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부산 초겨울 여행

醉月 2011. 12. 3. 11:21

이른 새벽 경매를 위해 부산 남항의 부산공동어시장에 부려진 고등어. 제주 동남쪽 해안에서 잡아 올려 밤새 운반선이 싣고 온 것이다. 막 잡은 고등어는 배 쪽의 비늘이 마치 갈치처럼 은빛으로 반짝거린다.

당장이라도 퍼덕이며 다시 바다로 돌아갈 것 같은 싱싱한 고등어들이 푸른 새벽에 부산 남항의 공동어시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한달 내내 바다에서 고등어의 뒤를 쫓는 대형선망선단이 잡아낸 것을, 운반선들이 싣고 밤새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들입니다. 운반선들이 이날 공동어시장에 내린 고등어는 20㎏짜리 18만 상자에 달했습니다. 상자당 고등어 50마리쯤이 들어간다니 이날 새벽에 공동어시장에 나온 고등어를 헤아려 보면 무려 900만 마리입니다.

가을 생선은 흔히들 전어를 첫손으로 꼽지만, 날이 차가워지면서 살이 탱글탱글해지고 기름이 자르르 도는 등푸른 고등어에 대자면 어림도 없습니다. 고등어에 칼집을 내고 굵은 소금만 뿌려서 석쇠에 구워 먹어도 좋고, 무를 숭덩숭덩 썰어서 짭짤하게 조려내도 그만입니다. 노릇하게 구워진 겨울 고등어의 맛을 어떤 생선이 따라올 수 있을까요.

한창 맛이 오를 대로 오른 고등어는 부산에 모였다가 온 나라 안의 어물전에 풀립니다. 부산이야 언제 다녀온대도 좋은 곳이지만, 누군가 ‘왜 꼭 지금이냐’고 묻는다면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고등어’입니다. 혹 ‘그깟 고등어’라고 치부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흔한 탓에 그 맛의 귀함을 우리가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부산이야말로 분광하는 스펙트럼처럼 다양한 색깔을 지닌 도시입니다. 자갈치시장의 시끌벅적한 사투리와 고등어를 부리는 억센 팔뚝의 어부들의 노동이 있는 남항 부두가 있고, 6·25전쟁 때 피란민의 삶이 아직 남아 있는 아미동의 산동네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21세기형 토건과 도시계획을 실현하는 마천루의 해운대도 있습니다. 아직 은행나무의 단풍이 다 물들지 않은 부산으로 초겨울 여정을 떠납니다.

해운대 동백섬 쪽에서 바라본 야경. 21세기형 도시계획의 정점을 보여주는 고층건물과 주상복합 건물들이 비현실적으로 서 있다. 위로 치솟는 건물들과 날로 고급스러워져 가는 레스토랑과 상점들은 도시의 소비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부산에서 먼바다를 회유해온 등 푸른 고등어를 만나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의 부산 남항. 공동어시장은 밤새 대형선망선단의 운반선들이 싣고 와 부려 놓은 고등어들로 가득했다. 고등어를 담은 나무상자들이 어찌나 많던지 그 넓은 어시장의 바닥이 안 보일 정도였다. 이날 하루 부려진 고등어는 18만여 상자, 삼치며 광어, 도미 같은 이른바 ‘고급생선’도 이곳에서만큼은 고등어에 밀려 아예 ‘잡어’ 취급을 받았다.

갓 잡아올린 고등어는 시장이나 마트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또렷한 눈에, 등의 푸른 빛은 짙은 검은 색에 가까웠고, 배 부분은 마치 은갈치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바닷물에 담그면 당장이라도 지느러미를 흔들며 깊은 바다로 돌아갈 것 같았다. 이런 싱싱한 고등어를 가져다 소금을 뿌린 뒤 연탄불에 노릇하게 구워낸다면, 그것 만한 별미가 또 있을까.

이즈음 고등어 어장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남쪽과 제주 해역의 동쪽에 형성돼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잡은 고등어는 가까운 항구로 가지 않고 다 부산으로 실려온다. 왜 고등어는 부산에 다 모이는 것일까.

그건 대형선단이 접안하거나 들고 나려면 부산처럼 큰 어항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이 첫째 이유다. 고등어 조업에는 보통 100t 남짓의 망선(그물배) 한 척과 불배 역할을 하는 세 척의 어탐선, 두 척의 운반선을 ‘한 통’으로 하는 대형선망선단이 나선다. 망선과 어탐선은 한 달 남짓 바다에 머물며 고등어를 잡아 올리고, 잡은 고등어는 운반선이 부지런히 항구로 실어나른다. 고등어잡이에 대형선단이 나서는 것은 고등어 어장이 연안에서 비교적 먼 곳에 형성되고, 고등어떼의 속도가 빨라 여간해서는 뒤쫓기 쉽지 않기 때문. 게다가 고등어는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까닭에 한번 그물을 내리면 찢어질 정도로 올라오니 이 정도 규모가 아니고서는 잡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등어라고 다 같은 고등어는 아니다. 고등어는 참고등어와 ‘물고등어’나 ‘기름고등어’라 부르는 망치고등어로 나뉜다. 배 부분에 희미한 잔 점이 박힌 것이 망치고등어인데 살도 무르고, 기름이 많아 맛이 참고등어에 크게 못 미친다. 그러니 망치고등어는 경매 가격도 참고등어의 60% 정도에 불과하다. 한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값싼 망치고등어가 도회지에서는 대부분 참고등어와 구분 없이 팔린다는 것. 그러니 초겨울 고등어의 참맛을 보겠다면 참고등어를 잘 살펴서 찾을 일이다.

#부산에서 맛보는 노릇하게 구워낸 고등어구이

부산의 이미지는 ‘도시’다. 바다를 끼고 있다고 해도 부산의 항구는 ‘컨테이너선이 오가는 무역항’쯤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건 부산 북항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남항은 아직도 어선들이 잡아온 생선들을 부리는 바다 냄새 가득한 어항이다.

남항의 부둣가 풍경이 다 그렇다. 그곳에는 억센 사투리의 자갈치 아지매, 그리고 뱃일로 손마디가 굵은 어부, 줄지어 정박하고 있는 녹슨 철선이 있다. 자갈치시장쯤에서 바다 내음 가득한 부둣가를 따라 공동어시장을 지나 암남동까지 부두의 도로를 걷다 보면 부두의 삶이 꿈틀거리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북항과 남항을 가르는 것은 1934년 놓인 영도대교. 다리의 한쪽 부분을 번쩍 들어 배가 드나들도록 했던 이른바 ‘도개교’인 영도대교는 다리를 들고 내리면서 북항과 남항을 가르고 또 이었다. 그러다 영도대교가 더이상 다리를 올리지 않으면서 북항과 남항은 완전히 분리됐고, 북쪽은 무역항으로, 남쪽은 어항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부산은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고등어 잡이의 중심이었다. 일제 때 부산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잡은 어종은 고등어였다. 거룻배로 조업을 했던 조선인들은 연안 가까이 다가온 멸치나 갈치 따위를 잡는 게 고작이었지만, 발동선을 앞세운 일본인들은 먼바다로 나가 고등어를 잡았다.

당시 어획 기록을 들춰보면 해마다 일본인들이 최고로 많이 잡은 생선이 고등어였다. 1931년에는 한 해 동안 일본인 어부들이 44만6666관(1675t)의 고등어를 잡아올렸다. 당시로써는 기록적인 어획량이었다. 그러나 이를 지금의 어획량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당시 한 해 동안 잡은 고등어가 요즘 공동어시장에서 하루 경매되는 고등어의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얼마나 고등어가 흔해졌는지, 당시에 고등어가 얼마나 귀한 생선이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아미동과 감천동 일대의 산동네들. 산비탈에 들어선 누추한 집들은 옛 피란민 판자촌의 흔적에 다름아니다.
이즈음 한창 제맛을 내는 고등어를 어디서 맛볼까. 남포동의 옛 미화당 백화점 뒤편에는 고등어를 구워 달큼한 간장양념을 바른 이른바 ‘고갈비(고등어갈비)’를 내놓는 식당이 있다. 한때 이런 식당들이 늘어서 있어 ‘고갈비 골목’이라 불리던 곳인데 지금은 단 두 집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공동어시장의 허름한 구내식당에서도 고등어구이와 조림을 낸다. 어시장 사람들에게 구워내는 고등어니 참고등어임은 말할 것도 없겠고, 신선도 역시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원도심의 산동네 마을에서 만나는 기억들

초량동의 왜관을 중심으로 한 이전의 역사가 왜 없을까만 부산의 역사라면 대번에 해방과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떠올리게 된다. 부산의 진면목을 보려면 21세기형 토건과 도시계획을 상징하는 해운대 일대보다 이른바 ‘불량주택’들로 가득한 비탈진 산동네의 원도심권을 먼저 만나야 한다.

부산은 해방 이후 몰려든 귀환동포와 6·25전쟁통에 쫓겨온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부산의 산동네 마을은 이런 와중에 급박하게 들어섰다. 얼기설기 나뭇조각을 이은 판잣집에서, 기름종이를 지붕에 얹은 루핑집으로, 다시 시멘트로 찍어낸 블로크 집으로 변해갔지만, 부산항을 내려다보는 산동네 마을에는 옛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원도심의 아미동이다. 한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들어섰다가 해방 이후 판잣집들이 늘어섰고, 지금은 비탈진 사면을 따라 막다른 계단과 좁은 계단 사이로 다닥다닥 붙여 지어진 집들이 부산항을 굽어보고 있는 곳이다. 일본인들의 묘비와 비석은 시멘트와 비벼져 계단이 되기도 하고 벽체가 돼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피란시절 여기 살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고향을 떠난 피란민들은 빈곤층으로 전락해 부두노동자, 행상, 구두닦이, 날품팔이 따위의 일을 하며 이곳에서 고단한 삶을 의탁했으리라. 어디 아미동만 그랬을까. 전쟁 전 인구 47만이었던 부산에는 6·25전쟁과 함께 217만명의 피란민이 밀어닥쳤다. 이렇게 늘어난 피란민들은 공터마다 판잣집을 지었고, 블록을 찍어내 세웠다. 이렇게 들어선 마을의 흔적이 초량동과 수정동, 영주동 일대에 남아 있다.

산동네 마을뿐만 아니다. 부산에는 당시 피란시절의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영도다리다. 부산항과 영도를 잇는 ‘도개교’인 영도다리는 1934년 처음 세워졌을 때 무려 6만명이 넘는 구경꾼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도다리가 어찌나 유명했던지 부산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피란민들은 헤어진 가족과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고, 다리 주변에는 헤어진 가족의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던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형성된 곳이 다리 아래 이른바 ‘점바치 골목’이었다. 한때 50여곳이 넘었다는 점집에는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난리통에 헤어진 식구들이 과연 살아 있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지금 영도다리는 보전도 철거도 아닌 어정쩡한 보수가 진행되고 있고 다리 아래 남아 있는 3곳의 점집도 개발의 바람에 문을 닫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한 시대의 아픈 기억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공간 해운대에서 올려다보는 겨울의 달

부산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축은 고층빌딩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즐비한 현대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해운대 일대다. 해운대는 일찍이 신라말 최치원이 마흔셋의 나이에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예감하고 가야산으로 홀연히 들어가면서 들렀던 곳. 해운(海雲)이란 이름도 최치원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영조 때 겸재 정선은 인근의 청하현감으로 재직 중 해운대와 태종대, 몰운대, 영가대 등을 찾아 화려한 필치로 ‘교남명승첩’을 펴내기도 했다. 겸재가 그린 해운대의 그림 속에는 와우산의 두 봉우리가 뚜렷하고, 해변의 오산마을의 집들, 그리고 바다에 떠있는 두 척의 범선이 운치 있게 그려져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해운대는 백두산 천지와 금강산 일만이천봉, 한라산 등과 함께 ‘대한팔경’ 중의 하나로 꼽혔다.

호젓한 백사장과 소나무들이 운치있게 서 있던 백사장은 지금 치솟은 고층빌딩과 세련된 레스토랑, 값비싼 커피숍들로 대체됐다. 한때는 풍류의 공간이었던 해운대가 세련된 도시민들의 욕망이 출렁이는 공간이 된 것이다. 여행자들은 이곳 해운대에 와서 도시의 편리함과 바다의 낭만을 두루 소비하고 있다. 해운대를 찾은 이들은 특급호텔과 세련된 모텔들에 거처를 정하고 달맞이고개 아래 해변의 송림을 거닐거나 바다를 굽어보는 해안가의 카페를 순례하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겨울 해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는 바로 달맞이길의 산책이다. 부산이야 겨울에도 그다지 춥지 않은 곳. 겨울의 맑은 대기 속에서 교교한 달빛 아래 이른바 ‘문탠로드’를 따라 밤길을 걷다 보면 해운대의 주인공은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 위로 뜨는 흰 달이라는 것쯤은 쉽사리 눈치챌 수 있다.


이제 웬만한 관광지에서는 다 사라진 ‘사진사’가 부산의 용두산공원에는 아직 남아 있다. 그것도 어엿한 일련번호가 매겨진 자격증이 있는 용두산공원의 ‘공식’ 사진사다.

용두산공원에 ‘공식’ 사진사가 등장한 것은 1973년 부산타워가 준공되면서부터. 부산타워 건립과 함께 부산시는 30명의 사진사에게 용두산공원에서 영업권을 허가하고 이들에게만 관광객의 사진을 찍어줄 수 있도록 했다. 이들에게는 1번부터 30번까지의 일련번호가 매긴 일종의 자격증을 내줬는데, 그때 1번 번호를 받은 이가 이상훈(75·사진)씨다. 피란민 출신인 이씨는 카메라라고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당시로써는 거금인 ‘하꼬방 한 채 값’을 주고 자격증을 받았고, 쌀 한 가마니 값인 아고스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40년여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카메라를 메고 용두산공원에 나오고 있다.

“지금이야 카메라가 아닌 (휴대)전화기로도 사진을 찍는 세상인데, 누가 사진사에게 사진을 찍겠어. 이젠 그저 소일삼아 나오는 거지.”

자격증을 가진 30명 중 나머지 20명은 일찌감치 그만뒀고 나머지 10명 정도가 드문드문 용두산공원에 나와 앉는다. 사진사가 10명이면 경쟁도 있을 법 하건만, 아예 사진사를 부르는 손님이 없으니 경쟁도 없다. 그저 공원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가물에 콩 나듯 사진찍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앞뒤로 기념사진이 인화된 패널을 펼쳐놓고 공원 구석에 카메라를 멘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이씨의 모습에서는 과거 추억의 따스함과 묘한 서글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먹고살 만 했지만 지금은 아침나절에 나왔다가 하루에 한 장도 못 찍고 돌아가는 날들이 더 많다. 그래도 이씨는 앞으로도 걸을 힘이 있는 한 용두산공원에 나올 생각이라고 했다. 사진을 찍으려는 손님이 줄을 섰던 ‘좋았던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피란 와서 평생 밥벌이가 돼 준 일을 하루아침에 놓기가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란 게 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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