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강원 인제 자작나무숲

醉月 2011. 12. 1. 21:07

인제군 남면 원대리의 산중에 만난 자작나무 숲. 순백의 빛나는 둥치를 가진 자작나무들이 저희끼리 모여 빼곡한 숲을 이루고 있다. 차가운 대기 속에서 낙엽이 두툼하게 깔린 자작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북유럽 동화의 나라 속에 산다는 ‘숲의 정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온통 순백의 세상이었습니다. 강원 인제의 거친 비포장 임간(林間)도로를 따라 들어가서 만난 자작나무 숲. 마주치자마자 탄성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온통 자작나무들이 저희들끼리 모여서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서 있었습니다. 차가워진 대기 속에서 흰 입김을 뿜으며 그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잎을 다 떨구고 잘 발라낸 생선의 흰 뼈들처럼 서 있는 자작나무의 흰 빛이 어찌 저리 맑을까요. 차고 맑은 박하 향내가 그득 고여 있는 숲길에서 그 빛깔과 향기 속에 몸과 마음을 빨래처럼 담가 흔들어 씻었습니다. 강원 인제. 겨울이 하루하루 깊어지고 있는 그곳으로 초겨울 여정을 제안합니다. 인제에는 겨울 여행에 딱 알맞은 박하 향내 같은 여행지들이 있답니다. 그 첫번째 목적지는 당연히 남면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입니다. 그리고‘찰 한(寒)’에 ‘시내 계(溪)’자를 쓰는 인제군 북면 한계리의 오래 묵어 스러진 절터인 한계사지가 두번째로 들러볼 곳입니다. 아직 얼지 않은 깊은 계곡의 물소리를 두른 채 14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탑 앞에서 이제 막 당도한 겨울의 시간을 봅니다. 한계령의 남쪽 자락에 소설 속의 공간이었다가 아예 지명이 돼버린 은비령을 넘어 당도하는 필례약수에서 얼음장 같은 탄산 약수 한잔은 어떻겠습니까.

은비령을 넘어가서 만나는 필례약수. 쇠 맛이 풍기는 탄산약수다.


# 순백의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로 난 길을 만나다

나무 중에서 가장 회화(繪畵)적인 나무는 아무래도 자작나무가 아닐까. 소나무가 수묵화 같은 그윽한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면, 자작나무는 서양화나 날카로운 펜화를 떠올리게 한다. 잎을 다 떨군 채 겨울 산자락에 시리게 서 있는 자작나무가 환기하는 정서는 다른 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겨울 자작나무 앞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이국의 정서’다. 눈부신 하얀 알몸을 드러내는 자작나무에서 대번에 떠올리게 되는 것은 북유럽 설원의 정취나 동화 속 겨울나라의 풍경 같은 것들이다.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북위 45도 위쪽에서 잘 자란다. 백두산이 북위 42도쯤이니 우리 땅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강원 일원의 태백산 일대에는 자작나무들이 제법 있다. 춥고 습한 땅에 사람의 손으로 심어지고 길러진 것들이다. 우리 땅에서 자작나무숲이 대부분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것도,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급경사의 비탈면에 조성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들어서 거닐 수 있는 자작나무 숲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 그동안 자작나무 숲이란 ‘먼발치서 굽어보아야 하는 숲’으로 알았다. 적어도 인제군 남면 원대리의 임도변에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펼쳐진 자작나무 숲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은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서 있는 자작나무 사이로 걸을 수 있는 우리 땅에서 거의 유일한 숲이다. 그곳에서는 얇은 종잇장을 여러 겹으로 붙여 놓은 것 같은 매끈한 수피를 매만지면서, 곧게 치솟은 가지를 올려다볼 수 있다.

숲 안에 들어서 느끼는 자작나무 숲은 멀리서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마치 순백의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선 기분이랄까. 청량하고 차가운 대기 속에서 나무 향을 맡으면서 자작나무 숲을 걷는 느낌은 다른 숲의 느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마치 현실이 아닌 공간으로 들어선 것처럼 느껴진다. 흰색의 색감이 이리도 강렬할 수 있다니….

# 적막 속에 잠겨 있는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다. 홍천에서 인제로 향하는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 3·8휴게소를 지나 남전리 방향으로 우회전해 들어가 원대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임도로 찾아들어가야 한다. 임도의 초입부터 능선의 자작나무들이 마중을 나오지만, 진짜 자작나무 숲은 여기서 비포장 임도를 따라 3.2㎞ 남짓을 더 들어가야 한다.

임도를 따라서 겨울에서 성성한 초록빛을 발하는 잣나무 숲을 지나다 보면 군데군데 자작나무가 눈에 띄고, 자작나무 군락지도 만나게 되지만 이 정도는 그냥 예고편에 불과할 뿐이다. 임도는 좀 거칠지만 조심조심 운전만 한다면 승용차로도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승용차로 가는 것보다는 임도 입구에 차를 대놓고 자작나무 숲까지 걸어서 왕복하거나 아예 임도를 돌아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를 택해 걷는 편이 낫겠다.

임도를 50분쯤 걷다 보면 왼쪽의 부드러운 비탈면 아래로 자작나무 숲이 갑자기 나타난다. 자작나무들이 어찌나 촘촘히 심어졌는지 순백으로 빛나는 둥치들로 어두운 숲이 온통 환해진다. 숲은 잘 정비돼 있다. 켜 낸 자작나무로 산책로를 만들어 두었고, 숲 한가운데 자작나무로 자그마한 오두막과 소박한 그네까지 매달아 두었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자작나무 둥치들이 겹쳐져서 마치 사방이 흰 벽이 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은 산림청 인제유림관리소에서 1993년 조성한 것. 18년이란 시간이 이렇듯 환상적인 숲을 만들어낸 것이다. 숲에는 숲속 유치원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자작나무에 초록 잎이 무성할 즈음에 인근의 유치원이며 초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반나절쯤을 보내고 가는 곳이다. 그러나 겨울의 숲에는 인적이 없다. 이따금 반대편 능선에 바람소리가 출렁거리지만, 이쪽의 숲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하다. 그 고요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두툼한 낙엽을 딛고 산토끼 한 마리가 숲 사이로 날쌔게 내달렸다. 그 숲에서는 시간을 잊게 된다. 자작나무들이 이룬 수직의 세상에서 누군들 바삐 걸을 수 있을까.

인제쪽 한계령 초입의 한계사지. 1400년의 시간이 잠긴 곳이다.


# 깊은 산중의 마을에 남아 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분교

자작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임도 길을 내친 김에 1.5㎞쯤 더 들어가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나온다. 한때 50여 가구가 넘는 주민들이 살았다는 회동마을이 있던 터다. 집은 다 허물어지고, 묵은 밭에는 억새만 가득 피어나 출렁거리고 있는 곳. 임도가 없던 시절, 도로에서 산길로 족히 두어 시간은 걸어들어 와야 하는 이리 깊은 산중에 어찌 마을이 있었을까. 그곳에는 ‘아이오라’라는 이름의 펜션 한 채와 옛 모습을 간직한 교실 한 칸짜리 분교가 남아 있다.

이곳에 마을이 들어선 연유가 이랬다. 6·25전쟁 무렵 산 아래쪽 3·8선이 마을 한복판을 지나가는 원대리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총부리를 겨누며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가 계속되자 주민들은 마을을 버리고 산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 그렇게 생겨난 마을이 여기 회동마을이었다. 초등학교 분교까지 세워졌으니 제법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1963년 개교한 분교는 1993년 폐교됐다. 30년 동안 이 학교를 거쳐간 졸업생은 고작 36명. 거의 1년에 1명꼴로 졸업한 셈이다. 이처럼 작은 학교가 참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회동마을 터의 분지는 임도 삼거리다. 직진하면 원대로 쪽으로 이어지고, 우회전하면 동아실 마을이다. 여기서 동아실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가는 운치 있는 임도가 8.9㎞ 정도 이어진다. 그 길 끝은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되돌아 나온다. 이렇게 원점으로 회귀하는 임도를 다 걷자면 네댓 시간쯤이 걸린다. 자작나무 숲길에서의 산책시간까지 더한다면 족히 반나절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그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것은 겨울철에 더 희게 빛나는 자작나무와 초록의 잣나무 숲이 뿜어내는 신선한 기운 때문이다. 겨울의 한복판을 걷는 숲길이 이처럼 운치 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 않다.

# 옛 절집의 오래된 탑 앞에서 설악을 등지고 서다.

인제에는 자작나무 숲 말고도 알싸한 겨울의 박하향을 느낄 수 있는 겨울여행지가 곳곳에 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인제에서 한계령을 넘어가는 북면 한계리에 있는 한계사지다. ‘사지(寺址)’라 함은 절이 있던 자리를 의미하는 말이니 한계사지란 한계사란 절이 있던 터다. 한계사는 1400여년 전 신라 무렵에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나 도합 다섯번에 걸친 큰 화재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다니다 지금의 백담사터에 자리를 잡았단다. 그러니 한계사란 백담사의 옛 자취인 셈이다.

한계사지는 국립공원 설악산사무소 장수대분소 부근에 있다. 도로 옆 장수대 분소에서 5분만 걸어오르면 폐허가 된 별장이 하나 있고, 그 뒤쪽에 한계사지가 있다. 설악산 서북주릉의 끝자락인 대승령(1210m)을 등 뒤에 두고 앞으로는 구름이 덮인 삼형제봉(1225m)과 주걱봉(1401m), 가리봉(1422m)을 바라보는 자리다. 한계사지에는 이렇다할 이야기는 전해오지 않지만, 너른 절터 여기저기 흩어진 주춧돌,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두 기의 삼층석탑이 그려내는 풍경만으로도 지나온 시간이 애잔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너른 절터에 남은 남삼층석탑은 수수하고 담백하기 이를 데 없다. 살짝 추켜올린 탑의 옥개석에는 풍경을 매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를 거느렸을 석탑은, 일순간에 스러져 버렸지만 한때는 대찰임이 틀림없었을 한계사의 마당을 지키던 것이었다. 절터 뒤편의 산자락의 소나무 숲에도 북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이것 또한 정갈하기 그지없다. 두 기의 석탑의 소박한 모습은 번성했던 당시에 절집을 지키고 서 있을 때보다 오히려 절집이 다 사라져버린 빈터의 적막감에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한계령의 협곡에는 초겨울 추위가 매섭지만, 양지 바른 절터에는 아직 초록의 풀들이 푸릇푸릇하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주춧돌에는 갖가지 문양들이 제법 선명하다. 나무들이 무성했던 잎을 다 떨구고 빈 몸으로 되돌아간 겨울이라서 그럴까. 1400여년 전의 석공들이 손길이 남아있는 석물에서 느끼는 애잔함이 더 짙다. 한계사지는 한계령을 넘는 국도변에 가까이 있지만, 아쉽게도 무시로 드나들 수는 없다. 개별적인 방문은 불가능하고 미리 국립공원 설악산사무소에 방문 시기와 목적을 제시하고 출입 신청을 해야 한다. 보물로 지정된 석탑 두 기의 도난이나 훼손우려 때문이라는데, 그렇더라도 아예 접근을 막는 것보다 시간을 정해두고 공개하거나 안내인을 상주시키는 방안도 있을 터인데, 정작 국립공원 측은 아무런 관심도, 배려도 없다.

# 소설 속의 공간을 따라가다 맛보는 알싸한 약수 한 모금

겨울에 인제를 찾아갔다면 알싸한 쇠 맛이 감도는 약수를 빼놓을 수 없겠다. 깊은 겨울산에서 솟는, 이가 시릴 정도의 차가운 약수를 들이켜면 입안에서 ‘싸아’ 하고 터지는 탄산으로 폐부까지 시원해진다. 인제에는 주위에 늙은 소나무와 엄나무들이 가득한 방동약수도 있고, 우리 땅의 약수 중 가장 높은 곳에서 솟는다는 개인약수도 있지만, 겨울 인제로 향하는 여정에서 필례약수를 추천하는 것은 그곳으로 드는 길에 깃든 이야기와 호젓한 정취 때문이다.

필례약수에 가려면 ‘은비령’을 넘어야 한다. 한계령 정상을 넘자마자 오른편 인제 귀둔리로 빠져 넘어가는 고갯길을 일컬어 은비령이라 부른다. 그러나 은비령이란 이름은 지도에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은비령이란 소설가 이순원이 1996년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소설에는 은비령이란 이름의 고개가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소설 속 지명을 조합해 보면 바로 이쪽 고갯길이 바로 은비령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들이 머물던 집을 ‘은자당’이라 불렀다. 겨울에 눈이 은비가 되어 날린다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펜션과 산장이 들어서 있는 필례약수 부근이다.

필례약수는 1930년에 발견됐다는데 한때 이곳에 화전을 일구고 살았던 주민들은 약수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다 해서 영천(靈泉)이라고도 불렀다. 탄산과 철분이 함유된 약수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다. 빨간 바가지로 떠서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식도를 넘어가는 물이 ‘싸아’하고 느껴진다. 필례약수 부근의 한 음식점은 아예 ‘은비령’이란 간판을 매달고 있다. 한계령 자락을 넘어가는 고개를 ‘피래고개’라고 부르던 주민들도 이제 ‘은비령’이라고 말하면 대번에 알아듣는다. 한 편의 소설이 지도에도 없는 지명과 그 지명에 깃든 낭만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 셈이다.


가는길


원대리 자작나무 숲 가는 길 = 수도권에서 가자면 경춘고속도로를 거쳐 동홍천나들목으로 나가 44번 국도 인제 방면을 향한다. 38선 휴게소를 지나 남전교를 건너기 직전, 남전리·원대리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인제종합장묘센터 앞을 지나서 원대리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가자마자 왼편으로 장승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서 우회전해 비포장 임도 쪽으로 들어선다. ‘산상의 들국화향기 펜션 아이오라’라고 적힌 팻말을 보고 들어가면 곧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원정도로란 표지판을 따라 3.2㎞쯤 가면 왼편으로 자작나무 숲 산책로가 나온다.

한계사지는 44번 국도로 한계령 쪽으로 방향을 잡으며 달리다 보면 만나는 국립공원 설악산사무소 장수대분소 사무소 인근에 있다. 필례약수는 한계령을 넘어 내리막길로 내려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나오는 귀둔리 방면 길을 따라가면 닿는다.


묵을곳 & 먹을것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자작나무 임도를 지나서 억새밭에 아이올라란 이름의 펜션이 있지만, 겨울에는 숙박객을 받지 않는다. 인제읍의 군청 앞에 새로 들어선 인제호텔(033-461-4035)과 콘도스타일의 하늘내린호텔(033-463-5700)이 있다. 숙박비는 5만∼6만원. 필례약수에서 내린천 쪽으로 나오다 만나는 하추리계곡에는 펜션들이 곳곳에 있고 하추리휴양림(033-461-0056)도 있다.

펜션은 겨울철에는 방이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따로 예약하지 않아도 숙박할 수 있다. 관광안내센터(033-463-4870)에서 민박집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인제의 겨울철 먹거리라면 단연 황태다. 미시령터널 쪽을 향하는 용대리 인근에는 황태촌식당(033-462-3109)과 복바위식당(033-033-462-1571) 등 황태를 내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자작나무 숲이 있는 원대리에서는 원대막국수(033-462-1515)가 가장 유명한 맛집이다.

# 응봉산 자락에도 자작나무숲…수령은 6살 더 많아

인제에는 원대리 말고도 자작나무 숲이 또 있다. 신남에서 양구 방면으로 향하다 샛길로 접어들어서 만나는 소양호 부근의 남면 수산리 응봉산 자락의 자작나무 숲이다. 이곳의 산자락에는 서울 여의도의 2배만 한 넓이의 자작나무 숲이 있다. 이곳에 자라는 자작나무만 90여만 그루에 이른다. 여기는 제지원료를 공급하는 회사에서 대규모 조림을 한 곳이다. 이곳의 자작나무의 수령은 원대리의 것보다 6년이 더 많다.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이 그 안의 숲길에 들어서 바라보는 곳이라면, 이곳 수산리의 자작나무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비탈진 능선에 군락을 이룬 자작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펜화 같은 풍경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2년 전 이곳의 자작나무 숲을 처음 찾아냈을 때는 산촌마을은 드나드는 이 하나 없이 고요했지만, 이즈음에는 산 아래 캠핑장이 들어서고, 자작나무 숲을 굽어볼 수 있는 응봉산 임도에는 나무로 지은 전망덱까지 놓였다. 산의 8부 능선쯤으로 올라 산허리를 끼고 돌아가는 임도에서는 자작나무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눈 내린 직후에 최고의 경관을 보여준다.



원대리 주민 심흥규씨가 들려주는 ‘화전민의 삶’

자작나무 숲이 있는 망대봉 자락은 옛 화전민의 땅이었다. 6·25전쟁의 복판에서 화전민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떡을 해먹고 풀뿌리로 죽을 끓여 연명하는 고된 삶을 이어왔다. 산자락 아래 인제군 남면 원대리 마을에서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심흥규(76·사진)씨를 만났다. 소일 삼아 나무뿌리를 조각하던 심씨는 ‘옛 화전민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말에 손부터 내저었다. 어찌나 고된 세월이었던지 그는 “다시 이야기하는 것조차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음력 6월 그뭄 무렵에 풀나무를 다 베어서 잘 말린 뒤 불을 질렀어. 불탄 곳의 재를 긁어낸 뒤 중복쯤에 메밀을 심어 베어 먹은 뒤에는 차조와 메조를 심고, 이듬해에는 콩과 팥을 심었고 마지막 해에는 호밀을 심었지. 그러고 나면 지력이 다해 무엇을 심어도 자라지 않아서 다른 화전을 일구러 떠나야 했어.”

이렇게 거둔 메밀로 국수도 만들어 먹고, 부침도 해먹었지만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물에 우려 가루로 만든 뒤 송기떡을 해먹기도 했고, 칡뿌리를 두드려 녹말을 뽑아내서 먹기도 했고, 쇠쟁이와 물구지나물을 삶은 뒤 도토리를 넣어 끓여 먹기도 했다. 그나마 이런 것이라도 입에 넣으며 생명을 부지하려면 부지런해야 했다. 이렇게 힘겹게 살던 와중에 6·25전쟁까지 터졌다. 38선이 마을 한복판을 지나가니 마을을 한가운데 두고 국군과 인민군이 대치했다. 마을 뒤편 망대봉은 국군이, 마을 앞쪽 천지봉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어 하루에도 몇번씩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를 떠올리던 심씨는 ‘한마디로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게 기적 같았다”고 했다.

심씨는 소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소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고, 해방 직후 인민학교를 1년쯤 다니다가 매주 월요일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하는 ‘자아비판’이 싫어 그마저도 작파하고 말았다. 배운 게 없으니 땅을 파먹는 농사일밖에 없었는데, 줄줄이 낳은 8남매를 손바닥만한 농토 하나 없이 키우자니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심씨는 자신이 전전한 직업을 마치 노래하듯 읊었다. 석공, 토공, 목공, 토역, 이발, 운전, 수의, 신파, 침술…. 어찌나 다양한 일을 했던지 해본 일보다 안 해 본 일을 찾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평생 돈이 아까워서 술을 입에 대본 적이 없고, 담배도 피워본 적이 없단다.

그렇게 고난의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그는 8남매를 번듯하게 키워냈다. 자식들을 위한 뒷바라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날도 마당에 자식들에게 부칠 콩이며 팥을 담은 자루들을 죽 늘어놓고는 숫자를 헤아렸다. 하루 전에는 아내와 함께 이틀에 걸쳐 무려 500포기의 김장을 했단다. 이렇게 거둔 농산물이며 김치를 자식들에게 바리바리 싸서 다 보내고 나면 그 보람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서는 그에게 “이제는 자식 곁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동안 살아온 지옥 같은 세월을 다 자식들이 있어 그 힘으로 견뎌냈으니 자식에게 받은 것은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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