정도 들어가면 됩니다. 보청구다오에 들어서면 종업원의 인사와 함께 기둥을 장식하고 있는 ‘영웅 조조’를 마주하게 되니 이곳이 조조와 화타의 고향이라는 점이 실감납니다.
   
   
   작약 넣은 수탉요리도 유명
   
▲ 보양식 전문식당 ‘보청구다오판디엔’
이 식당에서는 차오스위터우(曹氏魚頭)와 화주먼야(華祖燜鴨)가 대표적입니다. 조조의 생선요리와 화타의 오리요리라고는 하지만, 역사나 전설에서 조조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이 지방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빌린 것이지요. 차오스위터우는 뇌를 맑게 하여 건강하게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요리의 주재료가 생선대가리라서 하는 말로 보입니다. 팡위라는 신선한 생선의 대가리를 한 시간 이상 물에 담가두었다가 솥에 넣고 찐 다음, 인삼과 천마(天麻), 복령(茯嶺) 등 서른두 가지 약재를 넣고 24시간 동안 고아 냅니다. 또 화주먼야는 기와 혈을 북돋우고 식욕을 증진하는 효능이 있답니다. 보저우 현지의 토종오리를 선별해서 서양삼, 영지, 지네 등 16가지 약재와 특제소스를 넣고 뭉근한 불에 올려 아주 오랫동안 가열하면 오리가 부드럽게 되지요.
   
   이 지방의 토종닭요리 샤오화지(芍花鷄)도 있습니다. 작약의 꽃과 닭이란 뜻인데 어린 수탉에 작약의 꽃과 뿌리, 연꽃, 천리향, 나한, 팔각향, 향엽 등을 넣고 끓여낸 것입니다. 어려운 중국어로 활혈보혈산어(活血補血散瘀)와 평간강조양신(平肝降燥養身)이라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데, 혈량을 보충하고 혈행(피돌기)을 활성화해 어혈(죽은 피, 혈전과 콜레스테롤 등)을 없앤다는 뜻이며, 위로 올라가는 간의 기(열)를 내려주며 건조함을 없애고 몸을 기른다는 뜻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피를 보충하면서 어혈을 없애서 부족한 음을 보하고 넘치는 양을 적절하게 내보냄(瀉)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몸을 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에서 보양식은 대개 음을 보하고 양을 사하는 쪽이라고 합니다. 음에서도 특히 신장을 보해주는 것들이 많은데 이것은 중국인들의 체질 특성상 보통 음이 허해서 양이 위로 오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랍니다.
   
   약재 이야기를 잠시 더 해보자면, 한의학에서 작약의 꽃과 뿌리는 모두 간의 음을 보하고 열을 내리는 작용을 합니다. 이 보양식의 주약(主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연꽃도 열을 내리는 작용을 합니다. 천리향(千里香)은 구리향이라고도 부르는데 따뜻한 성질로 기를 돌려주는 작용을 해서 활혈작용을 돕습니다. 나한과(羅漢果)는 계림지역의 특산품으로 폐의 열을 내리는 약인데 주로 건조증에 많이 사용합니다. 보건식품으로 각광을 받는 약과 보건식품의 중간단계라고 할까요? 팔각향, 향엽 등은 향신료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오향장육의 재료들이기도 하지요.
   
   이 식당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호화로운 것도 아니지만 식당 운영에 내실이 있고 인터넷을 포함한 마케팅도 꽤 활발합니다. 일반식당과 달리 자신의 홈페이지(bcgdys.com)를 통해서도 중국의 보양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런 보양식은 대개 맵지도 짜지도 않고 뜨거운 국물이 주를 이루는 게 많은데 맛은 담담하면서 부드러운 게 대부분입니다. 설명해 놓은 재료를 보면 약간의 약재가 첨가되었을 뿐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소불알을 넣은 것과 같이 듣기에는 좀 거북할 수 있는 요리도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탕류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중국에서의 보양식은 우리나라의 삼계탕이나 곰탕과 유사합니다. 맵지도 짜지도 않게 오래 고아서 탕으로 만드는 이유는 소화 흡수 때문이지요. 병약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만큼 소화력이 좋지 않습니다. 고기나 약재 등을 오래 끓이면 영양성분이 더 많이 국물로 우러나오고, 이것이 소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약재일수록 더 많은 시간을 끓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잘 먹는 것보다 잘 소화시켜야
   
▲ 토종닭 요리 샤오화지
고기의 경우도 수육을 먹는 것과 탕으로 먹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수육은 육질을 직접 섭취하는 것이지만 소화력이 떨어지는 병약한 사람에게는 보양의 효능이 크게 떨어지고, 오랜 시간 고아낸 탕은 소화 흡수가 잘되기 때문에 보양식으로서 훨씬 좋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소화력이 약한 사람이 수육을 먹어봤자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바로 배출되어 버리니 보양의 효과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양식을 먹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보양식을 먹으면 건강해질까요? 보양식을 많이 먹는 사람들이 다 장수했을까요? 차무 박사(중국 중앙민족대학 중국소수민족전통의학연구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합니다.
   
   “현대사회에도 영양실조가 생깁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소화에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은들 소화를 못 시키면 흡수가 안 되기 때문에 먹으나마나입니다. 아무리 좋은 보양식도 소화를 못 시키면 오히려 장에 쌓여 결국엔 썩게 돼서 만병의 근원이 되곤 합니다. 현대사회에 영양실조가 생기는 이유도 바로 소화장애로 인한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좋은 것을 찾아 먹기보다는 나쁜 것을 안 먹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먹더라고 적게 먹으면 그만큼 이익입니다. 중국의 보양식과 한국의 것과 별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재료가 약간 다를 뿐이죠. 먹어서 손해볼 것도 없습니다, 과식만 안 한다면 말이죠.”

 

지방정부 부설 식당을 찾아라!

베이징서 실속있게 ‘중국’을 맛보는 방법

▲ 후난음식 전문점인 베이징의 샹두위안.
중국에서 가장 맛있는 도시는 어디일까요? 저라면 외국인에게 가장 맛있는 도시는 바로 베이징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베이징에는 각 지방의 음식이 전부 들어와서 치열한 맛의 경연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이징은 기후와 물산이 모두 척박한 곳이라 음식 문화가 발달할 만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근 1000년 동안 중국의 수도였다는 정치적 지위 때문에 전국의 음식 문화가 모여드는 곳이 되었고, 지금도 외국인이 중국의 음식 문화를 집약적으로 맛보기로 한다면 단연코 베이징이 제일 좋습니다. 이 연재를 통해 지금까지 스무 곳이 넘는 지역을 다니면서 음식을 맛보았지만, 베이징에서는 이 음식들을 전부 맛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늘부터 몇 회에 나눠서 베이징에서 베이징다운 음식기행을 하려고 하는데, 워낙 큰 도시인 데다가 외식이 발달한 베이징의 식당을 객관적으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제가 경험하고 쓴 ‘북방맛집100’이란 아이폰 애플리케이션에 담았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베이징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지요.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의 수도가 현재의 베이징 지역이었으니 3000년이 넘는 고도입니다. 전국적인 비중이 있는 수도로서는 요나라가 이곳에 남경유도부(南京幽都府)라는 이름으로 배도(陪都)를 설치한 938년부터라고 할 수 있고, 전체 중국의 수도로 올라선 것은 몽골제국의 원나라가 대도(大都)라는 이름으로 수도를 삼은 1272년부터입니다. 베이징(北京)이라는 명칭은, 남경의 황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오른 명의 영락제가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근거지인 이곳에 수도를 정하면서 붙여진 것입니다.
   
   베이징은 말 그대로 북쪽에 있는 수도로서 북방민족들이 중국의 패권을 잡으면서 수도가 됐습니다. 중원의 세력이 강했을 때 북방과의 단절을 위해 쌓은 장성이 중원의 입장에서는 북방한계선이었지만 북방민족의 입장에서는 장성을 돌파하여 베이징까지만 진출하면 중원 전체를 호령할 수 있는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지형으로 보더라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허베이평원은 1000㎞ 이상 펼쳐져 난징이나 항저우까지 이르기 때문이지요. 중원과 북방의 대결에서 북방이 항상 우세했고, 남방을 배경으로 탄생한 명나라조차도 북방에 머무르던 영락제가 남방의 황제보다 강력했던 탓에 베이징은 북쪽의 수도가 아니라 전체 중국의 수도로 굳어지게 된 셈입니다.
   
▲ 한텅거리찬팅의 ‘따판지’
황제의 권력을 정점으로 형성되는 수도에는 전국의 인재와 물산과 문화가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고 베이징에서는 전국 각지의 음식이 맛의 경연을 벌이게 되었지요. 베이징에 각 지방의 음식 문화가 모여드는 통로는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황실에 바쳐지는 각 지방의 공물들입니다. 각 지방의 특산물들은 어김없이 황실에 바쳐지고, 그 가운데 음식은 황실의 주방에서 서서히 베이징의 고관대작이나 일반 백성들에게 흘러나오게 됩니다.
   
   또 하나의 경로는 후난(湖南)회관, 광둥난하이(廣東南海)회관, 산시(山西)회관 등과 같은 독특한 회관 문화였습니다. 회관은 베이징에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이 베이징을 찾아온 동향 사람들을 상대로 음식숙박업을 하는 곳입니다. 지방의 방언과 베이징의 언어가 워낙 달랐기 때문에 동향인이 운영하는 음식숙박업소는 지방 사람들이 베이징에 적응하는 필수적 관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베이징의 회관은 과거시험과 관련이 깊어 시관(試館)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육제도와 관리직 임용이 일치되었던 중국에서 과거는 전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필생의 과업이었고, 지방의 예비시험을 거친 다음에는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본고사(會試)에 응시하기 위해 베이징에 직접 왔어야 했습니다. 이런 본고사 참가 인원이 6000~7000명씩이었고 그들을 수행한 하인을 한 명씩만 계산해도 1만5000여명이 베이징에 두어 달씩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들이 베이징에 와서 일정 기간씩 시험 준비를 했던 탓에 요즘 말로 과외공부도 성행했고, 과거에 낙방하고는 베이징에 눌러앉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니 이들의 취업 전선 역시 이 회관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회관은 전국 각 지방 사람들이 자기들끼리의 숙식과 놀이와 직업이 한데 엮어지면서 베이징에 이질적인 지방문화들이 병립하게 하는 거점이 된 것이지요.
   
   역사상 최초의 회관은 명나라 초기 베이징에 만들어진 우후(蕪湖)회관입니다. 이 최초의 회관에서도 그렇듯이 회관은 지명을 그대로 쓰곤 합니다. 베이징의 회관은 가장 번성했을 때 전국 각지의 회관이 모두 있었고 크고작은 회관이 무려 400여곳이나 됐다고 합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치면 성급 단위의 회관도 있었고 그보다 작은 도시나 현 등에서도 베이징에 회관을 두고 있었습니다. 회관 중에서도 유명한 회관들은 샤오싱(紹興)회관, 중산(中山)회관, 후난(湖南)회관, 후광(湖廣)회관, 난하이(南海)회관, 류양(瀏陽)회관, 장시(江西)회관, 산시핑야오(山西平遙)회관, 허둥(河東)회관입니다. 이들은 20세기 초 중국 정세가 격랑에 휘말릴 때에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인재들이 머무르며 많은 일들을 모색하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도 보호문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 (좌)산둥주징반찬팅의 ‘로보완’ (중)촨판찬팅의 ‘탄탄멘’ (우)한텅거리찬팅의 ‘셴쥔탕바오’

   이런 회관 문화와 유사한 맥락에서 각 지방 정부의 베이징 주재 연락사무소에 부설된 식당(○○駐京辦餐廳)들이 있는데, 이런 식당은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 실속있고 그 지방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식당들이니 기억해 둘 만합니다. 맛있는 음식은 어디를 가나 환영받고 좋은 사업 아이템이 되지만 베이징의 다양한 식당들은 다른 대도시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독특한 역사·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추천식당으로는 촨판찬팅(川飯餐廳·쓰촨음식·전화 6512-2277), 한텅거리찬팅(汗騰格里餐廳·신장음식·전화 6833-5599), 구이저우주징반찬팅(貴州駐京辦餐廳·구이저우음식·전화 6444-4466), 샹두위안(湘都園, 湖南駐京辦餐廳·후난음식·전화 8200-5999), 산둥주징반찬팅(山東駐京辦餐廳·산둥음식·전화 8200-2288) 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이징을 다녀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까지 자금성이나 만리장성만 보셨다면 이제는 스차하이와 회관이 남아 있는 베이징 남부의 후퉁(胡同)을 돌아봐도 좋을 듯합니다.
   
   지하철 4호선 차이스커우(菜市口)역 C출구(동남)나 D출구(서남)의 동서쪽 배후로 들어가면, 외관만 번듯하게 관광지로 개조된 후퉁이 아닌, 지금도 베이징의 서민들이 그대로 살고 있는 후퉁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골목 어딘가에서 루쉰의 샤오싱회관, 쑨원의 중산회관, 마오쩌둥의 후난회관도 만날 수 있고, 탄쓰퉁(譚嗣同)이나 캉유웨이(康有爲)와 같은 19세기 말의 개혁가들이 살던 옛집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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