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높이의 황금빛 주탑 두 개가 받치고 선 다리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거금대교가 특별했던 것은 두 개 층으로 다리를 놓아 아래 층을 순전히 걷거나 자전거를 탄 이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차들은 모두 다리의 2층으로 오고가니 그 아래에서는 아무런 방해없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교각 사이로 여객선이나 어선들이 바다를 가르며 긴 꼬리를 그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섬으로 건너가는 맛이 어찌나 각별하던지요. 다리를 건너 들어간 거금도는 곳곳에 비밀처럼 명소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강화도의 5분의 1쯤 되는 크기의 섬이라 다 돌아보는 데 한나절이면 충분하겠거니 했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섬 안에서의 일정은 이틀로 늘어났고, 그럼에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 때문에 내내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찍이 고흥 팔경 중의 하나로 꼽는 거금도 해안일주도로의 풍광은 말할 것도 없고, 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파성재 능선을 따라가다 굽어본 바다 건너 고흥반도 쪽의 풍경은 숨이 턱 막힐 정도였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거금도에서 뱃길로 5분 거리에 떠있는 자그마한 섬 연홍도에서는 바다를 정원으로 두고 있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연홍미술관을 만났고, 저물녘 오천항 부근의 서천마을 해변에서는 공룡이 낳은 알처럼 거대한 둥근 갯돌들이 조용히 바다에 씻기고 있는 모습과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여기다가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 멍석을 깐 마당에 모여앉아 거금도가 고향인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경기를 흑백TV로 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던 마을 주민들의 추억담까지 더해졌습니다.
# 천등산에 올라 거금도를 내려다보는 맛 전남 고흥은 부드러운 남쪽 바다를 끼고 있지만 산세가 제법 거칠다. 해발 500~600m를 넘나드는 산만 해도 팔영산과 적대봉, 천등산, 마복산 등 4개나 된다. 여기다가 운암산과 봉래산도 400m를 훌쩍 넘는다. 암봉으로 치솟은 산의 자태도 범상치 않다. 팔영산의 여덟 봉우리도 그렇고, 마복산의 기암들도 그렇다. 삼나무 숲이 울창한 봉래산도 명산으로 꼽을 만하다. 나로도며 남열리, 용바위 등 고흥 동쪽의 이름난 관광지를 다 제쳐두고 고흥 서쪽으로 향한 것도, 고흥의 이름난 산 중에서 굳이 천등산을 택한 것도 오로지 거금도 때문이었다.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의 섬 거금도는 이제 열흘 남짓이면 육지가 된다. 빼어난 풍광과 명소를 두루 갖춘 거금도로 건너가는 연륙교 거금대교가 오는 16일 개통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빼어난 풍경을 갖고 있으되 손대지 않은 처녀지나 다름없는 섬마을이 이제 막 봉인에서 해제돼 육지로 편입된다. 그 섬을 굽어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가 바로 천등산이다. 바다 건너 거금도로 건너가는 거금대교를 세우는 데는 착공 이후 9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보다 몇배나 더 오랜 시간 육지를 잇는 다리는 섬사람들의 꿈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거금대교를 단번에 건너지 않고 천등산을 먼저 찾았던 이유는, 어쩌면 그 긴 시간을 인스턴트처럼 한 번에 가로지르는 것의 싱거움, 혹은 불경스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굳이 그런 마음이 아니라도 상관없겠다. 천등산에 올라서면 거금도를 위시해 고흥반도 남서쪽에 떠있는 소록도와 시산도, 지죽도 등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지니 말이다. 천등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다 바다다. 도대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의 호사다. 천등산의 높이는 해발 554m. 바다를 끼고 있는 산은 높이만 보고 덤볐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해발 0m의 수준점에서 출발하니 체감하는 높이가 훨씬 더하다. 그러나 천등산은 산행의 어려움을 걱정할 필요없다. 관광객들을 위해 개방한 임도가 거의 산자락의 8부 능선까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풍양읍 율치리 사동마을에서 사동마을회관을 지나 5.5㎞ 남짓의 임도를 따라 들어가면 정상 아래 너른 주차장에 당도한다. 시멘트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번갈아가며 나오는 임도는 좀 거칠긴 하지만 조심하면 승용차로도 오를 수 있다. 등산에 영 취미가 없다면 주차장까지만이라도 다녀오길 권한다. 천등산 정상까지 가지 않는대도 임도를 따라가면서 펼쳐지는 경관만으로 입이 딱 벌어진다. 능선과 능선 사이로 펼쳐지는 바다의 풍경은 그냥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주차장에서 천등산 정상까지는 20분 남짓.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왕복 1시간이면 족하다. 정상에서 서남쪽 바위능선을 따라 가면 발바닥이 간질간질한 수직의 암봉이 나타난다. 여기에 올라서 굽어보는 거금도와 거금대교 일대의 풍경은 어찌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저 가서 보는 수밖에…. 천등산에서의 거금도 조망이 고흥 여행의 ‘필수’라면, 천등산의 반대편 능선의 금탑사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선혈처럼 붉은 초입의 단풍나무 가로수길을 지나고, 흰 수피의 나목들도 지나서 만나는 초록의 비자나무 숲. 그 가운데 들어선 절집의 풍모도 예사롭지 않다. 오래 묵은 돌담의 선이며, 장독대의 자리까지 어찌 저리 딱 맞는 자리에, 딱 맞게 앉아있는지…. 그윽한 조경만을 위해 가꾼 듯하다. 금탑사를 ‘선택’이라 했지만, 사실 천등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에서 비자나무의 초록 숲 한가운데 앉은 금탑사의 모습을 내려다본다면, 그곳을 들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게 틀림없다.
# 보행자들에게 한 층의 다리를 내준 다리 거금도는 고흥의 녹동항 쪽에서 소록도를 딛고 건너간다. 거금대교는 총연장 6.67㎞. 육상구간을 빼면 바다를 건너는 교각구간은 2㎞ 남짓이다. 거금대교는 높이 168m의 주탑 두 개가 케이블로 연결한 상판을 버티고 서있다. 거금대교는 늘씬하게 잘 생겼다. 다리가 보여주는 조형미만으로도 가 볼 이유는 충분하다. 거금대교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다리 상판이 2층으로 돼 있다는 점. 차량들은 2층 상판의 도로를 시원스레 달리고, 그 아래층은 보행자와 자전거가 다닌다. 도로 옆에 보도를 놓은 다른 다리와 무어 다를까 싶었는데, 한 층의 다리를 다 차지하고 활보하는 기분은 차량의 소음 속에서 옹색한 보도를 따라 건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걸으면서 좌우 양쪽의 바다를 다 볼 수 있었다. 빤히 건너다보이는 작은 섬인 상화도와 하화도 앞으로 고깃배들과 중대형 어선, 화물을 실은 상선들이 오갔다. 배들이 바다 위로 길게 끌고 가는 포말에 햇살이 부딪쳐 반짝거렸다.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런 길을 따라 바다를 건너 섬으로 걸어들어간다. 거금도에 당도하면 먼저 골프 퍼터 모양의 섬을 한바퀴 도는 해안일주도로에 오르는 게 순서다. 거금대교를 건너면 금세 금산면사무소를 지나게 된다. 면사무소를 지나자마자 김일기념관이 있다. 그 뒤쪽엔 체육관도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거금도는 1960~70년대 가히 ‘국민적 영웅’이었던 프로레슬러 김일의 고향이다. 당시 김일 선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지금으로 치자면 프리미어리그의 박지성 선수과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를 합친대도 어림없을 정도였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 온 국민은 야비한 반칙을 밥먹듯이 하는 일본 선수를 단번에 때려눕히던 김일의 박치기 한 방에 시름을 잊곤 했다. 김일기념관은 사실 기념관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옹색하다. 자그마한 기념관은 굳게 문이 닫혀있다. 기념관 뒤편에는 새로 체육관이 지어졌다. 거금대교 개통 이튿날인 오는 17일에 이곳에서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린다. 국내 레슬러는 물론이고 일본, 미국 등지의 프로레슬러들이 총출동한다. 개관식에는 생전의 김일과 숙적이었던 일본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끼도 참석할 예정이란다. # 거금도… 달리는 곳마다 펼쳐지는 절경 지금 거금도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초록빛 일색이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의 밭마다 심어진 양파와 마늘이 진초록으로 빛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거꾸로 초록의 색은 더 짙어질 터다. 초록의 구릉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해수욕장이 나타나기도 하고, 포구마을이 나타나기도 한다. 섬 안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보이는 곳이 바로 섬 일주도로의 딱 절반쯤에 위치한 오천항 일대다. 이쪽의 바다에는 제법 번성한 어촌마을의 포구와 그 앞에 떠있는 섬들이 서로 어우러져 남쪽바다의 그윽한 정취를 빚어낸다. 대취도, 소취도, 모녀도, 독도, 준도…. 그만그만한 섬들은 난대림으로 온통 짙푸르다. 오천항 못미처 길 옆으로 하얀파도 펜션의 팻말을 보고 해안으로 내려가면 수박보다 훨씬 큰 갯돌들이 뒹구는 작은 해안이 있다. 여기는 해질녘 만조에 맞춰 찾아가는 것이 좋다. 인적없는 해안가에 앉아서 윤기가 흐르는 둥글고 굵은 갯돌들 사이로 파도가 만든 포말이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모난 돌이 파도를 만나 둥글어지는 시간까지 생각이 가닿게 된다. 대개 둥근 갯돌들을 ‘몽돌’이라고 부르는데, 거금도 사람들은 이 돌들을 ‘공룡알’이라고 불렀다. 돌의 크기로 보면 몽돌이라기보다는 공룡알로 부르는 것이 더 맞다 싶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출의 바다풍경은 오천항을 지나치자마자 도로 옆의 언덕에 조성된 소원동산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 팔각정자와 전망대가 서있는 소원동산에서는 섬과 섬 사이로 수평선에서 뜨는 일출을 만날 수 있다. 해안일주도로를 다 돌았다면 이제 섬 속의 섬이라는 연홍도로 건너가거나 섬 한복판에 고래등처럼 솟은 적대봉을 오를 차례다. 연홍도는 거금도에서 배로 5분 거리에 떠있는 작은 섬. 그 섬에 뜻밖에 미술관이 있다. 올해로 개관 6년째인 연홍미술관이다. 자그마한 폐교를 리모델링한 미술관은 문을 열면 바다가 눈 앞으로 밀려드는 낭만적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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